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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리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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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갈리아 전쟁은 기원전 58년부터 기원전 50년까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끈 로마 공화국의 갈리아 정복 전쟁이다. 당시 갈리아는 게르만족의 침략과 부족 간의 분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고, 카이사르는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군사적, 정치적 야망을 실현하고자 했다.

카이사르는 8년에 걸쳐 헬베티족, 벨가이족 등 다양한 갈리아 부족들과 전투를 벌였으며, 라인 강을 건너 게르만족을 공격하기도 했다. 주요 전투로는 비브락테 전투, 사비스 전투, 모르비앙 해전, 알레시아 공방전 등이 있다. 카이사르는 뛰어난 군사적 역량과 전술을 통해 승리를 거듭하며 갈리아 전역을 로마의 지배하에 두었다.

갈리아 전쟁의 결과, 카이사르는 막대한 부와 명성을 얻었고, 로마 내에서 강력한 권력을 갖게 되었다. 이 전쟁은 로마 공화정의 멸망과 로마 제국의 성립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갈리아 지역에는 로마 문화가 전파되는 등 문화적, 역사적으로 심오한 영향을 남겼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기록은 그의 정치적 의도가 반영되어 있어, 객관적인 사료로 보기 어렵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2. 역사적 배경

당시 갈리아는 수에비족 출신 게르마니아인 아리오비스트가 마게토브리가 전투(기원전 63년경)에서 갈리아인을 패배시키고 라인 강(레누스 강) 부근 갈리아 일대에 세력권을 형성하여 갈리아인들을 몰아내고 지배 영역을 확장해 나가고 있었다.[9]

기원전 60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제1차 삼두정치를 결성하고 기원전 59년 집정관(콘술) 임기를 마친 카이사르는 이듬해 기원전 58년부터 프로콘술(전 집정관)로서 일리리아, 갈리아 키살피나(알프스 이남의 갈리아), 갈리아 트란살피나(알프스 이북의 갈리아)의 속주 총독이 되었다.

갈리아 키살피나는 이미 '''속주 갈리아'''로서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지만, 갈리아 트란살피나에는 아직 로마의 세력이 미치지 못했고, 카이사르는 원로원으로부터 5년간의 임페리움(군사 지휘권)을 위임받았다.

2. 1. 사회정치적 배경

당시 갈리아는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있었고, 일부는 로마와 안정적인 정치적 동맹을 맺기도 했다. 특히 아에두이 부족은 로마와 동맹 관계였다. 기원전 63년경, 로마의 속주였던 갈리아 아르베르니가 라인 강 동쪽의 갈리아 세쿠아니와 게르만 수에비와 공모하여 로마의 강력한 동맹국인 갈리아 아에두이를 공격하려 할때 로마는 이들의 공격을 막지 않았다. 세쿠아니와 아르베르니는 기원전 63년 마게토브리가 전투에서 아에두이를 패배시켰다.

로마인들은 갈리아를 야만족의 땅으로 여겼지만, 갈리아의 도시들은 지중해 도시들과 유사한 측면도 있었다. 갈리아인들은 주화를 주조하고 로마와 광범위하게 교역하며 철, 곡물, 그리고 많은 노예를 제공했다. 그 대가로 갈리아인들은 많은 부를 축적하고 로마 포도주를 즐겨 마셨다.

부유한 갈리아 전사의 전형적인 무장을 한 2018년 현대 재연자


갈리아인과 로마인은 서로 다른 군사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로마 군대는 고도로 훈련된 정규군이었고, 전쟁 사이에도 상비군을 유지했으며, 대부분 중보병으로 구성되었다. 반면 갈리아인들은 불규칙하고 훈련이 부족한 전투력을 가졌다. 그러나, 갈리아인들은 전사 문화를 가지고 용맹과 개인의 용기를 중시했으며, 로마인보다 긴 검을 사용하고 우수한 기병대를 보유했다.

기원전 58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갈리아 키살피나, 일리리쿰, 트란살피나 갈리아의 속주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5년 임기의 속주 총독으로 임명되어, 군사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3] 카이사르는 처음에는 네 개의 군단을 지휘했으며, 필요에 따라 추가 군단과 보조 부대를 모집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

당시 갈리아는 수에비족 출신 게르마니아인 아리오비스트가 기원전 63년 마게토브리가 전투에서 갈리아인을 패배시키고 라인 강(레누스 강) 부근 갈리아 일대에 세력권을 형성하여 갈리아인들을 몰아내고 지배 영역을 확장해 나가고 있었다.[9]

기원전 60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제1차 삼두정치를 결성하고 기원전 59년 집정관(콘술) 임기를 마친 카이사르는 이듬해 기원전 58년부터 프로콘술(전 집정관)로서 일리리아, 갈리아 키살피나(알프스 이남의 갈리아), 갈리아 트란살피나(알프스 이북의 갈리아)의 속주 총독이 되었다.

갈리아 키살피나는 이미 '''속주 갈리아'''로서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지만, 갈리아 트란살피나에는 아직 로마의 세력이 미치지 못했고, 카이사르는 5년간의 임페리움(군사 지휘권)을 원로원으로부터 위임받았다.

2. 2. 군사적 배경

로마 군대는 고도로 훈련된 정규군으로, 대부분 중보병으로 구성되었다. 보조 부대는 훈련이 덜 된 로마의 동맹국들에서 충원되었는데,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일부 갈리아인도 포함되었다.[2] 반면 갈리아인들은 불규칙하고 훈련이 부족한 전투력을 가졌다. 개별 갈리아인들은 로마인들처럼 스스로 무기를 장비했는데, 이러한 관행은 초기 제국 시대까지도 이어졌다.[2] 부유한 병사들은 더 나은 장비를 갖추었다.

사슬 갑옷을 입고 긴 지팡이를 든 사람
갈리아 전쟁 시대 제7군단 기수가 착용했을 장비를 착용한 2012년 현대 재연자


로마인들과 달리 갈리아인들은 전사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용감한 행위와 개인적인 용기를 중시했고, 이웃 부족을 자주 약탈하여 전투 기술을 유지했다. 로마인들에 비해 갈리아인들은 더 긴 검을 사용했고 훨씬 우수한 기병대를 보유했다. 갈리아인들은 일반적으로 로마인들보다 키가 컸으며, 이것은 그들의 더 긴 검과 결합되어 전투에서 사정거리의 이점을 제공했다. 양측 모두 궁수와 투석기병을 사용했다. 갈리아 전투 전략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으며, 갈리아 투석기병과 궁수의 효과는 알 수 없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전투 전략은 부족마다 다양했지만, 용기를 증명하기 위해 결전에 참여하는 경우가 잦았다. 모든 부족이 로마와 직접 맞서 싸운 것은 아니었는데, 로마는 강력한 적이었기 때문이다. 갈리아인들은 종종 소모전을 사용했다.

갈리아인들은 전투에서 훨씬 더 화려한 모습을 보였지만(예를 들어 정교하게 장식된 갑옷을 입고 싸우거나 알몸으로 싸우는 등), 로마인들의 우월한 훈련과 대형은 일반적으로 근접 전투에서 이점을 제공했다.

로마인들은 갈리아 부족들을 존중하면서 동시에 두려워했다. 기원전 390년, 갈리아인들은 로마를 약탈했는데, 이는 로마인들이 결코 잊지 못한 야만인 정복에 대한 존재적 공포를 남겼다.

2. 3. 율리우스 카이사르

기원전 60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제1차 삼두정치를 결성하고 기원전 59년 집정관(콘술) 임기를 마친 카이사르는 이듬해 기원전 58년부터 프로콘술(전 집정관)로서 일리리아, 갈리아 키살피나(알프스 이남의 갈리아), 갈리아 트란살피나(알프스 이북의 갈리아)의 속주 총독이 되었다.[9]

갈리아 키살피나는 이미 '''속주 갈리아'''로서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지만, 갈리아 트란살피나에는 아직 로마의 세력이 미치지 못했고, 카이사르는 5년간의 임페리움(군사 지휘권)을 원로원으로부터 위임받았다.

3. 전쟁 상황

카이사르는 기원전 58년부터 기원전 51년까지 갈리아의 여러 부족을 차례로 정복하고, 브리타니아 원정까지 감행했다.


  • 기원전 58년: 헬베티족을 아랄 강 전투와 비브락테 전투에서 격파하고 원래 거주지로 돌려보냈다. 하이두이족 등의 요청으로 보세구스 전투에서 아리오비스투스가 이끄는 게르만족을 레누스 강 너머로 몰아냈다.
  • 기원전 57년: 벨가이 부족 연합을 악소나 강 전투와 사비스 강 전투에서 격파하고 갈리아 북동부를 평정했다.[10][11] 푸블리우스 크라수스는 대서양 연안의 부족들을 로마에 항복시켰다.[10]
  • 기원전 56년: 베네티족 반란을 모르비앙 만 해전에서 진압했다.[12] 퀸투스 티투리우스 사비누스는 노르망디에서, 푸블리우스 크라수스는 아키텐에서 반란을 진압했다.[12]
  • 기원전 55년: 라인강을 넘어 게르만족을 공격하고, 제1차 브리타니아 원정을 감행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갈리아로 돌아왔다.[13]
  • 기원전 54년: 제2차 브리타니아 원정에서 카시벨라우누스와 강화를 맺고 갈리아로 돌아왔다. 암비오릭스가 이끄는 에부로네스족의 반란으로 9,000명의 로마군이 몰살당했으나, 카이사르는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를 구원하고 반란 부족을 격파했다.
  • 기원전 53년: 라인강을 다시 넘어 게르만족을 견제하고, 암비오릭스를 추격했으나 잡지 못하고 돌아왔다.[1]
  • 기원전 52년: 베르킨게토릭스가 갈리아 부족을 규합하여 로마에 대항했으나, 알레시아 공방전에서 카이사르에게 패배하고 항복했다.[1]
  • 기원전 51년: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역을 평정하고 로마의 속주로 편입시켰다.

3. 1. 전쟁 1년째: 기원전 58년

기원전 58년 카이사르가 갈리아 키살피나, 프로빈키아, 일리리아의 3개 로마 속주의 총독으로 임지에 도착했다. 게르만족에게 밀려난 헬베티족스위스 레만호 동쪽 연안에서 아르모리카 지방으로 민족의 대이동을 시작했다. 그들은 하이두이족에게 길을 내달라고 하고 카이사르에게 통과를 요청했으나 카이사르는 허가하지 않았다. 카이사르는 헬베티족의 12만 명 정도가 라인강을 건너오자 하이두이족과 공동으로 전쟁을 개시했다. 손강 유역에서 헬베티족을 기습하고, 달아나는 헬베티족을 쫓아 비브락테 전투에서 승리하고 강화를 맺었다.

헬베티족과 전투 이후 갈리아인들은 게르만 부족 중 하나인 수에비족을 물리쳐 달라고 카이사르에게 부탁했다. 카이사르는 수에비족의 수장 아리오비스투스와 협상을 시작했으나 브장송에서 협상을 결렬되고 수에비족과 전투를 벌여 승리했다. 카이사르는 브장송에 겨울 숙영지를 짓고 라인강을 로마의 방위선으로 결정했다.

 갈리아 전쟁 지도
갈리아 전쟁의 다년간에 걸친 개요. 카이사르 군대가 이동한 일반적인 경로는 화살표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헬베티이는 스위스 고원에 거주했던 약 5개의 관련 갈리아 부족들의 연합체였으며, 산맥과 라인강, 론강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들은 북쪽과 동쪽의 게르만 부족들로부터 점점 더 큰 압력을 받았고, 기원전 61년경 이주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들은 알프스 산맥을 돌아 현대 프랑스의 생통주 지역으로 갈리아를 가로질러 이동할 계획이었는데, 이는 로마의 동맹국인 하이두이족의 땅을 지나 로마의 트란살피나 갈리아 속주로 이어지는 경로였다. 이주 소식이 퍼지자 이웃 부족들은 우려하게 되었고, 로마는 여러 부족에 사절을 보내 헬베티이에 합류하지 않도록 설득했다. 로마는 헬베티이가 비운 땅을 게르만 부족들이 채울까 우려했다. 로마인들은 게르만 부족들보다는 갈리아 부족들을 이웃으로 훨씬 더 선호했다.

기원전 58년 3월 28일, 헬베티이는 모든 백성과 가축을 데리고 이주를 시작했다. 그들은 이주가 되돌릴 수 없도록 마을과 저장품을 불태웠다. 카이사르가 총독으로 있던 트란살피나 갈리아에 도착하자 그들은 로마의 땅을 통과할 허락을 요청했다. 카이사르는 그 요청을 고려했지만 궁극적으로 거절했다. 갈리아인들은 로마의 땅을 완전히 피해 북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카이사르가 갈리아의 로마 진입 요청을 고려한 것은 결정을 못 내린 것이 아니라 시간을 벌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는 이주 소식이 도착했을 때 로마에 있었고, 트란살피나 갈리아로 서둘러 가는 도중 두 개의 군단과 일부 보조병을 모았다. 그는 갈리아인들에게 거절 의사를 전달한 후, 이전 여행에서 모았던 군단과 세 개의 베테랑 군단을 모으기 위해 곧바로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카이사르는 이제 2만 4천 명에서 3만 명 사이의 군단 병력과 다수의 보조병을 거느렸는데, 그중 많은 수가 갈리아인들이었다. 그는 북쪽으로 소느강으로 진군하여 헬베티이가 강을 건너는 중간에 그들을 포착했다. 약 4분의 3이 강을 건넜고, 그는 강을 건너지 못한 자들을 학살했다. 그런 다음 카이사르는 뗏목 다리를 이용하여 하루 만에 강을 건넜다. 그는 헬베티이를 추격했지만 이상적인 조건을 기다리며 전투를 벌이지 않기로 했다. 갈리아인들은 협상을 시도했지만 카이사르의 조건은 가혹했다. 6월 20일 카이사르의 보급품이 부족해지면서 그는 비브락테의 동맹 세력 영토로 향해야 했다. 그의 군대는 소느강을 쉽게 건넜지만 보급 부대는 아직 건너지 못했다. 이제 헬베티이는 로마군보다 기동력이 뛰어났고 보이족과 툴링기족 동맹군을 모을 시간이 있었다. 그들은 이 기회를 이용해 카이사르의 후위를 공격했다.

이어진 비브락테 전투에서 갈리아인과 로마인은 하루 대부분을 싸웠다. 치열한 전투 끝에 로마군이 결국 승리를 거두었다. 카이사르는 그의 군단을 언덕 비탈에 배치하여 갈리아군이 오르막길에서 싸우도록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했다. 헬베티이족은 아마도 위장 공격으로 전투를 시작했지만 로마군은 쉽게 격퇴했다. 그러나 보이족과 툴링기족은 로마군의 우익을 기습 공격했다. 이때 로마군은 포위되었다.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군단 후방의 병사들은 뒤를 돌아서 싸우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들은 후방 공격만 받는 대신 두 방면에서 싸웠다. 결국 헬베티이족은 패주했고, 로마군은 수적으로 열세에 놓인 보이족과 툴링기족을 그들의 진영까지 추격하여 전사들뿐만 아니라 여성과 어린아이들까지 죽였다.

카이사르의 군대는 부상자들을 돌보기 위해 사흘 동안 휴식을 취했다. 그런 다음 항복한 헬베티이족을 추격했다. 카이사르는 그들을 그들의 땅으로 돌려보내 로마와 더욱 두려운 게르만 부족 사이에 완충지대를 만들도록 명령했다. 포로로 잡힌 헬베티이족 진영에서 카이사르는 그리스어로 쓰여진 인구 조사 기록이 발견되어 연구되었다고 주장한다. 368,000명의 헬베티이족 중 92,000명이 성인 남성이었는데, 고작 110,000명만이 살아남아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카이사르는 아랄 강 전투와 비브락테 전투에서 헬베티이족을 패퇴시키고 원래 거주지로 몰아넣었다. 헬베티이족을 토벌한 후, 카이사르는 하이두이족 등 갈리아인들의 요청에 따라 보세구스 전투에서 아리오비스트가 이끄는 게르마니아인들을 격파하고 레누스 강 너머로 몰아냈다.

3. 2. 전쟁 2년째: 기원전 57년

카이사르는 다시 한번 갈리아인들 사이의 내부 부족 간 분쟁에 개입했다. 로마군은 갈리아 북동부 경계까지 진출하여 레미족과 동맹을 맺고 벨가이의 여러 부족과 전투를 벌였다.[10] 벨기에 지역에 살던 벨가이족은 약 30만 명으로, 수에시오네스족의 족장 갈바를 중심으로 로마군에 맞섰다. 카이사르는 센강을 건너 벨가이인들과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다. 카이사르는 수에시오네스족을 물리치고 벨로바키족, 암비아니족과 차례로 강화를 맺은 다음, 지금의 벨기에 영토인 갈리아 북동부를 평정하였다. 그리고 푸블리우스 크라수스에게 대서양 연안의 부족들을 평정하게 하였다.[10]

넬르비이족, 아뜨레바테스족, 모리니족 등의 벨가이족들은 수에시오네스족의 족장 갈바를 중심으로 로마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벨가이족들은 레미족의 도시 비브락스[10]를 공격했다. 카이사르가 레미족을 지원하기 위해 비브락테 방면으로 진군하자 벨가이족들은 이를 맞아 싸웠으나, 악소나 강 전투에서 패배하고 갈바는 인질을 카이사르에게 바치고 항복했다. 그러나 보두오그나투스를 지도자로 하는 넬르비이족과 위로만두이족 등은 계속 저항하였으나, 격전 끝에 사비스 강 전투에서 패배하여 로마군에 항복했다.[11] 또한, 푸블리우스 크라수스에 의해 베네티족 등 대서양 연안 부족들이 로마에 항복했다.

3. 3. 전쟁 3년째: 기원전 56년

기원전 58년, 기원전 57년에 로마에 복속했던 베네티족은 대서양 연안에 세력을 가지고 해군력이 있었는데, 같은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군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율리우스 카이사르티투스 라비에누스를 벨가에인과 게르마니아인에게, 크라수스를 아키텐에 보내고, 자신은 베네티족 토벌을 위해 모르비앙에 도착했다. 해전 경험이 부족했던 카이사르 군이었지만, 데키무스 브루투스가 이끄는 로마 함대가 베네티족 등의 함대 220척을 모르비앙 만 해전에서 격파하여 반란을 진압했다.[12]

같은 시기에 윌리도윅스(Viridovix)가 이끄는 우넬리족(Unelli), 아우렐키족(Aulerci), 에브로위케스족(Ebrovices) 등도 반란을 일으켰고, 퀸투스 티투리우스 사비누스(Quintus Titurius Sabinus)가 이들을 맡았다. 푸블리우스 크라수스가 향한 아키타니아인 거주 지역에서도 소티아누스족 등이 로마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지만, 모든 소란은 진압되었다.[12] 한편 카이사르의 부하 장수들은 각지에서 카이사르를 대신해 전과를 올렸다. 라인강에서는 티투스 라비에누스가, 노르망디에서는 사비누스가, 아키텐에서는 청년 크라수스가 각각 승리하였다. 카이사르는 노르망디에서 겨울 숙영지를 설치했다.[12]

3. 4. 전쟁 4년째: 기원전 55년

기원전 55년 카이사르는 라인강으로 진격하여 우시페테스족과 텐크테리족을 쳐부수었다. 오늘날의 독일 쾰른 사이의 중간 지점에 다리를 놓아 처음으로 라인강을 넘어 수감브리족을 공격하고 우비족과 화평을 맺었다.[13]

이후 서부로 방향을 돌려 제1차 브리타니아 원정에 나섰다. 그때까지 브리타니아는 일부 지방을 제외하고는 로마에게 미지의 땅이었다. 카이사르는 도버해협을 건너 브리타니아로 갔는데, 해안가에서 브리타니아인들의 공격을 받았고 격전을 치렀지만 완전히 제압하지는 못하고 다시 갈리아로 돌아왔다.[13]

한편 카이사르는 아버지 크라수스를 따라 시리아로 원정을 떠나는 크라수스에게 기병 1,000기를 주어 보내고 아미앵에서 겨울을 보냈다.[13]

우시페테스족과 텐크테리족은 게르만 부족 중 약소 부족이었는데, 수에비족의 압력으로 라인 강을 건너 갈리아로 침입했다. 카이사르는 그들에게 라인 강 너머로 돌아갈 것을 경고했다. 양측이 협상을 위해 일시적으로 휴전하기로 약속했지만, 게르만족이 이를 어기고 로마 기병을 공격하자, 로마군은 게르만족을 공격하여 많은 수를 사살하고 포로로 잡았다.[13]

그 후 카이사르는 이 사건에 관련된 게르만족을 견제하기 위해 라인 강에 다리를 놓고 게르만 땅으로 건너가, 우시페테스족과 텐크테리족의 잔당을 숨겨준 수감브리족의 마을을 불태웠다. 그러나 깊은 숲 속에 진을 친 수에비족과의 전투는 피하고 갈리아 쪽으로 돌아왔다.[13]

베네티족의 반란 당시 브리타니아인들이 이에 가담했기에, 이를 견제하기 위해 카이사르는 갈리아 방어를 라비에누스에게 맡기고 브리타니아로 건너갔다. 폭풍으로 군선 일부가 파손되고 보급품 부족에 시달렸으며, 브리타니아 기병과 전차의 공격으로 고전했지만, 로마군은 우수한 병력으로 브리타니아인들을 크게 무찔렀다. 로마 군선의 수리가 끝나자 갈리아로 돌아왔다(브리타니아 원정).[13]

3. 5. 전쟁 5년째: 기원전 54년

기원전 54년 카이사르는 제2차 브리타니아 원정을 계획했다. 원정에 앞서 트리베리족을 복속시킨 후 브리타니아를 침공했다. 브리타니아인들은 게릴라 전술로 맞섰으나, 카이사르는 템즈강을 건너 브리타니아의 카시벨라우누스와 강화를 맺고 가을에 갈리아로 돌아왔다.

그해 갈리아의 밀 수확량은 예년보다 크게 떨어졌다. 카이사르는 군단을 여덟 개로 나누어 겨울을 나게 하고 각 부하 장군들에게 분산 배치했다. 그중 한 곳에서 에부로네스족의 족장 암비오릭스의 계략으로 15개 대대, 9,000명의 병사가 몰살당했다. 이 소식에 네르비족과 아투아투키족도 로마에 반기를 들었고, 6만 명의 벨가이족 군대가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겨울 숙영지를 포위 공격했다. 카이사르는 즉시 군단을 모아 키케로를 구원하고 반란 부족을 격파했다. 이후 카이사르는 아미앵에서 겨울을 보냈다.

3. 6. 전쟁 6년째: 기원전 53년

카이사르는 반란을 일으킨 네르비족을 제압한 후 파리에서 갈리아 부족장 회의를 주재하였다. 이때 참석하지 않은 부족을 반란 부족으로 간주하여 압박했고 결국 세노네스족카르누테스족의 복종을 받았다. 이로써 배후를 강화한 카이사르는 역시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던 트레베리족라비에누스에게 격파하게 하고 합류하였다.

카이사르는 다리를 만들어 두 번째로 라인강을 넘어갔으나 깊숙이 추격하지는 않았다. 게르만족과 전면전을 벌이지 않고 다시 돌아와 진지를 짓고 6000명을 라인강 서쪽에 주둔시켰다. 암비오릭스를 쫓아 북쪽으로 추격했으나 결국 붙잡지는 못하고 돌아와 랭스에서 부족장 회의를 다시 주재하고 반란군 주동자를 처형하였다.[1]

3. 7. 전쟁 7년째: 기원전 52년

기원전 52년 카르누테스족오를레앙의 로마인을 살해하고 로마에 반기를 들었고, 아르베르니족의 족장이 된 베르킨게토릭스가 갈리아 부족의 총궐기를 호소하여 갈리아 부족 대부분이 로마에 반기를 들었다. 카이사르프로빈키아에서 갈리아 중부로 달려가 모든 군단을 모아 반기에 맞섰다. 카이사르는 보르주에서 농성하는 갈리아군을 격파했지만 게르고비아에서는 성공하지 못하고 철수했다. 이 틈을 타서 갈리아 부족은 카이사르에게 전투를 걸었지만 카이사르는 이들을 격파하였고 베르킨게토릭스는 알레시아 요새에서 6만 명의 병력으로 농성하였다.[1]

카이사르는 알레시아에 포위망을 구축했지만 갈리아 부족 연합의 20만이 넘는 대군이 포위망을 다시 포위하여 안팎의 적을 상대해야 했다. 9월에 벌어진 알레시아 공방전에서 카이사르는 격전을 치르고 갈리아 부족 포위군을 격파하였다. 베르킨게토릭스는 무기를 버리고 카이사르에게 투항하였다. 카이사르는 군단을 다시 여덟 군데로 나누어 겨울을 나게 하고 자신은 하이두이족의 영토에서 숙영했다. 이로써 사실상 갈리아 전쟁은 막을 내렸다.[1]

3. 8. 전쟁 8년째: 기원전 51년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기》 7권을 간행했다. 전쟁 8년째에는 알레시아 공방전 이후 전후 처리를 하여 모든 부족을 로마에 복속시켰다.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로마화하고 속주세를 정액제로 바꾸었다.

4. 주요 전투 및 사건

전쟁 당시 갈리아 지도

  • 비브락테 전투(기원전 58년): 갈리아인과 로마인이 하루 종일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다. 로마군은 언덕 비탈에 배치되어 갈리아군이 불리한 위치에서 싸우게 했다. 헬베티이족은 위장 공격을 시도했으나 로마군에 격퇴되었다. 보이족과 툴링기족이 로마군 우익을 기습했지만, 로마군은 후방 병력의 전술적 대응으로 헬베티이족을 패주시켰다. 로마군은 보이족과 툴링기족을 추격하여 그들의 진영까지 이르러 많은 이들을 죽였다.[1]


카이사르는 부상병을 치료하기 위해 사흘간 휴식을 취한 후 항복한 헬베티이족을 추격했다. 그는 헬베티이족을 그들의 땅으로 돌려보내 로마와 게르만 부족 사이의 완충지대를 만들게 했다.[1] 포로로 잡힌 헬베티이족 진영에서 발견된 그리스어 인구 조사 기록에 따르면, 368,000명의 헬베티이족 중 92,000명이 성인 남성이었고, 110,000명만이 살아남아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실제 인구가 20,000~50,000명 정도였을 것이며, 카이사르가 선전 목적으로 과장했을 것으로 추정한다.[2][1]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현대 유럽 지도
기원전 58년 갈리아 전역(이탈리아어). 노란색으로 표시된 로마 영토에는 아직 프랑스, 저지대, 독일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카이사르의 원정은 빨간색 선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전투가 표시되어 있다. 켈트족 도시는 녹색, 게르만족 도시는 주황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 보주 전투(기원전 58년): 카이사르는 게르만족 수에비족 왕 아리오비스투스를 배신할 명분이 필요했다. 갈리아 부족들의 요청과 디비키아쿠스의 우려 표명을 기회로 삼아, 하루데스가 아이두이족을 공격하고 100개의 수에비족 부족이 라인 강을 건너려 한다는 보고를 명분으로 전쟁을 벌였다.[3][4]


아리오비스투스가 베손티오를 점령하려 하자 카이사르는 먼저 그곳에 도착했다. 아리오비스투스와의 회담은 결렬되었고, 이후 카이사르는 발레리우스 프로킬루스와 가이우스 메티우스를 보냈으나 아리오비스투스에게 모욕당하고 쇠사슬에 묶였다. 아리오비스투스는 카이사르의 보급로를 차단하려 했으나, 카이사르는 두 번째 진영을 건설하여 대응했다.[5][6]

다음날 카이사르는 동맹군을 집결시키고 군단을 진격시켰다. 카이사르와 그의 레가투스, 퀘스토르는 각각 군단을 지휘했다. 아리오비스투스는 7개의 부족 편제로 맞섰다. 크라수스의 돌격 덕분에 로마군은 승리했고, 게르만족 전열은 무너졌다. 카이사르는 아리오비스투스의 병력 대부분이 사망했다고 주장하며, 아리오비스투스는 라인 강을 건너 도망쳤다. 카이사르는 1년 만에 두 적을 물리치고 알프스 이남 갈리아로 돌아가 총독직의 비군사적 측면을 처리했다.[7][8][9]

  • 사비스 전투(기원전 57년): 카이사르는 벨가이 부족 연합에 맞서 진군했다. 벨가이인들은 비브락스 근처에서 로마와 동맹을 맺은 부족을 공격했고, 양측은 보급품 부족으로 전투를 피하려 했다. 카이사르는 요새를 건설했고, 벨가이 군대는 전투 없이 해산했다.[10]


카이사르는 벨가이 수에시오네스족의 ''옵피둠''(주요 정착지)을 포위 공격하여 항복시켰다. 벨로바키와 암비오네스도 항복했다. 그러나 네르비이는 아트레바테스와 비로만두이와 동맹하여 로마군을 매복하려 했다.[10]

57년 BC 갈리아 원정 지도. 전년도에 정복한 지역은 빨간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네르비족은 샘브르 강에 매복을 설치하고 로마군을 기다렸다. 로마군은 네르비족을 발견하고 전투를 시작했으나, 네르비족은 로마군을 방심하게 하고 덮쳤다. 로마군은 우수한 훈련과 경험으로 전열을 형성하여 중앙과 좌익에서 성공을 거두었지만, 우익은 포위당해 위기에 처했다. 카이사르의 개인적인 개입과 증원군 덕분에 전세가 바뀌었고, 네르비족은 격퇴되었다.[11]

카이사르의 자만심은 거의 패배로 이어질 뻔했지만, 군단의 경험과 그의 개인적인 역할 덕분에 승리했다. 벨가이족은 붕괴되었고, 대부분의 게르만 부족은 로마에 복종했다. 카이사르는 아투아투키족을 노예로 팔아 처벌하고, 겨울을 위해 트란살피나 갈리아로 돌아갔다.[11]

  • 모르비앙 해전(기원전 56년): 갈리아인들은 로마군에게 식량을 공급해야 한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베네티족은 로마 장교들을 사로잡고 아르모리카 부족들과 동맹을 맺어 함대를 준비했다. 로마는 해전에 대비가 부족했지만, 베네티족을 물리치려면 함대가 필요했다.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알비누스가 함대의 프라에펙투스로 임명되었다.[12][13]


카이사르는 새로운 배를 주문하고 노 젓는 사람들을 모집하여 함대를 준비했다. 군단들은 육로로 파견되었고, 기병대는 게르만족과 벨기에 부족들을 제압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푸블리우스 크라수스는 아키타니아로, 퀸투스 티투리우스 사비누스는 노르망디로 파견되었다. 카이사르는 나머지 군단을 이끌고 루아르 강 어귀 근처에서 함대와 합류했다.[12]

베네티족은 배와 지형에 유리했지만, 로마는 육지에서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 카이사르는 바다가 잔잔해질 때까지 전투를 중단했다.[12]

모르비앙 해전 지도
모르비앙 해전 (프랑스어, 로마는 빨간색, 베네티는 녹색)


로마 함대는 키베롱 만 근처에서 베네티 함대와 조우했다. 베네티 함대는 튼튼한 참나무 배와 높은 선체를 가졌지만, 로마는 갈고리를 이용해 베네티 함선의 돛대와 돛을 찢어 무력화시켰다. 로마군은 배에 탑승하여 갈리아인들을 제압했다. 해군력을 잃은 베네티는 항복했고, 카이사르는 부족 지도자들을 처형하고 나머지 사람들을 노예로 팔았다.[14][15]

56년 기원전 전투 지도. 북쪽 갈리아로 진출한 카이사르, 남쪽에서 작전을 수행한 크라수스, 그리고 서쪽 대서양 연안의 모르비앙 해전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전 해와 비교하여 정복된 영토는 대서양 쪽으로 길게 뻗어 있으며 프랑스 북동부 대부분을 포함한다.

5. 전쟁의 결과 및 영향

카이사르는 8년에 걸친 갈리아 전쟁을 통해 갈리아 전역과 브리타니아 일부를 정복하고 엄청난 부와 명성을 얻었다. 이 과정에서 카이사르에게 충성하는 정예 사병 군단이 형성되었고, 이는 카이사르가 로마 정치의 중심 인물로 부상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4]

그러나 카이사르의 세력이 커지면서 원로원과의 갈등 또한 심화되었다. 결국 기원전 49년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내전이 발발했다.[4] 기원전 50년, 카이사르는 갈리아에서 군단을 철수시키면서 전쟁은 사실상 마무리되었고, 이후 갈리아는 로마 속주가 되어 로마의 지배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라틴어가 전파되어 고대 프랑스어를 거쳐 현대 프랑스어의 기원이 되었다.[4] 또한 갈리아 정복은 로마 제국이 북서부 유럽으로 확장하고, 로마의 브리타니아 정복에도 영향을 주는 기반이 되었다.[5][6]

갈리아는 로마에 정복된 후 거의 5세기에 걸쳐 로마의 지배를 받으며 문화와 역사에 큰 영향을 받았다.

갈리아 전쟁은 강대국의 침략과 식민 지배의 역사를 보여주는 사례로, 한국의 역사와 비교하여 교훈을 얻을 수 있다. 특히,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운 갈리아 부족들의 저항은 한국의 독립운동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알레시아 공성전에서 베르징게토릭스가 이끄는 갈리아군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로마군에 맞서 용감하게 싸웠으나,[1] 로마군의 강력한 방어 시설과 전략에 밀려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2]

5. 1. 로마에 미친 영향

8년에 걸친 갈리아 전쟁의 결과로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역과 브리타니아 일부를 정복하고 엄청난 부와 명성을 얻었다. 특히 오랜 기간 동안 카이사르와 함께한 병사들은 로마 공화정이 아닌 카이사르 개인에게 충성을 바치는 정예 사병 군단이 되었다. 이는 카이사르가 로마 정치의 중심 인물로 부상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4]

그러나 카이사르의 세력이 커지면서 원로원과의 갈등 또한 심화되었다. 카이사르의 권력을 두려워한 원로원파(옵티마테스)는 폼페이우스와 손을 잡고 카이사르에 대항하였다. 결국 기원전 49년 1월 10일, 카이사르가 군단을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내전(기원전 49년-기원전 45년)이 발발했다.[4]

갈리아 전쟁은 명확한 종결 시점이 없지만, 대체로 기원전 50년에 카이사르가 갈리아에서 군단을 철수시키면서 사실상 마무리되었다. 이후 갈리아는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정식으로 로마 속주가 되었으며, 로마의 지배는 거의 5세기에 걸쳐 지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로마의 언어인 라틴어가 전파되어 고대 프랑스어로 발전했고, 이는 현대 프랑스어의 기원이 되었다.[4] 또한 갈리아 정복은 로마 제국이 북서부 유럽으로 확장하는 기반이 되었으며, 로마의 브리타니아 정복에도 영향을 주었다.[5][6]

5. 2. 갈리아에 미친 영향

갈리아는 로마에 정복된 후 거의 5세기에 걸쳐 로마의 지배를 받으며 문화와 역사에 큰 영향을 받았다. 로마는 갈리아에 라틴어를 전파했고, 이는 고대 프랑스어를 거쳐 현대 프랑스어의 기원이 되었다.[4] 갈리아 정복을 통해 로마는 제국을 북서부 유럽으로 확장할 수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게르마니아로 진출하여 엘베 강까지 이르렀으나, 테우토부르크 숲 전투 이후 라인 강을 국경으로 삼았다.[5] 클라우디우스의 로마의 브리타니아 정복 역시 카이사르의 침략을 기반으로 이루어졌다.[6] 로마의 지배는 단 한 번의 중단을 제외하고 서기 406년 라인 강 도하까지 계속되었다.

5. 3. 한국에 주는 교훈

갈리아 전쟁은 강대국의 침략과 식민 지배의 역사를 보여주는 사례로, 한국의 역사와 비교하여 교훈을 얻을 수 있다. 특히,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운 갈리아 부족들의 저항은 한국의 독립운동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암비오릭스가 이끈 에부로네스족의 봉기는 퀸투스 티투리우스 사비누스와 루키우스 아우룬쿨레이우스 코타가 지휘하는 로마 군단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는 갈리아인들이 로마의 지배에 굴복하지 않고 저항했음을 보여준다. 비록 이 봉기는 실패했지만, 갈리아인들의 저항 정신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알레시아 공성전에서 베르징게토릭스가 이끄는 갈리아군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로마군에 맞서 용감하게 싸웠으나,[1] 로마군의 강력한 방어 시설과 전략에 밀려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2] 이 사건은 강대국의 침략에 맞서 싸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보여준다.

갈리아 전쟁의 역사는 자주독립의 중요성과 외세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6. 역사적 논쟁 및 쟁점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저서 《갈리아 전쟁기》는 갈리아 전쟁에 대한 주요 사료이지만, 카이사르의 개인적인 관점과 정치적 의도가 반영되어 있어 객관적인 역사 서술로 보기 어렵다는 비판이 있다.[7] 20세기까지 이 책은 대체로 사실적이고 정확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역사가들은 카이사르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역사가 데이비드 헤니지(David Henige)는 카이사르가 제시한 인구와 전사 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카이사르는 헬베티이족 진영에서 발견된 그리스어 명판을 근거로 인구를 추정했다고 주장했지만, 헤니지는 갈리아인들이 그러한 인구 조사를 실시하기 어려웠을 것이며, 비그리스 부족이 그리스어로 기록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지적한다. 또한, 헤니지는 카이사르가 제시한 전투병의 비율(전체 인구의 4분의 1)이 지나치게 편리하며, 실제보다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1864년판 『갈리아 전기』의 한 페이지, 미국 남북 전쟁 당시 남부동맹 출판사인 패리시 & 윌링햄에서 제작.


우시페테스족과 텐크테리족에 대한 원정에서 카이사르는 로마군이 43만 명의 적군을 상대로 단 한 명의 병사도 잃지 않고 승리했으며, 패배 후 부족들이 집단 자살을 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헤니지는 이러한 주장이 불가능하다고 비판한다. 페르디난드 로트(Ferdinand Lot)는 43만 명이라는 전투 부대 규모를 믿을 수 없다고 지적했으며, 길리버(Gilliver) 역시 이 수치가 터무니없다고 평가한다. 다만, 길리버는 로마군이 수만 명을 죽였을 가능성과 로마군의 손실이 없었다는 주장은 가능하다고 본다.

현대 학자들은 《갈리아 전쟁기》를 카이사르가 자신을 실제보다 훨씬 위대하게 보이도록 만든 교묘한 선전물로 간주한다. 헤니지는 카이사르의 사실적인 어조와 읽기 쉬운 글쓰기가 그의 주장을 더욱 설득력 있게 만들었다고 지적한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전투를 갈리아인들의 야만성에 대한 정당한 방어로 묘사하고, 압도적인 역경을 이겨내고 최소한의 피해를 입었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자신과 로마인들이 신의 보호를 받는다는 믿음을 강화했다. 헤니지는 카이사르를 "역사상 가장 초기이자 가장 오랫동안 성공한 스핀 닥터 중 한 명"이라고 결론짓는다.[8]

쿠르트 라플라웁(Kurt Raaflaub)은 카이사르의 원정이 당시 기준으로는 특별히 잔혹한 것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카이사르가 불필요한 전투를 피하고 관대하려고 노력했으며, 도덕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는 것처럼 보이려 했다고 지적한다. 라플라웁은 카이사르의 저서가 선전으로 가득 차 있지만, 대부분의 저술가들이 믿는 것보다 더 많은 진실을 담고 있다고 주장한다.

참조

[1] 서적 Roman Imperialism: Post-Colonial Perspectives https://eprints.ncl.[...] School of Archaeological Studies, University of Leicester 2023-04-05
[2] harvnb 2015
[3] 웹사이트 Province ancient Roman government https://www.britanni[...] 2021-09-02
[4] 웹사이트 The French language before 1200 https://www.bl.uk/me[...] 2021-08-29
[5] 웹사이트 Battle of the Teutoburg Forest Summary, Facts, & Significance https://www.britanni[...] 2021-08-29
[6] 웹사이트 Roman Conquest of Britain: Caesar's Expedition to Hadrian's Wall https://www.thegreat[...] 2021-08-29
[7] 서적 Blood and soil : a world history of genocide and extermination from Sparta to Darfur https://www.worldcat[...] Yale University Press 2007
[8] 학술지 Caesar and Genocide: Confronting the Dark Side of Caesar's Gallic Wars 2021
[9] 서적 카에サル『ガリア戦記』1.31
[10] 서적 カエサル『ガリア戦記』2.6
[11] 서적 カエサル『ガリア戦記』2.6。ガリア戦記には「ネルウィ族はほぼ壊滅状態となった」と記載があるが、実際にはその後もネルウィ族は勢力を保っている。
[12] 서적 プルタルコス「英雄伝」ポンペイウス51
[13] 서적 プルタルコス「英雄伝」クラッスス15
[14] 문서 [[笞刑]]を加えて死に至らしめ、その後斬首するという方法であった
[15] 서적 カエサル「ガリア戦記」7.28
[16] 서적 カエサル「ガリア戦記」7.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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