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나베 하루미치
1. 개요
다나베 하루미치는 일본 제국의 관료이자 정치인으로, 1878년 야마나시현에서 태어나 1950년에 사망했다. 도쿄 제국대학 법과대학 졸업 후 체신성에 들어가 통신 행정 전문가로 활동하며 통신국장을 역임했다. 제2차 호헌 운동 당시 기요우라 게이고 내각과 연관되어 비판받았으며, 이후 히라누마 기이치로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오사카부 지사, 만주국 참의 등을 거쳐 히라누마 내각에서 내각서기관장과 체신 대신을 지냈으며, 귀족원 의원과 제3차 고노에 내각의 내무대신을 역임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공직에서 추방되었고, 훈2등 서보장을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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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부지사 -
하시모토 도루
하시모토 도루는 1969년 도쿄에서 태어나 변호사, 방송인으로 활동하다 2008년 오사카부 지사를 시작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오사카 시장을 역임하며 여러 정책을 추진하고 논란을 일으킨 일본의 정치인이다. -
오사카부지사 -
마쓰이 이치로
마쓰이 이치로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오사카부 의원, 오사카부 지사, 오사카 시장을 역임했으며, 오사카 행정 개혁을 추진하다 2023년 정계에서 은퇴했다. -
만주국 관련자 -
최남선
최남선은 1890년에 태어나 1957년에 사망한 대한민국의 문인이자 독립운동가, 언론인, 역사학자이며, 《소년》을 창간하고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하여 현대 한국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으며, 3·1 운동 독립선언서 기초, 친일 행적, 단군 연구, 《단군론》, 《불함문화론》 저술 등의 활동을 했다. -
만주국 관련자 -
김창영 (1890년)
김창영은 일제강점기 경찰 및 관료, 만주국 관리로서 항일 무장 세력 탄압과 귀순 공작에 참여하고 금산군수와 전라남도 참여관을 지냈으며, 광복 후 경성부부윤을 역임했으나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처벌받고 친일파 명단에 포함되었다. -
일본의 내각서기관장 -
시나 에쓰사부로
시나 에쓰사부로는 일본의 관료, 사업가, 정치인으로, 상공성 근무와 만주국 산업 개발 기여, 전시 경제 정책 수립, 자유민주당 부총재 역임, 한일 기본조약 체결, 중의원 의원 활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
일본의 내각서기관장 -
하토야마 이치로
하토야마 이치로는 15선 중의원 의원, 초대 자유민주당 총재, 제54대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한 일본 정치인으로, 소련과의 국교 회복과 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에 힘썼으나 선거구 개편 시도와 헌법 개정 추진, 과거 정치 활동과 사상 등으로 복잡한 평가를 받으며, 그의 아들과 손자 또한 일본 정계에서 활동하였다.
2. 생애
1878년 야마나시현에서 주조 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1905년 도쿄 제국대학 법과 대학을 졸업하고 체신성에 들어가 프랑스 유학 후 무선 전신법을 제정하는 등 통신 행정 전문가로 활약하여 1924년 통신국장이 되었다. 제2차 호헌 운동 때 기요우라 내각과 연결되는 "특권 관료"로 규탄받아 가토 다카아키 내각 성립 후 휴직 처분을 받고 의원면관되었다. 히라누마 기이치로의 고쿠혼샤(국본사) 이사, 오사카부 지사, 만주국 참의부 부의장을 역임했다. 히라누마 내각의 내각서기관장과 체신대신, 제3차 고노에 내각의 내무대신을 역임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에는 공직에서 추방당한 후, 1950년에 병사하였다.
2.1. 초기 생애 및 관료 경력
야마나시현 히가시야마나시군 가네가네 촌(현재의 고슈시)에서 양조업자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905년 도쿄 제국 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체신성에 들어갔다. 요코하마 우편국장, 오사카 우편국장, 체신관리국 서기관, 체신성 참사관 겸 환전 저금국 사무관, 오사카 체신국장, 도쿄 체신국장을 역임하고 프랑스에 유학한 뒤, 무선 전신법 제정에 힘쓰는 등 통신 행정 전문가로 활약하여 1924년 통신국장이 되어 "통신벌"의 우두머리로 여겨졌다.
제2차 호헌 운동 당시 기요우라 내각과 연결된 "특권 관료"로 규탄받아, 호헌 삼파에 의한 가토 다카아키 내각 성립 후 휴직 처분되어 그대로 의원 면관되었다. 평소 히라누마 기이치로를 존경했으며, 히라누마는 다나베를 높이 평가하여 고쿠혼샤 이사로 맞이하였고, 이후 오타 고조와 함께 히라누마의 측근으로 활약하였다.
2.2. 정치 입문과 호헌 운동
도쿄 제국대학 법과 대학을 졸업하고 체신성에 들어간 다나베 하루미치는 프랑스 유학 후 무선 전신법 제정에 힘쓰는 등 통신 행정 전문가로 활약하였다. 1924년 통신국장이 되면서 '통신벌'의 우두머리로 여겨졌으나, 제2차 호헌 운동 당시 기요우라 게이고 내각과 연결된 '특권 관료'로 비판받았다. 호헌 3파에 의한 가토 다카아키 내각 성립 후 휴직 처분을 받고 사임하였다.
평소 히라누마 기이치로를 존경하던 다나베는 그의 추천으로 고쿠혼샤(국본사) 이사가 되었고, 오타 고조와 함께 히라누마의 측근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에는 인척인 스즈키 기사부로 내무대신의 초청으로 오사카부 지사가 되었으나, 선거 간섭 사건으로 스즈키가 사임하자 함께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다.
2.3. 히라누마 기이치로와의 관계
다나베는 평소 히라누마 기이치로를 존경했으며, 히라누마는 다나베를 높게 평가하여 1924년에 자신이 창설한 국본사 이사로 초청했다. 다나베는 오타 고조와 함께 히라누마의 측근으로 활약했다.
1927년, 다나베는 히라누마의 또 다른 제자이자 국본사 회원인 내무대신 스즈키 기사부로에 의해 오사카부 지사로 임명되었으나, 스즈키가 선거 부정 혐의로 기소된 후 1년 만에 사임했다.
히라누마 내각이 성립되자, 다나베는 내각서기관장에 취임하여 정권의 기반을 다졌고, 3개월 후 오타에게 서기관장 자리를 넘기고 체신대신이 되었다. 하지만 히라누마 내각은 단명으로 끝나, 다나베는 체신대신이 된 지 4개월 만에 사임했다.
1941년, 제3차 고노에 내각이 성립되자, 다나베는 히라누마의 추천으로 내무대신이 되었다. 그러나 이 내각 역시 3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
2.4. 오사카부 지사 및 만주국 활동
1927년, 인척인 스즈키 기사부로 내무대신의 초청으로 오사카부 지사가 되었으나, 스즈키가 선거 간섭 사건으로 사임하게 되자,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1933년에 만주국으로 건너가 만주국 참의 및 참의부 부의장을 역임했다. 그는 산업의 사적 관리가 완전한 국가 통제 경제보다 더 현실적이라는 관동군의 견해를 지지했다.
2.5. 내각 서기관장 및 체신대신
히라누마 기이치로 내각이 성립되면서 다나베 하루미치는 내각서기관장에 임명되어 정권의 기반 형성을 맡았다. 3개월 후 서기관장을 오타 고조에게 넘기고 체신대신에 취임하여 옛 직장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히라누마 내각은 단명으로 끝나, 체신대신 취임 4개월여 만에 사임하게 되었다.
2.6. 귀족원 의원 및 내무대신
1938년, 다나베 하루미치는 일본 제국 의회 귀족원 의원으로 임명되었다. 1941년, 제3차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이 발족하자 히라누마 기이치로의 추천으로 내무대신에 취임했다. 그러나 이 내각은 3개월 만에 무너졌다.
2.7.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다나베 하루미치는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의해 공직에서 추방되었다. 그는 1950년에 지병으로 사망했다.
3. 평가
다나베는 제2차 호헌 운동 때, 기요우라 내각과 연결되는 "특권 관료"로 규탄받아, 호헌 3파에 의한 가토 다카아키 내각 성립 후, 휴직 처분을 받고 그대로 의원면관(依願免官)되었다. 그는 평소 히라누마 기이치로를 존경했으며, 히라누마는 다나베를 높게 평가해 고쿠혼샤(国本社) 이사에 앉혔고, 이후 오타 고조(太田耕造)와 함께 히라누마의 한쪽 팔로 활약하였다.
히라누마 내각이 성립되면서 내각서기관장이 되어 정권의 기반 형성을 맡았으며, 3개월 후 서기관장을 오타에게 넘기고 체신 대신이 되었다. 하지만 히라누마 내각은 단명으로 끝났고, 다나베는 체신 대신이 된 지 4개월 만에 사임하게 되었다.
1941년 제3차 고노에 내각 성립 당시, 히라누마의 추천으로 내무대신이 되었으나, 이 내각 역시 3개월 만에 무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