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기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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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단기고사는 728년 대야발이 발해어로 저술하고, 황조복이 한문으로 번역한 후 유응두 등에 의해 간행되었다고 전해지는 역사서이다. 10세기 이후 원본과 간행본이 소실되었으며, 1959년 정해박에 의해 국한문본으로 복원되었다. 국한문본은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의 역대 왕력, 주요 사건 등을 기록하고 있으나, 근대 용어 사용, 시대적 모순, 재위 연도 불일치 등 여러 문제점이 지적되어 역사적 자료로 인정받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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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기고사 | |
|---|---|
| 기본 정보 | |
|  | |
| 저자 | 미상 | 
| 제작 일자 | 미상 | 
| 분야 | 역사 | 
| 주제 | 역사서 | 
2. 출간 경로 및 유래
《단기고사》는 〈저자의 말〉, 〈중간서(重刊序)〉, 〈출간경로〉에 따르면, 728년 대야발이 흩어진 사료를 모아 발해어로 편찬하고, 830년경 황조복이 한문으로 번역하였다고 한다. 구한말 학자 유응두가 중국에서 이를 발견하여 수십 권 등사하였고, 이관구, 김두화, 이시영이 국한문으로 번역·교열하여 간행하였다고 하나, 10세기 이후 원판과 간행본은 소실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것은 1949년 간행본을 한문본으로, 1959년 정해박이 국한문본으로 복원한 것이다.[2]
1990년에는 국한문 번역본이 실제 내용과 다르다는 지적과 함께, 기억을 되살려 복원하였다는 한문초략본이 공개되었다.[2]
2. 1. 전해지는 출간 경로
728년 대야발이 흩어진 사료를 모아 발해어로 《단기고사》를 지었으며, 830년경 황조복이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구한말 학자 유응두가 중국에서 이를 발견하여 수십 권 등사하였고, 이관구, 김두화, 이시영이 국한문으로 번역·교열하여 간행하였다.[2] 그러나 10세기 이후 원판과 간행본은 소실되었다. 1949년 간행본을 다시 한문본으로 복원했고, 1959년 정해박이 국한문본으로 복원하였는데, 현재 남아 있는 것이 이 복원본이다.[2]1990년에는 국한문 번역본이 실제 내용과 다르다는 지적과 함께, 기억을 되살려 복원하였다는 한문초략본이 공개되었다.[2]
2. 2. 출간 경로의 문제점
《단기고사》는 728년 대야발이 흩어진 사료를 모아 발해어로 지었으며, 830년경 황조복이 한문으로 번역한 것을 구한말 학자인 유응두가 중국에서 발견하여 수십 권 등사하였고, 이관구, 김두화, 이시영이 국한문으로 번역·교열하여 간행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0세기 이후 원판과 간행본이 소실되었으며, 1949년 간행본을 다시 한문본으로 복원했고, 1959년 정해박이 국한문본으로 복원하였는데, 현재 남아 있는 것이 이 복원본이다.1990년에 국한문 번역본이 실제 내용과 다르다고 지적하며, 기억을 되살려 복원하였다는 한문초략본이 공개되었다.[2]
3. 내용 구성
1959년 국한문본 《단기고사》는 크게 출간 및 책 내용 관련 자료와 본문으로 구성된다. 출간 관련 자료는 다시 보충 자료와 출간 정보로 나뉜다. 보충 자료로는 역대총계표, 각종 기사, 역대약기, 전단제·후단제, 기자조선 지도, 국조단군칙어, 원본국가, 천부경이 있다. 출간 정보에는 김재형의 단기고사중간사, 정해박의 단기고사중간서, 김재형·정해박·이종국의 본사출간경로가 실려있다. 발해 대야발의 단기고사재편서, 이경직·신채호의 단기고사중간서도 포함된다. 본문은 전단군조선, 후단군조선, 기자조선 3편으로 구성된다.[1]
3. 1. 1959년 국한문본의 구성
1959년에 출간된 국한문본 《단기고사》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1]- 출간 및 책 내용과 관련된 자료
- * 보충 자료 - 역대총계표, 각종 기사, 역대약기, 전단제, 후단제, 기자조선 지도
- * 단기고사중간사(김재형), 단기고사중간서(정해박), 본사출간경로(김재형, 정해박, 이종국) 등 출간 정보
- * 보충 자료 - 국조단군칙어, 원본국가, 천부경
- * 단기고사재편서(발해국 대야발)
- * 단기고사중간서(이경직), 단기고사중간서(신채호)
- 본문
- * 제1편 전단군조선
- * 제2편 후단군조선
- * 제3편 기자조선
3. 2. 국한문본의 주요 내용 (요약)
《단기고사》 국한문본에 따르면,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의 역대 왕력, 주요 사건, 치세 기간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대수 | 왕명 | 재위 기간 | 주요 사건 | 
|---|---|---|---|
| 1 | 왕검(王儉) | 93년 | |
| 2 | 부루(扶婁) | 58년 | 3년, 도량형 통일[3]; 58년, 일식 | 
| 3 | 가륵(嘉勒) | 45년 | 2년, 국문정음(國文正音) 정선(精選) | 
| 4 | 오사구(烏斯丘) | 38년 | 7년, 배 만드는 곳을 살수 상류에 설치 | 
| 5 | 구을(丘乙) | 16년 | 13년, 혼천기(渾天機) 제조, 조선역서 제작 | 
| 6 | 달문(達文) | 36년 | |
| 7 | 한율(翰栗) | 54년 | |
| 8 | 우서한(于西翰) | 8년 | 7년, 세발 달린 까마귀가 대궐에 들어옴 | 
| 9 | 아술(阿述) | 35년 | 원년, 두 개의 태양이 나란히 나타남 | 
| 10 | 노을(魯乙) | 58년 | 16년, 장백산의 누운 돌이 일어나고, 발해에 용귀(龍龜)가 나타남, 흑수(黑水) 강가에 금괴 노출 | 
| 11 | 도해(道奚) | 58년 | 48년, 평양에서 만국박람회 개최 (양수기, 자행윤선차, 경기구, 자발전차, 천문경, 소금천리상응기, 진천뢰, 어풍승천기, 흡기잠수선, 측우기, 측한계, 측서계, 량우계, 측풍계, 사진계 등 제조) | 
| 12 | 아한(阿漢) | 52년 | 2년, 외뿔 가진 짐승이 송화강 북쪽에 나타남; 창해역사 여홍성, 비석에 시를 읊음 | 
| 13 | 흘달(屹達) | 61년 | 16년, 지방자치제 실시; 20년, 법정학교(法政學校) 설립; 태양의 원리 및 빛의 분산/흡수 현상 검증; 50년, 오성이 모여들고 누런 학이 뜰의 소나무에 깃듦 | 
| 14 | 고불(古弗) | 60년 | 56년, 호구조사 (총계 1억 8000만 명) | 
| 15 | 벌음(伐音) | 51년 | |
| 16 | 위나(尉那) | 58년 | 28년, 만국의 제후들을 영고탑에 모이게 하여 회의 | 
| 17 | 여을(余乙) | 68년 | 20년, 일식 | 
| 18 | 동엄(冬奄) | 49년 | |
| 19 | 종년(縱年) | 55년 | |
| 20 | 고홀(固忽) | 43년 | 40년, 공을홀이 천하의 지도(세계지도) 제작 | 
| 21 | 소태(蘇台) | 52년 | |
| 22 | 색불루(索弗婁) | 48년 | |
| 23 | 아홀(阿忽) | 75년 | |
| 24 | 연나(延那) | 11년 | 10년, 정치원론 저술 | 
| 25 | 솔나(率那) | 89년 | 39년, 영고탑으로 도읍을 옮김(후 단군조선), 서여가 기자조선 건국 (기원전 1291년) | 
| 26 | 추로(鄒盧) | 65년 | |
| 27 | 두밀(豆密) | 26년 | |
| 28 | 해모(奚牟) | 28년 | 11년, 태풍과 폭우로 천하의 육지에 고기가 흩어짐 | 
| 29 | 마휴(摩休) | 34년 | 8년, 여름에 지진; 9년, 가을에 남해(南海)의 조수가 약 0.91m나 물러남 | 
| 30 | 내휴(奈休) | 35년 | |
| 31 | 등올(登兀) | 25년 | |
| 32 | 추밀(鄒密) | 30년 | 13년, 3월 일식 | 
| 33 | 감물(甘勿) | 24년 | |
| 34 | 오루문(奧婁門) | 23년 | 10년, 두 해(兩日)가 함께 떠오르듯 왕무(黃霧)가 사방을 덮음 | 
| 35 | 사벌(沙伐) | 68년 | 6년, 황충 피해와 홍수; 8년, 일식 | 
| 36 | 매륵(買勒) | 58년 | 28년, 지진과 해일 (기원전 855년)[4]; 30년, 성리학, 심리학 저술; 35년, 용마 출현 (등에 별무늬); 50년, 의학화학 저술 | 
| 37 | 마물(麻勿) | 56년 | |
| 38 | 다물(多勿) | 45년 | |
| 39 | 두홀(豆忽) | 36년 | 21년, 일식 | 
| 40 | 달음(達音) | 18년 | |
| 41 | 음차(音次) | 20년 | 4년, 종교론 저술 | 
| 42 | 을우지(乙于支) | 10년 | 5년, 지리학, 광물학 저술 | 
| 43 | 물리(勿理) | 25년 | 8년, 논리학원본설 저술 | 
| 44 | 구물(丘勿) | 40년 | 3년, 일식; 5년, 동물 및 식물학 저술; 16년, 백과서 저술 | 
| 45 | 여루(余婁) | 55년 | 28년, 의학대방 저술; 40년, 자본론 저술 | 
| 46 | 보을(普乙) | 46년 | |
| 47 | 고열가(古列加) | 58년 | 22년, 건축학 저술; 25년, 종수학(種樹學) 저술; 기자조선 멸망, 위만조선 건국 (기원전 194년) | 
| 왕명 | 주요 사건 | 
|---|---|
| 서여 | 기자조선 건국(기원전 1291년) | 
고조선의 치세 기간은 기원전 2512년부터 기원전 416년까지 47대 2096년간 지속되었으며, 평균 재위 기간은 44년 7개월이다. 기자조선의 치세 기간은 기원전 1291년부터 기원전 194년까지 42대 1097년간 지속되었으며, 평균 재위 기간은 26년이다.[5]
국한문본 《단기고사》는 《환단고기》 〈단군세기〉와 왕의 명칭 및 재위 기간이 거의 일치하는 50여 건의 유사한 기록을 보이며,[6] 〈기자조선〉 기록은 《환단고기》 〈번한세가〉와 왕의 명칭, 업적 등에서 많은 공통점을 보인다.
4. 진위 논란
《단기고사》는 역사적 자료로서 학계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여러 심각한 모순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서지 사항의 불분명함: 국한문본 《단기고사》는 한문 원본이 존재하지 않으며, 1949년 간행본에 대한 기록도 불분명하다. 1959년 국한문 번역본 이전의 자료도 없다. 1990년에 공개된 한문초략본은 국한문본과 내용이 완전히 다르다. 일부에서는 1907년에 공개되었다고 주장하지만, 김교헌이나 신채호의 글에 《단기고사》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또한, 1907년에 쓰여진 이경직의 서문에 1910년 이후부터 사용된 '대종교'라는 명칭이 등장하는 것은 시대적 모순이다. 대야발의 서문은 천통 31년에 쓰여진 것으로 되어 있으나, 대조영의 재위 기간은 20년이었고, 뒤이은 무왕은 '인안'이라는 연호를 사용했으므로 이 역시 모순이다.
- 시대와 맞지 않는 내용 및 어휘: 미술관, 지구성, 원심력, 만국박람회 등 근대에 등장한 용어들이 사용되었다. 기구, 전화, 엑스레이, 잠수선, 비행기, 사진 등이 등장하고, 신하가 임금에게 서양의 칸트-라플라스가 주장한 성운설을 소개하는 내용은 시대상과 맞지 않는다. 또한, '회기를 정하고 백성에게 참정권을 허락하여 매년 8월 1일 정기회의 날짜로 정했다'라는 기록 등 근대적 용어와 개념이 사용된 점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 재위 연도의 모순: 《단기고사》에는 고조선이 2096년에 걸쳐 47대, 기자조선이 1097년에 걸쳐 42대로 기록되어 있다. 왕의 수는 비슷한데 통치 기간이 두 배 가까이 차이 나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왕들의 평균 재위 기간이 45년에 달하는 반면, 기자조선의 평균 재위 기간은 26년으로 계산되는 점도 모순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학계에서는 이러한 점을 들어 《단기고사》의 기록이 날조되었다고 판단한다. 또한, 《단기고사》에 따르면 기자조선이 전단조선 19세 단군 종년부터 시작되어 1097년간 계속되었다고 하는데, 위만조선의 시작 연대를 기원전 194년으로 가정하면 전단조선의 시작 연대는 기원전 2512년이 되어 일반적인 고조선 건국 연도인 기원전 2333년과 179년의 차이가 발생한다. 이는 《환단고기》〈단군세기〉의 기록과도 상충된다. 박병섭은 〈단군과 기자 관련 사료를 통해 본 《환단고기》의 역사성 검토〉에서 후단조선과 기자조선의 동일 내용에 대한 심각한 시대 불일치로 인해 《단기고사》 자체의 기간 정합성이 없음을 지적했다.
4. 1. 천문 기록 연구
국한문본 《단기고사》에 기록된 10여 건의 천문 관련 기록의 실현 여부를 연구한 논문이 발표되었으나, 그 내용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7] 논문의 내용과 반론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주장 - 오성취합은 250년에 한 번 정도 일어나는데, 기록과 실제 현상은 1년밖에 차이나지 않는다. 썰물 기록도 200년 사이에 가장 큰 썰물이 4년의 오차로 기록되었다. 이는 매우 적은 확률이며, 따라서 기록이 임의로 조작된 것일 확률도 매우 적다고 할 수 있다.
- 반론 - 논문은 국한문본 《단기고사》가 위작일 경우 막연하게 꾸며내었을 것을 가정하고 있지만, 동양 천문학의 지식이 있다면, 특히 천체의 위치를 계산할 수 있게 된 조선 세종시대 이후라면 옛 천문현상을 예측할 확률은 높아질 것이다.
연구의 기준으로 쓰인 연대는 고조선이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되었음을 가정한 것이며, 《환단고기》의 연대를 따른 것이다. 그러므로 《단기고사》의 연대로 같은 작업을 실행할 경우 200년 가까이 오차가 생기게 된다는 문제가 있다. 오성취합은 20년에 한 번 일어나는 현상으로 1년의 오차를 생각한다면 1/6 정도의 아주 높은 확률이다.
4. 2. 북한의 연구
북한 학계는 《단기고사》의 단군조선 47대 왕조 기록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지나치게 긴 재위 연대에 대해서는 현실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채택하지 않는다.[8] 시대와 맞지 않는 내용, 근대 이후에 사용된 용어 등 많은 부분이 후대에 위조 및 추가되었다고 판단하며, 《단기고사》 초략본(백산본)을 별도로 주목한다.[8] 기자조선(기자조선) 기록과 나머지 기록들은 전부 받아들이지 않고, 전조선·후조선의 시대 구분만을 채택하였다.[8]4. 3. 내용상의 모순
《단기고사》에는 근대 용어의 등장이나 당시 시대상으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기록 등 여러 가지 심각한 모순이 있어, 역사적인 자료로 그 어떤 학계에서도 채택되지 않는다.- '''서지 사항(출간 연도와 원본)'''
- * 국한문본 《단기고사》는 한문 원본이 소실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1949년 간행본에 대한 기록도 알 수 없고, 1959년의 국한문 번역본 이전의 것도 없다. 1990년에 공개된 한문초략본은 국한문본과 완전히 다른 내용이다.
- * 일부 환단고기 추종자들이 1907년에 공개되었다고 주장하지만, 김교헌이나 신채호의 글에 《단기고사》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 * 국한문본에서 1907년에 쓰여진 이경직의 서문에 1910년 이후부터 사용한 명칭인 ‘대종교’가 등장한다.
- * 대야발의 서문은 천통 31년에 쓰여진 것으로 되어 있으나, 대조영은 재위 기간이 20년이었으며, 뒤이은 무왕은 ‘인안’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 '''시대와 맞지 않는 내용 및 어휘(정체 불명의 기계)'''
- * 미술관, 지구성, 원심력, 만국박람회 등의 근대에 등장한 용어를 사용하였다. 기구와 전화, 엑스레이와 잠수선, 비행기, 사진이 등장하고, 신하가 임금에게 서양의 칸트-라플라스가 주장한 성운설의 내용을 소개하기도 한다.
- * ‘회기(會期)를 정하고 백성에게 참정권(參政權)을 허락하여 매년 8월 1일 정기회의 날짜로 정했다.’라는 기록 등 근대적 용어와 개념이 사용되었다.
- '''재위 연도의 모순'''
- * 《단기고사》에는 고조선이 2096년에 모두 47대로, 기자조선이 1097년에 42대로 기록되어 있다. 왕의 수는 비슷한데 다스린 연수가 무려 2배의 차이가 난다. 《단기고사》에 기록된 왕들의 평균 재위 연대는 45년 가까이 되어 상식과 어긋난다(후반부에 존재했던 것으로 기록된 기자조선은 41대 1052년으로 기록되어 평균 재위 연대가 26년으로 계산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학계에서는 이 점을 들어 《단기고사》의 기록이 전부 날조되었다고 판단하고 있다.
- * 《단기고사》에 따르면, 기자조선이 전단조선 19세 단군 종년(규원사화는 구모소 임금)부터 시작되었으며, 이후 1097년간 계속되었다. 위만조선의 시작 연대를 일반적인 기원전 194년으로 가정하면, 전단조선의 시작 연대는 기원전 2512년이 된다. 일반적인 기원전 2333년과는 179년의 차이가 난다. 《환단고기》〈단군세기〉는 기원전 2333년이 고조선의 시작 연도로 기록되어 있다.
- * 박병섭의 〈단군과 기자 관련 사료를 통해 본 《환단고기》의 역사성 검토〉에서는 후단조선과 기자조선의 동일 내용에 대한 심각한 시대 불일치로 자체의 기간 정합성이 없음이 지적되었다.
참조
[1] 
문서
 
단기고사의 기자(奇子)는 널리 알려진 [[기자 (사람)|기자(箕子)]]와는 다르며, 기자(奇子)가 중국으로부터 망명한 기자(箕子)를 받아들인 것으로 되어 있다.
 
[2] 
논문
 
천부경과 단기양조의 고찰
 
1990
 
[3] 
문서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에서는 B.C.2237에 해당된다.
 
[4] 
문서
 
환단고기》〈단군세기〉의 B.C.676에 해당된다.
 
[5] 
문서
 
위만조선의 건국 연대는 기원전 194년으로 추정하였다.
 
[6] 
문서
 
국한문본 《단기고사》의 고조선의 각 단군에 대한 연대는 《환단고기》 〈단군세기〉의 것보다 179년 앞선다.
 
[7] 
논문/서적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
 
김영사
 
2002
 
[8] 
서적
 
고조선력사개관
 
사회과학출판사·도서출판 중심
 
20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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