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언모
1. 개요
단언모는 당나라 말기에 활동한 인물로, 형남절도사를 역임했다. 그는 황소의 난 진압 작전에 참여했으며, 강서초토사로 임명되어 조전정을 대신했다. 형남절도사 부임 후, 감군 환관 양복광의 사주를 받아 송호를 살해하고 형남 지역을 장악했다. 이후 낭주자사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881년 형남절도사에 임명되었다. 882년에는 감군 주경매와의 갈등으로 인해 주경매에게 살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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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남절도사 (당) -
이덕유
이덕유는 당나라 무종 시대의 재상으로, 번진 세력 약화에 기여한 문장가이자 정원가였으나, 당쟁 주도 및 폐불 추진 등 논란 속에 좌천되어 생을 마감했다. -
형남절도사 (당) -
장괴
장괴는 당나라 말기 탐욕스럽고 포악한 통치로 민심을 잃어 곽우의 반란과 진종권의 공격으로 살해당한 형남절도사이다. -
882년 사망 -
아스콜트
아스콜트는 《원초 연대기》에 등장하는 인물로, 류리크의 부하로 키예프를 지배하다가 올레크 베시에 의해 살해당하고 키예프 루스가 멸망했다. -
882년 사망 -
교황 요한 8세
교황 요한 8세는 872년부터 882년까지 재위하며 교황청을 개편하고 사라센족에 맞서 이탈리아 도시들과 동맹을 맺었으며 슬라브족 선교를 지원했으나 882년 암살당했다. -
살해된 사람 -
정인보
정인보는 일제강점기 및 한국전쟁 시기에 활동한 사학자, 시조 작가, 교육자로, 민족주의 역사관과 ‘얼’ 사상을 형성하고, 연세대학교 강사, 동아일보 논설위원, 국학대학교 학장, 감찰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조선사 연구』 등의 저서를 남겼으나 한국전쟁 중 납북되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
살해된 사람 -
정기원 (1559년)
정기원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1585년 문과 급제 후 임진왜란 때 사은사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정유재란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하여 예조판서에 추증되고 충렬사에 배향, 시호는 충의이며 저서로 《현산집》, 《현산실기》가 있다.
2. 생애
(내용 없음 - 하위 섹션에서 생애의 주요 내용을 다루고 있으므로 중복을 피하기 위해 본 섹션 내용은 생략함)
2.1. 출신 배경 및 초기 경력
단언모의 출신 배경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이는 당나라의 공식 역사서인 《구당서》나 《신당서》에 그의 열전이 실려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는 당 희종 재위 초기에 산둥성 지닝에 본거지를 둔 태녕군(泰寧軍)의 도장(都將)으로 복무하며 대규모 농민 반란군 수령 황소(黃巢)에 맞서는 작전에 참여했다.
879년, 당나라 조정은 단언모를 강서초토사(江西招討使)로 임명하여 조전정(曹全晸)을 대신해 장강 서쪽 지역에서 황소 토벌 작전을 지휘하게 했다. 당시 조전정은 산남동도 절도사(山南東道節度使, 본거지는 현 후베이성 샹양) 유거용(劉巨容)과 함께 황소 군대에게 큰 타격을 입히고 추격하던 중이었다. 그러나 단언모로 지휘관이 교체되면서 조전정은 추격을 멈추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황소와 그의 주요 장수인 상양(尚讓)이 장강을 건너 강동 지역으로 도주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게 되었다.
2.2. 형남 절도사 부임
황소의 난 당시, 기존 형남절도사(荊南節度使)였던 전임 재상 왕탁은 조전정과 유거용이 황소를 격파하기 전에 이미 도주하여 형남 번진(藩鎭)의 절도사 자리는 공석이었다. 이에 형남감군(監軍)으로 있던 환관 양복광은 충무군(忠武軍, 현 허난성 쉬창 시 소재) 소속 도장(都將) 송호(宋浩)를 권지부사(權知府事)로 삼아 임시로 형남 번진을 관리하게 했고, 조정은 이후 송호를 형남안무사(荊南安撫使)로 임명하여 이를 승인했다.
당시 단언모는 군대를 이끌고 성을 지키는 임무를 맡고 있었는데, 자신이 송호보다 지위가 높다고 여겨 그의 지휘 아래 있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했다. 880년, 송호가 형남 번진의 수도인 강릉현(江陵縣, 현 후베이성 징저우 시 장링 현) 시가지 내 나무 벌목을 금지했으나, 단언모 부대의 일부 병사들이 이를 어겼다. 송호가 이들을 처벌로 채찍질하자, 단언모는 이를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여 격분했다. 결국 단언모는 송호의 본진을 공격하여 송호와 그의 두 아들을 살해했다. 이후 양복광은 조정에 송호가 잔혹하여 병사들에게 살해당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신당서》의 양복광 전기에는 양복광 또한 송호에게 불만이 있어 단언모의 행동을 부추겼다는 기록이 있다.
사건 이후 당 희종은 단언모를 낭주자사(朗州刺史, 현 후난성 창더 시)로 임명하고, 공부시랑(工部侍郞) 정소업(鄭紹業)을 새로운 형남절도사로 임명했다. 하지만 단언모는 낭주로 부임할 뜻을 보이지 않았고, 정소업은 형남을 장악한 단언모를 두려워하여 약 반년 동안 부임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이듬해인 881년경, 황소가 당나라 수도 장안을 함락시키고 희종이 성도로 피난하는 혼란 속에서, 희종은 결국 정소업을 소환하고 단언모를 형남절도사로 임명했다.
2.3. 최후
단언모와 신임 감군인 환관 주경매는 곧 적대적인 관계로 발전하게 되었다. 주경매는 3천 명의 정예군을 모집하여 그들을 충용군(忠勇軍)이라 부르고 자신의 지휘하에 두었다. 이에 격분한 단언모는 주경매를 살해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882년 6월 28일, 주경매는 선수를 쳐서 단언모를 공격하여 그를 살해하였다. 주경매는 당초 강릉소윤(江陵少尹) 이수李燧중국어를 유후(留後)에 임명하였다. 이때 당 희종은 다시 정소업을 형남절도사로 임명하였으나, 정소업은 주경매를 두려워하여 형남에 부임하기를 주저하였으며, 마침내 주경매는 압아(押牙) 진유에게 지부사(知府事)의 직책을 위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