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예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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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공예왕후는 고려 인종의 왕비로, 고려 의종, 명종, 신종 등 세 왕을 배출했다. 장흥 임씨 출신으로, 이자겸의 난 이후 인종의 왕비가 되었으며, 의종을 낳은 후 정식 왕후로 책봉되었다. 무신정변 이후 넷째 아들 원경국사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고 병을 얻어 1183년에 사망했으며, 능은 순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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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예왕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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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작위 | 고려 인종의 왕비(왕후) |
별호 | 연덕궁주(延德宮主) |
존호 | 공예태후(恭睿太后) |
가문 | 장흥 임씨 |
아버지 | 임원후 |
어머니 | 진한국대부인 이씨 |
배우자 | 인종 |
자녀 | 5남 4녀 의종, 대령후, 명종, 원경국사, 신종 승경궁주, 덕녕궁주, 창락궁주, 영화궁주 |
출생일 | 1109년 9월 7일 (음력) |
사망일 | 1183년 11월 22일 (음력) |
능묘 | 순릉(純陵) |
왕비 책봉 | |
재위 시작 | 1129년 5월 10일 ~ 1146년 2월 28일 (음력) |
이전 | 폐비 이씨(연덕궁주), 폐비 이씨(복창원주) |
이후 | 장경왕후 김씨 |
왕태후 책봉 | |
재위 시작 | 1146년 3월 29일 ~ 1183년 11월 22일 (음력) |
이전 | 명의태후 유씨 |
이후 | 선정태후 김씨 |
생애 | |
출생 | 당동 마을, 옥당리, 관산읍, 장흥군, 고려 |
사망 | 개성, 고려 |
봉호 | |
연덕궁주 (延德宮主) | 1129년 5월 10일부터 |
추존 | |
시호 | 공예 (恭睿; "공손하고 슬기로운") |
2. 생애
공예왕후는 1109년 음력 9월 7일 장흥 임씨 임원후의 장녀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부평 이씨였다. 15세에 김인규의 아들 김지효와 혼인할 예정이었으나, 김지효가 병에 걸려 혼인이 취소되었다. 점쟁이는 공예왕후가 왕후가 될 운명이라고 예언했고, 이 소문은 이자겸의 귀에 들어갔다. 이자겸은 자신의 딸들을 왕후로 만들어 권력을 쥐고 있었기에, 임원후를 개성부사로 강등시켰다. 1126년 이자겸의 난이 실패하고 인종의 왕비였던 이자겸의 두 딸이 폐출되면서, 공예왕후는 왕후로 간택되어 입궁하였다.[1]
이자겸의 난이 진압되고, 인종의 이모이자 왕비였던 이자겸의 두 딸이 폐위되자, 임원후의 딸이 왕비가 되었다.[2] 1127년 왕비는 의종을 낳고 정식 왕후로 책봉되었다. 이후 왕경(1130년), 왕호(1131년), 왕탁(1144년), 왕충희(1148년)를 낳았다. 다섯 아들 외에도 다섯 명의 딸을 두었다. 인종은 왕비를 매우 사랑하여 그녀의 출생지를 "지장흥부사"(知長興府事|지장흥부사중국어)로 높였다.[3]
1170년 무신정변으로 의종이 퇴위되고 명종이 즉위하면서 무신들에 의한 정치가 시작되어 공예왕후는 항상 마음을 졸이며 살았다.[4] 공예왕후는 장남 의종의 행동을 걱정하여 둘째 아들 대령후를 왕위에 올리려 했으나, 1151년 반란 사건에 연루되었다. 정중부는 대령후가 왕위를 계승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에 그를 암살했다.
1182년 넷째 아들 원경국사 충희가 사망하자, 공예왕후는 무신들에게 화를 당한 것이라 생각하고 충격을 받아 병을 얻었다.[5] 1183년 음력 11월에 생을 마감하였다.[6]
2. 1. 탄생 및 초기 생애
恭睿王后|공예왕후중국어는 1109년 음력 9월 7일 전라남도 장흥군 관산읍 옥당리 당동마을에서 장흥 임씨 임원후의 장녀로 태어났다.[1] 어머니는 부평 이씨로 임원후의 정실 부인이었다. 슬하에 남동생 다섯 명과 여동생 한 명을 두었는데, 이 여동생은 훗날 장선왕후의 어머니가 된다. 따라서 최씨 부인은 공예왕후의 외조카이자 며느리가 된다.고려사에 따르면, 공예왕후가 태어나던 날 밤에 태후의 외조부인 문하시중 이위가 황색의 큰 깃발 꼬리가 선경전을 싸고 도는 꿈을 꾸었다. 이위는 외손녀가 “선경전에서 놀게 될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다고 한다.[1]
15세에 김인규의 아들 김지효와 혼인을 약속하였으나, 김지효가 신부집 문에 이르러 병이 발작하여 사경을 헤메었다. 이에 임원후는 혼인을 취소하고 점쟁이에게 점을 쳤는데, 점쟁이는 여인이 왕후가 될 운명이라고 말했다. 이 소문이 당대 세도가 이자겸의 귀에 들어갔다. 이자겸은 자신의 3녀와 4녀를 왕후로 시집보낸 상태였기에, 임원후의 딸이 왕후가 된다는 것은 자신과 가문의 몰락을 의미했다. 이자겸은 임원후를 개성부사로 강등시켰다. 1126년 (인종 4년) 이자겸의 난이 실패로 끝나고, 인종의 아내였던 이자겸의 두 딸 역시 폐출당하였다. 1126년 음력 6월, 공예왕후는 왕후로 간택되어 입궁하였다.[1]
2. 2. 이자겸의 난과 왕비 간택
1126년 이자겸의 난이 실패로 돌아가자 인종의 아내이자 이자겸의 두 딸( 폐지된 연덕궁주, 폐지된 복창궁주) 역시 폐출당하였다.공예왕후는 15세에 김인규의 아들 김지효(金之孝)와 혼인을 약속하였으나, 김지효가 신부집 문에 이르러 병이 발작하여 사경을 헤매었다. 이에 공예왕후의 아버지 임원후는 결혼을 물리고 점쟁이에게 점을 쳤는데, 점쟁이는 여인이 왕후가 될 운명이라고 말했다.[1] 그러나 이 소문이 당대의 세도가 이자겸의 귀에 들어갔다. 이자겸은 자신의 3녀(폐지된 연덕궁주)와 4녀(폐지된 복창궁주)를 왕후로 시집 보냈는데, 임원후의 딸이 왕후가 된다는 것은 자신과 가문의 몰락을 의미했으므로 임원후를 개성부사로 강직시켜 버렸다.
임원후는 이후 개성 대사로 추존되었다.
2. 3. 왕비 시절과 자녀들의 혼인
이자겸의 난이 일어나 이자겸의 일가가 몰락하고, 인종의 이모이자 왕비였던 이자겸의 두 딸이 폐출되면서, 뒤를 이어 임원후의 딸이 왕비가 되었다.[2] 1127년 왕비는 의종을 낳고 정식 왕후로 책봉되었다.몇 년 동안, 왕비는 1130년에 둘째 아들 왕경을, 1131년에 셋째 아들 왕호를, 1144년에 넷째 아들 왕탁을 낳았다. 1148년에는 마지막 아들인 왕충희를 낳았다. 다섯 아들 외에도 다섯 명의 딸을 두었다.
인종은 왕비를 매우 사랑하여 그녀의 출생지를 "장흥부"(長興府|장흥부중국어)에서 "지장흥부사"(知長興府事|지장흥부사중국어)로 높였다고 한다. 왕비의 어머니인 이씨 부인은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진한국대부인중국어)으로 불렸다.[3]
인종과 공예왕후의 자녀들은 다음과 같다.
이름 | 생몰년 | 배우자 | 비고 | ||
---|---|---|---|---|---|
1 | 의종 懿宗 | 현 晛 | 1127년 - 1173년 | 장경왕후 김씨[12] | 제18대 국왕 |
2 | 대령후 大寧侯 | 경 暻 | 1130년 - ? | 왕온의 2녀 | |
3 | 명종 明宗 | 호 晧 | 1131년 - 1202년 | 의정왕후 김씨[13] | 제19대 국왕 |
4 | 원경국사 元敬國師 | 충희 冲曦 | ? - 1183년 | 미혼 | |
5 | 신종 神宗 | 탁 晫 | 1144년 - 1204년 | 선정왕후 김씨[14] | 제20대 국왕 |
이름 | 생몰년 | 배우자 | 비고 | |
---|---|---|---|---|
1 | 승경궁주 承慶宮主 | 생몰년 미상 | 공화후 왕영[15] | 의종 11년(1157년) 이전 사망[16] |
2 | 덕녕궁주 德寧宮主 | ? - 1192년 | 강양공 왕감[17] | |
3 | 창락궁주 昌樂宮主 | ? - 1216년 | 신안후 왕성[18] | 고종의 외조모[19] |
4 | 영화궁주 永和宮主 | 1141년 - 1208년 | 소성후 왕공[20] |
인종과 공예왕후의 손자와 손녀들은 사촌간 혼인관계를 맺었는데, 이는 고려 시대에 나타나는 족내혼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 의종의 아들 효령태자는 덕녕궁주의 딸과 혼인하였고, 의종의 셋째 딸인 화순궁주는 승경궁주의 아들 광릉공 왕면과 혼인하였다.
- 명종의 아들 강종은 창락궁주의 딸인 원덕왕후와 혼인하여 고종을 낳았다.
- 명종의 장녀인 연희궁주는 창락궁주의 아들 영인후 왕진과 혼인하여 성평왕후를 낳았는데, 성평왕후는 신종의 아들인 희종의 왕비이다.
- 명종의 차녀인 수안궁주는 영화궁주의 아들 창화후 왕우와 혼인하여 딸을 낳았는데, 희종의 첫번째 태자비였으나 최충수에 의해 폐위되었다.[21]
2. 4. 무신정변과 엇갈린 운명
1170년 무신정변으로 의종이 퇴위당하고 명종이 즉위하면서 무신들에 의한 정치가 시작되어 공예왕후는 항상 마음을 졸이며 살았다.[4] 의종은 술에 자주 취했고, 이는 무신들의 분노를 더욱 자극했다. 공예왕후는 장남 의종의 이러한 행동을 알고 그의 자질에 대해 의문을 품었으며, 둘째 아들인 대령후를 총애하여 의종을 그로 교체하려 했다. 이를 알게 된 후, 공예왕후와 의종은 좋지 않은 관계를 맺게 되었고, 그녀의 둘째 아들과 공모한 자들은 1151년에 반란 사건에 연루되었다.사랑하는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왕후는 의종에게 동생에게 안전을 제공하도록 설득했지만, 의종은 과거 사건에 대한 실망감을 표했다. 그러자 그녀는 버선을 신고 궁궐 밖으로 나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맹세를 했다. 갑자기 하늘에서 천둥과 번개가 쳤고, 의종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다고 전해진다.
비록 공예왕후는 둘째 아들이 왕위를 계승하기를 바랐지만, 그는 정중부가 미래에 위협이 될 수 있다고 두려워하여 암살당했다. 정중부는 당시 진정한 지배자는 무신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약한 왕호(명종)를 선택했다. 명종의 치세 동안 왕후는 병이 들었고, 왕은 그의 동생 왕충희를 불러 그녀를 돌보게 했다. 그러나 사랑받는 왕충희는 1182년에 사망했고, 공예왕후는 자신이 신과 왕충희에게 살해당한 영혼들을 분노하게 했다고 생각하여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며칠 동안 병을 앓았다.[4] 1183년 (음력 11월)에 생을 마감하였다.
2. 5. 원경국사의 죽음과 말년
이자겸의 난 이후 인종의 왕비가 된 공예왕후는 1127년 의종을 낳고 왕후로 책봉되었다. 인종이 죽고 의종이 즉위하자 태후가 되었다. 1170년 무신정변으로 의종이 퇴위되고 명종이 즉위하면서 무신들에 의한 정치가 시작되어 항상 마음을 졸이며 살았다.[5]1182년(명종 12년) 넷째 아들 원경국사 충희가 사망하였을 때 무신들에 의해 화를 당한 것이라 생각하고 충격을 받아 병을 얻었다. 평양공(平壤公) 신종이 치질로 오랫동안 문안을 드리지 못하자, 아들이 형 충희와 같은 노여움을 샀다고 생각했다. 1년 후, 왕탁은 병이 나아 명종의 명에 따라 문안을 드리고 위로했다.[5]
1183년(명종 13년) 음력 11월에 생을 마감하였다. 능호는 순릉(純陵)이다.[6] 1184년, 금나라의 세종 황제는 조의를 표하기 위해 고려에 조공을 보냈다.[7]
3. 가족 관계
아버지 | 임원후 (1089년 ~ 1156년) |
---|---|
어머니 | 진한국대부인 부평 이씨 ( ? ~ 1138년) |
형제자매 | |
남편 | 인종 왕해 (1109년 ~ 1146년) |
시부모 | |
자녀 |
4. 대중 매체
참조
[1]
웹사이트
http://db.history.go[...]
2021-09-03
[2]
웹사이트
http://db.history.go[...]
2021-09-03
[3]
웹사이트
http://encykorea.aks[...]
2021-07-03
[4]
웹사이트
http://db.history.go[...]
2021-09-03
[5]
웹사이트
http://db.history.go[...]
2021-09-03
[6]
웹사이트
http://db.history.go[...]
2021-09-03
[7]
웹사이트
http://db.history.go[...]
2021-09-03
[8]
서적
고려사
[9]
서적
고려사
[10]
서적
고려사
[11]
웹사이트
부평이씨 대종회
http://www.bplee.net[...]
[12]
문서
강릉공 왕온의 장녀
[13]
문서
강릉공 왕온의 3녀
[14]
문서
강릉공 왕온의 4녀
[15]
문서
강릉공 왕온의 장남
[16]
문서
왕영의 딸 왕씨묘지명(王瑛女王氏墓誌銘, 1185년)
[17]
문서
숙종의 5남 대원공의 아들
[18]
문서
예종의 장녀 승덕공주의 아들
[19]
문서
창락궁주 → 원덕왕후 → 고려 고종
[20]
문서
고려 숙종의 증손자
[21]
서적
고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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