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비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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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전비행장은 한국 전쟁 중 대전 지역에서 주요하게 사용된 비행장으로, 1950년 7월 미군의 초기 전방 항공 통제 임무 수행 장소였다. 7월 중순, 금강 방어선이 붕괴된 후 미군은 대전 비행장을 방어했으나, 북한군의 공격으로 점령당했다. 이후 인천 상륙 작전 이후 UN군의 반격으로 1950년 9월 28일 탈환되었다. 1980년대 대전시에 흡수되어 현재는 상업 및 주거 지역으로 개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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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비행장 | |
|---|---|
| 비행장 정보 | |
| 이름 | 대전비행장 (K-5 공군 기지) |
| 종류 | 군용 비행장 |
| 위치 | 대전광역시 인근 |
| 좌표 | 36°21′28.8″N 127°23′42″E |
| 건설 시기 | 1940년대 |
| 건설 주체 | 불명 |
| 사용 시기 | 1940년대-1980년대 |
| 폐쇄 여부 | 폐쇄됨 |
| 소유 | 불명 |
| 관리 | 미국 공군 대한민국 공군 |
| 주둔 부대 | 불명 |
| 지휘관 | 불명 |
| 점유 부대 | 불명 |
| 전투 | 대전 전투 |
| 사건 | 불명 |
2. 한국 전쟁
1950년 7월 9일, 제임스 A. 브라이언트와 프랭크 G. 미첼 중위는 대전(태전)에서 한국 전쟁 최초의 FAC 임무를 수행했으나, 무전기 문제로 대구로 이동했다.[2]
오산 전투, 평택 전투, 천안 전투에서 패배한 미군 제24 보병사단은 금강 방어선이 조선인민군(KPA)에 돌파되자 대전(태전)으로 후퇴했다.[3] 1950년 7월 18일, 제8군 사령관 월턴 워커 중장은 윌리엄 딘 소장에게 대전 사수를 지시했다.[4] 다음날 KPA는 조선인민군 공군(KPAF) Yak-9 전투기 6대 등의 지원을 받으며 대전 외곽을 공격, 7월 19일/20일 밤 대전 시와 비행장을 점령했다. 1950년 7월 20일 오후, 제24 보병사단 잔여 병력은 옥천과 영동으로 철수했다.[4]
이후 UN군은 제공권을 확보, KPAF는 대전 비행장을 제한적으로만 사용했다. 대전 비행장은 인천 상륙 작전 이후 UN군의 부산 교두보 돌파 작전 중 1950년 9월 28일 제24 보병사단에 의해 탈환되었다.[5][6]
2. 1. 초기 항공 통제 임무 (1950년 7월)
1950년 7월 9일, 제임스 A. 브라이언트와 프랭크 G. 미첼 중위는 한국 전쟁 최초로 대전에서 FAC 임무를 수행했다. 이들은 VHF 무선 장치가 장착된 L-5G 센티넬 두 대를 타고 대전에 도착했지만, 무전기를 작동시킬 수 없었다. 24 보병사단의 L-17s 두 대를 빌린 이 중위들은 진격하는 조선인민군(KPA) 부대에 대해 약 10번의 F-80s 출격을 요청했다.[2] L-17s는 곧 AN/ARC-3 무선 세트가 장착된 T-6s로 교체되었으며, 며칠 동안 그 가치를 입증한 후 대구로 작전을 옮겼다.[2]2. 2. 대전 전투 (1950년 7월)

오산, 평택, 천안에서 패배한 후, 미군 제24 보병사단은 태전(현재의 대전) 북쪽 금강에 방어선을 구축했다.[3] 1950년 7월 14일, 조선인민군(KPA)은 금강 방어선을 공격했고, 7월 16일까지 미군 방어선을 돌파하여, 잔여 미군 부대는 태전으로 후퇴했다.[3]
1950년 7월 18일, 제8군 사령관 중장 월턴 워커는 태전에 도착하여 제24 사단장 소장 윌리엄 딘에게 제1 기병사단이 포항에서 이동할 수 있을 때까지 태전을 사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4]
7월 19일, KPA는 비행장을 포함한 태전 외곽을 공격했으며, 이 공격은 6대의 조선인민군 공군(KPAF) Yak-9 전투기와 강력한 포병 지원을 받았다.[4] 비행장은 혼성 대대로 통합된 사단 포병대와 34 보병연대 제3대대가 방어했다.[3] 혼성 대대는 태전 시 남쪽으로, 34 보병연대 제3대대는 시 북쪽으로 철수했다.[4] 7월 19일/20일 밤, 전차 지원을 받은 KPA 부대가 태전 시를 포위하고 비행장을 점령한 후 이른 아침부터 시내 중심부를 공격하기 시작했으며, 제24 보병사단의 잔여 병력은 7월 20일 오후 옥천과 영동으로 철수했다.[4]
2. 3. 대전 비행장 탈환 (1950년 9월)
인천 상륙 작전 이후, 유엔군이 부산 교두보에서 돌파 작전을 펼치던 중, 1950년 9월 28일 미군 제24 보병사단이 대전을 탈환하였다.[5][6] 이 작전의 성공은 한국 전쟁의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대한민국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하기 위한 중요한 발판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3. 한국 전쟁 이후

1980년대에 대전비행장은 대전시에 흡수되었고, 현재는 상업 및 주거 지역으로 개발되었다.
3. 1. 대전시 편입 및 개발
1980년대에 대전비행장은 대전시에 흡수되었고, 현재는 상업 및 주거 지역으로 개발되었다. 대전 전투 기념비가 있는 보라매공원은 과거 대전비행장이 있던 곳이다. 이러한 변화는 군사 시설이 시민들을 위한 공간으로 탈바꿈한 것으로, 대전 지역 발전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받는다.[1]3. 2. 대전 전투 기념
대전 비행장은 1980년대에 대전시에 흡수되었고, 현재는 상업 및 주거 지역이 되었다.
참조
[1]
서적
The Korean War
University of Nebraska Press
[2]
서적
The United States Air Force in Korea, 1950-1953
https://media.defens[...]
Air Force History & Museums Program
[3]
서적
KIMH
[4]
서적
KIMH
[5]
서적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https://history.army[...]
U.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
[6]
서적
KIM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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