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평의회 (잉글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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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평의회는 10세기 앵글로색슨 시대부터 17세기까지 잉글랜드 왕국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자문 기관이다. 앵글로색슨 시대에는 왕위 계승, 법 제정, 외교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노르만 왕조 시대에는 국왕의 자문 기관으로 기능하며 법률 제정에도 관여했다. 플랜태저넷 왕조 시대에는 과세에 대한 동의를 얻는 역할을 하면서 대표성을 강화했고, 마그나 카르타를 통해 왕의 권한을 제한하는 데 기여했다. 15세기 말 이후에는 소집되지 않다가, 1640년 찰스 1세에 의해 마지막으로 소집되었으며, 이후 재소집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마그눔 콘실리움la은 10세기에 여러 작은 앵글로색슨 왕국들이 통일된 잉글랜드 왕국을 형성하면서 시작되었다.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에서 왕은 귀족과 고위 성직자로 구성된 토론회인 위탄을 열었다.
정복왕 윌리엄(윌리엄 1세)은 1066년 노르만 정복 이후 국가 현안을 논의하고 국가 재판을 수행하며 법을 제정하기 위해 고위 귀족들의 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는 magnum conciliumla(대평의회)라고 불렸으며, 법률은 법전이 아닌 영장 형태로 바뀌었다.[1] 국왕은 친밀한 조언을 구할 수 있었지만, 이는 합의 형성에 대한 필요성을 대체할 수 없었고, 친밀한 조언에만 의존하는 것은 정치적 불안정을 초래할 수 있었다.
2. 앵글로색슨 시대의 위탄 (10세기)
2. 1. 위탄의 구성과 기능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에서 왕은 귀족과 고위 성직자로 구성된 토론회인 위탄을 열었다. 위탄은 주교, 수도원장, 엘더맨, 테인 등 25명에서 수백 명이 참가하는 회의였다.[1] 크리스마스, 부활절, 성령 강림절 등 세 번의 축제 기간과 그 외 시기에 정기적으로 개최되었다. 이전에는 왕들이 이동식 궁정을 통해 귀족들과 교류했지만, 왕국의 규모가 커지면서 이는 비실용적이 되었다. 귀족들이 위탄에 참석하기 위해 왕에게 오는 것은 왕국 통제의 중요한 대안이었다.[1]
위탄은 여러 기능을 수행했다. 특히 왕위 계승 분쟁 시 왕을 선출하는 역할을 했으며, 왕위 즉위식과 맞물려 왕권 과시의 장이 되기도 했다. 또한 탄원서를 접수하고 영주들 간 합의를 이루는 창구였다. 왕은 장원 부여 등 후원을 베풀었고, 이는 참석자들이 증명하고 동의한 앵글로색슨 헌장에 기록되었다. 주교직이나 엘더맨직 등 공직 임명도 위탄 기간에 이루어졌다. 전쟁 개시 및 조약 체결과 같은 중요한 정치적 결정 역시 위탄과의 협의를 거쳤다. 위탄은 왕이 앵글로색슨법 법전을 제정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왕이나 주요 영주와 관련된 사건 등 중요한 사건의 재판정 역할도 수행했다.
2. 2. 앵글로색슨 법과 위탄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에서 왕은 귀족과 고위 성직자로 구성된 토론회인 위탄을 열었다. 이 회의는 주교, 수도원장, 엘더맨, 테인 등 25명에서 수백 명이 참가했다.[1] 위탄은 왕이 앵글로색슨법 법전을 제정하도록 도왔고, 왕이나 중요한 영주와 관련된 사건에 대한 법정 역할도 했다.
3. 노르만 왕조 시대의 마그눔 콘실리움 (1066년 ~ 1154년)
3. 1. 마그눔 콘실리움의 구성과 정치적 역할
정복왕 윌리엄(윌리엄 1세)은 1066년 노르만 정복 이후에도 국가 현안 논의, 국가 재판 수행, 법 제정을 위해 고위 귀족 회의를 소집하는 전통을 이어갔다. 이 회의는 magnum conciliumla(마그눔 콘실리움, 대평의회)이라고 불렸다.[1] 법률은 이제 법전이 아닌 영장의 형태로 바뀌었다.[1] 국왕은 친밀한 조언을 구할 수 있었지만, 사적인 조언은 합의 형성에 대한 필요성을 대체할 수 없었고, 이에 대한 과도한 의존은 정치적 불안정을 초래할 수 있었다. 대평의회는 "정치적 위험이 적고, 책임을 더 광범위하게 공유할 수 있으며, 더 많은 수의 고위 성직자와 귀족들을 의사 결정에 참여시킬 수 있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었다.
평의회 구성원은 국왕의 수석 영주들이었다. 대주교, 주교, 수도원장, 백작, 남작과 같은 주요 영주들은 개별 영장에 의해 소환되었지만, 때로는 하급 영주들도 셰리프에 의해 소환되었다. 정복 이후(1066–1154) 시대의 정치는 국왕과 주요 성직자 외에 약 200명의 부유한 평신도들이 지배했다. 고위 성직자(주교 및 수도원장)는 그 자체로 중요한 귀족이었다. 둠즈데이 북에 따르면, 잉글랜드 교회는 1066년에 모든 토지의 25%에서 33%를 소유했다.
각주
4. 플랜태저넷 왕조 시대의 발전 (1154년 ~ 1215년)
1066년 노르만 정복 이후, 정복왕 윌리엄은 고위 귀족들의 회의를 소집하여 국가 현안을 논의하고, 국가 재판을 수행하며, 법을 제정하는 전통을 이어갔다. 이 회의는 magnum conciliumla(대평의회)라고 불렸다. 국왕은 측근에게 조언을 구할 수 있었지만, 이러한 개인적인 조언은 합의를 대신할 수 없었고, 측근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면 정치적으로 불안해질 수 있었다. 대평의회는 "정치적 위험이 적고, 책임을 더 광범위하게 공유할 수 있으며, 더 많은 수의 고위 성직자와 귀족들을 의사 결정에 참여시킬 수 있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었다.
평의회 구성원은 국왕의 수석 영주들이었다. 대주교, 주교, 수도원장, 백작, 남작과 같은 주요 영주들은 개별 영장에 의해 소환되었고, 때로는 하급 영주들도 셰리프에 의해 소환되었다. 정복 이후(1066–1154) 시대의 정치는 국왕과 주요 성직자 외에 약 200명의 부유한 평신도들이 지배했다. 둠즈데이 북에 따르면, 잉글랜드 교회는 1066년에 모든 토지의 25%에서 33%를 소유했다.
전통적으로 대평의회는 과세에 관여하지 않았다. 왕실 재정은 토지 수입, 봉건적 부조와 부수적 이익, 그리고 왕실 재판의 이익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헨리 2세 통치 말기, 제3차 십자군 자금 조달, 리처드 1세의 몸값 지불, 플랜태저넷 왕가와 카페 왕가 사이의 영불 전쟁 자금 조달 등의 필요성으로 인해 변화가 일어났다. 1188년 헨리 2세는 평의회로부터 살라딘의 십일조 징수에 대한 동의를 얻었고, 이후 과세에 대한 귀족들의 동의를 얻는 선례가 확립되었다. 이 과정에서 평의회는 왕국의 납세자를 대신하여 동의하는 대표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으며, 이는 남작과 왕실 사이의 새로운 정치적 긴장을 야기했다.
존 왕 시대에 이르러서는 왕의 과도한 재정 요구와 권한 남용으로 귀족들의 불만이 커졌고, 이는 마그나 카르타 체결로 이어졌다.
4. 1. 마그나 카르타와 마그눔 콘실리움의 권한 강화 (1215년)
존 왕은 정의를 공정하게 처리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많은 세금을 요구했으며, 봉건 제도 아래서 왕에게 주어진 여러 권리들을 남용하여 귀족들의 미움을 샀다. 1215년, 귀족들은 존 왕에게 이전 왕들이 발표했던 자유 헌장들을 따르도록 강요했다(자유 헌장 참조).[1] 마그나 카르타(대헌장)로 알려진 이 문서는 의회 발전에 중요한 세 가지 원칙을 담고 있다.# 왕도 법을 따라야 한다.
# 왕은 (관습적인 봉건적 의무를 제외하고) "왕국 공동체"의 동의 없이는 법을 만들거나 세금을 부과할 수 없다.
# 신하가 왕에게 충성할 의무는 조건부이며,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비록 이후 발행된 문서들에서는 "공동 평의회 없이는 과세하지 않는다"는 조항이 빠졌지만, 이 원칙은 계속 지켜졌다. 마그나 카르타는 왕에게 조언을 해야 하는 봉건적 의무를 동의할 권리로 바꾸었다. 헌장에 보장된 자유는 "우리 왕국의 모든 자유민"에게 주어졌지만, 실제로 이들을 대표하는 사람들은 평의회에 참석한 귀족들이었다.
5. 13세기 이후 의회로의 발전
헨리 3세 통치 기간 동안 대평의회 회의는 ''의회''라고 불리기 시작했는데, 이는 11세기 말 프랑스어 parlement|파를르망프랑스어에서 시작되어 회담 또는 대화의 의미로 사용되었다.[1] 헨리의 아들인 에드워드 1세 통치 기간 동안 잉글랜드 의회는 계속 발전했다.
6. 튜더 왕조와 스튜어트 왕조 시대 (15세기 말 ~ 17세기)
헨리 7세는 15세기 말에 대평의회(마그눔 콘실리움)를 여섯 차례 소집했지만, 그 이후에는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찰스 1세는 1640년 가을, 단기 의회를 해산하고 스코틀랜드와의 주교 전쟁에서 패배한 후, 수 세대 만에 처음으로 대평의회를 소집했다. 대평의회는 찰스 1세에게 군대 지불을 위해 200000GBP의 대출을 보장했고, 스코틀랜드와 협상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대평의회는 고대 통치 역할을 재개하는 것을 거부하고 대신 장기 의회를 소집하도록 찰스 1세에게 촉구했고, 이 의회는 이후 잉글랜드 내전의 주역이 되었다. 스튜어트 왕정 복고 이후 부활한 군주는 대평의회를 재창설하지 않았고, 그 이후로 대평의회는 열리지 않았다.
7. 현대의 재소집 논의
2008년, 제5대 글래너스크 남작인 크리스토퍼 러셀 베일리는 1999년 상원법에 따라 세습 귀족들이 상원에서 의석을 잃었기 때문에 대평의회(Magnum Concilium)를 소집할 때가 되었다고 제안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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