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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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문은 덕수궁의 정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건물이다. 1897년 아관파천 이후 경운궁이 정궁으로 사용되면서 동문이었던 대안문(大安門)이 정문 역할을 시작했다. 1904년 화재 이후 1906년 수리하며 대한문(大漢門)으로 개칭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태평로 확장으로 이전 논의가 있었으나, 1970년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대한문 권역에는 금천, 금천교, 조원문, 원수부, 평장문, 광명문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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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문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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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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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 대한민국 |
위치 |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정동 5-1) |
시대 | 미상 |
상태 | 복원됨 |
원어 건물 명칭 | 大漢門 |
역사 | |
원래 명칭 | 대안문 (大安門) |
변경 이력 | 1906년: 대한문으로 개칭 |
설명 | |
특징 | 덕수궁의 정문 |
2. 역사
대한문은 원래 경운궁(현재의 덕수궁)의 동쪽 문이었던 대안문(大安門)에서 시작되었다. 아관파천 이후 고종이 경운궁을 정궁으로 사용하면서 궁궐 시설을 확충하는 과정에서 지어졌다. 대안문은 1899년 3월경 현판을 걸고 월대 공사를 시작한 기록으로 보아[7] 이 무렵 완공된 것으로 추정되며, 처음부터 정문 역할을 염두에 두고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8]
1904년 덕수궁에 큰 화재가 발생하여 주요 전각들이 소실되었고, 이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대안문도 수리되었다. 1906년 고종은 대안문의 이름을 대한문(大漢門)으로 바꾸라는 명을 내렸으며,[11] 이는 수리 과정에서 현판 교체로 이어졌다.[12] 상량문에는 '한(漢)' 자가 '하늘' 또는 '은하수'를 의미한다고 밝히고 있어,[2][13] 대한제국의 위상과 자주독립 의지를 담은 이름으로 해석된다. 이로써 대한문은 덕수궁의 정문이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대한문은 3·1 운동의 중요한 역사적 현장이었다.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만세 시위 군중의 일부가 대한문 앞에 모여 문을 통해 궁 안으로 들어가 고종의 빈전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14] 광복 이후, 1968년 시작된 태평로 확장 공사로 인해 대한문 이전이 결정되었고, 주변 궁장이 먼저 철거되면서 한동안 문만 남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결국 1970년 11월, 대한문은 원래 위치에서 33m 뒤쪽으로 옮겨져 현재의 자리에 위치하게 되었다.[15]
2. 1. 대안문 시절

경운궁이 정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아관파천 이후이다. 이전까지 경운궁은 왕궁으로 사용되지 않아 즉조당과 석어당만 남아있었는데, 1896년 고종의 지시로 개수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남쪽에 있던 인화문(仁化門)을 정문으로 사용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1896년 11월 19일에 민병석을 인화문 현판 서사관으로 임명한 기록이 있어[3], 인화문은 1896년 경운궁 개수 공사 때 착공된 것으로 추정된다. 인화문의 위치는 훗날 지어질 정전인 중화전과의 축을 맞추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중화전은 1901년에야 착공되었고, 완공 전까지 고종은 즉조당의 편액을 태극전(泰極殿)으로 바꾸어 정전 대신 사용했다.[4]
경운궁의 동쪽 문이었던 대안문(大安門)이 언제 지어졌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1898년 6월 26일에 민병석을 대안문 현판 서사관으로 임명한 기록이 있어[5][6] 이 무렵 공사가 진행 중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899년 3월 3일에는 현판을 걸고 월대(月臺) 공사를 시작했다.[7] 월대는 궁궐의 정문에만 설치하는 시설물이므로, 대안문은 처음 지을 때부터 정문 역할을 염두에 두었음을 알 수 있다.[8] 1902년 6월에는 대안문 안쪽에 연못을 만들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는 등[9] 대안문 주변 공사는 1902년까지 계속되었다.
1902년부터는 정문-중문-정전으로 이어지는 삼문(三門) 체제를 갖추기 위해 중화문(中和門)과 조원문(朝元門)을 짓기 시작했다. 이때 대안문(정문)과 중화문(중문)을 연결하기 위해 조원문(외문)을 동쪽으로 약간 틀어서 지었다.[10] 외문인 조원문의 방향이 동쪽으로 틀어지면서, 경운궁은 경복궁처럼 남북을 중심축으로 하는 전형적인 궁궐 배치 대신 창덕궁처럼 동서 방향의 축을 일부 가지게 되었다.
2. 2. 덕수궁의 정문이 되다

1904년 덕수궁에 큰 화재가 발생하여 중화전과 중화문 등이 불탔다. 1906년 이를 다시 지으면서 기존의 정문이었던 대안문도 함께 수리하였다. 대한제국 고종은 양력 4월 25일, 대안문의 이름을 대한문(大漢門)으로 바꾸라는 명령을 내렸고,[11] 이에 따라 수리 과정에서 현판을 교체하였다.[12]
수리는 12일 만에 완료되었으며, 상량식과 함께 이근명이 지은 상량문을 올렸다. 상량문에는 "한양이 억만 년 이어갈 터전에 자리하였으니, 문의 이름을 특별히 건다"(漢都奠萬億之基, 門號特揭)라는 구절이 있다. 또한 "중화문을 법전으로 삼고 대한문을 정문으로 삼는다"(中和法殿乃立大漢正門)고 명시하여 대한문이 덕수궁의 새로운 정문이 되었음을 분명히 했다.
특히 상량문은 대한문의 '한(漢)' 자가 "소한(霄漢)과 운한(雲漢)의 뜻을 취한 것", 즉 '하늘' 또는 '은하수'를 의미한다고 밝히고 있다.[2][13] 이는 대한제국의 황제국으로서의 위상과 자주독립 의지를 담은 이름으로 해석된다.
2. 3. 일제강점기와 광복 이후

일제강점기에 태평로를 확장하면서 대한문을 이전하려는 논의가 있었지만, 실제로 옮겨지지는 않았다.
대한문은 3·1 운동 당시 중요한 역사적 현장이었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승하하자 덕수궁 함녕전에 빈전과 혼전이 마련되었고, 인산일은 3월 3일로 정해졌다.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시위 군중 중 일부는 매일신보 사옥을 거쳐 대한문 앞으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대한문을 통해 궁 안으로 들어가 함녕전 고종의 혼전에 세 번 절하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14]
광복 이후, 1968년 2월 태평로 확장 공사 과정에서 문화재관리위원회가 대한문을 뒤로 옮기기로 결정했으나 바로 실행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주변 궁장들이 먼저 철거되면서 대한문만 길 가운데 섬처럼 남게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결국 1970년 11월, 대한문은 원래 위치에서 33m 뒤쪽으로 옮겨져 현재의 자리에 위치하게 되었다.[15]
3. 구조와 기능
대한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단층 문이다. 건축 양식은 다포식 공포와 우진각지붕을 특징으로 하며, 겹처마 구조를 갖추고 있다. 공포는 외이출목과 내삼출목으로 짜여 있으며, 안쪽 공포 판형 부재의 끝부분에는 구름 모양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다. 기둥은 세 줄의 평주(平柱)로 이루어져 있고, 천장은 가운데 칸이 서까래를 노출시킨 연등천장인 반면 양쪽 칸은 소란반자로 마감되었다. 현재 걸려 있는 현판의 글씨는 남정철이 쓴 것이다. 대한문은 덕수궁의 정문으로서 기능한다.[16]
4. 대한문 권역
경운궁이 정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아관파천 이후이다. 이전까지 경운궁은 왕궁으로 사용되지 않아 즉조당과 석어당만 남아있었는데, 1896년 고종의 지시로 개수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인화문을 정문으로 사용했는데, 1896년 11월 19일에 민병석을 인화문현판서사관으로 임명하는 등 1896년 경운궁을 개수할 때 착공된 것으로 추정된다.[3] 인화문의 위치는 덕수궁 남쪽이었는데, 정전인 중화전의 건설을 염두에 두고 중화전과 정문을 일직선상에 놓기 위해 설계한 것으로 추정한다. 중화전의 착공은 1901년에 이루어졌으며, 완공 전까지 고종은 즉조당의 편액을 태극전(泰極殿)으로 바꾸어 정전 대용으로 사용했다.[4]
경운궁의 동문이었던 대안문(大安門)의 영건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1898년 6월 26일에 민병석을 현판서사관으로 임명한 사실이 확인되어 그 즈음 공사가 진행중이었던 것으로 본다.[5][6] 이후 1899년 3월 3일에 현판을 올리고 월대 공사를 시작했다.[7] 월대는 궁궐의 정문만이 갖출 수 있는 부속으로, 대안문은 처음부터 정문을 염두에 두고 설계되었다.[8] 1902년 6월에 대안문 안에 연지(蓮池)를 조성하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는 등 대한문 권역의 공사는 1902년까지 지속되었다.[9]
1902년에 삼문체제를 갖추기 위해 중화문과 조원문(朝元門)을 건축하기 시작했는데, 대안문과 중화문 사이를 잇기 위해 조원문을 동측으로 틀어 짓기 시작했다.[10] 외문인 조원문의 방향이 틀어짐에 따라 경운궁은 경복궁처럼 전형적인 남북방향 축이 아닌 창덕궁처럼 동서의 축을 갖게 되었다.
정문인 대한문의 권역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4. 1. 금천
경운궁이 처음 황궁으로 사용될 때는 인화문이 정문이었고 중문은 돈례문이었다. 따라서 금천은 인화문과 돈례문 사이에 흘렀다. 1901년 중화전을 지으면서 인화문을 헐고 대안문(현재의 대한문)을 정문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자, 정릉동천의 물길을 옮겨 대안문과 조원문 사이에 금천을 새로 만들었다. 이 금천은 일제강점기에 복개되었다가 1986년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에 의해 복원되었다.4. 1. 1. 덕수궁 금천교
대한문에서 조원문을 향하는 어도(御道) 중간에 금천을 건너기 위해 만들어진 돌다리이다. 금천은 두 갈래로 흐르다 합쳐지는 정릉동천의 한 물줄기가 정동에서 발원하는데, 이 물줄기의 흐름을 약간 바꾸어 덕수궁을 관통하도록 만든 것이다. 금천교는 2개의 나란한 홍예교로 이루어져 있다.4. 2. 조원문
조원문(朝元門)은 대한문에서 중화전으로 들어가는 어도에 있던 외문이다. 1902년에 짓기 시작하였고, 1904년 화재 때도 소실되지 않고 남아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훼철되었다.4. 3. 원수부
원수부(元帥府)는 1899년 대한제국의 고종 황제가 군 통수권을 강화할 목적으로 설치한 기관이다. 원수부는 국방과 용병, 군사에 관한 명령을 황제가 직접 내리고, 수도와 지방의 모든 군대를 지휘하고 감독하는 역할을 맡았다. 위치는 대한문 바로 북쪽이었으며, 건물 두 채로 이루어져 있었다.4. 4. 광명문
조원문 북측의 행각에 나 있던 광명문(光明門)은 황제의 침전인 함녕전의 정문이다.참조
[1]
뉴스
현판이 전하는 덕수궁 역사…'대한문'은 '대안문'이었다
https://www.yna.co.k[...]
연합뉴스
2018-11-25
[2]
웹인용
"[궁궐의 현판과 주련-덕수궁_궁문]"
https://www.cha.go.k[...]
2022-12-08
[3]
간행물
대한제국 관보 제0488호, 建陽元年十一月廿三日 月曜
1896-11-23
[4]
논문
《[[고종실록]]》 고종 34년 10월 7일 (양력)
[5]
논문
《[[각사등록]]》 〈궁내부래문〉 25, 광무 3년 2월 8일
[6]
뉴스
황성신문 1898년 2월15일
1898-02-15
[7]
뉴스
독립신문 1899년 3월3일
1899-03-03
[8]
서적
덕수궁/시대의 운명을 안고 제국의 중심에 서다
문화재청
2010
[9]
논문
《각사등록》 〈각부청의서존안〉 21, 광무 6년 6월 28일
[10]
논문
《중화전영건도감의궤》 〈조칙〉, "中和殿外三門門號朝元"
[11]
논문
《[[승정원일기]]》 고종 43년 병오(1906) 4월 2일(기해, 양력 4월 25일) 맑음
[12]
논문
《경운궁중건도감의궤》 〈시일〉
[13]
웹인용
慶運宮重建都監儀軌
https://kyudb.snu.ac[...]
2022-12-08
[14]
웹인용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
2022-12-10
[15]
웹인용
덕수궁 대한문(德壽宮大漢門)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
2022-12-08
[16]
웹인용
덕수궁 대한문(德壽宮大漢門)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
2022-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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