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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도 다카쓰구 (16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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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도 다카쓰구는 1602년 이요 이마바리 번주 도도 다카토라의 적남으로 태어나, 1630년 아버지의 사망 후 쓰 도메인의 2대 다이묘가 되었다. 그는 에도성의 재건과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묘소 건설 등 막부의 대규모 공사에 참여했으나, 이로 인해 쓰번의 재정이 악화되었다.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어려움이 지속되었고, 1669년 장남 도도 다카히사에게 지위를 물려주고 은거한 후 1676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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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도 다카쓰구 (1602년)
인물 정보
도도 다카쓰구 초상
이름도도 다카쓰구
국적일본
시대에도 시대 전기
출생게이초 6년 윤11월 11일 (1602년 1월 4일)
사망엔포 4년 11월 16일 (1676년 12월 20일)
묘소미에현 쓰시의 간쇼인
미에현 이가시의 조교지
관위종4위하, 좌근위권소장, 이즈미노카미
주군도쿠가와 이에미쓰 → 이에쓰나
씨족도도 씨
아버지도도 다카토라
어머니쇼주인 (초 렌큐의 딸)
형제자매다카쓰구, 다카시게, 여동생 (가모 다다사토 정실, 후에 센슈지교초 실), 여동생 (도도 다다스에 실), 여동생 (오카베 가쓰라카타 실), 여동생 (이코마 마사토시 실), 여동생 (고보리 마사카즈 실), 의형: 다카요시
배우자사카이 다다요의 딸
자녀다카히사, 다카미치, 다카카타, 오사와 모토쓰네, 다카치카, 이시히메, 딸 (교고쿠 다카카즈 정실), 딸 (안도 시게유키 정실), 딸 (센슈지교엔 실), 딸 (이시카와 마사요시 정실), 딸 (이이 나오타케 정실)
다이묘 정보
이세 쓰번 번주
역대쓰 번 번주
임기 시작1632년
임기 종료1669년
이전도도 다카토라
이후도도 다카히사
기타 정보
초기 이름다이스케 (어린 시절 이름) → 다카쓰구

2. 생애

쓰 도메인의 다이묘였던 도도 다카토라는 아들이 없어, 니와 나가히데의 아들을 양자로 삼아 도도 다카요시라는 이름을 주었다. 그러나 다카토라는 46세에 늦둥이 아들 다카쓰구를 얻었고, 1630년 아버지 다카토라가 사망하자 쓰 도메인의 2대 다이묘가 되었다.

다카쓰구는 1669년 장남 도도 다카히사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하였으며, 1676년에 사망했다.

2. 1. 출생과 가독 상속

게이초 6년(1602년), 도도 다카토라이요 이마바리번의 번주였을 때 그의 적남으로 태어났다. 다카토라는 친자가 잘 생기지 않아 니와 나가히데의 아들을 양자로 들여 다카요시라 하였다. 간에이 7년(1630년), 다카토라가 46세에 친아들 다카쓰구가 태어나고 다카토라가 병사하자 다카쓰구가 뒤를 이었다. 간에이 13년(1636년), 다카요시는 다카쓰구의 명으로 이가 나바리로 전봉되어 나바리 도도가를 일으켰다. 다카쓰구는 다카요시를 자신의 지위를 위협하는 존재로 여겨 교호 연간까지 나바리 도도가와 본가 사이에 대립이 있었다.

2. 2. 막부의 공사 참여와 번 재정 악화

1632년, 도쿠가와 막부는 다카쓰구에게 에도성 제2 구루와 재건을 명했다. 이어서 1639년에는 화재로 소실된 에도성 혼마루(본성) 재건, 1652년에는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묘소인 닛코 도쇼구 건설을 맡았다. 1654년에는 쓰번성하 마을가 대화재로 불타 큰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막대한 지출로 인해 쓰번은 신전 개발과 다양한 재정 개혁을 통해 수입을 늘리려 노력했으나, 사실상 파산 상태에 이르렀다. 번의 재정난은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2. 3. 재정 재건 노력과 한계

도도 다카토라는 아들이 없어 니와 나가히데의 아들을 양자로 삼았다가, 46세에 늦둥이 아들 다카쓰구를 얻었다. 1632년 다카토라 사후, 다카쓰구는 쓰 도메인의 2대 다이묘가 되었다. 양아들 다카요시는 시코쿠 섬 이마바리로 보내졌다가, 1636년 다카쓰구에 의해 다시 소환되어 이세국 도도 씨 본가를 이끌게 되었다.

1632년, 도쿠가와 막부로부터 에도성 제2 구루와 재건을 맡았다.[1] 1639년에는 화재 후 에도성 혼마루(본성) 재건, 1652년에는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묘소인 닛코 도쇼구 건설이 이어졌다.[1] 1654년에는 성하 마을인 쓰가 대화재로 불타는 등[1] 막대한 지출로 인해, 새로운 논 개발과 다양한 재정 개혁을 통해 수입을 늘리려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파산했다.[1] 도메인의 어려운 재정 상황은 그 역사 전반에 걸쳐 문제가 되었다.[1] 다카쓰구는 연공 증수에 의한 재정 재건을 꾀하여 신전 개발을 적극적으로 장려하는 등의 개혁에 힘썼으나, 에도 막부의 보신 비용을 적극적으로 부담했기 때문에 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

2. 4. 이복 형과의 갈등

도도 다카토라는 아들이 없어 니와 나가히데의 아들을 양자로 삼아 다카요시라는 이름을 주었다. 그러나 다카토라는 46세에 친아들 다카쓰구를 얻었고, 1630년 다카토라가 사망하자 다카쓰구가 쓰 번의 2대 다이묘가 되었다. 자리를 잃은 다카요시는 1632년 이마바리에서 이세국으로, 1636년에는 이가 나바리로 전봉되어 나바리 도도가를 일으켰다. 다카쓰구는 자신의 지위를 위협하는 존재로 다카요시를 위험시하여 교호 연간까지 나바리 도도가와 본가의 대립이 이어졌다.[1]

2. 5. 은거와 죽음

1669년(간분 9년), 다카히사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하였다. 1676년 12월 20일(엠포 4년 11월 16일)에 사망했다.

도도 다카쓰구의 묘 (쓰시 간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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