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도 다카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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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도 다카토라는 1556년 오미국에서 태어난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까지 활약한 무장이다. 그는 여러 다이묘를 섬기며 실력과 외교 능력을 발휘했고,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조선 수군과 싸웠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귀순하여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공을 세웠으며, 이세 쓰 번의 번주를 거쳐 32만 석의 영지를 다스렸다. 그는 뛰어난 축성 기술과 내정 능력을 보여주었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에도 막부 시대의 중요한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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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도 다카토라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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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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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도도 다카토라 |
일본어 이름 | 藤堂 高虎 |
로마자 표기 | Tōdō Takatora |
출생일 | 1556년 2월 16일 |
출생지 | 도도 마을, 오미 국, 일본 |
사망일 | 1630년 11월 9일 |
사망지 | 에도, 일본 |
어린 시절 이름 | 요키치 |
통칭 | 요에몬 |
계명 | 간쇼인덴 도켄 고잔 곤다이소즈 |
묘소 | 도쿄도다이토구우에노 공원 내 간쇼인 미에현쓰시의 간쇼인 미에현이가시의 조교지 |
관직 | |
관위 | 종4위하, 좌근위권소장, 사도노카미, 이즈미노카미, 증 종3위 |
정치 및 군사 활동 | |
소속 | 아자이 씨 |
소속 | 오다 씨 |
소속 | 도요토미 씨 |
소속 | 동군 |
소속 | 도쿠가와 막부 |
가문 | 도도 씨 |
주요 전투 | 다지마 전투 미키성 전투 시즈가타케 전투 네고로지 전투 시코쿠 정벌 규슈 정벌 임진왜란 |
임진왜란 전투 | 명량 해전 칠천량 해전 |
세키가하라 전투 | 기후 성 전투 세키가하라 전투 |
오사카 전투 | 야오 전투 |
주요 직책 | |
영주 | 이요이마바리 번 초대 번주 (1600년 ~ 1608년) |
선대 영주 | 없음 |
후대 영주 | 마쓰다이라 사다후사 |
영주 | 이세쓰 번 초대 번주 (1608년 ~ 1630년) |
선대 영주 | 없음 |
후대 영주 | 도도 다카쓰구 |
가계 | |
아버지 | 도도 도라타카 |
어머니 | 도도 다다타카의 딸 |
형제자매 | 스즈키 야에몬의 부인 도도 다카노리 화도쿠인 (야마오카 나오노리의 부인, 후 와타나베 마모루의 부인) 도도 다카키요 도도 마사타카 도도 다카쓰네의 부인 |
배우자 | 정실: 잇시키 요시나오의 딸, 규호인 계실: 초 렌큐의 딸, 쇼주인 |
자녀 | 도도 다카쓰구 도도 다카시게 가모 다다사토의 정실 도도 다다스에의 부인 도도 다카요시 도도 다카노리의 부인 오카베 노리카쓰의 정실 마에노 지쇼의 부인 고보리 마사카즈의 정실 이코마 마사토시의 정실 |
주군 | |
주군 | 아자이 나가마사 아베 사다유키 이소노 가즈마사 쓰다 노부즈미 도요토미 히데나가 도요토미 히데야스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요토미 히데요리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쿠가와 히데타다 도쿠가와 이에미쓰 |
2. 생애
(내용 없음 - 하위 섹션에서 상세히 다루므로 중복 방지를 위해 생략)
2. 1. 초기 생애
고지 2년(1556년) 음력 1월 6일, 오미 이누카미군 도도무라(藤堂村, 현재 시가현 이누카미군 고라정)의 토호(土豪) 도도 도라타카(藤堂虎高)의 차남으로 태어났다.[6][7] 도도 씨(藤堂氏)는 14세기 궁정 귀족을 섬긴 도도 가게모리(藤堂景盛)를 조상으로 두었으나,[8] 센고쿠 시대에 들어서 몰락하여 다카토라가 태어날 무렵에는 농민과 다름없는 처지였다. 어머니는 타가라 씨(多賀良氏)의 딸이었으나 후에 도도 타다타카(藤堂忠高)의 양녀가 되었다.아명은 요키치(与吉)였다. 어려서부터 체격이 남달라 유모의 젖만으로는 부족하여 여러 여성의 젖을 먹고 자랐다고 전해진다. 성격 또한 거칠어 세 살 때 떡을 대여섯 개씩 먹는 일이 흔했고, 다쳐도 아프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13세에는 형 도도 다카노리(藤堂高則)보다 키가 크고 근육질의 몸을 가졌다. 형이 전사한 후 젊은 나이에 가독(家督)을 계승했다.
처음에는 오미국의 센고쿠 다이묘 아자이 나가마사(浅井長政)를 섬겼다.[9] 겐키 원년(1570년) 아네가와 전투에서 아버지 도라타카와 함께 이소노 가즈마사(磯野員昌)의 부대에 속해 첫 출진하여 무공을 세웠다. 이후 우사야마성 공격에서도 활약하여 나가마사로부터 감장(感状)과 와키자시(脇差)를 받았다.[10][46]
그러나 겐키 3년(1572년), 동료인 야마시타 모(山下某)를 공훈을 둘러싼 다툼 끝에 살해하고 도주했다. 이때 큰 문장이 새겨진 하오리를 뒤집어 입어 추격대를 따돌렸다고 전해진다.[47]
덴쇼 원년(1573년) 오다니성 전투에서 아자이 씨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 의해 멸망하자, 아자이 가문의 옛 가신이었던 야마모토야마성 성주 아헤이 사다유키(阿閉貞征)를 섬겼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동료인 아헤이 나타스케(阿閉那多助), 히로베 분페이(広部文平)를 자신의 지시에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살해하고 낭인 신세가 되었다. 이때 와타나베 료(渡辺了)와 교류하였다.
이후 다시 아자이 가문의 옛 가신이었던 오가와성 성주 이소노 가즈마사에게 80석의 녹봉을 받고 가신이 되었다.[11] 얼마 지나지 않아 노부나가의 조카인 츠다 노부스미(津田信澄)가 사와야마성에 들어오자 그를 섬겼으나, 별다른 대우를 받지 못했고 모이슈(母衣衆)의 아들과 싸움을 벌이는 등 오래 머물지 못했다.
2. 2. 도요토미 가신 시대
1576년, 오다 노부나가의 중신 하시바 히데요시의 동생인 하시바 히데나가 휘하에 300석 봉록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때 이름을 요에몬(与右衛門)으로 고쳤다고 전해진다.[12] 히데나가의 수하에서 주고쿠 정벌, 시즈가타케 전투 등에 참전하며 무공을 세웠다.1577년 10월, 히데나가를 따라 다지마(但馬)로 진군하여 다케다 성을 기습 점령하는 데 공을 세워 1,000석을 추가로 받고 아시가루(足軽) 대장이 되었다.[12] 1580년 미키 전투(三木合戦)에서는 적장 가코 로쿠로에몬(香西六郎右衛門)을 직접 베는 공을 세웠고[13][14], 2,000석을 더 받았다. 1581년에는 다지마 지역의 반란(小代一揆)을 진압하고 3,000석을 추가로 받아 총병대(鉄砲大将) 지휘관으로 승진했다.[16]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에서는 사쿠마 모리마사 군대를 격파하는 데 기여하여 1,300석을 추가로 받았다.[16] 1585년 기이 정벌(紀州征伐)에 참전하여 사이카토(雑賀党)의 수장 스즈키 시게오키를 모략으로 자결하게 만들고, 유카와 나오하루(湯川直春)를 항복시키는 등의 공을 세웠다.[16] 이 공으로 기이국 고카와(粉河)에 1만 석 영지를 받아 다이묘의 반열에 올랐다.[17] 이때 사루오카야마 성과 와카야마 성 축성을 담당하며 처음으로 성곽 건축 능력을 발휘했다.[18] 같은 해 시코쿠 정벌에서도 공을 세워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5,400석을 추가로 받았다.[19]
1586년, 히데요시의 명으로 교토 주라쿠다이 내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저택을 짓는 공사 책임자(作事奉行)를 맡았다. 다카토라는 보안 문제를 이유로 독단적으로 설계를 변경하고 추가 비용을 자비로 부담했는데, 이에야스는 오히려 다카토라의 세심한 배려에 만족했다고 한다.
thumb에 있는 도도 다카토라 동상.]]
1587년 규슈 정벌에서는 네지라사카 전투(根白坂の戦い)에서 시마즈 군에게 포위된 미야베 게이준을 구출하는 등 활약하여 총 2만 석으로 영지가 늘어났고[20], 히데요시의 추천으로 정5위하 사도노카미(佐渡守)에 임명되었다.[21] 1589년에는 기타야마(北山) 지역 농민 봉기(北山一揆)를 진압하기 위한 거점으로 아카기 성을 축성했으며, 이때 많은 농민을 처형했다고 전해진다.[22]
1591년 주군 히데나가가 사망하자 그의 양자 하시바 히데야스(豊臣秀保)를 섬겼다. 1592년부터 시작된 임진왜란과 1597년의 정유재란에는 수군을 이끌고 참전하였다.
1595년 히데야스가 사망하고 하시바 히데쓰구 일가가 처형당하자 잠시 고야산으로 출가했으나, 그의 재능을 아낀 히데요시의 부름으로 환속했다. 이후 5만 석을 추가로 받아 이요 이타지마(板島, 현재 우와지마시) 7만 석의 다이묘가 되었으며[23][24], 히데요시로부터 니혼마루(日本丸)라는 군함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정유재란 이후 귀국하여 다이슈성(大洲城) 1만 석을 추가 받아 총 8만 석의 다이묘가 되었고[26], 거성이었던 이타지마의 마루쿠시 성(丸串城)을 대대적으로 개축하여 우와지마성으로 개명했다.
2. 2. 1. 임진왜란 참전
1591년 주군 하시바 히데나가가 사망하자, 그의 조카이자 양자인 하시바 히데야스(豊臣秀保, 도요토미 히데야스)를 섬겼다.[58] 이듬해인 1592년 임진왜란(文禄の役)이 발발하자 히데야스의 대리로 군을 이끌고 조선으로 출정했다. 그는 수군 9,000여 명을 이끌고 참전하였으나,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에게 여러 차례 패배를 겪었다. 특히 일본 수군의 첫 패배로 기록된 옥포 해전 당시 지휘관 중 한 명이기도 했다.1595년 히데야스가 사망하자 잠시 고야산으로 출가했으나, 그의 재능을 아까워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름을 받고 환속했다. 이후 5만 석을 추가로 받아 이요 이타지마(板島, 현재 우와지마시) 7만 석의 다이묘가 되었다.[23][24][58]
1597년부터 시작된 정유재란(慶長の役)에도 수군을 이끌고 참가했다. 칠천량 해전에서는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을 궤멸시키는 전공을 세웠으나,[59] 이후 남원성 전투에 참가했고, 명량 해전에서는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한 이순신에게 대패하고 부상을 입기도 했다.[25] 이 시기 조선의 관료 강항을 포로로 잡아 일본으로 이송하기도 했다.
귀국 후에는 다이주성(大洲城) 1만 석을 추가로 받아 총 8만 석의 다이묘가 되었다.[59] 또한 거성이었던 이타지마의 마루쿠시 성(丸串城)을 대규모로 개축하고 우와지마성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thumb에 있는 도도 다카토라 동상.]]
2. 2. 2. 히데요시 사후
게이초 3년(1598년) 8월, 히데요시가 사망하기 직전부터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다카토라는 이전부터 이에야스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다고 전해진다.[60] 도요토미씨의 가신단이 무력을 중시하는 무단파와 행정을 중시하는 문치파로 나뉘어 대립하자, 다카토라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편에 가담했다.게이초 5년(1600년), 이에야스가 주도한 아이즈 정벌에 참여했으며, 이후 벌어진 갓토가와 전투에도 참전했다. 같은 해 9월 15일에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 본전에서는 동군의 선봉에 서서 오타니 요시쓰구의 부대와 격돌했다. 이후 산 속으로 전장을 옮겨 이시다 미쓰나리의 군대와도 싸웠다고 한다.[61] 또한, 전투 중에 자신의 영지인 이요 국에서 모리 테루모토의 사주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도 했다(모리 테루모토의 시코쿠 출병). 다카토라는 과거 오미 시절의 인맥을 활용하여 와키사카 야스하루, 오가와 스케타다, 쿠츠키 모토쓰나, 아카자 나오야스 등이 동군으로 돌아서도록 공작을 펼쳤다. 전투가 끝난 후, 와키사카 야스하루는 다카토라의 중개에 감사를 표하며 명검인 정종(正宗)의 칼을 선물했다고 한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이에야스로부터 기존 영지인 우와지마성 8만 석을 그대로 인정받는 동시에, 새롭게 이마바리성 12만 석을 추가로 받아 총 20만 석의 다이묘가 되었다. 다카토라는 이마바리성을 새로운 거점으로 삼아 대대적인 개축을 진행했으며, 우와지마성에는 사촌인 도도 요시카쓰를 성주 대리로 두었다.
다카토라는 이마바리성 개축 과정에서 기존의 망루형 천수의 단점을 보완한 새로운 층탑형 천수를 고안하여 건축했다. 층탑형 천수는 구조적으로 안정적이고 건축 기간도 단축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이후 다카토라가 에도성을 비롯한 여러 성곽 건축에 이 양식을 도입하면서, 층탑형 천수는 근세 일본 성곽 건축의 표준적인 형태로 자리 잡게 되었다.
2. 3. 에도 막부 시대
게이초 3년(1598년) 8월,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다카토라는 다음 시대의 패권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있다고 판단하고 빠르게 접근했다. 도요토미 가신단이 무단파와 문치파로 나뉘어 대립하자, 다카토라는 무단파와 함께 이에야스 편에 섰다.게이초 5년(1600년), 이에야스가 우에스기 가게카쓰 토벌을 위해 아이즈 정벌에 나서자 다카토라도 병력을 이끌고 참전했다. 이에야스가 자리를 비운 사이 이시다 미쓰나리를 중심으로 한 서군이 거병하자, 다카토라는 이에야스의 동군에 속해 오다 히데노부가 지키던 기후성 공략에 참여했다. 같은 해 9월 15일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 본선에서는 오타니 요시쓰구 부대와 격전을 벌였다. 또한, 와키자카 야스하루, 오가와 스케타다, 구쓰키 모토쓰나, 아카자 나오야스 등이 서군을 배신하고 동군에 가담하도록 설득하는 데 공을 세웠다.[29] 이 전투에서 시마 사콘의 넷째 아들 시마 키요마사가 다카토라를 공격하려 했으나 실패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세키가하라 전투 직전, 다카토라는 이에야스에 대한 충성의 표시로 자신의 가족을 에도로 보내기도 했다.[27]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이 승리한 후, 다카토라는 서군에 가담했던 다이묘들을 토벌하는 작전에 참여했다. 이요 국에서 모리 데루모토 세력의 저항을 진압했으며,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 옛 서군 장수들이 이에야스로부터 사면을 받도록 주선하기도 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다카토라는 이요 이마바리 20만 석의 영주로 봉해졌다.[30]
이후 다카토라는 에도 막부의 핵심 인물로 부상했다. 1604년, 다테 마사무네와 함께 전국의 다이묘들이 정기적으로 에도에 거주하도록 하는 제도를 막부에 건의했고, 이는 즉시 받아들여져 시행되었다.[32] 에도 성 개축 등 막부 사업에 참여했으며, 이에야스의 신임을 바탕으로 영지가 크게 늘어나 도자마 다이묘임에도 후다이 다이묘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영지 변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쓰 번 번정 확립 참조)
오사카 전투에서도 막부군으로 참전하여 활약했다. (자세한 내용은 #쓰 번 번정 확립 참조)
이에야스가 임종을 맞이할 때에는 침상 곁을 지키는 것이 허락될 정도로 깊은 신뢰 관계를 유지했다. 이에야스 사후에는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섬기며 막부의 중신으로서 역할을 이어갔다.
2. 3. 1. 쓰 번 번정 확립
게이초 13년(1608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도 다카토라의 능력과 충성심을 높이 평가하여, 이가 국 전역과 이세 국 8개 군을 합쳐 22만 석의 영지를 주며 쓰번의 번주로 삼았다.[33][34] 도자마 다이묘였음에도 불구하고 후다이 다이묘와 같은 대우를 받으며 막부의 중신으로 활동했고, 에도 성 개축에도 참여하는 등 막부 사업에 적극 협력했다.다카토라가 받은 이가 국 영지는 원래 쓰쓰이 사다쓰구의 것이었으나, 이에야스가 몰수하여 다카토라에게 넘겨준 것이다. 표면적인 이유는 사다쓰구의 영지 통치 부실이었지만,[35] 실제로는 사다쓰구가 막부의 허락 없이 오사카 성의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만나는 등 의심스러운 행동을 했고, 해당 지역이 군사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이에야스는 다카토라를 신뢰했기에, 이가 국을 그에게 맡김으로써 오사카의 도요토미 세력을 견제하고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609년 후반, 다카토라는 이가 우에노 성을 다층식 천수각을 갖춘 성으로 개축했다. 또한 교토 단바 지역의 가메야마 성 개축도 담당했는데, 이러한 성곽 공사는 오사카의 도요토미 세력과의 잠재적 충돌에 대비하기 위한 준비의 일환으로 해석된다. 이가 국 통치 시 다카토라는 이가류 닌자를 고용했으며,[38][36] 지방 씨족들을 무소쿠닌(無足人)으로 조직하여 활용했다. 무소쿠닌은 평시에는 농업에 종사하다가 전시에는 병력으로 동원되는, 토지 없는 하급 무사 계층이었다.[37][38][39]
게이초 19년(1614년)부터 시작된 오사카 전투에서는 막부군으로 참전했다. 겨울 전투에서는 이가 국의 무소쿠닌 부대를 동원하여 오사카 성 포위에 참여했다.[40][38] 이듬해 여름 전투에서는 가와치국 방면 선봉을 맡아 야오 전투에서 조소카베 모리치카 부대와 격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도도 군은 조소카베 군의 맹렬한 공격에 고전하며 무장 도도 요시카쓰와 도도 다카노리를 포함해 600여 명의 사상자를 내는 큰 피해를 입었으나, 결국 승리했다.[41] 이 공적으로 다카토라의 영지는 32만 석으로 늘어났고, 같은 해 종사위하(従四位下)에 서임되었다.[33][34]
원화 3년(1617년), 이세 국 다마루 성을 중심으로 5만 석이 추가되었고, 동생 도도 마사타카가 시모사 국에서 받았던 3천 석 영지가 쓰 번에 편입되어 총 석고는 32만 3천 석이 되었다. 이후 원화 5년(1619년), 도쿠가와 요리노부가 기슈번으로 옮겨오면서 다마루 5만 석은 기슈 번에 속하게 되었으나, 대신 야마토 국과 야마시로 국에서 5만 석을 받아 실질적인 영지 규모는 유지되었다.[34]
이에야스 사후에는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섬겼다. 원화 6년(1620년), 히데타다의 딸 도쿠가와 마사코가 천황가에 시집갈 때(입궐, 入内) 반대하는 귀족들을 강하게 압박하며 이를 성사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간에이 4년(1627년)에는 자신의 부지에 우에노 도쇼구를 건립하여 도쿠가와 가문에 대한 충성심을 보였다.
다카토라는 군사적 활동 외에도 내정에 힘써 번정의 기틀을 다졌다. 우에노성과 쓰성 주변에 조카마치(城下町, 성 아랫마을)를 건설하고 상업을 진흥시켰으며, 지방의 농지를 적극적으로 개발하고 황폐해진 사찰들을 복구하는 등 영지 경영에 힘썼다. 또한 막부의 명령으로 아이즈번, 다카마쓰번, 구마모토번 등 다른 번의 후견 역할을 맡아 가신을 파견하여 번의 운영을 돕기도 했다.

간에이 7년(1630년) 10월 5일, 다카토라는 에도 번 저택에서 7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42] 법명은 칸쇼인덴젠이슈린도켄코산곤다이소즈(寒松院殿前伊州林道賢高山権大僧都)이며, 장남 도도 다카쓰구가 뒤를 이었다.
2. 3. 2. 주요 성곽 축성 및 개축
1601년부터 6년에 걸쳐 이타지마 성(伊達島城)을 재건했는데, 이 성은 나중에 우와지마 성으로 불리게 되었다.1609년 후반에는 이가 우에노 성을 다층식 탑(덴슈, 天守) 형태의 성으로 개축하여 완공했다. 같은 해 교토의 단바 지역에 있는 가메야마 성 개축도 담당했다. 이러한 성곽 건설과 개축은 오사카성의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그 지지 세력과의 충돌에 대비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으며, 다카토라가 관여한 성들도 이러한 전략의 일환으로 여겨진다.
2. 4. 말년
말년에는 눈병을 앓아 실명했으며, 간에이 7년(1630년 음력 10월 5일) 향년 75세로 세상을 떠났다. 가독은 장남 다카쓰구가 대를 이었다.3. 인물 및 평가
도도 다카토라는 키가 6척 2촌(약 190cm)에 달하는 장신이었다고 전해진다. 어린 시절부터 남달리 체격이 좋고 성격이 거칠었다는 기록이 있다. 『高山公実録』에 수록된 『玉置覚書』에 따르면, 유모의 젖만으로는 부족하여 여러 여성의 젖을 먹었으며, 세 살 때 떡 다섯, 여섯 개를 거뜬히 먹고 다쳐도 아프다고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13세 무렵에는 이미 형 고노리(高則)의 키를 훌쩍 넘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의 용맹함을 보여주는 일화도 전해진다. 『公室年譜略』 에이로쿠 11년(1568년) 조에는 13세였던 다카토라가 오다니(小谷) 마을에 나타난 도적을 잡으러 가는 아버지와 형을 따라나서려 했으나 어리다는 이유로 제지당하자, 집에 돌아가 아버지의 예비용 칼을 들고 몰래 도적의 퇴로에 숨어 있다가 도망치는 도적들을 베어 쓰러뜨렸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는 크게 기뻐했고,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놀라워하며 감탄했다고 한다.
그의 유해는 온몸이 상처투성이였으며 총상과 창상 자국이 있었고, 오른쪽 약지와 새끼손가락은 잘려나가 손톱이 없었으며, 왼쪽 중지도 약 3cm 정도 짧았고, 오른쪽 엄지발톱도 없었다고 한다. (『平尾留書』) 이는 그가 평생 수많은 전투를 겪었음을 보여준다. 겐나 9년(1623년)경부터는 안질을 앓기 시작하여 간에이 7년(1630년)에는 실명하였다.
다카토라는 일생 동안 여러 차례 주군을 바꾸었기 때문에 '변절자' 혹은 '권력의 앞잡이'라는 비판을 받으며, 후대의 역사 소설 등에서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에도 시대 유교적 가르침 이전 일본에서는 가신이 능력에 맞는 대우와 장래성 있는 주군을 선택하는 것이 당연시되었다는 점[73], 그리고 소 요시토시의 사례처럼 당시 가치관 속에서 평가해야 한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그는 무용뿐 아니라 쓰번 통치에서 내정 수완을 보였고, 문학과 다도에도 능했다는 평가가 있다. "항상 죽기를 각오하면 마음의 동요가 없는 법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3. 1. 실력주의적 면모
도도 다카토라는 6척 2치(약 190cm)의 키를 자랑하는 거구였다고 전해진다. 그는 혈연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실력만으로 성공을 거둔 인물로 평가받는다. 여러 차례 주군을 바꾸었기 때문에 '변절자'나 '권력의 앞잡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며, 역사 소설 등에서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에도 시대에 유교적 가르침을 받은 무사가 등장하기 이전의 일본에서는 가신이 자신의 능력에 맞는 대우를 받고 장래성 있는 주군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기도 했다.[73] 소 요시토시가 자신의 세력에 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이혼했음에도 변절자로 취급받았던 것처럼, 시대적 배경이나 가치관의 차이로 인해 다카토라 역시 변절자라는 평가를 받았을 수 있다.다카토라는 오다 노부카쓰를 섬길 때 큰 공을 세웠으나, 노부카쓰는 그를 싫어하여 제대로 포상하지 않았다. 이에 다카토라는 영지를 버리고 낭인이 되었다가 후에 하시바 히데나가를 섬기게 되었다. 히데나가를 섬길 때는 충실한 가신으로 시코쿠 정벌 등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그의 정치 사상은 히데나가 주변에 모였던 당대 최고의 문화인들에게 영향을 받았다. 특히 센노 리큐를 필두로 한 히데나가의 중신들과 교류하며 다도를 비롯한 무로마치 시대 이래의 전통문화를 익히고 정치적 소양을 길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도요토미 가문에게 은혜를 입은 다이묘였음에도 불구하고 재빨리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접근하여 많은 다이묘들의 비난을 받았다. 충의를 중시하는 무사 사회의 분위기 속에서 이는 결코 칭찬받을 행동이 아니었다. 그러나 다카토라는 "자기 입장이 명확하지 않은 자야말로, 만일의 경우 가장 먼저 의지할 곳이 없게 된다"고 생각했다고 전해진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오사카 전투에서 공을 세운 다카토라를 높이 평가하며 "국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다카토라의 손을 빌리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도쿠가와 가문의 가신 대부분은 주군을 여러 번 바꾼 다카토라를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이에야스는 그의 실력을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 다카토라는 선봉에 서서 충성심을 보였고, 이에야스는 그를 더욱 신뢰하게 되었다. 이에야스가 임종할 때, 도자마 다이묘로서는 유일하게 다카토라만이 침상 곁에 있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한다.
다카토라는 무용뿐만 아니라 쓰 번의 행정 기반을 닦는 등 내정 수완이 뛰어났으며, 문학과 다도에도 능한 문화인이었다는 평가도 받는다. "항상 죽기를 각오하면 마음의 동요가 없는 법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특히 그는 3대 축성 명인 중 한 명으로 불릴 정도로 성곽 건축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게이초의 전쟁 당시에는 순천왜성 축성을 지휘했는데, 이 성은 명나라와 조선 연합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내며 견고함을 증명했다. 또한 층탑식 천수각 축조 방식을 창시했으며, 막부의 천하보청 사업에 참여하여 이가 우에노성과 단바 가메야마 성 등을 축성했다.
그는 자신의 본 영지인 쓰 번 외에도 막부의 명으로 여러 가문의 정무를 맡아 처리했다. 딸의 시집 간 곳인 아이즈번의 가모 가문, 다카마쓰번의 이코마 가문, 그리고 가토 기요마사 사후 구마모토번의 정무까지 맡아 가신단의 대립을 조정하며 총 160여만 석에 달하는 영지를 관리했다. 이 가문들은 다카토라의 존재 덕분에 유지될 수 있었으나, 그가 사망한 후에는 모두 개역[77]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막말의 도바·후시미 전투에서는 도도 가문이 막부군의 열세를 감지하자 재빨리 막부 측을 배신하고 관군 측에 가담하여 막부군에게 포격을 가했다. 이때 막부군 사이에서는 "역시 번조(藩祖, 도도 다카토라)의 가르침대로군"이라는 비아냥이 나왔다고 전해진다.
3. 2. 충성심
도도 다카토라는 여러 차례 주군을 바꾸었기 때문에 '변절자' 혹은 '권력의 앞잡이'라는 비판을 받으며, 역사 소설 등에서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에도 시대에 유교의 영향을 받은 무사도가 정립되기 이전 일본에서는 가신이 자신의 능력에 맞는 대우를 받고 장래성 있는 주군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는 시각도 있다[73]. 소 요시토시가 가문의 안위를 위해 이혼한 것이 변절로 비난받았던 것처럼,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지 않은 평가일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다카토라는 혈연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실력만으로 생존하고 성장한 인물로 평가받기도 한다. 일례로 오다 노부카쓰를 섬길 때 큰 공을 세웠음에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자 미련 없이 영지를 버리고 떠나 하시바 히데나가를 섬겼다고 전해진다.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다카토라는 다음 시대의 패자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될 것이라 판단하고 빠르게 그에게 접근했다. 도요토미 가신단이 무단파와 문치파로 나뉘자 무단파에 속해 이에야스 측에 가담했다. 1600년 이에야스가 우에스기 가게카쓰 토벌(아이즈 정벌)을 위해 군대를 일으키자 이에 종군했다. 이로 인해 비어있는 오사카를 이시다 미쓰나리 등 서군이 장악하자, 다카토라는 동군에 속해 오다 히데노부가 지키던 기후성 공격에 참여했으며, 9월 15일 세키가하라 전투 본 전투에서는 오타니 요시쓰구 부대와 교전했다. 또한 와키자카 야스하루, 오가와 스케타다, 구쓰키 모토쓰나, 아카자 나오야스 등이 서군을 배신하도록 공작한 공로를 인정받아, 전투 후 이에야스로부터 이요국 이마바리번 20만 석으로 영지가 늘어났다.
이후 다카토라는 에도 막부의 중신으로 활동하며 에도 성 개축 등에 힘썼고, 1608년에는 이가국 일국과 이세국 8개 군을 합쳐 22만 석으로 다시 영지가 늘어나 쓰번의 번주가 되었다. 히데요시 사후 재빨리 이에야스에게 접근한 것에 대해 다른 다이묘들의 비난도 있었지만, 다카토라는 "자기 입장이 명확하지 않은 자야말로 위급한 상황에서 가장 먼저 의지할 곳을 잃게 된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이에야스는 다카토라의 능력과 충성심을 높이 평가하여, 도자마 다이묘임에도 불구하고 후다이 다이묘에 준하는 대우를 해주었다.
1614년 오사카 겨울 전투와 이듬해 여름 전투에도 막부군으로 참전했다. 특히 여름 전투에서는 가와치국 방면 선봉을 자원하여 야오 전투에서 도요토미 측 조소카베 모리치카 부대와 격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도도 군은 조소카베 군의 맹공에 고전하며 무장 도도 요시카쓰와 도도 다카노리를 포함해 600여 명의 사상자를 냈으나 결국 승리했다. 이 공적으로 전후 32만 석으로 영지가 늘어났다. 이에야스는 오사카 전투에서의 공을 치하하며 "국가에 큰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다카토라의 힘을 빌리겠다"고 말할 정도로 그를 신뢰했다. 도쿠가와 가신들 중에는 주군을 여러 번 바꾼 다카토라를 싫어하는 이들도 많았지만, 이에야스는 그의 실력을 인정하고 깊은 신뢰를 보였다. 이에야스가 임종할 때, 도자마 다이묘로서는 유일하게 다카토라만이 침상 곁에 있는 것이 허락되었다.
이에야스 사후에는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섬겼다. 1620년 히데타다의 딸 도쿠가와 마사코가 고미즈노오 천황에게 시집갈 때(입궁) 선도역을 자청하여, 입궁을 반대하는 귀족들에게 "마사코 님이 입궁하지 못한다면 책임을 지고 어소(御所)에서 할복하겠다"고 말하며 강하게 밀어붙였다고 한다.
그러나 막말 시대 도바·후시미 전투에서는 도도 가문이 막부군의 열세를 감지하고 재빨리 관군 측으로 돌아서 막부군에게 포격을 가했다. 이를 두고 막부군 사이에서는 "역시 번조(藩祖, 도도 다카토라)의 가르침대로군"이라는 비아냥이 나왔다고 전해진다.
3. 3. 축성 기술
도도 다카토라는 3대 축성 명인 중 한 명으로 불릴 정도로 성곽 건축의 명인으로 알려져 있다. 정유재란 당시에는 순천왜성 축성을 지휘했는데, 이 성은 명·조선 연합군의 육상 및 해상 공격을 받았으나 이를 성공적으로 격퇴하여 성의 견고함이 실전에서 증명되었다.또한 천수각의 한 형태인 층탑식 천수각 축조 방식을 창시했으며, 에도 막부의 천하부흥(天下普請, 막부가 여러 다이묘에게 공사를 분담시키는 방식) 정책에 따라 이가우에노성과 단바 가메야마성 등을 축성했다. 이러한 축성 작업들은 오사카성의 도요토미 히데요리 세력과 서국(西国) 지역의 도요토미 가문과 관계가 깊던 다이묘들을 견제하고 포위망을 구축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을 가졌던 것으로 평가된다. 도도 다카토라 자신의 이세 전봉이나 쓰쓰이 사다쓰구의 영지 몰수,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전봉 등도 이러한 막부의 정책과 연관된 조치로 해석되기도 한다.
3. 4. 외교 능력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1598년 8월에 다카토라는 다음 시대의 패권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쥘 것으로 판단하고 신속하게 접근했다. 도요토미 가신단이 무단파와 문치파로 나뉘자, 다카토라는 무단파와 함께 이에야스 측에 가담했다.1600년 우에스기 가게카쓰 토벌을 위해 이에야스가 군사를 일으키자(아이즈 정벌), 다카토라도 병력을 이끌고 참전했다. 이로 인해 정치 중심지였던 오사카가 비게 되자, 이시다 미쓰나리 등 서군이 거병했다. 다카토라는 이에야스의 동군에 속해 오다 히데노부가 지키는 기후성 공격에 참여했으며, 9월 15일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오타니 요시쓰구 부대와 맞섰다. 이 전투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 오가와 스케타다, 구쓰키 모토쓰나, 아카자 나오야스 등이 서군을 배신하도록 공작한 공로를 인정받아, 전후 이에야스로부터 이요 이마바리 20만 석으로 영지가 늘어나 이전되었다.
다카토라는 일생 동안 주군을 여러 번 바꾼 이력 때문에 '변절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며, 후대의 창작물에서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에도 시대에 유교적 충의 사상이 강조되기 이전의 센고쿠 시대 일본에서는 가신이 자신의 능력에 맞는 대우를 받고 장래성 있는 주군을 선택하는 것이 비교적 자연스러운 일이었다.[73] 실제로 당시 교토나 오사카 같은 대도시에는 다카토라처럼 자신의 재능을 믿고 더 나은 주군을 찾아 옮겨 다니는 무사들이 많았으므로, 그가 특별히 이례적인 경우는 아니었다. 다카토라 자신도 "자기 입장이 명확하지 않은 자야말로, 만일의 경우 가장 먼저 의지할 곳이 없게 된다"고 말한 기록이 있다. 그는 하시바 히데나가를 섬길 때는 충실한 가신이었고, 시코쿠 정벌 등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히데요시 생전에도 충성을 다했으며, 이에야스에게 접근한 것은 히데요시 사후의 일이다. 따라서 그의 삶이 반드시 주군에 대한 충의를 저버린 것만은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
이에야스는 오사카 전투에서 공을 세운 다카토라를 높이 평가하며 "국가에 큰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다카토라의 힘을 빌리겠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도쿠가와 가문의 많은 가신들은 주군을 여러 번 바꾼 다카토라를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이에야스는 그의 능력을 인정했다. 특히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 다카토라가 선봉에 서서 충성심을 보이자 이에야스의 신임은 더욱 깊어졌다고 한다. 이에야스가 임종할 때, 도자마 다이묘로서는 유일하게 다카토라만이 침상 곁에 있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한다.
다카토라는 가토 기요마사나 가토 요시아키와 같은 급진적인 무단파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설도 있지만, 교우 관계는 매우 넓었다. 도요토미 히데나가 시절에는 요코하마 이치안, 고보리 엔슈 등과 친분을 맺고 친척 관계까지 맺었다. 또한 나카이 마사키요와 같은 건축가 집단과도 가까워 오사카 전투 당시 함께 공성도를 작성하기도 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 오미 출신 무장들과도 친분이 있었으며, 세키가하라 전투나 오사카 전투 이후 이들을 등용하거나 가문의 안정을 돕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승려 이심숭전과는 정실 부인을 통한 친척 관계였으며, 그의 사찰 건축을 자주 도왔다.[64]
말년에는 고산케나 도쿠가와 타다나가, 로주인 도이 도시카츠, 사카이 타다요시를 비롯해 다테 마사무네, 마에다 도시나가, 타치바나 무네시게, 다니와 나가시게, 호리 나오요시, 모리 히데모토 등 여러 유력 다이묘들과 깊은 교류를 가졌다.
그러나 막말의 도바·후시미 전투에서는 도도 가문이 막부군의 열세를 간파하고 재빨리 관군 측으로 돌아서 막부군에 포격을 가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 막부군 사이에서는 "역시 선조(다카토라)의 가르침대로군"이라는 비아냥이 나왔다고 한다.
다카토라는 자신의 본 영지인 쓰 번 외에도 막부의 명에 따라 사돈 관계였던 아이즈번의 가모 가문과 다카마쓰번의 이코마 가문, 그리고 가토 기요마사 사후 구마모토번의 정무까지 맡아 가신단의 대립을 조정하는 등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이러한 번들의 안정은 다카토라 개인의 역량에 크게 의존했기에, 그가 사망한 후 해당 가문들은 결국 개역[77]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3. 5. 한국에서의 평가
(작성할 내용 없음)4. 일화
- 강담[74]과 낭곡[75]의 소재가 된 '후지도 다카토라, 출세의 흰 떡(藤堂高虎、出世の白餅)' 이야기가 유명하다. 젊은 시절 아헤이 씨(阿閉氏) 슬하를 떠나 낭인 생활을 하던 다카토라(당시 이름은 요우에몬(与右衛門))는 극심한 배고픔에 시달렸다. 미카와국 요시다주쿠(吉田宿, 현재 아이치현 도요하시시)에 이르렀을 때, '요시다야(吉田屋)'라는 떡집에서 미카와 떡을 무전취식하고 말았다. 이후 주인인 요시다야 히코베(吉田屋彦兵衛)에게 사실대로 고백하고 사과했는데, 히코베는 오히려 다카토라를 꾸짖지 않고 "고향에 돌아가 부모님께 효도하라"고 타이르며 노잣돈까지 쥐여주었다고 한다. 이때 마침 요시다야의 부인은 오미(近江) 출신이었다고 전해진다. 훗날 다이묘로 크게 출세한 다카토라는 산킨코타이[76] 길에 요시다야에 들러 그때의 떡값을 갚았다는 인정미 넘치는 이야기가 전해진다.[62][63] 참고로 다카토라의 깃발에는 '세 개의 떡(三つ餅)' 문양이 그려져 있었는데, 흰 떡(白餅, 시로모치)이 '성을 가진 자(城持ち, 시로모치)'와 발음이 비슷하여 길조로 여겨 사용했다는 설도 있다. 산킨코타이 당시 요시다야의 주인은 3대째인 나카니시 요우에몬(中西与右衛門)이었는데, 그의 선조는 오다 노부나가를 섬기던 청주점(清州屋)이었으나 혼노지의 변 이후 요시다주쿠에서 주류 도매상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 일화는 「나카가와 쿠라우도 일기(中川蔵人日記)」 덴포 10년(1839년) 5월 24일 기록에도 등장하는데, 나카가와가 나카니시 요우에몬을 방문했을 때 '전통의 떡(吉例の餅)'을 대접받았으며, 다카토라가 떡을 먹은 이후 그곳에 숙박할 때는 주인이 삼베 덧옷을 입고 떡을 찧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적혀 있다.
- 어느 날 여색을 밝히는 가신과 노름을 좋아하는 가신 사이에 다툼이 벌어져 다카토라가 중재하게 되었다. 이때 다카토라는 여색을 밝히는 가신은 추방하고, 노름을 좋아하는 가신은 "계산이 빠르니 아직 쓸모가 있다"며 남겨두었다고 한다.
- "무사란 주군을 일곱 번 바꾸지 않으면 진정한 무사라 할 수 없다"는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이는 주군을 자주 바꾼 자신의 경력을 합리화하거나, 혹은 능력 있는 자는 더 나은 주군을 찾아 섬기는 것이 당연하다는 당시의 가치관을 반영하는 말로 해석된다.
5. 관련 작품
(내용 없음)
5. 1. 드라마
- '''일본'''
- * NHK 대하드라마
- ** 도쿠가와 이에야스 (1983년) - 마에다 마사아키
- ** 가스가노 쓰보네 (1989년) - 도지 다카오
- ** 히데요시 (1996년) - 도쿠 히데키
- ** 아오이 도쿠가와 삼대 (2000년) - 타무라 료
- ** 무사시 MUSASHI (2003년) - 마코토 나오야
- ** 천지인 (2009년) - 이치오카 유타카
- ** 사나다마루 (2016년) - 히노 세이지
- * NHK 신대형시대극
- ** 사나다 태평기 (1986년) - 코다마 켄지
5. 2. 영화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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寒松院は公園隣接地に移転したが、墓所は動物園内に残る(関係者のみ立ち入り可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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渡辺了長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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藤堂家始祖『三河守景盛』の素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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福井p.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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養父郡郷士。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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塩冶高清を指すかは不詳。
[50]
서적
秀吉の但馬平定と大屋
[51]
문서
『公室年譜略』、摂津野口城攻めの記述もあり。
[52]
문서
『公室年譜略』
[53]
서적
高山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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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山公実録』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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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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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山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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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
藤堂高虎は関ヶ原で大谷吉継と戦った―『藤堂家覚書』の記載検討を中心に―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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藤堂藩家老の中川蔵人の日記には「餅を土産として渡された」とある。
[63]
서적
出世の白餅考
[64]
문서
『公室年譜略』寛永5年正月廿七日や同年9月15日など。
[65]
문서
『名将言行録』
[66]
문서
『武家盛衰記』
[67]
문서
福井p.165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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今治p.2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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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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蒲生氏と徳川政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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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0-00
[73]
문서
다카토라도 당시로서는 당연한 행동을 했을 뿐이지만, 다이묘로 출세와 도자마다이묘로 있서면서도 이에야스의 눈에 띄어 중용한 것을 싫어하는 도쿠가와 후다이 가신과의 불화가 배경인지도 모르겠다
[74]
문서
관중에게 무용담이나 역사등을 알려주는 광대
[75]
문서
[[샤미센]]을 켜면서 이야기를 해주는 광대
[76]
문서
각 번의 다이묘가 정기적으로 쇼군을 뵈러 가는 일
[77]
문서
어떤 일로 인해 영지를 감봉 또는 몰수당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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