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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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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의민은 경주 출신의 고려 시대 무신으로, 소금 장수의 아들로 태어나 무술 실력으로 의종의 총애를 받았다. 정중부의 난에 가담하여 공을 세우고 권력을 잡은 후, 뇌물을 받고 백성을 수탈하는 등 횡포를 부렸다. 1196년 아들 이지영의 사건을 계기로 최충헌 형제에게 암살당하고, 그의 일족은 멸족되었다. 이의민은 족보에서 베트남 왕족의 후손으로 묘사되기도 하지만, 역사적 근거는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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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민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이의민
한자 표기李義旼
로마자 표기I Uimin
신상 정보
출생생년 미상, 고려 동경
사망1196년 5월 15일 (율리우스력 5월 8일) (음력 4월 9일), 고려 개경개성부 미타산 별장
배우자최씨
자녀이지순(李至純), 이지영(李至榮), 이지광(李至光), 2명의 이름 없는 딸
아버지이선(李善)
어머니성씨 미상, 옥령사(玉靈寺)의 여종(如宗)
친인척이무정(李茂貞), 이계운(李啓運), 이번(李蕃), 이희민(李羲珉), 이성순(李聖淳), 여흥 민씨(驪興 閔氏), 이연(李蓮), 이우원(李遇元), 이초(李初)
경력
소속 정당무소속
별명금강야차(金剛夜叉)
임기 시작1184년 음력 2월
임기 종료1196년 5월 15일
전임두경승(杜景升)
후임최충헌(崔忠獻)
매장지미상
능릉미상
묘호미상
시호미상
종교불교(佛敎)
가문경주(慶州) 또는 정선(旌善)
지휘미상
복무고려군
계급상장군
주요 참전 전투/전쟁무신정변
김보당의 난
조위총의 난
기타 이력미상
국가고려
직책무신정권 집권자
관직
관직고려의 군사 지도자
임기 시작1183년
임기 종료1196년
이전경대승
이후최충헌
군주명종

2. 생애

이의민은 경주 출신으로, 아버지는 소금 장수 이선이며, 어머니는 옥령사 여종이었다. 고려사에 따르면, 이의민은 키가 190cm에 달하는 놀라운 체력을 지녔다고 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 이선은 이의민이 푸른 옷을 입고 황룡사 9층탑에 오르는 꿈을 꾸고 아들의 장래 출세를 기대했다. 이의민은 성인이 되어 큰 체격과 높은 완력으로 '역사'로 이름을 알렸지만, 거친 성격으로 두 형과 함께 고향 마을에서 난폭한 행동을 일삼아 미움을 받았다. 결국 경주 안렴사에게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는데, 형들은 옥사했지만 이의민은 혼자 살아남았다. 안렴사는 이의민의 재능을 알아보고 개경의 경군에 입대시켜 군인의 길을 걷게 했다.[4]

이의민은 경기(근위대)에 들어가 뛰어난 무술 실력으로 의종의 눈에 띄어 별장으로 승진했다. 1170년 정중부의 난(경인의 난)에 참여하여 중랑장 직위를 얻었다.

명종 3년 (1173년), 김보당정중부, 이의방에 의해 폐위된 의종을 복위시키려 하자, 이의민은 이의방의 명을 받아 의종을 살해했다. 이의민은 맨손으로 의종의 등뼈를 꺾어 살해하고, 그 시체를 연못에 버렸다. 이 공으로 장군으로 승진했다.[4]

1174년(명종 4년), 조위총의 난을 진압하고 상장군으로 승진했다. 1177년(명종 7년)에는 조위총의 잔당을 소탕하고 300명을 참살했다.

1179년(명종 9년), 경대승에게 의종 시해 죄를 추궁받아 경주로 도망갔다. 1183년(명종 13년) 경대승이 사망하자, 명종의 부름을 받고 개경으로 돌아왔다.

정계에 복귀한 이의민은 공부 상서를 거쳐 1184년(명종 14년) 수사공·좌복야에 임명되어 재상의 자리에 올랐다. 명종은 이의민의 난폭함을 싫어하면서도 그의 비위를 맞추었고, 이의민과 그의 일족은 전횡을 일삼았다. 이의민은 뇌물을 받고 민가와 토지를 강탈했으며, 그의 두 아들 이지영, 이지광은 '쌍도자'로 불릴 정도로 악행을 저질렀다.

이의민의 권력은 두경승, 조원정 등의 무인 집단과 명종, 문신 관료들의 견제를 받았다. 1187년(명종 17년) 조원정이 숙청된 후, 이의민과 두경승의 양두 정치가 이루어졌다. 1190년 동중서문하평장사, 1191년 판병부사를 겸했지만, 두경승과의 관계는 여전히 불편했다. 1193년 김사미의 난에 이의민이 관여했다는 소문이 돌면서 불만이 높아졌다.

1196년(명종 26년) 봄, 이지영이 최충수비둘기를 빼앗는 사건을 계기로, 최충수는 형 최충헌과 함께 이의민 암살을 모의했다. 같은 해 음력 4월 8일, 이의민은 병 때문에 명종의 보제사 행차에 동행하지 않고 미타산 별장에 머물렀는데, 최충헌·최충수 형제는 가병을 이끌고 별장을 기습하여 이의민을 살해했다.

이후 최충헌은 왕궁을 포위하고 명종에게 이의민에게 충실한 나머지 무장 세력을 토벌하도록 요청했다. 최충헌·최충수 형제는 이의민의 추종자들을 체포하고, 해주에서 유람하던 이지영도 처형했다. 최충헌은 이의민의 가족과 친척을 모두 살해하고, 이의민의 가신과 노예들을 숙청했으며, 전국 각지에 사람들을 보냈다. 살아남은 이의민의 두 아들은 최충헌에게 자비를 구했지만, 최충헌은 이들을 모두 죽여 이의민의 마지막 씨를 말렸다.

2. 1. 출생과 가계

이의민은 경주 출신으로, 아버지는 소금 장수 이선(李善)이며, 어머니는 영일현(현재의 포항시 연일읍) 옥령사(玉靈寺)의 여종이었다. 출생 연도는 미상이나, 형제가 3명이었고 그중 막내였다고 전해진다.[2] 1196년 이의민이 최충헌에게 피살되고 일가가 몰살된 뒤에도 한동안 이의민의 친척들은 경주에 있었다고 한다.

고려사고려사절요에 의하면 이의민의 친척인 이사경(李思敬) 등은 신종 때도 경주에 있었다고 한다. 이의민의 사촌 이희민의 손자가 강원도 정선군에 정착하면서 그의 집안은 정선 이씨가 되었다.

정선 이씨 족보에는 이의민의 조상을 베트남 리 왕조의 후손 이양혼(李陽焜)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역사학계에서는 여러 가지 사료와 정황상 신빙성이 낮은 것으로 보고 있다.[3] 이양혼은 1127년에도 살아있던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고 이의민은 1168년도에도 활동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이의민은 이양혼의 5대손일 수가 없다.

그가 태어날 때 아버지 이선은 어린 아들이 푸른 옷을 입고 황룡사 구층탑으로 올라가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이의민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관계이름
증조부이무정(李茂貞)
할아버지이계운(李啓運)
할머니미상
백부이번(李蕃)
아버지이선(李善)
어머니성씨 미상, 옥령사의 여종
이씨(李氏)
둘째 형이씨(李氏)
부인최씨(崔氏)


2. 2. 초기 생애와 군인 활동

이의민은 한미한 집안 출신으로, 어린 시절에는 불량배로 활동하며 주변 지역에 행패를 부렸다.[4] 그러나 안렴사 김자양에게 발탁되어 경군(京軍)에 편입되면서 군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김자양은 이의민 형제를 붙잡아 고문했는데, 두 형은 고문을 받다 죽었지만 이의민은 끝까지 견뎌 끈질김을 높이 평가받아 개성으로 가 군인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수박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이의민은 의종의 총애를 받아 별장에 임명되었다.[4] 1170년(고려 의종 24년) 정중부의 난에 가담하여 공을 세우고 장군으로 승진했다.

1173년(고려 명종 3년) 김보당의 난 진압 과정에서 이의방의 명을 받고 의종을 살해하고 대장군이 되었다. 이후 1174년(고려 명종 4년) 조위총의 난을 평정하여 상장군에 올랐다.

2. 3. 권력 장악과 횡포

1183년 공부상서와 수사공 상서좌복야 등을 역임하고, 1190년 동중서문하평장사 겸 판병부사를 역임했다.[1] 그는 권력을 잡자 뇌물을 받고 벼슬을 팔았으며, 백성들의 민가를 함부로 헐고 논밭을 수시로 빼앗았다. 아들 이지영, 이지광, 손자 이진옥도 횡포가 심하기로 유명했다.[1] 특히 이지영과 이지광은 백성들로부터 쌍도자(雙刀子)라 불릴 정도로 악명이 높았다.[1] 이지영의 비행은 심각하여 이의민이 직접 처벌을 명종에게 청하였으나 명종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1]

두경승과의 갈등도 심했다.[1] 이의민이 두경승과 같이 중서성 회의에 갔을 때 힘자랑을 하며 주먹으로 중서성 전각의 기둥을 후려치자 지붕이 흔들렸다.[1] 두경승은 이를 받아채며 중서성의 벽을 쳤는데, 전각 벽에 금이 가고 구멍이 뚫렸다.[1] 한번은 이의민과 두경승이 중서성에 앉아 일을 의논하다가 서로 의견이 갈려 이의민이 그대가 무슨 공로로 나보다 높은 자리에 있느냐며 성질을 내며 기둥을 후려쳤다.[1] 당시 사람들은 "궁중에는 이의민과 두경승이요, 추밀원에는 손석(孫碩)과 김영존(金永存)이다"라고 비아냥댔으며, 어떤 이들은 시를 지어 조롱하기도 했다.[1]

부인 최씨는 이의민이 바람피우는 것을 질투하여 여종을 때려 죽였다.[1] 그러나 최씨도 바람을 피웠다가 이의민에게 발각되어 이혼당했다.[1] 아들 이지순은 견룡(牽龍) 박공습(朴公襲)과 기생 화원옥(花園玉)을 두고 싸웠는데, 앙심을 품고 칼을 들고 박공습을 쫓아가 궁궐 문까지 쫓아갔다.[1] 이의민은 아들 지순을 처벌할 것을 명종에게 상주했지만, 명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1]

1183년 경대승이 병으로 사망하자, 명종은 이의민을 개경으로 불렀다.[6] 이의민은 경대승의 죽음을 믿지 않고 여러 번 왕의 요청을 거절했지만, 결국 경대승의 죽음을 깨닫고 개경으로 향했다.[6]

명종은 이의민을 수사공좌복야(수사공좌복야|守司空左僕射|한국어)로 임명하고, 1190년에는 동중서문하평장사 판병부사(동중서문하평장사 판병부사|同中書門下平章事判兵部事|한국어)의 지위까지 겸하게 했다.

정권을 장악한 이의민은 뇌물을 받고 사가와 토지를 강탈했다. 그의 가족들 또한 많은 악행을 저질렀다. 특히 두 아들 이지영과 이지광은 '쌍도자'(雙刀子, '쌍검객'을 의미)로 불렸다. 이지영은 권위에 불복하는 자는 누구든 살해하고, 기혼 여부를 가리지 않고 강간하는 등 잔혹한 행위를 저질렀다. 왕의 후궁을 납치하여 강간하기도 했다. 이의민의 부인 최씨 역시 성욕이 왕성하여 노예와 간통하다 이의민에게 들켜 쫓겨나 죽음을 맞이했다. 이의민의 딸 역시 남편을 무시하고, 따로 거처를 마련하여 수많은 남자들과 어울리는 등 오만하고 음탕했다.

이의민의 권력 기반은 절대적이지 않았다. 경인의 난 이후 중앙에서 활동해 온 두경승, 조원정 등 무인 집단 내 실력자들이 건재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중부와 경대승 집권기를 거쳐 이의민이 실권을 잡은 후에도 군사력을 가진 채 중방의 중추로 버티고 있었으며, 이의민의 독주를 견제하려는 명종과 문신 관료들의 지지를 받았다. 이의민 집권 초는 두경승·조원정과 함께 세 사람의 연합 정치에 가까웠으나, 1187년 권력 투쟁에 밀려 반란을 꾀한 조원정이 숙청되자, 정권은 이의민과 두경승의 양두 정치로 이원화되었다. 1190년 동중서문하평장사, 1191년 판병부사를 겸했지만, 두경승과의 관계는 여전히 어색했다. 1193년 경상도에서 일어난 김사미의 난에 이의민도 관여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불만이 높아졌다.

2. 4. 최충헌에게 암살 및 몰락

1196년(고려 명종 26년) 이른 봄, 이의민의 아들 이지영이 동부녹사 최충수의 비둘기를 빼앗는 사건이 발생했다.[1] 이 사건을 계기로 최충수는 형 최충헌에게 이의민을 제거할 것을 제안했고, 최충헌은 잠시 망설이다가 동의했다.[2]

같은 해 음력 4월 8일, 이의민은 병을 핑계로 명종의 보제사 행차에 동행하지 않고 미타산 별장에 머물렀다.[1] 최충헌, 최충수 형제와 박진재 등은 이 틈을 노려 가병을 이끌고 별장 밖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이의민이 말을 타려 할 때 기습하여 살해했다.[1]

암살 성공 후, 최충헌은 즉시 개경으로 돌아와 이의민의 머리를 베어 거리에 내걸고, 백존유 장군의 도움을 받아 군대를 소집했다.[1] 이 소식을 들은 명종은 보제사에서 급히 개경으로 돌아왔다.[2] 최충헌은 왕궁을 포위하고 명종에게 이의민에게 충성하는 잔당을 토벌하도록 요청했고, 명종은 이를 허락했다.[1]

최충헌·최충수 형제는 개경 성문을 닫고 이의민의 추종자들을 체포했다.[1] 이의민의 아들 이지선과 이지광은 최씨 형제에 맞서 싸웠지만 결국 수세에 몰려 도주했다.[2] 한편, 해주에서 유람하던 이지영도 최충헌이 보낸 장군 한휴(韓休)에게 붙잡혀 처형되었다.[1] 이지영이 죽었다는 소식은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기쁨을 주었다고 전해진다.[2]

최충헌은 이의민의 모든 가족과 친척들을 죽였으며, 심지어 전국 각지에 사람을 보내 이의민의 추종자들과 노예들을 모두 제거했다.[2] 이의민의 두 아들 이지선과 이지광은 최충헌에게 자비를 구했지만, 최충헌은 그들을 모두 죽여 이의민의 마지막 핏줄을 끊었다.[2]

3.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아버지이선(李善)
어머니옥령사(玉靈寺)의 여종
부인최씨(崔氏)
아들이지순(李至純)
아들이지영(李至榮)
아들이지광(李至光)

[5]

4. 평가

이의민은 미천한 신분에서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지만, 그의 집권기는 무신정권 초기 혼란상과 권력 투쟁의 잔혹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된다.[1] 그는 뛰어난 무예와 담력을 지녔으나, 과도한 탐욕과 잔혹함으로 인해 백성들의 원성을 샀으며,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1]

이의민은 의종을 시해할 때, 맨손으로 등뼈를 꺾어 살해하고 그 자리에서 크게 웃었으며, 시체를 헝겊에 싸서 연못에 버리는 잔인함을 보였다.[1]

집권 후에는 뇌물을 받고 민가와 토지를 강탈하는 등 탐욕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그의 아들 이지영과 이지광은 '쌍도자'라 불리며 온갖 악행을 저질렀고, 이지영은 왕의 측실을 유괴하여 음란한 행위에 빠지기도 했다.[1]

이의민의 딸 역시 남편을 무시하고 수많은 남자와 관계를 맺는 등 오만하고 음란하여 악명이 높았다. 이러한 이의민과 그 일가의 행태는 백성들의 원성을 샀으며, 결국 최충헌에게 살해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1]

이의민의 생애는 당시 고려 사회의 모순과 한계를 드러내는 동시에, 능력 중심의 가치관이 대두되던 시대적 변화를 반영하기도 한다.[1]

5. 논란

이의민의 본관 및 신분에 대한 논란은 역사학계와 정선 이씨 문중 간의 이견을 보여준다. 고려사고려사절요에 따르면, 이의민은 경주 이씨이며, 그의 부모는 소금장수와 옥령사의 여종으로 미천한 신분이었다.[2][3] 반면, 정선 이씨 족보는 이의민을 베트남 리 왕조의 후손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역사학계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정선 이씨 족보의 주장은 여러 가지 이유로 신빙성이 낮다. 족보에 등장하는 이양혼은 1127년에도 생존했던 인물로, 1168년에 활동했던 이의민의 5대조가 될 수 없다. 정선 이씨 문중에서 시조로 주장하는 이양곤의 망명 사실 자체도 의문이며, 이의민이 이양곤의 6대손이라는 것은 연대상 맞지 않는다. 고려사에는 이의민의 아버지가 소금장수 이선이라고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정선 이씨 족보가 조선 숙종 때인 1677년에야 처음 편찬되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5. 1. 본관 및 신분 논란

정선 이씨 족보는 이의민을 베트남 리 왕조의 후손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역사학계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고려사고려사절요에 따르면, 이의민은 경주 이씨로 여러 번 언급되었고,[3] 그의 부모는 미천한 신분의 소금장수와 옥령사의 여종이었다.[2]

정선 이씨 족보에서는 이의민의 5대조를 이양혼이라 칭하며, 그가 휘종으로부터 벼슬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양혼은 1127년에도 생존했던 인물로 기록되어 있고, 이의민은 1168년에도 활동했던 사람이므로, 이의민이 이양혼의 5대손일 수는 없다. 따라서 이양혼은 정선 이씨 족보가 창작되면서 만들어진 가상의 인물로 보인다.

정선 이씨 문중에서는 시조를 베트남 리 왕조의 이양곤(李陽焜)이라 주장하며, 이의민이 그의 6대손이라고 주장한다. 이양곤은 베트남 리 왕조 신종의 동생으로, 송나라를 거쳐 고려로 귀화했다고 하나, 다음 세 가지 이유로 인해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첫째, 이양곤의 망명 자체가 의문이다. 이양곤은 왕위 다툼에서 밀려나 송나라로 망명했다가 1123년 금나라와의 전쟁을 피해 고려로 다시 망명했다고 하는데, 이는 정선 이씨 족보에만 나오는 이야기로, 창작된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이양곤의 형이라는 신종은 1116년생이므로, 이양곤은 아무리 빨라도 1117년생이다. 7살 어린이가 두 번이나 망명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둘째, 이의민이 이양곤의 6대손이라는 것은 연대상 맞지 않다. 이의민이 1135년생이라고 가정해도, 6대손이 아니라 아들이어야 할 정도로 나이 차이가 크다. 또한, 고려사에는 이의민의 아버지가 소금장수 이선이라고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셋째, 이의민의 베트남 황손 설은 정선 이씨 족보에만 등장하며, 이 족보는 조선 숙종 때인 1677년에야 처음 편찬되었다.

결론적으로, 이의민의 베트남 황손 설은 신빙성이 낮다. 고려시대 기록에는 이의민이 경주 이씨로 여러 번 언급되었고, 그의 부모가 미천한 신분이었기 때문에 후대에 정선 이씨 족보에서 베트남 황손으로 창작된 것으로 보인다.

6. 대중문화 속의 이의민

2003년부터 2004년까지 KBS에서 방영된 드라마 《무인시대》에서 배우 이덕화가 이의민 역을 맡아 연기했다.

참조

[1] 서적 A New History of Korea Ilchokak 1984
[2] 문서 Lee, pg.141
[3] 웹사이트 이의민 (李義旼) https://encykorea.ak[...] Academy Korean Studies 2024-04-01
[4] 문서 약 192cm로 추산. 1척을 24cm 정도로 본다.
[5] 문서 그에게는 조카며느리
[6] 문서 이개운-번-희민-성순-우원-형규-?-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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