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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프리카 전역 (제1차 세계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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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아프리카 전역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독일과 연합군 간에 벌어진 식민지 분쟁으로, 현재의 르완다, 부룬디, 탄자니아, 케냐, 모잠비크, 잠비아를 포함한 광대한 지역에서 진행되었다. 독일군은 파울 폰 레토포르베크의 지휘 아래 게릴라전을 펼치며 연합군의 병력과 보급을 분산시키는 전략을 사용했다. 영국, 벨기에, 포르투갈 등 연합군은 1916년부터 대규모 공세를 펼쳤지만, 레토포르베크는 1918년 11월 휴전 협정 체결 이후에야 항복했다. 이 전역은 막대한 인명 피해를 낳았으며, 아프리카 사회와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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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프리카 전역 (제1차 세계 대전) - [전쟁]에 관한 문서
위치 정보
기본 정보
독일령 동아프리카에서 행군을 준비하는 식민 아스카리 중대
독일령 동아프리카 (Deutsch-Ostafrika)에서 아스카리 중대가 행군을 준비하는 모습
분쟁동아프리카 전역
일부제1차 세계 대전 아프리카 전구
날짜1914년 8월 3일 – 1918년 11월 25일
장소탄자니아, 잠비아, 모잠비크, 르완다, 부룬디, 케냐, 우간다, 콩고민주공화국
결과연합국 승리, 독일령 동아프리카 분할
교전 세력
교전국 1영국
벨기에
포르투갈
교전국 2독일 제국
지휘관
연합군 지휘관얀 스뮈츠
야코프 판데벤터
아서 호스킨스
샤를 톰뵈르
아르망 위게
페레이라 질
주앙 테이셰이라 핀투(사망)
독일군 지휘관파울 폰 레토-포어베크
하인리히 슈네(포로)
쿠르트 발레
병력
연합군 병력영국 제국
초기: 2개 대대
12,000–20,000명 군인
총합: 250,000명 군인
600,000명 짐꾼
독일군 병력정규군(Schutztruppe)
초기: 2,700명
최대: 18,000명
1918년: 1,283명
총합: 22,000명
비정규군(Ruga-Ruga): 12,000명 이상
사상자
연합군 사상자영국 제국: 22,000명
군인 11,189명 사망
짐꾼 95,000명 사망
벨기에: 5,000명
군인 2,620명 사망
짐꾼 15,650명 사망
포르투갈: 12,000명 이상
군인 5,533명 사망
군인 5,640명 실종/포로
총합: 군인 40,000명 이상 사상
약 20,000명 사망
독일군 사상자군인 16,000명 이상 사상
2,029명 사망
2,849명 탈영
4,512명 실종
7,122명 포로
짐꾼 7,000명 사망
민간인 사망자전쟁 관련 기근으로 365,000명 사망
독일령 아프리카: 135,000명
영국령 아프리카: 30,000명
벨기에령 아프리카: 150,000명
포르투갈령 아프리카: 50,000명

2. 배경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동아프리카 전역유럽에서 벌어진 전쟁의 연장선상에서, 독일 제국과 연합군 세력이 아프리카 대륙에서 벌인 전투를 말한다.

당시 독일은 식민지 확장에 대한 야욕을 드러내며 독일 중앙 아프리카 건설을 구상했다. 이는 벨기에령 콩고 영토를 병합하여 독일의 동아프리카, 남서아프리카, 서아프리카 식민지를 연결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를 통해 독일은 중앙 아프리카를 지배하고 아프리카에서 가장 강력한 식민 세력이 되고자 했다.

그러나 아프리카의 독일 식민지 군대는 약하고 장비가 부족했으며 넓게 분산되어 있었다. 독일 식민 제국에서 가장 큰 군대가 동아프리카에 집중되어 있었지만, 많은 독일 군인들은 흑색 화약을 사용하는 구식 1871년형 소총에 의존해야 했다.

파울 폰 레토-포르베크 중령이 이끄는 독일군의 동아프리카 작전 목표는 연합군의 병력과 보급품을 유럽에서 아프리카로 돌리는 것이었다. 레토는 영국의 우간다 철도(Uganda Railway)를 위협하여 영국군이 동아프리카를 침공하도록 유도하고, 그곳에서 방어전을 펼칠 계획이었다. 1912년 독일 정부는 동아프리카 방어 전략을 수립했는데, 군대는 내륙으로 후퇴하여 게릴라전을 벌이는 것이었다.

2. 1. 독일령 동아프리카

독일 동아프리카(German East Africa)(Deutsch-Ostafrika)는 1885년 독일이 식민지화한 지역으로, 현재의 르완다, 부룬디, 탄자니아를 포함하며 면적은 약 995016.69km2에 달했습니다. 당시 원주민 인구는 750만 명이었고, 5,300명의 유럽인이 통치했습니다. 식민 통치는 비교적 안정적이었으나, 1904년부터 1905년까지 마지 마지 반란(Maji Maji Rebellion)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독일 식민 행정부는 260명의 유럽인과 2,470명의 아프리카인으로 구성된 군사 보호군(Schutztruppe), 예비군 국토방위군(Landsturm) 소속 2,700명의 백인 정착민, 그리고 소규모 준군사 헌병대(Gendarmerie)를 동원할 수 있었습니다.

2. 2. 독일의 전략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독일은 식민지 확장에 대한 열망을 키웠고, 유럽에서의 독일 제국 부활과 병행하는 독일 중앙 아프리카 건설을 구상했다. ''Mittelafrika''는 벨기에령 콩고 영토를 병합하여 독일의 동아프리카, 남서아프리카, 서아프리카 식민지를 연결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를 통해 독일은 중앙 아프리카를 지배하고 아프리카에서 가장 강력한 식민 세력이 되고자 했다.

독일 영토를 갈색으로, 영국 영토를 분홍색으로 표시한 제안된 ''중앙아프리카(Mittelafrika)'' 지도


그러나 아프리카의 독일 식민지 군대는 약하고 장비가 부족했으며 넓게 분산되어 있었다. 독일 식민 제국에서 가장 큰 군대가 동아프리카에 집중되어 있었지만, 많은 독일 군인들은 흑색 화약을 사용하는 구식 1871년형 소총에 의존해야 했다.

파울 폰 레토-포르베크 중령이 이끄는 독일군의 동아프리카 작전 목표는 연합군의 병력과 보급품을 유럽에서 아프리카로 돌리는 것이었다. 레토는 영국의 우간다 철도(Uganda Railway)를 위협하여 영국군이 동아프리카를 침공하도록 유도하고, 그곳에서 방어전을 펼칠 계획이었다. 1912년 독일 정부는 동아프리카 방어 전략을 수립했는데, 군대는 내륙으로 후퇴하여 게릴라전을 벌이는 것이었다.

2. 3. 연합군의 전략

연합군의 초기 전략 목표는 독일군을 해상 봉쇄하고 항구를 점령하며, 독일 식민지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파울 폰 레토포르베크Paul von Lettow-Vorbeck영어 중령이 이끄는 독일군은 연합군의 병력과 보급품을 유럽에서 아프리카로 돌리려 했다. 레토는 영국의 중요한 우간다 철도를 위협하여 영국군이 동아프리카를 침공하게 하고, 그곳에서 방어전을 펼칠 계획이었다. 1912년 독일 정부는 동아프리카에 대한 방어 전략을 수립했는데, 군대는 내륙으로 후퇴하여 게릴라전을 벌일 것이었다.

독일 식민지는 중립국인 벨기에령 콩고에 위협이 되었지만, 벨기에 정부는 아프리카에서 중립을 유지하고자 했다. 벨기에군(Force Publique)은 1914년 8월 15일까지 방어 전략을 고수해야 했다. 그날 탕가니카 호수의 독일 함선이 모콜로부 항구를 포격했고, 일주일 후 루쿠가 기지를 포격했다. 일부 벨기에 관리들은 동아프리카의 적대 행위를 아프리카에서 벨기에 영토를 확장할 기회로 보았다. 루안다와 우룬디를 점령하면 전쟁 후 벨기에의 복원을 보장하기 위해 망명 정부인 드 브로크빌 정부의 교섭력을 높일 수 있었다. 전후 베르사유 조약 협상 과정에서 쥘 랭캥 식민 장관은 벨기에령 콩고의 해안선을 늘리기 위해 독일 동아프리카에서 얻은 벨기에의 영토적 이득을 북부 앙골라의 포르투갈 할당량과 맞바꾸려고 했다.

3. 초기 전투 (1914–1915)

독일 식민지 제국 지도; 독일 동아프리카는 진한 파란색이다.


영국과 독일 동아프리카 총독들은 전쟁을 피하고 1885년 콩고 협정에 기초한 중립 협정을 선호했지만, 이는 분쟁 초기에 혼란을 야기했다. 1914년 7월 31일, 순양함 SMS 쾨니히스베르크(1905)가 다르에스살람에서 영국 상선 공격 작전을 위해 출항했으나, 영국 순양함의 추격을 간신히 피했다. 8월 5일, 영국 우간다 보호령의 병력이 빅토리아 호 근처 독일 강 유역의 전초 기지를 공격했다.

같은 날, 영국 전쟁 내각은 동아프리카를 점령하고 해적선 기지로서의 항구를 제거하기 위해 인도 원정군(IEF)을 파병하기로 결정했다. 8월 8일, 영국 해군 순양함 HMS 아스트라에아(1893)가 다르에스살람의 무선국을 포격했다. 아스트라에아 함장은 그 도시가 개방 도시로 남는다는 조건으로 휴전에 동의했지만, 이 협정은 독일 총독 하인리히 슈네와 포르벡 사이에 불화를 야기했고, 나중에 무시되었다. 탕가 전투 이전, 영국 해군은 협정을 파기하고 기습을 포기했다고 경고해야 했다.

1914년 8월, 양 식민지의 군대와 준군사 조직이 동원되었다. 동아프리카의 독일 보호군(Schutztruppe)은 독일인 260명과 2,472명의 아스카리로 구성되었는데, 이는 영국 동아프리카 식민지의 킹스 아프리카 라이플(KAR) 두 개 대대와 맞먹는 규모였다.

탕가니카 호에서는 전쟁 발발 이후 독일군이 3척의 무장 증기선과 2척의 무장하지 않은 모터보트를 이용해 호수를 장악하고 있었다. 1915년, 3파운드포와 맥심 기관총으로 무장한 영국 모터보트 2척, HMS ''미미''호와 ''투투''호가 육로로 약 를 이동하여 탕가니카 호의 영국령 해안에 도착했다. 12월 26일, 이들은 독일 함선 ''킹가니''호를 나포하여 로 개명하고, 제프리 스파이서-심슨 소령이 지휘하는 벨기에 함선 2척과 함께 공격하여 독일 함선 ''헤드비히 폰 비스만''호를 격침시켰다. ''그라프 폰 괴첸''호와 무장하지 않은 모터보트 ''와미''호만이 남은 독일 함선이었다. 1916년 2월, ''와미''호는 승무원에 의해 나포되어 해안으로 좌초된 후 소각되었다. 이후 레토우-포르벡은 ''쾨니히스베르크''포를 제거하여 철도로 주요 전선으로 보냈다. 이 배는 7월 중순 벨기에군의 키고마 공습 이후, 벨기에 식민군이 점령하기 전에 자침되었다. ''와미''호는 나중에 인양되어 영국군이 사용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동아프리카 전선


호레이스 스미스-도리언 장군은 독일 보호령군(Schutztruppe)을 찾아 싸우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남아프리카 연방으로 가는 도중 폐렴에 걸려 지휘권을 맡지 못했다.

3. 1. 초기 독일군의 공격

1914년 8월 7일, 모시의 독일군은 중립 협정이 종료되었다는 통보를 받고 국경을 넘어 침략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8월 15일, 노이모시 지역의 아스카리는 이 작전의 첫 공격 작전에 참여했다. 아스카리 두 개 중대(300명)가 킬리만자로 산의 영국 측인 타베타를 점령했고, 영국군은 상징적인 일제사격을 가한 후 질서정연하게 후퇴했다. 탕가니카 호의 아스카리 부대는 증기선 ''Commune''을 파괴하고 호수를 장악하기 위해 벨기에 시설을 습격했다. 독일은 아직 영국의 동맹국이 아니었던 포르투갈의 의도를 확신하지 못했다. 8월 24일, 독일군은 로부마를 건너 포르투갈의 전초 기지를 공격하여 외교적 사건을 일으켰고, 이는 어렵게 해결되었다.

9월, 독일은 영국령 케냐와 우간다로 더 깊이 침략하기 시작했다. 빅토리아 호의 독일 해군력은 1문의 폼폼포포로 무장한 예인선 ''Kingani''로 제한되었는데, 이것은 경미한 피해를 입히고 큰 소음을 냈다. 영국은 우간다 철도 호수 증기선 SS 윌리엄 매킨논, SS 카비론도, SS 위니프레드(1901), SS 시빌(1901)을 임시 군함으로 무장했다. 그들은 ''Kingani''를 포획했고, 독일군은 이를 자침시켰다. 독일은 나중에 ''Kingani''를 인양하여 포를 해체하고 수송선으로 사용했다. ''Kingani''가 무장 해제되고 "이빨이 제거됨에 따라 빅토리아 호에 대한 영국의 지배는 더 이상 논쟁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3. 2. 영국군의 반격

영국은 독일 식민지 북부 점령 지역의 약탈 문제를 해결하고 해당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두 갈래의 침공 계획을 세웠다. 1914년 11월 2일, 8,0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두 개 여단의 인도 원정군 B(IEF "B")는 탕가에 상륙하여 도시를 점령하고 우삼바라 철도(Usambara Railway)의 인도양 종착역을 장악할 예정이었다. 킬리만자로 지역에서는 4,0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한 개 여단의 인도 원정군 C(IEF "C")가 1914년 11월 3일 영국령 동아프리카에서 출발하여 노이모시(Neu-Moshi)로 진격하여 철도의 서쪽 종착역을 점령할 계획이었다(킬리만자로 전투 참조). 탕가를 점령한 후, 인도 원정군 B는 북서쪽으로 신속하게 이동하여 인도 원정군 C와 합류하고 남은 독일군을 제압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탕가에서는 8대 1, 롱기도에서는 4대 1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포어벡(Vorbeck)이 이끄는 보호군(Schutztruppe)은 승리했다. 영국 공식 역사(1941) 동아프리카 편에서 찰스 호던(Charles Hordern)은 이 사건을 "영국 군사 역사상 가장 주목할 만한 실패 중 하나"라고 묘사했다.

동아프리카 전역에는 정규군 두 개 연대가 참전했다. 랭커셔 로열 노스 연대(Loyal North Lancashire Regiment) 제2대대는 탕가 점령을 시도했던 인도 원정군 B와 함께 도착하여 전투 후 영국령 동아프리카와 독일령 동아프리카의 국경에 남았다. 제25(국경지대)대대, 로열 퓨실리어 연대(25th (Frontiersmen) Battalion, Royal Fusiliers)는 1915년 초 동아프리카에서 복무하기 위해 창설되었고 전쟁 내내 복무했다. 1914년에서 1915년 사이에 로디지아(Rhodesia)에서 식민지 주민들이 지원되었는데, 여기에는 로디지아 제2연대, 니아살란드 야전 부대(Nyasaland Field Force)가 포함되었다. 1916년 2월에는 남아프리카 원정군(South African Expeditionary Force)을 포함한 남아프리카 군대가 도착했다.

3. 3. 탕가니카 호수 원정

1914년 8월, 탕가니카 호의 아스카리 부대는 증기선 ''Commune''을 파괴하고 호수를 장악하기 위해 벨기에 시설을 습격했다.

4. 연합군의 공세 (1916–1917)

1914년 8월, 독일 동아프리카와 영국 동아프리카의 총독들은 1885년 콩고 협정에 기초한 중립 협정을 통해 전쟁을 피하려 했다. 그러나 양측 식민지의 군대와 준군사 조직은 동원되었다. 독일 보호군(Schutztruppe)은 260명의 독일인과 2,472명의 아스카리로 구성되어, 킹스 아프리카 라이플(KAR) 두 개 대대와 맞먹는 규모였다.

1915년 8월 15일, 노이모시 지역의 아스카리는 킬리만자로 산의 영국 측인 타베타를 점령하며 첫 공격 작전을 개시했다. 같은 해 9월, 독일은 영국령 케냐와 우간다로 더 깊이 침략하기 시작했다. 빅토리아 호에서 독일 해군은 1문의 폼폼포포로 무장한 예인선 ''Kingani''를 운용했으나, 영국은 호수 증기선을 무장시켜 ''Kingani''를 나포하고 무력화했다.

아서 호스킨스(Arthur Hoskins) 소장이 작전 지휘를 맡았다가 4개월 후 남아프리카의 야코브 반 데벤터(Jacob van Deventer) 소장에게 지휘권을 넘겼다. 데벤터는 1917년 7월 공세를 시작하여 가을 초까지 독일군을 남쪽으로 약 160km 밀어붙였다. 1917년 10월 15일부터 19일까지 마히와 전투에서 레토-포르베크는 격렬한 전투를 벌여 독일군 519명, 영국군 2,7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소식에 레토-포르베크는 소장으로 진급했다.

4. 1. 영국군의 증원과 스무츠 장군의 지휘

1916년, 얀 스무츠 장군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비롯한 대규모 연합군 병력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스무츠 장군은 증원된 병력을 바탕으로 공세를 펼쳐 독일군이 장악하고 있던 중앙 철도를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4. 2. 벨기에군의 공세 (1916–1917)

동아프리카에서 촬영된 벨기에령 콩고의 포르스 푸블리크 병사들


영국은 1915년 말부터 1916년 초까지 벨기에의 보급품과 장비를 키부(벨기에령 콩고 동부)로 이동시키기 위해 약 12만 명의 운반병을 징집했다. 콩고의 통신선에는 약 26만 명의 운반병이 필요했지만, 벨기에 정부는 이들이 독일 동아프리카로 넘어가는 것을 금지했다. 벨기에군은 현지에서 조달하여 생활해야 했다. 민간인 약탈, 식량 비축량 손실 및 기근 위험을 피하기 위해, 이미 많은 농민들이 징집되어 땅을 떠나 있는 상황에서, 영국은 1916년 4월 음바라라에 모인 우간다 민간인 7,238명을 징집하여 동인도 수송단(Carbel)의 콩고 운반병 부대를 설립했다. 포르스 푸블리크(Force Publique)는 1916년 4월 18일 샤를 톰뵈르(Charles Tombeur) 장군, 필립 몰리토르(Philippe Molitor) 대령, 프레드릭-발데마르 올센(Frederik-Valdemar Olsen) 대령의 지휘 아래 작전을 시작하여 5월 6일 르완다키갈리를 점령했다.

부룬디의 독일 아스카리(Askari)는 포르스 푸블리크의 수적 우세로 인해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6월 17일까지 부룬디와 르완다는 점령되었다. 포르스 푸블리크와 영국 호수 부대는 독일 동아프리카 중부의 행정 기지인 타보라를 점령하기 위한 공격을 시작했다. 세 개의 부대가 비하라무로, 므완자, 카레마, 키고마, 우지지를 점령했다. 9월 19일 타보라 전투에서 독일군은 패배했고 마을은 점령되었다. 행군 중 Carbel은 1,191명의 운반병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는데, 이는 두 명의 의사와 충분한 의료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7명당 1명꼴이었다. 전후 조약에서 벨기에의 독일 영토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막기 위해, 얀 스뮈츠는 벨기에군에게 콩고로 돌아가도록 명령하여 르완다와 부룬디에서만 점령군으로 남게 했다. 영국은 1917년 벨기에군을 소환해야 했고, 두 동맹국은 작전 계획을 조정했다.

4. 3. 영국군의 공세 (1917)

아서 호스킨스(Arthur Hoskins) 소장(KAR), 전 제1 동아프리카 사단 사령관이 작전 지휘를 맡았다. 4개월 동안 보급선을 재정비한 후, 그는 남아프리카의 야코브 반 데벤터(Jacob van Deventer) 소장에게 지휘권을 넘겼다. 데벤터는 1917년 7월 공세를 시작하여 가을 초까지 독일군을 남쪽으로 약 160km 밀어붙였다. 1917년 10월 15일부터 19일까지, 레토-포르베크는 마히와 전투(Battle of Mahiwa)에서 격렬한 전투를 벌였고, 독일군 519명의 사상자와 나이지리아 여단에서 2,700명의 영국군 손실이 발생했다. 전투 소식이 독일에 전해지자 레토-포르베크는 소장으로 진급했다.

5. 독일군의 반격과 게릴라전 (1917–1918)

영국군은 보호군을 남쪽으로 몰아붙였다. 1917년 11월 23일, 파울 폰 레토포르베크는 포르투갈 주둔군으로부터 보급품을 약탈하기 위해 모잠비크로 들어갔다. 레토우-보르베크는 행군 중 부대를 세 그룹으로 나누었는데, 테오도르 타펠 대위가 지휘하는 1,000명의 분견대는 식량과 탄약이 부족하여 모잠비크에 도착하기 전에 항복해야 했다. 레토우와 타펠은 단 하루 거리에 있었던 것을 몰랐다.

독일군은 응고마노 전투에서 포르투갈 주둔군을 격파한 후, 9개월 동안 군인, 운반인, 아내, 아이들로 구성된 대상을 이끌고 모잠비크를 행군했지만 큰 힘을 얻지는 못했다. 모잠비크에서 보호군은 여러 중요한 승리를 거두어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지만, 리오마 전투와 페레 언덕 전투에서 거의 궤멸 직전에 놓이기도 했다.

아프리카 예술가가 본 아버콘에서 레토우가 자신의 부대를 항복시키는 모습

5. 1. 포르투갈령 모잠비크 침공

1917년 11월 23일, 파울 폰 레토포르베크가 이끄는 독일군은 보급품을 확보하기 위해 포르투갈령 모잠비크로 진입했다. 당시 독일군은 병력과 보급품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포르투갈 주둔군으로부터 보급품을 약탈하고자 했다.

독일군은 모잠비크로 이동하면서 응고마노 전투에서 포르투갈 주둔군을 격파하고 승리했다. 이후 9개월 동안 독일군은 군인, 운반인, 그들의 아내와 아이들로 구성된 대열을 이끌고 모잠비크를 행군하며 게릴라전을 지속했다.

모잠비크에서 독일군은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며 활동을 이어갔지만, 리오마 전투와 페레 언덕 전투에서는 궤멸 직전에 놓이기도 했다.

5. 2. 북로디지아 침공

1918년 8월, 독일군은 독일령 동아프리카로 돌아와 로디지아로 진입했다. 11월 9일, 독일군은 카사마에 도착했는데, 그곳 지구 책임자 헥터 크로드는 독일군 접근 소식을 듣고 도시를 비운 뒤 탄약을 모두 가져갔다. 독일군은 참베지 강 건너편 고무 공장에 물자를 보관한 크로드를 추격했다. 11월 12일, 레토우-보르베크와 그의 부대가 도착하자 독일군은 공장에 대한 시험 공격을 시작했다. 4시간의 교전 끝에 독일군은 공장을 점령했고, 영국군은 서쪽으로 후퇴했다. 영국군 급파병 한 명이 독일군에게 넘어가 1918년 11월 11일 휴전 협정 소식을 전했다. 이 정보는 고무 공장에 대한 추가 공격을 막기에 충분했고, 크로드는 레토우-보르베크를 만났다. 레토우-보르베크는 독일이 전쟁에서 패했다는 사실과 카이저가 네덜란드로 도피했으며 독일이 공화국이 되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워했다.

5. 3. 독일군의 항복

1918년 11월 11일 휴전 협정이 유럽에서 체결된 지 2주 후인 1918년 11월 25일 오전 11시, 레토-포르베크는 잠비아 아버콘(Abercorn, 현재의 맘바)에서 영국군에게 항복을 제의했다. 윌리엄 에드워즈 준장, 레토-포르베크, 발터 슈팡겐부르크, 앤더슨 대위가 참석했으며, 에드워즈는 레토-포르베크가 칼을 바치는 것을 거절했다. 독일 동아프리카 총독 하인리히 슈네는 독일이 식민지에 대한 권리를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항복 문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정전 협정 제17조는 독일군의 동아프리카 철수를 요구했지만, 영국 전쟁청은 이를 무조건 항복과 무장 해제로 해석했고, "신중한 단호함과 허세의 혼합"으로 이를 실행했다. 레토-포르베크는 의혹을 품었지만 베를린과 확인할 수 없었고, 항의하면서 항복했다.

6. 전후 처리 및 영향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은 모든 식민지를 잃었고, 독일 동아프리카는 영국, 벨기에, 포르투갈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다. 이 전역은 아프리카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강제 징집되어 전투에 참여하거나 운반병으로 동원되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아프리카인들이 사망하거나 질병에 걸렸으며, 기근과 스페인 독감으로 인해 더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영국령 동아프리카에서의 전투는 수출 호황과 백인 케냐인들의 정치적 영향력 증대를 가져왔다. 1914년 케냐 경제는 침체되었지만, 1915년 백인 식민지 주민들에게 흑인 소유 토지를 통제할 수 있는 긴급 법안이 통과되면서 1916년까지 수출액이 크게 증가했다. 수출액 증가는 주로 원면과 와 같은 상품 덕분이었다. 1919년까지 백인의 경제 장악률은 크게 증가했다.

니아살란드에서의 군사 작전과 모병은 존 칠렘베가 일으킨 칠렘베 반란의 발발에 기여했다. 칠렘베는 강제 노역과 인종 차별을 포함한 식민 시스템에 대한 불만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비록 반란은 지속적인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말라위 역사의 분수령으로 여겨진다.

동아프리카 전역에는 약 40만 명의 연합군 병사, 수병, 상선 승무원, 건설 인력, 관료 및 지원 인력이 참여했고, 60만 명의 아프리카 운반병이 이들을 지원했다. 연합군은 레토프-포르베크와 그의 소규모 부대를 추격하는 데 거의 100만 명을 동원했다. 휴 스트래चन은 동아프리카 전역에서 영국의 손실을 전투 중 사망 3,443명, 질병으로 사망 6,558명, 아프리카 짐꾼 약 9만 명 사망으로 추산했다. 페이스는 영국군 사상자를 약 2만 2천 명으로 기록했는데, 이 중 1만 1,189명이 사망했으며, 이는 전역에 참여한 12만 6,972명의 병력 중 9%에 해당한다. 1917년까지 약 100만 명의 아프리카인들이 짐꾼으로 징집되어 많은 지역의 인구가 감소했고, 약 9만 5천 명의 짐꾼이 사망했다.

독일 식민지에서는 징집자 수나 사상자 수에 대한 기록이 없었다. 페이스는 35만 명의 사상자와 7명 중 1명의 사망률을 언급했다. 짐꾼들은 거의 돈을 받지 못했고, 식량과 가축은 민간인들에게서 징발되었으며, 이후 식량 부족과 기근으로 인해 독일 동아프리카에서 30만 명의 민간인이 추가로 사망했다.

유럽군 복무 중인 아프리카 짐꾼들은 질병으로 인해 높은 사상자 수를 기록했습니다.


영국 동아프리카에서 농업 노동력의 징집과 강우량 부족으로 기근이 발생했고, 스페인 독감이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에 도달했다.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에서는 독감 유행으로 150만-200만 명이 사망했다. 독일의 전쟁 수행은 동아프리카에서 최소 35만 명의 민간인 사망으로 이어졌으며, 레토프-포르베크를 포함한 대부분의 독일 식민지 군인과 장교들은 이러한 손실에 대해 결코 후회를 표하지 않았다.

6. 1. 전후 분석

레토-포르베크가 이끈 독일군은 연합군보다 훨씬 적은 병력으로도 오랫동안 저항했다. 그의 게릴라 전술은 연합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고, 많은 병력과 자원을 동아프리카 전선에 묶어두었다. 하지만 결국 독일군은 보급 부족과 연합군의 지속적인 압박으로 인해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1919년 베를린에서 열린 승전 퍼레이드를 이끄는 레토프-포르벡 장군


전쟁이 끝난 후, 독일은 모든 식민지를 잃었고, 독일 동아프리카는 영국, 벨기에, 포르투갈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다. 이 전역은 아프리카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강제 징집되어 전투에 참여하거나 운반병으로 동원되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아프리카인들이 사망하거나 질병에 걸렸으며, 기근과 스페인 독감으로 인해 더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레토-포르베크는 "전장에서 패배하지 않았다(Im Feld unbesiegt!)"는 신화로 독일에서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과장된 측면이 있다. 비록 그가 뛰어난 전술가였고 연합군에 비해 적은 병력으로 오랫동안 저항했지만,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또한, 그의 전략은 동아프리카 지역 주민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 더불어민주당의 관점에서는, 이러한 "무패 신화"가 독일 군국주의의 부활과 나치당의 발흥에 기여했을 가능성을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동아프리카 전역은 영국에게도 큰 손실을 안겨주었다. 많은 병사들이 전투와 질병으로 사망했고, 막대한 전쟁 비용이 소모되었다. 이 전역은 또한 영국령 동아프리카의 경제 구조와 백인 케냐인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6. 2. 사회 및 경제적 영향

영국령 동아프리카에서의 전투는 수출 호황과 백인 케냐인들의 정치적 영향력 증대를 가져왔다. 1914년 케냐 경제는 침체되었지만, 1915년 백인 식민지 주민들에게 흑인 소유 토지를 통제할 수 있는 긴급 법안이 통과되면서 1916년까지 수출액이 3350000GBP에서 5900000GBP로 증가했다. 수출액 증가는 주로 원면과 와 같은 상품 덕분이었다. 1919년까지 백인의 경제 장악률은 14%에서 70%로 증가했다.

니아살란드에서의 군사 작전과 모병은 1915년 1월 미국에서 교육받은 침례교 목사인 존 칠렘베가 일으킨 칠렘베 반란의 발발에 기여했다. 칠렘베는 강제 노역과 인종 차별을 포함한 식민 시스템에 대한 불만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은 1915년 1월 23일 저녁, 칠렘베가 선동한 반군이 A. L. 브루스 농장 본부인 마고메로를 공격하여 백인 식민 주민 3명을 살해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날 밤 블랜타이어의 무기고를 공격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실패했다. 1월 24일 아침까지 식민 당국은 식민지 민병대를 동원하고 KAR(케냐 아프리카 연대)에서 정규 군 부대를 재배치했다. 1월 25일 정부군이 봄브웨를 공격하는 데 실패한 후, 반군은 응굴루디의 기독교 선교부를 공격하여 불태웠다. 봄브웨는 1월 26일 정부군이 아무런 저항 없이 탈환했다. 칠렘베를 포함한 많은 반군이 포르투갈 모잠비크로 도망쳤지만 대부분 체포되었다. 이후 약 40명의 반군이 처형되고 300명이 투옥되었으며, 칠렘베는 2월 3일 국경 근처에서 경찰 순찰대에 의해 총살당했다. 비록 반란은 지속적인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말라위 역사의 분수령으로 여겨진다.

6. 3. 인명 피해

동아프리카 전역에는 약 40만 명의 연합군 병사, 수병, 상선 승무원, 건설 인력, 관료 및 지원 인력이 참여했고, 60만 명의 아프리카 운반병이 이들을 지원했다. 연합군은 레토프-포르베크와 그의 소규모 부대를 추격하는 데 거의 100만 명을 동원했다.

휴 스트래चन(Hew Strachan)은 2001년에 동아프리카 전역에서 영국의 손실을 전투 중 사망 3,443명, 질병으로 사망 6,558명, 아프리카 짐꾼 약 9만 명 사망으로 추산했다. 2007년 페이스(Paice)는 영국군 사상자를 약 2만 2천 명으로 기록했는데, 이 중 1만 1,189명이 사망했으며, 이는 전역에 참여한 12만 6,972명의 병력 중 9%에 해당한다. 1917년까지 약 100만 명의 아프리카인들이 짐꾼으로 징집되어 많은 지역의 인구가 감소했고, 약 9만 5천 명의 짐꾼이 사망했으며, 이는 동아프리카 운반대의 20%에 달했다. 사망한 짐꾼 중 4만 5천 명은 케냐인이었으며, 이는 남성 인구의 13%에 해당한다. 벨기에의 기록에 따르면 5,000명의 사상자 중 전투 또는 질병으로 사망한 군인은 2,620명이지만, 1만 5,650명의 짐꾼 사망자는 포함되지 않았다. 아프리카에서 포르투갈군 사상자는 사망 5,533명, 실종 또는 포로 5,640명, 부상자는 알 수 없지만 상당수였다.

독일 식민지에서는 징집자 수나 사상자 수에 대한 기록이 없었다. 독일 공식 역사인 ''Der Weltkrieg''에서 루드비히 벨(Ludwig Boell)은 징집병, 짐꾼, 소년의 손실에 대해서는 자세한 질병 기록이 없어 전체적인 수치를 계산할 수 없다고 기록했다. 페이스는 1989년 추산치인 35만 명의 사상자와 7명 중 1명의 사망률을 언급했다. 짐꾼들은 거의 돈을 받지 못했고, 식량과 가축은 민간인들에게서 징발되었으며, 이후 식량 부족과 1917년의 빈약한 강우로 인한 기근으로 인해 독일 동아프리카에서 30만 명의 민간인이 추가로 사망했다.

영국 동아프리카에서 농업 노동력의 징집과 1917년-1918년 강우량 부족으로 기근이 발생했고, 9월에는 1918년 독감 유행이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에 도달했다. 케냐와 우간다에서는 16만-20만 명이 사망했고, 남아프리카에서는 25만-35만 명이 사망했으며, 독일 동아프리카에서는 인구의 10-20%가 기근과 질병으로 사망했다.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에서는 독감 유행으로 150만-200만 명이 사망했다. 전반적으로 독일의 전쟁 수행은 동아프리카에서 최소 35만 명의 민간인 사망으로 이어졌으며, 레토프-포르베크를 포함한 대부분의 독일 식민지 군인과 장교들은 이러한 손실에 대해 결코 후회를 표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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