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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령 콩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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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벨기에령 콩고는 1908년부터 1960년까지 벨기에가 지배했던 아프리카 지역으로, 이전에는 레오폴드 2세의 개인 소유였던 콩고 자유국이었다. 콩고 자유국 시절, 레오폴드 2세는 고무와 상아 등 자원 채취를 위해 강제 노동과 학대를 자행하여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다. 1908년 벨기에령으로 편입된 후에도 강제 노동은 지속되었지만, 교육과 의료 서비스가 개선되는 등 일부 변화가 있었다. 제1, 2차 세계 대전에서 벨기에령 콩고는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특히 우라늄 공급을 통해 맨해튼 계획에 기여했다. 1950년대 탈식민지화 흐름 속에서 콩고인들의 독립 운동이 활발해졌고, 1960년 독립을 맞이했으나, 콩고 위기를 겪으며 혼란이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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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령 콩고
지도
벨기에령 콩고 위치 지도
1935년 벨기에령 콩고(진한 녹색)와 르완다-우룬디(연한 녹색)
기본 정보
공식 명칭(프랑스어)
(네덜란드어)
일반적인 긴 명칭벨기에령 콩고
상태식민지 (벨기에 군주국)
상태 설명벨기에의 식민지
건국 사건콩고 자유국의 벨기에 합병에 관한 식민지 헌장
건국 연도1908년
건국 날짜11월 15일
멸망 사건독립 선언
멸망 연도1960년
멸망 날짜6월 30일
이전 국가콩고 자유국
이전 국가 국기Flag of the Congo Free State.svg
다음 국가콩고 공화국
다음 국가 국기Flag of the Republic of the Congo (Léopoldville) (1960–1963).svg
국기Flag of the Congo Free State.svg
국가 문장Greater Coat of Arms of the Belgian Congo.svg
문장 종류국장
문장 크기120px
국가La Brabançonne ("브라방의 노래")
[[File:La Brabançonne.ogg|]]
Vers l'avenir ("미래를 향하여")
[[File:Vers l'avenir.ogg|]]
수도보마 (1908–1923)
레오폴드빌 (1923–1960)
국가 표어Travail et Progrès – L'union fait la force ("노동과 진보 - 단결은 힘이다")
공용어프랑스어 (공식)
네덜란드어
링갈라어
콩고어
스와힐리어
칠루바어
통화벨기에령 콩고 프랑
종교로마 가톨릭교회 (사실상)
현재 국가콩고 민주 공화국
정치
군주레오폴드 2세 (1908–1909)
알베르 1세 (1909–1934)
레오폴드 3세 (1934–1951)
보두앵 (1951–1960)
총독테오필 와히스 (1908–1912, 첫 번째)
헨드릭 코르넬리스 (1958–1960, 마지막)
역사
벨기에 합병1908년 11월 15일
독립 선언1960년 6월 30일
인구
1950년12,184,000
1960년15,451,000
기타
국가 표어 (프랑스어)Travail et Progrès
국가 표어 (번역)노동과 전진

2. 콩고 자유국 (1885년-1908년)

벨기에 레오폴드 2세, 1885년부터 1908년까지 벨기에 국왕이자 콩고 자유국의 사실상 소유주


레오폴드 2세 통치하 콩고 자유국에서 자행된 만행의 희생자들


19세기 후반, 유럽 열강의 아프리카 분할 경쟁 속에서 벨기에 레오폴드 2세는 개인적인 야심으로 콩고 분지에 눈독을 들였다. 당시 열대 우림과 질병 등으로 유럽인의 접근이 어려웠던 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레오폴드 2세는 국제 아프리카 협회라는 이름뿐인 기구를 내세우고 탐험가 헨리 모턴 스탠리를 고용하여 영향력을 확보했다.[7] 벨기에 정부는 식민지 개척에 소극적이었으나, 레오폴드 2세는 독자적으로 계획을 밀어붙였다.

중앙 아프리카, 특히 콩고 분지를 둘러싼 열강의 경쟁이 심화되자, 1884년 오토 폰 비스마르크 주재로 베를린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는 표면적으로 콩고 분쟁의 평화적 해결과 자유 무역 지대화를 목표로 했지만, 결과적으로 레오폴드 2세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8] 레오폴드 2세는 이 회의를 통해 국제적인 승인 아래 광대한 영토(2344000km2)를 확보하여, 1885년 콩고 자유국을 설립했다.

콩고 자유국은 이름과 달리 레오폴드 2세 개인이 국제 아프리카 협회를 통해 사적으로 통제하는 사기업 국가나 다름없었다.[9] 1885년부터 1908년까지 존속한 이 기간 동안, 레오폴드 2세는 고무와 상아 등 천연자원을 착취하기 위해 강제 노동을 동원하고 '공안군'(Force Publique)이라는 사병 조직을 이용해 원주민들을 극도로 잔혹하게 탄압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원주민이 학살되거나 신체가 절단되는 등 끔찍한 인권 유린이 자행되었으며, 유럽에서 유입된 질병까지 겹쳐 인구가 급감하는 인도주의적 재앙이 발생했다. 정확한 희생자 수는 기록 부족으로 추산하기 어렵다.[10][11] '공안군'은 아랍 노예 무역 세력과 콩고-아랍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콩고 자유국의 참상은 1900년대 초 로저 케이스먼트가 작성한 케이스먼트 보고서(1904년) 등을 통해 국제 사회에 폭로되었고, 이는 거센 비난 여론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국제적인 압박에 굴복한 레오폴드 2세는 콩고에 대한 개인 통치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1908년 벨기에 정부가 콩고를 공식 식민지로 합병하여 "벨기에령 콩고"가 되었다.

2. 1. 레오폴드 2세의 콩고 지배



19세기 후반까지 유럽인들은 콩고 분지 깊숙이 진출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열대 우림, 늪지가 펼쳐져 있었고, 말라리아아프리카 수면병 같은 열대 질병이 만연하여 유럽인들의 탐험과 개발 활동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1876년, 벨기에 레오폴드 2세는 아프리카 탐험과 식민지화를 목표로 국제 아프리카 협회(International African Association)를 조직했다. 이 협회는 주요 아프리카 탐험가들의 협력과 여러 유럽 정부의 지원을 받았다. 탐험가 헨리 모턴 스탠리가 1878년 콩고 지역 탐험을 마친 후, 레오폴드 2세는 스탠리에게 접촉하여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하도록 고용했다.[7]

레오폴드 2세는 1865년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벨기에를 위한 식민지를 확보하려는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벨기에 정부나 국민들은 군주의 제국 건설 야심에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야심차고 고집이 강했던 레오폴드 2세는 결국 독자적으로 일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중앙 아프리카를 둘러싼 유럽 열강들의 경쟁은 외교적 긴장을 유발했는데, 특히 아직 어떤 유럽 국가도 영유권을 주장하지 않은 콩고 분지를 둘러싼 갈등이 심화되었다. 1884년 11월, 독일 제국의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콩고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14개국 대표를 베를린으로 소집하여 베를린 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에서 중앙 아프리카에 대한 유럽 국가들의 영유권 주장이 공식적으로 승인되지는 않았지만, 분쟁 없이 지역을 분할하기 위한 규칙들이 합의되었다. 이 규칙에는 콩고 분지를 자유 무역 지대로 인정하는 내용 등이 포함되었다. 레오폴드 2세는 이 회의에서 외교적 승리를 거두었고,[8] 그가 단독 주주로 있던 "자선" 단체, 즉 국제 아프리카 협회는 콩고 자유국으로 조직될 광대한 영토(2344000km2)를 할당받았다.

콩고 자유국은 비정부 기구인 국제 아프리카 협회를 통해 레오폴드 2세가 개인적으로 통제하는 사실상의 사기업 국가 형태로 운영되었다.[9] 이 국가는 현재 콩고 민주 공화국의 전체 영토를 포함했으며, 1885년부터 1908년까지 존속했다. 1908년 벨기에 정부는 마지못해 이 지역을 공식 식민지로 합병하게 된다. 레오폴드 2세의 통치하에서 콩고 자유국은 극심한 인도주의적 재앙을 겪었다. 당시 정확한 기록이 부족하여, 무자비한 착취와 유럽인들과의 접촉으로 새롭게 유입된 질병(예: 1889년-1890년 범유행)에 대한 면역력 부족으로 얼마나 많은 원주민이 사망했는지 정확히 산출하기는 어렵다.[10] 역사학자 윌리엄 루바인스타인은 아담 호치실드가 제시한 인구 감소 수치가 부정확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하며, 20세기 이전 콩고의 정확한 인구는 알 수 없으며 2천만 명과 같은 추정치는 추측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11] 레오폴드 2세의 사병 조직인 '공안군'(Force Publique)은 고무와 상아 등 자원 채취를 위한 강제 노동을 시행하며 원주민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이들은 지역 공동체를 파괴하고 원주민들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하거나 신체를 절단하는 등 잔혹한 학대를 자행했다. 또한 '공안군'은 잔지바르/스와힐리족 세력가인 팁푸 팁과 같은 아프리카 및 아랍 노예상들과 콩고-아랍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1900년대 초, 영국과 미국 등 서구 언론은 콩고 자유국에서 벌어지는 잔학 행위를 대중에게 알리기 시작했다. 특히 1904년 영국의 외교관 로저 케이스먼트가 작성한 케이스먼트 보고서는 참혹한 실상을 고발하며 큰 파장을 일으켰다. 국제적인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레오폴드 2세는 1904년 국제 조사 위원회의 콩고 자유국 방문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끊임없는 여론의 압박과 외교적 노력으로 1908년 레오폴드 2세의 개인 통치는 막을 내렸고, 콩고는 벨기에 정부의 공식 식민지, 즉 "벨기에령 콩고"로 합병되었다.

2. 2. 콩고 자유국의 실상



19세기 후반까지 유럽인들은 콩고 분지로 거의 진출하지 못했다. 열대 우림, 늪지와 더불어 말라리아, 아프리카 수면병과 같은 열대 질병이 만연하여 유럽인들의 탐험과 개발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1876년, 벨기에 레오폴드 2세는 아프리카 탐험과 식민화를 목표로 주요 아프리카 탐험가들과 여러 유럽 정부의 지원을 받아 국제 아프리카 협회를 조직했다. 헨리 모턴 스탠리가 1878년 탐험을 마친 후, 레오폴드 2세는 스탠리를 설득하여 자신의 이익을 위해 콩고 지역에서 활동하도록 고용했다.[7]

레오폴드 2세는 1865년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벨기에의 식민지 확보를 강하게 원했다. 하지만 벨기에 정부는 식민 제국 건설에 거의 관심이 없었다. 야심만만한 레오폴드 2세는 결국 독자적으로 계획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중앙 아프리카를 둘러싼 유럽 열강들의 경쟁은 특히 콩고 분지를 두고 외교적 긴장을 유발했다. 1884년 11월,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콩고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14개국 대표가 모인 베를린 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에서 중앙 아프리카에 대한 유럽 열강의 영토 주장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분쟁 없이 지역을 분할하기 위한 규칙들을 합의했다. 이 규칙에는 콩고 분지를 자유 무역 지대로 인정하는 내용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레오폴드 2세는 베를린 회의에서 외교적 승리를 거두었고,[8] 그가 단독 주주로 있는 "자선" 단체는 2344000km2에 달하는 광대한 영토를 할당받아 콩고 자유국을 세우게 되었다.

콩고 자유국은 비정부 기구인 국제 아프리카 협회를 통해 레오폴드 2세가 사적으로 통제하는 기업형 국가로 운영되었다.[9] 현재의 콩고 민주 공화국 영토 전체를 포함했으며, 1885년부터 1908년까지 존속하다가 벨기에 정부에 의해 합병되었다. 레오폴드 2세의 통치 아래 콩고 자유국은 끔찍한 인도주의적 재앙을 겪었다. 정확한 기록 부족으로 인해 무자비한 착취와 유럽인들과의 접촉으로 유입된 새로운 질병(예: 1889년-1890년 인플루엔자 대유행)에 대한 면역력 부족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사망했는지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10] 윌리엄 루바인스타인은 아담 호치실드가 제시한 인구 감소 수치에 대해 "20세기 이전 콩고의 인구를 정확히 알 방법이 없으며, 2천만 명과 같은 추정치는 순전히 추측일 뿐"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11] 레오폴드 2세의 사병 조직인 ''강제 공화국''(Force Publique|포르스 퓌블리크프랑스어)은 고무와 상아 등 자원 채취를 위해 강제 노동을 강요하며 원주민들을 공포에 몰아넣었고, 지역 사회를 파괴하며 무차별적인 살해와 학대를 저질렀다. ''강제 공화국''은 또한 잔지바르/스와힐리족 세력가인 팁푸 팁과 같은 아프리카 및 아랍 노예상에 맞서 콩고-아랍 전쟁(1892년-1894년)을 벌이기도 했다.

1904년 로저 케이스먼트가 작성한 케이스먼트 보고서를 통해 콩고 자유국의 잔혹 행위와 참상이 폭로되면서, 1900년대 초 유럽과 미국 언론은 이 문제를 대중에게 알리기 시작했다. 국제적인 비난 여론에 밀려 레오폴드 2세는 1904년 국제 조사 위원회의 콩고 자유국 방문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08년, 국제 사회의 압력과 외교적 노력으로 레오폴드 2세의 개인 통치는 막을 내렸고, 콩고는 벨기에 정부에 합병되어 "벨기에령 콩고"가 되었다.

3. 벨기에령 콩고 (1908년-1960년)

벨기에령 콩고 총독(1908~1923)의 전 거주지 (보마)


레오폴드 2세의 콩고 자유국 통치에 대한 국제적 비난이 거세지면서, 벨기에 의회는 1908년 10월 18일 콩고를 벨기에 식민지로 병합하는 안을 통과시켰다. 사회주의자와 급진주의자 대다수는 병합에 강력히 반대했으나, 가톨릭과 자유당 의원 다수의 찬성으로 결정되었다.[12] 이에 따라 1908년 11월 15일, 벨기에령 콩고가 벨기에 왕국의 식민지로 공식 출범했다. 이는 레오폴드 2세가 콩고 자유국의 상당 부분을 별도의 왕실 재산으로 유지하려던 시도를 포기한 이후였다.

벨기에 정부가 행정을 인수하면서 "레드 러버"와 같은 잔혹한 착취와 자의적인 폭력은 일부 억제되는 등 상황이 다소 개선되었다. 1908년 식민지 헌장 제3조는 "어느 누구도 회사나 사적 이익을 위해 일하도록 강요받을 수 없다"고 명시했으나, 이는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고 벨기에 정부는 덜 노골적인 방식으로나마 강제 노역을 지속했다.[13]

콩고 자유국에서 벨기에령 콩고로의 전환은 변화의 계기였지만, 상당한 연속성도 지녔다. 콩고 자유국의 마지막 총독인 바론 와이스(Baron Wahis)는 벨기에령 콩고에서도 직무를 유지했고, 레오폴드 2세 행정부의 다수 인사들도 그대로 남았다.[14] 레오폴드 국왕 치하 통치와 비교하여 조건이 다소 개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벨기에 정부는 여전히 원주민의 의료 및 기본 교육에는 큰 중요성을 두지 않았으며[15], 콩고의 천연자원과 광물 자원을 벨기에 경제를 위해 개발하는 것이 식민지 확장의 주된 동기로 남아 있었다.

식민 통치 구조는 식민지 헌장에 따라 브뤼셀의 식민부 장관과 현지의 총독을 중심으로 운영되었으며, 콩고는 15개의 행정 구역으로 나뉘었다. 교육은 주로 가톨릭교회와 개신교 선교 단체들이 담당했으며, 초기에는 초등 교육에 집중되었으나 고등 교육 기회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식민 정부는 경제 개발을 위해 인프라 정비[92]를 수반하는 경제 재편을 추진했다.

3. 1. 벨기에령 콩고의 통치 구조



왼쪽은 브뤼셀에 있는 벨기에 헌법재판소(Constitutional Court)에 인접한 전 식민지부(Ministry of the Colonies)


벨기에령 콩고의 통치는 1908년 식민지 헌장에 명시된 바에 따라 이루어졌다.[16] 행정권은 벨기에 브뤼셀에 위치한 식민부 장관이 식민위원회(''Conseil Colonial'')의 지원을 받아 행사했다. 식민위원회는 식민지 장관을 의장으로 하여 콩고 통치를 감독했으며, 14명의 위원으로 구성되었다. 이 중 3명은 상원, 8명은 하원, 3명은 국왕이 임명했다. 벨기에 의회는 벨기에령 콩고에 대한 입법권을 가졌고, 콩고 예산은 매년 벨기에 의회에서 심의되었다.

1930년대에 발행된 벨기에령 콩고 지도


현지 식민 행정부의 최고 책임자는 총독이었다. 총독과 행정부는 처음에는 콩고강 어귀 근처의 보마에 주둔했으나(1886년~1926년), 1923년부터 수도를 내륙으로 약 300km 떨어진 레오폴드빌(현 킨샤사)로 이전했다.[17] 초기 벨기에령 콩고는 행정적으로 콩고-카사이, 에콰토르, 오리엔탈, 카탕가의 네 개 주로 나뉘었고, 각 주는 부총독이 관리했다. 이후 식민지는 15개의 행정 구역으로 나뉘기도 했으며, 1932년 행정 개혁을 통해 주의 수는 여섯 개로 늘어나고 부총독의 직함은 주지사로 변경되었다.[18]

영토 서비스(territorial service)는 식민 행정의 실질적인 중추였다.[20] 식민지는 주(1933년 개혁 이후 6개) 아래 여러 지역(콩고 전체 24개 지역)으로, 각 지역은 다시 소수의 영토(총 약 130~150개 영토)로 나뉘었다.[21] 각 영토는 한 명의 영토 관리자(territorial administrator)와 보조원들이 관리했으며, 그 크기는 벨기에의 여러 주를 합친 것보다 큰 경우도 많았다. 영토 관리자는 자신의 영토를 순찰하고 주 행정부에 상세한 연례 보고서를 제출할 의무가 있었다. 영토는 다시 수많은 "추장령"(chefferies)으로 세분화되었고, 벨기에 행정부는 각 추장령의 우두머리로 "전통 추장"(chefs coutumiers)을 임명하여 간접 통치를 시행했다.

법 체계는 유럽인을 위한 법원 체계와 원주민을 위한 법원(''tribunaux indigènes'') 체계로 이원화되어 운영되었다. 이 원주민 법원은 전통 추장이 주재했지만, 그 권한은 제한적이었고 식민 행정부의 엄격한 통제를 받았다. 1936년 기록에 따르면 벨기에에서 파견된 콩고 통치 관리자는 728명이었다.[22] 콩고에 거주하는 벨기에인과 콩고인 모두 식민 정부 운영에 대해 발언권이 없었으며, 어떠한 정치 활동도 허용되지 않았다.[23]

식민지의 공공 질서는 벨기에 장교들의 지휘 아래 현지에서 모집된 군대인 ''포르스 푸블리크''(Force Publique)가 유지했다. 벨기에 본토의 정규군 부대가 벨기에령 콩고(예: 카미나)에 주둔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식민 국가와 백인이 행사하는 모든 권위는 콩고인들에게 ''불라 마타리''(''bula matari'', "돌을 부수는 자")라고 불렸다. 이 용어는 원래 스탠리가 하부 콩고 지역에서 길을 낼 때 다이너마이트로 바위를 부순 것에서 유래한 별명이었으나,[24] 점차 식민 국가의 저항할 수 없는 강압적인 힘을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25]

3. 2. 제1, 2차 세계 대전과 벨기에령 콩고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동아프리카에서 활동하는 콩고 자유군


벨기에령 콩고는 제1차 세계 대전제2차 세계 대전에 직접 참전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초기에는 콩고 자유군(Force Publique)과 독일 식민지 군대 간의 대치가 있었으나, 1916년과 1917년 영국과 벨기에의 연합 침공으로 동아프리카 전역의 일부인 공개전으로 확대되었다. 1916년, 콩고 자유군 사령관인 샤를 톰뵈르 중장은 현지 운반병의 지원을 받는 1만 5천 명의 군대를 집결시켰다. 전쟁 기간 동안 최소 26만 명의 원주민 운반병이 동원된 것으로 추정된다.[26] 이 군대는 키갈리(현 르완다 수도)로 진격하여 1916년 5월 6일에 함락시켰고, 격렬한 전투 끝에 9월 19일 타보라(현 탄자니아의 일부)를 점령했다.[26] 1917년 마헨게(현 탄자니아)를 정복한 후, 2만 5천 명으로 증강된 벨기에령 콩고 군대는 독일 동아프리카의 3분의 1을 점령했다.[26]

제1차 세계 대전 후,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독일은 이전 독일 동아프리카의 서부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벨기에에 양도했고, 이 지역은 르완다-우룬디라는 이름으로 벨기에 행정부 하의 국제 연맹 위임 통치 지역이 되었다. 이 지역들은 벨기에령 콩고의 일부가 되지는 않았다. 르완다-우룬디는 나중에 르완다부룬디로 독립했고, 벨기에가 통제했던 다른 독일 동아프리카 지역들은 탕가니카에 합쳐져 이후 탄자니아가 되었다.[27]

제2차 세계 대전 중 벨기에령 콩고는 런던의 망명 벨기에 정부에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1940년 5월 독일이 벨기에를 점령한 후, 벨기에령 콩고는 망명 정부에 대한 충성을 선언했다. 벨기에령 콩고와 나머지 자유 벨기에군은 영국 본토 전투 등에서 연합군 편에서 싸웠으며, 영국 공군(RAF) 제349 비행대대와 남아프리카 공군(SAAF) 제350 비행대대 소속으로 28명의 조종사가 아프리카에서 활동했다.[28] 콩고 자유군은 다시 아프리카에서 연합군 작전에 참여했다. 벨기에 장교 지휘 하의 콩고군은 이탈리아 동아프리카에서 이탈리아 식민지 군대와 싸웠고, 1940년에서 1941년 제2차 동아프리카 전역에서 오귀스트-에두아르 질리아르 중장의 지휘 아래 아소사, 보르타이, 사이오 포위전 등에서 승리를 거두었다.[49] 1941년 7월 3일, 콩고 자유군에 의해 고립된 피에트로 가제라 장군 휘하의 이탈리아군은 항복했다. 콩고 부대는 또한 버마 전역에서 영국군과 함께 극동 전선에서 복무했다.[29]

맨해튼 계획에서는 유니온 미니에르의 전무인 에드가르 생지에가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940년, 그는 우라늄 광석을 미국으로 집중 수송했다.[93] 1944년 6월 13일,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과 윈스턴 처칠 영국 수상은 퀘벡 협정에 따라 워싱턴 D.C.에 미합중국-영국 원자력 개발 공동위원회 (Combined Development Trust)[94]를 설립하는 합의 문서를 작성했다. 이 신탁에는 미국, 영국, 캐나다가 각각 대표 2명씩을 파견했으며, 의장은 미국 대표가 맡았다. 이 신탁은 유니온 미니에르와 세 가지 계약을 체결했다. 9월의 계약은 캐나다와의 라듐 생산 경쟁에서 패배하여 1935년에 폐쇄했던 유니온 미니에르의 생산 시설을 신탁이 필요 경비를 부담하여 재개하는 것이었고, 신탁이 유니온 미니에르로부터 광석을 구매할 때의 단가도 결정되었다.

1944년 말, 벨기에 정부는 향후 10년 동안 벨기에령 콩고의 우라늄 광석을 미국과 영국에만 독점적으로 판매할 것을 약속했다. 9월 19일에 잠정 합의가 선행된 이 약속은, 제9조 (a)에 명시된 상업적 에너지 이용 개시 시 영미와 동등한 조건으로 벨기에가 참여한다는 조항 외에는 벨기에 측의 구체적인 이득이 명확하지 않았다. 계약 내용은 국가적 비판과 국제 여론을 의식하여 특정 비밀로 분류되었다.

1945년 10월, 신탁과 유니온 미니에르 간에 나머지 두 가지 계약이 체결되었다. 하나는 광석 1만 톤을 1파운드당 1.9USD에 구매하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1956년에 정부 간 협정이 효력을 상실할 때까지 최대한 많은 양의 우라늄을 채굴하고, 대금은 달러와 파운드로 절반씩 지불하며, 채굴된 우라늄이 군사적으로 이용될 것임을 명시했다. 1946년 초 벨기에가 우라늄 공급을 국유화하는 법안을 제출했으나, 벨기에 수상이 의회를 해산시켜 법안은 자동적으로 폐기되었다. 결과적으로 에드가르 생지에의 활약 덕분에 벨기에령 콩고의 우라늄 사업은 차질 없이 진행되었다.

3. 3. 경제 정책

1912년 콩고 강 보마에 도착한 증기선


1916년 9월 19일 타보라 전투 이후 포르스 푸블리크의 벨기에-콩고군


콩고의 경제적 착취는 식민 통치자들의 최우선 과제 중 하나였으며, 광산 및 농업 지역 개발을 위한 철도 건설이 핵심 수단이었다.[30] 초기에는 고무가 주요 수출품이었으나, 20세기 초 동남아시아 지역과의 경쟁으로 수출 비중이 77%에서 15%로 감소했다. 대신 카탕가 지방의 구리 광산 개발이 활발해졌다. 벨기에 소유의 상카탕가 연합광산 (Union Minière du Haut-Katanga|UMHK프랑스어)은 구리 채굴을 장악하고 베이라 항구까지 연결되는 철도를 이용했다. 제1차 세계 대전으로 구리 수요가 급증하면서 생산량은 1911년 997ton에서 1917년 27462ton으로 급증했다가 1920년 19000ton으로 감소했다. 제련소는 루붐바시에서 운영되었으며, 전쟁 전에는 독일에 판매되던 구리는 전쟁 중 영국이 전량 구매하여 그 수익은 망명 벨기에 정부로 들어갔다. 전쟁 기간 동안 다이아몬드와 금 채굴도 확대되었다. 영국의 리버 브라더스는 팜유 사업을 크게 확장했으며, 코코아, 쌀, 목화 생산량도 증가했다. 늘어난 수출 물량을 처리하기 위해 새로운 철도와 증기선 노선이 개설되었다.[31] 제1차 세계 대전(1914~1918년) 동안에는 cultures obligatoires|강제 재배프랑스어 시스템이 도입되어, 콩고 농민들은 수출용 작물(목화, 커피, 땅콩) 재배를 강요받았다.[32] 지역 행정관과 주 정부 농업 기술자들은 이를 감독하고 필요한 경우 제재하는 임무를 맡았다.[33]

1920년경 카탕가의 키산가 광산에서 일하는 르완다 이주 노동자


벨기에 통치 하에서 콩고 경제 기반 시설 투자는 1920년대와 1950년대에 집중되었다.[34] 1921년 벨기에 정부는 식민지 내 민간 기업의 호황을 지원하기 위한 공공 인프라 프로젝트 자금 조달을 위해 벨기에 콩고에 (벨기에 프랑)의 대출을 제공했으며, 정부 소유 기업(킬로-모토 광산, 라 소시에테 나시오날 데 트랑스포르 플뤼비오 등)의 많은 부분을 민영화했다.[35]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마타디-레오폴드빌, 엘리자베스빌-포르 프랑키 간 철도 등 운송 인프라 투자가 우선시되어, 1920년부터 1932년까지 2450km의 철도가 건설되었다.[36] 보마, 마타디, 레오폴드빌, 코킬하빌 등 주요 도시의 항만 시설과 전력, 상수도 시설 투자도 이루어졌고, 공항 건설과 브뤼셀-레오폴드빌 간 전화선도 설치되었다. 벨기에 콩고 투자의 약 50%는 정부가, 나머지 50%는 상업 기업이 담당했다. 상카탕가 연합광산(UMHK)를 중심으로 한 광업(카탕가의 구리와 코발트, 카사이의 다이아몬드, 이투리의 금)이 민간 투자의 대부분을 유치했다.[37] 이를 통해 벨기에 제네랄 소시에테(Société Générale de Belgique)는 벨기에 콩고에 거대한 경제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민간 기업들은 막대한 이윤을 창출했지만, 이는 대부분 배당금 형태로 유럽 및 해외 주주들에게 유출되었다.[38]

벨기에 콩고의 철도와 수운


1920년대 경제 호황기에는 많은 젊은 콩고 남성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 근교 기업에 고용되었다. 킨샤사(당시 레오폴드빌) 인구는 1920년에서 1940년 사이 거의 두 배가 되었고, 루붐바시(당시 엘리자베스빌) 인구는 1923년 약 16,000명에서 1929년 33,000명으로 증가했다.[39] 노동력은 전문 채용 회사(로버트 윌리엄스 & Co, 부르스 뒤 트라바이유 카사이 등)나 정부 채용 사무소(오피스 드 트라바이유-오피트라 등)를 통해 모집되었으며, 특히 카탕가 지역에서는 탕가니카, 포르투갈령 앙골라, 북부 로디지아, 그리고 1926년 이후에는 르완다-우룬디 출신 이주 노동자들이 주요 노동력을 구성했다.[40] 이러한 대규모 노동 이동은 농촌 공동체의 경제 기반을 약화시켰고 노동력 부족을 야기했다. 식민 정부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지역별 "노동 가능 인구" 최대 할당량을 설정하고, 인구 밀집 지역의 노동자 수만 명을 남부 카탕가의 구리 광산 등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정책을 폈다. 농업 부문에서도 식민 국가는 소위 "빈 땅"(현지 주민이 직접 사용하지 않는 땅)을 인수하여 유럽 기업, 개인 백인 토지 소유자(''콜롱''), 또는 선교부에 영토를 재분배하며 광범위한 농장 경제를 발전시켰다. 콩고의 팜유 생산량은 1914년 2500ton에서 1921년 9000ton, 1957년 230000ton으로 증가했다. 목화 생산량은 1932년 23000ton에서 1939년 127000ton으로 증가했다.[41] 자본주의 식민 경제에서 아프리카 노동력의 동원은 벨기에 콩고에서 화폐 사용의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기본적인 생각은 콩고의 발전이 벨기에 납세자가 아니라 콩고인 자신이 부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42] 식민 국가는 콩고인에게 화폐로 세금을 부과할 수 있어야 했으므로, 그들이 식민 경제의 틀 내에서 생산물이나 노동력을 판매하여 돈을 벌 수 있는 것이 중요했다.

1920년대 초 식민지부가 제작한 선전 전단


1920년대 경제 호황으로 벨기에 콩고는 세계 최고의 구리 광석 생산국 중 하나가 되었다. 1926년 한 해 동안만 UMHK는 80000ton 이상의 구리 광석을 수출했으며, 그 대부분은 호보켄(벨기에)에서 가공되었다.[43] 1928년 알베르 1세 국왕은 카탕가 광산 지역을 철도(최대 포르 프랑키)와 수상 운송(포르 프랑키에서 레오폴드빌)을 통해 대서양 항구인 마타디까지 연결하는 소위 '보아 나시오날'을 개통하기 위해 콩고를 방문했다.

1930년대의 대공황은 원자재와 농산물에 대한 국제 수요 감소(예: 땅콩 가격이 1.25프랑에서 25상팀(센트)으로 하락)로 인해 수출에 의존하는 벨기에령 콩고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카탕가 광산 지역과 같은 일부 지역에서는 고용이 70% 감소했다. 전국적으로 임금 노동자 수는 72,000명 감소했고 많은 노동자들이 마을로 돌아갔다. 이러한 노동력 이동으로 레오폴드빌(현 킨샤사)의 인구는 33% 감소했다.[44] 농촌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식민 정부는 수출 수요 변동에 덜 의존하는 강력한 내수 시장 개발을 지원하고, 강제 경작 계획으로 인한 심각한 토양 침식과 토양 고갈의 영향을 극복하기 위해 소위 "토착 농민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이 정책은 제2차 세계 대전 후 식민 정부에 의해 콩고 전역에서 대규모로 시행되기 시작했다. 이 계획은 개별 가정에 토지를 할당하고 선별된 종자, 농업 자문, 비료 등의 정부 지원을 제공함으로써 토착 농업을 현대화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45] 1934년에 설립된 양감베에 대규모 실험지와 실험실을 갖춘 벨기에령 콩고 농업 연구 국립 연구소(INEAC)는 작물 선발과 농업 연구 및 노하우의 보급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46]

맨해튼 계획에 사용된 우라늄의 대부분은 신콜로브웨 광산에서 채굴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산업 생산과 농업 생산량은 급격히 증가했다. 콩고 인구는 강제 경작 정책 강화 등을 통해 "전쟁 노력"의 가장 큰 부담을 짊어졌다.[47] 말레이가 일본군에 함락된 후(1942년 1월), 벨기에령 콩고는 연합국에 고무를 공급하는 전략적 요충지가 되었다.[48] 벨기에령 콩고는 제2차 세계 대전(및 냉전 시대) 동안 특히 신콜로브웨 광산에서 미국으로 우라늄을 수출하는 주요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이 식민지는 맨해튼 계획에 사용된 우라늄을 제공했으며, 여기에는 1945년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에도 포함되었다.[49] 유니온 미니에르 전무인 에드가르 생지에가 중책을 맡았다. 1940년, 그는 우라늄 광석을 미국으로 집중 수송했다.[93]

1944년 6월 13일,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과 윈스턴 처칠 영국 수상은 퀘벡 협정에 따라 워싱턴 D.C.에 ''미합중국-영국 원자력 개발 공동위원회''[94]를 설립하는 합의 문서를 작성했다. 이 신탁에는 미국, 영국, 캐나다가 각각 대표 2명씩을 파견했다. 의장은 미국 대표가 맡았다. 이 신탁은 유니온 미니에르와 세 가지 계약을 체결했다. 9월의 계약은 캐나다와의 라듐 생산 경쟁에서 패배하여 1935년에 폐산했던 유니온 미니에르를 신탁이 필요 경비를 부담하여 재개하는 것이었고, 신탁이 유니온 미니에르로부터 광석을 구매할 때의 단가도 결정되었다.

1944년 말, 벨기에 정부는 향후 10년 동안 미국영국에만 벨기에령 콩고의 우라늄 광석을 매각할 것을 약속했다. 9월 19일에 잠정 합의가 선행한 이 약속은 이득이 적다고 여겨졌다. 제9조 (a)는 상업적 에너지 이용 개시부터 영미에 대한 동등한 조건으로 벨기에의 참여를 인정하는 것이었으나, 그 외의 국익 확보가 미흡하다는 평가와 우라늄 생산 자체에 대한 국제 여론의 비판 때문에 계약 내용은 비밀에 부쳐졌다.

1945년 10월, 신탁-유니온 미니에르 간에 나머지 두 가지 계약이 체결되었다. 하나는 광석 1만 톤을 파운드당 1.9USD에 구매하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1956년에 정부 간 협정이 효력을 상실할 때까지 최대한 많이 채굴하고, 대금이 달러와 파운드로 반반씩 지불되며, 군사적으로 이용되는 것을 명시했다. 1946년 초 벨기에가 우라늄 공급을 국유화하는 법안을 제출하자 계약 당사자들이 동요했으나, 벨기에 수상은 의회를 해산시켜 법안을 자동 폐기시켰다. 벨기에령 콩고의 우라늄 사업은 에드가의 활약 덕분에 궤도에 올랐다.

3. 4. 문명화 사명과 사회 변화

1920년경 레오폴드빌 인근을 순회하는 스헤우티스트 선교사


레오폴드 2세의 개인 통치에 대한 국제적 비난이 거세지자, 벨기에는 1908년 콩고 자유국을 공식적으로 병합하여 벨기에령 콩고를 수립했다. 벨기에 식민 당국은 유럽 문화의 우월성을 전제로 한 문명화 사명을 통치의 명분으로 내세웠다. 이는 당시 아프리카 사회에 존재한다고 여겨졌던 부족 간 전쟁, 식인 풍습, 인신 공양 등 소위 "원시적인" 관행들을 근절하고 문명화된 사회를 건설한다는 논리에 기반했다.[53][54][55]

문명화 사명은 경제적, 교육적 발전과 밀접하게 연관되었다. 가톨릭 및 개신교 선교사들은 데이비드 리빙스턴과 같은 초기 탐험가들의 뒤를 이어 콩고 사회에 깊숙이 관여했다.[56][57] 이들은 기독교 개종 활동과 더불어 기본적인 서구식 교육과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활동은 단순히 인도주의적인 목적뿐만 아니라, 콩고 사회를 서구 자본주의 모델에 편입시키고, 식민 경제에 필요한 훈련되고 건강한 노동력을 확보하려는 의도와도 연결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식민 정부는 경제 및 사회 발전에 더욱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1949년에 발표된 10개년 계획은 주택 건설, 에너지 공급, 농촌 개발, 의료 인프라 구축에 중점을 두었으며, 이는 10년간의 강력한 경제 성장으로 이어져 콩고인들도 처음으로 상당한 규모의 혜택을 누리게 되었다.[50][51] 경제 성장과 함께 벨기에인의 콩고 이주도 늘어나, 1950년 약 3만 9천 명이던 벨기에인 인구는 1960년 8만 8천 명 이상으로 증가했다.

1953년에는 콩고인에게 처음으로 자신의 명의로 사유 재산을 소유하고 거래할 권리가 부여되었다. 1950년대에는 주요 도시(레오폴드빌, 엘리자베스빌, 스탠리빌, 루루아부르)를 중심으로 작지만 꾸준히 성장하는 콩고인 중산층이 등장하기 시작했다.[52] 이러한 사회경제적 변화와 교육 및 의료 서비스의 제한적 확대는 콩고 사회에 점진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1950년대 후반에 이르러 아프리카인들의 민족적 열망이 고조되면서 정치적 상황은 급변했고, 이는 1960년 벨기에령 콩고 총선과 독립으로 이어졌다.

3. 4. 1. 교육

야쿠수 의과대학 실험실의 학생들, 약 1930–1950년


마리아 수녀회 프란치스칸에 의한 교육 (약 1930년)


벨기에령 콩고의 교육 제도는 당시 벨기에 본국과 마찬가지로 가톨릭교회가 주도했으며, 일부는 개신교 교회가 담당했다. 교육 과정은 기독교적 가치관과 서구적 가치관을 반영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실제로 1948년 기준으로 전체 교육 시설의 99.6%가 기독교 선교 단체에 의해 운영되었다. 원주민을 대상으로 한 교육은 주로 종교적이거나 직업 훈련의 성격을 띠었으며, 학생들은 읽기, 쓰기, 기초적인 수학 등 기본적인 내용을 배웠다.

벨기에령 콩고는 아프리카 식민지 중에서는 드물게 초등학교 교육 과정에서 현지 언어(키콩고어, 린갈라어, 칠루바어, 스와힐리어)를 사용하도록 허용한 곳 중 하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 정책은 식민 통치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식민지 군대인 포르스 푸블리크에서 널리 사용되면서 반인공적인 공용어로 자리 잡은 린갈라어가, 롬롱고어와 같이 특정 지역에서 오랫동안 사용되어 온 토착 언어보다 우대받는 경향이 나타났다.[58]

초등 교육의 양적 성장은 두드러졌다. 6세에서 14세 사이 아동의 취학률은 1940년 12%에서 1954년 37%로 증가하여 당시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 지역에서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1950년대 후반에는 학령 인구의 42%가 읽고 쓸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는데, 이는 당시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에 비해 상당히 높은 수치였다.

그러나 원주민을 위한 중등 및 고등 교육의 발전은 식민지 시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졌다. 소수의 콩고인 학생들이 1950년부터 유럽인을 위한 중등학교에 입학하기 시작했다. 벨기에령 콩고 최초의 대학교는 가톨릭교회 예수회레오폴드빌 인근에 설립한 로바니움 대학교로, 1954년에 콩고인과 벨기에인 학생 모두에게 문호를 개방했다. 로바니움 대학교 설립 이전에도 루뱅 가톨릭 대학교는 콩고 내에서 여러 고등 교육 기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1926년 설립된 '포뮬락(Fomulac, 루뱅 대학교 콩고 의료 재단)'은 콩고인 의료 인력과 열대 의학 연구원 양성을 목표로 했고, 1932년 키산투에 설립된 '카둘락(Cadulac, 루뱅 대학교 콩고 농업 센터)'은 농업 과학을 전문으로 하며 훗날 로바니움 대학교의 기반이 되었다.[59] 1956년에는 엘리자베스빌에 국립 대학교가 세워졌다.

하지만 이러한 교육 기회 확대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발전은 더뎠다. 1950년대 말까지도 포르스 푸블리크에서 부사관 이상의 계급으로 진급하거나 식민 행정부 내에서 책임 있는 직책(과장급 이상 또는 지역 행정관 등)을 맡은 콩고인은 거의 없었다. 이는 고등 교육 기회의 부족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으며, 훗날 콩고민주공화국이 독립했을 때 고등 교육을 이수한 인력이 극소수에 불과하여 국가 운영에 심각한 어려움을 겪는 원인이 되었다.

1960년 통계에 따르면, 벨기에령 콩고 전역의 학교에는 총 1,773,340명의 학생이 재학 중이었다. 이 중 초등학교 학생은 1,650,117명, 초등학교 이후 과정 학생은 22,780명, 중등학교 학생은 37,388명, 대학교 및 고등 교육 기관 학생은 1,445명이었다. 학교 유형별로는 가톨릭 선교 학교에 1,359,118명, 개신교 선교 학교에 322,289명, 국가가 설립한 교육 기관에 68,729명의 학생이 다니고 있었다.[60]

3. 4. 2. 보건 의료

상업회사 Union Minière du Haut-Katanga의 간호사들과 콩고인 조수들, 엘리자베스빌, 1918


벨기에령 콩고의 보건 의료는 초기에는 주로 선교단체의 지원을 받았으나, 점차 식민지 정부의 관심이 커졌다. 개선된 의료 서비스는 문명화 사명의 일환으로 여겨졌으며, 원시 사회로 간주되던 콩고 사회를 서구 자본주의 모델에 편입시키려는 목적과도 연결되었다. 훈련되고 건강한 노동력 확보는 노동 시장 통합과 경제적 측면에서도 중요하게 여겨졌다.

1906년 브뤼셀에 안트베르펜 열대의학연구소가 설립되었다. 이 연구소는 열대 의학 분야의 교육 및 연구, 개발도상국의 보건 의료 체계 구축에서 세계적으로 선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61] 아프리카 수면병과 같은 풍토병 퇴치를 위해 대규모의 지속적인 노력이 이루어졌고,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61] 1925년에는 의료 선교사인 아서 루이스 파이퍼(Arthur Lewis Piper) 박사가 록펠러 재단의 수면병 치료제인 트리파르사마이드(tryparsamide)를 콩고에 처음 도입하여 사용했다.[62]

식민지 시대 동안 보건 의료 인프라는 꾸준히 확장되었다. 인구 대비 병상 가용률이 상대적으로 높았고, 가장 외진 지역에도 진료소가 세워졌다. 1960년 당시 콩고는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에 비해 훨씬 우수한 의료 인프라를 갖추고 있었다. 벨기에령 콩고에는 3,000개의 의료 시설이 있었으며, 이 중 380개는 병원이었다. 인구 1,000명당 병상 수는 5.34개(187명당 1개 병상)에 달했다.[60]

풍토병 퇴치에서도 큰 진전이 있었다. 체체파리 박멸 노력 등에 힘입어 수면병 환자 수는 1931년 34,000명에서 1959년 1,100명으로 크게 감소했다. 모든 유럽인과 콩고인들은 소아마비, 홍역, 황열병 예방 접종을 받았다. 또한 나병, 결핵 근절을 목표로 하는 광범위한 질병 예방 프로그램이 시행되었으며, 초등학교에서는 질병 예방 교육이 이루어졌다.[60]

3. 5. 사회적 불평등과 인종 차별

콩고인 남성들이 인력거를 끌고 있는 여성 선교사, 1920–1930년경


벨기에령 콩고 사회에는 법으로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의 아파르트헤이트와 같은 인종 차별이 만연했다. 식민지 내 도시에서는 콩고인 거주자들에게 통행금지가 시행되었고, 유사한 인종 차별적 제한 조치가 일반적이었다. 특히 레오폴드빌의 인종 차별적 통행금지 시스템은 다른 유럽 식민지, 예를 들어 인근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63]

흑인을 백인이 이용하는 시설에서 배제하는 명시적인 법률은 없었으나, 실제로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인종 분리가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초기 도시 중심부는 백인만을 위해 구획되었고, 흑인들은 cités indigènes|시테 인디젠fra(원주민 거주지)이라 불리는 지역에 격리되어 거주해야 했다. 병원, 백화점 및 기타 시설들도 백인 전용과 흑인 전용으로 나뉘는 경우가 많았다. Force Publique(식민지 군대) 내에서도 흑인은 하사관 이상의 계급으로 진급할 수 없었다. 도시의 흑인 인구는 오후 9시부터 다음날 오전 4시까지 집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야간 통행금지 대상이었다.

이러한 차별은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점차 완화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공포의 대상이었던 시코테(chicote, 채찍을 의미하는 포르투갈어)를 이용한 체벌과 같은 노골적인 차별 조치가 점차 폐지되었다. 1953년, 그리고 1955년 보두앵 국왕의 식민지 방문 이후, 레옹 페티용 총독(1952-1958)은 흑인과 백인이 평등하게 대우받는 "벨기에-콩고 공동체"를 만들려고 시도했다.[65] 그럼에도 불구하고 콩고인들은 여전히 정치적, 법적 측면 등 여러 면에서 2등 시민으로 취급받았다. 혼혈 금지법은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1959년부터 1962년까지 수천 명의 혼혈 콩고 어린이가 벨기에 정부와 가톨릭 교회에 의해 벨기에로 강제 이주되는 비극을 겪었다.[66]

식민 통치의 기반에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가 깔려 있었으며, 이는 총독 피에르 릭만스(1934-1946)가 내세운 Dominer pour servir|도미네르 푸르 세르비르fra(섬기기 위해 지배하다)라는 구호에 잘 나타나 있다.[64] 식민 정부는 자애롭고 갈등 없는 통치를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국가, 기독교 선교부, 벨기에 일반 회사가 결탁한 소위 "식민지 삼위일체"가 콩고를 지배했다.

한편, 벨기에 자유국 시대(1886-1892)에 스와힐리-아랍 노예상으로부터 해방된 노예들은 군대에 징집되거나 동맹 추장들에게 넘겨져 다시 벨기에인을 위한 강제 노동에 동원되었다. 벨기에령 콩고 수립 후 1910년에 노예제가 법적으로 폐지되었지만, 포로들은 여전히 공공 및 민간 사업의 강제 노동자로 징집되었다.[67]

3. 6. 콩고인들의 저항

콩고 민중의 식민 지배에 대한 저항은 끊임없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으며, 근대적인 사상과 교육이 확산되면서 더욱 활발해졌다.[68]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펜데의 반란(1931년), 루알라부르그의 반란(1944년) 등 무장 봉기가 산발적이고 지역적으로 발생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부터 1950년대 후반까지 식민 당국이 이 시기를 "''벨기에의 평화''"라고 선전했지만, 실제로는 1960년 식민 지배가 끝날 때까지 수동적인 저항과 반식민지 문화 표현이 다양하고 광범위하게 나타났다. 대표적인 예로 '예언자' 시몬 킴방구를 중심으로 한 킴방구즘 운동이 있다.

콩고인들의 저항 외에도, 식민 정권 내부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다. 1920년대 브뤼셀 식민 의회의 일부 의원들은 광산 회사들의 잔혹한 노동자 모집 방식을 비판했다. 또한 수면병과 같은 풍토병 퇴치 성공에도 불구하고, 많은 지역에서 인구 증가가 정체되거나 감소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는 강제 노동과 의무 경작으로 인한 전통 공동체 파괴가 주요 원인으로 지적되었으나, 식민 당국은 도시 인구 증가와 의료 개선을 근거로 반박하기도 했다.[69]

일부 선교사들은 콩고 주민들의 어려움에 공감하여 토지 소유권 문제 등에 대해 식민 행정부에 개입하기도 했다. 한편 선교회와 일부 행정관들은 콩고의 문화, 언어, 전통 연구와 보존에 기여하기도 했다. 구스타프 헐스타르트 신부는 1937년 몽고 연구를 위한 정기 간행물 ''Aequatoria''를 창간한 대표적인 인물이다.[70] 식민 정부 역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아프리카 중앙 과학 연구소''(IRSAC, 1948)를 설립하는 등 문화 및 과학 연구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3. 7. 독립을 향한 움직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콩고 민중의 저항은 계속되었고, 근대적 사상과 교육의 확산으로 더욱 활발해졌다.[68] 초기에는 펜데 반란(1931), 루알라부르그 반란(1944) 등 산발적 무장 봉기가 있었으나, 2차 대전 종전 후 1950년대 후반까지는 식민지 선전에서 "''벨기에의 평화''"라 불린 시기였다. 그럼에도 시몬 킴방구를 따르는 킴방구즘과 같은 수동적 저항과 반식민지 문화 표현은 광범위하게 나타났다. 식민 정권 내부에서도 비판이 제기되었는데, 1920년대 일부 식민 의회 의원들은 광산 회사의 잔혹한 노동자 모집 방식을 비판했다. 수면병 퇴치 등 보건 성과에도 불구하고, 강제 노동과 의무 경작으로 인한 전통 공동체 파괴로 농촌 인구 증가는 정체되었고, 이는 일부 선교사들의 우려와 개입을 낳기도 했다.[69] 선교회와 일부 행정관들은 콩고 문화 연구와 보존에 기여했으며, 식민 국가는 1948년 ''아프리카 중앙 과학 연구소''(IRSAC)를 설립하기도 했다.[70]

1950년대 초까지 콩고 대중의 정치적 해방은 요원해 보였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전 세계적인 탈식민지화 흐름은 콩고에도 영향을 미쳤다. 아시아 식민지들의 독립과 유엔의 압력은 벨기에(다른 식민지 국가들과 마찬가지로)에 변화를 요구했다. 벨기에는 민족 자결권을 명시한 유엔헌장 73조를 비준했지만, 미국과 소련의 개혁 압박에는 '내정 간섭'이라며 저항했다.

식민 당국은 콩고인의 상황 개선을 논의하며, 1940년대부터 소수 엘리트인 ''évolué''에게 제한적인 시민권과 정치 참여 가능성을 부여하는 정책을 소극적으로 시도했다. "시민 공로" 증명서나 '임마트리쿨라시옹'(등록)을 통해 유럽 문명과의 동화를 증명해야 했으나, 엄격한 조건과 통제로 인해 1950년대 중반까지 수천 명만이 이 지위를 얻었다. 이들에게 주어진 법적 평등은 종종 이론에 그쳐 ''évolué''들의 불만을 샀다. 페티용 총독이 원주민에게 더 많은 시민권을 부여하여 "벨기에-콩고 공동체"를 만들자고 제안했을 때, 브뤼셀은 무관심했고 콩고 내 일부 벨기에인들은 특권 상실을 우려하며 반대했다.[71]

벨기에 정부는 콩고에 대한 장기 전략이 부족했다. 식민지가 번영하는 동안 벨기에 내에서는 식민 문제가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러나 1951년 즉위한 젊은 보두앵 국왕은 벨기에 콩고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1955년 그의 첫 국빈 방문은 앙드레 코뱅의 다큐멘터리 영화 ''Bwana Kitoko''에 담겼듯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72] 외국 언론들은 벨기에의 통치가 성공적인 것처럼 보인다고 평가하기도 했다.[73] 보두앵 국왕은 "벨기에-콩고 공동체" 구상을 지지했지만, 실질적인 진전은 더뎠다. 동시에 노동조합의 성장, 공립학교 요구, 네덜란드어 지위 문제 등 벨기에 내부의 이념 및 언어 갈등이 콩고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조제프 카사부부, 아바코(ABAKO) 지도자이자 콩고 공화국(레오폴드빌)의 최초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


파트리스 루뭄바, 콩고 공화국(레오폴드빌)의 최초 민주적으로 선출된 총리


콩고인들은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경험과 다른 식민지들의 변화 소식에 힘입어 조직화되기 시작했다. 식민 정부의 미온적인 변화 속에서 콩고 엘리트들은 사회적, 정치적으로 결집했다. 1950년대에는 두 가지 민족주의 흐름이 나타났다. 하나는 벨기에 당국이 어느 정도 용인한, 통일된 독립 콩고를 지향하는 영토 민족주의였다. 다른 하나는 바콩고, 카사이, 카탕가 지역을 중심으로 한 민족 종교적, 지역적 민족주의였다. 최초의 정치 조직들은 후자에 속했다. 조제프 카사부부가 이끈 아바코(ABAKO)는 1950년 문화 협회로 시작했으나 곧 정치 단체로 변모하여 1950년대 중반부터 식민 통치에 대한 강력한 반대 세력이 되었다. 아바코는 바콩고족의 민족 종교 조직 역할도 했으며, 킴방구 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1955년, 벨기에 교수 앙투안 반 빌젠(Antoine van Bilsen)은 콩고의 점진적 해방을 위한 ''30년 계획''을 발표했다.[74] 그는 교육받은 엘리트 양성에 30년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벨기에 정부와 많은 에볼뤼에(évolués)들은 이 계획에 회의적이었다. 전자는 결국 식민지를 포기해야 한다는 점을, 후자는 30년이나 더 벨기에 통치가 지속된다는 점을 우려했다. 가톨릭 교회 계열 에볼뤼에 그룹은 콩고 저널 ''콩시앙스 아프리케인''(Conscience Africaine)에서 온건한 선언문으로 이 계획에 긍정적으로 반응했으며, 콩고인들의 참여 범위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75]

1957년, 식민 정부는 실험적으로 콩고인들이 공직에 출마하고 투표할 수 있도록 세 개의 도시 중심지(레오폴드빌, 엘리자베스빌, 자도트빌)에서 최초의 지방 선거를 실시했다. 1957~58년의 사건들은 정치적 해방에 대한 요구를 갑작스럽게 가속화시켰다. 1957년 가나의 독립과 1958년 8월 샤를 드골 대통령의 레오폴드빌 건너편 콩고 강에 있는 프랑스 콩고 수도 브라자빌 방문에서 그는 프랑스 제5공화국의 아프리카 식민지들에게 프랑스와의 계속된 관계 또는 완전한 독립 사이에서 자유로운 선택을 약속했고, 이는 콩고에서 야망을 불러일으켰다. 1958년 브뤼셀에서 열린 세계 박람회(엑스포 58)는 벨기에를 처음으로 방문할 수 있었던 많은 콩고 지도자들에게 또 다른 계기가 되었다.[76][77]

1958년, 독립에 대한 요구는 빠르게 급진화되고 탄력을 얻었다. ''콩고 민족 운동''(Mouvement National Congolais, MNC)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56년에 처음 설립된 MNC는 1958년 10월 통일되고 중앙집권화된 콩고 국가라는 목표를 지지하는 전국 정당으로 설립되었다.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는 카리스마 넘치는 파트리스 루뭄바였다. 1959년에는 알베르트 칼롱지와 더 온건한 정치적 입장을 선호하는 다른 MNC 지도자들에 의해 내분이 발생했다(이 분파는 콩고 민족 운동-칼롱지로 간주되었다). 당의 조직적 분열에도 불구하고, 루뭄바의 좌파파벌(현재 콩고 민족 운동-루뭄바)과 MNC는 벨기에 콩고에서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정당으로 자리매김했다. 벨기에는 루뭄바의 좌파적 견해에 강력하게 반대했고, 루뭄바의 MNC가 권력을 잡을 경우 그들의 재정적 이익의 상태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품었다.

벨기에 정부가 콩고 인구의 정치적 자치를 점진적으로 확대하는 프로그램을 논의하는 동안 예상치 못한 사건들이 발생했다. 1959년 1월 4일, 레오폴드빌(Léopoldville)에서 ABAKO가 주최한 금지된 정치 시위가 통제 불능 상태에 빠졌다. 순식간에 식민지 수도는 광범위한 폭동에 휩싸였다. 당국은 질서를 회복하는 데 며칠이 걸렸고, 가장 보수적인 추산으로도 수백 명이 사망했다. 폭력 사태는 콩고와 벨기에 모두에 충격파를 보냈다.[78] 1월 13일, 보두앵 국왕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연설하고 벨기에는 "지체 없이, 그러나 무책임한 성급함 없이" 콩고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선언했다.[79]

가스통 아이스켄스 총리 정부는 독립 시기를 특정하지 않고 수년에 걸친 과도기를 염두에 두었다. 1959년 12월에 지방 선거, 1960년 또는 1961년에 전국 선거를 실시한 후 행정 및 정치적 책임을 콩고인들에게 점진적으로 이양하는 계획이었으며, 아마도 1960년대 중반까지 완료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현장에서는 상황이 훨씬 더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80] 식민 행정부는 세금 납부 거부와 같은 다양한 형태의 저항에 직면했고, 일부 지역에서는 무정부 상태가 위협적이었다.[81] 동시에 콩고에 거주하는 많은 벨기에인들은 브뤼셀에 배신감을 느끼며 독립에 반대했다. 콩고인들의 요구가 급진화됨에 따라 정부는 점진적이고 신중하게 계획된 과도기의 가능성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82]

1960년 1월 20일 브뤼셀에서 열린 벨기에-콩고 원탁 회의 개막식


1959년, 보두앵 국왕은 벨기에 콩고를 다시 방문했는데, 4년 전 방문과는 큰 대조를 이루었다. 레오폴드빌에 도착했을 때 그는 식민 정부에 대한 선동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루뭄바의 투옥에 분노한 흑인 벨기에-콩고 시민들로부터 돌팔매를 맞았다. 다른 도시에서 보두앵의 환영은 상당히 더 좋았지만, "만세!"라는 함성은 종종 "즉각적인 독립!"이라는 외침으로 이어졌다. 벨기에 정부는 인도차이나알제리에서 프랑스가, 인도네시아에서 네덜란드가 겪었던 것과 같은 무의미하고 잠재적으로 매우 피비린내 나는 식민지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피하고 싶었다. 그 이유로 벨기에 정부는 콩고 지도자들이 요구하는 즉각적인 독립에 굴복하는 경향이 있었다.[83] 준비 부족과 교육받은 엘리트 부족(당시 대학 학위를 소지한 콩고인은 소수에 불과했다)에도 불구하고, 벨기에 지도자들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처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결정했다. 이것은 "Le Pari Congolais|르 파리 콩골레프랑스어" 즉, "콩고 도박"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960년 1월, 콩고 정치 지도자들은 브뤼셀에 초청되어 콩고 원탁 회의에 참여하여 독립을 논의했다. 파트리스 루뭄바는 이 기회에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회의는 놀랍도록 빠르게 콩고인들의 거의 모든 요구를 수용했다. 1960년 5월에 실시될 총선거와 1960년 6월 30일의 완전한 독립—"Dipenda"—이 그것이다. 이것은 콩고 대표단이 보여준 강력한 연합 전선에 대한 반응이었다.

선거를 앞두고 벌어진 정치적 책략은 세 개의 정치 연합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그중에는 ABAKO와 MNC—칼론지가 있는 6개의 분리주의 정당 또는 단체로 구성된 연방주의적 민족주의자들의 연합, 중앙주의적 MNC—룸바움바, 그리고 카탕가의 강자인 모이즈 촘베의 연합이었다. 촘베는 카탕가 지역의 경제적 활력과 상카탕가 광산 연합의 사업 이익을 보존하고자 했다(칼론지도 카사이 지역의 다이아몬드 개발과 관련하여 마찬가지였다). 의회 선거는 ABAKO를 중심으로 한 지역주의 세력과 MNC와 같은 민족주의 정당 모두가 좋은 성적을 거두면서 분열된 정치 지형을 만들어냈다. 카사부부가 콩고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고 루뭄바가 초대 정부 수반이 되는 타협안이 강행되었다. 불과 5개월 전에 계획된 대로 벨기에인들에 의한 인계식은 1960년 6월 30일 레오폴드빌에 있는 벨기에 콩고 총독의 새로운 관저에서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일주일 후, 여전히 대부분 벨기에인인 장교들에 대항하여 ''포르스 푸블리크''(Force Publique) 내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이는 콩고 전역에서 발생하는 소요의 촉매제가 되었으며, 주로 불만을 품은 병사들과 급진적인 젊은이들이 주도했다. 많은 지역에서 그들의 폭력은 특히 유럽인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했다. 몇 주 만에 벨기에 군대와 이후 유엔 개입군이 콩고에서 여전히 일하고 생활하고 있던 8만 명이 넘는 벨기에인 대부분을 대피시켰다.[84]

4. 콩고 위기와 그 이후

1960년 7월 바스콩고의 티스빌에서 시작된 포르스 푸블리크의 반란은 빠르게 콩고 전역으로 확산되었다.[85] 1960년 9월, 카사부부 대통령과 루뭄바 총리는 서로 상대방을 축출했다고 선언하며 극심한 정치적 혼란을 빚었으며, 이 교착 상태는 정부가 루뭄바를 체포하면서 일단락되었다. 1961년 1월, 그는 벨기에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레오폴드빌(현 킨샤사)로부터 분리 독립을 선포한 부유한 광산 지역인 카탕가로 이송되었다. 루뭄바는 촘베가 이끄는 카탕가 당국에 인계되어 처형되었다. 2002년 벨기에는 루뭄바 암살 사건에 대한 자국의 책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사과했다. 그의 정치적 성향이 지나치게 좌익적이라고 판단한 CIA의 개입 의혹 역시 오랫동안 제기되어 왔다. 당시 냉전 하에서 소련은 '반식민주의'를 명분으로 아프리카에서 유럽 열강에 대항하여 영향력 확대를 시도하고 있었다.[86]

1964년 11월 스탠리빌에서 붉은 용 작전 당시 사망한 인질 앞에 쓰러져 있는 벨기에 군인. 벨기에 공수부대는 콩고 반군에게 억류된 1,800명 이상의 유럽 및 미국 인질을 해방시켰다.


일련의 반란과 분리주의 운동은 통일된 콩고 국가 건설이라는 이상을 출발부터 위협했다. 독립에도 불구하고 벨기에는 자국민 및 외국인 보호를 명분으로 여러 차례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붉은 용 작전과 같은 군사 작전을 펼쳤다. 유엔 역시 1960년 후반부터 대규모 평화유지군을 파견하여 사태 안정화를 시도했다. 상황은 1964년에서 1965년 사이에 카탕가 주가 다시 콩고 중앙정부에 통합되고, 오리엔탈 주의 스탠리빌(현 키산가니)에서 발생한 소위 심바 반란이 진압되면서 점차 안정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 직후 모부투 세세 세코 대령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치적 교착 상태를 종식시키고 권력을 장악했다.

모부투는 강력한 반공주의 성향 덕분에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의 지지를 받았다. 집권 초기 그는 국가 통합과 경제 개발(1950년대 계획되었던 잉가 댐 건설 등)을 강조했다. 또한 이전 정권과의 차별화를 위해 '진정성(Authenticité)' 운동을 추진하며 1966년 식민지 시대의 지명들을 변경했다. 레오폴드빌은 킨샤사로, 엘리자베스빌은 루붐바시로, 스탠리빌은 키산가니로 개명되었다. 이 시기 콩고는 벨기에와 대체로 긴밀한 경제적, 정치적 관계를 유지했지만, 식민지 정부가 보유했던 대형 광산 회사의 지분 이전 문제 등 일부 재정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87] 1970년에는 콩고 독립 10주년을 기념하여 벨기에의 보두앵 국왕이 콩고를 공식 방문하기도 했다.

킨샤사에 있는 레오폴드 2세의 기마상. 모부투 정권 하에서도 식민 시대의 상징물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모부투 정권은 더욱 권위주의적인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모부투가 이끄는 인민혁명운동(MPR)은 유일 합법 정당으로 선포되어 확고한 일당 독재 체제가 구축되었고, 정치적 탄압은 상당히 심화되었다. 모부투는 국명을 자이르 공화국으로 변경했으며, 1970년대 중반에는 소위 "자이르화" 정책을 시행했으나 이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대규모 이탈과 경제적 파탄을 초래했다. 1980년대 모부투 정권은 극심한 부정부패와 국가 운영 실패의 대명사가 되었다.[88] 과거 식민 종주국이었던 벨기에와의 관계도 여러 차례 부침을 겪었으며, 이는 양국 간의 경제적, 정치적 이해관계가 점차 약화되는 상황을 반영했다. 냉전 시기 자이르가 소련의 영향권 아래 들어갈 위험이 없다고 판단한 서방 국가들은 모부투 정권의 독재와 인권 탄압에 대해 비교적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했다.[89]

1980년대 후반 소련의 붕괴와 냉전 종식은 모부투에게 큰 타격이었다. 서방의 지지를 상실한 그는 1990년 일당제를 폐지하고 민주주의로의 복귀를 선언했지만, 실제로는 권력 유지를 위해 시간을 벌며 반대 세력들을 이간질하는 전술을 사용했다. 1990년 5월 루붐바시 대학교 캠퍼스에서 자이르군이 학생들을 학살한 사건은 벨기에와의 외교 관계 단절이라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다. 특히 1993년 보두앵 국왕의 장례식에 모부투가 초대받지 못한 것은 그에게 큰 외교적 모욕으로 받아들여졌다.

결국 1997년, 로랑-데지레 카빌라가 이끄는 반군의 압력에 밀려 모부투는 권좌에서 축출되었다. 카빌라는 스스로 대통령을 선포하고 국명을 다시 콩고 민주 공화국으로 변경했다. 2001년 카빌라 대통령이 암살된 후에는 그의 아들 조제프 카빌라가 권력을 승계했다. 조셉 카빌라는 2006년, 1960년 독립 이후 콩고에서 처음으로 실시된 전국적인 자유 선거를 통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2010년 6월 30일부터 7월 2일까지는 콩고 독립 5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벨기에의 알베르 2세 국왕과 총리 이브 레테름이 킨샤사를 방문했다.

독립 이후에도 콩고에는 강력한 중앙 집권적 관료주의 경향, 식민 시대에 구축된 교육 및 사법 제도의 구조 등 특정 관행과 전통이 남아 있다. 벨기에의 영향력은 특히 경제 분야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는데, 유니옹 미니에르(현 유미코어)의 활동, 비철금속 산업의 발전, 안트베르펜 항과 다이아몬드 산업 등이 대표적이다. 오늘날까지 브뤼셀 항공(과거 사베나의 후신)은 콩고 민주 공화국 항공 노선에서 강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2010년 기준으로 콩고 민주 공화국에는 4,000명 이상의 벨기에 국민이 거주하고 있으며, 벨기에 내 콩고 출신 이주민 공동체는 최소 16,000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브뤼셀의 마통제 지역은 벨기에 내 콩고 공동체의 전통적인 중심지로 알려져 있다.[90]

5. 문화

쿠바의 룸바와 같은 라틴 음악은 식민 시대였던 1930년대와 1940년대에 벨기에령 콩고에 소개되어 널리 연주되었다. 1950년대에는 미국재즈 역시 아프리카 재즈로 널리 받아들여졌다. 1956년, 프랑코(Franco Luambo)는 OK Jazz(후에 TPOK Jazz로 개명)를 결성했다.[91]

조셉 카바젤(Joseph Kabasele), 혹은 ''르 그랑 칼레''(Le Grand Kallé, 위대한 칼레)로 알려진 인물은 아프리카 재즈를 결성했다. 하우스 밴드가 인기를 얻으면서 콩고 룸바가 형성되었다. 마를로 마시(Marlo Mashi) 역시 같은 시대의 음악가이다. 콩고의 대중음악은 대륙 리듬, 교회 음악, 가나하이라이프, 그리고 전통 콩고 음악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발전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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