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라울 마그랭베르느레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라울 마그랭베르느레는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한국 전쟁에 프랑스 육군 장교로 참전했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자유 프랑스 군대와 한국 전쟁 당시 프랑스 대대를 지휘했으며, 한국 전쟁 참전을 위해 중장에서 중령으로 자진 강등했다. 1950년 한국 전쟁 프랑스 대대 지휘를 맡아 지평리 전투에서 활약했으며, 이후 앵발리드의 지사를 역임했다. 그는 한국 연대 프랑스 유엔군 전국 협회의 창립 회장이었으며, 그의 업적을 기려 여러 기념물과 단체가 그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프랑스 육군 - 프랑스 육군 계급
    프랑스 육군 계급은 원수, 대원수, 장성, 선임 장교, 후임 장교, 부사관, 병으로 나뉘며, 각 계급은 특정 역할과 책임을 가진 다양한 직책으로 구성된다.
  • 제2차 세계 대전 명예훈장 수훈자 - 존 R. 하지
    존 R. 하지는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미국의 군인으로, 1945년 인천에 상륙하여 일본 총독부의 항복을 받고 주한 미군 사령관과 미군정청 사령관을 겸임하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까지 남한을 통치했으며, 1952년 대장으로 진급하여 1963년 사망했다.
  • 제2차 세계 대전 명예훈장 수훈자 - 더글러스 맥아더
    더글러스 맥아더는 제1, 2차 세계 대전과 한국 전쟁에서 활약한 미국의 군인이자 필리핀 식민지 통치자, 극동군 지휘관, 일본 점령사령부 수장, 미합중국 육군 원수였다.
라울 마그랭베르느레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랄프 몽클라르, 한국 전쟁 중
랄프 몽클라르, 한국 전쟁 중
출생일1892년 2월 7일
사망일1964년 6월 3일
출생지오스트리아-헝가리 부다페스트
사망지프랑스, 파리
별칭랄프 몽클라르 (Ralph Monclar)
군 복무 정보
소속프랑스 육군
복무 기간1912년 – 1964년 (52년 이상)
최종 계급군단급 장군
소속 부대제60선 보병 연대
제16샤세르 아 피에 대대
제1외인연대
제1e REI
제3외인연대
제3e REI
제2외인연대
제2e REI
제5외인연대
제5e REI
제4외인연대
제4e REI
지휘제13외인여단
제13e DBLE
제1자유프랑스사단
제1re DFL
제2 외인부대 감찰관 (1948–1950)
한국 전쟁 프랑스 대대
주요 참전 전투/전쟁제1차 세계 대전
레반트 – 모로코 – 알제리 – 통킹
제2차 세계 대전
나르비크 전투
한국 전쟁
훈장
훈장레지옹 도뇌르 훈장 대십자장
라 리베라시옹 훈장
메다이유 밀리테르
크루아 드 게르 1914–1918
크루아 드 게르 1939–1945
대영 제국 명예 기사 사령관 (영국)
은성 훈장 (미국)
태극무공훈장 (대한민국)
기타 정보
이후 활동앵발리드 지사 (1962-1964)

2. 생애

라울 마그랭베르느레는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한국 전쟁에 프랑스 육군 장교로 참전했으며, 한국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중장에서 중령으로 자진 강등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자유 프랑스 군대와 한국 전쟁 당시 프랑스 대대를 이끈 것으로 유명하다.[8]

제2차 세계 대전에서 그는 노르웨이 전역 중 1940년 5월 13일 노르웨이 비에르비크에서 제13외인반여단(13e DBLE)을 이끌고 전투를 치렀고, 4개의 목표를 점령하여 독일군을 퇴각시키고 다수의 포로와 자동 화기, 장비를 획득했다. 5월 28일부터 6월 2일까지는 나르비크 전투에서 승리하여 연합군 포로 60명을 해방하고, 독일군 400명, 대포 10문 및 상당한 물자를 포획하여 "1939-1940년 유일한 프랑스의 승리"라는 평가를 받았다.[3]

한국 전쟁 발발하자, 1950년 58세의 나이로 현역 은퇴 직전에 유엔군 프랑스 대대의 지휘를 자원하여 군단장에서 중령으로 자진 강등되었다. 이 대대는 미국 육군 제2보병사단 소속 제23보병연대에 배속되었다.[6] 1951년 2월, 지평리 전투에서 매슈 리지웨이 장군은 제23미국 보병연대와 프랑스 대대가 영하의 날씨 속에 완전히 포위된 채 압도적으로 많은 수의 중국군의 공격을 격퇴했다고 언급하며, 이들이 미국과 프랑스 최고의 병사들의 전투 수행 능력에 부응했다고 평가했다.[2]

2. 1. 초기 생애 및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빅토르 위고 학교에서 공부한 후, 그는 처음에는 외인 부대에 자원하려 했다. 하지만 15세에 불과했기에 입대가 거부되었고,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돌아갔다.

1912년 생시르 육군 특별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914년 '몽미라이 프로모션'의 일원으로 졸업했으며 소위 계급을 받았다. 1914년 8월 5일, 그는 제60 보병 연대 (60e régiment d'infanterie de ligne|60e RIL프랑스어)에 합류했으며, 종전 시에는 대위 계급을 달았다. 그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 슈발리에에 임명되었고 11번의 명예로운 인용을 받았으며, 7번의 부상을 입었다. 부상으로는 총탄에 의한 허벅지 골절, 수류탄으로 인한 팔 부러짐, 두개골 절개술 상처, 눈에 가스 화상 등이 있었으며, 이로 인해 90%의 불구로 퇴역했다.[1]

2. 2. 전간기 활동

1918년 11월 11일 휴전 이후, 라울 마그랭베르느레는 동방 연합군 최고 사령관에 배속되었다. 1919년 초 참모 본부의 제1국장으로 합류하여 제1 모로코 티레르 연대(1er Régiment de Tirailleurs Marocains|제1 모로코 티레르 연대프랑스어) 지휘 임무를 받았다.[2] 1919년 9월 25일, 산 스테파노의 제415 보병 연대 415e RI의 항공 센터에서 훈련 프로그램을 수행하도록 지명되었으며, 항공 교관으로 임명되었다.[2] 이 임무 후, 베이루트, 레바논에 있는 레반트 행정 서비스에 관리자 보좌관으로 합류했다.[2] 1920년 3월 1일에는 행정 위원회, 10월 19일에는 감사관으로 지정되었으며,[2] 그 직책에서 군대 명령에 따라 표창을 받았다.[2] 1921년 5월 11일, 레반트에서 레반트 군을 창설하라는 임명을 받았다.[2] 1921년 7월 1일, 제1 비행대대의 제4 전투 중대를 지휘하게 되었고, 결국 연대 사령관의 보좌관이 되었다.[2]

1924년 3월 1일, 프랑스 외인 부대에 합류했다.[2] 제1 외인 보병 연대 1er REI에서 짧은 기간 복무한 후, 제3 외인 보병 연대 3e REI (최근 재지정된 외인 부대 행진 연대)에 배속되어 1927년까지 모로코 작전에 참여했다.[2] 그 후, 1928년에 대대장(사령관 – 소령)으로 진급했다.[2]

1930년 10월 14일, 제16 샤쇠르 보병 대대 (16e Bataillon de chasseurs à pied|제16 샤쇠르 보병 대대프랑스어)의 지휘를 맡도록 지명되었다.[2] 이 지휘를 수행한 후, 1931년에 외인 부대로 재배치되었고, 1941년 10월까지 외인 부대를 떠나지 않았다.[2] 10년 동안 모로코에 주둔한 제2 외인 보병 연대 2e REI와 통킹에 있는 제5 외인 보병 연대 5e REI에 배속되었다.[2]

2. 3.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1938년 1월, 극동에서 귀국한 그는 사이디다의 훈련 대대 지휘를 맡았고, 1938년 6월 25일 중령으로 진급한 후 제4외인보병연대와 함께 모로코로 향했다.[8] 1940년 2월 23일, 그는 산악 행진 대대 그룹을 형성하는 제3외인보병연대에 합류했다. 그는 군단 2개 대대로 구성된 13 경산악 외인부대 사단 (13e Demi-Brigade Légère de Montagne de Légion Etrangère|13e DB.L.MLE프랑스어)의 연대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처음에는 라르자크에, 그 다음에는 사토네에 재집결한 그의 부대는 목적지를 알 수 없는 작전을 준비했다. 이 부대는 제13외인반여단(13e DBLE)의 선구자가 될 것이다.

1940년 5월 13일, 노르웨이 비에르비크에서 13 DBLE는 노르웨이 전역에서 처음으로 전투를 치렀고, 4개의 목표를 점령하여 독일군을 퇴각시키고, 다수의 포로, 자동 화기, 장비 및 호수에 갇힌 10대의 융커스 Ju 52 수송기를 버리게 했다.

5월 28일부터 6월 2일까지 마그랭베르네리 장군과 그의 외인부대원들은 "1939-1940년 유일한 프랑스의 승리" (''la seule victoire française de 1939–1940'')라고 불리는 나르비크에서 승리했다.[3] 13 DBLE는 연합군 포로 60명을 해방시키고 독일군 400명, 대포 10문 및 상당한 물자를 포획했다.

그는 그의 부하 500명과 함께 프랑스로 돌아온 직후, 1940년 6월 21일 자유 프랑스군에 합류하여 드 몽클라르(Monclar-de-Quercy, Tarn-et-Garonne 마을 이름에서 따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4] 그는 곧 대령으로 진급했다.

제1자유프랑스사단 (1re DFL)과 함께 동아프리카 전역에서 추축국에 맞서 13 DBLE를 이끌면서, 그는 케렌 전투와 마사와 전투에 참여했다.

1941년 6월, 그는 레반트에서 비시 프랑스군, 특히 제6외인보병연대 (6e REI)의 외인부대원들과의 전투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의 거절에 따라 그는 13 DBLE의 사령관 직에서 중령 아밀라크바리 왕자로 교체되었고, 그는 부대를 이끌고 북부 리비아와 튀니지로 진입했다.

장군 장교단으로 진급한 그는 레반트에서 다양한 지휘를 수행하고 수많은 작전에 참여했으며, 레반트 주둔군 최고 사령관으로 임무를 마쳤다.

1946년 알제리 주둔군 최고 사령관의 부관이 된 그는, 1948년에는 1950년까지 외인부대 부대를 검열하는 영구 임무를 맡은 외인부대 제2감찰관으로 임명되었다.[5] 그 후 2년 동안 그는 외인부대가 주둔하고 전투를 벌였던 알제리, 모로코, 마다가스카르, 인도차이나 등 다양한 대륙을 끊임없이 방문했다.

2. 4. 한국 전쟁 참전

라울 마그랭베르느레는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한국 전쟁에 프랑스 육군 장교로 참전하였다. 한국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중장에서 중령으로 자진 강등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자유 프랑스 군대와 한국 전쟁 당시 프랑스 대대를 이끈 것으로 유명하다.[8]

1950년, 58세의 나이로 현역 은퇴 직전에 유엔(유엔군) 한국 전쟁 프랑스 대대의 지휘를 자원하여 군단장에서 중령으로 자진 강등되었다. 이 대대는 미국 육군 제2보병사단 소속 제23보병연대에 배속되었다.[6]

1951년 2월, 제23보병연대와 프랑스 대대는 지평리 전투에서 교전을 벌였다. 당시 한국 주둔 미 육군 사령관 매슈 리지웨이 장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나는 폴 L. 프리먼 주니어 대령이 지휘하는 제23미국 보병연대와 프랑스 대대에 대해 간략하게 말하겠다. 일반적인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고립되어 영하의 날씨 속에 완전히 포위된 그들은 압도적으로 많은 수의 중국군의 계속된 주야 공격을 격퇴했다. 그들은 마침내 구출되었다. 나는 이 미국 병사들이 프랑스 전우들과 함께 미국과 프랑스가 국가로서 존재해 온 동안 배출한 최고의 병사들의 전투 수행 능력에 모든 면에서 부응했다고 말하고 싶다.[2]

2. 5. 한국전 이후 활동과 사망

1951년, 정년 연령에 도달한 그는 프랑스로 돌아왔다.

1962년, 장군 앙드레 키엔츠의 뒤를 이어 앵발리드의 지사(Gouverneur des Invalides)가 되었다. 이 직책은 기관을 관리하는 공식적인 임무였으며, 그는 다른 많은 지사들처럼 재임 중에 사망했다.

그는 또한 한국 연대 프랑스 유엔군 전국 협회의 창립 회장이었다.[7]

3. 상훈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그랑크루아
해방 훈장 동지장 (1943년 6월 1일)
군사 훈장
1914-1918 십자 전쟁 훈장 (11회 언급)
1939-1945 십자 전쟁 훈장 (3회 언급)
대외 작전 극장 십자 전쟁 훈장 (6회 언급)
저항 훈장 로제트 포함
탈출자 훈장
군 부상자 훈장 (7개 별)
1914–1918 자원 전투병 십자 훈장
식민 훈장 "모로코 25–26" 및 "에리트레아" 잠금쇠 포함
시리아-킬리키아 기념 훈장
1914–1918 기념 전쟁 훈장
1914–1918 연합국 전승 훈장
1939–1945 기념 전쟁 훈장
자유 프랑스 자원 봉사 기념 훈장
한국 유엔 작전 프랑스 기념 훈장
기타 국가
충무무공훈장 은성장 (대한민국)[1] (1952년 11월 4일)
안남 용관훈장 대십자위장(Grand Officer) (안남)
국가 훈장 지휘관(Commander) (벨기에)
전공 십자 훈장 (벨기에)
캄보디아 왕실 훈장 대십자 기사단 (캄보디아)
안주앙 별 훈장 (코모로)
은성 훈장 (미국)
공로 훈장 (미국)
전공 십자 훈장 (그리스)
레바논 공로 훈장 (레바논) (1926년)
알라위트 훈장 대십자위장 (모로코)
성 올라프 훈장 대십자장 (노르웨이)
칼이 있는 전쟁 십자 훈장 (노르웨이)
무공 훈장 (폴란드)
칼이 있는 루마니아 별 훈장 장교 (루마니아)
대영 제국 훈장 기사단장(Knight Commander) (영국)
무공 십자 훈장 (영국)


  • 지부티 주둔 제13외인여단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 1979년, 파리 15구에 있는 place du Général-Monclar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 생시르 육군 특별 사관학교 171기(1984–1987)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 뇌이쉬르센의 스타드 몽클레르.
  • 2011년, 몽클라르드케르시 시청은 시청 입구에 그의 명예를 기리는 비석을 세워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또한, 시청 명예의 전당 또한 그의 이름을 사용한다.

4. 유산 및 평가


  • 지부티 주둔 제13외인부대(13e DBLE)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3]
  • 1979년, 파리 15구에 있는 place du Général-Monclar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4]
  • 생시르 육군 특별 사관학교 171기(1984–1987)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5]
  • 뇌이쉬르센의 스타드 몽클레르.[6]
  • 2011년, 몽클라르드케르시 시청은 시청 입구에 그의 명예를 기리는 비석을 세워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또한, 시청 명예의 전당 또한 그의 이름을 사용한다.[7]

참조

[1] 웹사이트 Division General Commandant of the French Foreign Legion, Les Chefs COMLE http://www.legion-et[...]
[2] 웹사이트 http://rokdrop.com/2[...] 2008-10-15
[3] 웹사이트 Site de la promotion de Saint-Cyr ''"Général Monclar"''' http://www.generalmo[...] 2010-08-30
[4] 웹사이트 Ordre de la Libration http://www.ordredela[...] Ordredelaliberation.fr 2014-11-28
[5] 웹사이트 Division General Commandant of the French Foreign Legion, L'Etat-major du COMLE (Commandement de la Légion Étrangère), Les Chefs COMLE http://www.legion-et[...]
[6] 간행물 The French Participation in the Korean War and the Establishment of a 'Path of Memory' in South Korea 2013-11-05
[7] 웹사이트 ANAFFC ONU et RC, voir le site de l'association à l'adresse suivante http://assoc.orange.[...]
[8] 웹사이트 http://rokdrop.com/2[...] 2008-10-15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