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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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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레보차는 슬로바키아 북동부에 위치한 도시로, 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했으며, 1317년 왕립 자유 도시로 지정되었다. 15세기에 폴란드와 헝가리를 잇는 무역로에 위치하여 상업 및 문화의 중심지로 발전했으며, 17세기에는 합스부르크 왕가에 반대하는 봉기가 일어났다. 2009년에는 스피시 성, 제흐라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구시가지에는 고딕 양식의 성 야고보 대성당과 레보차의 마스터 파볼이 제작한 제단이 있다. 1995년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문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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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보차 - [지명]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레보차 성 야코브 대성당과 구 시청사
레보차 성 야코브 대성당과 구 시청사
현지 이름Levoča
지역프레쇼우
레보차
시장미로슬라프 빌코우스키 (2018년 11월 선출)
최초 언급1249년
면적114.77 제곱킬로미터
고도628 미터
시간대CET
UTC 오프셋+1
하계 시간CEST
하계 UTC 오프셋+2
우편 번호054 01
지역 번호+421 53
차량 번호판LE
웹사이트레보차 공식 웹사이트
인구
2022년14084명
기타 언어 표기
헝가리어Lőcse
루신어Левоча
독일어Leutschau

2. 역사

레보차는 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스피시 지역에 있다. 11세기에 헝가리 왕국에 정복되어 1918년까지 헝가리 왕국의 일부였다. 1241년과 1242년 사이 몽골의 침략 이후, 카르파티아 독일인(집서 독일인)들이 이 지역에 정착했다. 레보차는 헝가리 왕국 내에서 자치권을 가지며 스피시 독일인 협회의 수도가 되었다. 1249년 문헌에 "Leucha"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했으며,[13] 1317년 왕립 자유 도시로 지정되었고, 1321년 도시로 승격되었다.[13] 1321년, 광범위한 저장 권한이 부여되어 상인, 장인, 광산 소유자들이 정착하게 되었다.

"수치심의 우리", 옛 시청 밖의 처벌 우리


15세기 폴란드헝가리를 연결하는 무역로에 위치하여 상업 중심지로 발전했고, 철, 구리, 모피, 가죽, 옥수수, 포도주 등을 수출했다.[13] 동시에 문화 중심지로 발전하여, 영국의 인문주의자 레너드 콕스가 1520년경 레보차의 학교에서 가르쳤고, 비텐베르크 출신 서적상 브루어는 서점을 인쇄소로 발전시켜 150년간 운영했다. 중세 목각가 레보차의 마스터 파볼도 이곳에 정착했다.

1550년과 1599년의 화재로 고딕 건축물이 파괴되었음에도, 16세기 말까지 문화적, 경제적 지위를 유지했다. 이 시기 여러 교회가 건설되었고, 학교, 도서관, 약국, 의사가 있었다. 1624년에는 인쇄기가 있었으며, 종교 개혁의 중심지였다. 17세기에는 합스부르크 왕가에 반대하는 봉기가 일어났다.

1700년, 지역 귀족이 실수로 도시 시장을 다치게 한 사건으로 작센 치안 판사인 시장 카롤 크람러가 살해되었다. 시장의 팔은 방부 처리되어 시청에 보존되었고, 이는 칼만 믹사트의 소설 ''검은 도시''의 소재가 되었다.[13]

레보차 복음주의 교회는 1823년부터 건설되어 1832년에 헌당되었으며, 이전의 조항 교회를 대체했다.[14]

1871년 코시체-보훔 철도가 레보차를 우회하여 스피시스카 노바 베스를 통과하면서 경제적 중요성이 감소했다. 1892년 스피시스카 노바 베스 기차역에서 레보차까지 스피시스카 노바 베스-레보차 철도가 건설되었다. 1918년 독립 체코슬로바키아 수립 전까지 레보차는 헝가리 왕국 세페스 주의 일부였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는 슬로바키아 공화국 (1939–1945)의 일부였다. 1945년 1월 27일, 소련 내 제1체코슬로바키아군단이 베르마흐트와 헝가리 왕립군을 몰아내고 다시 체코슬로바키아의 일부가 되었다. 1993년부터 독립 슬로바키아의 일부이다.

1995년 7월 3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레보차를 방문하여 레보차의 복된 동정 마리아 방문 대성당에서 65만 명의 신자를 위한 미사를 집전했다.

레보차의 유대인 정착은 1768년과 1828년의 도시 인구 조사에서 유대인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1840년경까지 금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15] 1840년대에 훈코프체와 동슬로바키아에서 유대인 이주가 시작되어 유대인 공동체(케힐라)가 형성되었다.[15]

1870년대 케힐라는 확장되었고, 1880년대에는 묘지가 통합되었다.[15] 1899년, 유대인 공동체는 오리엔탈 건축 양식의 회당을 개관했고,[16] 학교와 미크베가 건설되었다.[15]

1938년 10월 슬로바키아 자치 이후 유대인 차별이 증가했다. 1938년 11월 4일, 시민권이 없는 레보차 유대인 55명이 슬로바키아-헝가리 국경 미개척 지역으로 강제 이주되었다가 유대인 단체의 노력으로 귀환했다.[15]

1939년 3월 14일 슬로바키아 공화국 설립 후, 유대인 집과 사업체는 나치 동맹의 독일 소수 민족에 의해 약탈과 파괴에 시달렸다. 하쇼메르 하차이어 여름 캠프 공격, 유대인 전문가 면허 취소, 유대인 선술집 폐쇄, 지역 사회 봉사직 해고 등이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981명의 지역 유대인이 추방되었다. 1942년 3월, 젊은 여성들이 포프라트를 거쳐 아우슈비츠로, 젊은이들이 질리나를 거쳐 마이다네크로 보내졌다. 가족, 병원 환자, 정신과 환자를 포함한 추가 추방으로 유대인 인구의 약 80%가 추방되었다.[15]

소수 유대인이 면제 서류를 소지하거나 개종하여 남아있었지만, 1944년 9월 독일 점령 후 박해가 심화되었다. 많은 이들이 추방 또는 처형되었고, 파르티잔 그룹에 합류하거나 피난처를 찾았다. 회당, 미크베, 학교 건물, 유대인 묘지가 모독되었고, 유대인과 파르티잔에 대한 사냥으로 추가 추방과 처형이 발생했다.

전후, 생존 유대인 일부가 돌아와 케힐라 생활을 부활시키고 공공 건물을 수리했다. 시온주의 활동이 재개되었으나, 대부분 1949년에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1960년대에는 약 60명의 케힐라가 남아 있었고, 묘지는 방치되었다. 1990년 현재, 소수의 유대인 가족만이 레보차에 거주했다.

2016년, 지역 가톨릭 청소년 단체, 슬로바키아 기독 청소년 운동 연합, 슬로바키아 유대인 공동체 연합, 레보차 시의 협력으로 유대인 묘지가 정돈되었다.[16]

2. 1. 초기 역사

1241년1242년 사이에 있었던 몽골족의 침공으로 파괴된 뒤부터 독일인들이 건설했으며 1249년 문헌에서 "Leucha"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했다.[13] 1317년 왕립 자유 도시로 지정되었고 1321년 도시로 승격되었다.[13] 15세기 폴란드헝가리를 연결하는 무역의 경로로 여겨지면서 상업의 중심지로 발전했고 철과 구리, 모피, 가죽, 옥수수, 포도주가 수출되었다.[13] 17세기 합스부르크 왕가에 반대하는 봉기가 일어나기도 했다.

레보차는 석기 시대부터 거주해 온 역사적 지역인 스피시에 위치해 있다. 11세기에 이 지역은 정복되어 이후 헝가리 왕국의 일부가 되었으며 1918년까지 유지되었다. 1241/1242년의 몽골 침략 이후 이 지역에는 카르파티아 독일인(나중에는 집서 독일인으로 알려짐)도 정착했다. 이 도시는 헝가리 왕국 내에서 자치 형태를 띠며 스피시 독일인 협회의 수도가 되었다. 1321년에는 광범위한 저장 권한이 부여되어 상인, 장인, 광산 소유주들이 이 도시에 정착하도록 유도했다.

15세기에 폴란드와 헝가리 사이의 교역로 교차로에 위치한 이 도시는 부유한 상업 중심지가 되었다. 동시에 이 도시는 중요한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영국의 인문주의자 레너드 콕스는 1520년경 레보차의 한 학교에서 가르쳤다. 비텐베르크 출신의 서적상 브루어는 자신의 서점을 번성하는 인쇄소로 바꾸었고, 150년 동안 지속되었다. 마지막으로, 가장 잘 알려진 중세 목각가 중 한 명인 레보차의 마스터 파볼이 이곳에 정착했다.

이 도시는 두 번의 파괴적인 화재(1550년에 일어난 첫 번째 화재는 거의 모든 고딕 건축을 파괴했고, 1599년에 또 다른 화재가 발생)에도 불구하고 16세기 말까지 이러한 문화적, 경제적 지위를 유지했다. 이 번영의 시대에 여러 교회가 건설되었고, 이 도시에는 학교, 도서관, 약국, 의사가 있었다. 1624년에는 이미 인쇄기가 있었다. 레보차는 종교 개혁의 중심지였다.

1700년 일련의 끔찍한 사건에서, 한 지역 귀족이 사냥 중에 실수로 도시 시장을 부상시키면서 일련의 복수 공격이 발생했고, 결국 작센 치안 판사인 시장 카롤 크람러가 살해되었다. 그 후 시장의 팔이 잘려져 방부 처리되어 추가적인 복수를 요구하는 의미로 시청에 보존되었다. 이것은 작가 칼만 믹사트의 이 도시에 관한 헝가리어 소설인 ''검은 도시''의 주제가 되었다.[13]

중앙 광장의 남쪽 끝에는 레보차 복음주의 교회가 1823년부터 건설되어 1832년에 헌당되었다. 이것은 도시 성벽 외부에 있던 이전의 조항 교회를 대체했다.[14]

이 도시의 경제적 중요성은 1871년 중요한 새로운 코시체-보훔 철도가 레보차를 우회하여 인근 도시인 스피시스카 노바 베스(Spišská Nová Ves)를 통과하며 남쪽에 건설되면서 감소했다. 이후 1892년에는 스피시스카 노바 베스 기차역에서 레보차까지 스피시스카 노바 베스-레보차 철도가 건설되었다.

2. 2. 중세 시대

1241년1242년 사이에 있었던 몽골족의 침공으로 파괴된 뒤 독일인들이 레보차를 건설했으며, 1249년 문헌에서 "Leucha"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했다.[13] 1317년 왕립 자유 도시로 지정되었고 1321년 도시로 승격되었다.[13] 15세기 폴란드헝가리를 연결하는 무역의 경로로 여겨지면서 상업의 중심지로 발전했고 철과 구리, 모피, 가죽, 옥수수, 포도주가 수출되었다.[13]

레보차는 석기 시대부터 거주해 온 역사적 지역인 스피시에 위치해 있다. 11세기에 이 지역은 정복되어 헝가리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1241/1242년의 몽골 침략 이후 이 지역에는 카르파티아 독일인(나중에는 집서 독일인으로 알려짐)도 정착했다. 이 도시는 헝가리 왕국 내에서 자치 형태를 띠며 스피시 독일인 협회의 수도가 되었다. 1317년 레보차(당시 일반적으로 독일어 이름인 Leutschau로 알려짐)는 왕립 도시의 지위를 받았다. 1321년에는 광범위한 저장 권한이 부여되어 상인, 장인, 광산 소유주들이 이 도시에 정착하도록 유도했다.

15세기에 폴란드와 헝가리 사이의 교역로 교차로에 위치한 이 도시는 부유한 상업 중심지가 되었다. 동시에 이 도시는 중요한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영국의 인문주의자 레너드 콕스는 1520년경 레보차의 한 학교에서 가르쳤다. 비텐베르크 출신의 서적상 브루어는 자신의 서점을 번성하는 인쇄소로 바꾸었고, 150년 동안 지속되었다. 마지막으로, 가장 잘 알려진 중세 목각가 중 한 명인 레보차의 마스터 파볼이 이곳에 정착했다.

이 도시는 두 번의 파괴적인 화재(1550년에 일어난 첫 번째 화재는 거의 모든 고딕 건축을 파괴했고, 1599년에 또 다른 화재가 발생)에도 불구하고 16세기 말까지 이러한 문화적, 경제적 지위를 유지했다. 이 번영의 시대에 여러 교회가 건설되었고, 이 도시에는 학교, 도서관, 약국, 의사가 있었다. 1624년에는 이미 인쇄기가 있었다. 레보차는 종교 개혁의 중심지였다. 17세기 합스부르크 왕가에 반대하는 봉기가 일어나기도 했다.

2. 3. 근세 시대

1241년1242년 사이에 있었던 몽골족의 침공으로 파괴된 뒤부터 독일인들이 건설했으며 1249년 문헌에서 "Leucha"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했다.[13] 1317년 왕립 자유 도시로 지정되었고 1321년 도시로 승격되었다.[13] 15세기 폴란드헝가리를 연결하는 무역의 경로로 여겨지면서 상업의 중심지로 발전했고 철과 구리, 모피, 가죽, 옥수수, 포도주가 수출되었다.[13] 17세기 합스부르크 왕가에 반대하는 봉기가 일어나기도 했다.

레보차는 석기 시대부터 거주해 온 역사적 지역인 스피시에 위치해 있다. 11세기에 이 지역은 정복되어 이후 헝가리 왕국의 일부가 되었으며 1918년까지 유지되었다. 1241/1242년의 몽골 침략 이후 이 지역에는 카르파티아 독일인(나중에는 집서 독일인으로 알려짐)도 정착했다. 이 도시는 헝가리 왕국 내에서 자치 형태를 띠며 스피시 독일인 협회의 수도가 되었다. 레보차시에 대한 가장 오래된 문헌 기록은 124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13] 1317년 레보차(당시 일반적으로 독일어 이름인 Leutschau로 알려짐 - 이름 변경 목록은 아래 연대기를 참조)는 왕립 도시의 지위를 받았다. 1321년에는 광범위한 저장 권한이 부여되어 상인, 장인, 광산 소유주들이 이 도시에 정착하도록 유도했다.

15세기에 폴란드와 헝가리 사이의 교역로 교차로에 위치한 이 도시는 부유한 상업 중심지가 되었다. 철, 구리, 모피, 가죽, 곡물, 와인을 수출했다. 동시에 이 도시는 중요한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영국의 인문주의자 레너드 콕스는 1520년경 레보차의 한 학교에서 가르쳤다. 비텐베르크 출신의 서적상 브루어는 자신의 서점을 번성하는 인쇄소로 바꾸었고, 150년 동안 지속되었다. 마지막으로, 가장 잘 알려진 중세 목각가 중 한 명인 레보차의 마스터 파볼이 이곳에 정착했다.

이 도시는 두 번의 파괴적인 화재(1550년에 일어난 첫 번째 화재는 거의 모든 고딕 건축을 파괴했고, 1599년에 또 다른 화재가 발생)에도 불구하고 16세기 말까지 이러한 문화적, 경제적 지위를 유지했다. 이 번영의 시대에 여러 교회가 건설되었고, 이 도시에는 학교, 도서관, 약국, 의사가 있었다. 1624년에는 이미 인쇄기가 있었다. 레보차는 종교 개혁의 중심지였다. 17세기에 반합스부르크 봉기가 일어나면서 이 도시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1700년 일련의 끔찍한 사건에서, 한 지역 귀족이 사냥 중에 실수로 도시 시장을 부상시키면서 일련의 복수 공격이 발생했고, 결국 작센 치안 판사인 시장 카롤 크람러가 살해되었다. 그 후 시장의 팔이 잘려져 방부 처리되어 추가적인 복수를 요구하는 의미로 시청에 보존되었다. 이것은 작가 칼만 믹사트의 이 도시에 관한 헝가리어 소설인 ''검은 도시''의 주제가 되었다.[13]

2. 4. 현대

1241년1242년 사이에 있었던 몽골의 침공으로 파괴된 뒤 독일인들이 레보차를 건설했으며 1249년 문헌에서 "Leucha"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했다.[13] 1317년 왕립 자유 도시로 지정되었고 1321년 도시로 승격되었다.[13] 15세기 폴란드헝가리를 연결하는 무역의 경로로 여겨지면서 상업의 중심지로 발전했고 철과 구리, 모피, 가죽, 옥수수, 포도주가 수출되었다.[13] 17세기 합스부르크 왕가에 반대하는 봉기가 일어나기도 했다.

레보차는 석기 시대부터 거주해 온 역사적 지역인 스피시에 위치해 있다. 11세기에 이 지역은 정복되어 이후 헝가리 왕국의 일부가 되었으며 1918년까지 유지되었다. 1241/1242년의 몽골 침략 이후 이 지역에는 카르파티아 독일인(나중에는 집서 독일인으로 알려짐)도 정착했다. 이 도시는 헝가리 왕국 내에서 자치 형태를 띠며 스피시 독일인 협회의 수도가 되었다. 레보차시에 대한 가장 오래된 문헌 기록은 124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13] 1317년 레보차(당시 일반적으로 독일어 이름인 Leutschau로 알려짐)는 왕립 도시의 지위를 받았다. 1321년에는 광범위한 저장 권한이 부여되어 상인, 장인, 광산 소유주들이 이 도시에 정착하도록 유도했다.

15세기에 폴란드와 헝가리 사이의 교역로 교차로에 위치한 이 도시는 부유한 상업 중심지가 되었다. 철, 구리, 모피, 가죽, 곡물, 와인을 수출했다. 동시에 이 도시는 중요한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영국의 인문주의자 레너드 콕스는 1520년경 레보차의 한 학교에서 가르쳤다. 비텐베르크 출신의 서적상 브루어는 자신의 서점을 번성하는 인쇄소로 바꾸었고, 150년 동안 지속되었다. 마지막으로, 가장 잘 알려진 중세 목각가 중 한 명인 레보차의 마스터 파볼이 이곳에 정착했다.

이 도시는 두 번의 파괴적인 화재(1550년에 일어난 첫 번째 화재는 거의 모든 고딕 건축을 파괴했고, 1599년에 또 다른 화재가 발생)에도 불구하고 16세기 말까지 이러한 문화적, 경제적 지위를 유지했다. 이 번영의 시대에 여러 교회가 건설되었고, 이 도시에는 학교, 도서관, 약국, 의사가 있었다. 1624년에는 이미 인쇄기가 있었다. 레보차는 종교 개혁의 중심지였다. 17세기에 반합스부르크 봉기가 일어나면서 이 도시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1700년 일련의 끔찍한 사건에서, 한 지역 귀족이 사냥 중에 실수로 도시 시장을 부상시키면서 일련의 복수 공격이 발생했고, 결국 작센 치안 판사인 시장 카롤 크람러가 살해되었다. 그 후 시장의 팔이 잘려져 방부 처리되어 추가적인 복수를 요구하는 의미로 시청에 보존되었다. 이것은 작가 칼만 믹사트의 이 도시에 관한 헝가리어 소설인 ''검은 도시''의 주제가 되었다.[13]

중앙 광장의 남쪽 끝에는 레보차 복음주의 교회가 1823년부터 건설되어 1832년에 헌당되었다. 이것은 도시 성벽 외부에 있던 이전의 조항 교회를 대체했다.[14]

이 도시의 경제적 중요성은 1871년 중요한 새로운 코시체-보훔 철도가 레보차를 우회하여 인근 도시인 스피시스카 노바 베스(Spišská Nová Ves)를 통과하며 8 km 남쪽에 건설되면서 감소했다. 이후 1892년에는 스피시스카 노바 베스 기차역에서 레보차까지 스피시스카 노바 베스-레보차 철도가 건설되었다. 1918년 독립 체코슬로바키아가 수립되기 전까지 레보차는 헝가리 왕국 내의 세페스 주의 일부였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슬로바키아 공화국 (1939–1945)의 일부였다. 1945년 1월 27일, 소련 내 제1체코슬로바키아군단이 베르마흐트와 헝가리 왕립군을 레보차에서 몰아내고 다시 체코슬로바키아의 일부가 되었다. 1993년부터 독립 슬로바키아의 일부이다.

1995년 7월 3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레보차를 방문했다. 그는 레보차에서 북쪽으로 약 2 km 떨어진 언덕인 레보차의 복된 동정 마리아 방문 대성당의 전통적인 순례지에서 65만 명의 신자를 위한 미사를 집전했다.

2. 5. 유대인 공동체의 역사

레보차에서 유대인 정착은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늦게 시작되었다. 1768년과 1828년의 도시 인구 조사 데이터는 유대인의 부재를 나타냈으며, 이는 1840년경까지 유대인 정착이 금지되었음을 시사한다.[15] 1840년대는 주로 훈코프체와 동슬로바키아의 다른 지역에서 레보차로 유대인 이주가 시작된 시기였다. 이러한 이주 물결은 최초의 유대인 가구의 설립으로 이어졌고, 유대인 공동체(케힐라)의 형성을 촉발했다.[15]

1870년대에 케힐라는 상당한 확장을 보였고, 1880년대에는 묘지와 같은 추가적인 구조물이 통합되었다.[15] 1899년, 유대인 공동체는 도시 외곽에 위치한 오리엔탈 건축 양식으로 설계된 광대한 회당을 개관했다.[16] 이 중요한 구조물과 함께 학교와 미크베라고 알려진 의례용 목욕탕이 근처에 건설되었다.[15]

1938년 10월 슬로바키아가 자치를 획득한 후, 유대인 인구는 차츰 증가하는 차별에 직면하기 시작했다. 1938년 11월 4일, 시민권을 가지고 있지 않은 레보차 출신의 유대인 55명이 플레시비츠, 슬로바키아 근처 슬로바키아-헝가리 국경을 따라 미개척 지역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열악한 환경과 충분하지 않은 거처에서 몇 주 동안 억류된 이들은 유대인 단체의 공동 노력으로 겨우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15]

1939년 3월 14일 슬로바키아 공화국이 설립되자, 유대인의 집과 사업체는 나치 동맹의 독일 소수 민족에 의해 만연한 약탈과 파괴에 시달렸다. 이러한 사건은 3월 23일에 재발했고, 8월에는 하쇼메르 하차이어 여름 캠프가 공격을 받아 해산되면서 더욱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그 해에는 수많은 유대인 전문가의 면허가 취소되고, 유대인 선술집이 폐쇄되었으며, 지역 사회 봉사직에서 해고되는 일도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981명의 지역 유대인이 추방되었다. 최초의 추방은 1942년 3월에 시작되었으며, 처음에는 주로 젊은 여성들을 대상으로 하여 포프라트의 임시 수용소로 보내졌다가 아우슈비츠로 보내졌다. 더 많은 젊은이들이 질리나의 임시 수용소를 거쳐 마이다네크로 보내졌다.

1942년 3월부터 레보차 출신의 유대인들은 집중 수용소와 절멸 수용소로 체계적으로 추방되었으며, 아우슈비츠로 보내진 젊은 여성 그룹이 시작이었다. 탈출 시도에도 불구하고 가족, 병원 환자, 정신과 환자를 포함한 추가 추방이 이어졌으며, 그해 말까지 유대인 인구의 약 80%가 추방되었다.[15]

이러한 물결 이후, 소수의 유대인이 지역에 남아 있었으며, 일부는 면제 서류를 소지하거나 추방을 피하기 위해 개종했다. 그러나 1944년 9월 독일이 레보차를 점령하면서, 남아 있던 유대인들은 더욱 심화된 박해에 직면했다. 많은 사람들이 추방되거나 처형되었고, 다른 사람들은 외딴 지역에서 피난처를 찾거나 파르티잔 그룹에 합류했다. 저항에도 불구하고, 회당, 미크베, 학교 건물, 유대인 묘지는 모독되었고, 유대인과 파르티잔에 대한 광범위한 사냥으로 인해 추가 추방과 처형이 발생했다.

전후, 살아남은 유대인 중 일부가 레보차로 돌아와 케힐라 생활을 부활시키고 공공 건물을 수리했다. 시온주의 활동이 재개되었으나, 대부분의 유대인은 1949년에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1960년대에는 약 60명으로 구성된 작은 케힐라가 남아 있었고, 한때 모독되었던 묘지는 방치되었다. 1990년 현재, 소수의 유대인 가족만이 레보차에 거주했다.

2016년에는 지역 가톨릭 청소년 단체인 Spoločenstvo Pavol, 슬로바키아 기독 청소년 운동 연합, 슬로바키아 유대인 공동체 연합, 레보차 시의 협력적인 노력 덕분에 역사적인 유대인 묘지에서 쓰레기가 치워지고 정돈되었다.[16]

2. 5. 1. 홀로코스트와 그 이후

이 지역의 다른 지역과 비교했을 때, 레보차에서는 유대인 정착이 비교적 늦게 시작되었다. 1768년과 1828년의 도시 인구 조사 데이터는 유대인의 부재를 나타냈으며, 이는 1840년경까지 유대인 정착이 금지되었음을 시사한다.[15] 1840년대는 주로 훈코프체와 동슬로바키아의 다른 지역에서 레보차로 유대인 이주가 시작된 시기였다. 이러한 이주 물결은 최초의 유대인 가구의 설립으로 이어졌고, 유대인 공동체(케힐라)의 형성을 촉발했다.[15]

1870년대에 케힐라는 상당한 확장을 보였고, 1880년대에는 묘지와 같은 추가적인 구조물이 통합되었다.[15] 1899년, 유대인 공동체는 도시 외곽에 위치한 오리엔탈 건축 양식으로 설계된 광대한 회당을 개관했다.[16] 이 중요한 구조물과 함께 학교와 미크베라고 알려진 의례용 목욕탕이 근처에 건설되었다.[15]

1938년 10월 슬로바키아가 자치를 획득한 후, 유대인 인구는 차츰 증가하는 차별에 직면하기 시작했다. 1938년 11월 4일, 시민권을 가지고 있지 않은 레보차 출신의 유대인 55명이 플레시비츠, 슬로바키아 근처 슬로바키아-헝가리 국경을 따라 미개척 지역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열악한 환경과 충분하지 않은 거처에서 몇 주 동안 억류된 이들은 유대인 단체의 공동 노력으로 겨우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15]

1939년 3월 14일 슬로바키아 공화국이 설립되자, 유대인의 집과 사업체는 나치 동맹의 독일 소수 민족에 의해 만연한 약탈과 파괴에 시달렸다. 이러한 사건은 3월 23일에 재발했고, 8월에는 하쇼메르 하차이어 여름 캠프가 공격을 받아 해산되면서 더욱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그 해에는 수많은 유대인 전문가의 면허가 취소되고, 유대인 선술집이 폐쇄되었으며, 지역 사회 봉사직에서 해고되는 일도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981명의 지역 유대인이 추방되었다. 최초의 추방은 1942년 3월에 시작되었으며, 처음에는 주로 젊은 여성들을 대상으로 하여 포프라트의 임시 수용소로 보내졌다가 아우슈비츠로 보내졌다. 더 많은 젊은이들이 질리나의 임시 수용소를 거쳐 마이다네크로 보내졌다.

1942년 3월부터 레보차 출신의 유대인들은 집중 수용소와 절멸 수용소로 체계적으로 추방되었으며, 아우슈비츠로 보내진 젊은 여성 그룹이 시작이었다. 탈출 시도에도 불구하고 가족, 병원 환자, 정신과 환자를 포함한 추가 추방이 이어졌으며, 그해 말까지 유대인 인구의 약 80%가 추방되었다.[15]

이러한 물결 이후, 소수의 유대인이 지역에 남아 있었으며, 일부는 면제 서류를 소지하거나 추방을 피하기 위해 개종했다. 그러나 1944년 9월 독일이 레보차를 점령하면서, 남아 있던 유대인들은 더욱 심화된 박해에 직면했다. 많은 사람들이 추방되거나 처형되었고, 다른 사람들은 외딴 지역에서 피난처를 찾거나 파르티잔 그룹에 합류했다. 저항에도 불구하고, 회당, 미크베, 학교 건물, 유대인 묘지는 모독되었고, 유대인과 파르티잔에 대한 광범위한 사냥으로 인해 추가 추방과 처형이 발생했다.

전후, 살아남은 유대인 중 일부가 레보차로 돌아와 케힐라 생활을 부활시키고 공공 건물을 수리했다. 시온주의 활동이 재개되었으나, 대부분의 유대인은 1949년에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1960년대에는 약 60명으로 구성된 작은 케힐라가 남아 있었고, 한때 모독되었던 묘지는 방치되었다. 1990년 현재, 소수의 유대인 가족만이 레보차에 거주했다.

2016년에는 지역 가톨릭 청소년 단체인 Spoločenstvo Pavol, 슬로바키아 기독 청소년 운동 연합, 슬로바키아 유대인 공동체 연합, 레보차 시의 협력적인 노력 덕분에 역사적인 유대인 묘지에서 쓰레기가 치워지고 정돈되었다.[16]

3. 지리

레보차는 해발 570m 지점에 위치하며 면적은 64.042km2이다.[18] 호르나드 분지 북부에 위치하며, 레보차 구릉 기슭, 호르나드강의 지류인 레보치스키 포토크 시냇가에 자리 잡고 있다. 팝라트는 서쪽으로 25km 떨어져 있고, 프레쇼우는 동쪽으로 50km, 코시체는 남동쪽으로 90km, 브라티슬라바는 남서쪽으로 370km 떨어져 있다.

인근 정착지로는 다음과 같은 곳이 있다.


  • 레보치스카 돌리나(Levočská Dolina, 레보차 계곡/Levočská Dolinask): 마을에서 약 4km 떨어진, 자바다로 가는 길에 있다.
  • 레보치스케 루키(Levočské Lúky, 레보차 들판/Levočské Lúkysk): 스피슈스카노바베스로 가는 길에 있는 정착지.
  • 자바다: 레보치스카 돌리나 위의 언덕에 있는 마을.

3. 1. 인근 지역

레보차는 해발 570미터 지점에 위치하며, 면적은 64.042제곱킬로미터이다.[18]

4. 인구

연도인구
19709,502
198011,097
199112,678
200114,366
201114,830
202114,256



2021년 인구 조사 기준 레보차의 인구는 14,256명이었다.[8]

2001년도 조사에 따르면, 마을 인구는 14,366명이다. 그 중 87.07%는 슬로바키아인, 11.20%가 로마인, 0.33%가 체코인이다[18]. 신앙은 79.54%가 로마 가톨릭교회, 9.01%가 무종교, 1.61%가 루터교, 3.87%는 동방 가톨릭교회이다[18].

4. 1. 민족 구성 (2001년 기준)

2001년 조사에 따르면 레보차 인구는 14,366명이다. 민족 구성은 슬로바키아인 87.07%, 로마인 11.20%, 체코인 0.33%이다.[18] 종교는 로마 가톨릭교회가 79.54%로 가장 많고, 무종교 9.01%, 루터교 1.61%, 동방 가톨릭교회 3.87%이다.[18]

4. 2. 종교 구성 (2001년 기준)

2001년 조사에 따르면 레보차의 인구는 14,366명이었다. 주민의 87.07%는 슬로바키아인, 11.20%는 로마인, 0.33%는 체코인이었다. 종교 구성은 로마 가톨릭교회가 79.54%로 가장 많았고, 무종교(9.01%), 루터교(1.61%), 동방 가톨릭교회(3.87%) 순이었다.

5. 문화

구시가지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곳에 자리 잡고 있으며, 대부분의 고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2009년 6월, 스피시 성 및 제흐라와 함께 "레보차, 스피시 성, 그리고 관련 문화 유적"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유네스코는 도시의 역사적인 중심지, 요새, 그리고 도시에 보존된 레보차의 마스터 바울의 작품들을 언급하고 있다.

구시가지의 주요 입구는 기념비적인 ''코시체 문'' (15세기)을 통해 이루어지며, 그 뒤에는 화려한 바로크 양식의 성령 교회와 새로운 소수파 수도원 ()이 있다.

도시 광장 (''Námestie Majstra Pavla'' - 마스터 바울 광장)에는 세 개의 주요 기념물이 있다. 박물관으로 사용되는 기이한 구 시청사 (15-17세기), 돔형의 복음주의 루터교회 (1837), 그리고 성 야고보 대성당 (슬로바키아어: ''Bazilika svätého Jakuba'', 영어에서는 종종 St. Jacob's로 잘못 불림)이다. 성 야고보 대성당에는 1520년경 마스터 바울이 제작한, 세계에서 가장 높은 18.62m의 웅장하게 조각되고 채색된 나무 고딕 제단이 있다. 이 광장은 매우 잘 보존되어 있으며, 중세 후기에 지역 귀족들의 저택이었던 눈에 띄는 건물들이 많이 있다. 또한 광장에는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죄인을 공개 처벌하는 데 사용되었던 쇠로 만든 "수치심의 우리"도 있다. 집 중 하나에 있는 명판은 코메니우스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오르비스 픽투스''가 도시에서 인쇄되고 출판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광장의 다른 건물에는 역사 박물관과 마스터 바울의 작품을 기리는 박물관이 있다.

광장 뒤의 Kláštorská 거리에는 14세기의 교회와 소수파의 옛 수도원의 유적이 있으며, 현재 교회 문법 학교에 통합되어 있다. 근처에는 15세기의 고딕 양식 건축물인 도시의 ''폴란드 문''이 있다.

16세기부터 1922년 말까지 레보차는 스페스(스피시) 주의 행정 중심지였다. 1806년부터 1826년까지 에거 출신의 헝가리 건축가 안탈 포볼니는 도시 행정의 본부로 웅장한 행정 건물인 대규모 주 청사를 지었다. 그는 건물의 수평선을 강조하여 레보차의 르네상스적 특성에 맞게 고전주의 양식을 조정했다. 이 건물은 옛 헝가리 왕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주 청사 중 하나로 여겨진다. 오늘날, 이 건물은 재건되었으며 행정부의 소재지이다.

주립 지역 기록 보관소 (''Štátny oblastný archív'')는 Nám. Majstra Pavla 60번지 광장 북쪽에 있는 황갈색 석조 건물에 있다.

5. 1. 세계유산

구시가지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곳에 자리 잡고 있으며, 대부분의 고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2009년 6월, 스피시 성 및 제흐라와 함께 "레보차, 스피시 성, 그리고 관련 문화 유적"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유네스코는 도시의 역사적인 중심지, 요새, 그리고 도시에 보존된 레보차의 마스터 바울의 작품들을 언급하고 있다.

구시가지의 주요 입구는 기념비적인 ''코시체 문'' (15세기)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 뒤에는 화려한 바로크 양식의 성령 교회와 새로운 소수파 수도원 ()이 있다.

도시 광장 (''Námestie Majstra Pavla'' - 마스터 바울 광장)에는 세 개의 주요 기념물이 있다. 박물관으로 사용되는 기이한 구 시청사 (15-17세기), 돔형의 복음주의 루터교회 (1837), 그리고 성 야고보 대성당 (슬로바키아어: ''Bazilika svätého Jakuba'', 영어에서는 종종 St. Jacob's로 잘못 불림)이다. 성 야고보 대성당에는 1520년경 마스터 바울이 제작한, 세계에서 가장 높은 18.62m의 웅장하게 조각되고 채색된 나무 고딕 제단이 있다. 이 광장은 매우 잘 보존되어 있으며, 중세 후기에 지역 귀족들의 저택이었던 눈에 띄는 건물들이 많이 있다. 또한 광장에는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죄인을 공개 처벌하는 데 사용되었던 쇠로 만든 "수치심의 우리"도 있다. 집 중 하나에 있는 명판은 코메니우스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오르비스 픽투스''가 도시에서 인쇄되고 출판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광장의 다른 건물에는 역사 박물관과 마스터 바울의 작품을 기리는 박물관이 있다.

광장 뒤의 Kláštorská 거리에는 14세기의 교회와 소수파의 옛 수도원의 유적이 있으며, 현재 교회 문법 학교에 통합되어 있다. 근처에는 15세기의 고딕 양식 건축물인 도시의 ''폴란드 문''이 있다.

16세기부터 1922년 말까지 레보차는 스페스(스피시) 주의 행정 중심지였다. 1806년부터 1826년까지 에거 출신의 헝가리 건축가 안탈 포볼니는 도시 행정의 본부로 웅장한 행정 건물인 대규모 주 청사를 지었다. 그는 건물의 수평선을 강조하여 레보차의 르네상스적 특성에 맞게 고전주의 양식을 조정했다. 이 건물은 옛 헝가리 왕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주 청사 중 하나로 여겨진다. 오늘날, 이 건물은 재건되었으며 행정부의 소재지이다.

주립 지역 기록 보관소 (''Štátny oblastný archív'')는 Nám. Majstra Pavla 60번지 광장 북쪽에 있는 황갈색 석조 건물에 있다.

5. 2. 주요 건축물

구시가지는 대부분 고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그림처럼 아름다운 곳에 자리 잡고 있다. 2009년 6월, 스피시 성 및 제흐라와 함께 "레보차, 스피시 성, 그리고 관련 문화 유적"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유네스코는 도시의 역사적인 중심지, 요새, 그리고 도시에 보존된 레보차의 마스터 바울의 작품들을 언급하고 있다.

구시가지의 주요 입구는 기념비적인 ''코시체 문'' (15세기)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 뒤에는 화려한 바로크 양식의 성령 교회와 새로운 소수파 수도원 ()이 있다.

도시 광장 (''Námestie Majstra Pavla'' - 마스터 바울 광장)에는 세 개의 주요 기념물이 있다. 박물관으로 사용되는 기이한 구 시청사 (15-17세기), 돔형의 복음주의 루터교회 (1837), 그리고 성 야고보 대성당 (슬로바키아어: ''Bazilika svätého Jakuba'')이다. 성 야고보 대성당에는 1520년경 마스터 바울이 제작한, 세계에서 가장 높은 (18.62 m) 웅장하게 조각되고 채색된 나무 고딕 제단이 있다. 이 광장은 매우 잘 보존되어 있으며, 중세 후기에 지역 귀족들의 저택이었던 눈에 띄는 건물들이 많이 있다. 또한 광장에는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죄인을 공개 처벌하는 데 사용되었던 쇠로 만든 "수치심의 우리"도 있다. 집 중 하나에 있는 명판은 코메니우스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오르비스 픽투스''가 도시에서 인쇄되고 출판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광장의 다른 건물에는 역사 박물관과 마스터 바울의 작품을 기리는 박물관이 있다.

광장 뒤의 Kláštorská 거리에는 14세기의 교회와 소수파의 옛 수도원의 유적이 있으며, 현재 교회 문법 학교에 통합되어 있다. 근처에는 15세기의 고딕 양식 건축물인 도시의 ''폴란드 문''이 있다.

16세기부터 1922년 말까지 레보차는 스페스(스피시) 주의 행정 중심지였다. 1806년부터 1826년까지 에거 출신의 헝가리 건축가 안탈 포볼니는 도시 행정의 본부로 웅장한 행정 건물인 대규모 주 청사를 지었다. 그는 건물의 수평선을 강조하여 레보차의 르네상스적 특성에 맞게 고전주의 양식을 조정했다. 이 건물은 옛 헝가리 왕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주 청사 중 하나로 여겨진다. 오늘날, 이 건물은 재건되었으며 행정부의 소재지이다.

주립 지역 기록 보관소 (''Štátny oblastný archív'')는 Nám. Majstra Pavla 60번지 광장 북쪽에 있는 황갈색 석조 건물에 있다.

6. 자매 도시

슬로바키아의 자매 도시 목록도 참조

레보차는 다음과 자매 결연을 맺고 있다.[17]

참조

[1] 웹사이트 Hustota obyvateľstva - obce https://datacube.sta[...] 2024-02-08
[2] 웹사이트 Základná charakteristika http://datacube.stat[...] Statistical Office of the Slovak Republic 2022-03-31
[3] 웹사이트 Počet obyvateľov podľa pohlavia - obce (ročne) https://datacube.sta[...] 2024-02-08
[4] 뉴스 UNESCO Newswebsite https://whc.unesco.o[...]
[5] 웹사이트 Municipal Statistics http://www.statistic[...] Statistical Office of the Slovak republic 2007-01-08
[6] 웹사이트 Statistical lexikon of municipalities 1970-2011 https://slovak.stati[...]
[7] 웹사이트 Census 2021 - Population - Basic results https://www.scitanie[...] Statistical Office of the Slovak Republic 2021-01-01
[8] 웹사이트 City Population https://citypopulati[...] 2024-06-12
[9] 서적 Lexikón stredovekých miest na Slovensku http://www.forumhist[...] Historický ústav SAV 2016-11-06
[10] 문서 "Vlastivedný Slovník Obcí na Slovensku" VEDA, vydavateľstvo Slovenskej akadémie vied
[11] 서적 Názvy Obcí Slovenskej republiky (Vývin v rokoch 1773-1997) VEDA, vydavateľstvo Slovenskej akadémie vied
[12] 간행물 Lexikálne východiská starej slovenskej hydronymie z povodia Hornádu v slovanskom kontexte http://www.slavu.sav[...] Slavistický ústav Jána Stanislava SAV
[13] 문서 Spiš
[14] 문서 Spiš
[15] 웹사이트 Encyclopaedia of Jewish communities, Slovakia https://www.jewishge[...] 2023-05-18
[16] 웹사이트 Slovakia: Clean-up at Jewish cemetery Levoča (& video) https://jewish-herit[...] 2023-05-18
[17] 웹사이트 Partnerské mestá http://www.levoca.sk[...] Levoča 2019-09-08
[18] 웹사이트 Municipal Statistics http://www.statistic[...] Statistical Office of the Slovak republic 2007-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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