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주이멋
1. 개요
레주이멋은 후 레 왕조 시기 찐씨 정권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인물이다. 레 유종의 아들로, 찐끄엉과 찐장의 횡포에 저항하여 1738년부터 1770년까지 30년 넘게 반란을 지속했다. 1738년 찐장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후, 여러 지역을 전전하며 저항했으나, 1770년 사위의 배신으로 찐 주의 군대에 포위되어 자결했다. 그의 반란은 후 레 왕조와 찐 주 사이의 권력 투쟁을 심화시키고, 베트남 사회의 불만을 표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 이름 | 레주이멋 |
|---|---|
| 출생 | 1738년 |
| 사망 | 1767년 |
| 국적 | 베트남 |
| 직업 | 반란 지도자 |
| 배우자 | 알려진 정보 없음 |
|---|---|
| 자녀 | 찐삼 1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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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0년 사망 -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는 베네치아 출신의 로코코 화가로, 밝고 화려한 색채와 환상적인 구성을 통해 우디네 대성당, 뷔르츠부르크 레지덴츠, 마드리드 왕궁 등 유럽 각지의 궁전과 교회를 장식하며 18세기 유럽 회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
1770년 사망 -
스즈키 하루노부
스즈키 하루노부는 에도 시대의 우키요에 화가로, 다색 목판화 기법인 니시키에를 발전시켜 우키요에 발전에 기여했으며, 미타테에 양식으로 에도 시대 생활상을 담아낸 섬세하고 서정적인 작품을 남겼다. -
생년 미상 -
손니 알리
손니 알리는 송가이 제국의 군주로서 니제르 강 유역을 장악한 후 팀북투와 젠네를 정복하고 군사력을 강화하여 제국을 확장했으며, 전통 신앙과 이슬람교 조화, 법에 의한 국가 통제, 무역 확립 등 내치에도 힘썼다. -
생년 미상 -
김조국
김조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2019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겸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2. 생애
레 유종의 아들이다.
당시 후 레 왕조는 실권이 없었고, 찐 주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다. 1729년, 찐끄엉은 레 유종을 협박하여 아들 레주이프엉에게 왕위를 넘기게 했다. 이후 찐끄엉이 죽고 찐장이 뒤를 이었으나, 그는 매우 포악하고 사치스러워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여러 지역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1732년, 찐장은 레주이프엉이 선왕 유종의 첩과 사통했다는 거짓 죄목으로 폐위시키고, 레 순종을 새로운 왕으로 세웠다.
찐장의 이러한 행동은 황족들의 반발을 샀다. 1738년, 레주이멋은 동생 레주이꾸이(黎維<0xEA><0xBF><0x8C>), 숙부 레주이쭉(黎維祝), 그리고 조정 관리인 팜꽁테(范公勢), 부트억(武鑠), 속교(屬校) 라이테떼(賴世濟)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수도 탕롱을 불태우고 찐장을 죽이려 했으나 실패했다. 반란이 실패하자, 레주이꾸이는 금수(錦水)로 달아났고, 레주이멋과 레주이쭉은 의양현(宜陽縣)으로 도망쳤다가 토착 세력가 응오흥따오(吳興造) 등의 도움을 받아 바닷길을 통해 청화(淸化)로 피신했다. 찐장은 팜꽁테, 부트억, 라이테떼를 처형하고 레주이멋 등 세 명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레주이꾸이와 레주이쭉은 곧 사망했으며, 레주이멋은 천관(天關) 산속을 떠돌다가 산길을 통해 안화현(安化縣), 봉화현(奉化縣)을 거쳐 미량현(美良縣), 명의현(明義縣)을 지나 산서처(山西處)의 임조현(臨洮縣)에서 다시 군사를 일으켰다.
1740년, 찐 주의 장수 당딘멋(鄧廷謐)이 군대를 세 갈래로 나누어 밤중에 레주이멋의 군대를 기습 공격하여 격파하고, 그의 보루 수십 개를 파괴했다. 레주이멋은 태원(太原)의 문랑현(文朗縣)으로 후퇴했으나, 당딘멋은 다시 산서(山西) 상류 지역에서 레주이멋을 공격하여 패배시켰다. 레주이멋은 이전에 왔던 길을 따라 청화로 돌아가 석성현(石城縣)의 옥루둔채(玉樓屯寨)를 근거지로 삼고 스스로를 천남제자(天南帝子)라 칭했다. 그러나 당딘멋이 다시 옥루둔채를 공격하여 함락시키자, 레주이멋은 예안(乂安)으로 달아나 고남동(古南洞)에 자리 잡았다. 이후 레주이멋은 다시 청화를 공격하여 뢰양구산(雷陽具山)에서 패상둔(沛上屯)을 격파하고, 강을 건너 예안성(乂安省)의 안장성(安場城)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1742년, 당딘멋, 하똥후언(何宗勳), 응우옌응이엠 등이 이끄는 찐 주 군대에게 다시 패배한 레주이멋은 강정현(康政縣)으로 도주했다. 그는 성미(盛美)에서 당딘멋과 교전했으나 또다시 패배하고, 진녕(鎭寧)으로 이동하여 정광산(呈光山)을 새로운 근거지로 삼았다.
1764년, 레주이멋은 남쪽의 응우옌 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1767년, 찐 주의 통치자 찐조아인이 죽고 찐섬이 권력을 계승했다. 레주이멋은 이 기회를 틈타 다시 군사를 일으켜 향산(香山)과 청장(淸漳) 등지에서 소요를 일으켰다. 찐섬은 서신을 보내 투항을 권유했으나, 레주이멋은 이를 거절했다.
1769년, 찐섬은 부이테닷(裴世達)을 예안통령(乂安統領)으로, 응우옌판(阮潘)을 청화정독령(淸化正督領)으로, 호앙딘테(黃廷體)를 흥화독령(興化督領)으로 임명하여 세 방향에서 진녕을 공격하게 했다. 부이테닷과 응우옌판의 군대가 정광산을 포위했지만, 레주이멋은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싸움을 피하며 저항했다.
1770년, 레주이멋의 사위인 라이테티에우(賴世玿)가 성문을 열어 찐 주의 군대를 맞아들이자, 궁지에 몰린 레주이멋은 스스로 불을 질러 처자식과 함께 목숨을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