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주이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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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레주이멋은 후 레 왕조 시기 찐씨 정권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인물이다. 레 유종의 아들로, 찐끄엉과 찐장의 횡포에 저항하여 1738년부터 1770년까지 30년 넘게 반란을 지속했다. 1738년 찐장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후, 여러 지역을 전전하며 저항했으나, 1770년 사위의 배신으로 찐 주의 군대에 포위되어 자결했다. 그의 반란은 후 레 왕조와 찐 주 사이의 권력 투쟁을 심화시키고, 베트남 사회의 불만을 표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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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주이멋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레주이멋 |
출생 | 1738년 |
사망 | 1767년 |
국적 | 베트남 |
직업 | 반란 지도자 |
가족 관계 | |
배우자 | 알려진 정보 없음 |
자녀 | 찐삼 1명 |
2. 생애
레 유종의 아들이다.[1]
당시 후 레 왕조는 실권이 없었고, 찐 주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다. 1729년, 찐끄엉은 레 유종을 협박하여 아들 레주이프엉에게 왕위를 넘기게 했다.[1] 이후 찐끄엉이 죽고 찐장이 뒤를 이었으나, 그는 매우 포악하고 사치스러워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여러 지역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1] 1732년, 찐장은 레주이프엉이 선왕 유종의 첩과 사통했다는 거짓 죄목으로 폐위시키고, 레 순종을 새로운 왕으로 세웠다.[1]
찐장의 이러한 행동은 황족들의 반발을 샀다. 1738년, 레주이멋은 동생 레주이꾸이(黎維<0xEA><0xBF><0x8C>), 숙부 레주이쭉(黎維祝), 그리고 조정 관리인 팜꽁테(范公勢), 부트억(武鑠), 속교(屬校) 라이테떼(賴世濟)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수도 탕롱을 불태우고 찐장을 죽이려 했으나 실패했다.[1] 반란이 실패하자, 레주이꾸이는 금수(錦水)로 달아났고, 레주이멋과 레주이쭉은 의양현(宜陽縣)으로 도망쳤다가 토착 세력가 응오흥따오(吳興造) 등의 도움을 받아 바닷길을 통해 청화(淸化)로 피신했다.[1] 찐장은 팜꽁테, 부트억, 라이테떼를 처형하고 레주이멋 등 세 명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1] 레주이꾸이와 레주이쭉은 곧 사망했으며, 레주이멋은 천관(天關) 산속을 떠돌다가 산길을 통해 안화현(安化縣), 봉화현(奉化縣)을 거쳐 미량현(美良縣), 명의현(明義縣)을 지나 산서처(山西處)의 임조현(臨洮縣)에서 다시 군사를 일으켰다.[1]
1740년, 찐 주의 장수 당딘멋(鄧廷謐)이 군대를 세 갈래로 나누어 밤중에 레주이멋의 군대를 기습 공격하여 격파하고, 그의 보루 수십 개를 파괴했다.[1] 레주이멋은 태원(太原)의 문랑현(文朗縣)으로 후퇴했으나, 당딘멋은 다시 산서(山西) 상류 지역에서 레주이멋을 공격하여 패배시켰다.[1] 레주이멋은 이전에 왔던 길을 따라 청화로 돌아가 석성현(石城縣)의 옥루둔채(玉樓屯寨)를 근거지로 삼고 스스로를 천남제자(天南帝子)라 칭했다.[1] 그러나 당딘멋이 다시 옥루둔채를 공격하여 함락시키자, 레주이멋은 예안(乂安)으로 달아나 고남동(古南洞)에 자리 잡았다.[1] 이후 레주이멋은 다시 청화를 공격하여 뢰양구산(雷陽具山)에서 패상둔(沛上屯)을 격파하고, 강을 건너 예안성(乂安省)의 안장성(安場城)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1]
1742년, 당딘멋, 하똥후언(何宗勳), 응우옌응이엠 등이 이끄는 찐 주 군대에게 다시 패배한 레주이멋은 강정현(康政縣)으로 도주했다.[1] 그는 성미(盛美)에서 당딘멋과 교전했으나 또다시 패배하고, 진녕(鎭寧)으로 이동하여 정광산(呈光山)을 새로운 근거지로 삼았다.[1]
1764년, 레주이멋은 남쪽의 응우옌 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1]
1767년, 찐 주의 통치자 찐조아인이 죽고 찐섬이 권력을 계승했다. 레주이멋은 이 기회를 틈타 다시 군사를 일으켜 향산(香山)과 청장(淸漳) 등지에서 소요를 일으켰다.[1] 찐섬은 서신을 보내 투항을 권유했으나, 레주이멋은 이를 거절했다.[1]
1769년, 찐섬은 부이테닷(裴世達)을 예안통령(乂安統領)으로, 응우옌판(阮潘)을 청화정독령(淸化正督領)으로, 호앙딘테(黃廷體)를 흥화독령(興化督領)으로 임명하여 세 방향에서 진녕을 공격하게 했다.[1] 부이테닷과 응우옌판의 군대가 정광산을 포위했지만, 레주이멋은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싸움을 피하며 저항했다.[1]
1770년, 레주이멋의 사위인 라이테티에우(賴世玿)가 성문을 열어 찐 주의 군대를 맞아들이자, 궁지에 몰린 레주이멋은 스스로 불을 질러 처자식과 함께 목숨을 끊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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