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노스 4세 디오예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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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노스 4세 디오예니스는 1068년부터 1071년까지 비잔틴 제국을 통치한 황제이다. 그는 군사적 재능을 인정받아 섭정 에우도키아 마크렘볼리티사와 결혼하여 황위에 올랐다. 로마노스는 셀주크 투르크의 침략에 맞서 군사적 노력을 기울였으나,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패배하여 포로로 잡혔다. 이후 폐위되어 유배되었고, 1072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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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노스 4세 디오예니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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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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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로마노스 4세 디오게네스 |
로마자 표기 | Romanos IV Diogenēs |
칭호 | 로마인의 황제 및 전제자 |
통치 | |
즉위 | 1068년 1월 1일 |
퇴위 | 1071년 10월 1일 |
이전 통치자 | 콘스탄티누스 10세 에우도키아 (섭정) |
다음 통치자 | 미하일 7세 |
공동 황제 | |
개인 정보 | |
출생 | 기원후 1030년경, 카파도키아 |
사망 | 1072년 (42세) |
사망 장소 | 프로테 |
배우자 | 불가리아의 안나 알루시아네, 에우도키아 마크렘볼리티사 |
자녀 | 안나와의 사이: 콘스탄티누스 디오게네스 에우도키아와의 사이: 니케포로스 디오게네스, 레오 디오게네스 |
가문 | 디오게네스 가 |
아버지 | 콘스탄티누스 디오게네스 |
어머니 | 아르기로사 |
2. 생애
1067년 콘스탄티노스 10세 두카스 황제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미카일 7세를 대신하여 황후 에우도키아 마크렌보리티사가 섭정을 맡았다. 그러나 백성과 귀족들은 셀주크 제국의 침공에 맞서기 위해 강력한 군사 정권의 수립을 원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카파도키아 출신의 장군이었던 로마노스 4세는 에우도키아와 결혼하여 1068년 황제로 즉위했다. 즉위 후, 로마노스 4세는 북쪽의 페체네그인, 루스인, 노르만족과 화해하고 그들을 용병으로 받아들여 군사력을 강화했다. 그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셀주크 제국과 전투를 벌여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
1071년, 로마노스 4세는 아르메니아를 침략한 셀주크 제국군을 격퇴하기 위해 친정하였다.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 제국의 알프 아르슬란과 맞섰으나, 동로마 제국군은 훈련 부족과 배신으로 인해 패배하고 로마노스 4세는 포로로 잡혔다. 이 패배로 소아시아는 투르크인에게 점령되었고, 이는 훗날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하는 원인이 되었다.
로마노스 4세가 포로가 된 후, 미카일 7세 두카스가 황제로 즉위했다. 로마노스 4세는 석방된 후 복위를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1072년 두 눈이 멀게 된 채로 사망했다.
2. 1. 황제 즉위 이전
로마노스 4세는 카파도키아 출신의 유력한 가문인 디오게나이 가문의 일원이었다.[1] 그는 소아시아의 귀족 가문들과 혈연 관계를 맺고 있었다.[2] 그의 아버지는 콘스탄티노스 디오예네스이며, 어머니는 황제 로마노스 3세의 형제인 바실 아르기로스의 딸이었다.[3]로마노스 4세는 군사적 재능을 바탕으로 군대에서 두각을 나타내 시리아와 다뉴브 강 전선에서 복무했다.[4] 1067년에는 세르디카를 중심으로 하는 불가리아 테마의 공작이 되었다.[5] 그러나 같은 해 콘스탄티노스 10세 두카스의 아들들의 왕위를 찬탈하려 했다는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섭정 에우도키아 마크렘볼리티사에게 형을 선고받기 위해 대기하던 중, 에우도키아는 그를 사면하고 남편이자 황제 섭정으로 선택했다.[6] 에우도키아가 이러한 결정을 내린 이유는 강력한 남편을 찾지 못하면 귀족에게 섭정 자리를 빼앗길 수 있다는 우려와 로마노스의 대중적 인기를 고려했기 때문이다. 또한 셀주크 투르크가 카파도키아를 유린하고 카이사레아를 점령하는 등 군사적 위협이 커지면서 유능한 장군의 필요성이 커진 것도 영향을 미쳤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요한 십피리노스가 콘스탄티노스 10세가 에우도키아에게 한 재혼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무효화하고 원로원의 승인을 얻은 후, 1068년 1월 1일 로마노스는 에우도키아와 결혼하여 황제로 즉위했다.

2. 2. 황제 즉위와 통치 (1068년 ~ 1071년)
1067년 콘스탄티노스 10세 두카스가 사망한 후, 황후 에우도키아 마크렘볼리티사가 섭정을 맡았으나, 국민과 귀족들은 셀주크 투르크의 침공으로 강력한 군사 정권의 수립을 원했다. 카파도키아 출신의 유력 가문 디오게나이 출신인 로마노스 디오예네스는 군사적 재능으로 군대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세르디카의 공작이 되었다.[5] 그러나 콘스탄티노스 10세의 아들들의 왕위를 찬탈하려 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에우도키아는 강력한 남편을 찾지 못하면 귀족에게 섭정 자리를 빼앗길 수 있다는 우려와 로마노스의 인기에 힘입어 그를 사면하고 남편이자 아들들의 황제 섭정으로 선택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요한 십피리노스가 에우도키아가 재혼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무효화하고 원로원의 승인을 얻은 후, 1068년 1월 1일 로마노스는 황제와 결혼하여 로마 황제로 즉위했다.
로마노스 4세는 즉위 후, 페체네그족, 루스인, 노르만족과 화해하고 그들을 용병으로 받아들여 군사력을 강화했다. 그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셀주크 제국과 전투를 벌여 어느 정도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패배하여 포로가 되었고, 이는 동로마 제국의 소아시아 상실과 이후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2. 2. 1. 셀주크 투르크와의 전쟁
로마노스 4세는 즉위 후, 북쪽에서 침략해오던 페체네그인, 루스인, 노르만족과 화해하고 그들을 용병으로 받아들여 군사력을 강화하여 셀주크 제국과 전투를 벌여 어느 정도 전과를 올렸다.[13]1071년, 아르메니아를 침략한 셀주크 제국군을 물리치기 위해 4만(또는 6만)의 병력을 이끌고 친정하였다. 병력이 적었던 셀주크 제국의 알프 아르슬란은 휴전을 원했으나, 로마노스는 이를 거부하고 만지케르트에서 셀주크 제국군과 전투를 벌였다.[14]
동로마 제국군은 수적으로 우세했으나, 용병에 의존했기에 훈련도가 낮았고 충성심도 없었다. 전투 중 아군의 배신으로 동로마 제국군은 무너지고 로마노스 4세는 포로가 되었다.[15] 로마 황제가 포로가 된 것은 3세기 발레리아누스 이후 처음이었다. 이 패전으로 소아시아는 투르크인에게 점령되었고, 훗날 오스만 제국에 의해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는 원인이 된다.[16]
로마노스 4세는 야전에서 군대를 이끌고 직접 통치해야만 자신의 권위를 행사할 수 있다고 결론내렸고, 정부 전체의 관심을 투르크족과의 전쟁에 집중시켰다. 1067년까지 투르크족은 메소포타미아, 멜리테네, 시리아, 킬리키아, 카파도키아를 침략했고, 카이사레아 약탈과 성 바실 성당 약탈로 절정에 달했다.[17] 로마노스는 전장에서 비잔틴의 우위를 자신했지만, 콘스탄티누스 10세 두카스의 무관심으로 악화된 비잔틴군의 열악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의 군대는 주로 슬라보니아, 아르메니아, 불가리아, 프랑크 용병으로 구성되었으며, 규율이 없고 조직적이지 않았다.[16]
로마노스의 첫 군사 작전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안티오크는 알레포의 사라센에게 노출되었고, 사라센은 터키 군대의 도움을 받아 비잔틴 시리아 속주를 재정복하려 시도했다.[17] 로마노스는 리칸도스로 진군하던 중 셀주크 군대가 폰토스 지역을 침략하여 네오카이사레아를 약탈했다는 소식을 들었다.[18] 그는 소규모 기동 부대를 이끌고 엘라이우사 세바스테와 테프리케 산맥을 통과하여 터키군과 마주쳤고, 터키군은 약탈품을 버리고 포로를 석방해야 했다.
남쪽으로 돌아온 로마노스는 주력 군대에 합류하여 토러스 산맥을 지나 게르마니키아 북쪽으로 진격하여 알레포 토후국을 침공했다. 로마노스는 히에라폴리스를 점령하고 요새화했다. 그는 알레포의 사라센과 전투를 벌였지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군사 작전 기간이 끝나가자, 알렉산드레타와 킬리키아 관문을 거쳐 포단도스에 도착했다. 여기서 그는 셀주크 군대가 소아시아를 다시 습격하여 아모리움을 약탈했지만 너무 빨리 기지로 돌아가 추격할 수 없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1069년 1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했다.

다음 해 작전은 노르만족 용병 로버트 크리스핀의 반란으로 혼란에 빠졌다. 로마노스가 제때 급여를 지급하지 않아[20], 프랑크족 군대는 에데사 근처에서 황실 세금 징수원을 공격하며 약탈을 시작했다. 크리스핀은 아비도스로 추방되었지만, 프랑크족은 아르메니아 테마를 계속 약탈했다. 카이사레아 주변 지역은 다시 튀르크족에게 점령당했고, 로마노스는 카파도키아에서 튀르크족을 몰아내는 데 시간을 써야 했다. 그는 모든 포로를 처형했고, 심지어 목숨을 위해 몸값을 제안한 셀주크족 추장까지도 처형했다. 로마노스는 평화를 가져온 후, 멜리테네를 거쳐 유프라테스 강으로 진군하여 로마노폴리스에서 강을 건넜고, 반 호의 아클라트를 점령하여 아르메니아 국경을 보호하려 했다.
로마노스는 상당한 규모의 군대를 이끌고 아클라트로 진군했고, 군대의 대부분은 필라레토스 브라차미오스에게 맡겨 메소포타미아 국경을 방어하게 했다. 필라레토스는 튀르크족에게 패배했고, 튀르크족이 이코니움을 약탈하면서 로마노스는 계획을 포기하고 세바스테로 돌아와야 했다. 그는 안티오키아의 두크스에게 몹수에스티아 협곡을 확보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한편, 헤라클레아에서 튀르크족을 추격하려 했다. 튀르크족은 킬리키아 산맥에 갇혔지만, 약탈품을 버리고 알레포로 탈출했다. 로마노스는 큰 승리 없이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왔다.
1070년, 로마노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머물면서 바리가 노르만인에게 함락될 위기에 처한 것을 포함하여 많은 행정 문제를 처리했다. 노르만인들은 1068년부터 바리를 포위했지만, 로마노스가 대응하는 데 2년이 걸렸다.[21] 그는 구원 함대를 출항시켰으나, 함대는 로베르토 기스카르의 동생인 로제르가 지휘하는 노르만 함대에 격파되었고, 이탈리아에서 비잔틴 제국의 마지막 전초 기지는 1071년 4월 15일에 항복했다.[22]
한편, 로마노스는 국내에서 여러 개혁을 추진했다. 그는 궁정 의식과 수도 미화에 대한 불필요한 공적 지출을 줄였다.[23] 그는 궁정 귀족에게 지급되는 봉급을 삭감하고 상인들의 이윤을 줄였다. 군대에 대한 그의 관심은 지방 총독들과 군 지휘 계층에게 인기가 없었는데, 부패 행위를 막고자 했기 때문이다.[24] 그는 용병들의 불만을 샀고, 히포드롬에서 게임을 열지 않아 백성들에게도 인기가 없었다.[25]
그는 주된 목표인 튀르크족을 잊지 않았다. 자신이 직접 원정에 나설 수 없었기 때문에, 제국 군대를 마누엘 콤네노스 장군에게 맡겼다.[26] 그는 튀르크족과 전투를 벌였지만, 패배하여 흐루지라는 튀르크 장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마누엘은 흐루지를 설득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가서 로마노스와 동맹을 맺게 했고, 이는 곧 성사되었다. 이로 인해 셀주크 술탄 알프 아르슬란은 비잔틴 제국을 공격하여, 만지케르트와 아르케시를 포위하고 점령했다.[27] 로마노스는 3년 전에 점령했던 히에라폴리스를 시리아에서 만지케르트와 아르케시와 교환할 것을 제안했다.
2. 2. 2. 만지케르트 전투 (1071년)
1071년 로마노스 4세는 제국의 동쪽 국경 지역인 아르메니아를 침략한 셀주크 제국군을 물리치기 위해 4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친정하였다. 병력이 적었던 셀주크 제국의 알프 아르슬란은 휴전을 바랐으나, 로마노스는 이를 거부하고 만지케르트에서 셀주크 제국군과 전투를 벌였다.[29]동로마 제국군은 수적으로 우세했으나 용병에 의존했기에 훈련도가 낮았고, 충성심도 없었다. 전투 중 아군의 배신으로 동로마 제국군은 무너지고 로마노스 4세 또한 포로가 되었다.[35][36] 로마 황제가 포로가 된 것은 3세기 발레리아누스 이래 처음이었다. 이 패전으로 소아시아는 투르크인이 점령하게 되었고, 후에 오스만 제국에 의해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는 원인이 된다.

알프 아르슬란은 먼지와 누더기로 뒤덮인 전사가 로마 황제라는 것을 처음에는 믿기 어려워했다.[38] 그는 자리에서 내려와 로마노스 4세의 목을 밟았다.[39] 그러나 이러한 의례적인 굴욕을 표시한 후, 아르슬란은 로마노스 4세를 땅에서 일으켜 세우고 왕처럼 대하라고 명령했다. 그 후 그는 황제가 그의 캠프에 머무는 8일 동안 그에게 극도로 친절하게 대했으며, 그에게 잔인한 말은 결코 하지 않았다. 그는 조약과 엄청난 몸값 약속을 대가로 황제를 석방했다. 처음에는 알프 아르슬란이 로마노스 4세에게 1,000만 노미스마의 몸값을 제안했지만, 나중에는 150만 노미스마로 줄였고, 연간 36만 노미스마를 추가했다.
2. 3. 폐위와 죽음
로마누스 4세는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패배하고 포로가 되자 황제 자리에서 폐위되었고, 콘스탄티누스 10세의 아들 미카일 7세가 새로운 황제가 되었다.[44] 그해 셀주크 제국에서 풀려난 로마누스 4세는 미카일 7세의 즉위를 인정하지 않고 저항했으나, 사로잡혀 두 눈을 잃고 추방되었다.[46] 그는 1072년 실의 속에 사망했다.[49]1071년 10월 1일, 미카일 7세는 단독 통치자로 선포되었고, 로마누스는 폐위되었다.[44] 한 달 뒤, 카이사르 요한 두카스와 미하일 프셀로스는 에우도키아를 강제로 수도원에 보내고, 셀주크의 알프 아르슬란과 로마누스 4세가 맺은 협약을 파기했다.[45] 로마누스는 곧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으나, 콘스탄티누스와 안드로니코스 두카스에게 패배하여 티로포이온 요새를 거쳐 킬리키아의 아다나로 후퇴했다. 그는 안드로니코스에게 쫓기던 중 아다나 주둔군에게 신변 안전을 약속받고 항복했다.[46] 항복 전,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돈을 모아 술탄에게 보내며 "황제로서 디나르의 몸값을 약속했지만, 폐위되어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감사의 표시로 가진 모든 것을 보냅니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47]
안드로니코스는 로마누스가 황제의 보라색 옷을 포기하고 수도원으로 물러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약속했고, 로마누스는 동의했다. 이 합의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비준되었다.[48] 그러나 요한 두카스는 1072년 6월 29일, 코티아이온에서 로마누스를 매복하여 잔인하게 두 눈을 멀게 했다. 아탈리아테스는 "그가 일어섰을 때, 그의 눈은 피로 젖어 있었고, 그것을 본 모든 사람이 참을 수 없이 울게 만드는 비참하고 가엾은 모습이었다."라고 기록했다. 로마누스는 프로테 섬( 마르마라 해)으로 추방되었고, 의료 지원을 받지 못해 상처가 감염되어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그는 죽기 며칠 전, 미하일 프셀로스로부터 눈을 잃은 것을 축하하는 조롱 섞인 편지를 받았다.[49] 로마누스는 자신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며 죽었고, 그의 아내 에우도키아는 그의 유해를 성대하게 장례 지낼 수 있었다.
3. 평가
로마노스 4세는 군사적 역량은 뛰어났지만, 정치적 판단력이 부족하고 성급했기 때문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황제로 평가받는다.
그는 셀주크 투르크의 침입에 맞서 제국을 지키고자 노력한 유능한 장군이었다. 즉위 후, 페체네그족, 루스인, 노르만족 등 이민족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이들을 용병으로 활용하여 군사력을 강화하였다. 또한, 셀주크 투르크와의 전투에서 여러 차례 승리하며 군사적 재능을 입증했다.
그러나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그의 성급함과 판단 착오가 드러났다. 병력이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강화를 거부하고 전투를 강행한 결과, 훈련 부족과 배신으로 인해 대패하고 포로로 잡히는 굴욕을 겪었다. 이 패배로 동로마 제국은 소아시아 지역의 대부분을 상실했고, 이는 이후 제국 쇠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로마노스 4세는 석방된 후에도 미카엘 7세 두카스에게 황위를 요구하며 저항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죽음은 정치적 음모와 권력 다툼의 희생양이었음을 보여준다.
4. 가족 관계
로마노스 4세는 두 번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배우자 | 자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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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루시안의 딸 안네 | 콘스탄티누스 디오게네스[50] (알렉시우스 1세 콤네노스의 누이 테오도라와 결혼, 1073년 사망)[51] |
에우도키아 마크렘볼리티사 | 레오 디오게네스 (1069년 출생)[52] |
니케포로스 디오게네스 (1069년 출생)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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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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