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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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이스가는 1010년경 성립된 독일의 귀족 가문이다. 1206년 로이스-게라, 로이스-플라우엔, 로이스-베이다로 영토가 분할되었고, 이후 여러 차례 분열과 재통합을 거쳤다. 1778년 로이스-그라이츠 후국(형계), 1806년 로이스-게라 후국(제계)이 수립되었으며, 1815년 독일 연방에 가입했다. 1918년 독일 혁명으로 군주제가 붕괴된 후, 1919년 두 영토가 합병되어 로이스 공화국이 되었고, 1920년 튀링겐주에 편입되었다. 로이스 가문의 남성들은 '하인리히'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숫자를 붙여 구분하는 독특한 전통이 있다. 현재는 로이스-케스트리츠 가문이 유일하게 존속하고 있으며, 2022년에는 가문의 수장인 하인리히 14세가 당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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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이스가 - 하인리히 로이스
하인리히 13세 로이스는 독일 로이스 가문 출신 사업가로, 극우 군주주의적 견해를 가지고 독일 제국 부활을 옹호하며 반유대주의 음모론을 제기하다 2022년 쿠데타 모의 혐의로 체포되어 2024년 5월부터 재판을 받고 있다. - 하인리히 6세 - 마네세 법전
마네세 법전은 14세기 초에 제작된, 135명의 민네징어들의 작품과 초상화를 담고 있는 선집으로, 현재 하이델베르크의 팔라티나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 하인리히 6세 - 에르푸르트 변소 사고
- 오버작센 관구 - 로이스그라이츠
로이스그라이츠는 튀링겐 지방의 로이스 가문 영방 국가로, 1778년 후국으로 승격되었으나 독일 제국 시대에 가장 작은 국가였으며, 1918년 독일 혁명으로 군주제가 폐지되어 튀링겐 주에 통합되었다. - 오버작센 관구 - 로이스게라
로이스게라 후국은 1848년부터 1918년까지 독일 튀링겐 지방에 존재했던 로이스 가문의 영방 국가로, 1871년 독일 제국의 구성국이 되었으나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군주제 폐지로 소멸되어 튀링겐주에 합병되었다.
로이스가 | |
---|---|
개요 | |
![]() | |
이름 | 로이스 제국 백국 |
원어 이름 | Reichsgrafschaft Reuß (독일어) |
일반 명칭 | 로이스 |
시대 | 중세 |
지위 | 백국 |
소속 제국 | 신성 로마 제국 |
정부 형태 | 군주국 |
존속 기간 | –1778/1806 |
주요 사건 1 | R.-게라, R-플라우엔, R-바이다로 분할 |
날짜 1 | |
주요 사건 2 | 장년, 중년, 청년 계열로 분할 |
날짜 2 | 1564년 |
주요 사건 3 | 로이스 장년 계열 후국 |
날짜 3 | 1778년 |
종료 사건 | 로이스 청년 계열 후국 |
종료 연도 | 1806년 |
선행 국가 | 포크틀란트 |
후행 국가 1 | 로이스-그라이츠 후국 |
후행 국가 2 | 로이스-게라 후국 |
![]() | |
수도 | 바이타 (1531년까지), 이후 플라우엔, 게라, 그라이츠 |
지리 | |
언어 | |
사용 언어 | 독일어 |
현재 | |
위치 | 독일 |
2. 역사
1010년경 성립되었다.[1]
1206년 - 로이스-게라, 로이스-플라우엔, 로이스-베이다의 세 영토로 나뉘었다.[1]
1564년 - 형계(兄系), 중계(仲系), 제계(弟系)의 세 영토로 나뉘었다.[1]
1778년 - 로이스그라이츠(로이스 형계(兄系, Altere Linie)) 후국이 수립되었다.[1]
1806년 - 로이스게라(로이스 제계(弟系, Jüngere Linie)) 후국이 성립되었다.[1]
1815년 - 두 후국이 독일 연방에 가입했다.[1]
1866년 - 두 후국이 북독일 연방에 가입했다.[1]
1871년 - 두 후국이 독일 제국의 한 영방이 되었다.[1]
1918년 - 독일 군주제 붕괴되었다.[1]
1919년 - 두 영토가 합병되어 로이스 공화국이 되었다.[1]
1920년 - 튀링겐주(州)의 일부가 되어 현재에 이른다.[1]
독일 연방이 결성될 당시, 이전에 존재했던 여러 로이스 가문의 공국들은 두 개의 남은 분가('''로이스-엘더'''와 '''로이스-영거''')에 속하게 되었다.[1] 그 이전에는 먼저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였고, 이후에는 라인 동맹에 속했다.[1]
2. 1. 기원과 포크트란트
12세기 초,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는 글라이스베르크의 하인리히 경건공(c. 1040−1120)을 게라와 바이이다의 포크트로 임명했다.[1] 하인리히 경건공은 제국 퀘들린부르크 수도원의 지배를 받았다. 그는 바이더의 에르켄베르트 1세의 아들로, 이 가족의 가장 오래된 선조로 알려져 있으며, 1122년 플라우엔의 성 요한 교회의 봉헌식에서 에버슈타인 백작 아달베르트의 수행원으로 언급되었다.[1] 하인리히가 통제한 지역은 그의 직책에서 유래하여 포크트란트 ('Terra advocatorum', 대리인의 땅)로 불리게 되었다.[1]하인리히 폰 글라이스베르크(Heinrich von Gleissberg)의 영지에는 게라와 바이이다가 포함되었고, 그의 손자 하인리히 2세(Henry II the Rich, 1209년 이전 사망)는 플라우엔도 획득했다.[1] 13세기 초, 하인리히 2세의 아들들이 상속 재산을 분할하면서 바이이다-로네부르크, 플라우엔-게라, 그라이츠-라이헨바흐의 세 개의 독립적인 지역이 생겨났다.
로이스 가문의 선조들은 12세기에 졸벤란트(Sorbenland), 현재의 포크트란트에서 신성 로마 황제의 포크트를 맡으면서 점차 영주로서 자립해 갔다. 그들은 튀링겐 지방의 슈라이츠(Schleiz), 그라이츠, 바트 로벤슈타인(Bad Lobenstein), 바이데 및 게라, 프랑켄 지방의 호프 및 젤프(Selb), 보헤미아 지방의 아슈(Asch)의 각 성주령을 확보하고 있었다.

"포크트"의 지위는 곧 세습되었다. 처음에는 자유롭지 못한 귀족(미니스테리알레스)이었던 "포크트"들은 빠르게 영주 계급으로 상승했다. 분할 이후 공식 칭호인 "포크트"는 모든 지파에서 사용되었고 세습 제국 봉토처럼 전해졌다. 1254년 "포크트"들이 마르크그라프 하인리히 3세와 조약을 협상했을 때 그들은 동등한 파트너로 활동했다. 1329년 황제 루트비히 4세는 "포크트"들에게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와 동등한 지위를 확인했지만, 그 자체의 칭호는 사용하지 않고 "포크트"라는 명칭을 계속 사용했다.[1]
12세기와 13세기에 바이이다의 "포크트"들은 그들이 통치하는 영토에서 퀘들린부르크 수도원으로부터 점차 독립했다. 그들의 지역은 오늘날 일반적으로 보크트란트로 이해되는 지역을 포함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포크트"들의 영토는 보크트란트를 넘어 서부 광산 산맥으로 확장되었고, 현재 체코 영토로까지 확장되었다.
바이이다 지파는 1535년에 단절되었고, 그라이츠-라이헨바흐 지파는 곧 플라우엔-게라 지파에 상속되었으며, 그 후 플라우엔(장자 및 차자)과 게라-슐라이츠-로벤슈타인(1550년에 단절)으로 분할되었다. "포크트"들의 플라우엔 장자 지파는 1380년에 단절되었고, 플라우엔 차자 지파의 창시자는 헨리(Henry, 1300년경 사망)였는데, 그는 동유럽 지역에서의 체류와 갈리치아의 다니엘 왕의 손녀와의 결혼으로 "''데어 로이스''"(der Reusse, 키예프 루스를 지칭하는 용어인 루테니우스)라는 성을 얻었으며, 이 이름은 나중에 그의 국가로 전해졌다.[1] 그의 후손들은 "플라우엔, 그라이츠 및 게라의 로이스 영주"(Lords Reuss of Plauen, Greiz and Gera)로 불렸다.[1] 그러나 14세기와 15세기에 "포크트"들은 소유지의 대부분을 잃었고, 그 대부분은 작센 선제후국으로 넘어갔으며, 1427년에는 바이이다, 1482년에는 플라우엔이 넘어갔다.

2. 2. 가문 분열과 재통합
1306년, 플라우엔 성주 가문은 플라우엔 계열과 로이스 계열(그라이츠 영주)로 분리되었다.[4] 1564년, 로이스 가문은 장자 계통(운터그라이츠), 중자 계통(오버그라이츠), 막내 계통(게라)으로 다시 분열되었다.[7][6] 중자 계통은 1616년에 단절되어 다른 두 계통에 흡수되었다.1778년, 장자 계통의 하인리히 11세가 로이스-그라이츠 후국(형계 로이스)을 수립했다.[7] 1806년, 막내 계통에서 로이스-게라 후국(제계 로이스)이 성립되었다.[10] 1815년, 두 후국이 독일 연방에 가입했다.[1]
1848년 혁명의 여파로, 로이스-로벤슈타인-에베르스도르프 공작 하인리히 72세가 퇴위하고, 로이스-슐라이츠 가문이 제계 로이스 가문을 통합하여 로이스-게라 공국을 수립했다.[10]
1918년 독일 혁명 이후, 1919년 로이스 인민 공화국이 수립되었고, 1920년에 튀링겐 주에 통합되었다.[1]
[[파일:Reuss Karte.jpg|thumb|350px|right|18세기 로이스 영토:
- 녹색: 로이스 앨더 라인 (그라이츠, 부르크)
- 빨간색: 로이스-게라 (잘부르크 포함)
- 노란색: 로이스-슐라이츠
- 갈색: 로이스-로벤슈타인
]]
2. 3. 로이스 가문의 이름과 서수
로이스 가문의 모든 남성은 '하인리히(Heinrich)'라는 이름을 사용하며, 이름 뒤에 숫자를 붙여 구분한다. 이는 12세기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하인리히 6세 황제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시작되었다. 하인리히 6세는 하인리히 데어 라이헤(1209년 사망)를 퀘들린부르크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하여 "포크트"의 칭호를 받게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1688년부터 가족법으로 규정되기 전부터 이름의 통일성에 대한 전통은 1200년경부터 이미 시행되었다.같은 아버지를 둔 형제 사이라도 '~세(世)'가 연속해서 이어지지는 않았는데, 숫자는 전체 가문의 남자아이들에게 태어난 순서대로 붙여졌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하인리히 67세의 다섯 아들들은 하인리히 5세, 하인리히 8세, 하인리히 11세, 하인리히 14세, 하인리히 16세였다.
숫자가 무한히 늘어나지는 않았는데, 형계 로이스 가문에서는 숫자가 100에 도달하면 다시 1부터 시작했고, 제계 로이스 가문에서는 세기가 바뀔 때마다 1부터 다시 시작했다. 1564년에 분열되기 전의 로이스 가문은 자신의 가문 내의 남자에게 태어난 순서대로 서수를 붙였다. 새로운 분가가 창시될 때마다, 그 분가에서는 서수가 "1세"부터 시작되었다.
21세기 현재, 아우계의 흐름을 잇는 로이스-케스트리츠 가문이 유일하게 남은 로이스의 가문이다. 2022년 시점에서 가문의 수장인 하인리히 14세가 말하는 바에 따르면, 로이스 가문의 일족회에 참가하여 교류하는 멤버는 60명이며, 이 중 30명이 "다른 번호가 붙은 하인리히"라고 한다.
2. 4. 근현대 로이스 가문
1918년 독일 혁명으로 로이스 가문은 제후의 신분을 잃었다. 당시 형계 로이스 후작(로이스-그라이츠 후작) 하인리히 24세는 중증 장애로 통치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동생계 로이스 후작(로이스-게라 후작) 하인리히 27세가 두 후국을 통치하고 있었다.[1]1919년 12월, 하인리히 27세는 로이스 인민주(Volksstaat Reuß) 정부와 협정을 맺어 3400만 라이히스마르크 상당으로 추정되는 재산을 확보했다. 동생계 로이스가는 거성 오스터슈타인 성(Schloss Osterstein, 게라의 퀴헨 정원(Küchengarten), 에베르스도르프 성(Schloss Ebersdorf), 슐라이츠와 오스터슈타인의 화폐 주조소와 무기고와 성내 부속 도서관, 슐라이츠 성의 거주권, 5285ha의 숲 등을 확보했다. 형계 로이스가는 옛날부터의 거성과 부르크(Burgk)의 무기고 및 삼림 구역, 1500ha의 평지, 그라이츠 성의 거주권을 확보했다.
1927년 형계 로이스 가문의 마지막 후작 하인리히 24세가 사망하면서 형계 로이스 가문은 단절되었고, 동생계 로이스 가문이 이를 통합하였다. 하인리히 27세는 로이스가 전체의 당주가 되었고, 명목상의 로이스 후작이 되었다. 이듬해 1928년 하인리히 27세가 죽자 그 아들 하인리히 45세가 로이스가 당주가 되었다.
하인리히 45세는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SDAP)의 당원이었고, 1944년까지 독일 국방군에 소속되어 있었지만, 적국인 영국의 여권을 가지고 영국 시민권을 취득했다는 이유로 나치당 정부에 의한 공용 징수를 면할 수 없었다. 1945년 하인리히 45세는 소련 점령군에 납치되어 행방불명되었다. 아마도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에 억류되어 죽은 것으로 생각된다. 하인리히 45세에게는 자식이 없어, 로이스-슐라이츠가의 마지막 남자가 되었다. 하인리히 45세의 자산은 1948년 소련 점령 당국에 의해 모두 접수되었다.[1]
로이스가 당주는 하인리히 45세에게 후계자로 지명되었던 로이스-케스트리츠가(Reuß-Köstritz)의 당주 하인리히 4세(1919년 - 2012년)가 계승했다. 로이스-케스트리츠가는 1692년 로이스-슐라이츠가에서 갈라져 나온 통치자 가문이 아닌 분가로, 로이스가의 여러 가문 중 존속하는 유일한 계통이다. 하인리히 4세는 로이스-케스트리츠가가 1822년부터 거성으로 삼고 있는 오스트리아 니더외스터라이히 주의 에른스트부른의 성관(Schloss Ernstbrunn)에 가족과 함께 계속 살았다. 하인리히 4세가 죽은 후, 장남 하인리히 14세(1955년 - )가 당주의 지위를 계승했다.
하인리히 45세는 하인리히 1세(1910년 - 1982년)를 1935년 양자로 맞이했고, 하인리히 1세와 자신의 조카 보이슬라바 페오도라 추 메클렌부르크 (1918년 - 2019년)와 결혼시켰다. 1990년대 초, 보이슬라바 페오도라 추 메클렌부르크는 소련에 의한 점령 시에 접수된 로이스가의 재산은 자신의 장남 하인리히 8세(1944년 - )에게 반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1]
하인리히 1세의 아들 중 한 명인 하인리히 13세 프린츠 로이스/Heinrich XIII. Prinz Reußde(1951년 - )는 프랑크푸르트에서 부동산 사업 등을 영위했지만, 독일의 극우 반정부 운동 "라이히 시민 운동/Reichsbürgerbewegungde"에 가담하여 독일의 군주제 옹호 등의 주장을 했고, 2022년 12월 7일에는 쿠데타 계획에 관여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당주 하인리히 14세는 로이스 가문은 음모론에 기울어진 하인리히 13세와 이미 거리를 두고 있다고 발표했다.[18][19][20]
3. 주요 분가
로이스 가문의 주요 분가는 크게 형계 로이스와 제계 로이스로 나뉜다.[3][4][5][6][7][8][9][10] 형계 로이스는 로이스그라이츠 후국으로, 제계 로이스는 로이스게라 후국으로 분리되었다.[3][4][5][6][7][8][9][10]
1209년 헨리 2세 사후 그의 아들들이 로이스 영지를 분할하면서 여러 분가가 형성되었다. 그 중 플라우엔 영지를 상속받은 헨리 1세[12]의 차남 헨리 1세 '러시아인'][12]이 그라이츠 영지를 다스리면서, 여기서 로이스그라이츠 후국의 기원이 시작되었다. 한편 게라 영지는 헨리 1세 '젊은']이 다스렸고, 그의 후손들이 로이스게라 후국을 형성하게 된다.
헨리 2세에 의해 통치되던 그라이츠 영지는 1673년 그라이츠 백작령으로 승격되었고[7], 1778년에는 그라이츠 공국으로 승격되어[7] 1918년까지 존속했다. 게라 영지는 1673년 게라 백작령으로 승격[6]되었으며, 1848년에는 게라 공국이 되었다.[10]
가문 | 분가 | 설명 |
---|---|---|
형계 로이스 | 로이스그라이츠 후국 | 그라이츠 영지에서 시작, 1673년 백작령, 1778년 공국으로 승격[7] |
제계 로이스 | 로이스게라 후국 | 게라 영지에서 시작, 1673년 백작령, 1848년 공국으로 승격[6][10] |
4. 주요 인물
- 하인리히 로이스 폰 플라우엔(1400년 - 1470년) - 독일 기사단 총장(재임: 1467년 - 1470년).
- 하인리히 포스투무스 폰 로이스/Henry II, Count of Reuss-Gera영어(1572년 - 1635년) - 로이스-게라 백작 하인리히 2세. 작곡가 쉬츠는 그의 의뢰로 『음악에 의한 장례/Musikalische Exequien영어』을 만들었다.
- 하인리히 24세(1681년 - 1748년) - 로이츠-케스트리츠 가문 초대.
- 하인리히 24세(1855년 - 1910년) - 작곡가. 로이츠-케스트리츠 가문의 가문을 계승.
- 아우구스테 로이스 추 에베르스도르프(1757년 - 1831년) -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작 프란츠의 두 번째 아내. 남편과 함께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의 시조가 된다.
- 엘레오노레 로이스 추 쾨스트리츠(1860년 - 1917년) - 불가리아 왕 페르디난트의 두 번째 왕비.
- 헤르미네 로이스 추 그라이츠(1887년 - 1947년) -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의 두 번째 아내.
- 하인리히 루초 로이스/Prince Heinrich Ruzzo Reuss of Plauen영어 (1950년 - 1999년) - 조경가. 케스트리츠 가문 분가의 출신으로 Prinz (공자) 칭호를 가짐.
- 아니프리드 링스타드(1945년 - ) - 스웨덴 팝 그룹 ABBA의 멤버. 1992년 하인리히 루초 로이스와의 결혼으로 로이스 공녀(Prinzessin Reuß von Plauen) 성을 사용.
5. 로이스 가문과 한국의 관계
6. 문화적 영향
참조
[1]
Catholic # Assuming Catholic is a template
[2]
문서 # Assuming 문서 is the default
Reuß-Köstritz
[3]
문서
[4]
문서
[5]
문서
[6]
문서
[7]
문서
[8]
문서
[9]
문서
[10]
문서
[11]
문서
[12]
문서
[13]
문서
[14]
문서
[15]
문서
[16]
문서
[17]
웹사이트
A German page describing the crisis which led to his abdication
http://www.thueringe[...]
2019-04-18
[18]
뉴스
Haus Reuß schockiert über Vorgänge um Heinrich XIII
https://www.mdr.de/n[...]
Mitteldeutscher Rundfunk
2022-12-10
[19]
웹사이트
Fürstenhaus Reuss distanziert sich von Weigelt-Gast Prinz Heinrich XIII.
https://www.mdr.de/n[...]
2022-12-07
[20]
뉴스
The Motley Crew that Wanted to Topple the German Government
https://www.spiegel.[...]
2022-12-11
[21]
웹사이트
Death of Duchess Woizlawa Feodora of Mecklenburg-Schwerin
https://mecklenburg-[...]
House of Mecklenburg-Schwerin
2019-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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