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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타니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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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시타니아 전쟁은 기원전 155년부터 기원전 140년까지 로마 공화국과 루시타니아인 사이에서 벌어진 일련의 무력 충돌이다. 로마의 가혹한 통치에 대한 루시타니아인들의 저항으로 시작되었으며, 초기에는 푸니쿠스가 이끄는 루시타니아인들이 로마군을 공격하며 시작되었다. 비리아투스의 등장과 게릴라 전술은 로마에 큰 피해를 입혔으나, 결국 비리아투스가 암살당하면서 루시타니아는 로마에 굴복했다. 이 전쟁은 루시타니아 지역에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시기를 가져왔지만, 이후 세르토리우스 전쟁에서 다시 로마에 저항했으며, 루시타니아 전쟁과 비리아투스는 포르투갈 민족성과 독립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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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타니아 전쟁
개요
분쟁명루시타니아 전쟁
시기기원전 155년 ~ 기원전 139년
장소히스파니아
원인히스파니아 내 로마 주둔에 대한 저항
결과로마 공화정의 승리
영토루시타니아 (오늘날 포르투갈의 타구스강과 도우루강 사이 지역 및 스페인의 에스트레마두라주) 평정
교전 세력
교전국 1로마 공화정
교전국 2루시타니아인 부족
기타 교전 세력 (로마 측)로마의 속국 켈트족 부족 (키네테스족, 투르데타니족 등)
기타 교전 세력 (루시타니아 측)기타 켈트족 부족 (베토네스족, 갈라에키족 등)
지휘관
로마 측 지휘관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카이우스 베틸리우스
카이우스 플란키우스
카이우스 니기디우스
파비우스 아이밀리아누스
파비우스 세르빌리아누스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
마르쿠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
루시타니아 측 지휘관비리아투스 (암살)
타우탈루스
쿠리우스
아풀레이우스
푸니쿠스
카이사루스
카우케누스
기타 정보
비리아투스 전쟁 지도
비리아투스 전쟁 지도

2. 역사적 배경

제2차 포에니 전쟁의 강화 조약으로 로마는 카르타고로부터 히스파니아의 지배권을 빼앗았으나, 실질적인 지배는 지중해에 면한 해안부와 반도의 남부에 한정되었다. 루시타니아인은 로마의 지배가 미치지 않는 이베리아 반도의 중서부, 현재의 포르투갈 중·북부에서 스페인 중서부에 살고 있었으며, 제2차 포에니 전쟁 직후 로마와 싸워 패했다.

기원전 153년에 로마는 반도 중부의 켈티베리아인을 상대로 누만티아 전쟁을 시작했다. 두 전쟁은 근접 병행했지만, 로마의 적끼리 제휴했다는 기록은 없다.

2. 1. 루시타니아인과 이베리아 반도의 정세

제2차 포에니 전쟁의 강화 조약으로 로마는 카르타고로부터 히스파니아의 주도권을 빼앗았다. 그러나 그 실질적 지배권은 지중해에 인접한 해안부와 반도의 남부에 한정되어 있었다. 루시타니아인은 로마 지배가 미치지 않은 이베리아반도의 중서부, 현재의 포르투갈 북부로부터 스페인 중서부에 살고 있었다.[2]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연장선상에서 고대 카르타고로마 공화국에게 패배했고, 이베리아 반도의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카르타고의 식민지들도 멸망했다. 이것은 로마 공화국이 이베리아 반도에 처음으로 진입한 사건이었으며, 포에니 전쟁 당시 루시타니아 용병들이 카르타고 편에서 싸웠기 때문에 루시타니아인과 로마인 간의 최초의 충돌이었을 가능성이 있다.[3]

기원전 194년, 로마인들은 루시타니아 땅에서 첫 번째 공세를 시작했다.[4] 기원전 179년까지 로마인들은 이 지역의 대부분의 부족들을 제압하는 데 성공했고 루시타니아인들과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로마인들은 토착 부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다. 고정된 ''vectigal''(토지세), ''tributum'', 그리고 일정량의 곡물이었다.[5] 세금은 수입의 유일한 원천이 아니었다. 광산 개발과 평화 조약은 데나리우스뿐만 아니라 전쟁 전리품, 노예로 팔린 전쟁 포로들의 수입원이었다. 토착 마을들은 자신들의 보물을 로마인들에게 바쳐야 했고, 그들은 세금을 내기 위해 연간 수입만 남겨두었다. 기원전 174년, 푸블리우스 푸리우스 필루스가 이베리아가 로마에 바쳐야 할 곡물에 대해 너무 적은 돈을 지불했다는 혐의를 받았을 때, 카토는 토착 부족들의 이익을 옹호했다. 착취와 강탈은 속주에서 극심한 정도에 이르렀고, 로마는 기원전 149년에 만들어진 렉스 칼푸르니아와 같은 특별 재판소와 법률을 만들어야 했다.

2. 2. 로마의 가혹한 통치와 루시타니아인의 저항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연장선상에서 고대 카르타고로마 공화국에게 패배했고, 이베리아 반도의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카르타고의 식민지들도 멸망했다. 이것은 로마 공화국이 이베리아 반도에 처음으로 진입한 사건이었으며, 포에니 전쟁 당시 루시타니아 용병들이 카르타고 편에서 싸웠기 때문에 루시타니아인과 로마인 간의 최초의 충돌이었을 가능성이 있다.[3]

기원전 194년, 로마인들은 루시타니아 땅에서 첫 번째 공세를 시작했다.[4] 기원전 179년까지 로마인들은 이 지역의 대부분의 부족들을 제압하는 데 성공했고 루시타니아인들과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로마인들은 토착 부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다. 고정된 ''vectigal''(토지세), ''tributum'', 그리고 일정량의 곡물이었다.[5] 세금은 수입의 유일한 원천이 아니었다. 광산 개발과 평화 조약은 데나리우스뿐만 아니라 전쟁 전리품, 노예로 팔린 전쟁 포로들의 수입원이었다. 토착 마을들은 자신들의 보물을 로마인들에게 바쳐야 했고, 그들은 세금을 내기 위해 연간 수입만 남겨두었다. 기원전 174년, 푸블리우스 푸리우스 필루스가 이베리아가 로마에 바쳐야 할 곡물에 대해 너무 적은 돈을 지불했다는 혐의를 받았을 때, 카토는 토착 부족들의 이익을 옹호했다. 착취와 강탈은 속주에서 극심한 정도에 이르렀고, 로마는 기원전 149년에 만들어진 렉스 칼푸르니아와 같은 특별 재판소와 법률을 만들어야 했다.

3. 전쟁의 경과

기원전 155년 루시타니아인의 약탈로 시작된 루시타니아 전쟁은 로마군이 항복한 루시타니아인 다수를 학살하면서 본격화되었다. 살아남은 루시타니아인들은 비리아투스를 중심으로 뭉쳐 항전을 계속했고, 비리아투스는 뛰어난 전술로 루시타니아족의 지도자가 되었다.

1940년에 세워진 비세우의 비리아투스 조각상


비리아투스는 기원전 148년부터 기원전 140년까지 로마군을 상대로 여러 차례 승리하며 게릴라전의 명수로 이름을 떨쳤다. 테오도르 몸젠은 그를 "평범한 시대에 호메로스 영웅 중 한 명이 다시 나타난 듯했다"고 평가했다.

호세 데 마드라조의 비리아투스 죽음 그림


그러나 기원전 140년, 로마는 비리아투스의 부하들에게 뇌물을 주어 그를 암살하게 했다. 비리아투스는 가장 신뢰하는 친구들인 아우닥스, 디탈쿠스, 미누루스를 카이피오에게 평화 협상을 하도록 보냈다. 카이피오는 그들에게 뇌물을 주어 비리아투스를 암살하도록 했다. 비리아투스는 잠을 거의 자지 않았고 갑옷을 입고 있었지만, 친구들이 언제든지 자신의 텐트에 들어와서 가능한 한 빨리 전투에 소집될 수 있도록 허락했다. 이를 이용하여 그의 친구들은 텐트에 들어가 잠든 그의 목을 그어 죽였다. 암살자들이 도주한 지 한참 후에 비리아투스는 아침에 시체로 발견되었다. 암살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기에 그를 복수할 수 없었던 루시타니아인들은 대신 성대한 장례식을 거행했다. 그들은 비리아투스에게 특별한 의복을 입히고, 화장을 하고, 행렬, 검투사 전투, 노래를 불렀다.[6] 명장을 잃은 루시타니아군은 카이피오에게 패배하여 로마의 신민이 되면서 전쟁은 종결되었다.

3. 1. 초기 전투 (기원전 155년 ~ 기원전 152년)

기원전 155년, 푸니쿠스가 로마의 지배를 받는 인접 지역을 공격하면서 루시타니아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공격에서 루시타니아인들은 재무관 테렌티우스 바르로를 포함하여 6,000명의 로마인을 살해했다. 이 첫 번째 승리 이후, 루시타니아인들은 베토네스와 동맹을 맺었다. 루시타니아인과 베토네스는 함께 로마의 지배를 받던 페니키아 정착지인 블라스토포에니키아를 포위했다. 푸니쿠스는 이 포위 공격 중에 사망했으며, 그의 뒤를 이어 카이사루스가 지도자가 되었다.[6]

로마는 카이사루스를 상대하기 위해 뭄미우스를 파견했다. 카이사루스는 처음에는 패배했지만, 도주하는 과정에서 전투의 흐름을 바꿔 결국 9,000명의 로마인을 죽였다. 뭄미우스는 남은 5,000명의 병사로 루시타니아인들을 기습 공격하여 많은 수의 루시타니아인들을 살해했다.[6]

타구스 강 건너편의 루시타니아인들은 카우케누스의 지휘하에 로마의 지배를 받던 쿠네이를 침략하여 코니스토르기스를 점령했다. 그 후 일부 루시타니아인들은 북아프리카를 습격하여 오실레라는 도시를 포위했다. 뭄미우스는 그들을 아프리카까지 쫓아가 루시타니아 반란군을 격파하고 오실레 포위를 끝냈다. 이 승리로 뭄미우스는 로마로 돌아와 개선식을 치렀다.[6]

뭄미우스의 뒤를 이어 마르쿠스 아틸리우스가 루시타니아인과 싸워 그들의 가장 큰 도시인 옥스트라카에를 정복했다. 이는 인접 부족들(베토네스 포함)에게 공포를 안겨 그들이 항복을 제의하게 만들었다.[6]

3. 2. 갈바의 배신과 학살 (기원전 152년 ~ 기원전 150년)

기원전 152년 겨울, 루시타니아인들은 다시 반란을 일으켜 로마인들을 포위했다. 아틸리우스의 후임인 세르비우스 갈바는 그들을 구출하기 위해 급히 달려갔다. 초기 승리 이후, 갈바는 도망치는 루시타니아 군을 추격하다가 패배했다. 약 7,000명의 로마인이 죽었고, 갈바는 카르모네라는 정착지로 피신해야 했다. 갈바는 군대를 재결집하여 코니스토르기스에서 겨울을 보냈다. 루쿨루스는 투르디타니아에서 겨울을 보내고 있었다. 루쿨루스의 군대는 루시타니아인들을 발견하여 공격했고, 이 과정에서 4,000명을 죽였다. 그는 이후 가데스 근처 해협을 건너 또 다른 1,500명을 죽이고 루시타니아를 침공했다. 갈바도 루시타니아 침공에 합류했다.[6]

루쿨루스와 갈바의 침공으로 루시타니아인들은 기원전 152년에 아틸리우스와 맺었던 조약을 갱신하기 위해 갈바에게 사절을 보냈다. 갈바는 휴전을 받아들이는 척하며 그들에게 비옥한 땅을 약속했다. 루시타니아인들은 사절들의 좋은 소식을 듣고 갈바가 정한 장소에 모여 평원에서 세 부분으로 나뉘었다. 갈바는 각 루시타니아 부대에 따로 접근하여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요구한 다음 그들을 학살했다. 비리아투스는 살아남은 몇 안 되는 루시타니아인 중 한 명이었다.[6]

3. 3. 비리아투스의 등장과 게릴라전 (기원전 148년 ~ 기원전 140년)

기원전 155년 루시타니아인들의 약탈 이후, 로마는 항복한 루시타니아인 대다수를 죽였다. 살아남은 루시타니아인들은 비리아투스를 중심으로 뭉쳐 로마에 항전을 계속했다. 비리아투스는 뛰어난 전술로 루시타니아족의 새 지도자가 되었다.[6]

기원전 148년, 루시타니아인들은 10,000명의 군대로 투르데타니아를 공격했다. 가이우스 베틸리우스는 이들을 막기 위해 파견되어 루시타니아인들을 격파하고 평화 조건을 제시했다. 그러나 비리아투스는 로마인들의 배신을 상기시키며 동족들을 설득, 전투하는 척하며 흩어져 트리볼라에서 재결집하는 계획을 세웠다. 베틸리우스는 비리아투스를 추격했지만, 비리아투스와 정예병 1,000명이 이틀 동안 로마군을 저지하여 다른 이들이 안전하게 재집결할 시간을 벌었다. 이후 비리아투스는 로마군을 따돌리고 합류, 그의 성공으로 갈라이시아인 등 주변 부족들이 합류했다.[6]

비리아투스는 게릴라전의 명수로 이름을 떨쳤다. 테오도르 몸젠은 "평범한 시대에 호메로스 영웅 중 한 명이 다시 나타난 듯했다"고 평가했다. 기원전 148년, 베틸리우스는 비리아투스를 쫓아 트리볼라로 갔으나 매복에 걸려 6,000명의 로마군이 카르페수스로 도망치고, 나머지는 죽거나 투옥되었다. 베틸리우스는 이 매복으로 사망했다. 퀘스토르는 벨리와 티티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이들 역시 루시타니아군에게 전멸당했다.[6]

기원전 146년, 비리아투스는 카르페타니아에서 이베리아인을 공격했다. 가이우스 플라우티우스 힙사에우스가 보병 10,000명과 기병 1,300명을 이끌고 왔으나 패배, 비리아투스는 히스파니아 울테리어를 공격했다.[6]

기원전 145년,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아에밀리아누스가 파견되어 15,000명의 보병과 2,000명의 기병을 모아 우르소에서 루시타니아인들과 소규모 전투를 벌였다.[6]

기원전 144년, 막시무스는 비리아투스를 공격해 도망치게 하고 두 도시를 점령했다. 바에코르까지 추격했으나 비리아투스를 잡지 못하고 코르도바에서 겨울을 보낸 후 퀸투스 폼페이우스에게 지휘권을 넘겼다.[6]

기원전 143년, 비리아투스는 아레바치, 티티, 벨리 등 켈트 부족들을 설득해 누만티아 전쟁을 일으켰다. 이후 퀸투스와 소규모 전투를 벌여 1,000명을 죽이고, 이투카 수비대를 몰아내는 등 성과를 거뒀다. 퀸투스는 코르도바에서 겨울을 나고 이탈리카 출신 히스파니아인 가이우스 마르키우스를 보내 비리아투스와 싸우게 했다.[6]

기원전 142년, 파비우스 막시무스 세르빌리아누스가 퀸투스를 계승, 18,000명의 보병과 1,600명의 기병을 확보하고 아프리카 코끼리 10마리의 지원을 받았다. 막시무스는 비리아투스를 격파했으나, 비리아투스는 3,000명의 사상자를 내고 로마군을 야영지로 몰아넣었다. 로마군은 밤에 구원받았지만, 비리아투스의 공격으로 이투카로 후퇴했다. 비리아투스는 루시타니아로 돌아갔고, 막시무스는 바에투리아에서 루시타니아 동맹군을 상대로 다섯 개 마을을 약탈한 후 쿠네이를 공격하고 루시타니아로 진격했다.[6]

막시무스는 쿠리우스와 아풀레이우스가 이끄는 10,000명의 군대에게 공격받았다. 쿠리우스는 전사했고, 막시무스는 에스카디아, 제멜라, 오볼콜라를 점령하고 약 10,000명을 포획, 500명을 참수하고 나머지는 노예로 팔았다. 에리사나에서 휴식 중이던 막시무스 군대는 비리아투스에게 기습당해 격파당하고 전쟁 종식을 요청했다.[6]

3. 4. 비리아투스의 죽음과 전쟁의 종결 (기원전 140년)

기원전 140년, 파비우스 막시무스 카이피오는 비리아투스와 맺은 조약에 불만을 품고 로마 원로원에 이를 로마의 위엄에 걸맞지 않다고 말했다. 원로원은 처음에는 카이피오가 비리아투스와 비밀리에 싸우는 것만 허용했지만, 결국 조약을 파기하고 비리아투스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카이피오는 아르사 마을을 점령하고 비리아투스에게 승리했으며, 비리아투스는 카르페타니아로 도망쳤다. 카이피오는 비록 비리아투스를 놓쳤지만, 베토네스와 갈라이키를 공격하여 그들의 밭을 파괴했다.[6]

이후 비리아투스는 가장 신뢰하는 친구들인 아우닥스, 디탈쿠스, 미누루스를 카이피오에게 평화 협상을 하도록 보냈다. 카이피오는 그들에게 뇌물을 주어 비리아투스를 암살하도록 했다. 비리아투스는 잠을 거의 자지 않았고 갑옷을 입고 있었지만, 친구들이 언제든지 자신의 텐트에 들어와서 가능한 한 빨리 전투에 소집될 수 있도록 허락했다. 이를 이용하여 그의 친구들은 텐트에 들어가 잠든 그의 목을 그어 죽였다. 암살자들이 도주한 지 한참 후에 비리아투스는 아침에 시체로 발견되었다. 암살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기에 그를 복수할 수 없었던 루시타니아인들은 대신 성대한 장례식을 거행했다. 그들은 비리아투스에게 특별한 의복을 입히고, 화장을 하고, 행렬, 검투사 전투, 노래를 불렀다.[6] 호세 데 마드라조의 비리아투스 죽음 그림은 이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배신자들의 운명에 대한 대중적인 이야기에 따르면, 로마 장군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가 그들을 처형하면서 "로마는 배신자에게 돈을 지불하지 않는다"라고 선언했다고 한다.

타우탈루스는 비리아투스의 뒤를 이어 루시타니아인들을 이끌도록 선출되었다. 루시타니아인들의 사군툼 약탈 시도는 실패했다. 귀환 중 바에티스 강을 건널 때, 그들은 카이피오에게 패배하여 로마의 신민이 되었다. 이것으로 루시타니아 전쟁은 종결되었다.[6]

4. 전쟁의 유산

루시타니아 전쟁 이후 루시타니아는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시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루시타니아인들은 기원전 80년부터 72년까지 세르토리우스 전쟁에서 다시 로마에 맞서 싸웠다. 이들은 추방된 로마 장군 퀸투스 세르토리우스를 지도자로 영입했다.

비리아투스가 활약한 루시타니아 전쟁은 포르투갈 민족성과 독립의 상징으로 여겨진다(루시타니아어 참조).

4. 1. 관련 작품

노, 혹은 지배의 헛된 영광(1990년, 포르투갈·스페인·프랑스 합작, 감독: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

참조

[1] 문서 This is the name used in Polybius and Appian.
[2] 웹사이트 Strabo.Geography https://penelope.uch[...] Penelope.uchicago.edu 2010-08-03
[3] 학술지 Comparative Resistance in Iberia: the Turdetanians and the Lusitanians https://digitalcommo[...]
[4] 웹사이트 Appian's History of Rome https://www.livius.o[...]
[5] 웹사이트 https://penelope.uch[...]
[6] 웹사이트 Appian's Roman History, Book VI. https://archiv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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