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제 폰 바덴 대공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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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이제 폰 바덴 대공녀는 바덴 대공자 카를 루트비히와 헤센다름슈타트의 아말리에의 딸로, 러시아의 황후 엘리자베타 알렉세예브나이다. 예카테리나 2세의 선택으로 알렉산드르 1세와 결혼하여 황후가 되었으나, 러시아 궁정 생활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남편과의 소원한 관계 속에서 다른 연인과의 관계를 맺기도 했으며, 두 딸을 잃는 슬픔을 겪었다. 1825년 남편과 함께 휴양하던 중 남편이 사망하고 이듬해 심장 쇠약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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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제 폰 바덴 대공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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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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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루이제 마리 아우구스테 폰 바덴 |
출생 | 1779년 1월 24일 |
출생지 | 신성 로마 제국, 바덴 변경백국, 카를스루에 |
사망 | 1826년 5월 16일 |
사망지 | 러시아 제국, 벨료프 |
매장지 | 상트페테르부르크, 페트로파블롭스크 대성당 |
종교 | 러시아 정교회 (이전: 루터교) |
배우자 | |
배우자 | 알렉산드르 1세 |
결혼 | 1793년 |
자녀 | 마리아 엘리자베타 |
왕족 정보 | |
왕가 | 바덴 가문 로마노프 왕조 |
아버지 | 카를 루트비히 폰 바덴 |
어머니 | 아말리에 폰 헤센다름슈타트 |
황후 | |
칭호 | 러시아 황후 |
재위 기간 | 1801년 3월 24일 ~ 1825년 12월 1일 |
대관식 | 1801년 9월 15일, 모스크바 우스펜스키 대성당 |
기타 칭호 | 핀란드 대공비 폴란드 왕비 |
2. 생애
바덴 변경백국의 공녀 루이제는 1792년 러시아 여제 예카테리나 2세의 눈에 띄어 여동생 프리데리케와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초대받았다. 예카테리나 2세는 루이제의 아름다움과 총명함을 마음에 들어 했고, 그녀를 황태자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훗날 알렉산드르 1세)의 신붓감으로 선택했다. 루이제 역시 잘생긴 알렉산드르에게 호감을 느꼈다.
1793년 9월 28일, 루이제는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하고 '''엘리자베타 알렉세예브나'''라는 이름을 받았다. 같은 날 14세의 나이로 15세의 알렉산드르 대공과 결혼하여 러시아의 황태자비가 되었다. 어린 나이에 낯선 러시아 궁정에 시집온 엘리자베타는 화려하지만 냉담한 궁정 생활과 복잡한 음모 속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예카테리나 2세의 총애를 받던 플라톤 주보프가 그녀를 유혹하려 했던 일은 큰 충격이었다.
여동생 프리데리케가 바덴으로 돌아가자 엘리자베타의 외로움은 더욱 깊어졌고, 남편 알렉산드르와의 관계도 점차 소원해졌다. 결혼 초 아이를 낳지 못하면서 예카테리나 2세를 실망시켰고, 1796년 시아버지 파벨 1세가 즉위한 후에는 그와의 불편한 관계로 인해 궁정 생활을 더욱 기피하게 되었다. 외로움 속에서 엘리자베타는 남편의 친구인 폴란드 귀족 아담 예지 차르토리스키 공작과 관계를 맺었다. 1799년 첫 딸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 대공녀를 낳았지만, 아이의 아버지가 차르토리스키라는 소문이 돌았고, 딸은 1800년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1801년 파벨 1세 암살 후 남편이 알렉산드르 1세로 즉위하면서 엘리자베타는 황후가 되었다. 알렉산드르 1세는 공식 석상에서는 황후를 예우했지만, 1803년 폴란드 귀족 마리아 나리슈키나를 정부로 삼아 15년 이상 관계를 지속했다. 엘리자베타는 다시 차르토리스키와 잠시 관계를 맺었으나, 이후 젊은 장교 알렉세이 오호트니코프와 사랑에 빠졌다. 1806년 둘째 딸 엘리자베타 알렉산드로브나 황녀를 낳았으나, 이 아이 역시 오호트니코프의 딸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생후 15개월 만에 사망했다. 오호트니코프 또한 1807년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두 딸을 잃은 슬픔 속에서도 엘리자베타는 나폴레옹 전쟁 시기 남편 알렉산드르 1세를 정치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헌신적으로 지원했다. 전쟁 후 빈 회의에서 차르토리스키와 재회하기도 했지만 관계는 오래가지 않았다. 1819년 알렉산드르 1세가 마리아 나리슈키나와의 관계를 정리하면서 부부 사이는 점차 회복되었고, 특히 알렉산드르 1세의 사생아 소피아의 죽음을 함께 슬퍼하며 관계가 더욱 가까워졌다.
1825년 10월, 엘리자베타는 건강 악화로 의사의 권유에 따라 남편과 함께 아조프해 연안의 타간로크로 요양을 떠났다. 그곳에서 부부는 조용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으나, 11월 크림 반도 방문 후 돌아온 알렉산드르 1세가 장티푸스에 걸려 12월 사망했다. 남편의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고 쇠약해진 엘리자베타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던 중 1826년 5월 16일 벨료프에서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2. 1. 어린 시절
카를스루에에서 바덴 대공자 카를 루트비히와 그의 아내 헤센다름슈타트의 아말리에의 딸, 바덴 공녀 루이제 마리 아우구스테 폰 바덴(Luise Marie Auguste von Badende)으로 1779년 1월 24일 태어났다.[1] 그녀는 체링겐 가문의 바덴 변경백국 공녀였으며, 부모 사이의 일곱 자녀 중 셋째였다. 태어날 당시 너무 작고 연약하여 의사들은 그녀가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걱정했다.[1]
루이제는 화목하고 따뜻한 가정 환경에서 성장했으며, 특히 어머니와 깊은 유대감을 유지하며 평생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녀는 바덴 궁정에서 세심한 교육을 받으며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유창하게 구사했고, 역사, 지리, 철학, 프랑스 및 독일 문학을 공부했다.[1] 바덴이 프랑스와 지리적으로 가까웠기 때문에, 당시 귀족 사회의 관례처럼 프랑스 문화와 세련된 예법에 익숙했다. 할아버지인 바덴 변경백이 부유하지 않아 왕족 기준으로는 비교적 소박하게 생활했다.[1]
한편, 러시아의 여제 예카테리나 2세는 장차 제위를 물려줄 손자, 미래의 알렉산드르 1세를 위한 신붓감을 찾고 있었다. 그녀는 프로이센의 여왕 헤센-다름슈타트의 프리데리케 루이제의 조카이자, 체사레비치 파벨 1세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고(故) 대공녀 나탈리아 알렉세예브나(헤센-다름슈타트의 빌헬미나 루이제)의 조카이기도 한 바덴의 공주들에게 관심을 보였다. 이는 프로이센 및 여러 독일 왕가와의 관계를 고려한 선택이었다. 좋은 인상을 받은 예카테리나 2세는 1792년 가을, 루이제와 그녀의 여동생 프리데리케(훗날 스웨덴 왕비)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초대했다.[1][2]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루이제는 아름다움과 매력, 정직함으로 예카테리나 2세를 기쁘게 했다.[2] 루이제 역시 키가 크고 잘생긴 알렉산드르에게 호감을 느꼈다. 처음에는 알렉산드르가 매우 어리고 경험이 부족하여 수줍어하며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고, 루이제는 이를 자신을 싫어하는 것으로 오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젊은 두 사람은 곧 서로에게 깊은 애정을 느끼게 되었다. 루이제는 알렉산드르에게 "당신은 어떤 사람의 행복이 제 손에 달려 있다고 말씀하시는군요. 만약 그렇다면, 그의 행복은 영원히 보장될 것입니다… 이 사람은 저를 다정하게 사랑하고, 저 또한 그를 사랑하며, 그것이 저의 행복이 될 것입니다… 당신도 아시다시피, 저는 당신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사랑합니다."라고 편지를 쓰기도 했다.[2] 두 사람은 1793년 5월에 약혼했다.[2]
2. 2. 러시아 황태자비
예카테리나 2세는 그녀의 맏손자인 미래의 알렉산드르 1세를 위한 신부를 찾던 중, 바덴의 공주들에게 주목했다. 긍정적인 인상을 받은 후, 예카테리나는 루이제 공주와 그녀의 여동생 프리데리카(훗날 스웨덴의 여왕)를 러시아로 초대했다. 1792년 가을, 두 자매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다.황후 예카테리나 2세는 루이제의 아름다움, 매력, 정직함에 기뻐하며 그녀를 마음에 들어 했다.[2] 루이제 자신도 키가 크고 잘생긴 알렉산드르에게 매력을 느꼈다. 처음에는 알렉산드르가 미래의 신부 앞에서 수줍어하여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고, 루이제는 이를 자신을 싫어하는 것으로 오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젊은 부부는 곧 서로를 좋아하게 되었고, 1793년 5월에 약혼했다.
루이제는 러시아어를 배우고, 1793년 9월 28일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했으며, 이름도 엘리자베타 알렉세예브나로 바꾸었다. 같은 날 결혼식이 열렸고, 엘리자베타는 불과 14세의 나이로 두 살 연상의 알렉산드르 대공과 결혼하여 러시아의 황태자비가 되었다. 예카테리나 2세는 이 결혼을 "프시케와 큐피드의 결혼"이라고 묘사했다.
매우 어린 나이에 결혼한 엘리자베타는 수줍고 순진했으며, 새로운 지위에 대한 준비가 부족했다. 그녀는 러시아 궁정의 화려함에 압도되었고, 냉담하게 벌어지는 복잡한 음모에 두려움을 느꼈다.[3] 간통이 공공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궁정의 분위기와 예카테리나 2세의 연인인 플라톤 주보프가 자신을 유혹하려 했던 일[4] 등에 충격을 받았다.
특히 여동생 프리데리케가 바덴으로 돌아간 후에는 외로움과 향수병을 심하게 느꼈다. 엘리자베타는 낯선 세상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었고, 처음에는 남편 알렉산드르와의 관계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남편이 없었다면, 나는 천 번이나 죽었을 것이다"
결혼 초 몇 년간 아이를 낳지 못하면서 예카테리나 2세를 실망시켰다. 1796년 11월 예카테리나 2세가 사망하고 시아버지 파벨 1세가 즉위하자, 엘리자베타는 시아버지와의 관계가 좋지 않아 그의 궁정을 피했다.[5] 그녀는 파벨 1세의 통치 방식과 성격을 싫어했으며, 사교계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극소수의 친구들과만 어울렸다.
남편 알렉산드르와의 사이 또한 점차 소원해졌다. 엘리자베타는 남편에게서 정서적 만족을 얻지 못했고, 알렉산드르의 가장 친한 친구인 폴란드 귀족 아담 예지 차르토리스키 공작과 로맨틱한 관계를 맺었다. 이 관계는 약 3년간 지속되었다.
결혼한 지 5년이 넘은 1799년 5월 29일, 엘리자베타는 딸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 대공녀를 낳았다. 그러나 궁정에서는 아이의 아버지가 차르토리스키라는 소문이 퍼졌다. 아이가 부모와 달리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파벨 1세조차 세례식에서 금발과 파란 눈을 가진 부모에게서 어두운 색의 아이가 태어난 것에 대해 놀라움을 표했다고 전해진다. 엘리자베타는 곧 연인과 딸을 모두 잃었다. 아담 차르토리스키는 외교 임무를 받아 러시아를 떠났고, 딸 마리아는 태어난 지 1년여 만인 1800년 7월 27일경 사망했다. 엘리자베타는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오늘 아침부터, 나는 더 이상 아이가 없고, 그녀는 죽었다... 하루 중 한 시간도 그녀를 생각하지 않고 지나가지 않으며, 확실히 그녀를 위해 쓴 슬픈 눈물이 없는 날은 없다. 내가 살아있는 한... 다른 방법은 없다."[6]라고 쓰며 깊은 슬픔을 표현했다.
2. 3. 황후 시절

1801년 파벨 1세가 암살되고 남편 알렉산드르 1세가 황제로 즉위하면서 엘리자베타 알렉세예브나 또한 황후가 되었다. 그녀는 남편을 여러 방면으로 내조했지만, 궁정 내 가장 높은 지위의 여성은 여전히 시어머니인 마리아 표도로브나였다. 공식 행사에서 마리아 표도로브나는 황제 옆에서 걸었고, 엘리자베타는 그들 뒤에서 혼자 걸어야 했다.
알렉산드르 1세는 아내를 무관심하게 대했고, 공개 행사에서는 그녀에게 공손하게 대했으며 그녀와 함께 식사하려고 노력했다.[7] 1803년 알렉산드르 1세는 폴란드 공주 마리아 나리슈키나와 연애를 시작했고, 이 관계는 15년 이상 지속되었다. 마리아 나리슈키나는 궁정에서 자신의 관계를 공공연하게 과시했다.
이에 엘리자베타는 남편의 즉위 후 러시아로 돌아온 옛 연인 아담 차르토리츠키 공작과 다시 관계를 맺었으나, 이 관계는 그녀가 잘생긴 참모 장교 알렉세이 오호트니코프와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면서 끝났다. 1806년 11월 16일, 엘리자베타는 둘째 딸 엘리자베타 알렉산드로브나 대공녀를 낳았다. 궁정에서는 이 아이가 오호트니코프의 딸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오호트니코프는 1807년 결핵으로 사망했으나, 알렉산드르 1세나 그의 동생 콘스탄틴 파블로비치 대공이 그를 살해하도록 명령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엘리자베타와 알렉세이 오호트니코프 사이의 모든 서신과 그녀의 일기 중 일부는 그녀가 죽은 후 니콜라이 1세 황제에 의해 파괴되었다.
엘리자베타는 딸 엘리자베타, 일명 "리신카"에게 모든 애정을 쏟았지만, 딸은 태어난 지 15개월 만에 이가 나는 과정에서 생긴 감염으로 갑자기 사망했다. 엘리자베타는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제 저는 이 세상에서 아무 쓸모가 없고, 제 영혼은 이 마지막 타격에서 회복할 힘이 없습니다."라고 쓰며 깊은 슬픔을 표현했다.[8] 딸의 죽음은 일시적으로 알렉산드르 1세와 엘리자베타를 더 가깝게 만들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 더 이상 아이는 태어나지 않았다.
나폴레옹 전쟁 동안 엘리자베타는 남편의 정책을 지지하는 든든한 조력자였다. 나폴레옹의 몰락 후, 그녀는 남편과 함께 1814년 빈 회의에 참여하여 옛 연인 아담 차르토리츠키와 재회했다. 그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했고 오호트니코프와의 관계를 용서했지만, 그들의 재회는 오래가지 못했다.
1819년 알렉산드르 1세가 마리아 나리슈키나와의 관계를 청산하면서 부부 사이는 점차 개선되어 정상적인 부부 관계에 가까워졌다. 엘리자베타는 알렉산드르 1세가 아끼던 서녀 소피아 나리슈키나의 죽음을 슬퍼할 때 그에게 동정심을 보이며 다가가 위로했다.
1825년 10월, 엘리자베타의 건강이 악화되자 의사는 따뜻한 아조프해 연안의 도시 타간로크에서의 요양을 권유했다. 알렉산드르 1세도 동행하여 부부는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그해 11월, 크림 반도 방문 후 타간로크로 돌아온 알렉산드르 1세는 감기에 걸렸고, 이는 장티푸스로 악화되어 12월에 사망했다. 황후로서 남편의 임종을 지켜본 엘리자베타는 이듬해인 1826년 5월 아침, 자신의 침대에서 심부전으로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2. 4. 말년과 죽음

40세가 되면서 엘리자베타는 이전의 연애 관계들을 정리했다. 남편 알렉산드르 1세 역시 개인적인 심경 변화를 겪으며 부부 관계는 이전보다 가까워졌다. 1818년 무렵, 종교적 신비주의에 심취하게 된 알렉산드르 1세는 오랜 기간 관계를 이어온 마리아 나리시키나와의 관계를 정리했다. 이후 황제 부부는 함께 보내는 시간이 늘어났으며, 엘리자베타는 남편을 깊이 이해하려 노력했다. 특히 알렉산드르 1세가 아끼던 사생아 소피아 나리시키나가 사망했을 때 엘리자베타가 보여준 지지는 부부 관계 개선에 큰 영향을 주었다. 부부 사이의 눈에 띄는 화해는 주변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안겼다. 엘리자베타는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 "때로는 제가 알렉산드르의 정부인 것처럼, 아니면 우리가 비밀리에 결혼한 것처럼 생각하게 됩니다..."라고 적기도 했다.[9]
1825년에 이르러 엘리자베타의 건강은 눈에 띄게 나빠져 폐 질환과 신경 쇠약을 앓았다. 의사들은 온화한 기후에서의 휴양을 권했고, 아조프해 연안의 남부 도시 타간로크가 휴양지로 결정되었다. 편안한 궁전이 없었기에 황실 부부는 10월 5일부터 타간로크의 소박한 집에서 머물렀다. 부부는 그곳에서 조용하고 소박한 생활을 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1825년 11월 17일, 크림 반도 방문 후 타간로크로 돌아온 알렉산드르 1세는 감기에 걸렸고, 이는 곧 장티푸스로 발전했다. 결국 그해 12월, 알렉산드르 1세는 아내 엘리자베타가 지켜보는 가운데 타간로크에서 사망했다. 엘리자베타는 남편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으며, "저는 제 자신을 이해할 수 없고, 제 운명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제 의지를 그분에게 완전히 복종시키고, 그분을 위해 헌신하고 싶었던 제 삶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고 기록했다.[10] 남편이 사망한 지 3일 후에는 어머니에게 "저에 대해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하지만 감히 말하자면, 제 삶의 전부였던 분을 따르고 싶습니다."라는 편지를 보냈다.

남편을 잃은 슬픔과 원래 좋지 않았던 건강 문제로 인해 엘리자베타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리는 장례식에 참석할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졌다. 마침내 수도로 돌아가는 여정을 시작했지만, 건강이 너무 악화되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는 도중 툴라 현의 벨료프에서 멈춰야 했다. 이는 그녀를 맞이하기 위해 남쪽으로 오고 있던 시어머니 마리아 표도로브나 황태후와의 만남을 불과 몇 시간 앞둔 시점이었다. 1826년 5월 16일 이른 아침 4시 30분경, 시녀가 엘리자베타의 상태를 확인하러 갔을 때 그녀는 이미 침대에서 사망한 상태였다. 사인은 심부전(심장 쇠약)이었다.
3. 인물
엘리자베타는 달걀형 얼굴, 금발과 크고 푸른 아몬드 모양의 눈, 그리스식 옆모습과 섬세한 이목구비를 지녔다. 부드럽고 감미로운 목소리와 어깨까지 내려오는 곱슬거리는 금발 머리를 가졌으며, 우아한 자태와 위엄 있는 품격으로 당대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 중 한 명이자 황후 중 가장 아름다운 인물로 여겨졌다.
thumb
매력적이고 관대하며 지적인 엘리자베타 알렉세예브나는 문학과 예술을 사랑했으며, 루드비히 빌헬름 테퍼 드 페르구손에게 음악 레슨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빼어난 미모와 지성에도 불구하고 수줍고 내성적인 성품 탓에 러시아 궁정이나 남편의 가족들에게 호감을 얻지 못하고 사교계에서 소외되었다. 그녀는 궁정 생활의 화려함과 의식보다는 단순함과 고독을 선호했다.
결혼 생활 역시 순탄치 않았다. 엘리자베타 알렉세예브나는 남편 알렉산드르 1세를 사랑했고 여러 개인적, 정치적 위기 속에서 그를 격려했지만, 알렉산드르는 그녀를 소홀히 대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겉으로는 원만했으나 정서적으로는 거리가 있었고, 각자 결혼 외의 연애 관계를 가졌다.
파벨 1세가 암살되고 알렉산드르가 황제로 즉위하자, 그는 아내를 대하는 태도를 바꾸어 공적인 자리에서 황후를 정중하게 대하고 함께 식사하려 노력했다. 엘리자베타 역시 남편에게 상냥하게 대하며 헌신적으로 보필했다. 그러나 1803년, 알렉산드르는 폴란드 귀족 여성 마리아 나리시키나(나리시킨 공작 드미트리의 아내)를 애첩으로 삼았고, 이 관계는 15년 이상 지속되었다.
엘리자베타는 남편의 즉위 후 러시아로 돌아온 아담 예지 차르토리스키 공작과 다시 관계를 맺었으며, 나중에는 장교 알렉세이 오코트니코프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1806년 11월, 엘리자베타는 둘째 딸 엘리자베타 알렉산드로브나 황녀를 낳았는데, 아이의 아버지는 오코트니코프였다. 다음 해 오코트니코프는 갑작스럽게 사망했고, 황제 알렉산드르나 그의 동생 콘스탄틴 파블로비치 대공이 암살을 사주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엘리자베타는 "리신카"라는 애칭으로 부르던 딸에게 깊은 애정을 쏟았으나, 이 딸 역시 생후 15개월 만에 사망했다.
둘째 딸의 죽음 이후 엘리자베타는 남편 곁으로 돌아왔다. 당시 30세가 채 되지 않았던 그녀는 여전히 자녀를 가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는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황제를 계속 지원했다. 빈 회의에서 차르토리스키와 재회하여 잠시 관계를 맺기도 했지만, 결국 남편을 선택했다. 1819년 알렉산드르는 애첩 마리아 나리시키나와의 관계를 정리했고, 두 사람은 비로소 정상적인 부부 관계에 가까워졌다. 엘리자베타는 알렉산드르가 아꼈던 서녀 소피아 나리시키나의 죽음을 슬퍼하는 황제에게 동정심을 보이며 다가갔다.
1825년 10월, 폐 건강이 좋지 않았던 엘리자베타는 의사의 권유로 따뜻한 아조프해 연안의 도시 타간로크로 요양을 떠났다. 알렉산드르도 동행하여 두 사람은 함께 휴가를 보냈다. 그러나 11월, 크림 반도 방문 후 타간로크로 돌아온 알렉산드르는 감기에 걸렸고, 이는 장티푸스로 악화되어 12월에 엘리자베타의 품에서 사망했다.
남편이 사망한 다음 해인 1826년 5월 아침, 엘리자베타는 침대에서 이미 싸늘하게 식은 채로 시녀에게 발견되었다. 사인은 심장 쇠약이었다.
4.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생몰년 | 비고 |
---|---|---|---|
아버지 | 바덴의 상속자 카를 루이 | 1755년 ~ 1801년 | 바덴 변경백국의 상속자 |
어머니 | 아말리에 폰 헤센-다름슈타트 | 1754년 ~ 1832년 | 헤센-다름슈타트 방백 루트비히 9세의 딸 |
배우자 | 알렉산드르 1세 | 1777년 ~ 1825년 | 러시아 제국의 황제. 1793년 9월 28일 결혼. |
장녀 |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 | 1799년 5월 29일 ~ 1800년 7월 8일 | 요절 |
차녀 | 엘리자베타 알렉산드로브나 | 1806년 11월 15일 ~ 1808년 5월 12일 | 요절 |
여동생 | 프리데리케 폰 바덴 | 1781년 ~ 1826년 | 스웨덴의 구스타프 4세 아돌프와 결혼하여 스웨덴 왕비가 됨. |
엘리자베타 알렉세예브나는 1779년 1월 24일, 카를스루에에서 바덴 변경백국의 공녀 루이제 마리아 아우구스테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바덴의 상속자 카를 루이이며, 어머니는 아말리에 폰 헤센-다름슈타트이다. 그녀는 일곱 자녀 중 셋째로, 따뜻한 가정 환경에서 성장했으며 특히 어머니와는 평생에 걸쳐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1] 그녀의 형제자매 중에는 훗날 스웨덴의 왕비가 되는 여동생 바덴의 프리데리카가 있다.
1792년, 러시아 제국의 예카테리나 2세는 손자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 대공(훗날의 알렉산드르 1세)의 신붓감으로 루이제와 그녀의 여동생 프리데리케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초대했다. 예카테리나 2세는 루이제의 아름다움과 총명함에 만족했으며[2], 루이제 역시 알렉산드르에게 호감을 느꼈다. 1793년 5월 약혼 후, 루이제는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하고 이름도 엘리자베타 알렉세예브나로 바꾸었다. 같은 해 9월 28일, 14세의 나이로 15세의 알렉산드르 대공과 결혼했다.
엘리자베타는 알렉산드르 1세와의 사이에서 두 딸을 낳았으나, 두 딸 모두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첫째 딸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 대공녀는 1799년 5월 29일에 태어나 다음 해인 1800년 7월 8일에 사망했다. 둘째 딸 엘리자베타 알렉산드로브나 대공녀는 1806년 11월 15일에 태어나 1808년 5월 12일에 사망했다. 첫째 딸 마리아의 출생 당시, 부모와 달리 검은 머리카락과 눈을 가졌다는 점 때문에 아이의 친부에 대한 소문이 궁정에 돌기도 했다. 엘리자베타는 두 딸의 연이은 죽음으로 큰 슬픔을 겪었다.[6]
5. 같이 보기
참조
[1]
서적
Alexander I: The Tsar Who Defeated Napoleon
[2]
서적
The Romanovs
[3]
서적
The Romanovs
[4]
서적
The Romanovs
[5]
서적
The Tragic Dynasty
[6]
서적
Alexander of Russia
[7]
서적
The Tragic Dynasty
[8]
서적
Alexander of Russia
[9]
서적
Alexander of Russia
[10]
서적
Alexander of Russia
[11]
서적
Genealogie ascendante jusqu'au quatrieme degre inclusivement de tous les Rois et Princes de maisons souveraines de l'Europe actuellement vivans
https://books.google[...]
Frederic Guillaume Birnsti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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