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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세 드 콩데 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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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이 1세 드 콩데 친왕은 16세기 프랑스의 군인으로, 프랑스 종교 전쟁에서 위그노 편에 서서 활약했다. 그는 샤를 드 부르봉의 아들로, 앙리 4세의 숙부이다. 군 장군으로 메스 포위전과 생캉탱 전투에 참여했으며, 앙부아즈 음모에 연루되어 투옥되기도 했다. 이후 위그노 전쟁에서 드뢰 전투에서 포로로 잡히고, 앙부아즈 화의를 협상했으나, 1569년 자르나크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는 두 번 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두었고, TV 드라마 레인에서 묘사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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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세 드 콩데 친왕
기본 정보
칭호초대 콩데 공
재위1546년 7월 15일 – 1569년 3월 13일
전임새 칭호
후임앙리 1세
본명루이 드 부르봉
가문부르봉-콩데 가문 (콩데 분가) (창시)
종교이전 가톨릭, 이후 칼뱅주의 (위그노)
출생일1530년 5월 7일
출생지방돔
사망일1569년 3월 13일 (향년 38세)
사망지자르나크
가계
아버지샤를, 방돔 공작
어머니프랑수아즈 달랑송
배우자엘레오노르 드 루시
프랑수아즈 도를레앙
자녀앙리 1세
프랑수아, 콩티 공
샤를 2세, 추기경 드 부르봉
샤를, 소아송 백작 외
결혼과 자녀
엘레오노르 드 루시 드 루아와의 사이에서앙리 1세 드 콩데, 1572년 마리 드 클레브와 결혼
마르그리트, 1572년 느베르 공작 프랑수아 2세와 결혼
프랑수아즈 도를레앙과의 사이에서샤를, 루앙 대주교
루이 드 부르봉
뱅상 드 부르봉
마들렌 드 부르봉
카트린 드 부르봉
프랑수아, 초대 콩티 공

2. 초기 생애

방돔에서 태어난 그는 샤를 드 부르봉의 다섯째 아들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르네, 알랑송 공작과 로렌의 마르가리트의 장녀인 프랑수아즈 다르장송이었다. 그의 형 앙투안 드 부르봉은 잔 다르브레(나바라 여왕)와 결혼했다. 그들의 아들, 즉 콩데의 조카는 앙리 4세가 되었다. 그의 아버지의 사촌 (앙투아네트 드 부르봉의 형제)은 마리 드 기즈였다.[1]

방돔 공 샤를과 프랑수아즈 다랑송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형은 방돔 공 앙투안이며, 훗날 프랑스 왕 앙리 4세는 조카이다.[1]

3. 군 경력 및 정치 활동

방돔 공 샤를과 프랑수아즈 다랑송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형은 방돔 공 앙투안이며, 훗날 프랑스 왕 앙리 4세는 조카이다.

프랑스 군 장군으로서 루이는 1552년 메스 포위전에 참전하여 기즈 공프랑수아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겸 스페인 왕 카를 5세로부터 메스를 지켜냈고, 1557년 생캉탱 전투에서도 황제군에게 승리했다.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한 후, 위그노 전쟁에서 위그노의 일원으로 싸웠으며, 1562년 드뢰 전투에서 포로로 잡혔다. 오를레앙에서는 기즈 공 프랑수아가 암살되었다. 1563년, 왕태후 카트린 드 메디시스로부터 위그노에게 일정한 신앙의 자유를 부여하는 조건을 이끌어내, 가톨릭파와 앙부아즈 화의를 협상했다. 1567년 전쟁이 재발한 후, 1569년 자르나크 전투에서 전사했다.

3. 1. 앙리 2세 치하

콩데는 프랑스 군의 군인으로서 1552년 메츠 포위전에 참전하여 기즈 공작 프랑수아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군대로부터 도시를 성공적으로 방어하는 데 기여했다. 그와 그의 형제 수아송 백작 겸 앙기엔 백작 장은 생 티보 문에서 셀 강까지의 성벽 구역을 담당했다. 그는 또한 1557년 참혹했던 생 캉탱 전투에도 참전했다. 군사적으로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콩데는 형제와 마찬가지로 앙리 2세 치세 동안 중요한 직책을 맡지 못했다. 앙리 2세는 대신 그의 총신인 몽모렌시와 기즈 공작 프랑수아에게 직책을 수여했고, 콩데는 상대적으로 가난한 처지에 놓였다.

3. 2. 프랑수아 2세 치하

앙리 2세가 갑작스럽게 죽으면서 프랑스 정치 지형이 바뀌었고, 콩데는 그의 형 앙투안과 함께 몽모렌시 가문, 부르봉-몽팡시에 가문과 더불어 어린 국왕을 위한 권력을 협상하는 자리에 있었다.[1] 그러나 콩데 가문은 기즈 가문에 의해 밀려났는데, 기즈 가문은 콩데에게 피카르디 총독직과 7만 리브르의 현금을 약속하며 매수했다.[2]

이러한 매수에도 불구하고 여러 파벌에서 기즈 가문의 새로운 행정부에 대한 반대가 커졌고, 콩데는 그 반대에 끌렸다. 그의 형이 앙부아즈 음모자들이 혈통의 공작 섭정 역할을 해달라는 요청을 거절하자, 그들은 콩데가 혈통의 작은 공작으로서 더 약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 그를 지도자로 삼고자 했다. 음모에 대한 소문이 기즈 가문의 귀에 들어가자, 그들은 콩데의 연루를 의심하기 시작했고, 그의 피카르디 총독직은 실현되지 못했다.

1560년 앙부아즈 음모에 연루되었는데, 이는 프랑수아 2세를 가톨릭 지도자인 기즈 공프랑수아로부터 떼어내려는 위그노와 부르봉 가문 사람들이 꾸민 일이었으나 실패로 끝나 많은 위그노가 학살되었다.

3. 3. 샤를 9세 치하

1560년 2월, 기즈 가문은 오랫동안 찾던 음모의 증거를 확보했다. 이는 겁을 먹은 공모자로부터 얻은 것이었다. 그들은 궁정을 안전한 앙부아즈 성으로 옮기고, 콩데 친왕을 포함한 고위 귀족들을 성으로 소환하여 방어를 돕도록 했다. 콩데는 이후 며칠 동안 공모자들이 진압되는 것을 성벽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혐의를 피하려는 듯 콩데는 며칠 동안 궁정에 머물면서 자신의 연루에 대한 소문이 '쓰레기'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격분하여 비난했다. 그는 자신을 고발하는 사람은 누구든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하며, 귀족 사회에서 심각한 비난을 가했고, 면전에서 자신을 고발하는 자와 결투할 것을 제안했다. 기즈 공작은 콩데의 유죄를 확신했지만, 당분간 필요한 증거가 없다는 것을 알고 콩데에게 아무도 그의 명예를 의심하지 않는다고 확신시켰다. 그가 안심시키는 동안, 그의 형제인 샤를 드 로렌 추기경은 열심히 바닥을 쳐다보았다. 4월 18일, 콩데가 국왕의 알현에 참석하는 동안 기즈 가문은 증거를 찾기 위해 그의 아파트를 급습했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고 그에게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자신이 얼마나 많은 의심을 받고 있는지 잘 알고 있던 콩데는 궁정을 떠날 기회를 잡았다.

Image of the conspiracy as it unfolded at various stages on the 13th 14th and 15th simultaneously
앙부아즈 음모, 장 페리생과 자크 토르토렐


앙부아즈에서 국왕을 납치하려던 시도가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독립적인 군대가 봉기하여 게릴라전을 벌이면서 왕국 전역에 혼란이 지속되었다. 콩데는 계속 음모를 꾸며, 리옹에 군대를 보내 도시를 점령하고 기즈에 반대하는 세력의 핵심으로 삼을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리옹에서의 봉기는 시작되기도 전에 발각되었고, 기즈는 콩데와 나바르의 연루에 대한 의심을 품게 되었다. 콩데의 요원을 체포하여 그를 연루시키는 서류를 확보하면서 기즈의 의심은 확증되었다. 분노한 기즈 형제는 마침내 확고한 증거를 확보하고, 곧 열릴 귀족 회의에 참석하도록 초청했다. 참석할 경우 체포될 것이 분명했기에 나바르와 콩데는 봉건 영지인 방돔에 머물렀다. 기즈는 부르봉-방돔 가문을 방계 친척들로부터 고립시키기 위해 국토의 상당 부분을 통제하는 두 개의 초대 총독직을 만들고, 하나는 라 로슈 쉬르 용 공 샤를에게, 다른 하나는 몽팡시에 공 루이에게 주었다. 그들은 4만 명의 군대를 소집하기 시작했고, 1560-1년 삼부회에 참석하지 않으면 반역자 형제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경고했다. 두 사람은 6천 명의 보병만 보유하고 있었지만 싸움 없이 북쪽으로 이동했고, 콩데는 10월 31일에 즉시 체포되었다.

기즈는 콩데를 반역죄로 재판을 준비했다. 콩데는 재판 절차를 지연시키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시도했고, 재판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동료들에 의한 재판을 요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죄 판결을 받았고, 로슈 지하 감옥에서 무기한 징역형을 선고받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콩데는 오래 감옥에 갇히지 않았고, 젊은 프랑수아 2세의 죽음은 기즈의 정치적 권력과의 연결을 끊었고, 카트린 드 메디치의 섭정 정부가 들어설 길이 열렸다. 카트린은 삼부회가 섭정에 대한 나바르의 권리를 선호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콩데의 투옥을 지렛대로 사용하여 그를 매수하여, 그녀의 통치를 지지하는 대가로 그를 석방하고 형을 무효화하겠다고 약속했다.

콩데는 프랑수아 2세가 사망한 지 15일 만인 1560년 12월 20일에 투옥에서 풀려났다. 나바르는 의회에서 콩데를 옹호하며 격렬하게 주장했고, 그의 형이 총애를 되찾지 못하면 반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암시를 했다. 카트린은 나바르가 위협을 거두도록 설득했고, 나바르는 카트린의 섭정을 인정하며, 기즈 가문의 비난으로부터 형을 보호하고 싶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한편, 가석방 상태였던 콩데는 피카르디에서 자신의 사건과 관련된 소식을 기다리며, 자신을 기소한 자들에 대한 복수를 간절히 원했다. 카트린은 나바르와 기즈 가문의 화해를 주선했고, 그들의 개인적인 화해가 온 가족에게 유효할 것이라고 알렸다. 이 일이 이루어지자 카트린은 콩데를 궁정으로 초대했다. 콩데는 6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출발했지만, 카트린은 그에게 수행원을 해산하고 25명 이하의 기병만 데리고 오라고 명령했다. 그는 3월 9일 저녁 퐁텐블로에 도착했다. 자신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그는 기즈 공작이 왕 앞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왕을 만나는 것을 거부하겠다고 말하면서 즉시 사건을 일으켰다. 결국 그는 기즈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그들을 만나는 데 동의했다. 3월 13일 콩데는 왕과 의회를 상대로 음모를 꾸민 적이 없다고 법정에서 맹세했고, 샤를 9세가 이 사실을 나타내는 조례를 통해 의회는 공식적으로 그를 사면했으며, 이 조례는 ''고등 법원''에 등록되었다.

궁정은 이 조치로 콩데가 만족할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그는 기즈에게 여전히 무뚝뚝하게 대했고, 자신의 무죄에 대한 추가적인 확인, 즉 자신을 유죄 판결했던 ''고등 법원''의 공식적인 판결, 그리고 자신을 고발한 자들에 대한 비난을 요구했다. 3월 17일 그는 여전히 자신을 고발한 자들에게 복수를 위협하며 퐁텐블로를 떠나 파리로 향했다. 4월 1일, 그는 500명의 대규모 수행원과 함께 콜리니의 아파트에서 칼뱅주의 예배에 참석했다. ''고등 법원''은 오를레앙 칙령과 4월 19일 칙령에 반대하는 데 몰두하여 6월 13일에야 콩데의 유죄 여부를 다루었고, 압력 하에 그의 무죄를 선언했다. 카트린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기즈 공작과 콩데가 공개적으로 화해하도록 강요했다.

4. 프랑스 종교 전쟁

드뢰 전투


기병 돌격과 사람들이 도시로 도망치는 모습
모(Meaux)의 기습에서 국왕을 붙잡으려 하는 콩데와 그의 기병대


루이 1세는 위그노 전쟁에서 위그노의 일원으로 참전했다. 1562년 드뢰 전투에서 포로로 잡혔으나, 오를레앙에서 기즈 공 프랑수아가 암살되면서, 왕태후 카트린 드 메디시스로부터 위그노에게 일정한 신앙의 자유를 부여하는 앙부아즈 칙령을 이끌어내며 가톨릭파와 화의를 협상했다.

내전 종식 후, 르아브르디에프에 대한 잉글랜드 점령 문제가 왕실의 관심사가 되었다. 카트린은 이 도시들을 탈환하기 위한 연합군이 전년도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콜리니와 프랑수아 드 콜리니 당들로는 이전 동맹에 대항하는 것을 거부했지만, 콩데는 왕실의 노력에 동참했다. 콩데, 샤를 드 코세, 브리사크 백작 등의 지휘하에 있던 군대는 1563년 8월까지 이 도시들을 다시 복속시켰다.

한편 기즈 가문과 몽모렌시 가문 사이에는 반목이 깊어졌는데, 기즈 가문은 몽모렌시 가문의 조카인 콜리니가 기즈 공작을 암살했다고 비난했고, 몽모렌시 가문은 조카를 보호하고 있었다. 로렌 추기경은 이 다툼에서 이점을 얻기 위해 콩데 친왕에게 접근하여 종교적 기반이 아닌 지지 기반을 구축하려 했다. 1564년 7월 그의 부인이 사망하면서 몽모렌시 가문과의 친족 관계가 끊어진 것이 이러한 시도를 부추겼다. 두 사람은 수아송에서 우호적인 만남을 가졌으며, 추기경은 그에게 기즈 가문의 공주를 새 부인으로 제안했다. 이 제안은 실패했지만 그의 호의를 확신한 추기경은 무력을 동원하여 파리에 입성하려 했고, 그의 수행원들은 1565년 1월 파리 거리에서 몽모렌시 가문의 수행원들과 충돌했다. 이 싸움에서 패배한 추기경과 젊은 앙리 드 기즈는 도망쳐야 했다. 기즈 가문은 말싸움으로 전환하여 콩데 친왕과 다른 공들에게 그들이 몽모렌시 가문과 같은 벼락출세한 가문에 맞서 진정한 지위의 사람들을 보호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콩데는 이후 몇 년 동안 기즈 가문과 멀어지게 되는데, 그들이 종교적이지 않은 접근 방식을 버리고 복수를 위해 가톨릭 강경파를 옹호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특히 앙부아즈 칙령의 조건을 축소하는 수정안과 알바 공작과의 카트린 드 메디치의 만남은 콩데와 콜리니의 불안감을 불러일으켰다. 1567년에 앙부아즈 칙령이 파리에서 일 드 프랑스 지역까지 개신교 금지령을 확대하는 방식으로 또다시 수정되는 동시에 알바가 네덜란드로 북상하기 시작하자, 콩데는 국왕과 고함 지르는 말다툼을 벌인 후 궁정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는 자신의 영지에서 알바의 군대로부터 프랑스를 보호하기 위해 스위스 용병을 고용한 것에 대해 카트린에게 항의하며, 그들을 위그노 박멸의 도구로 보았다. 카트린은 그를 안심시키고 궁정으로 다시 초대했지만 그는 관심이 없었다.

권력의 중심에서 벗어난 주요 위그노 귀족들은 어떤 행동을 취할지 계획하기 시작했고, 콜리니의 성에서 만나 세부 사항을 논의했다. 콩데, 콜리니, 그리고 몽고메리 백작 등이 참석했다. 결국 그들은 모에서 국왕과 국모를 납치하고, 특히 로렌 추기경과 같이 그들에게 반대하는 궁정 멤버들을 암살하기로 결정했다. 이 음모는 앙부아즈 음모보다 더 잘 지켜진 비밀이었고, 9월 28일에 그들이 공격했을 때 궁정은 당황했다. 그러나 궁정은 회복하여 빠르게 파리로 향할 수 있었다. 콩데는 철수 속도에 놀라 의도했던 병력의 1/3만으로 추격했다. 그는 세 번의 돌격을 감행했지만 스위스 용병의 방진에 의해 격퇴되었고 궁정은 파리에 도착했다.

4. 1. 제1차 종교 전쟁



카트린의 정부는 종교적인 방향으로 인해 왕국의 귀족들 사이에서 점차 고립되었다. 처음에는 기즈와 몽모렌시가 왕실로부터 멀어져 궁정을 떠났고, 이후 나바르가 획기적인 1월 칙령 공포 이후 반대 입장에 들어섰다.[1] 이 긴장된 정치적 순간에 기즈 공작은 나바르의 요청으로 반대 입장을 돕기 위해 파리로 돌아가던 중 바시 학살을 감독했다.[2] 1000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파리로 계속 이동하던 그는 교외에서 열린 예배에서 돌아오는 길에 500명의 수행원을 거느린 콩데와 마주쳤다. 카트린은 두 사람 모두 도시에 있는 위험을 인식하고, 바시에서 자신의 군대가 보인 행동에 대해 기즈에게 분노하여 두 사람 모두 도시를 떠나라고 명령했지만 콩데만 이에 따랐다.

카트린이 콩데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동안 그는 오를레앙으로 떠났고, 기즈는 어린 국왕과 섭정을 차지할 수 있었다. 거기서 그는 4월 2일에 도시를 점령하고, "기즈 씨가 보는 앞에서 바시에서 자행된 잔혹하고 끔찍한 대학살"을 비난하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며칠 후 그 도시의 칼뱅주의 종교 회의는 그를 프랑스 내 모든 교회의 보호자로 선포했다.

콩데의 전략은 프랑스 전역의 전략적 도시들을 점령하고 이를 유리한 협상을 위한 지렛대로 삼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프랑스 전역의 위그노들에게 봉기를 장려했고, 그들은 투르, 루앙, 몽펠리에, 블루아 등 여러 도시에서 성공적으로 봉기했다. 하지만 콩데는 초기의 기세를 살리지 못했고, 5월에는 오를레앙에 머물렀는데, 이때 카트린은 그와 협상하기 위해 프랑수아 드 세페오를 보냈고, 기즈와 몽모렌시에게서 그들의 직위를 박탈하고 그의 동생이 프랑스 군대를 단독 지휘하도록 제안했다. 콩데는 자신의 입장에 자신감을 갖고 이 조건을 거부하고 대신 칼뱅주의자들을 위한 완전한 종교의 자유를 요구했다. 카트린은 이러한 조건을 받아들일 의향이 없었고, 원수들을 철수시켰다.

6월에 왕립군이 마침내 소집되자, 오를레앙으로 진군하여 콩데의 군대를 그 도시에 가두려 했다. 콩데는 포위를 피하기 위해 자신의 병력을 주변 지역으로 분산시켜 파리 시에 대한 위협을 끝냈다. 왕립군은 자유롭게 움직이며 먼저 부르주를 제압했고, 엘리자베스 1세와의 협상 소식을 듣고, 르아브르를 군사 지원과 교환하는 내용의 햄프턴 코트 조약을 체결한 콩데를 막기 위해 루앙으로 진군하여 영국군과의 연결을 막으려 했다. 그의 형제 나바르는 루앙 포위전에서 사망했지만, 그 도시는 함락되었다. 수적인 열세를 줄이기 위해 독일에서 용병을 모집하여 콩데의 군대를 보충했다. 왕립군은 생탕드레 원수에게 이들이 연결되기 전에 차단하라는 임무를 맡겼지만,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고, 콩데는 병력을 이끌고 파리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그의 파리 진군은 좌절되었고, 그는 북쪽으로 후퇴하던 중 드뢰 전투에서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콩데는 전투의 대부분 동안 위그노 군대를 지휘했지만, 그의 기병대가 후퇴하는 동안 포로로 잡혔고, 그의 군대가 전투에서 패배한 후, 그는 기즈 공작의 포로가 되었다. 승리한 기즈는 관대하게 포로로 잡힌 왕자에게 심지어 자신의 침대까지 내주었다. 그러나 오를레앙을 제압하려다 암살당한 공작의 죽음으로 인해, 완전한 승리에 다다를 뻔했던 왕관은 모든 기세를 잃게 되었다. 콩데는 몽모렌시와 함께 카트린에 의해 평화를 협상하기 위해 소환되었다. 앙부아즈 칙령은 1562년의 포괄적인 생제르맹 칙령보다 더 제한적이지만, 어느 정도의 관용을 확인했다. 이 칙령은 주로 위그노 당의 귀족 세력에게 유리했으며, 귀족 영지에서 예배의 자유를 허용하는 조항을 담고 있었다.

4. 2. 제2차 종교 전쟁

쿠데타가 실패한 후, 콩데 친왕과 다른 주요 공모자들은 파리를 포위하여 국왕이 정규군을 완전히 소집하기 전에 굶겨 죽이려는 계획을 세웠다.[1] 그들은 프랑스 전역에서 일어난 반란의 지원을 받아 오를레앙, 발랑스, 오세르 등을 점령했다.[2] 콩데 친왕은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협상하며 종교의 자유로운 행사, 이탈리아 금융업자 추방, 루이 12세 이후 부과된 모든 세금 철폐를 요구했다. 그러나 국왕은 이러한 요구를 거부하고, 천천히 병력을 증강시키며 교량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콩데 친왕은 상황을 잘못 판단하여 인근 도시들을 점령하기 위해 부대를 파견했고, 이로 인해 파리 포위망은 약화되었다. 11월, 몽모렌시가 파리에서 공격하여 생-드니 전투에서 콩데 친왕을 물리쳤지만, 몽모렌시 자신도 전사했다. 콩데 친왕은 파리에서 동쪽으로 철수했고, 몽모렌시의 죽음으로 왕실군이 재정비하는 동안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그는 용병 및 다른 위그노 군대와 합류한 후, 다시 방향을 돌려 샤르트르를 포위했다. 샤르트르 포위전은 콩데 친왕의 대포 배치 미숙으로 지연되었지만, 양측 간의 협상으로 3월 13일에 휴전이 성사되었고, 3월 23일 롱주모에서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롱주모 평화 조약은 수년 전 아브루아에서 합의된 조항을 대체로 반복한 것이었다. 양측 모두 평화 조약의 지속에 대한 믿음이 크지 않아 불안정했다. 궁정의 균형은 평화를 협상했던 온건파에서 이를 뒤집기를 원하는 강경파로 이동했다. 한편, 콩데와 위그노 지도부는 '사악한 책략'에 대항하기 위해 서로를 돕기로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개신교 반군과 합의하면서 외교 동맹 금지령을 무시했다.

9월까지 로렌은 평화를 뒤집기 위한 의회 다수결을 확보했고, 교황 비오 5세가 이단과의 전쟁에 대한 대가로 제공한 재정 지원 제안에 열성적이었다. 콩데, 콜리니, 그리고 위그노 지도부는 가스파르 드 소, 토반 영주로부터 그들을 체포하려는 계획에 대한 경고를 받고 궁정을 떠나 남쪽으로 도주하여 라 로셸의 안전한 피난처로 향했고, 그곳에서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무기를 들었다. 9월 28일 생-모르 칙령은 롱주모 평화 조약을 폐지하고 가톨릭교를 프랑스의 유일한 종교로 선포했다. 10월 6일 앙주 공작 앙리가 전장에 나섰다.

4. 3. 제3차 종교 전쟁과 죽음

자르나크 전투, 중앙에 콩데의 처형 장면


콜리니와 콩데는 북부 도시 봉기에서 이점을 얻지 못하고, 제3차 종교 전쟁의 중심을 남부 위그노 핵심 지역 방어로 재편성했다. 1568년 말, 콩데 군대와 타반 군대는 루덩을 포위하여 서로 공격할 지점을 찾으려 했다. 결국 왕실군은 겨울을 나기 위해 물러섰고, 위그노 군대도 소뮈르 점령에 실패한 후 진영을 구축했다.[1] 1569년 3월, 콩데가 남쪽으로 진격하여 코냑을 점령하려 한다는 보고를 받은 타반은 기회를 포착, 3월 12일 밤 샤랑트를 건너 위그노 후위에 도달했다. 몽팡시에 휘하 왕실 선봉대가 콩데 휘하의 위그노 후위대를 공격하여 콩데를 말에서 떨어뜨렸다. 콩데는 무장하지 않은 채 경비병에게 잡혔고, 앙주 공작의 명령에 따라 처형되었다. 위그노 군대 대다수는 무사했지만, 콩데의 시신은 당나귀 등에 실려 자르나크를 지나며 시민들에게 조롱받았다.[2]

5. 결혼과 자녀

콩데는 1551년에 엘레오노르 드 루시 드 로이에와 결혼하여[1] 샤를 드 로이에의 상속녀가 되었다. 그녀는 아미앵 남서쪽에 있는 콩티-쉬르-셀(Conti-sur-Selles) 성과 작은 마을을 지참금으로 가져왔고, 이 마을은 그들의 셋째 아들에게 넘어갔으며, 이 아들은 콩티 공작의 조상이 되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자녀를 두었다.

이름출생사망비고
앙리 드 부르봉, 콩데 공[2]
마르그리트 드 부르봉1556년 11월 8일1558년 10월 7일요절
샤를 드 부르봉1557년 11월 3일1558년 9월 1일요절
프랑수아 드 부르봉, 콩티 공[2]1558년 8월 19일
샤를 드 부르봉[2]1562년 3월 30일루앙 대주교, 추기경
루이 드 부르봉1561년 3월 30일1563년 10월 19일요절
마들렌 드 부르봉1562년 3월 30일1563년 10월 7일요절
카트린 드 부르봉1564년 2월 18일1564년 5월 5일요절



1565년 11월 8일, 그는 미망인이 된 후 프랑수아즈 드 오를레앙, 롱그빌 양과 결혼하여[2] 다음과 같은 자녀를 두었다.

이름출생사망비고
샤를 드 부르봉, 수아송 백작[2]1566년 11월 3일노장 르 로트루 출생
루이 드 부르봉1567년 8월 7일1569년 3월 24일요절
뱅자맹 드 부르봉1569년 9월 7일1573년 3월 2일요절



그는 자신의 정부인 이자벨 드 리메유에게 아들을 두었다고 알려졌는데, 이자벨은 명예 시녀로 카트린 드 메디치의 시중을 들었으며, 프랑스 궁정에서 "비행 중대"로 알려진 악명 높은 여성 스파이 그룹의 일원이었다. 그는 이자벨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노릇을 강력하게 부인했다.

루이 1세, 콩데 공의 문장.
그의 아들 앙리 역시 위그노 장군이 되어 후기 종교 전쟁에 참전했다.

6. 대중 매체에서의 묘사

루이 콩데는 TV 프로그램 《레인》에서 영국 배우 숀 틸이 연기했다. 그는 메리 1세와 불륜을 저지르고 군주제에 반하는 쿠데타를 주도한다.[1]

참조

[1] 웹사이트 Reign - Season 2- Sean Teale joins cast http://www.spoilertv[...] 2015-01-31
[2] 브리태니커백과사전 Louis I de Bourbon, prince de Condé French military leader https://www.britan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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