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큐의 위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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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류큐의 위계는 류큐 왕국 시대의 신분 체계를 설명한다. 왕족은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최상위 계층으로, 왕자, 안지 등으로 구분되었다. 사족은 사무레라고 불렸으며, 상급 사족과 일반 사족으로 나뉘었고, 친방, 친운상 등의 칭호가 주어졌다. 일반 평민은 햐쿠쇼라고 불렸으며, 지방 통치는 간절을 기본 단위로 이루어졌고, 지두대, 부지두, 팔리, 문자 등의 지방 역인이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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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큐의 위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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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큐의 위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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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정치 체제 | 류큐 왕국의 관위 |
존칭 | 전하, 저하 |
복색 | 류큐 옷 |
위계 | |
왕족 | 왕 (王) 왕세자 (王子) 왕녀 (王女) 왕손 (王孫) |
귀족 | 왕자 (按司 (아지)) 친방 (親方 (웨에카타)) 위계자 (位階者 (이카이샤)) |
관리 | 사족 (士族 (시조쿠)) 통사 (通事 (츠지)) 필자 (筆者 (힛샤)) |
품계 | |
친방 | 정일품 (正一品) 종일품 (従一位) 정이품 (正二品) 종이품 (従二位) 정삼품 (正三品) 종삼품 (従三位) |
위계자 | 정사품 (正四品) 종사품 (従四位) 정오품 (正五品) 종오품 (従五位) 정육품 (正六品) 종육품 (従六位) 정칠품 (正七品) 종칠품 (従七位) 정팔품 (正八品) 종팔품 (従八位) 정구품 (正九品) 종구품 (従九位) |
2. 왕족
류큐 왕국의 왕족은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최상위 신분 계층으로, 무품(無品)으로 품계를 초월한 존재였다. 왕족은 고텐(御殿)이라는 저택에서 거주했으며, 왕자와 안지로 구성되었다. 왕족은 정치에 직접 관여하지 않는 직위에 취임하는 경우가 많았다.
왕자와 안지는 마키리(오늘날의 시정촌)를 채지로 하사받았으며, 이를 안지 지두라고 불렀다. 이들은 채지로 받은 마키리 명을 가명으로 하여 나키진 왕자, 모토부 안지 등으로 불렸다. 또한, 이들의 저택은 고텐(우둔)이라고 불렸으며, 나키진 고텐, 모토부 고텐과 같이 안지가를 지칭하는 존칭으로도 사용되었다.
칭호 | 설명 | 관모 및 비녀 |
---|---|---|
왕자 | 국왕의 아들, 왕숙(王叔), 왕제(王弟) 등 | 적지 금입 오색 부직관, 금비녀 |
안지 | 왕자나 안지의 후계자 | 적지오색부직관 또는 황지오색부직관, 금비녀 |
2. 1. 왕자 (王子, 오지)
국왕의 아들, 왕숙(王叔), 왕제(王弟)에게 주어지는 칭호 및 위계명이다. 정실의 자녀는 직(直)왕자, 측실의 자녀는 협(脇)왕자라고 불렀다. 세자는 나카구스쿠 간절을 채지로 받았기 때문에, 나카구스쿠 왕자라고 불렸다. 왕자는 1대에 한정되며, 왕자의 자녀는 안지가 되었다.명의 책봉을 받아 왕호가 사용되기 시작한 이후에 왕자의 칭호가 사용되었다. 제3대 쇼신왕 시대에 건립된 타마우도노 비문(1501년)에는 "나카구스쿠노 안시 마니키요타루(中くすくのあんし まにきよたる, 중성의 안지・마니키요타루, 후의 쇼세이왕)"라고 되어 있는 것처럼, 왕자를 아직 '안시(按司)'라고 표기하고 있다.
공적이 있거나 에도 상경의 정사로 임명된 경우, 섭정에 취임한 안지에게도 왕자 칭호가 주어졌는데, 이들은 종(従)왕자로 불렸다. 하네지 왕자 조슈 등이 그 예이다. 왕자는 적지 금입 오색 부직관을 쓰고, 금비녀를 꽂았다.
2. 2. 안지 (按司, 아지 또는 안지)
왕족 중, 왕자에 다음가는 칭호이자 위계명으로, 왕자나 안지의 후계자에게 주어졌다. 안지는 '아지' 또는 '안지'라고 발음하며, '주인(あるじ)'에서 변형된 것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안지는 표기이다. 안지는 왕가의 분가 당주가 받는 것으로, 일본의 궁가 당주에 해당한다.원래 아지는 지방의 지배자나 그 가족 등, 지배 계급에 있는 인물의 칭호였으나, 제2 쇼 씨 왕조 하에서는 주로 왕족의 칭호 및 위계명이 되었다. 타마우도노(玉陵) 비문에는 왕의 자식과 함께 世添御殿(요도노고텐)의 大按司(오오아지), 聞得大君(키코에오오키미)의 아지, 佐司笠(사시키사)의 아지라고 하여, 왕모, 상급 신녀의 존칭으로도 아지가 사용되었다. 앞서 본 바와 같이 왕의 자식은 후에 왕자라고 칭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안지의 자식은 모두 안지라고 칭했지만, 쇼테이 왕 치세인 1692년 이후, 후계자만이 칭하도록 변경되었다. 여기에는 왕부 재정 문제가 관련되어 있다고 한다. 안지는 큰 공적이 있으면 왕자로 승격되기도 했지만, 역대 당주에게 공적이 없으면 7대 만에 사족으로 강등되었다. 赤地五色浮織冠(아카지 고시키 우키오리칸) 또는 黄地五色浮織冠(키지 고시키 우키오리칸)을 쓰고, 금비녀를 꽂았다.
3. 사족 (士族)
류큐의 사족은 '사무레' 또는 '유캇츄'(좋은 사람)라고 불렸으며, 고류큐 시대에는 '게스'라고도 불렸다. 16세기 초두에는 이미 왕족과 그 이하의 사족 계층을 구분하는 차별 의식이 있었다.
정오품 이하의 사족은 일반 사족에 해당한다. 류큐에서는 "분닌"이라고 불렸으며,[2] 봉토를 갖지 못한 무록사(無祿士)를 말한다. 오품, 육품으로 승진하는 것도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지만, 사품 이상의 상급 사족으로 승격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일반 사족에는 사토누시 집안(里之子家)과 치쿠도노 집안(筑登之家)이라는 두 가문이 있었다. 사토누시 집안은 중급 사족, 치쿠도노 집안은 하급 사족에 해당한다. 각 집안의 출세 과정은 다음과 같다.
- 사토누시 집안: 시(子) → 사토누시(里之子) → 사토누시베친(里之子親雲上) → 페쿠미(親雲上)
- 치쿠도노 집안: 시(子) → 치쿠도노(筑登之) → 치쿠돈베친(筑登之親雲上) → 페쿠미(親雲上)
두 가문의 가격은 고정된 것이 아니었고, 치쿠도노 집안 출신은 공적을 쌓으면 오야카타(親方)까지 오를 수 있었다. 이 경우에 사토누시 집안으로 승격되었다. 또한 사토누시 집안도 공적이 없으면, 치쿠도노 집안으로 격하되었다. 푸다이(譜代)는 오래된 사족 가문을, 신참(新參)은 새로 사족이 된 가문을 말한다. 1689년 가계 편찬 때 쇼네이왕 대 이전부터 벼슬한 가문은 푸다이, 이후 벼슬했거나 천계·숭정 연간(1621년 - 1640년)에 자손이 벼슬하지 않은 가문은 신참으로 분류했다.[3]
신참은 소후레(訴後れ), 훈공(勳功), 헌금(獻金)으로도 사족이 될 수 있었다. 소후레는 1690년 가계 급여 시점에서 사족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나중에 신청한 자들(과거 벼슬했던 자나 그 자손, 시골로 내려간 자, 진공선의 선원, 근교 간절의 지방 관리 등)이다.[4] 훈공은 왕부에 공적이 있던 평민, 헌금은 왕부에 막대한 1600억위안을 납부한 자나 사비로 공공 공사를 시행하고 왕부로부터 인정받은 자들을 말한다.
칭호 | 품계 | 관 | 비녀 |
---|---|---|---|
사토누시베친(里之子親雲上) | 정7품 | 황관(黃冠) | 은비녀(銀簪) |
치쿠돈베친(筑登之親雲上) | 종7품 | 황관(黃冠) | 은비녀(銀簪) |
사토누시(里之子) | 팔품 | 적관(赤冠) | 은비녀(銀簪) |
치쿠도노(筑登之) | 구품 | 적관(赤冠) | 은비녀(銀簪) |
시(子) | 무위(無位) | 적관(赤冠) | 은비녀(銀簪) |
니야(仁屋) | 무위(無位) | 녹관(緑冠) | 동비녀(銅簪) |
3. 1. 상급 사족
정1품부터 종4품까지의 사족은 상급 사족에 해당하며, 국정의 요직을 맡았다. 친방(웨카타)은 원칙적으로 한 간절(間切)을 채지(采地)로 하사받아 총지두라고 불렸으나, 실제로는 채지 부족으로 와키지두(脇地頭)에 머무는 경우가 많았다. 와키지두는 간절 내의 한 촌을 채지로 받는 지두직을 말하며, 이 경우 와키지두 친방이라고 불렸다. 『류큐번 잡기』(메이지 6년)에 따르면, 왕조 말기 총지두직 친방은 14명, 와키지두 친방은 38명이었다.[2]친운상(페쿠미)은 보통 채지명에 따라 우라소에 친방, 치바나 친운상 등으로 칭했으나, 왕자령이나 왕가 직령과 겹칠 경우 다른 호칭을 사용했다. 예를 들어 나카구스쿠 간절(나카구스쿠 왕자령)의 지두는 이샤도, 사시키 간절(왕비령)의 지두는 모리야마라고 칭했다. 친방과 지두직 친운상의 저택은 전내(톤치)라고 불렸으며, 가문은 토미구스쿠 전내(토미구스쿠둔치)나 기마 전내(기마둔치)와 같이 불렸다.[2]
3. 1. 1. 친방 (親方, 웨카타)
'''웨카타(親方)'''사족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칭호로, 국정의 요직을 맡았다. 친방(웨카타)은 세습이 아니라 공적이 있는 사족이 오르는 자리였기 때문에 친방의 자식이 반드시 친방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 대부분은 역시 슈리를 중심으로 한 문벌에 의해 세습되었다. 친방은 자관(紫冠)을 쓰고, 화금경은비녀(花金茎銀簪)를 꽂았다. 정이품 이상으로 승진하면 금비녀를 꽂았다.
친방의 칭호는 오래되지 않아, 17세기경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이전에는 카나조메 친운상(紫の親雲上, 자주색 친운상)이라고 칭했다. 이것은 자관에서 유래된 것으로 생각된다. 친방은 『류큐국유래기(1713년)』의 「관작열품」 항목에 "이 관작은 하종(게스)의 극관이다"라고 있듯이, 사족이 승격할 수 있는 최상위이다. 공적이 있는 황관(黃冠)의 사족에게 특별히 자관을 하사한 것이 친방의 시작으로 여겨진다.
왕족이 의례 관계의 한직에 임명되는 데 반해, 친방은 정치의 실무를 담당했고, 투표로 선출되면 삼사관에 취임했다. 왕자에서 친방까지는 각각 하나의 간절(間切)의 영주로 여겨졌기 때문에, 류큐에서는 '''다이묘(デーミョー)'''라고 불렸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실제로는 와키지토(脇地頭) 직에 머무는 「소묘급」의 친방이 더 많았다.
3. 1. 2. 친운상 (親雲上, 페쿠미)
류큐에서는 사족을 '사무레-(サムレー)'라고 불렀으며, 속칭 '유캇츄(좋은 사람)'라고도 했다. 류큐의 사족은 일반적으로 친운상(페ー친)이라고 불렸지만, 그중에서도 채지(采地)를 받은 자, 즉 지두 직에 있는 자는 친운상(페ー크미)이라고 발음하여 구분했다.[1] 고류큐 시대에는 친운상에 해당하는 계층을 "오야쿠모이"라고 불렀다. "모이"는 존칭 접미사, "오야쿠"는 어원이 불분명하지만, "대역" 즉 중요한 역직에 취임한 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냐는 설도 있다. 따라서, 후세의 친운상(훈독으로, 오야쿠모우에)이라는 칭호는 이 "오야쿠모이"의 차자이다.친운상(페ー크미)은 한 촌을 채지로 하사받아 와키지두의 직에 올랐다.[2] 친운상(페ー크미)도 세습이 아니었으며, 노력 여하에 따라 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공적을 쌓으면 친방위에 승격했다. 채지가 아닌, 명도(채지의 이름만)를 받은 경우에는 페친이라고 발음했다. 황관을 쓰고 은잠을 꽂았다.
사토노코(里之子) 가문의 사람이 정7품으로 승격하면 사토노코 페ー친(里之子親雲上)이라 칭했다. 황관을 쓰고 은비녀를 꽂았다. 지두직(地頭職)에 임명되면 페ー쿠미(親雲上)라 칭했다. 축등지(筑登之) 가문의 사람이 종7품으로 승격하면 축등지 친운상(筑登之親雲上)을 칭했다. 황관을 쓰고 은잠을 꽂았다. 지두직(地頭職)에 임명되면 친운상(親雲上, 페이쿠미)을 칭했다.
3. 2. 일반 사족
정5품 이하의 사족은 봉토를 갖지 못한 무록사(無錄士)로, 류큐에서는 "분닌(ブンニン)"이라고 불렀다.[2] 이들은 일반 사족에 해당하며, 오품이나 육품으로 승진하는 것조차 어려웠고, 사품 이상의 상급 사족이 되는 것은 더욱 힘들었다.일반 사족에는 '''사토노코 가'''(사토노코 가계)와 '''치쿠토노 가'''(치쿠토노 가계)가 있었다. 사토노코 가는 중급, 치쿠토노 가는 하급 사족이었다. 출세 과정은 다음과 같았다.
- 사토노코 가: '''자''' → '''사토노코''' → '''사토누시베친''' → '''페쿠미(親雲上)'''
- 치쿠토노 가: '''자''' → '''치쿠도노''' → '''치쿠돈베친''' → '''페쿠미(親雲上)'''
두 가계는 고정되지 않아, 치쿠토노 가 출신도 공적을 쌓으면 우에카타까지 올라 사토노코 가로 승격될 수 있었다. 반대로 사토노코 가도 공적이 없으면 치쿠토노 가로 강등되었다.
푸다이(譜代)는 오래된 사족 가문, 신참(新參)은 새로 사족이 된 가문을 뜻한다. 1689년 가계 편찬 때 쇼네이왕 대 이전부터 벼슬한 가문은 푸다이, 이후 벼슬했거나 천계·숭정 연간(1621년 - 1640년)에 자손이 벼슬하지 않은 가문은 신참으로 분류했다.[3]
신참은 소후레(訴後れ), 훈공(勳功), 헌금(獻金)으로도 사족이 될 수 있었다. 소후레는 1690년 가계 급여 시 인정받지 못하고 나중에 신청한 자들(과거 벼슬했던 자나 그 자손, 시골로 내려간 자, 진공선 선원, 근교 간절 지방 관리 등)이다.[4] 훈공은 왕부에 공적이 있던 평민, 헌금은 왕부에 막대한 금전(1600억위안)을 낸 자나 사비로 공공 공사를 한 자들이었다.
3. 2. 1. 사토누시베친 (里之子親雲上, 사토누시 페친)
사토누시 집안의 사람이 정7품으로 승격되면 사토누시베친(里之子親雲上)으로 칭했다. 황관(黃冠)을 쓰고 은비녀(銀簪)를 착용하였다. 지토(地頭)직에 임명되면 페쿠미(親雲上)로 칭했다.[1]3. 2. 2. 치쿠돈베친 (筑登之親雲上, 치쿠둔 페친)
치쿠도노 집안의 사람이 종7품으로 승격되면 치쿠돈베친으로 칭했다. 황관(黃冠)을 쓰고 은비녀(銀簪)를 꽂았다.[1] 지토(地頭)직에 임명되면 베친(페쿠미)으로 칭했다.[1]3. 2. 3. 사토누시 (里主, 사토누시)
총지두 가문이나 와키지두(脇地頭) 가문의 후계자로, 가독을 이었지만 아직 황관 이하의 위계(정종 8·9품)로 낮은 자를 사토누시(里主, 사토누시)라고 불렀다. 예를 들어 오야카타 집안(親方家)과 베친 집안(親雲上家)과 같은 영지를 보유한 명문가를 계승하였지만 당주가 아직 나이가 젊은 경우에는 사토누시(里主)로 불렸다. 사토누시(里主)는 원래 영주를 뜻한다.[1]류큐의 위계 제도는 승진 속도가 연한(年限)에 의해 정해져 있어서, 명문가의 가독을 상속하여도 즉시 특진하는 것은 아니었다. 안지(按司)의 계승자는 첫 위계로 안지를 받았는데, 이것은 예외이다.
3. 2. 4. 사토누시 (里之子, 사토누시)
사토누시 집안의 사람이 팔품으로 승격되면 사토누시로 칭했다. 적관(赤冠)을 쓰고, 은비녀를 착용하였다.[1]3. 2. 5. 치쿠도노 (筑登之, 치쿠둔)
치쿠도노(筑登之)는 치쿠도노 집안의 사람이 9품으로 승격되면 칭하는 칭호였다. 적관(赤冠)을 쓰고, 은비녀(銀簪)를 착용하였다.[1]3. 2. 6. 시 (子, 시)
보대(譜代)의 자제이며, 무위(無位)인 사람을 시(子)로 칭했다. 가타카시라를 하고(원복) 적관(赤冠)을 쓰고 은비녀를 꽂았다.[3]3. 2. 7. 니야 (仁屋, 니야)
신참(新參) 사족의 자제로서 무위(無位)인 사람을 니야라고 칭했다. 녹관(緑冠)을 쓰고 동비녀(銅簪)를 착용하였다. 상급 평민(지방 관리)의 자제로서 무위인 사람도 니야라고 칭했다.[1]4. 평민 (平民)
류큐에서 평민은 하쿠쇼(百姓, 햐쿠쇼)라고 불렸으며, 마치하쿠쇼(町百姓, 마을 백성), 이나가하쿠쇼(田舎百姓, 시골 백성) 등으로 나뉘었다.[6] 이나가하쿠쇼 중 지방 관리로 등용된 필산인(筆算人)은 족보를 가질 수 없는 무계(無系)였다.[6]
4. 1. 하쿠쇼 (百姓, 햐쿠쇼)
류큐에서 일반 평민을 하쿠쇼(百姓)라고 불렀다. 하쿠쇼로 간주된 농(農)은 농민이라는 말이 아니라 사족 이외의 모두를 가리킨다.[6] 슈리・나하・구메무라・도마리무라에 거주하는 자를 마치하쿠쇼(町百姓, 마을 백성)라 하고, 그 이외의 지역은 이나가하쿠쇼(田舎百姓, 시골 백성)라고 불렀다. 이나가하쿠쇼 중에서 지방 관리로 등용될 수 있었던 자를 필산인(筆算人)이라고 불렀다. 지방 관리는 족보 편집이 허용되지 않아 족보를 가지지 않는 '''무계'''(無系)가 되었다.[6] 동비녀(銅簪, 놋쇠 비녀)를 착용하였다.5. 지방 통치 체계
류큐 왕국의 지방 통치는 간절(間切)을 기본 단위로 하는 체계로 이루어졌다. 지방 관리는 지방 역인(地方役人), 필산인(筆算人), 또는 오에카인(親)이라고 불렸다. 지방 역인은 마기리 역인(間切役人)과 촌 역인(村役人)의 두 종류로 나뉘었으며, 오키나와 본섬 및 도서 지역과 랴쿠샤 제도 사이에는 역인 제도에 차이가 있었다.
지방 역인은 평민 신분이었지만, 상급 역인이 되면 "오에카지"(역직에 따라 주어지는 토지)를 받아 왕부에 상납하는 몫 외에는 자신의 소유로 할 수 있었다. 또한, 부지두는 마을 백성을 연 2회 부릴 수 있는 등의 특권이 있었다. 이 때문에 중간 착취나 지위 남용을 하는 악덕 역인도 많았으며, 방언의 웨이키(재산가)는 이러한 현상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쇼코왕은 "사족이나 백성은 생활을 절약하는데, 중간에 있는 지방 역인은 창고를 짓고 착취하고 있다. 다스리기 어려운 세상이다"라고 탄식하는 류카를 남기기도 했다.[5]
5. 1. 지두대 (地頭代, 지투데이)
지두대(지투데이, ジートゥーデー|지투데이ryu)는 간절 행정의 현지 최고 책임자로, 현대의 촌장에 해당한다. 사쓰마 침공 이후에 설치된 직책으로, 『구양』의 쇼네이 23년(1611년) 조항에 "왕이 여러 군의 안지오키(按司掟)를 처분하고, 처음으로 지두대를 세웠다"라고 기록되어 있다.[5] 신분은 백성이었지만, 재직 중에는 나지마(名島)로서 친운상(親雲上)의 칭호를 허락받아 "……친운상"이라고 칭하며 황관을 착용했다.5. 2. 부지두 (夫地頭, 부지투)
부지투(ブジトゥ|부지투ryu)는 지두대의 보좌역이었다. 비상근이며, 임기는 일반적으로 3년이고, 정원은 마지리(間切)에 따라 2~8명이었다.[5]5. 3. 팔리 (捌理, 사바쿠이)
수리 오야코(首里大屋子), 오후우치(大掟), 페우치(南風), 니시우치(西掟)의 4명을 사바쿠리(捌理, 방언으로 사바쿠이)라고 불렀다.[5] 팔리(捌吏), 팔고리(捌庫理)라는 문자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사바쿠(捌く)는 재판하다, 처리하다의 의미를 가진 방언으로, 사무를 처리한다는 의미로 추측된다. 지토다이(地頭代), 혹은 부지토(夫地頭) 밑에 위치하는 지방 관료의 엘리트였다.5. 4. 문자 (文子, 티쿠구)
문자(テークグ|티쿠구ryu)는 간절(間切) 내 하급 관리이다. 계급이나 직종에 따라 대문자, 섬문자, 상부(아이츠케) 문자, 옆문자, 젊은 문자, 견습 문자 등의 호칭이 있었다. 인원은 비교적 많았으며, 예를 들어 니시하라 간절에 66명, 기노완 간절에 63명이 있었다.[5]참조
[1]
서적
琉球王国の構造
吉川弘文館
1987
[2]
서적
沖縄門中大事典
[3]
백과사전
沖縄大百科事典
[4]
백과사전
沖縄大百科事典
[5]
백과사전
沖縄大百科事典
[6]
논문
《근세 류큐 사족층의 혼인에 대해》
http://gamsung.org/h[...]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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