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펏뜨
1. 개요
리펏뜨는 6세기 베트남에서 활동한 인물로, 전 리 왕조의 수립에 기여하고 후리남제로 불렸다. 그는 544년 리분의 부장으로 전 리 왕조 수립에 참여했고, 리천보 사후 부중의 수령이 되어 봉주에 도읍을 정했다. 이후 조광복과의 갈등 끝에 베트남 북부를 통일했으나, 601년 수나라의 공격을 받아 투항, 처형당하면서 전 리 왕조는 멸망했다. 리펏뜨는 베트남 민족의 독립 의식을 고취했으며, 베트남인들은 그를 기리기 위해 사당을 건립했다. 리펏뜨의 출신에 대해서는 중국계 혈통과 타이어족 출신이라는 주장이 존재한다.
| 칭호 | 만춘의 황제 |
|---|---|
| 재위 기간 | 571년–602년 |
| 이전 군주 | 찌에우 비엣 브엉 |
| 후임 | 왕조 붕괴 |
| 배우자 | 알 수 없음 |
| 자녀 | 리 냐 랑 |
| 휘 | 리 펏 뜨 (李佛子) |
| 연호 | 남월 황제 (후)(南越皇帝) |
| 묘호 | 알 수 없음 |
| 왕조 | 전기 리 왕조 |
| 아버지 | 리 남 데 (삼촌) |
| 어머니 | 알 수 없음 |
| 출생일 | 518년경 자오저우, 량 중국 |
| 사망일 | 602년 시안, 수 중국 |
| 묻힌 곳 | 장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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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6년 사망 -
승찬 (승려)
승찬은 선종의 제3조로 추앙받으며, 혜가에게 법을 전수받고 은둔 생활을 하다가 도신에게 법을 전하고 입적했으며, 당나라 현종으로부터 시호를 받았다. -
606년 사망 -
양소 (처도)
양소는 북주 평정, 수나라 개국에 기여하고 황태자 책봉을 도왔으나, 수 양제의 시샘으로 파직되어 사사된 수나라의 1등 공신이다. -
베트남의 군주 -
딘보린
딘보린은 십이사군의 난을 평정하고 대구월을 건국한 정조의 창건자이자 베트남 최초로 연호를 제정하고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한 초대 황제이다. -
베트남의 군주 -
사섭
후한 말 교지를 자치적으로 통치한 사섭은 학문이 뛰어나 지식인을 등용하고 남해 무역으로 세력을 유지했으나 사후 아들의 반란으로 몰락했으며, 오늘날 베트남에서 사왕으로 숭배받고 있다.
2. 생애
전 리 왕조를 세운 리분의 사촌으로, 중국계라는 설과 함께 타이어족 지도자였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리분 휘하의 부장으로 전 리 왕조 건국에 참여했으며, 555년 리천보가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하여 봉주(峯州)에 도읍하고 후리남제(後李南帝)라 칭했다.
이후 경쟁 세력이었던 조광복(Triệu Việt Vương)과 전쟁 및 화약을 거듭하다 571년경 결국 그의 세력을 통합하고 베트남 북부 지역을 통일하여 독립 국가인 반쑤언을 다스렸다. 그러나 601년 수 문제가 침공을 계획하고 이듬해 유방이 이끄는 수나라 군대에 투항하였으며, 수도 대흥성으로 압송되어 참수당함으로써 전 리 왕조는 멸망했다.
베트남인들은 그를 기리기 위해 소아해구(小鴉海口)에 사당을 세웠으며, 후대의 기록인 《오전유령집(粵甸幽靈集)》에서는 영렬인효흠명성무황제(英烈仁孝欽明聖武皇帝)로 추존되었다.
2.1. 초기 생애와 전 리 왕조 건국 참여
리분의 사촌으로 알려져 있으며, 중국계라는 설이 있다. 한편, 역사학자 캐서린 처치맨(Catherine Churchman)은 리펏뜨가 Lĭ(俚)족으로 언급된 점을 들어, 서기 200년부터 700년까지 홍 강 삼각주에 거주했던 타이어족의 지도자였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544년, 리분 휘하의 장수가 되어 전 리 왕조 건국에 참여하였다.
546년, 양나라의 장수 진패선이 리분을 격파하자 리분은 굴료(屈獠)로 달아났다. 리펏뜨는 리천보와 함께 봉기하여 3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구진(Cửu Chân)으로 후퇴하려 하였으나, 도중에 진패선의 추격을 받자 애뢰(哀牢)로 가서 항복하였다.
2.2. 리천보 사후 왕위 계승과 통치
548년, 리분이 사망하자 리천보를 따라 도랑성채(桃郎城寨)에서 나라를 세웠다.
555년, 리천보가 병사하자 그 뒤를 이어 부중(部衆)의 수령이 되었고, 봉주(峯州)에 도읍하였다. 베트남 역사에서는 그를 후리남제(後李南帝)라고 부른다.
557년, 리펏뜨는 군사를 일으켜 다른 봉기군 수령인 조광복(趙光復)을 공격했다. 태평현(太平縣)에서 싸웠으나 승부를 가리지 못하자, 조광복과 화약을 맺고 군신주(君臣州)를 경계로 삼았다. 리펏뜨는 아들 리아랑(李雅郎)을 조광복의 사위로 보냈다.
리 펏 쯔는 찌에우 비엣 브엉(Triệu Việt Vương, 조광복)과 평화 협정을 맺었지만, 베트남 전역을 차지하려는 야망을 가졌다. 571년경, 리펏뜨는 다시 군사를 일으켜 찌에우 비엣 브엉을 공격했고, 그가 다스리던 롱비엔을 점령하고 장악했다. 기습을 당한 찌에우 비엣 브엉은 패배하여 남딘 성의 다이냐 강으로 후퇴하여 자결했으며, 리펏뜨는 마침내 그의 세력을 통합하였다. 이후 리펏뜨는 스스로 후기 리 남 데(後期李南帝)를 칭하고 다음 32년 동안 독립 국가인 반쑤언을 통치했다.
601년, 수 문제가 리펏뜨를 토벌할 계획을 세우자, 리펏뜨는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형의 장남인 리대권(李代權)에게 용편(龍編)을, 장군 리보정(李普鼎)에게 명연성(鳴鳶城)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군사를 거느리고 월왕고성(越王古城)을 지켰다. 수 문제는 좌복야 양소(楊素)의 추천을 받아 과주자사 유방(劉方)을 교주도행군총관으로 삼아 27영의 군사를 이끌고 리펏뜨 정벌에 나섰다. 리펏뜨는 2천여 명을 보내 방어했지만, 수나라 군대는 도륭령(都隆嶺)에서 리펏뜨의 군대를 격파했다. 유방이 사자를 보내 항복을 권하자, 두려움을 느낀 리펏뜨는 군사를 이끌고 투항했다. 유방은 그를 수나라 수도 대흥성으로 압송했고, 리펏뜨는 그의 장령들과 함께 참수당했다. 이로써 전 리 왕조는 멸망했다.
2.3. 조광복과의 갈등과 베트남 북부 통일
557년, 리펏뜨는 군사를 일으켜 또 다른 세력의 지도자인 조광복(趙光復, Triệu Việt Vương)을 공격했다. 태평현(太平縣)에서의 전투는 승패를 가리지 못했고, 이후 두 사람은 군신주(君臣州)를 경계로 삼는 화약을 맺었다. 이 화약의 일환으로 리펏뜨는 자신의 아들 리아랑(李雅郎)을 조광복의 사위로 보냈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리펏뜨는 베트남 전역을 통치하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고, 571년(또는 서기 570년경) 다시 군대를 동원하여 조광복을 공격했다. 리펏뜨의 군대는 조광복의 영토였던 롱비엔(龍編)을 기습하여 점령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패배한 조광복은 남딘 성의 다이냐 강(大鴉江)까지 후퇴했으나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조광복의 세력을 흡수한 리펏뜨는 마침내 베트남 북부 지역을 통일하고, 이후 약 30여 년간 독립 국가인 반쑤언(萬春)을 다스렸다.
3. 수나라와의 전쟁과 최후
601년, 리불자는 방어 태세를 갖추어 형의 장남인 리대권(李代權)에게 용편(롱비엔)을 지키게 하고, 장군 리보정(李普鼎)에게는 명연성(鳴鳶城, Minh Diên)을 맡겼으며, 자신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월왕고성(越王古城, Việt Vương)을 지켰다.
602년,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의 수 문제는 만춘(반쑤언)을 공격하여 베트남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되찾으려 했다. 수 문제는 좌복야 양소(楊素)의 추천을 받아 과주자사(瓜州刺史) 유방(劉方)을 교주도행군총관(交州道行軍總管)으로 삼고, 도지시랑(都支侍郎) 경덕량(敬德亮)을 장사(長史)로 임명하여 27영(營)의 군사를 이끌고 리불자를 공격하게 했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수나라 군대는 12만 명에 달했다고도 한다.
리불자는 2천여 명의 군사를 보내 방어에 나섰으나, 수나라의 영주(營主) 송찬(宋纂), 하귀(何貴), 엄원(嚴願) 등이 이끄는 부대가 도륭령(都隆嶺)에서 리불자의 군대를 격파했다. 리불자는 자신의 군대가 수나라 대군과 맞서기 어렵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내부적으로도 수나라와의 충돌을 피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었다. 유방이 사자를 보내 항복을 권유하자, 리불자는 지역의 안정을 위해 군사를 이끌고 투항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유방은 항복한 리불자를 수나라의 수도인 대흥성(장안)으로 압송했고, 결국 리불자는 그의 장수들과 함께 참수당했다. 이로써 전 리 왕조는 멸망하게 되었다.
4. 평가 및 영향
베트남인들은 리펏뜨를 기리기 위해 소아해구(小鴉海口)에 사당을 세웠다. 훗날 《월전유령집(粵甸幽靈集)》에서는 그를 영렬인효흠명성무황제(英烈仁孝欽明聖武皇帝)로 칭송했다.
리펏뜨는 리 남 데의 사촌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혈통에 대해서는 중국계라는 주장과 다른 견해가 존재한다. 역사학자 캐서린 처치맨(Catherine Churchman)은 리펏뜨가 사서에서 '리(俚, Lĭltc-Latn)'족으로 언급된 점에 주목한다. 이를 근거로 처치맨은 리펏뜨가 서기 200년에서 700년 사이에 홍 강 삼각주 지역에 거주했던 타이어족 계열 민족의 지도자였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초기 리 왕조는 비록 수나라에 의해 멸망했지만, 60년 이상 이어진 반란과 저항은 베트남 민족에게 독립과 자치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는 베트남 민족의 독립 의식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으며, 훗날 당나라가 쇠퇴했을 때 베트남 민족이 중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중요한 기반을 마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