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나베 아키후사 (166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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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나베 아키후사는 1666년 6월 18일에 태어난 고후번 가신 니시다 기요사다의 아들로, 사루가쿠 스승을 거쳐 도쿠가와 이에노부의 측근이 되었다. 이에노부의 쇼군 취임 후에는 아라이 하쿠세키와 함께 쇼토쿠의 치를 단행하며 막정을 주도했으나, 이에노부 사후 실각하여 에치고국 무라카미번으로 전봉되었다. 1720년 8월 19일, 무라카미에서 사망했으며, 사후 다카사키 5만 석 영주를 거쳐 사바에번의 자작으로 봉해졌다. 그는 성실하고 신의가 두터운 인물로 평가받았으며, 여러 작품에서 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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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다이라 노부요시는 불우한 환경 속에서 마쓰다이라 노부카즈의 양자가 되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조카가 되었으며, 세키가하라 전투와 오사카 전투에 참전하고 여러 성주를 거치며 영내 정비에 힘썼으나 잦은 전봉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사망, 그의 두 아들을 통해 후지이 마쓰다이라 가는 두 갈래로 나뉘었다.
2. 생애
간분 6년 5월 16일 (1666년 6월 18일), 고후번주 도쿠가와 쓰나시게의 가신 니시다 기요사다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아베 다다아키의 가신 오가와 지로에몬의 딸이다. 처음에는 사루가쿠 스승 기타 시치다유의 제자였다.
이후 도쿠가와 이에노부를 섬기며 그의 총애를 받아 출세 가도를 달렸으며, 쇼토쿠의 치를 주도하며 막부 정치의 핵심 인물로 활약했다. 그러나 이에노부 사후 정치적 기반을 잃고 실각하여 에치고 무라카미번으로 좌천되었고, 교호 5년 7월 16일(1720년 8월 19일)에 그곳에서 55세(만 54세)로 생을 마감했다.
마나베 가문은 가미노쿠니 다카사키번 5만 석에서 에치고국 무라카미번 5만 석을 거쳐, 에치젠국 사바에번 5만 석에서 메이지 유신을 맞이하여, 화족령에 의해 자작을 수여받았다.
2. 1. 출세
조쿄 원년 (1684년) 쓰나요시(도쿠가와 이에노부의 첫 이름)의 고쇼로 발탁되었다[4]. 아키후사는 "마나베" 씨를 칭했지만, 같은 해에 쓰나요시의 명에 따라 "마나베"로 개명했다. 이후 쓰나요시의 총애를 받아 승진을 거듭하여 겐로쿠 12년(1699년) 고후번 용인이 되었고, 겐로쿠 16년(1703년)에는 봉록 1500표를 받았다.호에이 원년(1704년), 이에노부가 에도성 니시마루에 입성함에 따라 고후 도쿠가와 가신단은 막신으로 편입되었고, 아키후사는 종5위하 에치젠노카미에 서임되었으며, 니시마루 오쿠반가시라(쇼인반가시라 격)가 되었다. 호에이 2년(1705년) 정월, 니시마루 소바요닌이 되어 1500석을 추가로 받아 구라코메를 고쳐 3000석의 지행을 받게 되었다. 호에이 3년(1706년) 정월에는 와카도시요리 격이 되어 사가미국 내에서 1만 석의 다이묘가 되었다. 같은 해 12월에는 종4위하에 서임되어 로주 차석으로 승격했다. 영지는 이후에도 계속 늘어나 호에이 7년(1710년)에는 다카사키 5만 석의 영주가 되었다. 일본 역사상 사루가쿠 스승 출신이 다이묘가 된 것은 아키후사가 유일하다. 또한, 이에쓰구 시대 아키후사를 실질적인 국정 최고 책임자(집정, 수상)로 본다면, 일본 역사상 예능 출신이 이 지위에 오른 유일한 사례이다.
2. 2. 쇼토쿠의 치
도쿠가와 이에노부가 쇼군으로 취임한 후, 아라이 하쿠세키와 함께 쇼토쿠의 치를 단행했다.[4] 아키후사는 이에노부의 소바요닌으로서 큰 권한을 쥐고, 쇼토쿠 시대의 막정을 주도했다. 그러나 아키후사와 하쿠세키의 정치는 쇼군 이에노부에게만 의존하는 불안정한 기반 위에 있었고, 특히 이에노부 사후 어린 도쿠가와 이에쓰구가 쇼군직을 계승하면서 문벌층과 반(反) 고후파 막신들의 반발이 더욱 강해져 정치 개혁이 제대로 진척되지 않았다.[4]2. 3. 실각과 죽음
도쿠가와 이에노부가 사망하고 어린 도쿠가와 이에쓰구가 쇼군직을 계승하면서, 마나베 아키후사와 아라이 하쿠세키의 정치 개혁은 문벌층과 반(反) 고후파 막신들의 반발로 어려움을 겪었다.[4] 교호 원년 (1716년), 이에쓰구가 어린 나이로 사망하고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8대 쇼군으로 취임하자, 아키후사와 하쿠세키는 정치적 기반을 잃고 실각했다.[4] 아키후사는 소바요닌에서 해임되고, 에치고국 무라카미번으로 전봉되었다.교호 5년 7월 16일 (1720년 8월 19일), 아키후사는 더위를 먹고 무라카미에서 향년 55세 (만 54세)로 사망했다.[4] 가독은 친동생이자 양자인 마나베 아키코토가 이었다.
3. 인물 및 평가
마나베 아키후사는 성실하고 신의가 두터운 인물로 여겨졌다. 이에노부를 낮밤으로 곁에서 모셨기 때문에 이에노부의 신뢰를 받았다.[1] 하쿠세키는 아키후사를 "몸이 한가하지 않고" "매우 본성이 아름다워서, 대개 옛 군자의 사람에게도 부끄럽지 않다"라고 평가했다. 또한 하쿠세키가 이에노부 사후 정치에 소극적일 때, 아키후사는 그를 격려하고 능력을 끌어내는 데 힘썼다고 한다.[2]
3. 1. 논란
마나베 아키후사는 성실하고 신의가 두터운 인물로 여겨졌으며, 다른 막신들과 달리 교대 근무를 하지 않고 이에노부(家宣)를 낮밤으로 잠시도 떨어지지 않고 모셨다. 이 때문에 이에노부는 아키후사를 특히 신뢰했다.[1] 아라이 하쿠세키(白石)는 아키후사를 "몸이 한가하지 않고" "매우 본성이 아름다워서, 대개 옛 군자의 사람에게도 부끄럽지 않다"라고 평가했다.[2] 또한, 하쿠세키는 이에노부 사후 정치에 소극적으로 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아키후사는 그런 하쿠세키를 격려하고 능력을 끌어내는 데 진력했다고 한다.[2]《삼왕외기(三王外記)》에 따르면, 이에노부 사후 아키후사가 오오쿠(大奥)에 빈번하게 출입하며 월광원과 밀회를 거듭했고, 오오쿠에서 월광원과 함께 있을 때 아키후사의 편안한 모습에 이에쓰구(家継)가 유모에게 "아키후사는 마치 장군 같다"라고 말했다고 한다.[3] 그러나 막부 공식 사서인 《도쿠가와 실기》에는 이러한 내용이 없다.[3]
4. 관력
5. 가계
6. 등장 작품
참조
[1]
서적
Homosexuality and Civilization
Harvard University
2003
[2]
서적
Sources of Japanese Traditions
Columbia University
[3]
문서
[4]
문서
[5]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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