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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빠꼰 니띠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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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노빠꼰 니띠타다는 1884년 방콕에서 태어난 태국의 법조인이자 정치인으로, 1932년 시암 혁명 이후 초대 총리를 역임했다. 그는 법학을 전공하고 법조계에서 경력을 쌓았으며, 1932년 혁명 이후 인민당과 왕실 세력 사이에서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하며 총리로 지명되었다. 총리 재임 기간 동안 시암의 첫 헌법을 공포했지만, 1933년 경제 계획을 둘러싼 갈등과 쿠데타로 인해 총리직에서 물러났으며, 이후 망명 생활을 하다 1948년 사망했다. 그는 시암의 첫 번째 총리이자 쿠데타로 축출된 첫 번째 총리라는 유산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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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빠꼰 니띠타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마노빠꼰 니띠타다
본명꼰 후따싱
출생1884년 7월 15일
출생지프라나콘 방콕, 시암 (현재 태국 방콕 프라나콘)
사망1948년 10월 1일
사망지말레이시아 페낭
정치 경력
초대 시암 총리1932년 12월 10일 – 1933년 6월 20일
군주쁘라자디뽁
전임직책 신설
본인 (인민위원회 의장)
후임파혼 폰파유하세나
시암 인민위원회 의장1932년 6월 28일 – 1932년 12월 10일
군주쁘라자디뽁
전임직책 신설
후임직책 폐지
본인 (총리)
재무부 장관1932년 12월 10일 – 1933년 6월 20일
총리본인
전임직책 신설
본인 (왕립 재무부 장관)
후임짜오 프라야 스리탐마티벳
왕립 재무부 장관1932년 6월 29일 – 1932년 12월 10일
군주쁘라자디뽁
전임수파욕 카셈 왕자
후임직책 폐지
본인 (재무부 장관)
개인 정보
배우자닛 사나센 (1912년 결혼, 1930년 사별)
츠어이 후따싱하
자녀1명
정당무소속
출신 학교Assamption College
미들 템플 (법조원)

2. 어린 시절과 교육

1903/04년 시암 변호사 그룹. 마노빠꼰 니띠타다(콘 후타싱)는 뒷줄 첫 번째


마노빠꼰 니띠타다의 본명은 '''ก้อน หุตะสิงห์|꼰 후타싱tha'''이다. 그는 1884년 7월 15일 방콕에서 화교 출신인 아버지 푸왓(화드)과 어머니 께오(카에우) 사이에서 태어났다.[5][2]

어린 시절에는 왓 라차부라나 사원에서 공부했으며, 성적이 우수하여 명문 수안쿨랍 학교에서 초등 교육을 받았다. 이후 미션계 학교인 아순션 칼리지에서 수학했다.

법학에 뜻을 두고 법무부 산하의 법학 학교에 입학하여 1903년 졸업했다. 1905년에는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런던의 미들 템플(법학원)에서 공부했다고 알려져 있다. 1908년 졸업 후 법정 변호사 자격(바리스타)을 취득했다고 주장되지만, 미들 템플의 공식 입학 기록에서는 그의 회원 자격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가 없다.[6][3]

3. 법조 경력 및 관직

프라야 마노파꼰 니띠타다의 공식 초상화


꼰 후타싱하(마노빠꼰 니띠타다의 본명)는 법학 교육을 마친 후 법무부에서 경력을 시작했다.[3] 그는 전통적인 관직 단계를 거쳐 마침내 '''프라야'''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마노빠꼰 니띠타다"라는 명예 이름을 얻게 되었다.[3] 1918년에는 와치라웃 국왕(라마 6세)의 추밀원 의원으로 임명되었다.[4]

4. 1932년 시암 혁명과 총리 취임

1932년 혁명 이후 아난타 사마콤 왕좌 홀에서 군중들에게 연설하는 프라야 마노빠꼰 니띠타다


1932년 6월 24일, 파혼폰파유하세나 백작을 중심으로 한 인민당(카나 라차돈)은 입헌 혁명을 일으켜 태국의 절대 왕정을 종식시켰다. 혁명 이후 쁘라자디폭(라마 7세) 국왕은 1932년 6월 27일 임시 헌법에 동의하였다.

전원 임명직으로 구성된 최초의 시암 인민 의회6월 28일 처음 소집되었다. 혁명을 주도한 카나 라차돈은 자신들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혁명을 일으킨 것처럼 보이는 것을 피하고자 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왕실과의 관계가 있고 비교적 중립적이며 청렴한 인물로 평가받던 프라야 마노빠꼰이 혁명 세력과 왕족 세력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할 적임자로 여겨졌다. 그는 인민당원은 아니었지만, 당시 상황에서 총리직을 맡을 만한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다.

결국 인민 의회는 카나 라차돈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인 쁘리디 파놈용의 제안에 따라 마노빠꼰에게 총리의 초기 형태인 "인민 위원회 의장" 직책을 제안했고, 그는 같은 날인 6월 28일 초대 의장으로 지명되어 인민위원회를 구성했다.

프라야 마노빠꼰 내각의 첫 번째 임무는 영구적인 헌법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쁘라자디폭 국왕은 '인민 위원회 의장'이라는 명칭이 공산주의나 공화주의적인 느낌을 준다고 지적했다. 논의 끝에 이 직책은 "총리"로 변경되었다. 프라야 마노빠꼰의 감독 아래 시암의 첫 번째 헌법이 1932년 12월 10일 공포되었으며, 이날은 현재 태국 헌법 기념일로 기념되고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프라야 마노빠꼰은 최초의 입헌 시암 정부의 수장이 되었다. 그의 내각, 즉 인민 위원회는 인민당 출신 인사들과 고위 공무원 및 군 장교들로 구성되었으며, 인선은 인민당의 지침에 따라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프라야 마노빠꼰은 본질적으로 카나 라차돈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고, 국가는 사실상 일당제 국가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5. 총리 재임 시절



1932년 시암 혁명 이후, 라마 7세 국왕은 1932년 6월 27일 임시 헌법에 동의했다. 다음 날인 6월 28일, 전원 임명직 의원으로 구성된 최초의 시암 인민 의회가 소집되었다. 혁명을 주도한 카나 라차돈은 중립적이고 존경받는 인물로 평가받던 프라야 마노빠꼰을 지도자로 추대했다.

의회는 카나 라차돈의 핵심 인물인 쁘리디 파놈용의 제안에 따라 마노빠꼰에게 총리의 전신 격인 "인민 위원회 의장"직을 제안했다. 국왕의 지적에 따라 명칭은 "총리"로 변경되었다. 마노빠꼰 내각은 시암 최초의 헌법을 마련하여 1932년 12월 10일에 공포했으며, 이 날은 현재 태국 헌법 기념일이다.

헌법 공포 후, 마노빠꼰은 최초의 입헌 시암 정부 수반이 되었다. 제1차 마노빠꼰 내각은 인민당 출신 인사들과 고위 공무원, 군 장교들로 구성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인민당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초기에는 반(反)입헌 혁명 세력으로 지목된 나콘사완 친왕을 국외로 추방하는 등 혁명 세력의 요구에 부응했다.

그러나 1933년 쁘리디 파놈용이 제출한 급진적인 경제 계획 초안('''황색 표지 보고서''')이 공산주의 논란을 일으키며 정치적 갈등이 심화되었다. 마노빠꼰은 이 기회를 이용해 쁘리디 세력을 견제하고 권력을 강화하고자 했다. 그는 1933년 1월 인민당 해산을 명령하고, 3월에는 정부 관료의 '인민의 회' 가입을 금지하는 등 쁘리디파를 압박했다.

결국 1933년 4월 1일, 마노빠꼰은 국회를 폐쇄하고 헌법의 일부 조항을 정지시키는 이른바 "침묵의 쿠데타"를 단행하여 제2차 마노빠꼰 내각을 구성했다. 쿠데타 직후 반공법을 시행하고 쁘리디 파놈용프랑스로 추방하는 등 반대파 숙청에 나섰다. 이로 인해 정치적 자유는 크게 위축되었다.

하지만 군부와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그의 권력은 오래가지 못했다. 1933년 6월, 군부 실력자 프라야 파홀 폴파유하세나가 주도한 쿠데타로 마노빠꼰 정권은 붕괴되었고, 그는 총리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5. 1. 황색 표지 보고서 사건

1933년, 당시 국무 대신이었던 쁘리디 파놈용은 그의 경제 계획 초안인 황색 표지 보고서를 국왕 라마 7세에게 제출했다. 이 보고서는 국가의 재정 및 경제 문제 해결을 위해 사회주의적 접근을 제안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라마 7세는 이 계획을 공산주의적이라며 강하게 비판했고, 쁘리디를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쁘리디의 보고서가 거부되면서 그의 정치적 입지는 크게 흔들렸고, 이는 인민당과 인민 위원회 내부에 큰 혼란을 가져왔다. 프라야 마노빠꼰은 송수라뎃 반란의 프라야 송수라뎃 등 쁘리디의 계획에 반대하는 인물들을 모아, 인민당 내에서 강력한 지지 기반을 가졌던 쁘리디를 몰아내기 위해 자신의 내각을 해산했다.

이후 프라야 마노빠꼰은 정국 안정을 명분으로 헌법의 일부 조항 효력을 정지시키고, 인민 의회의 추가 회의를 금지했으며 사법부를 폐쇄했다. 이러한 조치로 인해 쁘리디는 결국 프랑스로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프라야 마노빠꼰의 이러한 행보는 "펜으로 쿠데타를 이끌었다"고 평가받으며, 태국 역사에서 "1933년 4월 쿠데타" 또는 "침묵의 쿠데타"(รัฐประหารในประเทศไทย เมษายน พ.ศ. 2476tha)로 기록되었다.

쿠데타 이후 프라야 마노빠꼰은 반공산주의법을 통과시켜 공산주의자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체포할 수 있는 권한을 확보했고, 이를 통해 시암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체포되어 투옥되는 등 탄압이 이루어졌다. 황색 표지 보고서 사건을 거치며 프라야 마노빠꼰의 통치 하에서 정치적 자유는 크게 위축되었고, 많은 좌익 성향의 신문과 출판물이 폐간되는 등 언론 검열이 강화되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에게 총리직을 안겨주었던 인민당 세력이 결국 그의 몰락을 초래하게 된다. 1933년 6월 16일, 군부 실력자이자 인민당의 핵심 인물이었던 프라야 파홀 폴파유하세나가 다른 고위 장교 3명과 함께 "건강상의 이유"를 내세우며 인민 위원회에서 사퇴하면서 그의 정치적 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5. 2. 1933년 4월 쿠데타 (침묵의 쿠데타)

1933년, 당시 국무 대신이었던 쁘리디 파놈용은 국가의 재정 및 경제 문제에 대한 사회주의적 해결책을 담은 경제 계획 초안, 이른바 '''황색 표지 보고서'''를 라마 7세 국왕에게 제출했다. 하지만 라마 7세는 이 보고서를 "공산주의"로 규정하며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이로 인해 쁘리디의 보고서는 거부되었고 그의 정치적 입지가 약화되면서 인민당과 인민 위원회 내부에 심각한 분열과 혼란이 발생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총리 프라야 마노빠꼰은 프라야 송수라뎃 등 쁘리디의 계획에 반대하는 인물들을 규합했다. 그는 인민당 내에서 강력한 지지를 받던 쁘리디를 축출하기 위해 자신의 내각을 해산했다. 이후 정국 안정을 명분으로 1933년 4월, 헌법의 일부 조항 효력을 정지시키고 인민 의회의 추가 회의를 금지했으며 사법부를 폐쇄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쁘리디 파놈용은 결국 프랑스로 망명해야 했다.

마노빠꼰이 무력이 아닌 법적, 행정적 절차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고 정치적 반대파를 제거한 이 사건은 "펜으로 쿠데타를 이끌었다"고 평가받는다. 태국 역사에서는 이를 1933년 4월 쿠데타 또는 침묵의 쿠데타(รัฐประหารในประเทศไทย เมษายน พ.ศ. 2476|tha)라고 부른다. 쿠데타 이후 마노빠꼰은 반공산주의법을 승인하여 공산주의 성향으로 의심되는 인물들을 체포할 권한을 정부에 부여했고, 실제로 시암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황색 표지 사건과 쿠데타 이후, 프라야 마노빠꼰 정부 하에서 정치적 자유는 크게 위축되었다. 그는 신문출판물 폐쇄를 포함한 많은 좌익 활동을 검열하고 탄압했다.

6. 몰락과 망명, 사망

1933년 6월 10일, 마노빠꼰은 프라야 파혼 폰파유하세나를 각료에서 제외했다. 이에 프라야 파혼 폰파유하세나는 다른 군사 지도자들과 함께 혁명단을 조직하여 1933년 6월 20일 쿠데타를 일으켰다. (일설에는 이 쿠데타가 쁠랙 피분송크람이 배후에서 계획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쿠데타로 인해 마노빠꼰은 총리직에서 즉시 해임되었고, 프라야 파혼 폰파유하세나가 두 번째 총리로 취임했다. 마노빠꼰은 이후 영국령 말라야(현 말레이시아)의 페낭으로 망명하여 10년을 보냈으며, 귀국하지 못한 채 1948년 페낭에서 6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프라야 마노빠꼰 니띠타다의 기념비, 방콕, 태국의 왓 파툼와나람


프라야 마노빠꼰은 시암(현 태국)의 첫 번째 총리였으나, 동시에 쿠데타로 축출된 첫 총리이기도 했다. 그는 군사 쿠데타로 실각한 마지막 민간인 총리가 아니었으며, 이는 이후 태국 정치의 불안정성을 예고하는 사건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7. 유산



프라야 마노빠꼰은 시암의 첫 번째 총리였으며, 동시에 쿠데타로 인해 자리에서 물러난 첫 번째 총리이기도 하다. 그는 군사 쿠데타로 축출된 마지막 민간인 총리는 아니었다.

그의 유산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한편으로는 1929년 월스트리트 대폭락과 같은 어려운 시기에 정부를 이끌었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권한 범위를 넘어섰으며, 점차 권위주의적인 모습을 보이며 인민당의 세력 강화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1933년 시암 쿠데타 이후 총리직에서 해임된 그는 영국령 말라야의 피낭주로 추방되었고, 1948년 64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서 머물렀다.

한편, 게임 Hearts of Iron 4에서는 그의 초상화가 구현되어 있다.

8. 내각 구성

마노빠꼰 니띠타다는 1932년 시암 혁명 이후 시암(현 태국)의 첫 총리이자 인민 위원회 의장으로서 세 차례에 걸쳐 정부를 이끌었다.

처음에는 혁명 직후인 1932년 6월 28일, 혁명을 주도한 카나 라차돈의 추대로 인민 위원회 의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는 과도기적 성격의 정부였으며, 같은 해 12월 9일까지 존속하며 영구 헌법 제정을 주요 과제로 삼았다.

1932년 12월 10일, 시암의 첫 영구 헌법이 공포되면서 마노빠꼰은 공식적인 초대 총리로서 제1차 내각을 구성했다. 이 내각은 시암 최초의 입헌 정부였으나, 카나 라차돈 내부의 급진파와 보수파 간 갈등, 특히 쁘리디 파놈용의 급진적인 경제 계획을 둘러싼 논란으로 정치적 불안정이 심화되었다. 결국 마노빠꼰은 1933년 4월 1일 국회를 해산하고 헌법 일부 효력을 정지시키는 비상 조치를 단행하며 1차 내각은 막을 내렸다.

이어 1933년 4월 1일 출범한 제2차 마노빠꼰 내각은 더욱 권위주의적인 통치를 시도했다. 반공법을 제정하여 정치적 반대파를 탄압하는 수단으로 활용될 소지를 만들었으며, 카나 라차돈의 핵심 인물이자 진보적 개혁을 추진하던 쁘리디 파놈용을 공산주의자로 규정하고 프랑스로 추방했다. 또한 군부 내 혁명 세력인 프라야 파혼폰파유하세나 등을 견제하려 했으나, 이는 군부의 강력한 반발을 샀다. 결국 1933년 6월 20일, 프라야 파혼폰파유하세나 등이 주도한 쿠데타로 실각하며 그의 정치적 생명은 끝나게 되었다.

8. 1. 인민위원회 (1932년 6월 28일 - 1932년 12월 9일)



1932년 시암 혁명 이후, 쁘라자디폭(라마 7세) 국왕은 1932년 6월 27일 임시 헌법에 동의했다. 전원 임명된 의원으로 구성된 최초의 시암 인민 의회는 6월 28일에 처음 소집되었다. 혁명을 주도한 카나 라차돈은 자신들이 권력을 위해 혁명을 일으킨 것처럼 보이는 것을 피하고자 했고, 비교적 중립적이고 청렴하며 존경받는 인물로 평가받던 프라야 마노빠꼰을 위원회 의장으로 선택했다.

의회는 카나 라차돈의 지도자 중 한 명인 쁘리디 파놈용의 제안에 따라 마노빠꼰에게 총리의 초기 형태인 "인민 위원회 의장" 직책을 제안했다.

프라야 마노빠꼰 내각의 첫 임무는 영구적인 헌법을 만드는 것이었다. 쁘라자디폭 국왕은 "인민 위원회 의장"이라는 명칭이 공산주의나 공화주의적인 느낌을 준다고 지적했다. 논의 끝에 이 직책은 "총리"로 변경되었다. 시암의 첫 번째 헌법은 프라야 마노빠꼰의 감독 아래 1932년 12월 10일에 공포되었으며, 이날은 현재 태국 헌법 기념일로 기념되고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프라야 마노빠꼰은 최초의 입헌 시암 정부 수장이 되었다. 프라야 마노빠꼰 내각, 즉 인민 위원회는 카나 라차돈당 출신과 고위 공무원 및 군 장교들로 구성되었으며, 당의 지침에 따라 임명되었다. 이로 인해 프라야 마노빠꼰은 사실상 카나 라차돈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고, 국가는 일당 체제로 운영되었다.

이 입헌 혁명은 평민 출신 관료와 군인이 왕족 중심의 정부를 무너뜨린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마노빠꼰은 반입헌 혁명 세력으로 간주된 라마 5세의 아들 나콘사완 친왕을 국외로 추방하며 권력을 공고히 했다. 이후 마노빠꼰은 임시 헌장이었던 '''불기 2475년 시암국 통치 헌장'''을 수정하여 12월 9일에 인민위원회를 해산했다. 다음 날인 12월 10일에는 '''불기 2475년 시암 왕국 헌법'''을 공포하고 제1차 마노빠꼰 내각을 출범시켰다.

직책이름
위원장마노빠꼰 니띠타다 백작
위원육군 소장 프리차 촌유트 백작 (완 찰라판)
씨 위싼와차 백작 (티엔리앙 훈타라쿤)
육군 대령 파혼폰파유하세나 백작
육군 대령 손술라데트 백작 (텝 판마센)
육군 대령 릿 아카네 백작 (사라 엠마시리)
프라 므앙 위차푼 백작 (웡 분롱)
육군 중령 프라삿 핏타야윳 자작 (완 츄킨)
육군 소령 피분송크람 남작
해군 소령 씬 송크람차이 남작 (씬 카몬나윈)
뎃 사하콘 남작 (몸루앙 뎃 사니타웡)
투아 라파누크롬
육군 중위 프라윤 파몬몬트리
네프 파혼요틴


8. 2. 제1차 마노빠꼰 내각 (1932년 12월 10일 - 1933년 4월 1일)

1932년 12월 10일, 시암의 첫 번째 헌법이 공포되면서 프라야 마노빠꼰 니띠타다를 총리로 하는 첫 번째 입헌 정부가 출범했다. 이 내각은 1933년 4월 1일까지 유지되었다.

프라야 마노빠꼰 내각, 즉 인민 위원회는 인민당 출신 인사들과 고위 공무원 및 군 장교들로 구성되었다. 인선은 인민당의 의중이 반영된 결과였다. 마노빠꼰 총리는 재무부 장관직을 겸임했다.

제1차 마노빠꼰 내각의 구성원은 다음과 같다.

직책이름
총리마노빠꼰 니띠타다 백작
재무부 장관마노빠꼰 니띠타다 백작
국방부 장관해군 중장 라차완산 백작
외무부 장관씨위산와차 백작
농상부 장관웡사누프라판 후작 (หม่อมราชวงศ์สาทร สนิทวงศ์|몸 라차웡 사탄 사닛웡tha)
종무부 장관탐마삭몬트리 후작 (사난 텝하삿딘)
내무부 장관차센야보디씨보리반 백작 (칫 쏜톤라웡)
법무부 장관텝위툰파훈살라타보디 백작 (분추 와이 와닛쿤)
국무 장관해군 소장 프리차욘유팃 백작
국무 장관육군 대령 프라야 파혼폰파유하세나 백작
국무 장관육군 대령 손스라뎃 백작
국무 장관육군 대령 릿 아카네 백작
국무 장관프라므원위차품 백작
국무 장관육군 중령 프라삿피타야윳 자작
국무 장관프라딧마누탐 남작 (쁘리디 파놈용)
국무 장관해군 소령 신속크람 남작
국무 장관해군 소령 쁠랙 피분송크람 남작
국무 장관뎃 사하콘 남작
국무 장관프라유운 파몬몬트리
국무 장관넵 파혼요틴
국무 장관투와 라파누크롬 남작



내각 출범 이후 정치적 갈등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1933년 1월, 마노빠꼰 총리는 인민당의 해산을 명령했으나, 당내 일부 급진 세력은 이에 반발하여 '인민의 회'를 조직했다. 정부 내 혼란이 가중되자 마노빠꼰은 같은 해 3월 9일, 정부 관료들의 인민의 회 가입을 금지하는 조치를 내렸다. 이 시기 국회는 마노빠꼰파, 프라야 파혼폰파유하세나파, 루앙 프라딧마누탐파 등 여러 파벌로 나뉘어 대립했다.

결정적인 갈등은 3월 19일, 루앙 프라딧마누탐(훗날 쁘리디 파놈용)이 발표한 '국가 경제 계획'에서 비롯되었다. 이 계획은 토지 국유화 등을 포함한 급진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 라마 7세 국왕과 보수 세력으로부터 공산주의적이라는 강한 비판에 직면했다. 정부 내에서도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고, 결국 온건파와 군부의 강력한 반대로 계획은 부결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불안정과 갈등 속에서 마노빠꼰 총리는 3월 29일 후아힌으로 가서 라마 7세에게 국회 정지와 헌법 개정에 대한 재가를 요청했다. 결국 1933년 4월 1일, 마노빠꼰 총리는 국회를 폐쇄하고 헌법의 일부 조항 효력을 정지시키는 비상조치를 단행했다. 이로써 제1차 마노빠꼰 내각은 막을 내리고, 곧이어 제2차 마노빠꼰 내각이 성립되었다.

8. 3. 제2차 마노빠꼰 내각 (1933년 4월 1일 - 1933년 6월 20일)

새 헌법에 내각의 입법권을 포함시킨 마노빠꼰 니띠타다는 내각 구성 직후인 1933년 4월 2일 '공산주의자 관련법'이라는 반공법을 시행했다. 이 법은 정치적 반대 세력을 탄압하는 수단으로 활용될 소지가 있었다. 같은 해 4월 12일, 마노빠꼰 정부는 카나 라차돈의 핵심 인물 중 하나였던 루앙 프라딧마누탐 (쁘리디 파놈용)을 공산주의자로 규정하고 프랑스로 추방했다. 이는 당시 진보적 개혁을 추진하던 세력에 대한 견제였다.

급진파로 여겨지던 쁘리디 파놈용을 제거한 후, 마노빠꼰은 군부 내 유력 인사인 프라야 파혼폰파유하세나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1933년 6월 10일, 마노빠꼰은 프라야 파혼폰파유하세나를 각료에서 제외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군부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프라야 파혼폰파유하세나는 카나 라차돈의 군부 세력을 중심으로 혁명단을 결성하여, 같은 해 6월 20일 마노빠꼰 정부에 대한 쿠데타를 감행했다. 일설에 따르면 이 쿠데타는 마노빠꼰 정권에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던 쁠랙 피분송크람(피분)이 실제 계획한 것이라고도 전해진다. 결국 쿠데타는 성공했고, 마노빠꼰은 총리직에서 사임하게 되었다.

제2차 마노빠꼰 내각의 구성원은 다음과 같다.

직책이름
총리마노빠꼰 니띠타다 백작
재무부 장관마노빠꼰 니띠타다 백작
국방부 장관해군 중좌 라차완상 백작
외무부 장관씨위싼와차 백작
농상부 장관웡사누쁘라판 후작
종교부 장관탐마삭몬뜨리 후작
내무부 장관차이쏭야보디 시보리반 백작
법무부 장관텝위툰파훈살라타보디 백작
국무 장관우돔폰펜사왓 백작
국무 장관해군 소장 프리찬촌윳 백작
국무 장관마나와라차세위 백작
국무 장관육군 대좌 파혼폰파유하세나 백작 (1933년 6월 10일 해임)
국무 장관육군 대좌 손스라뎃 백작
국무 장관육군 대좌 릿아카네 백작
국무 장관육군 중좌 쁘라삿피타야윳 자작
국무 장관육군 중좌 쁠랙 피분송크람 남작
국무 장관육군 중좌 씬송크람 남작
국무 장관해군 소령 수파찰라사이 남작
국무 장관쁘라윤 파몬몬뜨리


참조

[1] 웹사이트 “รักที่จากไปไกล” ของพระยามโนปกรณ์นิติธาดา นายกฯ คนแรกของไทย https://www.silpa-ma[...]
[2] 서적 '51. Phya Manopakarana Nitidhada. He spoke perfect English and was always very friendly to England. Is three parts Chinese. His wife, who was a favourite lady-in-waiting to the ex-Queen, was killed in a motor accident in 1929 when on an official visit to Indo-China.' 1997
[3] 서적 Register of Admissions to the Honourable Society of the Middle Temple 1949
[4] 웹사이트 ความขัดแย้งภายในคณะราษฎรที่มีผลต่อหนังสือพิมพ์ https://pridi.or.th/[...]
[5] 서적 '51. Phya Manopakarana Nitidhada. He spoke perfect English and was always very friendly to England. Is three parts Chinese. His wife, who was a favourite lady-in-waiting to the ex-Queen, was killed in a motor accident in 1929 when on an official visit to Indo-China.' 1997
[6] 서적 Register of Admissions to the Honourable Society of the Middle Temple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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