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래빈
1. 개요
마이클 래빈은 루마니아계 유대인 혈통의 바이올리니스트였다. 7세에 바이올린을 시작하여 이반 갈라미안에게 사사받았으며, 13세에 카네기 홀에서 데뷔했다. 래빈은 런던 로열 앨버트 홀에서도 데뷔했으며, 펠릭스 멘델스존,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 파가니니, 헨리크 비에니아프스키, 차이콥스키 등의 협주곡과 막스 브루흐의 스코틀랜드 환상곡 등을 녹음했다. 그는 벨 칸토 스타일로 연주했으며, 1735년산 "쿠벨리크" 주세페 과르네리를 사용했다. 미국, 유럽, 남아메리카 등에서 투어를 했으며, 1951년에는 텔레비전에 출연하기도 했다. 래빈은 35세에 뉴욕의 아파트에서 넘어져 사망했다.
이미지 준비중입니다.
| 출생 | 1936년 5월 2일 |
|---|---|
| 사망 | 1972년 1월 19일 (향년 35세) |
| 사망 장소 | 뉴욕 |
| 국적 | 미국 |
| 직업 | 바이올린 연주자 |
| 부모 | 아버지: 조지 라빈 (바이올리니스트) 어머니: 잔 라빈 (피아니스트) |
|---|
| 사사 | 야샤 하이페츠 도로시 딜레이 |
|---|
| 활동 시기 | 1950년 - 1972년 |
|---|---|
| 악기 | 바이올린 |
| 장르 | 클래식 음악 |
| 레이블 | EMI |
| 참고 링크 | The Michael Rabin Legacy: Unissued Recordings 1950-56 |
|---|---|
| IMDb | 마이클 라빈 (IMDb) |
| Find a Grave | 마이클 라빈 (Find a Grave) |
-
루마니아계 미국인 -
스탠리 큐브릭
스탠리 큐브릭은 1928년 뉴욕에서 태어나 영화 감독으로 활동하며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시계태엽 오렌지》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연출하고 뛰어난 시각적 연출과 음악 사용으로 영화사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
루마니아계 미국인 -
마크 웨인 클라크
마크 웨인 클라크는 제2차 세계 대전과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이탈리아 주둔 미군 최고사령관, 유엔군 사령관 등을 역임했으며, 몬테 카시노 전투 지휘와 한국 정전 협정 서명에 관여했다. -
1936년 출생 -
달릴라 (무용가)
달릴라는 스페인 출신의 무용가로 발레, 플라멩코, 벨리댄스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했으며, 1950년대 이집트에서 벨리댄서로 공연하고 멕시코와 미국에서 댄스 스튜디오를 운영하다 2001년에 사망했다. -
1936년 출생 -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는 이탈리아의 사업가이자 정치인으로, 세 차례에 걸쳐 총리를 역임했으며, 미디어셋 설립, 포르차 이탈리아 창당, 친미 외교 정책, 탈세 및 성 스캔들 등 여러 법적 문제와 논란에 휘말렸다. -
1972년 사망 -
김두한
김두한은 일제강점기 주먹으로 활동하다 해방 후 정치인으로 변신한 인물로, 김좌진 장군 아들이라는 설이 있지만 논란이 있으며, 반일 활동, 정치 활동, 폭력 사건 등 다양한 행적을 보였고, 그의 삶은 여러 매체에서 재해석되었으나 평가는 엇갈린다. -
1972년 사망 -
J. 에드거 후버
J. 에드거 후버는 1924년부터 1972년까지 미 연방수사국(FBI) 국장으로 재직하며 FBI를 현대적인 수사 기관으로 발전시켰지만, 권력 남용과 정치적 탄압으로 비판받았으며, 사후 FBI 국장 임기가 제한되었다.
2. 생애
마이클 래빈은 루마니아계 유대인 혈통의 미국 바이올리니스트이다.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나 7세에 바이올린을 시작했으며, 이반 갈라미안에게 사사하며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13세인 1950년에 카네기 홀에서 데뷔한 이후 빠르게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미국과 유럽, 남미, 호주 등지에서 활발한 연주 활동을 펼쳤다. 그는 니콜로 파가니니, 펠릭스 멘델스존,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 등의 주요 바이올린 협주곡과 파가니니의 카프리스 등을 녹음하며 풍부한 음색과 뛰어난 기교를 선보였다. 그는 벨 칸토 스타일로 연주했으며, 1735년산 "쿠벨리크" 주세페 과르네리 바이올린을 사용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카네기 홀 리사이틀 중 쓰러진 사건 이후 신경학적 문제로 활동에 어려움을 겪었으며, 1972년 35세의 젊은 나이에 뉴욕 자택에서 넘어져 사망했다.
2.1. 초기 생애 및 교육
마이클 래빈은 루마니아계 유대인 혈통이었다. 그의 어머니 잔은 줄리어드에서 훈련받은 피아니스트였고, 아버지 조지는 뉴욕 필하모닉의 바이올리니스트였다. 그는 7세에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부모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음악적 성장을 이루었다. 야샤 하이페츠에게 레슨을 받은 후, 하이페츠는 그에게 이반 갈라미안에게 배울 것을 조언했다. 갈라미안은 래빈을 "약점이 전혀 없는, 절대적인" 연주자이자 "흠 잡을 데 없는, 타고난 완벽한 바이올리니스트"라고 평가했다. 래빈은 뉴욕과 메도우마운트 음악학교, 줄리어드 학교에서 갈라미안에게 바이올린을 배웠다.
2.2. 연주 경력
마이클 래빈은 1950년 1월, 13세의 나이로 카네기 홀에서 내셔널 오케스트라 협회와 협연하며 데뷔했다. 이때 레옹 바르진의 지휘 아래 앙리 비외탕의 협주곡 5번을 연주했다. 이후 여러 미국 오케스트라와 협연했으며, 1951년 11월 29일에는 15세의 나이로 뉴욕 필하모닉과 함께 카네기 홀 무대에 다시 섰다. 드미트리 미트로풀로스의 지휘로 니콜로 파가니니의 D장조 협주곡을 연주하며 정식 데뷔 무대를 가졌다. 그가 1958년에 녹음한 이 파가니니 협주곡은 풍부한 음색으로 유명하며, 많은 이들에게 이 작품의 가장 인상적인 연주로 평가받는다.
1954년 12월 13일, 18세에는 런던의 로열 앨버트 홀에서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하여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의 D장조 협주곡을 연주하며 영국 데뷔를 했다.
래빈은 미국, 유럽, 남아메리카, 남아프리카, 호주 등 세계 주요 도시를 순회하며 활발한 연주 활동을 펼쳤다. 1951년에는 버라이어티 텔레비전 시리즈 "텍사코 스타 극장"에 출연하기도 했다.
그는 펠릭스 멘델스존,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 파가니니(1번), 헨리크 비에니아프스키(1번, 2번), 차이콥스키의 협주곡을 비롯하여 막스 브루흐의 스코틀랜드 환상곡, 파가니니의 카프리스 전곡 등을 녹음했다. 또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바이올린 독주 소나타 3번 C장조, 외젠 이자이의 바이올린 독주 소나타 3번과 4번, 그리고 할리우드 볼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비르투오소 곡 모음 음반 등도 남겼다.
연주 스타일은 벨 칸토 창법의 영향을 받았으며, 오랫동안 1735년산 "쿠벨리크" 주세페 과르네리 바이올린을 사용했다. 스승 이반 갈라미안은 래빈을 "흠 잡을 데 없는, 타고난 완벽한 바이올리니스트"로 평가했다. 래빈은 타고난 오른손 활 테크닉에 갈라미안을 통해 뤼시앙 카페로부터 이어진 현대적인 활 쓰기(보잉)를 더해 강인하고 화려한 음색을 만들어냈다. 그의 완성된 기교는 1958년 녹음된 파가니니의 24개의 카프리스 전곡 음반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카네기 홀에서 리사이틀 도중 갑자기 균형을 잃고 쓰러지는 일이 있었는데, 이는 이후 그의 활동을 제약하게 된 신경학적 문제의 초기 증상이었다. 래빈은 야샤 하이페츠를 깊이 존경했으며 스스로 그의 후계자가 되기를 원했고, 많은 거장들 역시 그를 하이페츠의 재림으로 여겼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천재로 주목받으며 국제적인 경력을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성장세가 둔화되면서 좌절을 겪었고 주변의 기대만큼 대기만성형 연주자로 성숙하지는 못했다는 평가도 있다.
2.3. 음반
마이클 래빈은 다양한 협주곡과 독주곡을 녹음으로 남겼다. 그의 대표적인 음반으로는 1958년 녹음된 니콜로 파가니니의 24개의 카프리스 전곡이 꼽히며, 이는 그의 완성된 연주 기교를 잘 보여준다.
또한 그는 여러 오케스트라와 협연하여 주요 바이올린 협주곡들을 녹음했다. 특히 1958년에 녹음한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 D장조는 풍부한 음색으로 유명하며, 많은 이들에게 이 작품의 가장 인상적인 녹음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이 외에도 펠릭스 멘델스존,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 헨리크 비에니아프스키,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의 협주곡과 막스 브루흐의 스코틀랜드 환상곡 등을 녹음했다.
독주 작품으로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바이올린 독주를 위한 소나타 3번 C장조와 외젠 이자이의 바이올린 독주 소나타 3번과 4번 등 기교적으로 뛰어난 곡들을 녹음했다. 할리우드 볼 오케스트라와 함께 앨범을 녹음하기도 했다.
주요 녹음 목록은 다음과 같다.
| 구분 | 작곡가 | 작품명 | 비고 |
|---|---|---|---|
| 협주곡 | 펠릭스 멘델스존 | 바이올린 협주곡 | |
|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 | 바이올린 협주곡 | ||
| 니콜로 파가니니 | 바이올린 협주곡 1번 D장조 | 2회 녹음 (1958년 녹음 유명) | |
| 헨리크 비에니아프스키 | 바이올린 협주곡 1번 F#단조 | ||
| 헨리크 비에니아프스키 | 바이올린 협주곡 2번 D단조 | ||
|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 |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 ||
| 기타 협주 작품 | 막스 브루흐 | 스코틀랜드 환상곡 | |
| 독주곡 | 니콜로 파가니니 | 24개의 카프리스 전곡 | 1958년 녹음 (대표 음반) |
|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 바이올린 독주를 위한 소나타 3번 C장조 | ||
| 외젠 이자이 | 바이올린 독주 소나타 3번 | ||
| 외젠 이자이 | 바이올린 독주 소나타 4번 | ||
| 기타 | 할리우드 볼 오케스트라와 협연 | 앨범 녹음 |
2.4. 사용 악기
마이클 래빈은 수년 동안 1735년에 제작된 주세페 과르네리 바이올린 "쿠벨리크"(Kubelik영어)를 사용했다.
2.5. 갑작스러운 죽음
카네기 홀에서 리사이틀을 하던 중 갑자기 균형을 잃고 앞으로 넘어졌다. 이는 이후 그의 연주 경력을 제한하게 된 신경학적 질환의 초기 징후였다. 그는 35세의 나이에 뉴욕 시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넘어져 사망했다.
3. 연주 스타일
하이페츠는 어린 래빈의 연주를 듣고 스승 이반 갈라미안에게 배울 것을 조언했으며, 갈라미안은 래빈을 처음 만났을 때 "약점이 전혀 없다, 절대"라고 평가했다. 특히 1958년에 녹음된 파가니니의 협주곡 1번은 풍부한 음색으로 유명하며 많은 이들에게 이 작품의 가장 인상적인 녹음 중 하나로 꼽힌다.
3.1. 특징
래빈은 벨 칸토 스타일로 연주했으며, 그의 스승 이반 갈라미안은 그를 "흠 잡을 데 없는, 타고난 완벽한 바이올리니스트"라고 평가했다. 갈라미안은 래빈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약점이 전혀 없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의 연주상 특징은 타고난 오른손 활 솜씨와 뤼시앙 카페로부터 계승된 현대적인 보잉 기법의 결합에서 찾을 수 있다. 이를 통해 강렬하면서도 화려한 음색을 구사했으며, 이러한 기교는 1958년 스테레오로 녹음된 파가니니의 24개의 카프리스 전곡 음반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는 연주 활동 기간 동안 주로 1735년에 제작된 '쿠벨리크' 주세페 과르네리 바이올린을 사용했다.
많은 사람들은 래빈의 뛰어난 재능을 하이페츠에 비견하며 그의 재림으로 여기기도 했다. 래빈 역시 하이페츠를 존경하며 그의 뒤를 잇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천재성을 인정받아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성장이 다소 정체되어 주변의 기대만큼 원숙한 대가로 성장하지 못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3.2. 하이페츠와의 비교
래빈은 하이페츠를 숭배했으며, 스스로 그의 후계자가 되기를 원했다. 또한, 래빈의 뛰어난 재능을 인정한 많은 거장들은 그를 하이페츠의 재림으로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천재로 불리며 국제적인 경력을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성장은 점차 둔화되었고 이로 인해 좌절을 겪었다. 결국 주변의 기대와 달리 대기만성형 연주자로 성숙하지는 못했다.
3.3. 한계
하이페츠를 숭배했던 래빈은 스스로 그의 후계자가 되기를 원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뛰어난 재능을 인정한 많은 거장들로부터 '하이페츠의 재림'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천재로 불리며 국제적인 경력을 화려하게 시작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성장세가 둔화되는 모습을 보이며 좌절을 겪었다. 주변의 큰 기대와는 달리,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깊이 있는 연주자로 성숙하는 대기만성형 인물로는 성장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