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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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두한은 일제강점기 종로를 중심으로 활동한 폭력배이자, 대한민국 제1공화국과 제6대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이다. 그는 김좌진의 아들로 알려졌으며, 18세에 종로파 두목이 되어 주먹계의 왕으로 불렸다. 해방 후에는 조선공산당에 잠시 몸담았으나, 반공주의로 전향하여 우익 활동을 펼쳤다. 1954년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이후 자유당, 무소속, 한국독립당 소속으로 활동하며 3선에 도전했으나 실패했다. 1966년 국회 오물 투척 사건으로 의원직을 사퇴하고, 1972년 5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삶은 여러 영화와 드라마로 제작되었으며, 딸 김을동과 외손자 송일국 또한 연예계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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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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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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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김두한 |
로마자 표기 | Gim Du-han |
한자 표기 | 金斗漢 |
호 | 의송 |
한자 호 | 義松 |
로마자 호 | Uisong |
출생일 | 1918년 5월 15일 |
출생지 | 경성부, 경기도, 조선 (현재의 서울특별시) |
사망일 | 1972년 11월 21일 |
사망지 | 서울특별시 |
자녀 | 김을동 |
부모 | 김좌진(아버지), 김계월(생모), 오숙근(적모), 나혜국(계모) |
친척 | 송일국(손자) |
정치 경력 | |
국회의원 | 대한민국 국회 의원 |
임기 시작 | 1965년 11월 10일 |
임기 종료 | 1966년 9월 24일 |
임기 시작1 | 1954년 5월 31일 |
임기 종료1 | 1958년 5월 30일 |
정당 | 무소속 |
기타 소속 정당 | 자유당 (1954년) 진보당 (1956년) 민주사회당 (1956–1960년) 한국독립당 (1965–1966년) 신민당 (1967–1969년, 1969–1972년) |
기타 정보 | |
학력 | 경성교동공립보통학교 2학년 1학기 중퇴 대한민국 중학교 입학자격 검정고시 합격 |
종교 | 불교 |
배우자 | 초배: 이재희 (1924년 출생~1987년 사망, 1971년 재결합) 계배: 김부미 (1917년 출생~1999년 사망, 1962년 이혼) 삼취: 박정인 (1933년 출생~, 1966년 이혼) 사취: 김순옥 (1945년 출생~, 1971년 이혼) |
자녀 | 4남 2녀 (장녀 김을동, 차녀 김영채, 장남 김경민, 차남 김현성, 3남 김주택, 4남 김범상) |
형제자매 | 김석출(이복 누이동생), 김철한(이복 남동생), 김강석(이복 누이동생) |
군 복무 | 6.25 전쟁 당시 경남 부산 민간 종군원 |
웹사이트 | 헌정회 |
2. 생애 초기
김좌진의 아들로 알려진 김두한은 1918년 음력 5월 15일(양력 6월 23일)[5] 종로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일제강점기 하에서 불우한 환경을 겪었다. 원영기 노인의 도움으로 생활하다가 원영기 사후, 18세에 주먹 세계에 발을 들여 우미관을 장악하고 종로 일대에서 활동했다.
2. 1. 출생과 유년
김두한은 김좌진의 서자로 서울 종로에서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다.[22] 7살 되던 해에 외조모와 함께 강원도 속초를 출발하여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서 북간도 목단강역에서 부친 김좌진과 상봉한 적이 있다고 한다.[23] 며칠 후 귀국하였고 그 후 청산리 전투에서 광복군이 큰 승리를 거두었다. 1932년 12월 23일자 중앙일보에는 김좌진의 피살 이후 아들 김두한 등 유가족이 유린당하며 풍전등화 참상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청산리 전투를 빌미로 외조모와 생모가 일본 경찰에 구속되자 7살 때[24] 개성에 있는 외삼촌 집으로 보내졌다.[25] 일제강점기에 불온한 조선인으로 감시받는 한편, 가정 환경도 좋지 않아 2학년 때 겨동국민학교(현 겨동초등학교)를 중퇴했다.[6] 10살이 되던 해에[26][27] 부친 김좌진이 암살당한 후 외삼촌이 냉대하기 시작하였고, 그래서 독립하고자 가출하여 홀로 서울로 왔다.[28]
처음에는 거지들과 함께 수표교 아래에서 살았다.[29] 그러다가 13살 경부터 파고다 공원 근처에서 설렁탕집을 운영하는 원영기라는 노인의 도움을 받으며 생활하게 되었다.[30] 형평운동을 했었던 원영기는 "왜놈의 공부는 할 필요가 없다. 곧 우리나라가 독립하게 되니 그때 공부하라."고 하였고 그의 뜻에 따라 학교는 다니지 않고 운동에만 전념했다.[31][32][33]
2. 2. 청년 시절
1935년 나이 18세에 우미관을 장악하였다.[34] 또한 개인적으로 1930년 후반 배우 김승호를 동양극장 극단에 소개하고 곤경에 처한 권투선수 정복수를 도와주었고, 종각의 술집에서 일본 헌병 장교들을 때려눕혀 목숨의 위협을 받았던 레슬링 선수 황병관을 구해주기도 했다.[35]태평양 전쟁 이후 1942년 조선총독부로부터 김두한에게 강제로 징용이 요구되었는데, 이때 그는 조선 총독부와 협상하여 경성특별지원청년단(반도의용정신대)이라는 청년단체를 조직하였고 단장으로 재직, 징용 대체 근로활동을 하였다. 1944년 반도의용정신대를 이끌던 시절, 앞쪽 맨 왼쪽이 김두한이다. 1944년 이재희와 혼인하였다.[32]
18세에 조선 전역에 약 3만 명의 구성원을 거느린 폭력배 종로파 두목이 되었다.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서울 번화가 종로를 중심으로 조선의 주먹계의 왕[3]이 되었다.
일반 시민에게 악행을 저지르는 불량 폭력배나 조직폭력배와는 달리, 김좌진의 아들임을 자랑으로 여기며 강한 반일 태도로 일본군 무기고를 폭파시켰다. 일본계 폭력배와 항쟁을 벌이며 조선 상인을 보호하는 의협심 넘치는 인물로 활동했다고 알려진다.[7]
후의 자유당 정권 하에서 정치 폭력배 두목으로 급성장한 이정재는 김두한이 조직한 종로파의 하위 단체 준구성원 출신이다.
전쟁 중 만주와 조선반도 북부에서 우세를 자랑했던 조선반도 북부 폭력배 두목 시라소니 이성순과는 사적으로 의형제를 맺었다.
1944년, 전주 이씨 이재희와 결혼했다. 1945년 9월 5일, 후에 국회의원이 되는 김을동이 태어났다.
3. 해방 정국 활동
김두한은 대한민청의 실질적 지도자이자 우익의 선봉장으로서 반탁운동 등에 활약하였으며, 청년단체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훗날 반민특위의 체포 대상이었던 박흥식 등 친일파 자본가들의 집을 습격하기도 했다. 김두한은 회고록에서 1원도 사사로운 곳에 쓰지 않았다는 근거로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자신의 집을 저당잡히고 이승만의 친필 휘호를 보여주며 영수증을 썼다고 밝혔다.
3. 1. 광복 직후
1945년 해방 이후 김두한은 건국준비위원회 등에 참여하여 용산의 일본군 무기고를 무력으로 점령하여 활약하였다고 하나, 이 시기 김두한의 활동에 대해서는 확실히 검증되는 것은 없다. 하지만 곧 미군정기로 인해 건국준비위원회 등 단체들이 해체되자 김두한은 죽마고우인 친구 정진룡의 부탁으로 함께 조선공산당 산하 조직인 조선청년전위대에 가입하였다. 김두한은 노변야화 라디오 방송에서, 김일성도 자신을 눈여겨 보았으며, 인민군 남조선 사령관 (소장)으로 임명하겠다는 제의도 있었다고 회고하였다.하지만 얼마 안가서 김두한은 조선청년전위대를 탈퇴하였는데, 그의 전향 원인은 지금도 명확하게 밝혀지진 않았다. 김두한 본인은 부친의 동지였던 이규갑, 윤치성, 유진산, 염동진, 박용직이 부친 김좌진의 죽음에 대해 알게 되어 탈퇴를 하였다고 밝혔는데, 사실관계에 틀린 점이 많아 현재의 역사학계에서는 인정하지 않는다. 부친의 동료였던 이범석, 신익희 등 우익 인사들의 지속적인 설득과 본인에게도 우익에서 활동하는 것이 배경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더 좋은 환경이라는 판단 하에 자발적으로 전향하였다는 설이 우세하며, 전향 후 염동진이 조직한 백의사에서 비공식으로 활동하였다.[36][37]
1946년 김구, 이승만, 김규식 명예회장, 유진산 회장, 그리고 김두한을 감찰부장 겸 별동대 대장으로 하고 참모총대장에 문영철 등을 조직하여 대한민청(전국 2만 3천여 명의 부하를 둔, 일제 때부터 만들어진 조직)이 조직되었다. 김두한은 대한민청의 실질적 지도자로서 반탁운동 등 좌우대립에서 우익의 선봉장 역할을 하면서 산정호수 김일성 별장습격, 박헌영 납치미수, 국군준비대 습격, 학병동맹 습격, 전평 본부습격, 심영·신불출 습격, 과거 친일사업가들의 거금 압수, 9월 총파업 등에 활약하였고,[38] 김원봉 습격, 좌우합작 방해 (여운형 협박 벼랑에서 낙하사건, 김규식 협박) 등에도 관여하였다고 뒷날 회고록에서 밝혔다. 좌우합작 방해 이후 경교장에서 김구의 격려와 충고 이후에는 임시정부계열 인물들과 대립이 없었다고 한다.[39] 남로당 총책이었던 박갑동에 의하면 미군정과 경찰에 잡히면 안심했고 별동대에 잡히면 죽는다며 공포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당시 별동대의 활동반경은 북으로는 연천군, 남으로는 화성, 수원, 용인에 이르렀을 정도로 전 경기도를 통틀었다고 한다.
3. 2. 체포와 석방
1947년 대한민청에서 조선공산당 소속 전위대장 정진룡을 살해한 사건이 계기가 되어 미군정은 김두한에게 포고령 위반 및 살인죄로 체포하여 사형을 선고하였다.[40] 3심 판관이 사퇴를 제출하는 등 재판 과정에서도 좌우 양측의 대립이 극심하였다. 1948년 3월 21일 김구는 "근일에 김두한 군의 사건을 보아도 우리가 얻는 바 교훈이 많다. 김 군이 자기 범행에 대해서 법적 제재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으나, 그 범행이 애국적 동기에서 나왔다고 간주할 수 있으며, 또 그가 위대한 애국자 김좌진 장군의 영사(令嗣)라는 점에서 보면, 그에 대한 구명 운동이 그토록 열렬하지 못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말하였다.[40] 1948년 3월 24일 지청천, 이범석 등이 존 하지에게 진정하는 등 그의 구명 운동을 벌였다.[41]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김두한은 이승만 등의 배려로 사형을 면하고 석방되었다.
4. 정치 활동
김두한은 1948년 대한민국 제1공화국 출범으로 석방된 후, 대한청년단 등에서 활동하며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종로구 을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자유당에 입당했으나 이승만, 이기붕과는 정치 노선을 달리했으며, 사사오입 개헌에 반대하여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활동하였다.
1956년에는 진보당추진위원회에 참여했다가 탈퇴하고 노농당으로 옮겼다. 이승만 정부를 비판하며 이정재에게 협박을 받기도 했고, 1956년 7월 27일 야당 국회의원들이 거리 시위를 한 7.27 데모사건에 참여하고 이기붕 의장 사직권고결의안을 제출하기도 했다. 이승만을 비판하여 1956년 10월 5일 국가원수모독죄로 징계를 받기도 했다.
4.19 혁명 이후 장면의 총리 인준에 반대하였으며, 5·16 군사정변 이후에는 김좌진 장군의 아들로서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을 받았다. 1965년 한일협정 체결에 반대하여 보궐선거에서 한국독립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나, 1966년 한국독립당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가 석방되었다. 1966년에는 국회 오물 투척 사건을 일으켜 국회의원직을 사퇴했다.
4. 1. 제1공화국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제1공화국 출범으로 김두한은 석방되었다. 그는 대한청년단 감찰국장 겸 건설국장을 역임하고, 노동운동가로도 활동하며 우익 활동을 계속했다. 이승만 정부에 의해 암살 대상으로 지목되기도 했고, 1949년 6월 17일에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투옥되기도 했다.[42][43]한국 전쟁 발발 후, 김두한은 과거 별동대원으로 추정되는 인물들의 도움으로 한강을 건너[43][44][45] 인민군과 전투를 벌이며[46] 부산으로 피난했다. 그는 피난 중이던 고위층과 유력 인사들의 행태에 실망하여 그들을 응징했다고 회고했다. 또한 노동자 인권 증진에도 관심을 보였다. 노변야화 라디오 증언에 따르면, 이승만은 김두한에게 내무부장관직을 제의했으나 김두한은 거절했다. 이승만은 학도병을 이끌고 낙동강 전투에서 활약한 김두한에게 국민방위군 사령관(육군 준장)을 제의했지만, 김두한은 군 경력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전쟁 중 카바레 영업에 분노한 김두한은 부산의 카바레들을 폐업시켰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두한은 민주국민당 공천을 거절하고 무소속으로 종로 을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종로 유흥가 여성들의 지지가 당선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당선 축하연에서 김두한은 종로파 해산과 정계 은퇴를 선언했고, 부하들은 반대 없이 따랐다. 당시 종로파는 3만 명 이상의 구성원을 가진 아시아 최대 조직이었다.
김두한의 추천으로 이성순(시라소니)은 신익희, 장면의 경호 책임자가 되었다. 1956년 신익희가 유세 중 사망하자, 김두한은 여러 사건과 실언, 태고종과 조계종 대립 연관, 자유당 경력 등으로 신뢰를 잃고 제4대, 제5대, 제6대 총선에서 모두 낙선했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실각하고,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 조병옥을 지지했지만 윤보선이 대통령이 되면서 공석이 된 종로 보궐선거에서도 낙선했다.
4. 2. 한국 전쟁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김두한은 과거 별동대원으로 추정되는 4명과 함께 극적으로 배를 구해 한강을 건넜다.[43][44][45] 이후 인민군과 전투를 벌이며[46] 남하하여 부산에 도착했는데, 회고록에는 그 당시 부산에 피난해 있던 고위층이나 사회 유력인사들의 행태에 큰 실망을 느껴 그들을 응징했다고 적혀있다. 그 후 노동자 인권 증진 관련 활동에도 관심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노변야화 라디오 증언에 따르면 이승만이 내무부장관을 제의했으나 본인이 거절했다고 한다. 또한 이승만이 학도병을 이끌고 낙동강 전투에 크게 활약한 김두한을 국민방위군 사령관(육군 준장)으로 제의하며 임명해주겠다고 했으나, 김두한 본인은 사관학교 출신도 아니고 군대 경험이 없다고 해서 거절했다. 또한 전쟁 중에 전선에서 젊은 군인들이 피 흘리며 죽어가고 있는데 신나는 노래를 틀고 남녀가 춤을 추는 카바레는 있을 수 없다며 부산의 모든 카바레의 폭력배들을 구타하고 카바레를 폐업했다.4. 3. 국회의원 활동
김두한은 1954년 5월 20일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종로구 을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자유당이 이승만의 종신 집권을 위해 무소속 의원들을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김두한은 이승만 정부를 비판한 혐의 등으로 구속되었다가 자유당 입당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하지만 김두한은 이승만, 이기붕과는 정치 노선을 달리했으며, 자유당 의원총회에서 장경근에게 주먹을 날리기도 했다.[47]1954년 7월 16일 판잣집 철거에 관한 청원에 참여하였다.[48] 1954년 11월 27일, 이승만 3선 개헌안이 1표 차로 부결되었으나, 자유당은 사사오입 개헌을 강행했다. 김두한은 개헌 반대 투표 후 자유당에서 제명되었고, 이후 무소속으로 활동하였다.[49]
1956년 1월, 진보당추진위원회에 참여했다가 탈퇴하고 노농당으로 옮겼다.[50][51] 이승만 정부를 계속 비판하던 중, 이정재에게 국회 휴게실에서 권총 협박을 받았으나 호통을 쳐서 돌려보냈다고 한다.[52][53]
1956년 7월 27일, 7.27 데모사건에서 경찰들과 몸싸움을 벌였다.[54][55] 이후 김두한 등 야당 의원 15명은 이기붕 의장 사직권고결의안을 제출하였다.[56] 1956년 10월 5일, 이승만을 민족반역자라고 비판하여 국가원수모독죄로 의원징계처분을 받았다.[58] 1956년 10월 13일, 제1차 여야 민의원 친선 야구대회에 참가하였다.[59]
1957년 5월 25일, 장충단 공원에서 열린 야당 시국강연회에서 경호총책임자를 맡았다.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종로구에서 대처승의 본부를 두고 있던 종교 인사들에게 탄압을 받았고, 자유당 경력, 폭행 사건, 말실수 등으로 신뢰를 잃어 낙선하였다. 이후 제5대 국회 충남 홍성, 6대 국회 종로구에서도 낙선하였다.
4.19 혁명 이후 남산의 이승만 동상을 철거하였다.[63] 1960년 8월 19일, 장면의 총리 인준 표결 전,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장면의 친일 경력을 문제 삼으며 반대하였으나[64][65] 제지당했고, 장면의 총리 인준안은 통과되었다.[66]
4. 4. 제2공화국 시절
1960년 8월 장면이 차기 총리로 유력시되자, 그가 친일파였다는 소문이 다시 퍼졌다. 8월 19일 국회에서 장면의 총리 지명동의안 표결이 있기 전, 김두한은 여의도 국회의사당에 나타나 장면의 친일 경력을 문제 삼았다. 김두한은 장면에게 역사적인 귀한 표를 던져서는 안 된다는 내용과 장면의 창씨개명을 적은 문건을 뿌리고[64][65], 장면을 국무총리로 뽑는다면 의사당을 불살라 버리겠다고 외쳤으나[64][65] 사전 제지당했고, 장면의 총리 인준안은 무난히 통과되었다. 총 유효 득표수 225표 중 찬성 117표, 반대 107표, 기권 1표로 정족수를 채우고 총리에 선출되었다.[66]5·16 군사정변 이후 1962년 3월 1일 독립유공자 건국훈장 수여식에서 김두한은 부친 김좌진을 대신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67]
4. 5. 제3공화국
5·16 군사정변 이후 1962년 3월 1일 김두한은 부친 김좌진을 대신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받았다.[67] 그는 5·16 군사 정변에 대해 관망하는 입장이었으나, 군의 원대 복귀 공약을 믿고 애국단을 조직했다가 곧 해체했다.1965년 한일협정 체결에 반대하여 민중당 의원들이 사퇴한 후, 김두한은 보궐선거에서 한국독립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1966년 한국독립당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가 국회에서 석방 결의안이 통과되어 풀려났다.
1966년 9월 22일에는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 사건과 관련하여 국회에서 국회 오물 투척 사건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김두한은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구속 기소되었으나, 그를 지지하는 여론이 우세하여 신민당에 영입되었다.
4. 5. 1. 한독당 내란음모사건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되자 이에 반대한 민중당 의원 8명이 8월에 의원직을 자진 사퇴하였다. 민중당 서민호 의원의 사퇴로[68] 궐석이 된 용산구 보궐선거가 같은 해 11월 9일에 치러졌는데, 김두한은 한국독립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69][70] 그러나 1966년 1월 8일 국가보안법 위반 및 내란음모 혐의로 구속되었다.[71][72] 중앙정보부는 김두한을 비롯한 한국독립당 당원들이 주도하여 5단계 혁명 계획을 수립하고 사제폭탄을 만들어 교외에서 실험하는 등 정부 전복을 기도하였다고 발표하였다.[73][74]1월 29일 국회에서 김두한 의원 석방 결의안이 통과되어[75] 19일 만인 1월 31일 석방되었다.[76] 불구속 상태에서 수사와 재판이 진행되어 4월 28일에 5년을 구형받았으나 5월 10일에 관련 혐의자 전원 무죄가 선고되었다. 구속되어 있던 19일간 김두한은 건강이 악화될 정도로 많은 고문을 당하였다.[77] 이후 김두한은 서울 용산구에서 이재민이 발생했을 때 서울시장과 만나 봉천동에 터를 마련해서 이주시켰으며 판잣집 철거 문제와 갈등이 발생할 때마다 앞장섰다고 한다.
4. 5. 2. 국회 오물 투척 사건
1966년 9월 22일, 한국 비료 주식회사의 사카린 밀수 사건에 대한 국회 대정부 질문 중, 무소속 김두한은 국회 발언대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이병철이 밀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정부가 범죄를 저지를 만한 환경을 조성했기 때문이며, 민족주의를 파괴하고 재벌과 유착하는 부정한 역사를 되풀이하는 현 정권을 응징하고자 한다. 국민의 재산을 도둑질하고 이를 합리화시키는 당신들은 총리나 내각이 아니고 범죄 피고인에 불과하다. 그러니 우선 너희들이 밀수한 사카린 맛을 봐라." 발언 후 김두한은 국무위원 등에게 미리 준비한 똥물을 투척하였다.[78]이 사건으로 이병철 한국비료 사장(삼성그룹 회장)은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하고 언론 및 학원 사업에서 손을 뗄 것을 선언하였다. 1967년 10월 11일, 이병철 사장은 헌납 교섭을 맡았던 장기영 부총리가 해임되자 개각 1주일 만에 한국비료 주식의 51%를 국가에 헌납했다.
김두한은 이 사건으로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곧바로 구속 기소되었으나, 김두한을 지지하는 여론이 우세하여 제2당인 신민당에 영입되었다. 사카린 밀수 사건은 국회에서 현직 국무총리 등이 연루된 것으로 알려져 격렬한 논의가 벌어졌고, 김두한은 국회의사당에서 정일권 국무총리 등에게 알루미늄 캔에 담긴 배설물을 던지는 국회 오물 투척 사건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여당인 공화당의 국무총리를 비롯한 수뇌부 전원이 내각 총사퇴했고, 김두한은 1966년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이후 고혈압 지병으로 병보석되었다.
5. 말년과 사망
김두한은 말년에 광산 사업과 정릉 관광 사업 등에 손을 댔으나 실패했다.[81] 노동 운동을 하고 대학생들과 교류하는 등 재야 인사로 활동하였다. 1972년 11월 18일(19일) 전화를 받고 외출했다가 청계천 3가 센추럴호텔 객실 302호에서 쓰러진 채 발견되어[82] 서대문 고려병원 응급실로 옮겨졌다. 당시 진찰했던 의사는 1년차 레지던트 손관수 씨로, 환자는 의식불명의 혼수상태였으며 특별한 외상은 없었고 오랜 지병이라는 진단을 내렸다.[83] 중환자실에 입원했으나 상태가 매우 안 좋아 가망성이 없다는 의료진의 판단에 따라 보호자와 상의 후 20일 오전에 퇴원하였다. 11월 21일 오전 9시 5분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무허가 자택에서 향년 55세에 오랜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84] 공교롭게도 그가 죽은 1972년 11월 21일은 박정희 정부가 유신헌법 찬반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압도적인 지지로 유신헌법을 확정한 날이다.
5. 1. 총선 출마와 구속
김두한은 1954년 5월 20일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종로구 을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자유당이 이승만의 종신 집권을 위해 무소속 의원들을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김두한은 이승만 정부를 비판한 혐의(선거법 위반, 부하 김관철 살해 미수)로 구속되었다가 자유당 입당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하지만 김두한은 이승만, 이기붕과는 정치 노선을 달리했으며, 자유당 의원총회에서 장경근에게 주먹을 날리기도 했다.[47]1954년 7월 16일 판잣집 철거에 관한 청원에 참여하였다.[48] 사사오입 개헌 당시 개헌 공고 서명을 거부하고 반대 투표를 했으며, 이후 무소속으로 활동하였다.[49]
1956년 1월 진보당 추진위원회에 참여했다가 부흥주택대지 2중 매매 혐의로 내사받고 탈퇴, 곧 노농당으로 옮겼다.[50][51] 이승만 정부를 계속 비판하는 과정에서 이정재에게 국회 휴게실에서 권총 협박을 받았으나, 김두한은 이정재를 호통쳤다고 한다.[52][53]
1956년 7월 27일 7.27 데모사건에서 경찰들과 몸싸움을 벌였다.[54][55] 이후 김두한 등 야당 의원 15명은 이기붕 의장 사직권고결의안을 제출하였다.[56] 1956년 10월 5일 이승만을 민족반역자라고 비판하여 국가원수모독죄로 의원징계처분을 받았다.[58]
1957년 5월 25일 장충단 공원에서 열린 야당 시국강연회에서 경호총책임자를 맡았다.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종로구에서 대처승의 본부를 두고 있던 종교 인사들에게 탄압을 받고, 자유당 경력, 폭행 사건, 말실수 등으로 대한민국 제4대 국회 종로구에서 노농당 후보, 대한민국 제5대 국회 충남 홍성에서 무소속, 6대 국회 종로구에서 무소속 등 연이어 낙선하였다.
1965년 한일협정 반대로 민중당 의원 8명이 의원직을 자진 사퇴하여, 보궐선거가 치루어졌는데 김두한은 한국독립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69][70] 그러나 1966년 1월 8일 국가보안법 위반 및 내란음모 혐의로 구속되었다.[71][72] 중앙정보부는 김두한을 비롯한 한국독립당 당원들이 정부 전복을 기도하였다고 발표하였다.[73][74]
1월 29일 국회에서 김두한 의원 석방 결의안이 통과되어[75] 19일 만인 1월 31일 석방되었다.[76] 4월 28일에 5년을 구형받았으나 5월 10일에 관련 혐의자 전원 무죄가 선고되었다. 구속 기간 동안 김두한은 건강이 악화될 정도로 고문을 당했다.[77]
국회 오물 투척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다 병보석으로 석방된 김두한은 1967년 6월 8일에 실시된 제7대 총선에 경기도 수원에서 신민당 후보로 출마하였다.[79] 유세 중 북한을 찬양했다는 혐의로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었고 선거에도 낙선하였다. 서대문 형무소 교도관의 증언에 따르면 김두한은 심한 고문을 당했지만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고 한다.[80]
5. 2. 재야 활동과 사망
국회 오물 투척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다 병보석으로 석방된 김두한은 1967년 6월 8일에 실시된 제7대 총선에 경기도 수원에서 신민당 후보로 출마하였다.[79] 유세중 대한민국과 북한의 전깃불 비교 발언이 북한을 찬양했다는 혐의로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었고 선거에도 낙선하였다. 서대문 형무소 교도관 서윤환은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된 그날 저녁 김두한 씨가 비에 젖은 채 감방에 왔는데 손과 발에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온몸이 피멍 투성이였다."고 하며 그 다음 날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심한 고문을 당했지만 돌아와서는 "서 동지, 나 죽을 뻔했어"라며 웃을 뿐 불만은 토로하지 않았다고 말하였다.[80] 이후 석방된 김두한은 박정희 정권의 독재를 지속적으로 비판하였다.[78]말년에는 광산사업과 정릉관광사업등에 손을 댔으나 실패하였다.[81] 아울러 노동운동을 했으며 대학생들과 교류 등 재야인사로 활동하였다. 김두한은 1972년 11월 18일 (19일) 전화를 받고 외출했다가 청계천3가 센추럴호텔 객실 302호에서 쓰러진채 발견되었다.[82] 급히 서대문 고려병원 응급실로 옮겨졌다. 당시 진찰을 했던 의사는 1년차 레지던트 손관수씨로, 환자의 상태는 의식불명의 혼수상태였으며 특별한 외상은 없었고 오랜 지병이라는 진단을 내렸다.[83] 중환자실에 입원은 했으나 상태가 매우 안좋아 가망성이 없다는 의료진의 판단하에 보호자와 상의후 20일 오전에 퇴원하였다. 김두한은 11월 21일 오전 9시 5분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무허가 자택에서 향년 55세에 오랜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84] 공교롭게도 그가 죽은 1972년 11월 21일은 박정희 정부가 유신헌법 찬반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압도적인 지지로 유신헌법을 확정한 날이다.
당시 대부분의 언론에는 김두한의 일대기에 대하여 '협객' 등의 표현을 써가며 긍정적인 논조로 쓰여진 기사들이 게재되었다. 그리고 윤치영, 민관식 등 여야를 가리지 않고 많은 정치계 인사들이 조문하였다. 슬하에는 탤런트 김을동 등 2남 1녀를 두었다.[85] 장례는 조시원이 장례위원장으로 광복장으로 진행되었으며[86][87][88]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신세계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89] 훗날 장녀 김을동을 비롯한 유족들과 지인들 그리고 언론에 의해 김두한의 타살의혹이 제기 되곤 하였다.[90]
5. 3. 장례와 언론 보도
당시 대부분의 언론은 김두한의 일대기에 대하여 '협객' 등의 표현을 써가며 긍정적인 논조로 기사를 게재하였다. 윤치영, 민관식 등 여야를 가리지 않고 많은 정치계 인사들이 조문하였다. 슬하에는 탤런트 김을동 등 2남 1녀를 두었다.[85] 장례는 조시원이 장례위원장으로 광복장으로 진행되었으며[86][87][88]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신세계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89] 훗날 장녀 김을동을 비롯한 유족들과 지인들, 그리고 언론에 의해 김두한의 타살 의혹이 제기되기도 하였다.[90] 아버지 김좌진에게 수여된 1등 국가공로상 연금 전액을 고아원에 기부했던 김두한의 장례식에는 많은 고아들이 참석했다.6. 친자 논란
김두한이 김좌진 장군의 아들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다.[91][92][93][94] 이러한 의혹을 공개적으로 제기한 사람 중 하나는 도올 김용옥이다. 김용옥은 1990년 신동아에 기고한 글에서[95] '김두한은 김좌진의 아들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김두한의 일생을 바탕으로 한 영화와 드라마가 제작, 방영되는 등[96] 대중적인 인지도가 높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출생과 일제강점기 행적은 대부분 검증되지 않았고 심층적인 연구도 부족하다. 이는 김두한이 김구, 이승만, 김일성 등과 같이 한국 근현대사의 핵심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해방 이후 혼란스러웠던 시대적 상황도 제대로 된 연구를 어렵게 만들었다.
하지만 김두한은 1930년 김좌진 사망 이후 유명해져서 동년배 중에서는 자료가 많이 남아있는 편이다. 영화나 드라마에 묘사된 그의 행적은 주로 1963년 출간된 자서전 《피로 물들인 건국 전야》와 동아방송 라디오 프로그램 "노변야화 - 김두한 편"[97][98] 등 김두한 본인의 증언에 근거한다. 김두한의 자서전은 2002년 《김두한 자서전》이라는 제목으로 재출판되었으나, 역사적 사건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어 신뢰성이 떨어진다.
김두한 자서전은 대부분 자신의 인생을 미화한 내용이 많으며, 특히 일제강점기 조직폭력, 해방 이후 극우폭력, 정치인으로서의 삶을 과대 포장한 부분이 많다. 그러나 김두한 자서전이 엉터리라는 이유로 그가 일제강점기 종로의 폭력배였다거나, 해방 이후 정치폭력배였다거나, 국회의원이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마찬가지로, 김두한은 이미 1930년대에 김좌진의 아들로 인정받고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으며, 그가 김좌진의 아들로 인정받은 시기에는 자서전이 존재하지도 않았다. 즉, 자서전의 내용이 틀리다고 해서 그가 김좌진의 아들이 아니라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김두한의 자서전은 그의 말년에 즉흥적인 방식으로 씌여졌기 때문에, 세부적인 내용에서 틀린 부분이 많은 것은 당연하다.
2001년 홍성군에서 발간한 《대한독립군단 총사령관 백야 김좌진 장군 전기》는 김좌진을 주인공으로 한 역사소설이다. 21세기 이후 김두한의 딸인 김을동이 국회의원이 되면서 정치적 반대 세력의 공격 대상이 되었고, 김좌진의 진짜 증손자라는 김장춘 관련 주장이 나오면서 김두한이 가짜라는 주장이 다시 인터넷에 퍼지고 있다. 특히, 《대한독립군단 총사령관 백야 김좌진 장군 전기》 소설을 분석하여 김좌진 부인 관련 묘사에 모순이 많다고 비판하며, 이를 근거로 김두한의 출생이 가짜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역사 소설일 뿐이므로, 소설 내용의 모순이 현실에서 김좌진 가족의 진위 여부를 증명하지는 않는다.
이 책에서 부인 중 이복희는 1910~1920년으로 기록되어 10살에 사망한 것처럼 보이고, 김영숙 여사는 1919~1928년으로 기록되어있다. 하지만 책 내용대로라면 이복희는 1920년 20세에 사망했다고 되어 있으므로 편집 실수이다. 김영숙도 마찬가지로, 작가가 1909~1928년으로 기술하려다 잘못 편집한 것으로 보인다. 이 부분을 가지고 8살, 10살에 출산했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99] 나혜국 여사가 첫 아이를 낳고 9개월 만에 둘째를 낳았다는 내용도 저자의 잘못된 기술이며, 실제로는 두 아이가 3살 차이가 난다고 알려져 있다. 이 책은 홍성군이라는 일개 군에서 군수의 결정으로 만들어진 것이므로 공신력이 있는 서적도 아니다.
그 외에 나혜국 여사와 그 여동생이 일제에 협력했다는 주장은 정설이 아니라 김장춘 관련 인사들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며, 실상은 공식적으로 독립운동가로 인정받는 인물들이다.
7. 평가
김두한은 장면의 친일 경력을 비판하고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등 정치적 활동을 했다. 한국독립당 당원으로 활동하며 정부 전복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으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고문을 당해 건강이 악화되기도 했다. 용산 이재민 문제 해결에 앞장서는 등 서민들을 위한 활동도 했다고 한다.
7. 1. 부정적 평가
1960년 8월 장면이 차기 총리로 유력시되자, 김두한은 장면의 친일파 경력을 문제삼았다. 8월 19일 국회에서 장면의 총리 지명동의안 표결이 있기 전, 김두한은 여의도 국회의사당에 나타나 장면의 창씨개명을 적은 문건을 뿌리고[64][65] 장면을 국무총리로 뽑는다면 의사당을 불살라 버리겠다고 외쳤으나[64][65] 사전 제지당했다. 그러나 장면의 총리 인준안은 무난히 통과되었다.[66]1965년 한일협정 체결에 반대하여 민중당 의원 8명이 사퇴하자, 김두한은 같은 해 11월 9일 보궐선거에서 한국독립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69][70] 그러나 1966년 1월 8일 국가보안법 위반 및 내란음모 혐의로 구속되었다.[71][72] 중앙정보부는 김두한을 비롯한 한국독립당 당원들이 정부 전복을 기도하였다고 발표하였다.[73][74]
1월 29일 국회에서 김두한 의원 석방 결의안이 통과되어[75] 19일만인 1월 31일 석방되었다.[76] 4월 28일에 5년을 구형받았으나 5월 10일에 관련 혐의자 전원 무죄가 선고되었다. 구속되어 있던 19일간 김두한은 건강이 악화될 정도로 많은 고문을 당하였다.[77]
역사학자 한홍구는 김두한에 대해 "우리 역사에서 참으로 악역을 많이 맡았지만, 분명히 그 어딘가 미워할 수 없는 구석이 있다.", "나름대로 자기 입장을 갖기 위해 열심히 살았지만, 그는 주변의 모사들에 의해 이용되는 경우가 많았고, 끝내 자신의 이름보다 장군의 아들이란 아버지의 후광 속에 들어가야만 빛을 발하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라고 평가했다.[105]
8. 기타
- '와싱톤'이라는 예명을 쓰는 협객이 독립운동 혐의로 일제 경찰에게 모진 고문을 당해 형무소에 쓰러져 빈사 상태가 되었다. 이때 김두한은 이 와싱톤을 살리기 위해 돌아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돈을 구해 와서 결국 와싱톤을 병원에 입원시켜 살려냈다. 실존인물 와싱톤은 성이 '정'씨인 것만 밝혀진 상태이다.
9. 학력
10. 약력
- 대한민주청년동맹 감찰부장 및 별동대장
- 전국학생연맹 고문
- 대한학도의용군 참모장
- 대한노동조합총연합회 최고위원
- 대한부흥건설단장
- 국민연합전선 의장
- 불교양로원 부원장
- 대한권투총연맹 이사
- 전국고학생총연맹 위원장[14]
11.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증조할아버지 | 김병호 | |
양증조할아버지 | 김병태 | |
큰할아버지 | 김덕규(1848년~1900년) | |
할아버지 | 김형규(1864년~1892년) | |
할머니 | 한산 이씨 이상희 또는 이중규[107](1863년~1949년) | |
큰아버지 | 김경진(1883년~1963년) | |
고모 | 김옥출 | |
작은아버지 | 김동진(1891년~1938년) | |
아버지 | 김좌진(1889년~1930년) | |
어머니 | 김계월(1904년~1970년대) | |
적어머니 | 오숙근(1887년~1958년) | |
이복 여동생 | 김석출 | |
계모 | 박계숙(박상궁의 딸, 김계월과 동일인물 추정) | |
계모 | 나혜국(1901년~1992년) | |
이복 남동생 | 김철한(1924년~1998년) | |
계모 | 김영숙 | |
이복 여동생 | 김강석 | |
장인 | 이경익 | |
장모 | 청주 한씨 | |
첫째 부인 | 전주 이씨 이재희(1924년~1987년) | 1944년 결혼[32] |
딸 | 김을동(1945년~) | |
외손자 | 송일국(1971년~) | |
외손부 | 정승연(1976년~) | |
외손녀 | 송송이(1973년~) | |
둘째 부인 | 김부미(1917년~1999년) | |
딸 | 김영채 | |
아들 | 김경민(1955년~) | |
아들 | 김현성 | |
셋째 부인 | 김순옥(1945년~) | |
아들 | 김범상 | |
넷째 부인 | 박정인[108](1933년~) | |
아들 | 김주택 | |
기타 | 송대한, 송민국, 송만세 | 조카 |
김두한은 4명의 부인에게서 4남 2녀를 두었으며, 호적상으로는 본처 이재희의 자녀로 입적되었다. 김두한은 대한민국 정치인 김을동의 아버지이자, 대한민국 배우 송일국의 외할아버지이다.
12. 김두한이 등장한 작품
김두한은 여러 작품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했다.
1974년부터 1981년까지 이대근은 《실록 김두한》, 《협객 김두한》, 《김두한 제3부》, 《김두한 제4부》, 《김두한과 서대문 1번지》 등의 영화에서 김두한 역을 맡았다. 1990년대 초에는 박상민이 《장군의 아들》 3부작에서 김두한을 연기했다. 이 영화는 세가 마스터 시스템과 NES로 게임화되기도 하였다.
1970년대에는 김창호가 《풍운아 김두한》, 《소년 김두한》 등의 만화를 그렸다.
12. 1. 드라마
방영 연도 | 작품명 | 방송사 | 배역 |
---|---|---|---|
1981년 | 제1공화국 | MBC | 강인덕 |
1989년 | 제2공화국 | MBC | 강인덕 |
무풍지대 | KBS | 김영인 | |
1993년 | 제3공화국 | MBC | 강인덕 |
1999년 | 왕초 | MBC | 이훈 |
2001년 | 동양극장 | KBS | 장태성 |
2002년 | 야인시대 (소년 시절) | SBS | 곽정욱 |
야인시대 (청년, 중장년 시절) | SBS | 안재모, 김영철[2] | |
2004년 | 명동백작 | EBS | 강인덕 |
영웅시대 (1, 2부) | MBC | 강민서, 김규열 | |
2009년 | 경숙이 경숙아버지 | KBS | 김성태 |
2013년 | SNL 코리아, GTA경성 | tvN | 김민교 |
12. 2. 영화
- 장동휘 - 《팔도 사나이》 (1969년)[109]
- 이대근 - 《실록 김두한》 (1974년), 《협객 김두한》, 《김두한 (제3부)》, 《김두한 (제4부)》 (1975년), 《김두한과 서대문 1번지》 (1981년)
- 이강조 - 《김두한형 시라소니형》 (1981년), 《대명》 (1993년)
- 박상민 - 《장군의 아들》 (1990년), 《장군의 아들 2》 (1991년), 《장군의 아들 3》 (1992년)
- 장군의 아들 3부작은 세가 마스터 시스템과 NES로 게임화되기도 하였다.
12. 3. 소설
- 홍성유의 소설 《인생극장》 (1985년)이 김두한을 소재로 다루고 있다.[110]
- 임권택 감독의 영화 장군의 아들 3부작에서 박상민이 김두한 역을 연기하였다.
- * 장군의 아들 (1990)
- * 장군의 아들 2 (1991)
- * 장군의 아들 3 (1992)
-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안재모[2]와 김영철이 김두한 역을 연기하였다.
- MBC 드라마 이 남자에서 김두한의 손자인 송일국이 출연하였다.
- 1981년~82년 방영된 드라마 제1공화국에서는 강인덕이 김두한 역을 연기하였다.
12. 4. 만화
12. 5. 음반
- 타카피 - 《김두한》 (2002년)[112]
13. 역대 선거 결과
연도 | 선거 종류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순위 | 당락 | 비고 |
---|---|---|---|---|---|---|
1954년 | 총선 | 무소속 | 8,762표 (28.63%) | 1위 | 당선 | 초선 |
1958년 | 총선 | 노농당 | 8,987표 (23.93%) | 2위 | 낙선 | |
1960년 | 총선 | 무소속 | 9,593표 (18.37%) | 2위 | 낙선 | |
1965년 | 11.9 재보선 | 한국독립당 | 12,048표 (28.4%) | 1위 | 당선 | 재선 |
1967년 | 총선 | 신민당 | 21,770표 (44.97%) | 2위 | 낙선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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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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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Lee Dong Wook And Ryu Kyung Soo Have An Hour To Defeat Ahn Jae Mo And Find Kim So Yeon In "Tale Of The Nine-Tailed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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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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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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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노변야화 김두한 편:제1화 부친 김좌진 장군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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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한 자서전 (1) 저자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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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소년시절과 우미관 뒷골목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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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을동 의원 홈페이지 나의가족 김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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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부친 김좌진장군을 만주에서 만나고 온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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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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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映畵館 優美館 없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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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職業倫理 (3)「代價제일」에 무너지는 프로精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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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화 해방후 대한민청 모체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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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방송
1969-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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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명문家를 찾아서)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덕수 이씨家
http://article.joins[...]
조인스
2009-11-16
[38]
뉴스
한강하구 군사사3-한국전쟁기(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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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뉴스
2006-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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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제43화 김구선생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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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방송
1969-12-06
[40]
뉴스
조국 흥망의 관두(關頭)에 임하여 남하한 이북 동포에게 기(奇)함
https://web.archive.[...]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
1948-03-21
[41]
뉴스
金斗漢 감형을 양 李장군이 陳情
자유신문
1948-03-24
[42]
뉴스
金斗漢 大韓靑年團 건설국장,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서울지검에 송청
한성일보
1949-09-10
[43]
뉴스
제67화 백범 김구선생 암살에 관계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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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방송
1949-09-10
[44]
뉴스
6.25를 回想(회상)한다 (5) 三統��(삼통사)는 지금 어디에…
http://dna.naver.com[...]
경향신문
1980-06-27
[45]
뉴스
4) 맥아더 장군의 일선 시찰과 중공군 소속 북한 의용군-김웅수장군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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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뉴스
제68화 6.25도강 피난
1970-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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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김두한의 장경근 구타 사건·개헌열풍
http://dbs.donga.com[...]
동아방송
1970-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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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록
제3대국회 제19회 제25차 국회본회의 11. 판자집철거에관한청원
대한민국 국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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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그때 그일들 <255> 閔寬植(민관식) (3) 四捨五入改憲(사사오입개헌) 運命(운명)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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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76-11-03
[50]
뉴스
한국일보
1956-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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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조봉암과 1950년대(상)(역비한국학연구총서 15)
역사비평사
1999-12-15
[52]
뉴스
(김영삼前대통령 회고록 탈고)"58년 부정총선때 유일한 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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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2000-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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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YS "야인 너무 보고 싶다" 김두한 장남 경민씨 초대 비화 공개
굿데이
2003-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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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제76화 7.27 의원 데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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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방송
1970-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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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그때 그일들 <161> 朴炳培(박병배) (5) 7.27民議員(민의원)데모事件(사건) 失敗(실패)한 강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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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76-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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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역대 국회의장 불신임 결의안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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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2005-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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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실물로 만나는 우리들의 역사
웅진씽크하우스
2005-09-10
[58]
뉴스
歷代國會(역대국회) 議員(의원)징계 事例(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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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74-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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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실물로 만나는 우리들의 역사
웅진씽크빅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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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김두한씨 사진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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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2003-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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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고려대, 5일 개교 105주년 기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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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경제
2010-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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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김두환씨 비서관출신 이찬오씨 기아차고문으로 컴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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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신문
2003-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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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동상 철거와 역사적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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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대한매일
2000-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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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총리의 비극
신동아
198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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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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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43年前(연전)의感激(감격)되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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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62-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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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과 10.26 박정희, 김재규 그리고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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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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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66-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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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金斗漢議員(김두한의원) 구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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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66-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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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국가 보안법 위반, 내란음모 혐의의 김두한 의원 구속에 대해 "김두한 의원 석방하라"는 현수막을 들고 가두행진하는 시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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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14-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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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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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金斗漢議員(김두한의원) 釋放(석방)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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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66-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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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斗漢議員(김두한의원)출감
http://dn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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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한 자서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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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불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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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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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5.16과 10.26 박정희, 김재규 그리고 나
나남
2009-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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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김두한 '별' 성조기 보다 많은 51개
굿데이
2002-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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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김두한 자서전 2
메트로신문사
2003-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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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한 자서전 2
메트로신문사
2003-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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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한 자서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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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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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김두한 자서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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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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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연작 에세이 어머니 탤런트 김을동 조강지처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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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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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故(고) 金斗漢(김두한)씨 葬禮式(장례식) 내일 光復同志葬(광복동지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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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72-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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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金斗漢(김두한)씨 光復會葬(광복회장) 嚴修(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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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노제때 어린이들이 절을 올리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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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한 [金斗漢]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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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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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김을동, 김좌진-김두한 친자 의혹글 삭제 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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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후보들 잇따라 인터넷서 ‘의혹 글’ 지우기
http://www.hani.co.k[...]
[93]
웹사이트
김을동 “난 정말 장군의 손녀”…도올에 분통
http://news.khan.co.[...]
[94]
웹사이트
"내가 장군의 손녀가 아니라고?" 김을동 발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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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신동아
199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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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드라마
장군의 아들, 야인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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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노변야화 -- 김두한 편
http://dbs.donga.com[...]
1963-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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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tube
故 의송 김두한 의원 육성 노변야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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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백야 김좌진 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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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굿피플 101인) 정치·경제·연예·체육·문화계
굿데이
2003-09-17
[101]
뉴스
굿피플 101인 선정과정
굿데이
2003-09-17
[102]
뉴스
굿피플 101인 뽑고보니…
굿데이
2003-09-17
[103]
뉴스
조선 제일의 협객 김두한이오
http://book.donga.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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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16대 의정활동 조순형,김근태 1위
http://www.munhwa.co[...]
문화일보
2003-09-25
[105]
뉴스
황당한, 그러나 미워하기 힘든…
http://h21.hani.co.k[...]
한겨레21
2002-11-14
[106]
뉴스
김두한은 정의파 정치인
https://www.kado.net[...]
[107]
텍스트
[108]
텍스트
[109]
뉴스인용
故허장강, 자기만의 색깔로 기억된 최초의 배우
http://star.mt.co.kr[...]
스타뉴스
2008-08-27
[110]
텍스트
[111]
뉴스인용
제5회 웹애니메이션 페스티벌 최종선정작 발표
http://news.jkn.co.k[...]
재경일보
2009-11-06
[112]
뉴스인용
타카피의 '김두한', 경쾌한 리듬 인기
https://news.naver.c[...]
한국일보
2002-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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