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노 아키라
1. 개요
마키노 아키라는 일본 해군 위생병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중 필리핀 삼보앙가에서 생체실험에 관여했다고 증언한 인물이다. 1922년 오사카에서 태어나 해군에 입대, 1944년 삼보앙가로 파견되어 미군 상륙 후 살아남아 귀국했다. 2006년, 반세기 넘는 침묵 끝에 생체실험 가담 사실을 폭로했으며, 2007년 8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증언은 논란을 일으켰으며, 다른 생존자의 평가와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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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 1929년 12월 24일 |
|---|---|
| 사망 | 2012년 6월 4일 (향년 82세) |
| 직업 | 군인, 의사 |
| 소속 | 일본 제국 육군 |
|---|---|
| 계급 | 군의관 |
| 참전 | 태평양 전쟁 |
| 본명 | 마키노 아키라 (牧野 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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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시아 전구 (제2차 세계 대전) -
버마국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 제국의 지원으로 독립을 선포한 버마국은 바 모를 국가원수로 내세웠으나 실질적인 주권은 일본의 제약 하에 있었으며, 일본 패전과 함께 붕괴 후 현재 미얀마 정부는 연속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
동남아시아 전구 (제2차 세계 대전) -
베트남 제국
베트남 제국은 1945년 일본의 지원을 받아 바오다이 황제가 건국한 국가로, 쩐쫑낌 내각을 구성하여 개혁을 추진했으나 일본의 항복과 베트민의 혁명으로 멸망했다. -
태평양 전쟁 관련자 -
쇼와 천황
쇼와 천황은 메이지 천황의 손자로 태어나 124대 일본 천황으로 즉위하여 사망할 때까지 재위하며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 등 침략 전쟁에 관여했다는 논란이 있으며, 전후에는 상징적인 천황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고 그의 전쟁 책임 문제는 논쟁의 대상이다. -
태평양 전쟁 관련자 -
혼마 마사하루
혼마 마사하루는 일본 제국 육군 군인으로, 필리핀 공략전을 지휘했으나 바탄 죽음의 행진에 대한 책임으로 전범으로 처형되었고, 그의 재판은 지휘자 책임 적용 및 맥아더의 복수심 작용 등의 논란이 있다. -
2007년 사망 -
보리스 옐친
보리스 옐친은 소련 공산당에서 활동하다가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이 되어 소련 해체 후 시장 경제 개혁을 추진했으며, 헌법 위기와 체첸 전쟁을 겪고 1999년 사임 후 2007년 사망했다. -
2007년 사망 -
박승재
박승재는 대한민국의 정치학자이자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제13대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으로,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한양대학교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한양대학교 교수 및 한국정치학회 이사,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했다.
2. 이력
마키노는 종전 후 60년이 지나고 아내가 사망한 2006년에 삼보앙가에서의 종군 중 생체 해부에 관여했다는 체험담을 처음 발표했다. 필리핀에서의 생체 해부를 증언하는 사람은 그 전까지 한 명도 없었다. 마키노의 증언은 일본 언론에 의해 보도되어 일본 국내에서 논쟁을 낳았으며, 교도통신을 통해 BBC, 가디언 등 국외 언론에서도 보도되었다. 그 후, 2006년 12월에는 오사카시 내 병원에 입원했지만, 2007년 5월에 84세로 사망했다.
2.1. 출생과 입대
마키노 아키라는 1922년 오사카부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자 일본 해군에 지원병으로 입대하여 위생병이 되었다. 1944년, 22세의 마키노는 군의관 등 약 20명으로 구성된 부대에 소속되어 1500여 명과 함께 전함 야마토에 탑승, 일본군 점령 하의 필리핀 민다나오섬 서부 삼보앙가로 파견되었다.
2.2. 필리핀 파견
오사카부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마키노 아키라는 지원병으로 일본 해군에 입대했다. 위생병이 된 마키노는 군의관 등 약 20명의 부대에 배속되어, 22세였던 1944년(쇼와 19년)에 다른 1500명 정도와 함께 전함 "야마토"에 편승하여 일본군 점령 하에 있던 필리핀의 민다나오 섬 서부 삼보앙가로 파견되었다. 제33경비대 등의 수비대가 전개되어 있던 삼보앙가에서 마키노의 부대는 적 항공기에 대한 감시를 임무로 했다.
삼보앙가는 마키노 등이 진출한 후에 고립되어 보급이 끊기고 의약품 등 물자가 부족한 상태가 되었다. 또한, 이슬람교 계 소수 민족인 모로족을 중심으로 하는 현지 게릴라의 습격에 시달렸다. 1945년(쇼와 20년) 3월에 미군이 삼보앙가에 상륙하여 일본군 수비대는 패배했다. 삼보앙가 주둔 일본 해군 부대는 미군 상륙 시 4600명이었지만, 종전 시 생존자는 약 400명이었다. 마키노는 살아남아 일본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
2.3. 삼보앙가 전투와 귀국
마키노는 지원병으로 일본 해군에 입대했다. 위생병이 된 마키노는 군의관 등 약 20명의 부대에 배속되어, 22세였던 1944년(쇼와 19년)에 다른 1500명 정도와 함께 전함 "야마토"에 편승하여 일본군 점령 하에 있던 필리핀의 민다나오 섬 서부 삼보앙가로 파견되었다. 삼보앙가에는 일본 해군의 항공 기지가 있었고, 제33경비대 등의 수비대가 전개되어 있었다. 마키노의 부대는 적의 항공기에 대한 감시를 임무로 했다고 한다. 삼보앙가는 마키노 등의 진출 후에 고립되어 보급이 끊기고, 의약품 등 물자가 부족한 상태가 되었다. 또한, 이슬람교 계 소수 민족인 모로족을 중심으로 하는 현지 게릴라의 습격에 시달렸다.
1945년(쇼와 20년) 3월에 미군이 삼보앙가에 상륙하여 일본군 수비대는 패배했다. 삼보앙가 주둔 일본 해군 부대는 미군 상륙 시에 4600명이었지만, 종전 시에 생존해 있던 것은 약 400명이었다. 마키노는 살아남아 일본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
3. 생체실험 가담
마키노 아키라는 1944년 12월부터 1945년 2월 사이에 민다나오 섬 삼보앙가에서 어린이와 여성, 미국의 스파이 혐의로 수감된 필리핀 남성 2명을 포함한 약 30명의 수감자들에게 생체실험을 했다고 증언했다. 실험 대상은 대부분 모로 무슬림이었다. 마키노는 이들에게 신체 절단, 복부 생체 해부 등의 실험을 수행했다.
3.1. 생체실험 배경
마키노 아키라는 지원병으로 일본 해군에 입대하여 위생병이 되었다. 그는 군의관 등 약 20명으로 구성된 부대에 배속되어 22세였던 1944년에 다른 1500명 정도와 함께 전함 야마토에 탑승하여 일본군 점령 하의 필리핀 민다나오 섬 서부 삼보앙가로 파견되었다. 삼보앙가는 마키노 등이 진출한 후 고립되어 보급이 끊기고 의약품 등 물자가 부족한 상태가 되었으며, 이슬람교 계 소수 민족인 모로족을 중심으로 하는 현지 게릴라의 습격에 시달렸다.
1945년 3월, 미군이 삼보앙가에 상륙하여 일본군 수비대는 패배했다. 마키노는 살아남아 일본으로 귀국했다.
마키노는 종전 후 60년이 지나고 아내도 사망한 2006년에 삼보앙가에서의 종군 중 생체 해부에 관여했다는 체험담을 처음 발표했다. 필리핀에서의 생체 해부를 증언하는 사람은 그 전까지 한 명도 없었다. 그의 증언은 일본 언론에 보도되어 논쟁을 낳았으며, 교도통신을 통해 BBC, 가디언 등 국외 언론에도 보도되었다.
마키노의 증언에 따르면, 그의 부대에서는 포로로 잡힌 게릴라를 생체 해부했다. 일부 게릴라는 잡힌 자리에서 참수되었지만, 많은 수가 군의관에게 넘겨져 해부에 동원되었다. 해부의 목적은 마키노 등 위생병에게 수술 교육을 실시하는 것이었고, 포로는 마취를 한 후에 위생병들이 보는 앞에서 해부되었다. 이는 731 부대와 같은 조직적인 연구가 아니라 우발적인 것이었으며, 세균 감염 실험 대상으로 삼거나 실험 데이터를 수집하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필리핀의 다른 해군 부대에 있던 테라시마 요시히코는 자신의 부대에서 포로 해부를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가능성은 있다고 평가했다. 테라시마에 따르면, 일본군 장병이 살아남기 위해 모든 수단을 다했던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현장의 군의관 개인의 판단으로 수술 교육을 위해 생체 해부를 했을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다고 한다.
마키노의 증언이 허위가 아닌가 의심하는 견해도 있으며, 마키노를 비난하는 국수주의 계열의 웹사이트도 있다.
3.2. 생체실험 과정
마키노 아키라의 증언에 따르면, 1944년 12월부터 1945년 2월 사이에 어린이와 여성, 미국의 스파이 혐의로 수감된 필리핀 남성 2명을 포함한 약 30명의 수감자들이 생체실험 대상이 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모로 무슬림이었다. 마키노는 이들에게 신체 절단, 복부 생체 해부 등의 실험을 했다. 교도 통신사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스파이 혐의를 받은 필리핀인 2명을 에테르를 적신 천으로 마취한 후, 수술용 칼로 절개하여 간을 연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자신이 "끔찍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명령 불복종은 곧 죽음이었기 때문에 지시를 거부할 수 없었다고 한다.
마키노 부대에서는 포로가 된 게릴라를 생체 해부했다. 일부 게릴라는 잡힌 자리에서 참수되었지만, 많은 수가 군의관에게 넘겨져 해부에 동원되었다. 해부 목적은 마키노 등 위생병에게 수술 교육을 하는 것이었고, 포로는 마취를 한 후 위생병들이 보는 앞에서 해부되었다. 731 부대와 같은 조직적인 연구가 아니라 우발적인 것이었으며, 세균 감염 실험이나 데이터 수집은 없었다고 한다.
3.3. 당시 심경
마키노는 교도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무서운 일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에 떨었지만,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죽음을 당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지시를 거부할 수 없었다고 진술했다.
4. 양심선언
마키노 아키라는 2006년에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군 위생병으로 복무하며 필리핀 민다나오 섬 삼보앙가에서 포로로 잡힌 모로족 게릴라들을 대상으로 생체 해부에 가담했던 사실을 고백했다. 이는 동남아시아에서 자행된 일본의 생체실험에 참여한 전문가의 증언으로는 최초였다.
이러한 양심선언은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옛 일본군 출신 지인들로부터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마키노는 "우리는 그런 비극을 다시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 비록 한두 사람에게만 이야기하는 것이라도 전쟁의 진실을 말하고 싶습니다."라며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4.1. 침묵과 폭로
마키노 아키라는 반세기 이상 침묵하다가 2006년에 자신이 겪은 모든 것을 공개했다. 그의 증언은 동남아시아에서 일본이 자행한 생체실험에 참여한 전문가의 증언으로는 최초였다. 그는 옛 일본군 출신 지인들로부터 격렬한 반발을 받았지만, "우리는 그런 비극을 다시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 비록 한두 사람에게만 이야기하는 것이라도 전쟁의 진실을 말하고 싶습니다."라며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마키노는 지원병으로 일본 해군에 입대하여 위생병이 되었다. 1944년, 22세의 나이에 군의관 등 약 20명의 부대에 배속되어 야마토에 편승하여 필리핀 민다나오 섬 서부 삼보앙가로 파견되었다.
삼보앙가는 일본 해군 항공 기지가 있었고, 제33경비대 등의 수비대가 있었다. 마키노의 부대는 적 항공기 감시가 임무였으나, 보급이 끊기고 의약품 등 물자가 부족했으며, 모로족 게릴라의 습격에 시달렸다. 1945년 3월 미군 상륙으로 일본군은 패배했고, 마키노는 살아남아 귀국했다.
1945년 종전 후 60년이 지나고 아내도 사망한 2006년에, 마키노는 삼보앙가에서의 종군 중 생체 해부에 관여했다는 체험을 처음 발표했다. 필리핀에서의 생체 해부를 증언하는 사람은 이전까지 한 명도 없었다. 마키노의 증언은 일본 언론에 보도되어 논쟁을 낳았고, 교도통신을 통해 BBC, 가디언 등 국외 언론에도 보도되었다.
마키노는 포로가 된 게릴라를 생체 해부했다고 증언했다. 일부는 잡힌 자리에서 참수되었지만, 많은 수가 군의관에게 넘겨져 위생병 교육을 위한 해부에 동원되었고, 마취 후 해부되었다. 731 부대와 같은 조직적인 연구가 아니라 우발적인 것이었으며, 세균 감염 실험이나 데이터 수집은 없었다고 한다.
필리핀의 다른 해군 부대에 있던 테라시마 요시히코는 포로 해부 경험은 없지만,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현장 군의관의 판단으로 수술 교육을 위해 생체 해부를 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평가했다.
마키노의 증언을 의심하고 비난하는 국수주의 계열 웹사이트도 있다.
4.2. 증언의 파장
마키노는 반세기 이상 침묵하다가 2006년에 자신이 겪은 모든 것을 공개했다. 마키노의 증언은 동남아시아에서 벌어진 일본의 생체실험에 참여한 전문가가 한 최초의 증언이다. 그는 일본군 출신 지인들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았지만, "우리는 그런 비극을 다시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 비록 한두 사람에게만 이야기하는 것이라도 전쟁의 진실을 말하고 싶습니다."라며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마키노의 증언은 일본 언론에 보도되어 논란을 일으켰고, 교도통신을 통해 BBC, 가디언 등 해외 언론에도 보도되었다. 이후 2006년 12월 오사카시 병원에 입원했고, 2007년 5월 84세로 사망했다.
필리핀에서 복무했던 테라시마 요시히코는, 당시 일본군이 생존을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던 상황을 고려하면, 현장 군의관의 판단으로 수술 교육을 위한 생체 해부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고 평가했다.
마키노의 증언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그를 비난하는 국수주의 웹사이트도 존재한다.
4.3. 비판과 소신
2006년, 마키노는 반세기 이상 침묵을 깨고 자신이 겪은 모든 것을 공개했다. 그의 증언은 동남아시아에서 벌어진 일본의 생체실험에 참여한 전문가가 한 최초의 증언이었다. 그는 옛 일본군 출신 지인들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았지만, "우리는 그런 비극을 다시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 비록 한두 사람에게만 이야기하는 것이라도 전쟁의 진실을 말하고 싶습니다."라며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마키노의 증언은 일본 언론에 보도되어 논란을 일으켰고, BBC, 가디언 등 해외 언론에도 보도되었다. 마키노를 비난하는 국수주의 계열 웹사이트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