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당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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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막당중은 1483년 어부의 아들로 태어나 후 레 왕조에서 군인으로 성장하여 권력을 얻었다. 그는 레 소종을 폐위시키고 레 공황을 옹립한 후, 1527년 제위를 찬탈하여 막 왕조를 건국했다. 막당중은 명나라의 책봉을 받기 위해 노력했으나, 찬탈 행위로 인해 비판을 받았다. 막당중은 개혁 정치를 펼쳤지만, 후 레 왕조의 부흥 운동과 남북조 시대를 겪으며 1541년에 사망했다. 그는 전통적인 역사관에서는 부정적으로 평가받았으나, 현대에는 개혁 정치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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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당중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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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막등중 (莫登庸) |
칭호 | 대월의 황제 |
원어 이름 | Mạc Đăng Dung (莫登庸) |
다른 이름 | 안흥왕 (즉위 전) |
출생일 | 1483년 11월 23일 |
사망일 | 1541년 8월 22일 |
묘호 | 태조 (太祖) |
시호 | 인명고황제 (仁明高皇帝) |
능묘 | 안릉 (安陵) |
통치 정보 | |
국가 | 대월 |
왕조 | 막 왕조 |
즉위 | 1527년 6월 15일 |
퇴위 | 1529년 |
선임자 | 레 공황(후 레 왕조) |
후임자 | 막 태종 |
연호 | 명덕 (明德) |
가계 | |
아버지 | 막혁 (莫檄) |
어머니 | 당씨효 (鄧氏孝) |
배우자 | 阮氏玉璇 (Nguyễn Thị Ngọc Toàn) |
왕조 | |
왕가 | 막 왕조 |
2. 생애
막당중(莫登庸, Mạc Đăng Dung)은 1483년 어부의 아들로 태어나[4][8] 후 레 왕조의 군인으로 출세의 길을 걸었다. 그는 위목제와 양익제 시대를 거치며 무장으로서 두각을 나타냈고, 특히 소종 즉위 이후 쩐까오의 난 등 극심한 혼란기에 군사적 영향력을 크게 확대했다.[5][8][9][10][11]
조정 내 권력 다툼과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막강한 군권을 장악한 막당중은 점차 황제조차 능가하는 실권자로 부상했다.[17][19][20][21] 그는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인물들을 제거하고, 1522년에는 자신을 견제하려던 레소종을 탕롱에서 몰아내고 그의 동생 공제를 허수아비 황제로 옹립했다.[22] 이후 저항하던 소종마저 체포하여 1526년 살해하였다.[25]
1527년, 막당중은 마침내 레 공제에게 선양을 강요하여 막 왕조를 건국하고 스스로 황제(민덕제)에 올랐다.[25][26] 그는 레 공황을 비롯한 후 레 왕조의 잔존 세력을 제거하며 권력 기반을 다졌으나, 응우옌낌 등이 라오스에서 레 장종을 옹립하며 시작된 후 레 왕조 부흥 운동이라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40]
즉위 3년 만인 1529년 아들 막등영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태상황으로 물러났으나[33], 여의의 난 진압에 직접 나서는 등 여전히 실권을 행사했다. 한편, 그의 찬탈에 분노한 명나라가 정벌을 준비하자, 막당중은 후 레 왕조 부흥 세력과의 양면전을 피하기 위해 1540년 명나라에 직접 나아가 굴욕적인 항복 의식을 치르고 영토 일부를 할양하는 대가로 안남도통사라는 지위를 인정받았다.[32][34] 이는 그의 정통성에 큰 흠결을 남겼다.
막당중은 병제, 전제 등 여러 개혁을 시도하고 상업 발전을 이끄는 등 치적을 남기기도 했으나[41][28], 그의 왕위 찬탈은 결국 베트남을 북부의 막 왕조와 남부의 후 레 왕조로 분열시키는 남북조 시대를 초래했다. 그는 이러한 혼란 속에서 1541년 5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1. 집안 내력과 초기
막당중(莫登庸, Mạc Đăng Dung)은 1483년 12월 22일(음력 계묘년 11월 23일)[4][8] 현재 하이퐁시 끼엔투이 지역인 응이즈엉현(宜陽縣) 고짜이 마을에서 어부 막힉의 아들로 태어났다.[4] 그는 시인 막딘찌의 후손이자,[8] 명나라가 대월을 지배하던 시기 명나라의 관직을 지낸 막투이의 5대손이다.[2][3] 막투이는 명나라의 베트남 민족 협력자 중 한 명이었다.[2][3] 그러나 막당중이 태어날 무렵에는 가세가 기울어 아버지와 함께 어업에 종사하며 생계를 유지했다.[8]
가난한 환경에서도 막당중은 건장하고 무예가 뛰어났으며, 이를 바탕으로 후 레 왕조의 위목제 때 무과에 급제하여 숙위(宿衛, 황궁을 지키는 병사)가 되었다.[5][8][9][10] 그는 위목제의 신임을 얻어 황제 호위군의 총지휘관까지 올랐다. 위목제가 폐위되고 그의 사촌인 양익제가 즉위한 후, 막당중은 천무위도지휘사(天武衛都指揮使), 무천백(武川伯)에 봉해지며 황실과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했다.[11]
2. 2. 두각을 드러내다
막당중(莫登庸, Mạc Đăng Dung)은 1483년 11월 23일(계묘년) 현재의 하이퐁시 끼엔투이현에 해당하는 응이즈엉현 고짜이 마을에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났다.[4][8] 그의 가문은 쩐 왕조 시기 장원 급제자였던 막정지(莫挺之)의 7세손으로 알려져 있으며,[8] 막정지의 손자인 막투이(Mạc Thuý)는 명나라의 베트남 점령 시기 협력자이기도 했다.[2][3]
어린 시절 가세가 기울어 아버지와 함께 고기잡이를 하며 생계를 유지했던 막당중은 성장하여 레 왕조의 군인이 되었다.[8][9][10] 그는 레 위목(Lê Uy Mục) 황제의 호위무사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군인으로서 경력을 쌓으며 점차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5][8] 위목제와 그의 후계자 레 뜨엉득(Lê Tương Dực)이 연이어 살해되는 등 정치적 혼란이 극심했던 시기는 막당중에게 기회가 되었다. 특히 1516년 어린 레 찌에우똥(Lê Chiêu Tông)이 즉위한 이후, 조정 내 권력 다툼과 쩐까오의 난 등으로 대월이 내전 상태에 빠져들자, 막당중은 여러 군벌들과의 경쟁 속에서 점차 군사적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2. 2. 1. 출세가도
레 왕조의 위목제(Lê Uy Mục) 시기 호위무사로 관직 생활을 시작한 막당중은 군인으로서 경력을 쌓아나갔다.[5][8][9][10] 위목제가 폭정 끝에 반란으로 살해되고 사촌인 양익제(黎襄翼帝)가 즉위하자, 막당중은 무천백(武川伯)에 봉해지며 점차 황실과 가까워졌다.[11]그러나 양익제 역시 폭정을 일삼다가 찐주이산(鄭惟㦃)에게 시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12] 찐주이산은 양익제의 조카 레꽝찌(黎光治)를 황제로 옹립했으나,[35] 곧 찐주이다이(鄭惟岱)가 레꽝찌를 납치하고 그의 형제들을 살해하며 정국은 혼란에 빠졌다.[36][14] 양익제의 죽음에 반발한 응우옌호앙주(阮弘裕)가 탕롱(昇龍, 현 하노이)을 공격하자, 찐주이산은 레소종(黎昭宗)을 새로운 황제로 즉위시켰다.[13]
이러한 황실의 혼란을 틈타, 이전부터 황제를 참칭했던 쩐까오(陳暠)의 세력이 탕롱을 공격해왔다.[15] 소종은 여러 제후들에게 쩐까오 토벌을 명했고, 응우옌호앙주, 쩐쩐(陳真) 등이 쩐까오 세력을 격파하며 반란은 일단락되었다.[16]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응우옌호앙주와 쩐쩐 사이에 권력 다툼이 벌어졌고, 결국 쩐쩐이 승리하여 조정의 전권을 장악했다. 쩐쩐의 세력은 황실을 허수아비로 만들 정도로 강력했으며, 막당중조차 자신의 아들 막당조아인(莫登瀛)을 쩐쩐의 딸과 혼인시킬 정도로 그의 힘을 의식해야 했다.[17]
그러던 중 누군가가 "쩐쩐이 황위를 찬탈하여 명군이 될 것이다"라는 내용의 시를 지었고, 이를 들은 일부 신하들이 소종에게 쩐쩐 제거를 권했다. 결국 소종은 쩐쩐을 궁으로 유인하여 암살했다.[17] 하지만 쩐쩐의 죽음은 그의 잔당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이들은 반란을 일으켜 탕롱을 약탈하는 등 폭주했다. 소종은 가림현(嘉林縣) 보제진(菩提津)으로 피신하여 응우옌호앙주에게 반군 진압을 명했으나, 그는 명을 따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소종은 막당중에게 병권을 맡겼다.[17] 막당중은 소종을 보제진으로 맞이하고 반군을 성공적으로 진압했으며, 반란 주동자 3명을 처형했다. 이후 막당중은 보제진이 남은 쩐씨 세력과 가깝다고 판단하여 소종을 자주(慈州)로 옮기려 했고, 이에 반대하는 어사대 관리들을 살해하며 권력을 강화했다.
한편, 찐뚜이(鄭綏)와 응우옌낀(阮敬)은 레방(黎榜)을 황제로 내세워 조정에 대항하기 시작했다.[37][18] 막당중은 이 반란 진압에 나섰지만 이전처럼 쉽게 제압하지 못했다. 이에 소종은 다시 응우옌호앙주를 불러 막당중과 함께 반군을 상대하게 했다.[18] 그러나 응우옌호앙주가 이끄는 청화병(清化兵)은 참패했고, 소종은 막당중을 더욱 중용할 수밖에 없었다. 막당중은 제영사(诸营事)에 임명되어 완앙(阮盎) 등 반군 토벌을 위한 모든 병마를 지휘하게 되었다.[19] 마침내 1519년, 막당중은 반군에게 승리했고 이 공으로 명군공(明郡公)에 봉해졌다.[20] 패배한 완앙 등 일부 반군 세력은 막당중에게 귀순하면서 그의 세력은 더욱 커져갔다.[20]
1521년, 막당중은 인국공(仁國公)에 봉해지며 황실 군권을 완전히 장악했다.[21] 같은 해 쩐까오의 아들 진승(陳㫒)이 이끄는 반란 잔당을 완전히 소탕했으며,[21] 다음 해에는 여극망(黎克綱)과 여백효(黎伯孝)의 반란마저 진압했다.[22] 연이은 반란 진압 과정에서 막강한 군사력과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한 막당중은 황제조차 함부로 할 수 없는 황실의 최고 실권자로 부상했다.
2. 2. 2. 황위를 넘보다
1521년 인국공(仁國公)에 봉해진 막당중은 황실의 군권을 완전히 장악하였고, 같은 해 진승(陳昇)[38]의 잔당과 이듬해 여극망(黎克纲), 여백효(黎伯孝)의 반란마저 진압하며 황제조차 함부로 할 수 없는 실권자로 부상했다.[21][22]
막당중은 서서히 후 레 왕조의 황위를 찬탈할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다. 그는 소종을 통제하기 위해 자신의 딸을 궁중에 보내 시중들게 하였는데, 이는 사실상 소종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위한 목적이었다.[22] 또한 장남 막당조아인을 제후에 봉하고 금광전(金光殿)을 감독하게 하였다.
권세가 강대해진 막당중은 점차 거만해져, 행차 시 마치 천자와 같은 화려한 수레를 타고 다녔다. 완구(阮構), 염거(覃舉) 등이 막당중의 이러한 행동을 비판하자, 막당중은 그들을 살해하였다. 이에 분개한 소종은 1522년 팜히엔(范獻), 팜트(范恕) 등과 함께 막당중 제거를 계획했으나 실패하고, 결국 홀로 탕롱을 탈출하여 산서(山西)의 찐뚜이 세력에게 의탁했다.[22]
막당중은 즉시 황유악(黃惟岳)을 보내 소종을 추격하게 했으나, 소종은 군대를 보내 저항하며 황유악을 죽였다. 그러자 막당중은 "소종이 간신에게 외지로 납치당했다"고 선포하고, 소종의 동생인 레쑤언을 새로운 황제로 옹립했다.[22] 이후 막당중은 소종을 폐위하여 타양왕(陀陽王)으로 강등시키고, 여러 차례 공제를 압박하여 찐뚜이와 소종을 공격하게 했다. 소종은 처음에는 세력이 컸으나, 간신 판전(范田)의 이간질로 찐뚜이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23][20]
1524년 평장군국중사(平章軍國重事)로 승진하고, 1525년에는 도읍(都邑)에 임명되어 나라의 모든 병권을 장악한 막당중은 마침내 소종을 체포하여 탕롱으로 압송했다.[24] 그리고 다음 해인 1526년, 부하인 배계백(沛溪伯) 범금방(范金榜)에게 명하여 소종을 시해하였다.[25]
이 시기 막당중의 세력은 북부 베트남 지역에 널리 퍼져 있었고, 그는 찬탈 의지를 굳혔다. 이미 1524년 평장으로 임명될 당시, 옛 쩐쩐 세력의 지지를 얻기 위해 그의 아들 진실(陳實)을 홍휴백(弘休伯)에 봉하기도 했다.[24] 1527년, 막당중은 조정을 압박하여 공제로부터 구석(九锡)을 받고 안흥왕(安興王)에 봉해졌다.[25]
막당중은 주 문공이 어린 주 성왕을 보좌한 고사를 칭송하는 시를 지어 자신을 비유했으며, 고제(古齋)에서 탕롱으로 돌아와 모든 신하들이 공제에게 선위를 건의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이때 무예(武睿) 등 후 레 왕조에 충성하는 신하들이 막당중을 모욕하며 불복했으나, 막당중은 이들을 모두 처형하였다.[25][26]
2. 3. 안흥왕(安興王)
1527년, 조정은 막당중의 뜻에 따라 구석(九锡)[39]을 수여하고 그를 안흥왕(安興王)으로 봉했다.[25] 막당중은 이후 주 문공이 어린 주 성왕을 보좌했던 고사를 칭송하는 시를 지어 자신을 이에 비유하며 찬탈의 명분을 쌓아나갔다.[25] 고제(古齋)에서 수도 탕롱으로 돌아온 막당중은 모든 신하들에게 압력을 넣어 레 공제에게 황제의 자리를 자신에게 넘기도록 건의하게 만들었다.[25] 이 과정에서 후 레 왕조에 대한 충성을 지키며 막당중의 찬탈 시도에 반대한 무예(武睿) 등 일부 신하들은 막당중에게 모욕적인 말을 하였으나, 결국 모두 처형당하고 말았다.[25][26]2. 4. 막 왕조 건국
막당중(莫登庸, Mạc Đăng Dung)은 1483년 11월 23일(계묘년) 현재의 하이퐁시 끼엔투이현에 속하는 응이즈엉현 고짜이 마을에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났다.[4] 그의 조상 중에는 명나라에 협력했던 막수이(Mac Thuy)가 있다.[2][3]
막당중은 후 레 왕조의 레 위묵(Lê Uy Mục) 황제 시절 호위무사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군인으로서 경력을 쌓아나갔다.[5] 레 위묵과 그의 후계자 레 뜨엉즉(Lê Tương Dực)이 연이어 암살당하는 등 정치적 혼란이 극심해지자, 막당중은 군부 내에서 점차 권력과 지위를 강화했다.
1516년 어린 레 치우통(Lê Chiêu Tông)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조정 내 권력 투쟁과 쩐까오의 난 등으로 나라는 내전 상태에 빠졌다. 1516년부터 1520년까지 응우옌 황 주(Nguyễn Hoàng Dụ), 찐주이산(Trịnh Duy Sản), 응우옌 킨(Nguyễn Kính), 쩐까오(Trần Cao) 등 여러 군벌이 권력을 다투었다. 막당중은 처음에는 레 치우통 황제에게 충성하는 세력을 이끌고 이들과 싸웠으나, 결국 모든 경쟁자를 물리치고 압도적인 권력을 장악했다.
권력을 손에 쥔 막당중은 1522년, 레 치우통 황제가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려 하자 그를 폐위시키고 동생인 레 공황(Lê Cung Hoàng)을 허수아비 황제로 내세웠다.[22] 레 치우통은 탕화로 피신하여 찐뚜이(鄭綏, Trịnh Tuy) 세력의 지원을 받아 막당중에 맞서 싸웠으나[23][20], 1526년(또는 1525년[24]) 결국 체포되어 살해당했다.[25]
1527년, 막당중은 마침내 레 공황에게 선양(禪讓)을 강요했다. 그는 공황으로부터 구석(九錫)을 받고 안흥왕(安興王)에 봉해졌으며, 신하들은 그를 주공단에 비유하며 찬양했다. 선양 논의 과정에서 후 레 왕조에 대한 충성을 지키며 막당중을 비난했던 신하들은 모두 처형되었다.[25][26] 같은 해, 막당중은 레 공황마저 살해하고 스스로 황제에 올라 막 왕조를 건국했다. 이로써 후 레 왕조는 일시적으로 멸망하였다.
2. 4. 1. 새로운 대월의 황제
1522년 레 치우통(Lê Chiêu Tông) 황제를 폐위시키고 허수아비 황제 레 공황(Lê Cung Hoàng)을 옹립했던 막당중은[22], 1526년에는 탕화로 도망쳐 저항하던 레 치우통마저 체포하여 살해했다.[25] 마침내 1527년, 막당중은 레 공황에게 선양(禪讓)을 강요하는 형식을 취했다. 신하들 사이에서 선양 논의가 일어났고, 이 자리에서 후 레 왕조(後黎朝)에 대한 충성을 지키며 막당중을 비난한 신하들은 모두 처형되었다.[25][26]1527년 4월, 막당중은 공황의 선위를 받아 막 왕조(莫朝)를 건국하고 연호를 '''명덕'''(明德)으로 개원했다. 그는 스스로 '''민덕제'''(Minh Đức)라 칭하며 베트남의 새로운 황제임을 선포했다. 폐위된 레 공황은 공왕(恭王)으로 강봉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막당중의 협박으로 태후 정씨(鄭氏)와 함께 자살해야 했다. 막당중은 북쪽에 남아 있던 다른 레 왕조의 구성원들도 살해했다.
즉위 초 막당중은 자신의 찬탈에 대한 반발을 두려워하여 후 레 왕조의 법도를 따르는 모습을 보이며 기존 유신들의 지지를 얻으려 했다. 그러나 많은 레 왕조 신료들은 이를 거부하고 외국으로 망명하거나 은둔했으며, 일부는 도적이 되기도 했다. 막당중은 무력을 사용하여 레 왕조 관리들에게 새 왕조를 인정하도록 강요했고, 이에 저항하는 이들은 살해당하거나 남쪽으로 도망쳐 저항 세력에 합류했다.
응우옌호앙주의 양자였던 응우옌낌(Nguyễn Kim)은 라오스로 피신하여 후 레 왕조의 부활을 도모했으며[40], 그의 사위 정 검(Trịnh Kiểm)과 함께 막 왕조에 대항하는 가장 큰 세력으로 성장하게 된다. 1533년, 응우옌 낌은 라오스로 망명했던 레 치우통의 아들 레 장 tông(Lê Trang Tông)을 황제로 옹립하고 탕화(Thanh Hóa) 지역을 중심으로 막 왕조에 대한 본격적인 저항을 시작했다. 이들은 명나라 조정에 사신을 보내 막 왕조를 몰아낼 군대 파병을 요청하기도 했다.
한편, 막당중은 명나라에 복종적인 태도를 보이고 뇌물을 바치는 외교 정책을 통해 1528년 일시적으로나마 명나라로부터 자신의 통치를 인정받는 데 성공했다.
정세가 어느 정도 안정되자 막당중은 수도를 하노이로 옮기고 군사, 토지, 녹봉 제도를 개혁했다. 그러나 즉위 3년 만인 1529년, 노령을 이유로 아들 막등영(Mạc Đăng Doanh)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주고 태상황으로 물러났다. 그는 상광전(祥光殿)에서 어업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2. 4. 2. 후 레 왕조 유신의 부흥운동
1530년, 후 레 왕조 종실의 외손을 자처한 청화 출신 여의가 자주(椰州)에서 봉기하여 레소종의 연호인 광소(光紹)의 부활을 선언했다. 많은 후 레 왕조 유신들이 그의 휘하로 모여들면서 짧은 시간에 병력이 수만 명에 달하는 큰 세력으로 성장했다.[33]
이에 태상황이었던 막당중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진압에 나섰으나 연이어 패배하고 수도 탕롱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막국정에게 방어를 맡겼지만 그 역시 패배하였고, 여의의 군대는 서도성(西都城)까지 점령하며 기세를 올렸다. 막당중은 다시 군대를 정비하여 막국정과 함께 협공을 시도했으나 또다시 패배했고, 그의 아들 막당조아인은 탕롱으로 후퇴했다.
큰 승리를 거둔 여의는 점차 해이해져 향락을 즐기기 시작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막국정이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여의를 사로잡았다. 여의는 탕롱으로 압송된 후 거열형에 처해져 죽음을 맞이했다.[33]
여의의 세력은 와해되었지만, 그의 잔존 세력 중 일부는 당시 라오스 방면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던 응우옌낌에게 합류했다. 응우옌낌은 레소종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황족 레닌(黎寧)을 새로운 황제로 옹립하여 후 레 왕조의 부활을 선포했다.[33] 이로써 막 왕조에 대항하는 강력한 정통성 있는 세력이 등장하게 되었다.
잇따른 후 레 왕조 유신들의 저항에 직면한 막당중은 민간에서 보유하고 있는 창, 칼을 비롯한 모든 종류의 무기를 몰수하는 강경책을 시행하고, 이를 위반하는 자는 엄벌에 처하도록 지시했다. 이러한 조치 이후 막 왕조 치하의 치안은 상당히 안정되어, "길에 떨어진 물건을 아무도 줍지 않고, 백성들이 문을 잠그지 않고도 외출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전해진다.[41][28]
2. 4. 3. 명나라에 대한 책봉 문제
후 레 왕조의 레 소종이 막당중의 위세에 밀려 산시성으로 피신했을 때, 소종의 어머니 정씨(鄭氏)는 명나라에 막당중이 국정을 장악하고 황제를 위협하고 있음을 알렸다. 당시 막 즉위한 명나라 가정제는 진압군 파견을 준비하였으나, 용주(龍州)의 반란 진압 문제로 인해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32] 1525년, 소종은 명나라에 직접 사신을 보내 지원과 함께 자신을 다시 안남 국왕으로 책봉해 줄 것을 요청하여 막당중에게 대항하려 했으나, 막당중의 방해로 실패했다. 다음 해인 1526년, 막당중은 흠주(欽州) 판관 당청(唐淸)에게 뇌물을 주어 자신이 내세운 허수아비 황제 레 공황을 안남 국왕으로 책봉받으려 시도했으나, 당청이 투옥되면서 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32]
1527년 찬탈에 성공한 막당중은 자신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1528년 명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그는 레 왕조의 후손이 끊겨 황위를 이을 사람이 없으며, 자신이 신하들과 백성들의 추대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안남 국왕으로 책봉해 줄 것을 요구했다. 가정제는 사람을 보내 안남의 상황을 비밀리에 조사하게 했고, 그 결과 막당중이 찬탈자이며 그의 주장이 거짓임을 확인하였다.[29] 명나라 조정은 막씨 사신을 통렬하게 꾸짖었고, 막당중은 명나라의 정벌을 두려워하여 거액의 공물을 바치고 나서야 겨우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29] 이 시기에도 레 왕조의 유신들 중 상당수가 명나라로 망명하여 레 왕조의 부흥을 도와달라고 요청했으나, 막당중은 명나라 국경 지역 관리들에게까지 뇌물을 주어 이러한 움직임을 방해했다.[30]
1533년, 레 장종이 후 레 왕조의 부활을 선포하고 명나라에 사신 정유료(鄭惟僚)를 파견하여 자신이 소종의 아들이며 막당중이 찬탈자임을 알렸다. 모든 진실을 알게 된 가정제는 막당중의 10대 죄상을 열거하며 안남 정벌 준비를 시작했고, 막당중과 그의 아들 막등영(莫登瀛) 부자의 목에 현상금을 걸었다.[31] 신하들의 간언으로 정벌 계획이 잠시 중단되기도 했으나, 얼마 후 운남 순무 왕문성(汪文盛)이 막 왕조의 간첩을 체포하자 다시 격노한 가정제는 안남 정벌을 명했다.[31]
막당중은 이미 남쪽에서 후 레 왕조의 저항 세력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북쪽의 명나라까지 적으로 돌리면 양면전쟁으로 파멸할 것을 우려했다. 결국 그는 사신 완문태(阮文泰)를 명나라에 보내 모든 잘못을 인정하고 항복하겠다는 뜻을 전하며 보물을 바치고 영토 할양까지 약속함으로써 명나라 군대의 출병을 간신히 막았다.[32][34]
1540년, 태상황이었던 막당중은 조카 막문명(莫文明)과 신하 40여 명을 이끌고 직접 운남 순무 왕문성을 찾아가 항복 의식을 치렀다. 그는 대월의 토지대장, 호적 등 국가 중요 문서와 고평(까오방) 지역의 땅, 그리고 막대한 양의 특산물을 바쳤다. 특히 그는 스스로를 밧줄로 묶어 죄인처럼 보이게 하는 등, 절대적인 충성을 넘어선 비굴한 태도를 보였다. 일국의 통치자가 명나라 황제도 아닌 일개 관원에게 보인 이러한 굴욕적인 자세는 후대 베트남 역사학자들에게 큰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막당중의 절대적인 충성 표시에 명나라는 마지못해 그를 안남의 통치자로 인정해주었다. 하지만 정식 안남 국왕으로 책봉한 것이 아니라, 그보다 격이 낮은 안남도통사(安南都統使)라는 직위를 주었다. 이는 명목상 통치권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지위를 격하시킨 조치였다.
2. 4. 4. 치적
막당중이 세운 막 왕조는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서구와의 무역을 시작하여 상업이 크게 발달하였고, 여성 인권을 개선하는 등 당시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과 비교해 진취적인 면모를 보였다. 막당중 자신도 병제, 전제, 녹제를 개혁하는 등 여러 정책을 추진했다. 특히 이전 여 왕조의 레 성종이 이룩한 법률적 성과를 인정하여, 이를 바탕으로 수정된 형태인 황조관제전례(皇朝官制典例)를 만들어 법률 체계를 정비하고자 했다. 또한 화폐 제조 방식을 바꾸어 옛 화폐 방식으로 주조하려 했으나, 이물질이 섞인 화폐가 유통되면서 널리 사용되지는 못했다.
비록 왕위를 찬탈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막당중은 기울어져 가던 대월을 재건하고 여러 개혁을 통해 국가의 전성기를 이끌었다는 점에서 현대에 이르러 재평가를 받고 있다.
2. 4. 5. 사망
1541년, 후 레 왕조의 레 장종(Lê Trang Tông)은 응우옌낌(Nguyễn Kim), 찐검(Trịnh Kiểm) 등의 지원을 받아 서도(西都) 탕화(Thanh Hóa)를 공략하여 남부의 광대한 땅을 차지하고 후 레 왕조를 재건하였다. 후 레 왕조의 유신들이 속속 합류하면서 베트남은 북쪽의 막 왕조와 남쪽의 후 레 왕조로 나뉘는 남북조시대에 접어들게 되었다.이러한 상황 속에서 1541년 9월 11일, 막당중은 5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의 사후 손자인 막푹하이(Mạc Phúc Hải, 헌종(憲宗))가 친정을 시작했으며, 시신은 안릉(安陵)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막당중의 죽음이 혼란의 종식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의 죽음을 기점으로 후 레 왕조 측도 수장이 아닌 황제를 칭하며 막 왕조와의 전투를 더욱 심화시켰다. 결국 그가 세운 막 왕조는 1592년 사실상 멸망하고, 명나라의 중재로 까오방(Cao Bằng) 지역만을 통치하는 지방 정권으로 전락하였다.
후대의 베트남 역사가들은 막당중이 비록 명나라의 승인을 받고 베트남 북부 대부분을 장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통치에 대한 정통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막당중의 찬탈은 결국 베트남을 분열시켰으며, 북쪽의 막 왕조와 남쪽에서 정씨 및 응우옌씨 세력의 지원을 받는 후 레 왕조의 오랜 대립을 초래한 것으로 평가된다.
3. 평가
찬탈자이기 때문에 전통적인 사관들은 막 왕조 황제들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고 각박한 평을 남겼다. 근세 베트남 역사학자 쩐쫑낌은 그를 매국노로 평했고, 베트콩 학자들의 막당중에 대한 평가 역시 저조하며, 명나라에 굴복했다는 사실은 파렴치하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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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의 사실상 초대 군주. 완황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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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 떨어진 것을 줍지 않는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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