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플라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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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말플라크 전투는 1709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중 벌어진 전투로, 프랑스와 동맹군 간의 치열한 격전이었다. 동맹군은 말보로 공작과 사보이 공작 외젠이, 프랑스군은 빌라르 원수와 부플레르 공작이 지휘했으며, 양측 모두 막대한 사상자를 냈다. 전투는 동맹군의 전술적 승리로 끝났지만, 엄청난 피해로 인해 '피로스의 승리'로 불렸고, 이후 프랑스가 위트레흐트 조약에서 유리한 조건을 얻는 데 기여했다. 말플라크 전투는 영국의 정치적 변화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종결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프랑스 군사사에서 심리적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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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플라크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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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일부 |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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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1709년 9월 11일 |
장소 | 프랑스 에노 테니에르쉬르옹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네덜란드 공화국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신성 로마 제국 프로이센 왕국 (1701년) |
교전국 2 | 프랑스 왕국 |
지휘관 및 지도자 | |
사령관 1 | 말버러 외젠 틸리 오라녜 공자 파겔 로툼 슐렌부르크 오크니 백작 |
사령관 2 | 빌라르 부플레르 퓌세귀르 드 라 콜로니 |
병력 규모 | |
병력 1 | 86,000명, 대포 100문 |
병력 2 | 75,000명, 대포 80문 |
피해 규모 | |
사상자 1 | 약 22,000명 |
사상자 2 | 약 11,000명 |
결과 | |
결과 | 결과 참고 |
2. 전투 전 상황
1709년 6월 중순, 유난히 추웠던 겨울이 지나고 동맹군은 군사 행동을 시작했다. 말버러 공작은 프랑스군의 완강한 방어와 빌라르 원수에게 위험한 전투를 피하라는 베르사유의 명령 때문에 프랑스군을 전장으로 끌어들이지 못했다. 대신 투르네와 이프르를 점령하는 데 집중했다. 투르네는 প্রায় 70일간의 긴 공성전 끝에 9월 초에 함락되었다. 말버러 공작은 질병 위험이 있는 이프르 대신 동쪽의 몽스를 공격하여 프랑스 서부 방어선에 구멍을 내려고 했다.
루이 14세는 몽스를 반드시 지키라고 명령했고, 빌라르는 이 명령에 따라 말버러 공작을 추격했다. 양군은 몽스 서남부의 말플라크 협곡에서 마주하게 되었다.[2]
2. 1. 1709년 대기근과 프랑스의 위기
1709년 초, 프랑스는 파산 직전이었고, 혹독한 1708~1709년 겨울로 인해 널리 퍼진 기근이 발생했다. 투르네, 아라스, 생토메르, 발랑시엔 및 캉브레의 수비대는 식량과 봉급 부족으로 인해 모두 폭동을 일으켰다.[1] 전쟁을 끝내기 위해 필사적인 루이 14세는 헤이그에서 대동맹과 평화 협상을 시작했다. 그는 손자 필립 5세를 합스부르크 후보 대공 카를로 대체하는 것을 포함한 대부분의 조건을 수락했다. 그러나 그와 그의 장관들은 필립을 제거하기 위해 프랑스군을 사용하라는 요구에는 동의할 수 없었고, 4월 말에 협상은 결렬되었다.[1]1708년의 오우데나르데 전투와 그 뒤를 이은 릴 공성전에서 프랑스군은 남네덜란드와 프랑스 북부의 중요 거점을 잃었다. 더불어 1709년에는 혹한이 유럽을 휩쓸었고, 프랑스를 포함한 여러 나라가 기근에 시달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궁지에 몰린 루이 14세는 화의를 고려하게 되었고, 먼저 네덜란드와 단독으로 협상한 뒤 동맹국 전체와의 협상으로 옮겨갔다. 프랑스에서는 토르시 후작, 네덜란드에서는 안톤 헨시우스, 영국에서는 찰스 타운젠드와 말버러 공작, 오스트리아에서는 프린츠 외젠이 선정되었고, 5월 20일에 헤이그에서 회담을 가졌다.
5월 27일, 동맹국이 프랑스에 제시한 화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조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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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왕위는 루이 14세의 손자인 펠리페 5세에서 카를 대공으로 넘긴다. |
네덜란드 도시 릴, 메닌, 몽스를 네덜란드에 할양한다. |
네덜란드의 투르네, 이프르, 몽스, 나뮈르, 샤를루아, 룩셈부르크, 덩케르크에서 프랑스군을 철수시킨다. 독일의 라인강 지역 스트라스부르, 케일에서도 철수시킨다. |
포르투갈·사보이아에도 국경 문제에서 양보한다. |
그러나, 조건이 베르사유 궁전에 전달되자 비난이 쏟아졌고, 펠리페 5세의 퇴위가 문제시되었다. 네덜란드 전선은 열세였지만 스페인에서는 프랑스 편인 펠리페 5세가 유리했고, 동맹국이 지원하는 카를 대공은 카탈루냐만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펠리페 5세 자신은 퇴위를 거부했고, 스페인 국민들도 펠리페 5세를 지지하는 경향이었기 때문에 프랑스 측이 압도적으로 불리한 것은 아니었고, 펠리페 5세에게 퇴위 의사가 없는 현실에서는 화의 가능성이 없었다. 결국 루이 14세는 화의를 거부했고, 전쟁은 재개되었다.[1]
2. 2. 헤이그 평화 협상 결렬
1709년 초, 프랑스는 파산 직전이었고, 혹독한 1708~1709년 겨울로 인해 널리 퍼진 기근이 발생했다. 투르네, 아라스, 생토메르, 발랑시엔 및 캉브레의 수비대는 식량과 봉급 부족으로 인해 모두 폭동을 일으켰다.[1] 전쟁을 끝내기 위해 필사적인 루이 14세는 헤이그에서 대동맹과 평화 협상을 시작했다. 그는 손자 필립 5세를 합스부르크 후보 대공 카를로 대체하는 것을 포함한 대부분의 조건을 수락했다. 그러나 그와 그의 장관들은 필립을 제거하기 위해 프랑스군을 사용하라는 요구에는 동의할 수 없었고, 4월 말에 협상은 결렬되었다.[2]1708년 오우데나르데 전투와 릴 공성전에서 프랑스군은 남네덜란드와 프랑스 북부의 중요 거점을 잃었다. 1709년에는 혹한이 유럽을 휩쓸었고, 프랑스를 포함한 여러 나라가 기근에 시달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궁지에 몰린 루이 14세는 평화를 고려하게 되었고, 네덜란드와 단독으로 협상한 뒤 동맹국 전체와의 협상으로 옮겨갔다. 프랑스에서는 토르시 백작, 네덜란드에서는 안톤 헨시우스, 영국에서는 찰스 타운젠드와 존 처칠, 오스트리아에서는 프린츠 외젠이 선정되었고, 5월 20일에 헤이그에서 회담을 가졌다.
5월 27일, 동맹국이 프랑스에 제시한 평화 조건은 다음과 같다.
조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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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왕위는 루이 14세의 손자인 펠리페 5세에서 카를 대공으로 넘긴다. |
네덜란드 도시 릴, 메닌, 몽스를 네덜란드에 할양한다. |
네덜란드의 투르네, 이프르, 몽스, 나뮈르, 샤를루아, 룩셈부르크, 덩케르크에서 프랑스군을 철수시킨다. 독일의 라인강 지역 스트라스부르, 케일에서도 철수시킨다. |
포르투갈·사보이아에도 국경 문제에서 양보한다. |
그러나, 조건이 베르사유 궁전에 전달되자 비난이 쏟아졌고, 펠리페 5세의 퇴위가 문제시되었다. 네덜란드 전선은 열세였지만 스페인에서는 프랑스 편인 펠리페 5세가 유리했고, 동맹국이 지원하는 카를 대공은 카탈루냐만을 유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펠리페 5세 자신은 퇴위를 거부했고, 스페인 국민들도 펠리페 5세를 지지했기 때문에 프랑스 측이 압도적으로 불리한 것은 아니었고, 펠리페 5세에게 퇴위 의사가 없는 현실에서는 평화의 가능성이 없었다. 결국 루이 14세는 평화를 거부했고, 전쟁은 재개되었다.[1]
2. 3. 프랑스군의 방어 전략
1709년 초, 프랑스는 파산 직전이었고, 1708~1709년 겨울의 혹독한 추위로 기근이 만연했다. 투르네, 아라스, 생토메르, 발랑시엔, 캉브레 수비대는 식량과 봉급 부족으로 폭동을 일으켰다.[1] 루이 14세는 전쟁을 끝내기 위해 헤이그에서 대동맹과 평화 협상을 시작했지만 결렬되었다.[2]루이 14세는 비야르에게 전투를 피하고 프랑스의 입장이 더 악화되는 것을 막으라고 명령했다. 비야르는 스카프 강을 따라 생브낭에서 두에까지 방어선을 구축했다.[3]
루이 14세는 국민에게 협력을 호소하며 사비를 전비에 충당했고, 국민과 귀족들도 징병과 재산 헌납에 자원하며 조국 방위에 참여했다.
프랑스군은 방어에 전념하기로 했지만, 지휘관 인선에 문제가 있었다. 반돔 공은 1706년부터 1708년까지 네덜란드 전선을 담당했으나, 오덴나르데 전투와 릴 포위전에서 연합군에게 패배하고, 부르고뉴 공 루이 및 베릭 공과의 대립으로 지휘권을 박탈당했다.
빌라르는 유능했지만 언행 문제로 좌천되었으나, 루이 14세에 의해 재등용되었다. 빌라르는 징병과 식량 징발에 힘쓰고, 병사들에게 호소하여 사기를 높이고 군대의 규율을 다잡았다.
빌라르는 방어선 구축에 힘썼다. 이전에는 이프르, 릴, 투르네, 몰타뉴, 콩데, 생지스랑, 몽스를 따라 방어선이 있었지만, 릴 함락으로 틈이 생겨 방어선을 이중으로 구축했다. 새로운 방어선은 에르, 생브낭, 베퇴느, 라바스, 두에, 발랑시엔, 몽브주까지였고, 빌라르는 베퇴느에서 두에까지 방어선을 구축한 뒤, 몽브주까지 범위를 넓히고, 두에에서 연합군을 기다렸다.
2. 4. 연합군의 전략
1709년 초, 프랑스는 파산 직전이었고, 혹독한 1708~1709년 겨울로 인해 기근이 널리 퍼졌다. 투르네, 아라스, 생토메르, 발랑시엔 및 캉브레의 수비대는 식량과 봉급 부족으로 인해 모두 폭동을 일으켰다.[2] 전쟁을 끝내기 위해 필사적인 루이 14세는 헤이그에서 대동맹과 평화 협상을 시작했지만 4월 말에 결렬되었다.[2]1709년 작전이 시작될 때, 루이는 비야르에게 전투를 피하고 프랑스의 입장이 더 악화되는 것을 막으라고 명령했다. 비야르는 스카프 강을 따라 생브낭에서 두에까지 방어선을 구축했다.[2]
한편, 연합군은 프랑스가 붕괴 직전에 있다고 확신하고, ''철의 국경''으로 알려진 국경 요새선을 통해 진격하여 압박을 계속하기로 했다. 연합군 사령관인 말보로는 비야르가 점령한 위치가 정면 공격하기에는 너무 강력하다고 생각했고, 네덜란드는 그의 선호하는 선택지인 이프르에 반대했기 때문에, 1709년의 주요 목표를 투르네로 하는 데 동의했다.[2]
투르네 공성전은 6월 15일에 시작되었다. 프랑스에서 가장 강력한 요새 중 하나이며 7,700명의 수비대가 주둔하고 있던 투르네는 9월 3일에 항복했고, 말보로는 즉시 몽으로 행군했다.[2] 루이는 이제 비야르에게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프랑스의 구원이 걸려 있다"며 몽의 함락을 막으라고 명령했다.[2] 주요 연합군은 9월 7일에 도시 동쪽에 도착하여 투르네에서 포위 공격용 포병이 도착하기를 기다렸고, 비야르는 9일 남서쪽에 위치를 잡았고, 두 세력은 말플라케 틈새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게 되었다.[2]
3. 전투의 경과
주력 부대가 네덜란드와 오스트리아 병사들로 구성된 동맹군은 말버러 공작과 사보이의 외젠 공작이 지휘했고, 프랑스군은 빌라르 원수와 부플레르 원수가 지휘했다. 부플레르는 공식적인 지위는 빌라르보다 높았지만 자발적으로 그를 따랐다.[4] 동맹군은 약 86,000명에 100문의 포[4]를, 프랑스군은 75,000명의 병력에 80문의 포[5]를 보유하고 있었다. 양측은 현재의 벨기에 국경 근처에서 대포 사정거리 안에 진을 쳤다.[7]
말버러 공작은 블레넘, 라미이, 아우데나르더에서 성공적으로 사용했던 전술, 즉 프랑스 측면에 대한 정면 공격으로 중앙 병력을 이동시킨 후 대규모 기병 공격으로 중앙을 붕괴시키는 전술을 사용하려 했다.
9월 11일 오전 9시, 오스트리아군이 공격을 개시하여 프랑스군 좌익을 숲으로 밀어붙였다. 동맹군 좌익의 네덜란드군은 1시간 후 프랑스군 우익을 공격하여 부플레르가 빌라르를 지원하지 못하게 했다.
빌라르 원수는 군대를 재집결할 수 있었으나, 말버러 공작과 외젠 공작은 재차 공격을 가하여 프랑스군 좌익을 돌파했다. 이로 인해 빌라르 원수는 좌측에서 접근하는 위더 장군의 분견대를 저지하는 데 병력을 투입해야 했다. 오후 1시경, 빌라르 원수는 무릎에 총상을 입고 후방으로 이송되면서 지휘권을 부플레르에게 넘겼다. 오크니 경이 지휘하는 보병대는 약화된 프랑스군 중앙에 결정적인 공격을 가했다.
동맹군 기병대는 적진을 돌파하여 프랑스 기병대와 격돌했다. 부플레르 원수는 직접 메종 드 루아(Maison du Roi)의 정예부대를 지휘하며 치열한 기병전을 벌였다. 그는 최소 6번에 걸쳐 동맹군 기병대를 방어벽 너머로 몰아냈으나, 동맹군 보병대의 화력에 밀려 후퇴해야 했다. 결국 부플레르 원수는 오후 3시경 전투에서 승리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퇴각 명령을 내렸다. 동맹군은 공격 중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여 프랑스군을 추격하지 못했다. 동맹군은 21,000명의 병력을 잃었고, 이는 프랑스군 사상자의 2배에 달하는 수치이다.
3. 1. 투르네 공방전
빌라르가 준비를 진행하는 동안, 연합군은 악천후로 작전이 지연되어 겐트(Ghent)에서 군대를 정비한 후, 릴(Lille)에서 동쪽의 투르네(Tournai) 함락을 목표로 6월 27일 포위 공격을 개시했다. 빌라르의 움직임도 신경 쓰였기에, 연합군은 처음에 제2방어선을 공격하는 척 남진했지만, 도중에 투르네로 방향을 바꿔 동진하여 빌라르로 하여금 투르네 수비대 일부를 빼내게 했다. 그러나 투르네는 견고한 요새로 여러 겹의 참호가 설치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도시에 지뢰를 매설하여 포위군을 괴롭혔다. 포위군 역시 비로 인해 공격용 참호가 진흙탕이 되고, 병사들이 지뢰 때문에 진격을 주저했기 때문에 9월 3일 함락까지 2개월 이상 시간이 걸렸다.[2]3. 2. 몽스 포위와 빌라르의 출격
1709년 6월 중순, 동맹군은 프랑스군의 완강한 방어와 빌라르(Villars) 원수에게 위험한 전투를 피하라는 베르사유의 명령 때문에 프랑스군을 전장에 끌어들이지 못했다. 말버러 공작(Duke of Marlborough)은 투르네(Tournai)와 이프르(Ypres) 점령에 집중했다. 투르네는 প্রায় 70일 간의 공성전 끝에 9월 초에 함락되었다. 말버러 공작은 이프르 대신 동쪽의 몽스(Mons)를 공격하여 프랑스 서부 방어선에 구멍을 내려고 했다. 루이 14세의 명에 따라 몽스를 지키려던 빌라르는 말버러 공작을 쫓았고, 양군은 몽스 서남부 말플라크에서 마주쳤다.[2]말보로 공작과 사보이아의 외젠은 빌라르가 몽스를 사수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승리를 확신했다. 빌라르는 루이 14세에게 전투가 불가피하다고 알렸다. 연합군은 헨리 위더스 지휘 하의 1,900명의 병력이 투르네에서 도착할 때까지 공격을 지연시켰는데, 이 결정은 비판을 받았다. 이로 인해 빌라르는 방어 진지를 구축할 시간을 벌었다.[2]
말보로 공작은 블렌하임, 라밀리, 오데나르데에서처럼 프랑스 측면에 대한 정면 공격으로 병력을 중앙에서 이동시킨 후, 중앙을 기병 공격으로 붕괴시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말플라크에서 프랑스군은 강력한 방어 진지, 뛰어난 지휘, 높은 사기를 유지했다.[2]
빌라르는 라밀리에서의 교훈을 바탕으로 보병을 방어 진지에 집중시켰다. 프랑스군은 80문의 대포와 스위스 용병, 아일랜드 여단 등을 포함하여 7만 5천 명에서 8만 명 사이의 병력을 보유했다. 빌라르는 좌익, 드 라 콜로니는 중앙, 루이-프랑수아 드 부플러는 우익을 지휘했다. 보병은 참호선을 유지했고, 기병은 후방에 집결했다.[2]
연합군은 약 8만 6천 명의 병력과 100문의 대포를 보유했다. 우익은 외젠 왕자가 이끄는 3만 명의 독일 및 덴마크 보병, 중앙은 오크니 백작이 지휘하는 주로 영국 보병 8,000명, 후방에는 3만 명의 기병이 있었다. 좌익은 오렌지 공 지휘 하의 1만 8천 명의 보병과 헤세-카셀 공 지휘 하의 1만 명의 기병으로 구성된 네덜란드군이었다. 틸리 백작이 전체 지휘를 맡았지만, 오라니예파에 반대했기 때문에 전투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2]
빌라르가 준비하는 동안, 연합군은 6월 27일 투르네를 포위했다. 빌라르의 움직임에 연합군은 남진하는 척하다 투르네로 방향을 바꿔 빌라르가 투르네 수비대 일부를 빼내게 했다. 투르네는 견고한 요새였고, 9월 3일 함락까지 2개월 이상 걸렸다.[2]
연합군은 7일 몽스를 포위했다. 루이 14세는 빌라르에게 출격 명령을 내렸고, 부플레르도 참전했다. 양군은 8일까지 진지 구축에 착수했다. 빌라르는 숲에 참호를 구축하고 베어낸 나무를 쇠사슬로 연결하여 요새를 만들었다. 숲 중간에도 방어선을 설치했다.[2]
연합군은 몽스를 포위하면서도 프랑스군의 공격을 유도했다. 빌라르의 진지 구축을 알게 되자, 완성 전에 공격하기로 했다. 10일 몽스를 함락시키고, 투르네에서 올 증원군과 합류하기 위해 결전을 11일로 정했다. 새벽 3시, 연합군은 프랑스군 진지로 진격하여 9시에 공격을 개시했다.[2]
3. 3. 말플라크 전투


주력이 네덜란드와 오스트리아 병사들로 이루어진 동맹군은 말버러 공작과 사보이의 외젠 공작이 지휘하고 있었고, 프랑스군은 빌라르 원수와 부플레르 원수가 지휘를 맡고 있었다. 부플레르는 공적인 지위로는 빌라르보다 우위에 있었음에도 자발적으로 그를 따랐다.[4] 동맹군은 약 86,000명에 100문의 포[4]가 있었으며, 프랑스군은 75,000명의 병력에 80문의 포[5]를 가지고 있었다. 양측은 현재의 벨기에 국경 근처에서 대포의 사정거리 안에 진을 치고 있었다.[7]
말버러 공작은 블레넘, 라미이, 아우데나르더에서 사용했던 전술, 즉 프랑스 측면에 대한 정면 공격으로 중앙 병력을 이동시킨 후 대규모 기병 공격으로 중앙을 붕괴시키는 전술을 사용하려 했다.
9월 11일 7시, 연합군은 포격으로 전투를 시작했다. 8시 30분 포격이 끝나자, 연합군 우익은 핀켄슈타인 백작, 로툼, 슐렌부르크가 이끄는 사르스 숲에 주둔한 프랑스군을 공격했다. 3시간 동안 치열한 근접전이 벌어졌고,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었다. 외젠 공은 경상을 입었지만 전장을 떠나기를 거부했다. 9시경, 파헬이 지휘하는 네덜란드군은 스위스 용병과 스코틀랜드 여단을 포함한 13개 대대를 이끌고 프랑스군 우익을 공격했다. 초기 성공 후 격퇴당하자, 오렌지 공과 뱅 고슬링가는 블레롱 농장 주변 프랑스군 진지를 공격하여 파헬을 지원하기 위해 17개 대대를 추가로 투입하도록 명령했다.
강력하게 요새화된 병력에 대한 정면 돌격은 블레롱 농장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네덜란드군에게 5,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으며, 많은 고위 장교들이 포함되었다. 이러한 손실에도 불구하고, 오렌지 공은 말보로가 중지 명령을 내릴 때까지 공격을 계속했다.
한편, 외젠 공의 압력으로 빌라르는 좌익의 붕괴를 막기 위해 중앙에서 계속해서 병력을 이동시켜야 했다. 정오 무렵, 프랑스군 중앙에는 9개 대대와 60개 기병 중대가 있었고, 연합군은 각각 23개 대대와 80개 중대였다. 오후 초, 빌라르는 중상을 입고 지휘권을 부플뢰르에게 넘겼고, 퓌세쥐르가 좌익을 맡았다.
네덜란드군의 공격은 프랑스군 우익이 중앙을 지원하는 것을 막았다. 오크니의 보병이 프랑스군 중앙을 압도했고, 그로베스틴스 휘하의 네덜란드 기병이 프랑스군 후방으로 돌파했지만, 부플뢰르가 이끄는 프랑스 왕실 기병대의 정예 기병대의 공격을 받았다. 수적 열세로 연합군 기병은 후퇴했지만, 프랑스군 역시 오크니의 보병에게 격퇴당했다. 연합군은 다시 진격하여 18세기 최대 규모의 기병전을 벌였다. 프랑스군 좌익은 위더스와 슐렌부르크의 압력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퓌세쥐르는 부대 철수를 명령했고, 오렌지 공은 프랑스군 우익에 대한 또 다른 대규모 공격을 이끌었다. 네덜란드 보병은 어느 정도 진전을 이루었지만 다시 격퇴되었고, 그로베스틴스의 기병이 프랑스군 후방에 접근하여 결국 프랑스군이 참호를 버리도록 강요했다. 15시, 부플뢰르는 약 25km 떨어진 르 케누아로의 전면적인 후퇴를 명령했고, 연합군은 너무 지쳐서 추격하지 못했다.
연합군도 손실이 커서 추격하지 못했다. 오후 3시에 전투가 끝났고, 연합군의 사상자는 24,000명,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그 절반인 12,000명이었다.[3]
4. 전투의 결과 및 영향
빌라르는 얼마 후 프랑스군이 동맹군을 격멸하였다고 선언하였으나[8], 몽스를 지키려는 계획은 실패했고, 요새는 8월 20일 함락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세기 가장 치열한 전투인 말플라크 전투에 대한 소식은 유럽을 얼어붙게 만들었으며, 심지어 말버러 공작이 죽었다는 소문은 프랑스 민요 ''전장의 왕자 말버러''(Malbrough s'en va-t-en guerre)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이전의 4번의 승전 때 앤 여왕으로부터 개인적인 감사 편지를 받았던 말버러 공작은 이번에는 받지 못했다. 리처드 블랙모어의 시 ''반더 벡에 대한 교육''(Instructions to Vander Beck)은 말플라크 전투로 인해 영국의 토리당이 이듬해 정권을 잡자마자 대동맹에서 탈퇴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동안, 말버러 공작의 승리를 칭송하려 시도한 유일한 영국 시였다.
오렌지 공은 몽스 포위 공격을 감독하게 되었고, 몽스는 10월 21일에 항복했다.[8] 장기적으로 말플라크 전투는 루이 14세가 1709년에 가능했던 것보다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에서 훨씬 더 유리한 조건으로 협상할 수 있게 했다.[8] 1710년 3월 협상이 재개되었을 때, 프랑스의 전략적 위치는 대체로 변함이 없었지만,[8] 말플라크 전투는 전쟁 목표와 그에 따른 비용에 대한 연합군의 분열을 심화시켰다.[8]
연합군은 승리했지만, 큰 피해를 입어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말버러 공작은 큰 피해를 인정했다. 부상에서 회복된 빌라르는 루이 14세에게 "이런 전투를 한 번 더 치르면 적은 멸망할 것입니다"라고 자랑스럽게 편지를 보냈다. 프랑스는 전의를 되찾았고, 빌라르는 루이 14세로부터 환영받았다. 프랑스에 아직 저력이 남아 있음을 알게 되자 화의 가능성은 사라졌고, 말버러 공작의 예상과는 달리 점점 더 멀어져 갔다.
4. 1. 피로스의 승리
전체적으로 이 전투는 전장을 소유한 자가 승리한다는 당시의 룰에 따르면 전술적 승리였으나, 동맹군 군대는 큰 피해를 입었다. 전략적 측면에서는 동맹군의 공격을 저지했다는 점에서 프랑스의 중대한 승리였다. 드냉에서의 승리와 함께 프랑스는 완벽한 패배를 피할 수 있었고, 이는 위트레흐트 조약에서 프랑스가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 제시되는 것을 막았다.[8]대부분의 해설가들은 연합군 사상자를 2만 1천 명에서 2만 5천 명 사이로 추산하며, 이 중 8,462명은 네덜란드 보병이었다. 다른 추산으로는 최저 1만 5천 명에서 최고 3만 명까지도 언급된다. 프랑스군 사상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일반적으로 1만 1천 명에서 1만 4천 명 사이로 추산된다. 그 외에 최저 7,000명에서 최고 1만 7천 명(부상자 포함), 그리고 500명의 포로를 포함한다는 주장도 있다. 연합군은 프랑스군의 대포 16문을 노획했다.[3]
말버러 공작은 중앙을, 외젠은 우익을 지휘했다. 말버러 공작은 적의 양 날개에 압력을 가해 지원군을 유도하여 중앙을 약화시킨 후, 병력을 집중하여 중앙을 돌파하는 전술을 사용해왔다. 말플라크에서도 이 전술로 프랑스군을 격파하려 했고, 네덜란드군과 독일군이 프랑스군이 매복한 숲을 공격했다.
그러나 숲의 방어는 견고하여 우익은 돌파하지 못했고, 좌익의 네덜란드군은 5,000명이라는 큰 손실을 보고 패주했다. 전황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우익은 독일군의 수적 우세로 연합군이 점차 우세해졌고, 빌라르는 중앙에서 좌익으로 지원군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외젠도 총알이 귀를 스치는 격전을 치렀으나, 정오 무렵 프랑스군을 숲에서 몰아내고 점령했다.
빌라르는 반격을 시도했지만, 연합군의 일제 사격으로 왼발에 부상을 입고 기절하여 후방으로 옮겨졌고, 부프레르가 대신 지휘를 맡았다. 프랑스군 좌익은 후퇴했고, 중앙도 진지를 포기하여 연합군에게 넘어갔다. 남은 우익은 네덜란드군의 재차 돌격을 막고 저항했지만, 중앙의 병력 약화로 말버러 공작은 3만 명이 넘는 기병을 중앙에 집결시켜 돌파를 명령했다.
부프레르는 연합군의 총공격에 맞서 기병 돌격으로 저지했지만, 좌익의 후퇴와 우익의 돌파로 한계에 다다르자 총퇴각을 명령하고 질서정연하게 후퇴했다. 연합군도 큰 피해를 입어 추격하지 못했다. 오후 3시에 전투가 끝났고, 연합군의 사상자는 2만 4천 명,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그 절반인 1만 2천 명이었다.
4. 2. 영국의 정치적 변화
말플라크 전투의 막대한 사상자 소식은 영국 내에서 큰 충격을 주었다. 리처드 블랙모어의 시 ''반더 벡에 대한 교육''만이 말버러 공작의 승리를 칭송했을 뿐, 이전과 달리 앤 여왕은 말버러 공작에게 개인적인 감사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8]이러한 분위기는 영국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말플라크 전투의 피해는 토리당에게 좋은 공격 명분이 되었고, 이들은 전쟁에 대한 반대 여론을 주도했다. 결국 1710년 총선에서 토리당이 압승을 거두며 정권을 잡게 되었다. 토리당은 신용 위기를 막기 위해 전쟁에 대한 헌신을 확인했지만, 휘그당의 "스페인 없는 평화"라는 요구가 과도하다고 느꼈다.[8]
토리당은 외교 정책에서 휘그당과 다른 입장을 보였다. 휘그당은 대륙 전략을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토리당은 영국 해군을 이용하여 상대방의 무역 이익을 공격하는 것을 선호했다. 또한 토리당은 유럽에 대한 영국의 개입이 지나치게 비싸고, 네덜란드와 같은 상업적 경쟁자들에게만 이익이 된다고 생각했다.[8]
1710년 12월 브리우에가 전투와 빌라비시오사 전투에서 연합군이 패배하면서, 펠리페 5세가 스페인 국왕으로 확정되었다. 이는 명분상 전쟁의 원인이었기에, 영국의 전쟁 지속에 대한 반대는 더욱 거세졌다.[8]
1711년, 토리당은 말보로 공작을 자금 횡령 혐의로 해임하고, 동맹국들을 배제한 채 프랑스와 비밀 협상을 시작했다. 결국 1712년 영국군을 대륙에서 철수시키고,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 1714년 라슈타트 조약을 체결하여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종결지었다.[8]
4. 3.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종결
1710년 3월 평화 협상이 재개되었을 때, 프랑스의 전략적 위치는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8] 말플라크 전투는 전쟁 목표와 그에 따른 비용에 대한 연합군의 분열을 심화시켰다.[8] 1709년 의회는 1706년 500만 파운드에서 증가한 640만 파운드의 지출을 승인했고, 1710년 말에는 이 금액이 두 배인 1290만 파운드로 증가했다.[8] 심지어 1709년 전역 이전에도 말버러 공작 자신은 "스페인 없는 평화"라는 휘그당의 요구가 과도하다고 느꼈다.[8] 그런 점에서 말플라크 전투는 같은 해 알리칸테와 라 구디나에서의 스페인의 성공만큼 영국 정책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는데, 이 전투들은 그곳에서의 승리 가능성을 점점 더 희박하게 만들었다.[8]
1710년 평화 회담이 재개되기 전에 말보로 공작은 연합군 협상가들에게 "우리의 승리 덕분에… 원하는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라고 썼다.[8] 이러한 견해는 프랑스 내부를 노출시킨 몽의 함락에 사용되었으며, 말플라크 전투에서 입은 손실은 프랑스가 수비만 할 수 있게 만들었다.[8] 1710년 봄, 연합군은 거의 방해받지 않고 진격을 재개했고, 9월까지 "프레 카레"의 이차 방어선을 돌파하여 두에, 베튄, 아르덴느의 아르 및 생방낭을 점령했다. 보급이 부족하고 많은 연대가 공식 규모의 절반 이하로 줄어든 빌라르는 마지막 남은 프랑스 야전군을 또 다른 전투에 위험에 빠뜨릴 수 없었다.[8]
결과적으로 말플라크 전투의 직접적인 영향은 군사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이었다. 1710년 3월 헤르트루이덴베르흐에서 평화 협상이 재개되었을 때, 영국의 분위기가 바뀌었음이 분명해졌다.[8] 영국의 손실은 비교적 적었지만,[8] 말보로 공작의 국내 반대자들은 막대한 사상자를 이용해 그를 공격했다.[8] 미미한 이득을 위해 계속 싸우는 것을 꺼리는 것은 10월 총선에서 토리당의 압승으로 이어졌지만, 그들은 신용 위기를 막기 위해 전쟁에 대한 헌신을 확인했다.[8] 프랑스에서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1710년 12월 브리우에가 전투와 빌라비시오사 전투에서의 추가 패배로 인해 영국의 전쟁 지속에 대한 반대가 강화되었는데, 이 전투들은 펠리페 5세를 스페인 국왕으로 확정했고, 이는 명목상으로 전쟁의 원인이었다.[8]

네덜란드는 말보로 공작의 전술, 위더스의 네덜란드 공격 지원 실패 의혹, 프랑스의 방어가 너무 강력하다는 것이 분명해졌을 때에도 계속 공격한 오렌지 공을 손실의 원인으로 지목했다.[8] 대총사 안토니 헤인시우스와 여러 네덜란드 레헨트들은 사상자가 더욱 엄격한 평화 조건을 정당화한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것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말보로 공작의 참모로 근무했던 네덜란드 현장 대표인 시코 판 고슬링가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요새 중 두 곳"인 투르네와 몽을 점령하고 "전투 중 가장 치열한 전투 중 하나"를 승리했기 때문에 그러한 사상자는 예상되었다고 주장했다.[8]
1711년 4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후보인 합스부르크의 찰스 대공이 그의 형제인 요제프 1세의 뒤를 이어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었다. 영국과 네덜란드는 스페인과 오스트리아의 연합을 프랑스와의 연합만큼이나 달가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는 전쟁을 계속하는 주요 이유를 사실상 훼손했다.[8] 1711년 9월 부샹 함락으로 연합군의 진격을 막는 마지막 중요한 장애물 중 하나가 제거되었지만, 새로운 영국 정부는 이미 루이 14세와 비밀리에 평화 조건을 협상하여 1711년 10월 8일 런던 예비 조항에 서명했다.[8] 1711년 말, 말보로 공작은 토리당인 오먼드 공작으로 대체되었고, 그는 영국군의 추가 공세를 막도록 명령받았다.[8]
연합군은 다시 몽스 포위에 착수했고, 프랑스군은 이에 대항하기 위해 부플레르와 베릭을 몽스 남서쪽으로 보냈지만, 연합군의 방어가 굳건하여 공격은 보류되었다. 10월 21일 몽스는 항복했고, 1709년 전쟁은 종결되었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막대한 피해에 대한 비난 여론이 야당인 토리당을 중심으로 들끓었고, 스페인 문제 해결까지는 화의를 하지 않겠다는 여당인 휘그당과 말보로 공작의 입지는 위태로워졌다. 앤 여왕은 휘그당을 싫어하고 토리당을 신임했으며, 말보로 공작에게는 불신감을 품었다. 이듬해 1710년에 말보로 공작의 친구이자 대장관 시드니 고돌핀이 해임되었고, 총선에서 휘그당이 패배하고 토리당이 여당이 된 후 말보로 공작은 해임을 확신하고, 이전과 같은 기동력을 활용한 대담한 전략에서 방어선 도시 함락으로 전략을 변경했다.
이듬해 1711년, 토리당은 말보로 공작을 자금 횡령을 구실로 사령관직에서 해임하고, 동맹국을 배제한 채 프랑스와 비밀 협상에 들어가 1712년에 대륙에서 영국군을 철수시키고 화의에 매진했다. 남은 연합군도 드냉 전투에서 빌라르에게 패한 것을 계기로 프랑스와 화의에 들어갔고, 1713년에 위트레흐트 조약, 1714년에 라슈타트 조약을 체결하여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종결짓게 되었다.
4. 4. 전후 평가와 역사적 의의
말플라크 전투는 전술적으로는 연합군의 승리였지만, 엄청난 사상자로 인해 전략적으로는 프랑스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당시 기준으로 전장을 차지한 쪽이 승리하는 것이었기에 연합군의 승리로 여겨졌고, 현대 역사가들 대부분도 이에 동의한다.[8] 하지만, 프랑스는 이 전투를 통해 연합군의 공세를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프랑스 지휘관들은 연합군에 큰 피해를 입힌 것에 주목했다. 부플뢰르는 루이 14세에게 "불운하게도 또 다른 패배를 알려야 하지만, 이러한 불운은 더 큰 영광과 함께한 적이 없음을 확신시켜 드립니다."라고 보고했다. 빌라르는 "만약 신이 우리에게 또다시 그러한 전투에서 패배하는 은총을 내려주신다면, 폐하는 그의 모든 적들이 멸망할 것이라고 확신하셔도 좋습니다."라고 썼다.
이후 프랑스는 드냉 전투에서 승리하며 완전한 패배를 면했고, 위트레흐트 조약에서 불리한 조건을 피할 수 있었다.
말플라크 전투의 결과로 몽스 요새가 함락되었지만, 장기적으로는 루이 14세가 위트레흐트 조약에서 더 유리한 조건으로 협상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 전투는 연합군 내부에 전쟁 목표와 비용에 대한 분열을 심화시켰다. 영국에서는 막대한 사상자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아졌고, 이는 1710년 영국 총선에서 토리당의 압승으로 이어졌다. 토리당은 전쟁 지속에 회의적이었고, 결국 영국은 대동맹에서 탈퇴하게 된다.
1710년 평화 회담이 재개되기 전, 말버러 공작은 연합군 협상가들에게 "우리의 승리 덕분에… 원하는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라고 썼다. 그러나 말플라크 전투에서 입은 손실로 인해 프랑스는 수비만 할 수 있게 되었고, 1710년 봄 연합군은 "프레 카레"의 이차 방어선을 돌파하며 두에, 베튄 등을 점령했다.
결과적으로 말플라크 전투는 군사적 측면보다는 정치적 측면에 더 큰 영향을 미쳤다. 영국 내에서는 막대한 사상자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아졌고, 이는 1710년 영국 총선에서 토리당의 압승으로 이어졌다. 또한, 빌라비시오사와 브리우에가 전투에서의 패배는 영국 내에서 전쟁 지속에 대한 반대를 더욱 강화시켰다.
네덜란드는 말보로 공작의 전술과 오렌지 공의 공격 지속 결정을 비판했다. 대총사 안토니 헤인시우스 등은 더 엄격한 평화 조건을 주장했지만, 다른 이들은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1711년, 요제프 1세가 사망하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된 찰스 대공은 스페인 왕위 계승 후보였기에, 영국과 네덜란드는 스페인과 오스트리아의 연합을 우려하여 전쟁 지속의 명분을 잃게 되었다. 결국 영국은 프랑스와 비밀리에 평화 협상을 진행했고, 1711년 10월 런던 예비 조항에 서명했다.
말플라크 전투는 영국과 네덜란드에서는 막대한 사상자를 낸 전투로 기억되지만, 프랑스에서는 자국 군대의 회복력을 보여준 전투로 평가받는다. 프랑스 군사사에서 이 전투는 심리적인 측면에서 중요하며, 프랑스군이 자신감을 회복하고 참패에서 회복하는 능력을 보여주는 증거로 여겨진다.
이 전투에는 총 14개 대대의 스위스 용병이 참여했는데, 스위스 근위병 2개 대대를 포함한 6개 대대는 프랑스 측에서, 8개 대대는 네덜란드 측에서 싸웠다. 8,0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말플라크 전투는 1808년 바일렌 전투까지 스위스 용병들이 직접 서로 교전한 마지막 전투였다.
이 전투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애미어블 레니게이드: 피터 드레이크(1671-1753)의 회상록''(Amiable Renegade: The Memoirs of Peter Drake (1671–1753))에 남아있다. 여러 유럽 군대에서 복무한 아일랜드인 드레이크는 말플라크 전투에서 ''왕의 근위대(Maison du Roi)''에서 싸웠고, 여러 번 부상을 입은 후 포로로 잡혔다. 아일랜드계 이민자 펠림 오닐(Féilim Ó Néill)도 아일랜드 여단에서 복무하다 전사했다.
참조
[1]
서적
(제목 정보 없음)
[2]
서적
(제목 정보 없음)
[3]
서적
(제목 정보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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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The Wars of Louis XIV 1667-1714
[5]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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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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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ars of Louis XIV 1667-1714
[7]
문서
(제목 정보 없음)
[8]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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