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거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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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멍거불루는 16세기 후반 하다 국주로, 예허와의 갈등과 명나라의 개입 속에서 하다의 분열과 멸망을 겪었다. 그는 아버지 완의 용호장군을 승습했지만, 예허의 칭기야누, 양기누 형제의 공격과 하다 내부의 다이샨, 캉글 간의 갈등으로 인해 국력을 잃었다. 명나라의 개입과 누르하치의 건주 여진과의 전쟁 끝에 멍거불루는 누르하치에게 처형당하고 하다는 멸망했다. 그의 아들 울구다이는 명나라의 지원을 받아 하다를 잠시 부흥시키려 했으나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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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거불루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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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원래 이름 | |Nara Menggebulu}} |
원래 이름 (한자) | 那拉 孟格布錄 (납란 맹격포록) |
통치 정보 | |
작위 | 호륜국 만한, 해서여진 하다 아이만 버일러 |
재위 (호륜국) | 1582년-1599년 |
전임자 (호륜국) | 후르간 |
후임자 (호륜국) | (일시 멸망), 1601년 우르구다이 |
재위 (하다 아이만) | 1596년-1599년 |
전임자 (하다 아이만) | 후르간 |
후임자 (하다 아이만) | 우르구다이 |
이름 | |
휘 | 나라 멍거불루(}}, ) |
생애 | |
출생일 | 1565년 |
사망일 | 1600년 |
가문 | |
왕조 | 해서여진 |
가문 | 나라 할라 |
아버지 | 왕타이 |
자녀 | 우르구다이 |
친척 | 형 후르한 |
2. 약사
1582년(만력 10년) 음력 7월, 초대 하다 국주 완이 사망했다. 완의 장남 풀간이 2대 국주로 즉위했지만, 사생아 동생 캉글과의 갈등으로 캉글을 살해하려 했다. 캉글은 예허로 망명했지만, 풀간은 즉위 1년 만에 병사했다.[2] 풀간의 아들 다이샨이 3대 국주로 즉위했고,[3][4][5] 멍거불루는 19세에 아버지의 용호장군, 좌도독 직을 승습했지만, 통치력은 없었다.[6]
1583년(만력 11년) 음력 7월, 예허 국주 칭기야누, 양기누 형제는 하다의 반신 베푸치와 결탁하고, 몽골 홀친부 웅가다이[7] 등과 연합하여 기병 10,000명으로 하다를 습격, 재산을 약탈했다. 멍거불루의 요청으로 명나라가 칙서를 내려 예허를 압박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예허는 병사를 규합하여 멍거불루 영토의 민가와 밭을 불태웠다. 명나라는 회유를 시도했지만, 예허는 하다 처벌 칙서를 요구했고, 음력 12월에 다이샨과 멍거불루 등의 장원을 불태웠다. 웅가다이의 기병 2,000명을 이끌고 남관 공물 시장에 나타나 사대량 부족을 함락, 300명을 납치하여 공물 칙서[9]를 요구했다. 다이샨과 멍거불루는 기병 2,000명으로 맞섰지만 역부족이었다.[10][11][12]
1584년(만력 12년), 명나라 이성량이 칭기야누, 양기누 형제를 유인하여 주살했다.
2. 1. 하다부의 분열
1582년 음력 7월, 하다의 국주 완이 사망하면서 그의 아들들 사이에 권력 투쟁이 시작되었다. 장남 풀간이 2대 국주로 즉위했으나, 서자 캉글과의 갈등으로 캉글을 살해하려 했다. 캉글은 예허로 망명했으나, 풀간은 즉위 1년 만에 병으로 급사하고, 그의 아들 다이샨이 3대 국주로 즉위했다.[2] 멍거불루는 19세의 나이로 아버지의 용호장군, 좌도독을 승습했지만, 나라를 통솔할 힘은 없었다.[6]1583년 음력 7월, 예허 국주 칭기야누, 양기누 형제는 하다에 복수하기 위해 몽골 홀친부의 웅가다이[7] 등을 규합하여 기병 10,000명으로 하다를 습격했다. 멍거불루는 명에 요청하여 예허를 압박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예허는 오히려 하다를 공격하고 명나라에 하다를 처벌하라는 칙서를 요구했다. 같은 해 음력 12월, 예허는 다이샨과 멍거불루 등의 장원을 불태우고, 웅가다이의 기병 2,000명을 이끌고 남관의 공물 시장을 공격하여 300명을 납치하고 공물 칙서를 요구했다.[9] 다이샨과 멍거불루는 기병 2,000명으로 맞섰지만 역부족이었다.[10][11][12]
1584년, 명나라 이성량이 칭기야누, 양기누 형제를 유인하여 주살했다.
1587년 음력 4월, 예허 동성주 나림불이 몽골 호르친부 웅가다이의 기병 10,000명을 이끌고 하다를 급습했으나, 명나라의 개입으로 위기를 넘겼다. 이때, 풀간의 사망 소식을 들은 캉글이 하다로 돌아와 아버지 완의 측실 온제와 혼인했다. 온제는 명나라에 의해 주살된 예허 국주 칭기야누, 양기누 형제의 여동생이자 멍거불루의 어머니였다. 예허는 온제와 캉글을 이용하여 멍거불루를 부추겨 다이샨과 대립하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하다는 다이샨, 멍거불루, 캉글의 삼파전으로 내분이 일어나 국력이 약화되었다.
같은 해 음력 6월,[13] 나림불이 웅가다이의 기병 5,000명을 이끌고 다시 다이샨을 습격하자, 캉글이 내응하여 다이샨의 재산과 가축을 약탈하고,[14] 멍거불루도 캉글과 함께 다이샨의 아내를 납치해 살해했다.[15][16][17] 명나라는 멍거불루의 입공 자격을 정지시키고, 그의 속부와 영지, 가축을 모두 다이샨에게 귀속시켰지만,[18] 멍거불루는 다이샨과의 화해를 거부하고 예허와 함께 랴오닝성톄링시개원으로 들어갔다.[19][20] 이때, 명나라 군대에 의해 캉글과 온제가 체포되었다. 명나라 순무 고양겸이 멍거불루에게 다이샨과 화해하고 약탈한 것을 돌려주지 않으면 어머니의 목을 베겠다고 경고하자,[21] 멍거불루를 자극할 것을 우려하여 온제는 석방되었다. 멍거불루는 나림불을 따라 다이샨을 협공하고 자신의 거주 부족을 불태운 후,[22][23][24] 석방된 어머니 온제를 데리고 예허로 도망쳤다. 멍거불루의 용호장군 직은 박탈되었고, 왕감은 탄핵되어 해임되었다.
2. 2. 명나라의 개입
만력 11년(1583년) 8월, 멍거불루의 요청으로 명은 칙서를 내려 예허를 압박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예허는 오히려 맹골태, 나목새의 병력을 합쳐 멍거불루 영토의 민가와 밭을 불태웠다. 명나라는 회유를 시도했지만, 예허는 하다를 처벌하는 칙서를 요구했고, 같은 해 12월에는 다이샨과 멍거불루 등의 장원을 불태웠다. 홀친부 웅가다이의 기병을 이끌고 남관의 공물 시장에 나타나 사대량 부족을 함락시키고 300명을 납치하여 공물 칙서[9]를 요구하기도 했다. 다이샨과 멍거불루는 기병 2,000명으로 맞섰지만 역부족이었다.[10][11][12]만력 12년(1584년), 명나라 이성량은 칭기야누, 양기누 형제를 유인하여 죽였다. 만력 15년(1587년) 4월, 예허 동성주(東城主) 나림불이 호르친부 웅가다이의 기병 10,000명을 이끌고 하다 영토를 급습했지만, 명나라의 개입으로 하다는 위기를 넘겼다.
같은 해 6월[13], 나림불이 다시 다이샨을 습격하자, 캉글이 모반을 일으켜 다이샨의 재산과 가축을 약탈했고,[14] 멍거불루도 캉글 등과 함께 다이샨의 아내를 납치해 살해했다.[15][16][17] 명나라는 멍거불루의 입공 자격을 정지하고, 그의 속부와 영지, 가축을 모두 다이샨에게 귀속시켰지만,[18] 멍거불루는 다이샨과의 화해를 거부하고 예허 서성주 부자이, 나림불과 함께 개원(현재 랴오닝성톄링시카이위안시)으로 들어갔다.[19][20] 이때, 명나라 군대에 캉글과 온제[20]가 체포되었다. 순무 고양겸이 멍거불루에게 다이샨과 화해하고 약탈한 것을 돌려주지 않으면 어머니 온제의 머리를 베겠다고 경고하자,[21] 멍거불루는 나림불을 따라 다이샨을 협공하고 자신의 거주 부족을 불태운 후[22][23][24] 석방된 어머니 온제를 데리고 예허로 도망쳤다. 멍거불루의 용호장군 직은 박탈되었고, 왕감은 탄핵되어 해임되었다.
만력 16년(1588년) 2월, 순무 고양겸 등은 예허 토벌을 결정했다.[25] 3월 13일, 이성량이 이끄는 명군은 해주(현재 랴오닝성 안산시 하이청시)를 출발하여 예허의 서성에 도착했다.[26] 명군은 고전 끝에 예허를 항복시켰다. 같은 달, 명나라는 하다 존속을 위해 캉글을 석방하기로 결정했다. 다이샨은 내정을 명나라에 의지하고, 누르하치의 만주 (건주부)와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32] 이 결정으로 예허의 모략을 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같은 해 4월 1일, 캉글은 석방되어 다이샨과 화해했다. 명나라는 예허에 공칙을 분배하겠다고 전했다.[33][34]
2. 3. 멍거불루의 집권
1582년 하다의 국주 완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풀간이 뒤를 이었으나, 곧 병으로 사망하여 다이샨이 3대 국주로 즉위했다.[2][3][4][5] 멍거불루는 19세의 나이로 아버지의 직위를 승계했지만, 실질적인 통치력은 부족했다.[6]1583년 예허 국주 칭기야누와 양기누 형제는 하다에 복수하기 위해 몽골 홀친부의 웅가다이[7] 등과 연합하여 하다를 공격했다. 명나라는 멍거불루의 요청으로 예허를 압박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예허는 오히려 하다의 장원을 불태우고 공물 칙서[9]를 요구하며 공세를 강화했다. 다이샨과 멍거불루는 이에 맞섰지만 역부족이었다.[10][11][12]
1584년, 명나라 이성량이 칭기야누와 양기누 형제를 유인하여 살해했다. 1587년 예허의 나림불이 다시 하다를 공격했으나, 명나라의 개입으로 위기를 넘겼다. 한편, 풀간의 사망 소식을 들은 캉글이 하다로 돌아와 완의 측실이자 멍거불루의 어머니인 온제와 혼인했다. 온제는 예허의 전 국주 칭기야누와 양기누의 여동생으로, 예허는 온제와 캉글을 통해 멍거불루를 부추겨 다이샨과 대립하게 만들었다. 하다는 다이샨, 멍거불루, 캉글의 삼파전으로 내분이 심화되었다.
같은 해, 나림불이 다시 다이샨을 공격하자, 캉글과 멍거불루가 이에 호응하여 다이샨의 재산을 약탈하고 아내를 살해했다.[14][15][16][17] 명나라는 멍거불루의 입공 자격을 정지시키고 다이샨에게 힘을 실어주었지만,[18] 멍거불루는 예허와 함께 개원으로 들어갔다.[19][20] 이때 캉글과 온제[20]가 명나라 군대에 체포되었으나, 온제는 석방되었다. 멍거불루는 나림불과 함께 다이샨을 공격하고 자신의 거주지를 불태운 후,[22][23][24] 어머니 온제를 데리고 예허로 도망쳤다. 명나라는 멍거불루의 직위를 박탈하고 관련자를 처벌했다.
1588년, 명나라는 예허를 토벌하여 항복시켰다.[25][26][27][28][29][30][31] 이후 다이샨을 보좌하기 위해 캉글을 석방하고, 하다와 예허에 공칙을 분배하여 갈등을 완화하려 했다.[33][34] 캉글은 귀환 후 병사하고, 그의 공칙은 멍거불루에게 넘어갔다.[35] 멍거불루는 예허로 이주를 계획하고 어머니 온제를 데려갔으나, 온제는 유선염으로 사망했다.[36][37]
1591년, 다이샨은 예허의 계략으로 암살당했다.[41][42][39] 멍거불루는 하다로 돌아와 4대 국주로 즉위하고,[43] 명나라는 다이샨의 속부와 공책을 멍거불루에게 위탁했다.[44]
2. 4. 건주여진과의 전쟁
만력 10년(1582년) 음력 7월, 하다의 국주 완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들 사이에 권력 다툼이 벌어졌다. 완의 장남 풀간이 2대 국주로 즉위했으나, 사생아 동생 캉글을 살해하려다 실패하고, 캉글은 예허로 망명했다. 풀간은 즉위 1년 만에 병으로 급사했고,[2] 그의 아들 다이샨이 3대 국주로 즉위했다.[3][4][5] 멍거불루는 19세의 나이로 아버지의 직위를 이었지만, 나라를 통솔할 힘은 없었다.[6]만력 11년(1583년) 음력 7월, 예허 국주 칭기야누와 양기누 형제는 하다에 복수하기 위해 몽골 홀친부의 웅가다이[7] 등을 끌어들여 하다를 공격했다. 멍거불루는 명나라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명나라의 탄압 시도는 효과가 없었다. 예허는 멍거불루의 영토를 불태우고, 명나라에 하다를 처벌하라는 칙서를 요구했다. 같은 해 음력 12월, 예허는 다이샨과 멍거불루 등의 장원을 불태우고, 웅가다이의 기병을 이끌고 남관의 공물 시장을 공격하여 300명을 납치하고 공물 칙서[9]를 요구했다. 다이샨과 멍거불루는 기병 2,000명으로 맞섰지만 역부족이었다.[10][11][12]
만력 12년(1584년), 명나라 이성량이 칭기야누와 양기누 형제를 유인하여 처형했다.
만력 15년(1587년) 음력 4월, 예허 동성주 나림불이 몽골 호르친부 웅가다이의 기병 10,000명을 이끌고 하다 영토를 급습했지만, 명나라의 개입으로 위기를 넘겼다. 푸르간의 사망 소식을 들은 캉글이 하다로 돌아와 아버지 완의 측실 온제와 혼인했다. 온제는 예허의 전 국주 칭기야누와 양기누 형제의 여동생이자 멩거불의 어머니였다. 예허는 온제와 캉글을 이용하여 멩거불을 부추겨 다이샨과 대립하게 만들었다. 하다 국내는 다이샨, 멩거불, 캉글의 삼파전으로 내분이 일어나 국력이 약화되었다.
같은 해 음력 6월[13], 나림불이 웅가다이의 기병 5,000명을 이끌고 다이샨을 습격하자, 캉글이 다이샨의 속부를 선동하여 모반을 일으키고 재산을 약탈했다.[14] 멩거불도 캉글과 함께 다이샨의 아내를 납치해 살해했다.[15][16][17] 명나라는 멩거불의 입공 자격을 정지시키고, 그의 속부와 영지를 다이샨에게 귀속시켰지만,[18] 멩거불은 다이샨과 화해하지 않고 예허 서성주 부자이, 나림불과 함께 개원(현재 랴오닝성톄링시카이위안시)으로 들어갔다.[19][20] 이때 캉글과 온제[20]가 명나라 군대에 체포되었으나, 멩거불이 다이샨과 화해하지 않으면 온제의 목을 베겠다는 순무 고양겸의 경고에[21] 온제는 석방되었다. 멩거불은 나림불을 따라 다이샨을 공격하고 자신의 거주 부족을 불태운 후,[22][23][24] 석방된 어머니 온제를 데리고 예허로 도망쳤다. 멩거불의 용호장군 직은 박탈되었고, 왕감은 탄핵되어 해임되었다.
만력 16년(1588년), 예허는 멍거불루를 부추겨 다이샨 토벌을 꾀했지만,[38] 명나라는 부자이, 나림불, 멍거불루, 다이샨에게 서로의 원한을 잊고 함께 입조하도록 명령했다. 이후 부자이가 다이샨에게 딸과의 혼인을 허락했다.[39]
만력 19년(1591년) 음력 정월, 다이샨은 부자이의 딸을 얻기 위해 예허를 방문했지만, 예허 측의 계략으로 하다로 돌아가는 길에 나림불과 부자이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당했다.[40][41][42][39] 멍거불루는 다이샨 암살 소식을 듣고 하다로 돌아와 4대 국주에 즉위했다.[43] 명나라는 다이샨의 속부 및 공책 137도를 잠시 멍거불루에게 위탁했다.[44]
같은 해, 예허 동성주 나림불은 건주부에 사자를 보내 영토 할양을 요구했지만, 누르하치에게 거부당했다. 나림불은 멩게불, 휘발 국주 바인다리 등과 함께 다시 사자를 보내 누르하치를 위협했다.

만력 21년(1593년) 음력 6월, 누르하치는 풀룬 4부 연합군의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하다 속령의 풀기야치 부족을 급습하고, 복병을 숨겨 멩게불 등을 유인했다. 멩게불은 계략에 빠져 누르하치에게 포위되었지만, 복병에게 격퇴당해 퇴각했다(→ 부이쟈치 대전).
같은 해 음력 9월, 풀룬 4부에 몽골 등을 더한 9부 연합군이 누르하치 정벌을 위해 구르산에서 누르하치 군과 격돌했으나 대패했고, 멩게불은 또다시 도망쳤다. 이 전투에서 예허는 서성주 부자이가 살해당했고, 우라는 국주의 동생 부잔타이가 포로로 끌려갔다(→ 고륵산 전투).
만력 25년(1597년) 음력 정월, 예허를 필두로 풀룬 4국이 누르하치에게 강화를 요청했지만, 누르하치는 3년의 유예기간을 제시하며 경고했다. 그러나 나림불은 곧바로 배신하여 누르하치의 말을 약탈했다.
만력 26년(1598년), 멩게불 거성의 북쪽에 있는 계곡을 따라 피가 흘렀다.
2. 5. 하다부의 멸망
만력 27년(1599년) 음력 9월, 누르하치는 멍거불루의 거성인 하다 호톤(하다성)을 함락시키고, 멍거불루와 울구다이 부자를 포로로 잡아 하다의 부락을 약탈했다. 멍거불루는 이후 누르하치의 훈육을 받았다.[46]만력 28년(1600년) 음력 4월, 멍거불루는 누르하치의 첩인 파라와 간통하고,[48] 누르하치를 살해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이때, 모반을 사전에 알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가가이가 연좌되어 처형되었으며(파라도 처형[48]), 누르하치는 파라를 대신하여 멍거불루의 첩인 송대속대를 취했다.[48] 멍거불루의 아들 울구다이는 명나라의 개입으로 잠시 하다를 부흥시키지만, 명나라로부터 버림받아 나라를 재건하지 못한 채 예허의 침공을 계속 받아 누르하치에게 투항하여 하다는 완전히 멸망한다.
3. 가계
멍거불루의 가계는 『팔기만주씨족통보』 권23 "하다 지방 나라씨"에 기록되어 있다.[49] 멍거불루는 여러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은 울구다이이고, 차남은 게바쿠[49], 니에크세[49] 등이었다. 게바쿠는 누르하치에게 연행되었다가 명나라의 개입으로 하다로 귀환했다.[50] 니에크세는 여러 아들을 두었다. 울구다이의 동생 모로홍은 슈르하치의 딸과 결혼했으나, 명나라로 망명하려다 처형되었다.[51][52]
3. 1. 가계도
1대 | 2대 | 3대 | 4대 | 5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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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거불루 |
3. 2. 업적 및 영전
니에케세는 직능을 평가받아 3등 경거도위(三等輕車都尉)를 수여받았으며, 세 차례 은상으로 1등 경거도위 겸 1운기위(一雲騎尉)로 승진했다. 니에케세의 차남 훔부(훔부|Hūnbù중국어)는 이를 세습했지만, 병으로 퇴관했다. 훔부의 아들 닝간(닝간|Nínggān중국어)은 세습 시 니에케세의 은상에 가증분을 삭감당해 3등 경거도위로 강등되었다. 닝간 사후에는 아들 푸쇼우(푸쇼우|Fushòu중국어)가 세습했다.[1]4. 참고 문헌
- 모서징(茅瑞徵), 『동이보고(東夷考略)』, 1621년 (한문)
- 홍주(弘昼) 외, 『팔기만주씨족통보(八旗滿洲氏族通譜)』 권23, 하다 지방 납란씨(哈達地方納喇氏) 부분, 1744년 (한문)
- 오르타이(鄂爾泰, ortai), "han i araha jakūn gūsai manjusai hala be uheri ejehe bithe(흠정팔기씨족통보(欽定八旗氏族通譜))", 건륭 10년(1745)
- 편자 불명, 『만문노당(滿文老檔, ᠮᠠᠨᠵᡠ ᡳ ᠶᠠᡵᡤᡳᠶᠠᠨ ᡴᠣᠣᠯᡳmnc)』, 1775년 (만주어) *1905년 나이토 고난 발견.
- 편자 불명, 『대청력조실록(大清歷朝實錄, 청실록(清實錄))』 만주실록(滿洲實錄) 권2, 1781년 (만주어, 한문, 몽골어)
- 조이손(趙爾巽) 외, 『청사고(清史稿)』 권223, 청사관(清史館), 1928년 (한문)
- 안쌍성(安双成), 『만한대사전(满汉大辞典)』, 랴오닝 민족 출판사(遼寧民族出版社), 1993년 (중국어)
- 호증익(胡增益) 주편, 『신만한대사전(新满汉大词典)』, 신장 인민 출판사(新疆人民出版社), 1994년 (중국어)
- 마츠우라 시게루(松浦茂), 『청의 태조 누르하치(清の太祖 ヌルハチ)』, 하쿠테이샤(白帝社), 1995년
참조
[1]
문서
柳邊紀略, 八旗滿洲氏族通譜, 清史稿
[2]
문서
『清史稿』巻223に拠れば、フルガンは万暦10年旧暦8月に研修部の部落を襲撃している。万暦11年旧暦7月にはダイシャンが後を継いでいる為、フルガンの死亡した時期はこの間ということになる。
[3]
문서
『八旗滿洲氏族通譜』巻23、『滿洲實錄』巻1では[[萬 (女真人)|萬]]→子・[[フルガン (ハダナラ氏)|フルガン]]→弟・カングル→弟・メンゲブル(→子・[[ウルグダイ]])と国主が続いたとしている。一方、『清史稿』巻223の書き方はそこまで簡単ではない。それによると、カングルはフルガン統治時代にイェヘに亡命し、フルガン死後に帰還したが、フルガンの子・[[ダイシャン (ハダナラ氏)|ダイシャン]]、萬の末子・メンゲブルの三人で国を三分したとしている。その後、明朝の方針でダイシャンを擁立し、カングルを補佐にあてることになったが、カングル病死後、ダイシャンがメンゲブルとイェヘの共謀で殺害され、メンゲブルがハダの実権を握って国主に即位する。つまり、カングルがハダの実権を握ったことはなく、明朝の支持を受けていたこともない。明朝側の史料 (東夷考略) も『清史稿』と概ね同様。
[4]
서적
八旗滿洲氏族通譜 (Wikisource版)
https://zh.wikisourc[...]
四庫全書
2023-08-27
[5]
서적
滿洲實錄 (Wikisource版)
https://zh.wikisourc[...]
不詳
2023-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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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清史稿
https://zh.wikisourc[...]
清史館
[7]
문서
原文は「恍惚太」だが、これは蒙古語のウンガダイの音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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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ジュシェン-マンジュ史箚記二題
立命館東洋史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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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皇帝が出す勅書の内、[[朝貢]]の許可証に相当するものを特に「貢勅」(入貢勅書の意) と呼ぶ。
[10]
문서
维基百科「岱善」には「叶赫国主杨吉砮、清佳砮率部进攻哈达,虽然岱善与孟格布禄率两千骑兵将其击退,」とあり、『清史稿』223「萬」の「迎戰而敗」に拠ったのかも知れないが、この「敗」は目的語をとって「敗之」などとすれば「敗(や)ぶる」の意味で、目的語をとらない場合は「敗(ま)ける」の意味であり、恐らく現代語訳ミス。実際、同じく『清史稿』223の「楊吉砮」の項目には「襲敗孟格布祿」と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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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清史稿
https://zh.wikisourc[...]
清史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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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清史稿
https://zh.wikisourc[...]
清史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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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同じ内容の事件を記した文章が、『東夷考略』では万暦15年6月、『清史稿』巻223では万暦16年となっている。『清史稿』ではその文章の直後に万暦16年2月の内容が載っている為、上の「万暦16年」は1-2月の間ということになる。ちょうど年の変り目で怪しい為、ここでは『東夷考略』の説をと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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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東夷考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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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詳
[15]
문서
ダイシャンの妻を拉致した人物については、(確認できる限りでは) ①メンゲブルとカングルの共謀 (東夷考略)、②ナリムブル (清史稿-223) の二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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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東夷考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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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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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清史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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清史館
[18]
서적
清史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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清史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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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イェヘの本拠地は開原の北にあった為、明朝からは「北関」と呼ばれた。対してハダの本拠地は開原の南にあった為、「南関」と呼ばれた。ここでは「南関」ことハダに攻め込んだイェヘ軍が、開原を経由して「北関」、つまり自らの領地に引き上げることを指しているものと思われ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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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清史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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清史館
[21]
서적
清史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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清史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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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確認できる限りでは、「18の村落」(往"十八寨") とする説 (東夷考略) と、「18里の村落」(居"十八里寨") とする説 (清史稿) の二つがある。数字は特に重要ではないと判断し訳文からは削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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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東夷考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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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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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清史稿
https://zh.wikisourc[...]
清史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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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清史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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清史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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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清史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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清史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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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東夷考略』では軍を、『清史稿』巻223では城を棄てている。ここでは城の説に従った。*或いは城も軍も一切合切棄てて身一つで逃げたのかもしれな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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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清史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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清史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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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東夷考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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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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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清史稿
https://zh.wikisourc[...]
清史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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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清史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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清史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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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清史稿
https://zh.wikisourc[...]
清史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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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明末の女真は明朝から与えられる入貢勅書 (貢勅) をどれだけ手に入れられるかがそのまま勢力の強大さに通じた。珍品を明朝に貢げば莫大な富が懐に転がり込む為、勅書は正に大金そのものであった。そして、フルンの女真 ([[海西女直]]) に与えられる勅書は1,000と決まっていた。チンギヤヌ、ヤンギヌ兄弟の祖父・[[チュクンゲ]]は一定の勢力を有し、その1,000の勅書の内の過半数を保有していたが、明朝に忠義を尽くすハダ部の[[ワンジュ (ナラ氏)|ワンジュ・ワイラン]]がチュクンゲを誅滅した際にその勅書を横奪した。イェヘのハダに対する深い恨みはここに発する。その後、ワンジュの後を継いだ萬の時代になってハダは勅書をコンプリートしてしまうが、ハダの国力の衰頽と並行してイェヘが盛り返すと、徐々に勅書もイェヘに流れていった。
[34]
서적
東夷考略
https://zh.wikisourc[...]
不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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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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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東夷考略
https://zh.wikisourc[...]
不詳
[37]
서적
清史稿
https://zh.wikisourc[...]
清史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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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清史稿
https://zh.wikisourc[...]
清史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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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東夷考略
https://zh.wikisourc[...]
不詳
[40]
문서
『東夷考略』にみえる「擺思哈」([https://zh.wikisource.org/wiki/東夷考略 海西考]) と、『滿洲實錄』巻2にみえる「拜斯漢」(「[https://zh.wikisource.org/wiki/清實錄/滿洲實錄/卷二 ○時葉赫國主納林布祿遣部下伊勒當阿拜斯漢二人來謂……]」) は同一人物か。
[41]
문서
「ハダへ帰る道中」(東夷考略-女直考) とも、「姉に会いにゆく道中」(東夷考略-海西考) とも読めるが、ここでは前者をとった。
[42]
서적
東夷考略
https://zh.wikisourc[...]
不詳
[43]
서적
扈伦研究
不詳
[44]
서적
東夷考略
https://zh.wikisourc[...]
不詳
[45]
문서
清朝の史料にはっきりと「万暦27年に60道の貢勅を横奪した」とは書かれていないが、「(万暦29年) 納林布祿歸所掠敕六十道,」(清史稿-223) や「(万暦29年) 那林孛羅亦歸原擄勑六十道,」(東夷考略) とあるのが、直前のナリムブルによるハダ襲撃、即ち万暦27年の一件を指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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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滿洲實錄
https://zh.wikisourc[...]
不詳
[47]
서적
滿洲實錄
https://zh.wikisourc[...]
不詳
[48]
서적
東夷考略
https://zh.wikisourc[...]
不詳
[49]
문서
维基百科はウルグダイ、ゲバク、モロホン、ニェクセの順で挙げているが、典拠な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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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東夷考略
https://zh.wikisourc[...]
不詳
[51]
문서
维基百科は漢字表記を「莫洛渾」としているが、典拠なし。『清史稿』巻226に同表記がみえるが、[[覚羅氏|ギョロ氏]]の全くの別人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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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滿洲老檔
不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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