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사마트루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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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메르사마트루 전투는 1942년 6월, 리비아의 메르사마트루에서 벌어진 북아프리카 전역의 전투이다. 가잘라 전투에서 패배한 영국 제8군은 퇴각했고, 에르빈 롬멜이 이끄는 추축군은 영국군을 격파하기 위해 메르사마트루를 공격했다. 영국군은 롬멜의 기습적인 공격에 대응하여 분산되었고, 추축군은 메르사마트루를 점령하여 대규모 보급품을 확보했다. 이 전투로 영국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엘 알라메인에서 방어선을 구축하여 추축군의 진격을 저지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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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사마트루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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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전투명 | 메르사마트루 전투 |
일부 | 서부 사막 전역 |
위치 | 이집트 메르사마트루, 이집트 국경에서 동쪽으로 떨어진 곳 |
날짜 | 1942년 6월 26일 – 1942년 6월 29일 (3일) |
결과 | 독일-이탈리아 연합군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
교전국 2 | |
지휘관 | |
연합군 지휘관 | 클로드 오킨렉 |
추축군 지휘관 | Ettore Bastico 에르빈 롬멜 |
병력 규모 | |
연합군 | 전차 200대 |
추축군 | 독일군: 전차 60대 이탈리아군: 전차 40대 |
사상자 및 손실 | |
연합군 | 8,000명 사망, 부상 또는 포로 포로 전차 40대 노획 |
추축군 | 알 수 없음 |
관련 정보 |
2. 배경
가잘라 전투와 추축군의 토브루크 점령 이후, 영국 제8군은 동쪽으로 퇴각해야 했다. 영국군은 토브루크에 수비대를 남겨두었는데, 이는 제8군이 재편성되고 손실을 보충하는 동안 항구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영국 사령부는 토브루크를 장기간 포위 공격에 대비하지 않았고, 두 달 안에 수비대를 구원할 계획이었으나, 토브루크는 하루 만에 함락되었다. 이는 영국군에게 큰 심리적 타격을 주었으며, 아프리카 기갑군은 항구를 확보하여 충분한 보급품을 얻고, 포위군을 남겨둘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이탈리아와 독일이 이집트를 침공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에르빈 롬멜은 토브루크에서의 승리 후, 영국군이 재편성할 기회를 갖기 전에 제8군을 격파하고자 했다. 비록 그의 부대는 약화되었지만, 롬멜은 속도, 교활함, 기습을 통해 이를 극복하려 했다.
클로드 오친렉 중동 사령부 사령관은 사임을 제안했지만 거절되었다. 영국 사령부는 이집트 진격을 늦추기 위해 키레나이카-이집트 국경의 프론티어 와이어(철조망)를 따라 방어선을 구축하려 했다. 윌리엄 고트 중장이 지휘하는 영국 제13군단은 지연전을 수행할 예정이었으나, 방어 구축 시간이 부족했고, 제8군은 개방된 남쪽 끝을 방어할 기갑 전력이 부족했다. 고트는 메르사 마트루까지 약 193.12km 더 후퇴할 것을 권고했고, 영국 후위 부대는 국경에 버려진 연료와 탄약을 파괴했다. 고트는 Panzerarmee Afrikade와 교전하지 않고 철수했으며, 영국 사령부는 제8군에게 메르사 마트루에서 Panzerarmee Afrikade를 저지하라고 명령했다.
2. 1. 영국군 상황
가잘라 전투와 추축군의 토브루크 점령 이후, 영국 제8군은 혼란에 빠졌고, 사기가 저하되지는 않았지만 흔들리고 있었다.[1] 클로드 오친렉 중동 사령부 사령관은 지휘부 교체가 필요함을 인지하고 6월 25일 리치를 해임하고 제8군 사령관 직을 맡았다. 그는 제8군을 기동성을 강조하는 부대로 바꾸라는 지시를 받았고, 제8군의 온전함을 유지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임을 분명히 했다.오친렉은 알렉산드리아 직전의 마지막 방어 위치인 엘 알라메인에서 방어 태세를 준비했지만, 메르사 마트루에서 엘 알라메인 간극까지 기동 방어 전투를 벌일 예정이었다. 그는 비기동 부대가 기동 부대에 무력하다는 것을 알고 더 많은 부대를 잃을 여유가 없었다. 그는 영국 제13군단의 보병 부대가 완전히 기동화될 수 있도록 수송 수단을 전환했고, 메르사 마트루에서 싸우는 제8군 부대가 포위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2. 2. 추축군 상황
가잘라 전투와 추축군의 토브루크 점령 이후, 롬멜은 이집트로 진격하여 제8군을 격파하려 했다. 비록 아프리카 기갑군은 가잘라 전투로 인해 전력이 약화되었지만, 롬멜은 속도와 기습을 통해 영국군을 압박하려 했다.[1] 제21기갑사단은 재편성 후 해안 도로를 따라 이집트로 진격했다.롬멜은 무솔리니에게 제8군을 이집트까지 추격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았고, 국경에 남아 있던 영국군 보급품을 노획하여 연료, 장비, 탄약을 보충했다. 롬멜은 밤낮으로 진격했지만, 사막 항공대가 강화되어 기지에 더 가까이 작전하는 반면, 독일 루프트바페(Luftwaffe)와 이탈리아 왕국 공군(Regia Aeronautica|레지아 아에로나우티카it)은 기지에서 멀어져 공중 공격이 거세졌다.
3. 전초전
메르사 마트루는 사이레니카와 엘 알라메인 사이 철도에서 동쪽으로 약 193.12km 떨어진 작은 항구였다. 이 항구는 알렉산드리아와 연결되어 있었고, 작고 깊은 수역을 가진 약 2.41km 길이의 항구는 작은 토브룩과 유사했다.[1] 1940년 이집트 이탈리아 침공 이전에 요새화되었고, 십자군 작전을 위한 병력 증강 동안 더욱 강화되어 연합군의 마지막 해안 요새가 되었다.
이 도시는 내륙으로 약 16.09km 뻗어 절벽까지 이어지는 얇은 해안 평야에 위치했다. 더 남쪽으로는 시디 하마자 절벽까지 약 19.31km 뻗어 있는 두 번째 좁은 평야가 있었다. 이 절벽의 동쪽 끝에는 민카르 카임|Minqar Qaimar 트랙이 있었고, 절벽 너머에는 카타라 저지까지 남쪽으로 약 128.75km 뻗어 있는 높은 사막이 있었다. 도시 서쪽은 지뢰밭으로, 도시 남쪽 접근로 주변으로 확장되었지만, 요새 동쪽은 여전히 열려 있었다. 비행장은 바로 내륙에 있었고, 해안 도로(비아 발비아|Via Balbiait)는 도시를 통과하는 주요 퇴각로였다.
3. 1. 메르사 마트루

메르사 마트루(아랍어: مرسى, 닻)는 사이레니카와 엘 알라메인 사이의 철도에서 동쪽으로 약 193.12km 떨어진 작은 항구였다. 철도는 도시와 알렉산드리아를 연결했다. 항구는 길이가 약 2.41km였고 작고 깊은 수역의 닻을 포함하여, 작은 토브룩과 같았다.[1] 1940년 이집트 이탈리아 침공 전에 요새화되었고, 십자군 작전을 위한 병력 증강 동안 더욱 강화되었으며, 연합군의 마지막 해안 요새였다.
이 도시는 내륙으로 약 16.09km 뻗어 절벽까지 이어지는 얇은 해안 평야에 위치해 있다. 더 남쪽으로는 시디 하마자 절벽까지 약 19.31km 뻗어 있는 두 번째 좁은 평야가 있다. 이 절벽의 동쪽 끝에는 민카르 카임|Minqar Qaimar 트랙이 있다. 위쪽 절벽 너머에는 카타라 저지까지 남쪽으로 약 128.75km 뻗어 있는 높은 사막이 있다. 도시의 서쪽 접근로는 지뢰밭이었고, 이 지뢰밭은 도시의 남쪽 접근로 주변으로 확장되었지만, 요새의 동쪽 접근로는 여전히 열려 있었다. 비행장은 바로 내륙에 있었다. 해안 도로(비아 발비아|Via Balbiait)는 주요 퇴각로였으며 도시를 통과했다.
3. 2. 추축군 계획

롬멜은 영국군이 방어선을 구축하고 새로운 부대로 군대를 재건하기 전에 제8군을 각개 격파할 계획을 세웠다.[1] 가잘라에서 영국 기갑 부대에 큰 타격을 입힌 그는 메르사 마트루에 영국 보병을 가두어 대규모로 섬멸하려 했다.[1] 롬멜은 4개 보병 사단이 요새에 주둔하고 있으며, 영국 기갑 부대의 잔존 세력은 남쪽에 있다고 믿었다.[1] 그는 독일군 부대를 이용해 영국 기갑 부대를 밀어내고, 제90경보병사단을 이용해 마트루의 보병을 포위할 계획을 세웠다.[1]
사막 공군은 자동차 수송을 방해하는 것 외에도, 이탈리아 제20기동군단의 차량을 공격하여 포병 사령관 귀도 피아첸자 장군을 살해하고, 공병 사령관 비토리오 라파엘리 대령과 군단장 에토레 바스티코 장군에게 치명상을 입혔다. 이들은 6월 25일 제7기갑사단을 공격하기 위해 선두 부대 사이를 이동하던 중이었다.[1]

독일 정찰 부대는 6월 25일 저녁 메르사 마트루 외곽에 도달했다.[1] 롬멜은 다음 날 공격을 계획했지만, 6월 26일 아침 추축국 보급 부대가 파괴되어 연료 부족을 겪었고, 이로 인해 공격은 오후로 연기되었다.[1] 마트루의 영국군 배치에 대한 롬멜의 정보는 제한적이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항공 정찰 부족과 영국군이 가잘라 전투에서 점령하여 파괴한 621신호대대의 무선 통신 감청 부대 손실 때문이었다.[1]
3. 3. 영국군 계획
오킨렉은 XXX 군단을 주둔시키기 위해 메르사마트루에 방어선을 구축했지만, 알라메인 지역으로 옮겼다. X 군단(중장 윌리엄 홈스)은 두 개의 보병 사단과 함께 마트루 방어선을 맡았다. 제10 인도 보병 사단은 메르사마트루에, 제50 (노섬브리아) 보병 사단은 마을 동쪽 후방에 배치되었다. 남쪽에서는 XIII 군단이 두 번째 절벽 위 고지에 자리를 잡았다. 오킨렉은 군단 지휘관들에게 최대한 강력하게 저항할 것을 지시했다. 한 군단이 공격받으면 다른 군단은 추축군의 측면을 공격할 기회를 잡아야 했다.[1]XIII 군단은 제5 인도 보병 사단, 제2 뉴질랜드 사단, 제1 기갑 사단으로 구성되었지만, 제5 인도 보병 사단은 제29 인도 보병 여단만 보유했다. 제29 인도 보병 여단은 시디 하마자 절벽의 마을 남쪽에 배치되었다. 최근 시리아에서 도착한 제2 뉴질랜드 사단은 민카르 카임|민카르ar(곶 또는 절벽) 트랙의 절벽 동쪽 끝에 자리를 잡았다. 제22 기갑 여단(제1 기갑 사단)은 남서쪽으로 약 8.05km 떨어진 사막에 있었다. 제1 기갑 사단은 제7 기동 여단과 제4 기갑 여단(제7 기갑 사단)으로 보강되어 제8군의 남쪽 측면 기동을 보호했다. 기갑 부대는 가잘라 전투에서 거의 모든 전차를 잃었지만, 교체를 받아 60대의 미국산 그랜트 전차를 포함하여 159대의 전차를 보유했으며, 이 전차에는 75mm 포가 장착되어 있었다.[1]
군단 사이에는 절벽으로 둘러싸인 평원이 있었고, 이곳에는 29 인도 보병 여단의 Gleecol과 Leathercol로 가려진 얇은 지뢰밭이 있었다. 각 소부대에는 보병 소대 2개와 포병 분견대가 있었다. 명령과 반대 명령으로 영국 지휘관들은 혼란스러웠다. 영국군은 추축군과 교전하여 최대한 많은 소모를 강요해야 했지만, 포위되어 파괴될 위험은 없었다. 마트루에서 제8군 부대는 독일군과 이탈리아군보다 훨씬 강력했지만, 상충되는 목표로 인해 효과가 감소했다. 영국군 사이의 협조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군단 수준에서 통신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4. 전투 경과
6월 27일 새벽, 롬멜은 제90경보병사단에 진격을 재개하여 마트루 남쪽 약 27.36km 지점에서 더럼 경보병 제9대대(9th DLI)를 격파하라고 명령했다. 동쪽으로 이동하던 제90경보병사단은 제50(노섬브리아)보병사단 포병의 포격을 받아 엄폐해야 했다. 롬멜은 제21기갑사단과 함께 남쪽으로 진격했고, 포병 교전의 엄호 아래 제21기갑사단은 2차 뉴질랜드 사단의 전선을 가로질러 민카르 카임 동쪽 진격로로 측면 기동을 했다. 이 사단은 민카르 카임에서 제2뉴질랜드 사단 수송대에 돌입하여 흩어지게 만들었다. 뉴질랜드군은 제21기갑사단을 쉽게 막아냈지만, 퇴각로는 차단되었다. 같은 날 정오, 오친렉은 두 군단 지휘관에게 포위되어 파괴될 위험에 처하면 포위될 위험을 감수하기보다는 퇴각하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롬멜은 북쪽으로 이동하여 제90경보병사단과 합류하여 해안 도로를 차단하기 위해 진격을 재개하도록 했다. 어둠이 내린 후, 제90경보병사단은 해안 도로에 도달하여 제10군단의 퇴각을 막았다.
제2뉴질랜드 사단의 퇴각로가 차단되자, 고트는 그날 밤에 철수하기로 결정하고 제8군에 통보했다. 고트는 병력을 온전하게 철수시키는 데 몰두했기 때문에, 제90경보병사단이 해안 도로에 고립된 좁은 돌출부를 점령하고, 제21기갑사단은 약 24.14km 떨어져 뉴질랜드군에게 압박을 받고 있었으며, 제15기갑사단과 제20기동군단은 제1기갑사단에 의해 차단되어 위험한 상황에 처한 Panzerarmeede를 보지 못했다. 고트는 자신의 의도를 제8군에 전달했으며, 마트루에서 동쪽으로 약 약 48.28km 떨어진 푸카에 두 번째 지연 위치를 잡을 계획이었다.
6월 27일 21시 20분, 오친렉은 제8군에게 푸카로 후퇴하라고 명령했다. 이 시점에서 제2뉴질랜드 사단 사령관 버나드 프레이버그 장군은 파편에 의해 목에 부상을 입고, 지휘권을 제4뉴질랜드 여단 사령관 린지 메리트 잉글리스 준장에게 넘겼다. 잉글리스는 그의 여단을 사용하여 동쪽으로 돌파하기로 결정했고, 그 뒤를 사단 본부와 제5뉴질랜드 여단이 따르기로 했다. 독일군을 놀라게 하기 위한 사전 포격은 없었다. 공격 시작은 마오리 대대의 늦은 도착으로 인해 새벽 2시까지 지연되었다. 일단 편성된 세 대대는 절벽 아래로 출발했다. 제4뉴질랜드 여단은 백병전을 벌이며 Minqar Qaimar 트랙을 따라 제21기갑사단의 panzergrenadierde 대대의 위치로 직접 돌진했다. 독일 수비군은 뉴질랜드군이 거의 접근할 때까지 뉴질랜드군의 진격을 알지 못했고, 뉴질랜드군은 제21기갑사단의 위치를 뚫고 나갔다.
전투는 치열하고 혼란스러웠으며, 때로는 백병전도 벌어졌고, 독일군 부상자 중 일부는 뉴질랜드군이 통과하면서 총검으로 찔렸으며, 독일군은 이에 대해 공식적으로 항의했다. 제4뉴질랜드 여단은 진지의 반대편에 도달하여 재편성한 후 동쪽으로 탈출했다. 이 공격이 진행되는 동안 잉글리스는 지연과 다가오는 새벽에 대해 우려했고, 사단의 나머지 병력을 다른 경로로 데려가기로 결정했다. 그는 사용할 수 있는 수송 차량에 과부하를 가하여 사단 본부, 예비 그룹, 제5뉴질랜드 여단을 남쪽으로 이끌었고 제21기갑사단의 기갑 대대의 위치에 돌입했다. 이어진 혼란스러운 포격에서 여러 대의 트럭과 구급차에 불이 붙었지만 대부분의 병력은 간신히 탈출했다. 제13군단이 푸카로 철수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지만 제2뉴질랜드 사단이 이를 받았는지는 불분명하다. 사단의 병력은 동쪽으로 엘 알라메인까지 계속 이동했다. 3일간의 전투에서 뉴질랜드군은 지휘관을 포함하여 약 800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거의 10,000명이 탈출했다.
통신 오류로 인해, 오친렉의 철수 명령은 6월 28일 이른 아침까지 홀스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밤새도록 제10군단은 고트의 압력을 덜기 위해 남쪽으로 반격을 가했지만, 제13군단이 이미 떠났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홀스와 오친렉 사이에 짧은 논의가 있었고, 홀스는 가능한 한 요새를 유지하고, 해안 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공격하여 제90경보병사단과 싸우거나, 밤에 남쪽으로 돌파하기로 결정했다. 오친렉은 제10군단이 방어 위치를 고수하려 하지 않도록 분명히 했고, 해안 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싸우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홀스에게 부대를 열로 나누어 남쪽으로 돌파하라고 명령했다. 그들은 몇 마일을 더 가서 동쪽으로 방향을 돌려 엘 알라메인으로 향하도록 했다.
그날 밤, 제10군단은 소규모 부대로 집결하여 남쪽으로 돌파했다. Afrika Korpsde는 이동했고, 이탈리아군과 제90경보병사단만이 마트루를 포위했다. 그들이 통과하면서 주로 이탈리아군과의 격렬한 교전이 발생했다. 한 부대는 Afrika Korpsde 지휘부 구역으로 접근하는 경로를 선택했다. 롬멜의 Kampfstaffelde이 교전했고 참모 장교들은 스스로를 방어해야 했다. 잠시 후 롬멜은 그의 사령부를 남쪽으로 이동하여 전투에서 벗어났다.
제29인도보병여단은 6월 28일 늦은 오후에 푸카의 재집결 지점에 도착했고, 제21기갑사단이 뒤따랐다. 여단 사령관은 빠른 철수가 필요할 경우에 대비하여 수송 차량을 배치했지만, 제21기갑사단의 공격은 너무 빨랐고 여단은 압도되어 파괴되었다. 6월 29일 이른 아침, 제90경보병사단과 이탈리아군 제133기갑사단 "Littorio"가 메르사 마트루를 포위했다. 제10인도사단은 6월 28일 밤에 돌파하려 했지만 "Littorio"에 의해 격퇴되었다. 메르사 마트루 위치는 제27보병사단 "Brescia", 제102기동사단 "Trento"의 포병에 의해 폭격을 받았으며, 이는 제90경보병사단과 함께 요새를 포위하는 주력이었고, 보병 전투와 돌파 시도가 실패한 후, 요새는 항복을 모색했다. 6월 29일, 제7베르사글리에리 연대가 요새에 진입하여 6,000명의 영국군 병사의 항복을 받아들였고, 많은 물자와 장비를 포획했다.
제90경보병사단은 휴식을 취할 시간도 없이 빠르게 해안 도로를 따라 퇴각하는 제8군을 따라갔다. 제90경보병사단의 일지에는 "우리의 모든 힘든 싸움 끝에, 우리는 휴식을 취하거나 바다에서 목욕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고 적혀 있다. 제21기갑사단은 푸카 근처에서 일부 영국군 부대를 가로막아 1,600명의 포로를 더 잡았다. 롬멜은 Afrika Korpsde를 내륙으로 약 약 24.14km 돌려 제8군의 더 많은 병력을 차단하려 했다. 양측의 소규모 부대가 엘 알라메인을 향해 사막의 울퉁불퉁한 지면을 가로질러 질주했다. 부대들이 뒤섞이고 혼란스러워졌고, 적대적인 부대들이 서로 평행하게 달렸으며, 독일군 부대가 때로는 퇴각하는 영국군보다 먼저 달리기도 했다. 부대들은 때때로 교전을 벌였고, 대부분의 Panzerarmeede 수송 차량이 영국 또는 미국 장비를 포획했기 때문에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기 어려웠다.
4. 1. 6월 26일
6월 26일, 추축군의 공격은 부대 배치와 연료 보급 지연으로 인해 오후 중반이 되어서야 시작되었다.[1] 제21기갑사단은 마트루 상공의 두 절벽 사이 평원을 가로질러 이동했고, 제90경보병사단은 왼쪽 측면에, 제15기갑사단은 제2 절벽 상공의 평원을 가로질러 이동했으며, 제20기동군단이 뒤따랐다. 제90경보병사단과 제21기갑사단은 지뢰밭을 통과하여 영국군을 물리쳤다. 제15기갑사단은 높은 사막 평원에서 제22기갑여단과 마주쳐 진격이 저지되었다.
5. 결과
메르사마트루 전투는 제8군의 배치 문제, 롬멜의 오판, 영국군 내 보병과 기갑 부대 간 협력 부족으로 인해 연합군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다.[1] 이로 인해 제10군단은 큰 피해를 입고 흩어졌으며, 제10군단의 60%만이 엘 알라메인으로 후퇴할 수 있었다.
전투 후, 프리드리히 폰 멜렌틴은 오킨렉의 망설임이 영국군에게 큰 기회를 놓치게 했으며, 이는 회복하기 어려운 패배로 이어졌다고 평가했다.
제1차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오킨렉은 제8군을 재집결시켜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했다. 양측 모두 지친 상태였지만, 영국군은 주요 지점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연합군은 위기를 극복하고 병력을 증강하여 공세로 전환할 준비를 시작했다. 이 전투는 롬멜의 이탈리아 군에게 큰 사기 진작이 되었는데, 비록 독일군 지휘 하에 있었지만 전투의 주된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5. 1. 인명 및 물자 피해

메르사마트루 전투에서 연합군은 약 8,000명의 포로를 잃었는데, 이 중 6,000명이 메르사마트루에서 잡혔다. 또한 40대의 영국 전차가 손실되었다. 추축군은 대규모 보급품을 점령하여 한 개 사단에 충분한 장비를 확보했다.
메르사마트루 비행장은 알렉산드리아 해군 기지에서 약 257.49km 떨어져 있었고, 지중해 함대는 동지중해 항구로 분산되었다.
5. 2. 전략적 영향
메르사마트루 전투는 제8군의 배치, 롬멜의 오해, 그리고 영국 보병과 기갑 부대 간의 만성적인 조정 부족이 특징이었다.[1] 종전 후 헨리 메이틀랜드 윌슨 원수는 "제13군단은 사라졌고 제10군단만 곤경에 처했다"고 말했다. 홀름스는 제10군단의 60%만이 엘 알라메인으로 돌아갔다고 추정했다. 롬멜의 정보 장교였던 프리드리히 폰 멜렌틴은 "오킨렉의 망설임으로 인해 영국군은 Panzerarmeede를 파괴할 좋은 기회를 놓쳤을 뿐만 아니라, 쉽게 회복할 수 없는 재앙으로 이어질 수 있는 심각한 패배를 겪었다. 메르사마트루 전투만큼 교훈적인 전투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메르사마트루에서 탈출한 후, 제10군단은 흩어져 조직력이 저하되었고, 제1차 엘 알라메인 전투 초반에 참여할 수 없게 되어 "델타 부대"로 나일강으로 철수했다. 제2뉴질랜드 사단은 푸카에서 재정비하지 않고 엘 알라메인으로 계속 진격하여 엘 알라메인 방어선에 배치되었다. 전투 중 연합군은 약 8,000명의 포로를 잡았는데, 이 중 6,000명이 메르사마트루에서 잡혔으며, 40대의 영국 전차도 손실되었다. 추축군은 대규모 보급품을 점령했고, 한 개 사단에 충분한 장비를 확보했다.
메르사마트루 비행장에서 작전하는 추축군 항공기는 알렉산드리아 해군 기지에서 약 257.49km 떨어져 있었고, 지중해 함대는 동지중해 항구로 분산되었다. 미국 육군 정보부장은 이집트 내 영국군의 입장이 일주일도 안 되어 붕괴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사람들은 팔레스타인으로 동쪽으로 도망쳤고, 카이로의 하늘은 불타는 공식 및 비밀 문서의 연기로 자욱했다("재의 수요일"). 영국 영사관은 비자를 요청하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영국군은 나일 삼각주의 여러 지역을 침수시키고 기반 시설을 파괴할 준비를 했으며, 알렉산드리아와 수에즈 운하에 방어 진지를 구축했다. 초토화 작전은 논의되었지만, 실행하지 않기로 결정되었다.
멜렌틴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오친렉은 제8군을 다시 집결시켰고, 한 달간의 전투를 통해 제1차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독일군의 진격을 막았다. 전투가 끝났을 때 양측 모두 지쳐 있었지만, 영국군은 여전히 중요한 지점을 지키고 있었다.
연합군의 위기는 지나갔고, 제8군은 공세로 전환하기 위해 병력을 증강하기 시작했다. 이 전투는 또한 롬멜의 이탈리아 군에게 큰 사기 진작 역할을 했는데, 비록 독일 지휘 하에 있었지만 주로 그들이 수행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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