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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 (프로뱅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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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멘(Maine)은 프랑스의 옛 프로뱅스로, 철기 시대부터 로마 시대까지 아울레르키 케노마니 부족이 거주했으며, 6세기경 부족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8세기와 9세기에는 카롤링거 왕조가 케노마니 공국을 분봉령으로 사용했고, 이후 노르망디와 브르타뉴의 침략으로 전략적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11세기에는 앙주와 노르망디 간의 분쟁 중심지가 되었으며, 1066년 노르만 정복의 기반이 되었다. 1129년부터 1204년까지 앙주 제국에 속했고, 1331년 프랑스 왕국의 귀족이 되었다. 프랑스 혁명 동안에는 슈앙 반혁명의 중심지였으며, 혁명 이후 마옌주와 사르트주의 일부가 되어 페이 드 라 루아르 지역에 통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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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 (프로뱅스) - [지명]에 관한 문서
지리적 위치
1789년 프랑스 내 메인의 위치
1789년 프랑스 내 메인의 위치
기본 정보
이름메인
공식 이름(정보 없음)
별칭(정보 없음)
메인 (프로뱅스) 깃발
메인 깃발
메인 문장
메인 문장
국가프랑스
좌석(정보 없음)
역사
설립 제목(정보 없음)
설립 날짜(정보 없음)
지리
면적(정보 없음)
고도(정보 없음)
최대 고도(정보 없음)
최소 고도(정보 없음)
인구
인구(정보 없음)
시간대
시간대CET
UTC 오프셋(정보 없음)
여름 시간 (DST)(정보 없음)
UTC 오프셋 (DST)(정보 없음)
기타 정보
우편 번호 유형(정보 없음)
우편 번호(정보 없음)
지역 코드(정보 없음)
웹사이트(정보 없음)

2. 역사

철기 시대로마 시대에 아울레르키 케노마니가 이 지역에 거주했다. 멘이라는 지명은 6세기경 이들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으며, 당시에는 ''in Cinomanico''(765년에는 ''*pago Celmanico'', 12세기부터는 ''*Cemaine'', 이후 ''르 멘''으로 불렸다)라고 불렸다.[1]

카롤링거 왕조 시대인 8세기와 9세기에는 분봉령으로 사용된 케노마니 공국(ducatus Cenomannicus)이 존재했다. 이 공국은 변경백령으로, 메인을 포함한 여러 군을 포함했을 수 있으며, 노르망디 저지를 거쳐 센 강까지 뻗어 있었다.[1] 피핀 3세는 이 공국을 이복 형제인 그리포에게 주었고, 이후 샤를마뉴는 그의 어린 아들 젊은 샤를에게 넘겨주었다. 샤를마뉴의 손자인 대머리 샤를과 그의 아들 말더듬이 루이가 이 작위를 상속받았다. 9세기 후반, 메인은 노르망디브르타뉴의 침략으로 인해 전략적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프랑스의 라울 왕은 924년 메인을 노르망디 공작롤로에게 주었다고 전해진다.

앙주노르망디 사이에 위치한 메인은 11세기 초, 메인 백작 휴 3세가 앙주 백작 풀크 3세를 주군으로 인정하면서 분쟁의 중심지가 되었다. 1063년,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훗날 정복왕 윌리엄)은 메인을 침공하여 점령했다. 1069년, 르망 시민들이 노르만족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1070년에 노르만족을 몰아냈다. 이후 메인의 휴 5세가 메인 백작으로 선포되었으나, 실권은 마옌의 조프루아 2세에게 있었다. 메인 백작 엘리아스 1세가 앙주 백작 풀크 5세와 그의 딸과 결혼하면서 1110년 메인은 다시 앙주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풀크의 아들 앙주 백작 제프리 플랜태저넷은 멘을 상속받았고, 그의 아들 잉글랜드 왕 헨리 2세에게 넘어갔다. 헨리 2세는 1150년부터 노르망디 공작이었기 때문에 앙주, 멘, 노르망디는 처음으로 같은 지배자를 갖게 되었다. 사자왕 리처드는 잉글랜드, 노르망디, 아키텐, 앙주, 브르타뉴, 멘, 투렌을 통치했는데, 이 지역들을 통틀어 앙주 제국이라고 불렀다. 리처드가 1199년에 사망하자 계승 전쟁이 발발했고, 잉글랜드 왕 존은 잉글랜드 왕으로 인정받았지만, 노르망디, 투렌, 앙주, 멘의 플랜태저넷 영지는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에 의해 침략 및 정복되었다.[4]

1331년, 멘 백작은 프랑스 왕국의 귀족이 되었다.[1] 1424년 베르뇌유 전투 이후, 잉글랜드는 멘을 점령했고, 랭커스터의 존이 공작 칭호를 받았다.[2] 잉글랜드는 1448년까지 르 망을, 1449년까지 프레스네를 점유했다.[2] 1481년, 앙주 공작 샤를 4세는 자신의 영지를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에게 유증하여, 멘은 다시 왕실로 귀속되었다.[2]

프랑스 혁명 초기, 멘 지역 인구의 일부는 혁명을 지지했다. 그러나 혁명의 확산과 유럽 국가들의 반대로 전쟁이 발발했고, 프랑스 공화국은 군인 징집을 강요했다. 멘, 노르망디 남부, 브르타뉴 동부 지역의 젊은이들은 입대를 거부하고 슈앙이라는 비밀 군대를 조직했다.[1] 이들은 로마 가톨릭교를 지지하는 농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반혁명의 중심지가 되었다.[1] 프랑스 혁명 이후, 멘은 마옌주와 사르트주로 나뉘어 현재의 페이 드 라 루아르 레지옹에 속하게 되었다.[1]

2. 1. 고대

철기 시대와 로마 시대에 아울레르키 케노마니가 이 지역에 거주했다. 멘이라는 지명은 6세기경 이들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며, 당시에는 ''in Cinomanico''(765년에는 ''*pago Celmanico'', 12세기부터는 ''*Cemaine'', 이후 ''르 멘''으로 불렸다)라고 불렸다.[1]

2. 2. 중세 초기

8세기와 9세기에 카롤링거 왕조의 여러 왕들이 분봉령으로 사용한 케노마니 공국(ducatus Cenomannicus)이 존재했다. 이 공국은 변경백령으로, 메인을 포함한 여러 군을 포함했을 수 있으며, 노르망디 저지를 거쳐 센 강까지 뻗어 있었다. 748년, 당시 궁재였으며 왕 다음으로 프랑키아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이었던 피핀 3세는 이 공국을 이복 형제인 그리포에게 주었다. 790년 샤를마뉴는 이 공국을 그의 어린 아들 젊은 샤를에게 넘겨주었다. 샤를마뉴의 손자인 미래의 대머리 샤를과 그의 아들 말더듬이 루이가 이 작위를 상속했다. 샤를마뉴의 사위인 로르곤은 832년에서 839년까지 메인 백작이었다. 9세기 후반에 메인은 노르망디브르타뉴의 침략으로 인해 전략적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로르곤의 아들 고즈프리드는 차례로 메인 백작이 되었다. 그는 브르타뉴의 솔로몬과 싸웠고, 866년에는 브리사르트 전투에 강력공 로베르와 함께 프랑크의 노이스트리아 변경백으로 참여했다. 고즈프리드가 사망하자 대머리 샤를은 고즈프리드의 아이들이 그 역할을 수행하기에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노이스트리아의 라게놀드에게 작위뿐만 아니라 군과 더 넓은 노이스트리아 변경백령을 부여했다. 르노 드 에르보쥬의 아들일 수도 있는 라게놀드는 885년 루앙을 약탈하던 바이킹과 싸우다 사망했다.

프랑스의 라울 왕은 924년 메인을 노르망디 공작롤로라는 노르드 귀족에게 주었다고 전해진다.

2. 3. 중세 성기

앙주노르망디 사이에 위치한 메인은 11세기 초, 메인 백작 휴 3세가 앙주 백작 풀크 3세를 주군으로 인정하면서 분쟁의 중심지가 되었다.

1063년,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훗날 정복왕 윌리엄)은 메인을 침공하여 점령했다. 메인의 허버트 2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윌리엄은 자신의 아들 로베르 쿠르토즈와 허버트 2세의 누이 마르그리트의 약혼을 근거로 메인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했다. 이로써 메인은 노르만 정복의 주요 거점이 되었으며, 이는 1066년 윌리엄의 잉글랜드 정복을 가능하게 한 요인 중 하나였다.[4]

1069년, 르망 시민들이 노르만족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1070년에 노르만족을 몰아냈다. 이후 메인의 휴 5세가 메인 백작으로 선포되었으나, 실권은 마옌의 조프루아 2세에게 있었다. 이후에도 노르만족의 공격이 계속되었지만, 메인 백작 엘리아스 1세가 앙주 백작 풀크 5세와 그의 딸과 결혼하면서 1110년 메인은 다시 앙주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잉글랜드의 헨리 1세는 그가 노르망디 공작을 자신의 주군으로 인정하는 한에서 엘리아스 1세를 메인 백작으로 인정했다.

2. 3. 1. 플랜태저넷 시대 (1129-1204)

풀크의 아들 앙주 백작 제프리 플랜태저넷은 멘을 상속받았다. 제프리가 1151년에 사망하자 그의 아들 잉글랜드 왕 헨리 2세에게 넘어갔다. 헨리는 1150년부터 노르망디 공작이었기 때문에 앙주, 멘, 노르망디는 처음으로 같은 지배자를 갖게 되었다. 헨리는 후에 잉글랜드에 플랜태저넷 왕조를 창건했다.

사자왕 리처드는 잉글랜드, 노르망디, 아키텐, 앙주, 브르타뉴, 멘, 투렌을 통치했는데, 이 지역들을 통틀어 앙주 제국이라고 불렀다. 리처드가 1199년에 사망하자 1204년까지 이어진 계승 전쟁이 발발했다. 잉글랜드 왕 존은 잉글랜드 왕으로 인정받았지만, 노르망디, 투렌, 앙주, 멘의 플랜태저넷 영지는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에 의해 침략 및 정복되었다.[4] 침략 기간 동안 프랑스 원수 윌리엄 데 로슈가 프랑스 왕을 대신하여 투렌, 앙주, 멘을 점령했다.

2. 4. 중세 후기

1331년, 멘 백작은 프랑스 왕국의 귀족이 되었다.[1]

1424년 베르뇌유 전투 이후, 잉글랜드는 멘을 점령했고, 랭커스터의 존이 공작 칭호를 받았다.[2] 잉글랜드는 1448년까지 르 망을, 1449년까지 프레스네를 점유했다.[2] 1481년, 앙주 공작 샤를 4세는 자신의 영지를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에게 유증하여, 멘은 다시 왕실로 귀속되었다.[2]

2. 5. 프랑스 혁명

초기에 멘 지역 인구의 일부는 파리에서 일어난 프랑스 혁명을 지지했다. 혁명의 확산과 다른 유럽 국가들의 전반적인 반대는 전쟁을 촉발했고, 이는 새로 건립된 프랑스 공화국 당국이 유럽의 적들과 싸울 군인들을 징집하도록 강요했다.[1] 군인의 수요 증가는 멘, 노르망디 남부, 브르타뉴 동부 지역에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했다.[1] 젊은이들은 입대를 거부하고 사라져 숨는 것을 선호했다.[1] 그들은 일종의 비밀 군대를 조직했고, 그들의 지도자 장 코테로의 별명에서 따온 슈앙이라는 이름을 얻었다.[1] 이러한 지도자들과 함께 멘은 빠르게 슈앙 반혁명의 중심지가 되었다.[1] 그들은 행정부와 군대가 사제들과 로마 가톨릭교를 대하는 방식에 충격을 받은 농민들로부터 곳곳에서 지역적 지지를 받았다.[1]

2. 6. 근대

프랑스 혁명 이후, 멘은 마옌주와 사르트주로 나뉘어 현재의 페이 드 라 루아르 레지옹에 속하게 되었다.[1]

3. 갤러리

갈로로마 및 중세 시대 르망의 도시 성벽


마옌 보카주-울타리


생트-수잔 파노라마

4. 참고 문헌


  • 파트리스 모렐, 〈9세기 메인 백작〉, 《메인 역사 및 고고학 저널》, 르망, 2005, 4° 시리즈 T.5, 컬렉션 CLVI권, 177–264쪽 (주요 인물 색인 포함; 참고 문헌).[1]
  • 로베르 라투슈, 〈메인의 초기 세습 백작〉, 《메인 역사 및 고고학 저널》, 르망, 1959, 컬렉션 CXV권, 37–41쪽[2]
  • 로베르 라투슈, 《10~11세기 메인 백작령의 역사》, 파리, 고등 연구 학교 도서관, 1910.[3]
  • 제라르 루이즈, 〈10~12세기 벨렘 영지〉, 《바스-노르망디》, 1990, 3호 (199), 161–175쪽[4]
  • 장-피에르 브륑테르, 〈메인 공작령과 브르타뉴 변경 지역〉, 《뇌스트리: 650년부터 850년까지 루아르 북쪽의 국가》, 하르트무트 아트스마 발행, 국제 역사 콜로키움, 1989, 1권.
  • 프랑수아 뇌뵈, 《공작에서 왕까지의 노르망디 10~12세기》, 렌, 웨스트-프랑스, 1998
  • 오귀스트 브리, 《메인과 앙주, 역사적, 고고학적, 그리고 그림처럼 아름다운 이야기. 사르트, 마옌, 메인-에-루아르 부서의 예술 및 역사와 관련된 가장 주목할만한 유적지와 기념물 모음집》, 낭트 및 파리, 1856–1860;
  • 아베 앙고, 〈메인 자작〉, 《마옌 역사 및 고고학 위원회 회보》, 1914, 30호, 180–232쪽, 320–342쪽, 404–424쪽.

참조

[1] 서적 Toponymie générale de la France Librairie Droz 1990
[2] 서적 la Normandie avant les Normands, de la conquête romaine à l'arrivée des Vikings Ouest-France 2002
[3] 간행물 Les Annales de Flodoard
[4] 서적 King John: An Underrated King https://books.google[...] Anthem Press 2019-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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