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주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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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앙주 제국은 12세기 잉글랜드 왕 헨리 2세와 그의 아들 리처드 1세, 존이 지배했던 광대한 영토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1887년 처음 사용되었으며, 잉글랜드, 프랑스,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일부, 웨일스, 브르타뉴 등을 포함했다. 헨리 2세는 아키텐 공작과의 결혼, 노르망디 공국 상속 등을 통해 영토를 확장했고, 헨리 2세 사후 리처드 1세가 제3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는 동안 동생 존이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와 결탁하여 영토를 잃으며 쇠퇴했다. 존 왕은 1215년 마그나 카르타에 서명했으나, 프랑스 왕세자 루이의 잉글랜드 침공으로 이어졌고, 헨리 3세 즉위 후 램베스 조약으로 앙주 제국은 붕괴되었다. 앙주 제국은 문화적으로 고딕 건축의 발달과 영국 왕실 문장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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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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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명칭 (프랑스어) | Empire Plantagenêt |
유형 | 동군연합 |
정치 체제 | 봉건 군주제 |
수도 | 공식적인 수도는 없음. 궁정은 일반적으로 앙제와 시농에서 열림. |
공용어 | 고대 프랑스어 |
기타 사용 언어 | 바스크어 중세 브르타뉴어 중세 콘월어 노르만 프랑스어 컴브리아어 중세 영어 중세 아일랜드어 고대 오크어 중세 웨일스어 |
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 (공식) |
통화 | 프랑스 리브르, 은 페니, 금 페니 |
역사 | |
성립 | 1154년 |
주요 사건 시작 | 헨리 2세가 잉글랜드 왕국을 상속받음 |
시작 날짜 | 1154년 10월 25일 |
주요 사건 1 | 앵글로-노르만 아일랜드 침공 |
사건 1 날짜 | 1169년–1177년 |
주요 사건 2 | 필리프 2세의 노르망디 침공 |
사건 2 날짜 | 1202년–1204년 |
주요 사건 종료 | 시농 휴전 협정 |
멸망 | 1214년 |
종료 날짜 | 1214년 9월 28일 |
지도자 | |
직책 | 국왕, 공작, 백작, 영주 |
지도자 1 | 헨리 2세 |
지도자 1 통치 기간 | 1154년–1189년 |
지도자 2 | 리처드 1세 |
지도자 2 통치 기간 | 1189년–1199년 |
지도자 3 | 엘레오노르 다키텐 (아키텐만 해당) |
지도자 3 통치 기간 | 1154년–1204년 |
지도자 4 | 존 |
지도자 4 통치 기간 | 1199년–1214년 |
현재 국가 |
2. 용어 및 개념
"앙주 제국(Angevin Empire)"은 플랜태저넷 왕조의 헨리 2세와 그의 아들들인 리처드 1세, 존이 지배했던 영토를 정의하기 위해 만들어진 새로운 용어이다. 조프루아 2세는 브르타뉴를 통치하며 별개의 계보를 세웠다. 앙주 가문의 지배하에 있던 지역을 가리키는 당대의 용어는 없었지만, "우리 왕국과 우리의 지배를 받는 모든 것"과 같은 묘사가 사용되었다.[40] "앙주 제국"이라는 용어는 케이트 노게이트가 1887년 출판한 저서 『앙주 왕조 시대의 잉글랜드』에서 처음 사용되었다.[41] 프랑스에서는 플랜태저넷 지역(espace Plantagenet)이라는 용어가 플랜태저넷 가문이 획득한 영지를 묘사하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42]
"앙주"라는 용어는 앙주 백국과 그 역사적 수도인 앙제 주민들을 가리키는 지방 명칭(demonym)이다. 플랜태저넷 가문은 제프리 1세로부터 계승되었기에 이 용어가 사용된다.[43]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따르면 이 지방 명칭은 1511년부터 사용되었다.
"제국"이라는 용어의 사용은 당시 상황에 대한 정확한 묘사인지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 지역은 헨리가 상속받고 획득한 영토들의 집합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영토들이 공통의 정체성을 공유했는지, 따라서 "제국"이라는 용어로 명명되어야 하는지 불분명하다.[44][45][46] 일부 역사가들은 이 용어가 당시 실제로 제국이라고 불린 서유럽의 유일한 정치 구조인 신성 로마 제국에만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비록 알폰소 7세가 1135년에 "전 스페인의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했지만 말이다. 다른 역사가들은 헨리 2세의 제국은 강력하지도 않았고, 중앙집권화되지도 않았고, 제국이라고 부를 만큼 크지도 않았다고 주장한다.[48] 게다가 플랜태저넷 가문은 "앙주 제국"이라는 용어에서 암시하는 것과 같은 어떤 종류의 제국 칭호도 주장하지 않았다.[49] 그러나 플랜태저넷 가문 자신은 제국 칭호를 주장하지 않았더라도, 종종 헨리 2세를 위해 일하는 편년사들은 이 영토들의 집합을 묘사하기 위해 "제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50] 최고 칭호는 "잉글랜드 국왕"이었고, 프랑스에서 보유한 여러 지역의 공작과 백작의 다른 칭호들은 왕실 칭호와 완전히 독립적이었으며 어떤 영국 왕실 법에도 종속되지 않았다.[51] 이러한 이유로 W. L. 워렌과 같은 일부 역사가들은 "제국"이라는 용어 대신 "연방(commonwealth)"이라는 용어를 선호하며, 앙주 제국은 서로 느슨하게 결합된 7개의 완전히 독립적인 주권 국가들의 집합체에 불과했고, 잉글랜드 국왕의 인격적 통합에 의해서만 통합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52]
2. 1. 앙주 제국 (Angevin Empire)
앙주 제국(Angevin Empire)은 플랜태저넷 왕조의 헨리 2세와 그의 아들들인 리처드 1세, 존이 통치했던 영토를 가리키는, 근대에 만들어진 용어이다. 헨리 2세의 또 다른 아들 조프루아 2세는 브르타뉴를 통치하고 별도의 가문을 세웠다. 당시에는 앙주 가문의 지배하에 있던 지역을 가리키는 용어가 없었지만, "우리 왕국과 우리의 지배를 받는 모든 것"과 같은 표현이 사용되었다.[40] "앙주 제국"이라는 용어는 1887년 케이트 노게이트가 저술한 『앙주 왕조 시대의 잉글랜드(England under the Angevin Kings)』에서 처음 사용되었다.[41] 프랑스에서는 플랜태저넷 가문이 획득한 영지를 묘사하기 위해 "플랜태저넷 지역(espace Plantagenet)"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도 한다.[42]"앙주 제국"이라는 용어의 채택은 이 연합이 지속된 반세기 동안 영국과 프랑스의 영향력이 영토 전체에 걸쳐 확산되었기 때문에 당시를 재평가하는 것을 의미한다. "앙주(Angevin)"라는 용어 자체는 앙주 백국과 그 역사적 수도인 앙제 주민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플랜태저넷 가문은 앙주 백작 조프루아 1세로부터 계승되었기에 이 용어가 사용된다.[43]
"제국"이라는 용어의 사용은 이 지역이 헨리가 상속받고 획득한 영토들의 집합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영토들이 공통의 정체성을 공유했는지, 따라서 "제국"이라는 용어로 명명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44][45][46] 일부 역사가들은 이 용어가 당시 실제로 제국이라고 불린 서유럽의 유일한 정치 구조인 신성 로마 제국에만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47] 다른 역사가들은 헨리 2세의 제국은 강력하지도, 중앙집권화되지도, 제국이라고 부를 만큼 크지도 않았다고 주장한다.[48] 게다가 플랜태저넷 가문은 "앙주 제국"이라는 용어에서 암시하는 것과 같은 어떤 종류의 제국 칭호도 주장하지 않았다.[49] 그러나 플랜태저넷 가문 자신은 제국 칭호를 주장하지 않았더라도, 종종 헨리 2세를 위해 일하는 편년사들은 이 영토들의 집합을 묘사하기 위해 "제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50]
최고 칭호는 "잉글랜드 국왕"이었고, 프랑스에서 보유한 여러 지역의 공작과 백작의 다른 칭호들은 왕실 칭호와 완전히 독립적이었으며 어떤 영국 왕실 법에도 종속되지 않았다.[51] 이러한 이유로 W. L. 워렌(W. L. Warren)과 같은 일부 역사가들은 "제국"이라는 용어 대신 "연방(commonwealth)"이라는 용어를 선호하며, 앙주 제국은 서로 느슨하게 결합된 7개의 완전히 독립적인 주권 국가들의 집합체에 불과했고, 잉글랜드 국왕의 인격적 통합에 의해서만 통합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52]
2. 2. 플랜태저넷 왕조 (Plantagenet dynasty)
앙주 제국 내에서 잉글랜드는 가장 확고한 통제를 받았다. 이는 국가를 통치하는 여러 관직들의 오랜 역사와 확립된 전통 및 관습 덕분이었다. 잉글랜드는 여러 개의 셔로 나뉘었고, 각 셔에는 보안관이 영미법을 시행했다. 국왕이 대륙에 있는 동안에는 대법관이 임명되어 국왕을 대신했다. 잉글랜드 국왕들은 잉글랜드보다 프랑스에 더 자주 머물렀기 때문에 앵글로색슨 왕들보다 문서를 더 자주 사용했는데, 이는 실제로 잉글랜드에 유익한 것으로 판명되었다.[1] 윌리엄 1세 통치하에 앵글로색슨족 귀족들은 대부분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토지를 나눠 가진 앵글로노르만족 정착민들로 대체되었다. 이로 인해 그들이 국왕에게 반란을 일으키고 모든 토지를 동시에 방어하는 것이 훨씬 어려워졌다. 잉글랜드 백작들의 권력은 마틸다와 스티븐 사이의 무정부 상태 동안 성장했는데, 이들은 여러 남작들에게 백작령을 부여하여 지지자를 확보하려 경쟁했다. 그러나 헨리 2세부터 이러한 상황은 역전되어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백작의 수가 24명에서 12명으로 절반으로 줄었다.[2] 잉글랜드는 대신 국고에 의존하여 통치 군주를 대신하여 재정적 및 행정적 통제를 제공했다.[3]웨일스는 플랜태저넷 왕가에 충성을 맹세하고 그들을 영주로 인정하는 조건으로 좋은 조건을 얻었다.[4] 그러나 웨일스는 거의 자치적인 상태를 유지했다. 웨일스는 플랜태저넷 왕가에 보병과 장궁병을 제공했다.[5]
2. 3. 에스파스 플랑타주네 (Espace Plantagenêt)
Espace Plantagenêt프랑스어는 프랑스에서 플랜태저넷 가문의 영토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아일랜드는 처음에는 지배를 확립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던 아일랜드 영주령의 통치를 받았다. 더블린과 레인스터는 앙주파의 거점이었고, 코크, 리머릭, 얼스터 동부 지역 일부는 앵글로-노르만 귀족들이 점령했다.[1]2. 4. 제국 (Empire) 용어에 대한 논쟁
"제국(Empire)"이라는 용어의 사용은 당시 상황을 정확하게 묘사한 것인지에 대해 일부 역사가들 사이에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6] 이 지역은 헨리 2세가 상속받고 획득한 영토들의 집합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영토들이 공통된 정체성을 공유했는지, 따라서 "제국"이라는 용어로 불러야 하는지 불분명하다.[6] 일부 역사가들은 이 용어가 당시 실제로 제국이라고 불린 서유럽의 유일한 정치 구조인 신성 로마 제국에만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47] 알폰소 7세가 1135년에 "전 스페인의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했지만 말이다. 다른 역사가들은 헨리 2세의 제국은 강력하지도, 중앙집권화되지도, 제국이라고 부를 만큼 크지도 않았다고 주장한다.[48] 게다가 플랜태저넷 가문은 "앙주 제국"이라는 용어에서 암시하는 것과 같은 어떤 종류의 제국 칭호도 주장하지 않았다.[49] 그러나 플랜태저넷 가문 자신은 제국 칭호를 주장하지 않았더라도, 종종 헨리 2세를 위해 일하는 편년사들은 이 영토들의 집합을 묘사하기 위해 "제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50] 최고 칭호는 "잉글랜드 국왕"이었고, 프랑스에서 보유한 여러 지역의 공작과 백작 칭호는 왕실 칭호와 완전히 독립적이었으며 어떤 영국 왕실 법에도 종속되지 않았다.[51] 이러한 이유로 W. L. 워렌과 같은 일부 역사가들은 "제국"이라는 용어 대신 "연방(commonwealth)"이라는 용어를 선호하며, 앙주 제국은 서로 느슨하게 결합된 7개의 완전히 독립적인 주권 국가들의 집합체에 불과했고, 잉글랜드 국왕의 동군연합에 의해서만 통합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52]3. 지리와 행정
앙주 제국은 잉글랜드 왕국, 아일랜드 영주령(윈저 조약 위반으로 불법 간주), 노르망디 공국(채널 제도 포함), 가스코뉴 공국, 아키텐 공국, 앙주 백작령, 푸아투, 메인, 투렌, 생통주 백작령, 라 마르슈 백작령, 페리고르, 리무쟁, 낭트 및 케르시 백작령으로 구성되었다. 이들 공국과 백작령은 프랑스 국왕에게 다양한 수준의 봉신 관계를 맺고 있었다.[54] 플랜태저넷 가문은 브르타뉴 공국, 콘월, 웨일스 공국, 툴루즈 백작령, 스코틀랜드 왕국에 대한 통제력도 가졌지만, 이들은 제국의 공식적인 일부는 아니었다. 오베르뉴는 헨리 2세와 리처드 1세 통치 기간 동안 제국에 속했다. 헨리 2세와 리처드 1세는 베리 백작령에 대한 주장도 했지만, 존이 즉위할 무렵에는 상실되었다.[55]
제국의 국경은 프랑스 국왕의 왕실령과 노르망디 공국 사이처럼 명확한 곳도 있었지만, 아키텐 동쪽 국경처럼 불분명한 곳도 있었다. 이곳에서는 헨리 2세와 리처드 1세가 주장한 국경과 실제 권력이 미치는 범위 사이에 차이가 있었다.[55]
스코틀랜드는 독립 왕국이었으나, 사자왕 윌리엄의 원정 실패 후 팔레즈 조약에 따라 스코틀랜드 남부 에든버러, 록스버러, 제드버러, 버윅에 영국 수비대가 주둔했다.[62]
앙주 제국은 통치자가 직접 통치하기보다는 각 지역에 임명된 신하들에게 권력이 위임되었다.[7] 이들은 다양한 정치적, 군사적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앙주 제국의 경제는 복잡했다. 영국과 노르망디는 잘 관리되어 아키텐보다 더 많은 수익을 낼 수 있었다. 영국과 노르망디에는 세금 징수 관리가 더 많았고, 지역 영주들이 자체 주화를 주조할 수 없었기에 앙주 왕들은 쉬농의 행정 기반에서 경제를 통제할 수 있었다. 쉬농의 중요성은 리처드가 1187년 아버지에게 반역했을 때와 존이 형의 죽음 후 즉시 쉬농으로 달려갔을 때 드러났다.[61]
영국에서 모금된 돈은 대부분 대륙 문제에 사용되었다.[9] 영국 수입은 해마다 변동이 있었다. 1155-1156년 연간 수입은 10500GBP였는데, 이는 헨리 1세 시대 수입의 절반 정도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왕권이 강화되고 수입도 증가했다. 제3차 십자군 준비로 리처드 치하 1190년에는 수입이 31000GBP를 넘었다. 리처드가 해외에 있는 동안 수입은 감소했다. 1194-1198년 수입은 평균 25000GBP였다. 존 치하에서는 수입이 변동했다. 프랑스 재정복을 위해 1210년에는 영국의 수입이 50000GBP로 증가했지만, 1211년에는 83000GBP를 넘었다가 1212년에는 다시 50000GBP로 떨어졌다. 그 후 수입은 감소했다. 헨리 3세 치세 초 3년간은 내전으로 인해 평균 8000GBP의 수입을 올렸다.[10]
아일랜드 수입은 1212년 2000GBP로 낮았다. 노르망디 수입은 1180년 6750GBP였지만, 1198년에는 연간 25000GBP에 달해 영국보다 높았다.[10] 노르망디 인구는 영국 인구보다 훨씬 적은 약 150만 명이었다. 이 기간은 '노르망디 재정 혁명'으로 알려졌다.[10]
아키텐과 앙주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이 지역이 가난했던 것은 아니다. 대규모 포도원, 중요한 도시들과 철광산이 있었다. 영국의 편년사 랄프 오브 디세토는 아키텐에 대해 "아키텐은 여러 종류의 부로 넘쳐나서 서구 세계의 다른 지역을 훨씬 능가하여 역사가들은 이곳을 갈리아 지방 중 가장 운이 좋고 번영하는 곳 중 하나로 여긴다."라고 썼다.[11]
플랜태저넷 왕들의 부는 확실히 더 크다고 여겨졌다. 웨일스의 제럴드는 "헨리 2세와 그의 아들들이 많은 전쟁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렇게 많은 보물을 소유했는지 질문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의 고정적인 수입이 줄어들자 그들은 특별한 부과금으로 총액을 충당하는 데 주의를 기울였고, 일반적인 수입원보다 이러한 것에 점점 더 의존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11]
쁘띠 뒤탈리는 "리처드는 자원에서 우위를 유지했는데, 만약 그가 살았다면 라이벌을 분쇄할 기회를 얻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3. 1. 잉글랜드 왕국
England영어는 철저한 통치하에 있었고, 아마도 가장 통치가 잘 미치는 곳이었을 것이다. 왕국은 주로 나뉘어 주장관(치안 판사)이 법령을 시행했다. 국왕이 부재중일 때는 최고 행정 장관(대법관)(유스티시에)을 임명했다. 잉글랜드 국왕은 대개 잉글랜드보다 프랑스에 머물렀고, 다른 앵글로색슨의 여러 왕보다 훨씬 많은 칙령을 사용했다. 이상하게도 이것은 잉글랜드를 돕는 결과가 되었다.[56] 윌리엄 1세 정복왕 시대에는 앵글로색슨 귀족이 앵글로노르망인 귀족으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앵글로노르망 귀족은 상당히 큰 연속된 토지를 소유할 수 없었으므로(떨어진 곳에만 영지를 가질 수 있었으므로), 귀족들이 국왕에 대한 반역을 일으키는 것을 더욱 어렵게 하는 동시에, 자신의 모든 토지를 동시에 방어하는 것도 어렵게 만들었다. 잉글랜드의 백작(Earl) (앵글로색슨 출신의 에알돌먼에 임명된 자)는 대륙에서도 마찬가지로 백작(count)령(카롤루스 대제 출신의 콩트·백작)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 국왕을 능가하는 자는 없었다.3. 2. 아일랜드 영주령
더블린과 렌스터는 앙주파의 확고한 거점이었고, 코크, 리머릭, 그리고 얼스터(울라)의 일부 지역은 앵글로-노르만 귀족들이 점령했다.[61] 초기에는 통치에 어려움이 따랐다.3. 3. 프랑스 내 영토
앙주 제국은 최대 영토일 때 프랑스 국왕에게 다양한 수준의 봉신 관계를 맺고 있던 노르망디 공국(채널 제도 포함), 가스코뉴 공국, 아키텐 공국, 앙주 백작령, 푸아투, 메인, 투렌, 생통주 백작령, 라 마르슈 백작령, 페리고르, 리무쟁, 낭트 및 케르시 백작령으로 구성되었다.[53][54]
프랑타가네트 가문은 브르타뉴 공국, 툴루즈 백작령에 대한 통제권도 가지고 있었지만, 이 지역들은 제국의 공식적인 일부는 아니었다. 오베르뉴 또한 헨리 2세와 리처드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아키텐 공작의 지위로 제국에 속해 있었다. 헨리 2세와 리처드 1세는 베리 백작령에 대한 추가적인 주장을 펼쳤지만,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55]
제국의 국경은 프랑스 국왕의 왕실령과 노르망디 공국 사이처럼 잘 알려진 곳도 있었지만, 아키텐의 동쪽 국경과 같이 명확하지 않은 곳도 있었다. 이곳에서는 헨리 2세와 리처드 1세가 주장한 국경과 그들의 실질적인 권력이 미치는 국경 사이에 종종 차이가 있었다.[55]
3. 3. 1. 노르망디 공국
노르망디 공국은 앙주 제국에서 가장 일관되게 관리된 지역 중 하나였다. 프레보(prévots)와 비콩트(vicomte)는 재판권과 사형 집행을 관할하는 바이이(bailli) 앞에서 자신의 유리한 입장을 잃었다. 바이이들은 12세기경 노르망디에 도입되어 잉글랜드의 주장관처럼 조직되었다. 프랑스 왕실령과 노르망디 공령의 국경에서는 노르망디 공작의 힘이 강력했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더 느슨했다.[55]3. 3. 2. 앙주 백작령

대앙주[57]는 프레보(대관):en:prévots와 세네샬(가령):en:seneschals이라는 두 종류의 관리에 의해 통치되었다. 이들 관리와 관청은 투르, 시농, 부르주, 보포르, 브리삭, 앙제, 소뮈르, 루당, 로슈, 랑게, 몽바존 등에 설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메인과 같이 다른 지역은 앙주 가문의 행정하에 있지 않고 다른 일가에 의해 통치되었다. 메인은 처음에는 대부분 자치적이었고 행정 기구가 부족했기 때문에, 앙주 가문은 르망의 세네샬과 같은 새로운 행정관을 임명하여 행정 기구 개선을 시도했다. 이러한 개선은 너무 늦게 이루어졌지만, 카페 왕조가 대앙주를 흡수한 후 그 혜택을 받게 되었다.[58]
3. 3. 3. 아키텐 공국
가스코뉴는 앙주 제국의 통치가 매우 느슨한 지역이었다. 관리는 앙트르드메르(돌도뉴 강과 가론 강 사이 지역), 바욘, 닥스에만 머물렀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길과 가론 강 수로를 아쟁 부근까지만 관리했다. 가스코뉴의 나머지 지역은 행정 관리 대상이 아니었다.[59] 과거 푸아티에 가문의 공작처럼 앙주 가문이 공국 전체에 권위를 행사하기는 어려웠다.[59] 가스코뉴는 통치하기 어려운 풍경과 강력한 통치를 확립하기 어렵다는 점 때문에 통치자에게 매력적이지 않았다.[60]푸아투와 기옌에서는 성이 기옌에 집중되어 공적 대리인이 있었지만, 동쪽의 페리고르와 리무쟁에는 없었다. 이들 지역의 영주들은 주권을 가진 소공주처럼 통치하며 화폐를 주조하는 등 영지에 자신의 힘을 과시했다. 리처드 1세는 리무쟁에서 사망했다.[55]
아키텐과 앙주에서 공작과 백작의 권위는 존재했지만, 각 지역 내는 동질적이지 않았다. 예를 들어, 푸아투와 라 마르슈에서는 루지냥 가문이 매우 강력하여 플랜태저넷 가문에 중요한 대항 세력이었다.
3. 3. 4. 기타 지역
스코틀랜드는 독립 왕국이었지만, 사자왕 윌리엄이 이끄는 원정 실패 이후 팔레즈 조약에 따라 스코틀랜드 남부의 에든버러, 록스버러, 제드버러 및 버윅 성에 영국 수비대가 주둔하게 되었다.[62]툴루즈 백작령은 아키텐 공국의 봉신인 툴루즈 백작의 지배를 받았지만, 툴루즈 백작이 아키텐 공작에게 충성하는 일은 드물었다. 케르시만이 플랜태저넷 가문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았으나, 분쟁 지역이었다.
브르타뉴 공국은 전통적으로 귀족들의 독립성이 강한 지역이었으나, 플랜태저넷 가문의 지배가 강화되었다. 브르타뉴 공작은 노르망디 공작의 봉건 가신이었다. 낭트는 앙주 가문의 확실한 지배하에 있었고, 플랜태저넷 가문은 브르타뉴의 여러 사건에 간섭하고 대주교를 설치하는 등 권위를 행사했다.[63]
웨일스는 플랜태저넷 가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복종을 맹세하고 영주로 인정받았지만, 거의 자치권을 행사했다.[64] 웨일스는 플랜태저넷 가문에 단검과 장궁을 제공했으며, 이는 훗날 잉글랜드에 큰 성공을 가져다주었다.
4. 앙주 제국의 성립 (1135년 ~ 1156년)
앙주 백작은 오랫동안 프랑스 북서부에서 세력을 떨쳤다. 풀크 4세는 투렌, 망슈, 낭트의 지배권을 요구했지만, 시농, 로슈, 루당 등의 성을 건설함으로써 투렌만을 효과적으로 지배할 수 있었다. 풀크 4세는 아들 풀크 5세를 망슈 상속녀 에랑부르 드 메앵과 결혼시켜 앙주를 통일했다. 앙주 왕조가 성공을 거두는 동안 숙적 노르망디 공국은 잉글랜드를 정복했고, 푸아티에 가문은 가스코뉴 공작이자 아키텐 공작이 되었으며, 블루아 백작은 샹파뉴 백작이 되었다.[5]
잉글랜드 국왕 헨리 1세는 형 로베르 쿠르트뇌즈를 무찌르고 노르망디 공국을 차지했으며, 형의 아들 기욤 크리통을 적대시했다. 헨리 1세는 플랑드르에 대항하고자 외아들 윌리엄 아델린과 풀크 5세의 딸을 결혼시켜 앙주와 동맹을 맺으려 했지만, 윌리엄 아델린은 1120년 화이트십의 난파로 사망했다. 헨리 1세는 딸 마틸다를 앙주 백작 제프루아 5세와 결혼시키려 했지만, 앵글로-노르만인들이 마틸다의 왕위 계승을 인정해야 했다. 1127년 1월 앵글로-노르만 귀족과 고위 성직자들은 마틸다를 왕위 계승자로 인정하고 맹세했다. 1128년 6월 17일 르망에서 결혼식이 거행되었다.[5]
4. 1. 배경
앙주 백작들은 10세기부터 프랑스 북서부에서 권력을 다투었다. 앙주 백작들은 노르망디 공국과 브르타뉴 공국의 통치자들, 그리고 때로는 프랑스 국왕과도 끊임없이 대립했다. 풀크 4세는 투렌, 망슈, 낭트에 대한 통치권을 주장했지만, 실제로 지배한 곳은 투렌 뿐이었으며, 시농, 로슈, 루드 성의 건설이 이를 잘 보여준다. 풀크 4세는 아들이자 훗날 예루살렘 국왕이 되는 풀크 5세를 망슈의 상속녀인 에랑부르 드 메앵과 결혼시켜, 동군연합을 통해 망슈를 앙주와 통합했다.[5]앙주 가문이 프랑스에서 권력을 강화하는 동안, 그들의 숙적인 노르만인들은 11세기에 잉글랜드를 정복했다. 한편 프랑스의 다른 지역에서는 푸아티뱅 람눌피드 가문이 아키텐 공작과 가스코뉴 공작이 되었고, 블루아 백작인 스테판(차기 잉글랜드 국왕 스티븐의 아버지)이 샹파뉴 백작이 되었다. 프랑스는 몇몇 귀족 가문들 사이에 분열되어 있었다.[5]
잉글랜드 국왕 헨리 1세는 로베르 2세를 무찌르고 노르망디 공국을 차지했으며, 그의 아들인 기욤 크리통(1127년 플랑드르 백작이 됨)을 적대시했다. 헨리 1세는 플랑드르에 대항하기 위해 풀크 5세의 딸과 외아들 윌리엄 아델린을 결혼시켜 앙주와 동맹을 맺으려 했다. 그러나 윌리엄 아델린은 1120년 화이트십의 난파로 사망했다. 이에 헨리 1세는 딸 마틸다를 앙주 백작 제프루아 5세와 결혼시키려 했지만, 앵글로-노르만인들이 마틸다의 왕위 계승을 인정해야 했다. 1127년 1월, 앵글로-노르만 귀족들과 고위 성직자들은 마틸다를 왕위 계승자로 인정했다. 1128년 6월 17일 르망에서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4. 2. 무정부 시대 (The Anarchy)
1135년 잉글랜드의 헨리 1세가 사망한 후, 잉글랜드와 노르망디의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분쟁이 발생했다. 헨리 1세는 자신의 딸 마틸다 황후를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그의 조카 잉글랜드의 스티븐이 왕위를 주장하며 내전이 시작되었다. 이 시기를 "무정부 시대"라고 부른다.헨리 1세는 생전에 마틸다와 앙주의 제프리를 결혼시켜 앙주 가문의 지지를 확보하려 했다. 제프리는 노르망디를 점령하며 세력을 확장했고, 마틸다는 잉글랜드에서 스티븐과 대립했다. 1141년 링컨 전투에서 스티븐이 포로로 잡히면서 앙주 가문이 유리한 고지를 점했지만, 윈체스터에서 마틸다의 이복 오빠 글로스터 백작 로베르가 포로로 잡히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결국 마틸다는 스티븐과 로베르를 교환하는 방식으로 석방되었다.
1144년, 제프리는 루앙을 점령하고 노르망디 공작으로 즉위하며 노르망디 지역 대부분을 장악했다. 그는 프랑스의 루이 7세에게 지소르를 넘겨주는 조건으로 노르망디 공작 지위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12] 그러나 앙주 내 반란과 잉글랜드 내 마틸다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제프리는 노르망디 지배에 집중하며 잉글랜드 내전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4. 3. 헨리 2세의 즉위
1152년 3월, 루이 7세와 알리에노르는 오랫동안 아이를 갖지 못했기에 근친혼을 이유로 보장시 궁전에서 이혼했다.[75] 이혼 후 알리에노르는 아키텐 공국을 유지했지만, 프랑스 왕의 지배는 그대로 받았다. 8주 후 알리에노르는 헨리 2세와 재혼했는데, 이로 인해 헨리 2세는 아키텐과 가스코뉴의 공작이 되었다. 헨리 2세가 동생에게 앙주를 양도하지 않은 것은 앙주를 동생에게 주면 자신의 영토가 분할되기 때문이었다.
루이 7세는 헨리 2세에게 적대적인 동맹을 결성했다. 잉글랜드 왕 스티븐과 그의 아들 부로뉴 백작 우스타슈 4세(루이 7세의 누이와 결혼), 샹파뉴 백작 앙리 1세(알리에노르의 딸 마리와 약혼), 드뢰 백작 로베르 1세(루이 7세의 동생), 그리고 헨리 2세의 동생 조프루아가 반(反) 헨리 동맹에 참여했다.
1152년 7월 카페 가문의 군대가 아키텐을 공격했고, 루이 7세는 우스타슈 4세, 앙리 1세, 로베르 1세와 함께 노르망디를 공격했다. 스티븐이 잉글랜드에서 앙주 가문에 충성하는 세력을 공격하는 동안, 조프루아는 앙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헨리 2세는 자신의 영토가 공격받는 동안 잉글랜드 왕위를 주장하기 위해 출항하려던 참이었다. 헨리 2세는 먼저 앙주로 가서 조프루아에게 항복을 요구했고, 1153년 1월 스티븐을 만나기 위해 잉글랜드로 항해했다.
다행히 루이 7세는 병으로 인해 전투에서 물러났고, 헨리 2세는 자신의 영토를 방어했다. 7개월간의 전투와 정치적 협상 끝에 헨리 2세는 스티븐을 완전히 제압하지는 못했지만, 스티븐의 아들 우스타슈 4세가 의문스럽게 사망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스티븐은 윈체스터 조약(월링포드 조약 또는 웨스트민스터 협정)을 비준하여 헨리 2세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다. 단, 스티븐 가문의 잉글랜드와 프랑스 영토는 보장되어야 했다. 1154년 10월 25일 스티븐이 사망하자, 헨리 2세는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
헨리 2세는 로마 교황 하드리아누스 4세에게서 강제로 서약했다는 이유로 특허장을 받아 1156년에 조프루아에게 보상하겠다고 루앙에서 약속했다. 그러나 조프루아는 이를 거부하고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헨리 2세가 노르망디, 앙주, 아키텐의 봉신으로서 루이 7세에게 충성 맹세를 한 후, 루이 7세는 헨리 2세에게 간섭하지 않았다. 헨리 2세가 조프루아의 반란을 진압한 후, 조프루아는 연금을 받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5. 앙주 제국의 확장
헨리 2세는 더 많은 영토를 요구하며, 특히 잉글랜드와 노르망디 주변에 완충 지대 역할을 할 봉신 국가들의 고리를 형성하고자 했다. 확장 가능성이 가장 높았던 지역은 스코틀랜드, 웨일스, 브르타뉴였으며, 플랑드르 백작령은 새로운 영토라기보다는 동맹국이었다.[66]
데이비드 1세는 무정부 시대를 틈타 컴벌랜드, 웨스트모어랜드, 노섬벌랜드를 장악했다. 웨일스에서는 데헤우바르트의 리스와 오웨인 귄네드와 같은 지도자들이 등장했다. 브르타뉴에서는 외드 2세가 노르망디의 봉건적 지배를 인정했다는 증거가 없다.[66] 물랭라마르슈와 봉물랭은 드뢰의 로베르의 손에 있었고, 티에리는 1153년 루이 7세가 결성한 동맹에 가입했다. 더 남쪽으로는 블루아 백작이 앙부아즈를 획득했다.[66] 헨리 2세는 이러한 영토 문제들을 해결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66]
헨리 2세는 대담하고 활동적인 국왕이었다. 로저 오브 하우던은 헨리가 자신의 영토를 매우 빠르게 여행했기 때문에 루이 7세가 "잉글랜드 국왕은 지금 아일랜드에 있다가 잉글랜드에 있다가 노르망디에 있습니다. 그는 말이나 배로 이동하는 것보다 날아다니는 것 같습니다."라고 외쳤다고 기록했다.[76] 헨리는 잉글랜드보다 프랑스에 더 자주 머물렀으며, 세인트 폴 대성당의 학장 랄프 드 디세토는 "국왕을 잉글랜드로 데려올 것은 런던탑뿐입니다."라고 풍자적으로 말했다.[77]
1154년 헨리 2세는 베르농과 뇌프마르셰를 매입했다. 이는 플랜태저넷 왕가와 카페 왕가 사이의 새로운 전략적 조정을 의미했다. 루이 7세는 헨리 2세를 무찌르는 데 실패했고, 앙주 가문이 잉글랜드를 지배하는 상황에서 카페 왕가의 우위는 무의미했다. 헨리 2세는 노르망디와 벡생을 완전히 회복할 때까지 요구를 멈추지 않았다. 1158년 토머스 베켓이 파리에 대사로 파견되어 앙주 가문의 부를 과시했다. 루이 7세의 딸 마르그리트는 헨리 2세의 아들 젊은 헨리와 약혼했고, 마르그리트의 지참금은 노르망디와 벡생이었다. 헨리 2세는 물랭라마르슈와 봉물랭을 탈환했고, 티보 5세는 앙부아즈를 반환했다.[66]
티에리가 헨리 2세 반대 동맹에 가담했음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와 플랑드르 간의 양모 무역은 원활했다. 티에리는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떠날 때 헨리 2세를 자신의 영지 관리인으로 지명할 정도로 신뢰했다. 1159년 스티븐의 아들 기욤 1세가 죽자 헨리 2세는 몰탕 백작령을 병합하고, 부로뉴 백작령은 티에리의 아들 마튜에게 주었다. 마튜는 마리 드 부로뉴와 결혼했다. 부로뉴 백작령에는 런던과 콜체스터의 중요한 영지가 포함되었다.[66]
부로뉴를 통해 잉글랜드는 플랑드르와 많은 양모 무역을 했다. 1163년 헨리 2세와 티에리는 윌리엄 1세가 체결한 조약을 갱신했다. 플랑드르는 헨리 2세에게 매년 조공 대신 기사들을 제공했다.[66]
브르타뉴에서는 코난 3세가 아들 호엘을 서자로 선언하고 폐위시켰다. 그 결과, 호엘의 누이인 베르트가 브르타뉴 여공작이 되었고, 그의 남편 외드가 명목상의 공작이 되었다. 1156년에 코난 4세가 낭트에서 즉위했을 때 브르타뉴는 내란에 휘말렸고, 사람들은 호엘에 대항하기 위해 헨리 2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헨리 2세의 동생 제프리는 헨리 2세에 의해 낭트 백작에 임명되었지만, 24세에 죽었기 때문에 오래가지 못했다. 1158년에 코난 4세는 단기간 낭트 백작이 되었지만, 헨리 2세는 아브랑슈에 군대를 집결시켜 코난 4세를 위협하여 백작 지위를 박탈했다. 1160년에 헨리 2세는 화해의 혼인으로 자신의 사촌인 마가렛 오브 헌팅던과 코난 4세를 결혼시켰다. 헨리 2세는 돌 대주교의 임명에도 관여하여, 종교계로부터 브르타뉴에 압력을 가했다.[21] 1166년 헨리 2세는 아들 제프리 2세와 콘스탄스를 약혼시키고, 콘스탄스 4세를 강제로 퇴위시켜 브르타뉴의 지배자가 되었다. 브르통계 귀족들은 이에 반발하여, 1167년, 1168년, 1173년에 브르타뉴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헨리 2세는 신뢰할 수 있는 인물로 윌리엄 피츠하모와 롤랜드 오브 디난을 브르타뉴에 파견했다.[18]
툴루즈는 요새화된 도시이자 툴루즈 백작령의 중심지였다. 오도 대공 시대 아키텐 공국의 중심 세력이었던 이 광대한 백작령에 대해 엘레오노르의 조상들이 권리를 주장했다.[24] 그러나 헨리 2세와 엘레오노르는 람눌피드 가문 출신이 아니었기에, 이 고대 공작 가문과는 관련이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24]
툴루즈는 당시 다른 도시들보다 크고 요새화가 잘 되어 있었으며, 훨씬 부유했다. 대서양과 지중해 사이에 위치하여 전략적으로 중요했고, 나르본, 카오르, 알비, 님, 카르카손과 같은 중요한 도시들을 포함하는 지역 무역과 도로망을 지배했다. 앙주 가문과 툴루즈 간의 갈등은 뉴버러의 윌리엄에 의해 "40년 전쟁"으로 불리게 되었다.[24]
1159년 6월, 헨리 2세의 군대는 푸아티에에 집결했다. 가스코뉴에서 잉글랜드까지 그의 모든 영지에서 온 병사들과 맬컴 4세가 보낸 증원군이 포함되었다. 당시 이보다 더 큰 규모의 군대는 주요 십자군을 위해 모집된 군대뿐이었다. 헨리 2세는 북쪽에서 공격했고, 그의 동맹인 트랑카벨 가문과 라몽 베렝게르 4세는 제2전선을 열었다. 헨리 2세는 루이 7세가 방어에 참여했기 때문에 툴루즈 자체를 함락시킬 수 없었다. 그는 봉신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주거나 군주를 포로로 잡는 문제를 다루고 싶지 않았다. 헨리 2세는 가론 계곡의 케르시 지역에 있는 성들과 함께 카오르를 점령했다.[24]
헨리 2세는 1161년에 돌아왔지만, 다른 곳의 분쟁으로 너무 바빠 동맹국들에게 툴루즈와의 싸움을 맡겼다. 알폰소 2세도 전쟁에 참여했다. 1171년 헨리 2세의 동맹은 움베르토 3세에 의해 강화되었다.[24]
1173년 리모주에서 레몽 5세는 10년 이상의 싸움 끝에 항복했다. 그는 헨리 2세와 그의 아들들인 헨리와 리처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83]
5. 1. 스코틀랜드
1157년 헨리 2세는 컴벌랜드, 웨스트모어랜드, 노섬벌랜드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말콤 4세를 만났다. 이 지역들은 이전에 말콤의 할아버지인 데이비드 1세가 점령했던 곳이었다. 1149년, 헨리 2세가 권력을 잡기 전에 그는 데이비드에게 뉴캐슬 북쪽의 땅은 영원히 스코틀랜드 국왕에게 속해야 한다는 맹세를 했다. 말콤은 그에게 이 맹세를 상기시켰지만 헨리 2세는 이를 지키지 않았다. 뉴버러의 윌리엄은 헨리 2세가 교황으로부터 면죄부를 받았다는 증거는 없다고 말했다. "신중하게 고려해 보건대, 훨씬 더 큰 권력을 가진 영국 국왕이 논쟁에서 더 나은 입장에 있었다."[22]말콤 4세는 포기하고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은 헌팅던을 대가로 충성을 맹세했다.[22]
다음 스코틀랜드 국왕인 윌리엄 사자왕은 헨리 2세에게 불만을 품었다. 그는 1152년 데이비드 1세로부터 노섬벌랜드를 받았고, 말콤 4세가 1157년에 그것을 헨리 2세에게 돌려주었을 때 잃었기 때문이다.
루이 7세가 설정한 연합의 일부로, 윌리엄 사자왕은 1173년과 1174년에 노섬벌랜드를 침략했고, 그 결과 알닉 근처에서 포로로 잡혀 팔레즈 조약에 서명해야 했다. 에든버러, 록스버러, 제드버러, 베릭의 성에 수비대가 주둔하게 되었다.[62] 그때부터 남부 스코틀랜드는 브르타뉴와 마찬가지로 확고한 통제 하에 있었다. 1189년 12월 5일, 리처드 1세는 캔터베리 포기 선언으로 조약을 무효화했는데, 이는 록스버러와 베릭의 반환과 리처드의 십자군에 자금을 지원하기 위한 돈을 대가로 스코틀랜드 독립을 공식적으로 승인한 것이었다. 워렌은 이것을 "외교적 승리"라고 불렀는데, 이는 존의 1193년~1194년 반란 동안 잉글랜드의 북쪽 방어선을 보호했다.[78]
5. 2. 웨일스
데헤우바르트의 리스와 오웨인 귄네드는 협상에 소극적이었다. 헨리 2세는 1157년, 1158년, 1163년에 세 차례 웨일스를 공격하여 그들을 궁정으로 소환하려 했다. 웨일스인들은 그의 조건이 너무 가혹하다고 여겨 대거 반란을 일으켰다. 헨리 2세는 1164년에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네 번째 침략을 감행했다. 웨일스 연대기인 ''브뤼트 유 투이소지온''에 따르면, 헨리 2세는 "잉글랜드, 노르망디, 플랑드르, 앙주, 가스코뉴, 스코틀랜드의 정예 전사들로 구성된 강력한 군대"를 모아 "모든 브리튼인들을 예속시키고 파괴하기" 위해 출병했다.[79]악천후, 폭우, 홍수, 그리고 웨일스 군대의 끊임없는 공격으로 앙주 군대는 속도가 느려졌고 웨일스 정복은 실패했다 (크로겐 전투 참조). 격분한 헨리 2세는 웨일스 인질들을 잔혹하게 훼손했다. 웨일스는 한동안 안전을 유지했지만, 1171년 아일랜드 침공으로 인해 헨리 2세는 리스와의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64]
5. 3. 브르타뉴
1148년, 브르타뉴 공작 코난 3세가 사망하면서 브르타뉴는 혼란에 빠졌다. 코난 3세는 아들 호엘 3세를 사생아로 선언하고 후계자에서 제외했다. 이에 따라 호엘 3세의 누이인 베르타가 남편 에우도와 함께 브르타뉴 여공작이 되었다. 그러나 베르타는 전 남편인 앨런 드 브르타뉴와의 사이에서 아들 코난 4세를 두고 있었다.[18] 코난 4세는 리치먼드 백작으로서 영국령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헨리 2세가 더욱 쉽게 통제할 수 있는, 헨리 2세에게는 이상적인 브르타뉴 공작 후보였다.[18]1156년 낭트 시민들이 호엘 3세에 대항하여 봉기하자, 헨리 2세는 자신의 동생 제프리를 낭트 백작으로 임명했다.[19] 같은 해 9월, 코난 4세는 브르타뉴 공작으로 즉위했지만, 낭트는 앙주 직할 통치하에 남았다.[19] 1158년 제프리가 사망하자 코난 4세가 낭트를 장악했지만, 헨리 2세는 군대를 동원하여 코난 4세를 압박하고 낭트를 다시 빼앗았다.[20] 헨리 2세는 코난 4세와 헌팅던의 마가렛 (Margaret of Huntingdon, Duchess of Brittany)의 결혼을 주선하고, 돌의 고대 대교구 (Ancient Diocese of Dol) 대주교를 임명하는 등 브르타뉴에 대한 간섭을 강화했다.[21]
1166년 헨리 2세는 코난 4세의 딸이자 상속녀인 콘스탄스를 자신의 아들 제프리 2세와 약혼시키고 제프리 2세의 이름으로 브르타뉴를 점령했다. 헨리 2세는 투아르 (Thouars)에서 브르타뉴 귀족들로부터 충성 맹세를 받고, 렌 대성당 (Rennes Cathedral)이 있는 렌 (Rennes)으로 가서 브르타뉴 공작 책봉식을 거행했다. 이후 몇 년 동안 브르타뉴 귀족들은 앙주 통치에 반기를 들었지만, 헨리 2세는 영토와 성을 몰수하며 진압했다. 1169년 5월, 렌에서 헨리 2세의 아들 제프리 2세가 브르타뉴 귀족들로부터 직접 충성 맹세를 받으면서, 브르타뉴는 앙주 제국의 일부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5. 4. 아일랜드
헨리 2세는 1155년 교황령을 통해 로마 교황으로부터 아일랜드 침공에 대한 지지를 얻었으나, 여러 문제로 인해 침공을 연기해야 했다.[80] ''Laudabiliter'' 교황령에는 "당신의 웅장함이 세상에 당신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널리 알리고자 하는 것은 칭찬할 만하고 이익이 됩니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80]1167년, 아일랜드 레인스터의 왕 더모트 맥머로우는 헨리 2세에 의해 "레인스터의 왕자"로 인정받았고, 다른 아일랜드 왕들에 대항하기 위해 잉글랜드와 웨일스에서 병사를 모집할 수 있게 되었다. 잉글랜드와 웨일스 기사들은 아일랜드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고, 1171년 10월 헨리 2세는 워터포드 근처에 상륙하여 아일랜드 대부분의 토착 왕들로부터 복속을 받았다. 콘노트의 왕이자 아일랜드 고왕이었던 루아이드리 우아 콩호바이르도 헨리 2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80]
헨리 2세는 더블린과 레인스터에 자신의 사람들을 배치하고, 코크, 리머릭, 얼스터 등 정복되지 않은 왕국들을 자신의 사람들에게 주어 노르만인들이 아일랜드에서 영지를 차지하게 했다.[80]
1177년, 헨리 2세는 자신의 아들 존을 첫 번째 아일랜드 영주로 임명했다. 그러나 존은 너무 어렸기 때문에 1185년에야 300명의 기사와 함께 아일랜드에 도착했다. 존은 아일랜드 족장과 앵글로-노르만 정착민 모두를 적으로 돌리는 등 실패를 겪고 1년 만에 아버지에게 돌아갔다.[23] 이후 존 드 쿠르시와 휴 드 레이시 등 다른 앵글로-노르만인들이 아일랜드에 성을 건설하고 세력을 확장했다.[23]
5. 5. 툴루즈

툴루즈(Toulouse)는 요새화된 도시이자 툴루즈 백작령의 중심지로, 오도 대공 시대 아키텐 공국의 중심 세력이었던 이 광대한 백작령에 대해 엘레오노르의 조상들이 주장했다.[24] 그러나 헨리 2세와 엘레오노르는 엘레오노르가 람눌피드 가문 출신이고 헨리 2세는 앙주 가문 출신이었기에, 이 고대 공작 가문과는 관련이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툴루즈는 당시 다른 도시들보다 크고, 요새화가 잘 되어 있었으며, 훨씬 부유했다. 툴루즈는 대서양과 지중해 사이에 위치하여 전략적으로 중요했고, 나르본(Narbonne), 카오르(Cahors), 알비(Albi), 님(Nîmes), 카르카손(Carcassonne)과 같은 중요한 도시들을 포함하는 지역 무역과 도로망을 지배했다. 앙주 가문과 툴루즈 간의 반복적인 갈등은 뉴버러의 윌리엄(William of Newburgh)에 의해 "40년 전쟁"으로 불리게 되었다.[24]
1159년 6월, 헨리 2세의 군대는 푸아티에(Poitiers)에 집결했다. 가스코뉴에서 잉글랜드까지 그의 모든 영지에서 온 병사들과 스코틀랜드의 맬컴 4세(Malcolm IV of Scotland) 왕이 보낸 증원군이 포함되었다. 당시 이보다 더 큰 규모의 군대는 주요 십자군을 위해 모집된 군대뿐이었다. 헨리 2세는 북쪽에서 공격했고, 그의 동맹인 트랑카벨(Trencavel) 가문과 바르셀로나 백작 라몽 베렝게르 4세(Ramon Berenguer IV, Count of Barcelona)는 제2전선을 열었다. 헨리 2세는 그의 봉신인 프랑스의 루이 7세 왕이 방어에 참여했기 때문에 툴루즈 자체를 함락시킬 수 없었다. 그는 그의 봉신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주거나 그의 군주를 포로로 잡는 문제를 다루고 싶지 않았다. 헨리 2세는 가론(Garonne) 계곡의 케르시(Quercy) 지역에 있는 성들과 함께 카오르(Cahors)를 점령했다.
헨리 2세는 1161년에 돌아왔지만, 그의 영지 다른 곳의 분쟁으로 너무 바빠서 동맹국들에게 툴루즈와의 싸움을 맡겼다. 그곳에 이해관계를 가진 아라곤의 알폰소 2세(Alfonso II of Aragon) 아라곤의 왕(King of Aragon)도 전쟁에 참여했다. 1171년 헨리 2세의 동맹은 레이몽 5세의 또 다른 적이었던 모리엔느의 움베르토에 의해 강화되었다.
1173년 리모주(Limoges)에서 레이몽은 10년 이상의 지속적인 싸움 끝에 마침내 항복했다. 그는 헨리 2세와 헨리의 아들들인 헨리와 아키텐 공작 리처드(Richard)에게 충성을 맹세했다.[83]
6. 앙주 제국의 최전성기와 쇠퇴
루이 7세는 당대 사람들에게 경건함, 사랑, 평화로 알려졌다. 파리의 에티엔느는 루이 7세를 "너무나 평화롭고, 공정하고, 가톨릭적이며, 자비로웠다"라고 묘사하며, "정의를 사랑하고 약자를 보호"하는 왕으로 칭송했다.[84] 월터 매푸 조차도 루이 7세에게 호의적이었다.[85]
루이 7세는 전쟁을 싫어했지만,[86] 헨리 2세와의 관계는 툴루즈 공격으로 악화되었다. 루이 7세는 후계자 남성이 없었다. 1160년 왕비 콘스탄스 드 카스티유가 사망하자, 루이 7세는 아델 드 샹파뉴와 재혼했다. 헨리 2세는 아들(젊은 헨리)과 루이 7세의 딸 마르그리트를 결혼시키고 노르망디와 벡생을 지참금으로 요구하여, 젊은 헨리가 프랑스 왕위를 계승할 가능성을 열었다.
1164년 루이 7세는 캔터베리 대주교 토마스 베케트를 동맹으로 맞이했다.[87] 존 오브 솔즈베리에게 "Rex Christianisimus"(그리스도교의 왕)이라고 불린[88] 루이 7세는 베케트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다.[88] 1170년 베케트가 살해되면서 헨리 2세는 비난받았고, 베케트를 보호한 루이 7세는 도덕적 우위를 점했다.
1165년 루이 7세의 아들 필립이 태어나면서 헨리 2세 아들의 프랑스 왕위 계승 가능성은 사라졌다. 헨리 2세는 1167년 오베르뉴, 1170년 부르주를 공격하며 평화를 깨뜨렸다. 루이 7세는 노르망디와 벡생을 기습하여 헨리 2세를 압박하고 부르주를 해방시켰다.
헨리 2세는 영토를 아들들에게 분할 상속할 계획이었다. 1170년 젊은 헨리는 잉글랜드 왕, 1172년 리처드는 아키텐 공작, 1181년 조프루아는 브르타뉴 공작, 1185년 존은 아일랜드 영주가 되었다. 1161년 엘레오노르는 1170년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8세와 약혼했다. 그러나 영토 분할은 헨리 2세의 통치를 어렵게 했고, 아들들의 반란을 야기했다.
1173년 젊은 헨리는 상속지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하고, 루이 7세에게 합류했다. 엘레오노르와 리처드, 조프루아 2세도 반란에 가담했다. 윌리엄 1세, 플랑드르 백작 필립, 블루아 백작 티보 5세 등도 헨리 2세에게 등을 돌렸다. 헨리 2세는 용병을 고용하고 엘레오노르와 윌리엄 1세를 사로잡아 팔레즈 조약을 강요하며 전쟁에서 승리했다. 헨리 2세는 라 마르슈 백작을 매수하고 벡생과 부르주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지만, 추가적인 침략은 없었다.
6. 1. 헨리 2세 통치기
1164년, 루이 7세는 대주교 토마스 베케트(Thomas Becket)에게서 동맹을 발견했다.[25] 루이 7세와 베케트는 1158년에 만난 적이 있었지만, 프랑스는 성직자 망명자들의 피난처였고, 루이 7세는 솔즈베리의 존(John of Salisbury)에 의해 'Rex Christianissimus'(가장 기독교적인 왕)으로 불렸다.[25] 베케트는 프랑스로 피신했고, 헨리 2세와 베케트 사이의 갈등이 커졌다. 헨리 2세는 1170년에 "내 집에서 어떤 비참한 배신자들이 나를 키웠기에 그들의 주인이 천한 서기관에게 그렇게 수치스러운 무시를 당하게 했는가!"라고 선언하여 베케트의 살해를 유발했다.[25] 기독교 세계는 헨리 2세를 비난했고, 루이 7세는 베케트를 보호함으로써 지지를 얻었다. 루이 7세의 세속적 권력은 헨리 2세보다 약했지만, 도덕적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25]
1165년, 샹파뉴의 아델(Adèle of Champagne)이 아들 필립을 낳으면서 헨리 2세 아들의 프랑스 왕위 계승 희망은 사라졌다. 이후, 영국-프랑스 평화는 끝났다. 1167년, 헨리 2세는 오베르뉴(Auvergne (province))로 진격했고, 1170년에는 부르주(Bourges)도 공격했다. 루이 7세는 노르망디 벡생을 급습하여 헨리 2세가 군대를 북쪽으로 이동하게 만들었고, 루이 7세는 부르주를 해방할 기회를 얻었다.
헨리 2세는 자신의 영토를 개인적인 소유물로 간주하여 자녀들에게 분배할 계획이었다. 젊은 왕 헨리는 1170년에 잉글랜드 국왕으로 즉위했지만(실제 통치는 하지 않았다), 리처드는 1172년 아키텐 공작, 제프리는 1181년 브르타뉴 공작, 존은 1185년 아일랜드 영주가 되었고, 카스티야의 엘레오노르(Eleanor of England, Queen of Castile)는 1170년 툴루즈 공격 중 가스코뉴를 지참금으로 받고 알폰소 8세와 약혼했다. 자녀들 사이에 토지를 분할한 것은 그가 자녀들을 통제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1173년, 젊은 왕 헨리는 자신의 상속 재산의 일부를 요구했지만, 헨리 2세는 거절했다. 젊은 왕 헨리는 루이 7세에 합류했고, 그의 어머니인 엘레오노르도 헨리 2세에 대한 반란에 합류했다. 리처드와 제프리도 형제에게 합류했다. 스코틀랜드의 윌리엄 왕, 플랑드르 백작 필립, 불로뉴 백작 매슈, 블루아 백작 테오발드도 이 갈등에 합류했다. 헨리 2세는 많은 용병을 모집할 수 있었고, 엘레오노르를 사로잡아 감금했고, 윌리엄 왕을 사로잡아 팔레즈 조약(Treaty of Falaise)에 강제로 참여시켰다. 헨리 2세는 마르슈 백작령(County of Marche)을 매입했고, 프랑스 벡생과 부르주가 즉시 반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6. 2. 리처드 1세 통치기
리처드 1세는 필리프 2세가 앙주 제국의 대륙 영토 상당 부분을 장악하고 아미앵과 아르투아를 상속받았기 때문에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잉글랜드는 리처드 1세에게 가장 안전한 영토였으며, 제3차 십자군 원정에 함께 참여했던 허버트 월터가 대법관으로 임명되었다. 리처드 1세는 존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항복하지 않은 노팅엄 성을 포위 공격했다. 이후 4월에 윌리엄 1세와 만나 그가 주장하는 노섬브리아 매입 제안을 거절했고, 나중에 존의 아일랜드 영지를 장악하고 그의 대법관을 교체했다.
리처드 1세는 존이 앙브루아즈 주둔군을 학살하고 필리프 2세에게 그 도시를 넘겨줌으로써 배신하자 자신의 영토를 되찾기 위해 영국 해협을 건넜다. 윌리엄 더 브르통은 "그는 먼저 자신의 아버지인 헨리 2세, 그리고 그의 형인 리처드 1세, 그리고 이제 우리의 국왕인 필리프 2세를 배신했다"라고 말했다. 나바라의 산초 7세는 분쟁에 참여하여 아키텐을 공격, 앙굴렘과 투르를 점령했다. 리처드 자신은 훌륭한 군 지휘관으로 알려져 있었다.[27] 존 길링엄이 묘사한 대로 필리프 2세가 "빈틈없는 정치가이자 유능한 군인"이었기 때문에, 전쟁 초기는 리처드에게 여러 차례의 패배를 안겨주며 어려웠다.[48] 그러나 10월, 툴루즈 백작 레이몽 6세가 카페 왕가 진영을 떠나 리처드 쪽에 합류했다. 훗날 라틴 제국의 황제가 될 발두인 4세도 필리프 2세와 아르투아를 놓고 다투며 리처드 쪽에 합류했다. 1197년 헨리 6세가 사망하고 리처드 1세의 조카인 오토 4세가 그 뒤를 이었다. 뛰어난 지휘관인 불로뉴 백작 르노 드 다마르탱 또한 필리프 2세를 버렸다. 발두인 4세는 아르투아를 침공하여 생토메르를 점령했고, 리처드 1세는 베리에서 전투를 벌여 파리 근교 지소르에서 필리프 2세에게 큰 패배를 안겨주었다. 휴전이 체결되었고, 리처드 1세는 노르망디를 거의 회복했으며 이전보다 더 많은 아키텐 영토를 장악하게 되었다. 리처드 1세는 리무쟁에서 일어난 반란에 다시 한번 직면해야 했다. 그는 1199년 4월 샤뤼-샤브롤에서 석궁에 맞아 사망했고, 그의 시신은 아버지처럼 퐁트브로 수도원에 매장되었다.
6. 2. 1. 제3차 십자군 원정
제3차 십자군 원정은 리처드 1세에게 중요한 과제였다. 1187년에 십자군 참여를 결정했지만, 여러 문제로 지연되었다.[95] 리처드 1세의 증조부 풀크는 예루살렘 국왕이었고, 당시 왕위 계승자인 기 드 루지냥은 리처드 1세의 봉신들과 관련 있는 푸아투 귀족이었으며, 그의 아내 시빌라 여왕은 리처드 1세의 사촌이었다.[41] 십자군 원정은 리처드 1세가 잉글랜드에 머물지 않은 주된 이유가 되었으며, 그는 재위 기간 중 6개월 미만을 잉글랜드에서 보냈다.[25]
출발 전, 리처드 1세는 나바라 국왕 산초 6세와 동맹을 맺어 제국을 강화했다.[43] 성지로 가는 길에 키프로스 통치자가 리처드 1세의 신부를 모욕하자, 리처드 1세는 키프로스 섬을 정복했다. 1191년 키프로스 리마솔에서 리처드 1세는 베렝가리아와 결혼했다.[26]
아크레 포위전은 성지에서 마지막 기독교 거점이었으며, 7월에 끝났다. 필리프 2세는 프랑스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는데, 이질에 걸렸거나, 리처드 1세에 대한 분노, 또는 플랑드르 백작의 죽음 이후 아르투아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으로 보인다.[96]
리처드 1세는 필리프 2세보다 1년 이상 늦은 1192년 10월에 성지를 떠났다. 십자군 원정 중 레오폴트 5세 오스트리아 공작에게 모욕을 당한 리처드 1세는 귀환길에 빈 근처에서 체포되어 헨리 6세 황제에게 넘겨졌다.[96]
6. 2. 2. 리처드 1세의 포로 생활과 귀환
리처드 1세는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필리프 2세가 앙주 제국의 대륙 영토 상당 부분을 장악했고, 아미앵과 아르투아를 상속받았기 때문이다. 잉글랜드는 리처드 1세에게 가장 안전한 영토였으며, 그와 함께 십자군에 참여했던 허버트 월터가 대법관으로 임명되었다. 리처드 1세는 존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항복하지 않은 노팅엄 성을 포위 공격했다. 그 후 4월에 윌리엄 1세와 만나 그가 주장하는 노섬브리아 매입 제안을 거절했다. 나중에 리처드 1세는 존의 아일랜드 영지를 장악하고 그의 대법관을 교체했다.리처드 1세는 존이 앙브루아즈 주둔군을 학살하고 필리프 2세에게 그 도시를 넘겨줌으로써 배신하자 자신의 영토를 되찾기 위해 영국 해협을 건넜다. 윌리엄 더 브르통은 "그는 먼저 자신의 아버지인 헨리 2세, 그리고 그의 형인 리처드 1세, 그리고 이제 우리의 국왕인 필리프 2세를 배신했다"라고 말했다. 나바라의 산초 7세는 분쟁에 참여하여 아키텐을 공격하여 앙굴렘과 투르를 점령했다. 리처드 1세 자신은 훌륭한 군 지휘관으로 알려져 있었다.[27] 이 전쟁의 초기는 존 길링엄이 묘사한 대로 필리프 2세가 "빈틈없는 정치가이자 유능한 군인"이었기 때문에 리처드 1세에게 여러 차례의 패배를 안겨주며 어려웠다.[48] 그러나 10월에 새로운 툴루즈 백작인 레몽 6세가 카페 왕가 진영을 떠나 리처드 1세 쪽에 합류했다. 그 뒤를 이어 훗날 라틴 제국의 황제가 될 발두인 4세도 필리프 2세와 아르투아를 놓고 다투며 리처드 1세 쪽에 합류했다. 1197년 헨리 6세가 사망하고 리처드 1세의 조카인 오토 4세가 그 뒤를 이었다. 뛰어난 지휘관인 불로뉴 백작 르노 드 다마르탱 또한 필리프 2세를 버렸다. 발두인 4세는 아르투아를 침공하여 생토메르를 점령했고, 리처드 1세는 베리에서 전투를 벌여 파리 근교 지소르에서 필리프 2세에게 큰 패배를 안겨주었다. 휴전이 체결되었고, 리처드 1세는 노르망디를 거의 회복했으며 이제 이전보다 더 많은 아키텐 영토를 장악하게 되었다. 리처드 1세는 다시 한번 반란에 직면했는데, 이번에는 리무쟁에서 일어났다. 그는 1199년 4월 샤뤼-샤브롤에서 석궁에 맞아 사망했고, 그의 시신은 그의 아버지처럼 퐁트브로 수도원에 매장되었다.
6. 3. 존 왕 통치기: 앙주 제국의 붕괴
1199년 리처드 1세가 사망하자, 존은 앙주 왕실 금고를 장악하려 했으나, 앙주 관습에 따라 조카인 아서 공이 더 강력한 왕위 계승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앙주, 메인, 투렌의 귀족들은 아서 공을 지지했고, 프랑스의 필리프 2세는 에브뢰와 노르망디 벡생을 점령했다. 르망은 존에게 충성을 거부했고, 존은 노르망디로 달아나 공작으로 임명된 후 잉글랜드로 떠났다. 잉글랜드는 윌리엄 마샬과 캔터베리 대주교 허버트 월터의 지지로 존을 지지했고, 존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식을 올렸다.[28]아서 공을 사로잡으려던 투아르 백작 에메리의 시도는 실패했고, 필리프 2세가 노르망디를 공격하자 존은 필리프 2세와의 휴전을 통해 통치를 확보하고자 대륙으로 돌아갔다. 존은 유리한 위치에서 아서의 앙주 총독 후보였던 윌리엄 데 로슈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윌리엄 데 로슈는 아서와 그의 어머니 콘스탄스를 포로로 르망으로 데려왔으나, 이들은 곧 필리프 2세에게 탈출했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존은 1200년 르 굴레 조약을 통해 필리프 2세와 평화를 맺고 앙주 제국 계승을 인정받았지만, 독일 동맹을 깨고 노르망디에서 필리프 2세의 이득을 인정해야 했다. 또한 필리프 2세를 봉건적 봉신으로 인정하고 20,000 마르크를 지불해야 했다. 이 조약으로 프랑스 왕의 프랑스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가 시작되었고, 앙주 제국의 통치자는 더 이상 프랑스에서 지배적인 귀족이 아니었다.[29]
존은 1200년 이자벨라 드 앙굴렘과 결혼했는데, 이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녔지만, 이자벨라가 이미 루시냥의 휴와 약혼한 상태였고 존의 결혼 후 행위는 루시냥 가문으로 하여금 필리프 2세에게 호소하게 만들었다. 필리프 2세는 존을 소환했으나 존이 거절했고, 이는 1202년 노르망디를 제외한 존의 대륙 영토 몰수로 이어졌다. 필리프 2세는 노르망디를 침공하여 여러 성을 함락시켰다.[30]
1202년 존은 미르보 전투에서 승리하여 아르튀르와 그의 누이 엘레오노르를 사로잡았지만, 아르튀르의 운명에 대해 윌리엄 데 로슈와 상의하지 않아 윌리엄이 존을 버리고 앙제를 포위하게 만들었다. 아르튀르는 팔레즈에서 사라졌고, 존이 그의 살해에 책임이 있다고 여겨졌다. 1204년 루앙이 함락되면서 노르망디는 함락되었고, 1205년에는 투르, 시농, 로슈가 함락되었다.
1204년 존의 어머니 엘레오노르가 사망하자 푸아투의 대부분이 프랑스 왕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카스티야의 알폰소 8세는 가스코뉴를 침략했다. 1206년 존의 원정으로 아키텐의 대부분은 안전해졌고, 존과 필리프 2세 사이에 2년 동안의 휴전이 체결되었다. 앙주 제국은 영국, 가스코뉴, 아일랜드, 푸아투 일부로 축소되었다.
6. 3. 1. 프랑스와의 전쟁
1212년 말, 필리프 2세는 잉글랜드 침공을 준비하고 있었다. 필리프 2세는 자신의 아들 루이를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시키려 했고, 1213년 4월 수아송 회의에서 미래의 프랑스와 잉글랜드 간 관계를 작성했다. 그러나 1213년 5월 30일, 솔즈베리 백작 윌리엄 롱에스페가 담 전투에서 프랑스 침공 함대를 격파하여 프랑스의 침공을 막는 데 성공했다.1214년 2월, 존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4세를 중심으로 한 동맹을 맺은 후 라 로셸에 상륙했다. 솔즈베리 백작과 존의 독일 동맹군이 북쪽에서 필리프 2세를 공격하는 동안 존은 남쪽에서 공격하는 것이 목표였다. 1214년 6월, 존은 루지냥, 몰레옹, 투아르 가문의 지원을 받았지만, 6월 17일 앙제를 점령하며 앙주로 진격했을 때 푸아티뱅 동맹국이 이탈하여 라 로셸로 후퇴해야 했다.
1214년 7월 27일, 존의 독일 동맹군은 부빈느 전투에서 패배했고, 솔즈베리 백작을 포함한 많은 포로가 생겼다.[31] 이 전투에서 존의 동맹군은 모두 필리프 2세에게 패배했다.
- 플랑드르 백작 페랑은 붙잡혀 투옥되었다.
- 오토 4세는 간신히 포로가 될 뻔한 위기에서 벗어났지만, 독일에서 그의 입지는 약해져 프리드리히 2세(필리프 2세와 동맹)에게 황위를 빼앗겼고, 이후 황위를 되찾지 못하고 1218년에 사망했다.
- 부르고뉴 백작 르노 드 랑마르탱은 감옥에서 쇠약해져 자살했다.
- 윌리엄 드 롱게스페이는 영국군을 지휘했지만 포로가 되었고, 나중에 로베르 3세와 교환되었다.
1214년 9월 18일, 존과 필리프 2세는 1220년 부활절까지 지속될 시농 휴전에 합의했다.[32] 같은 해 10월, 존은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존의 위신은 추락했고, 잉글랜드 경제는 파산했으며, 실패한 약탈자로 여겨지게 되었다.[101]
6. 3. 2. 마그나 카르타 (Magna Carta)
Magna Carta영어는 1215년 존 왕이 귀족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승인한 문서로, 왕권을 제한하고 귀족의 권리를 보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98]6. 3. 3. 프랑스 왕세자 루이의 잉글랜드 침공
1215년 잉글랜드 귀족(바론)들은 존이 마그나 카르타를 존중하지 않는다고 확신하여 프랑스 왕세자 루이에게 잉글랜드 왕위를 제안했다. 그해 11월, 카페 왕조 군대가 반란군을 돕기 위해 런던으로 파병되었다.[102] 1216년 5월 22일, 루이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샌드위치에 상륙했다. 존이 도망치자 루이는 런던과 윈체스터를 점령했다.[103] 8월까지 루이는 잉글랜드 동부 대부분을 지배했고, 도버, 링컨, 윈저만이 존에게 충성했다. 스코틀랜드 왕 알렉산더 2세는 캔터베리까지 가서 루이를 잉글랜드 왕으로 인정하고 봉신이 되었다.[104]존이 사망하고, 헨리 3세가 너무 어려 섭정이 설치되었다. 앵글로-노르망드 귀족들은 루이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루이는 링컨과 샌드위치에서 패배하고, 1217년 9월 램베스 조약에서 잉글랜드 왕위 요구를 철회했다.
7. 문화적 영향
앙주 제국의 지배 계급은 프랑스어를 사용했다.[34]
12세기는 슈제르 수도원장이 생드니에서 한 작업에서 알려진 고딕 건축의 세기이기도 하다. 영국 초기 건축 시기는 앙주 제국 시대인 1180년 또는 1190년경에 시작되었지만,[35] 이 종교 건축은 앙주 제국과는 완전히 독립적이었으며, 단지 같은 시기에 탄생하여 그 당시 영국에 퍼져나갔다.
리처드 1세의 개인 문장인 붉은 바탕에 세 마리의 금사자(금색 사자가 지나가는 모양)는 그 이후 대부분의 영국 왕실 문장과 노르망디와 아키텐의 깃발 변형에 계속 등장한다.[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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