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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고뉴 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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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르고뉴 공국은 14세기부터 15세기까지 존재했던 서유럽의 강력한 정치 세력이었다. 1361년 카페 가문의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1세가 후사 없이 사망한 후 프랑스 왕 장 2세가 공국을 병합했으나, 이후 그의 아들 필리프 2세에게 다시 주어지면서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필리프 대담공, 장 용맹공, 필리프 선공, 샤를 대담공으로 이어지는 동안 부르고뉴는 플랑드르, 네덜란드 등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며 번영을 누렸으나, 샤를 대담공의 부르고뉴 전쟁 패배와 사망으로 공국은 멸망하고,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가문 간의 분할로 이어진다. 부르고뉴 공국은 북방 르네상스 미술의 중심지였으며, 황금양모 기사단 창설 등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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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고뉴 공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부르고뉴의 고대 깃발
발루아-부르고뉴 왕조 통치 기간의 깃발 (상단)
부르고뉴의 군기
군기 (하단)
국명부르고뉴 공국
로마자 표기Duché de Bourgogne (프랑스어), Ducatus Burgundiae (라틴어)
일반 명칭부르고뉴
데모님부르고뉴인
시대중세
상태봉신
봉신국프랑스 왕국
정치 체제봉건 군주제
수도디종
좌표47°19′23.002″N 5°2′30.998″E
언어중세 라틴어
오일어 (고대 프랑스어, 부르고뉴어, 프랑콤투아어)
아르피탄어
종교로마 가톨릭교회
통화골드굴덴, 스튀베르, 그로
의회부르고뉴 사유지
역사
설립880년
멸망1790년 (프랑스 왕실 영토로 흡수)
계승 위기1002년
백년 전쟁1337년–1453년
부르고뉴 네덜란드와 부르고뉴 백국과의 개인 연합1384년
금양모 기사단1430년
부르고뉴 전쟁1474년–1477년
부르고뉴 계승 전쟁1477년–1482년
이전 국가부르군트 왕국
후계 국가프랑스 왕국
통치자
초대 공작로베르 1세
초대 공작 재임 기간1032년–1076년
마지막 공작샤를 용담공
마지막 공작 재임 기간1467년–1477년
공작필리프 용감공, 장 용감공, 필리프 선량공, 샤를 용담공
현재 국가
현재 국가프랑스

2. 명칭

'''부르고뉴 공국'''(Duché de Bourgogne|뒤셰 드 부르고뉴프랑스어) 또는 '''부르고뉴 국가'''(État bourguignon|에타 부르기뇽프랑스어)라고도 한다. 이는 발루아부르고뉴가 시대에 부르고뉴가 중앙 집권적 국가 기구를 갖추기 시작했기 때문이다.[41] 공국은 부르고뉴 공국의 농업 지대, 플랑드르 백국의 헨트브뤼허로 상징되는 상공업 지대를 포함했으며, 칙령대(상비군)까지 갖추었다.[42]

각 언어에서 부르고뉴는 다음과 같이 불렸다. 옛 부르군트 왕국의 영역이라는 것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언어명칭
프랑스어부르고뉴 (Bourgogne|부르고뉴프랑스어)
독일어부르군트 (Burgund|부르군트de)
영어버건디 (Burgundy|버건디영어)


3. 역사

534년부터 843년까지 프랑크 왕국 내 부르고뉴


부르고뉴 공국은 5세기에 갈리아에 도착한 동게르만족인 부르고뉴인들이 지배하던 부르군트 왕국의 계승자였다. 부르고뉴인들은 디종, 샬롱쉬르쏜 등지에 정착하여 그 지역에 이름을 남겼다. 부르군트 왕국은 534년 메로빙거 왕조의 힐데베르트 1세에 의해 프랑크 왕국에 합병되었으나,[7] 프랑크 왕의 사후 프랑크 영토가 재분할될 때 여러 차례 재건되었다.[4]

프랑크 왕국의 일부였던 부르고뉴는 ''로이 곰베트''를 유지하며 반자치적인 존재를 유지했다. 그러나 남부 부르고뉴는 8세기 사라센 침공으로 약탈당했다. 샤를 마르텔이 침입자들을 몰아낸 후, 부르고뉴를 네 개의 지휘부로 나누고, 그의 형제 힐데브란트를 프랑크 부르고뉴 총독으로 임명했다. 카롤링거 왕조 시대에 부르고뉴의 분리주의는 약해졌고, 부르고뉴는 이전 부르고뉴의 백국 지역만을 가리키는 순전히 지리적인 용어가 되었다.[4]

부르고뉴 공국과 부르고뉴 백국은 모두 카롤링거 중앙집권주의의 붕괴와 843년 베르됭 조약에 의해 초래된 프랑크 영토의 분할로 등장했다. 프로방스의 게랭은 대머리왕 샤를을 도와 퐁테네 전투에서 황제 로타르에 대항했다. 서프랑크 왕국이 분할되면서 게랭은 샬롱과 네베르 백국의 행정권을 부여받았고, 때때로 "공작"으로 알려졌다.[4]

약 900년경 구 부르고뉴 왕국의 세 지역 지도


리샤르 공작 시대에 부르고뉴 공국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리샤르는 왕으로부터 공작으로 공식 인정받았으며, 오튀네, 보뇌, 아발루아 등 여러 지역을 포함하는 ''ducatus''라는 영토에 대한 권력을 강화했다. 리샤르 통치하에 이 지역들은 법과 질서를 부여받았고, 노르망인으로부터 보호받았으며, 박해받는 수도승들에게 피난처가 되었다.

프랑스의 루돌프는 리샤르의 아들로, 923년 프랑스 국왕이 되면서 부르고뉴는 잠시 프랑스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흑색 휴 치하에서 부르고뉴는 힘든 시대를 맞이했다. 프랑키아 공작 칭호를 가진 로베르 가문은 부르고뉴 공국을 종주권 아래 두려고 했으나 실패했고, 부르고뉴는 독립된 공국으로 유지되었다. 프랑스의 첫 번째 카페 왕조 국왕인 위그 카페의 두 형제, 오토와 앙리 경건왕이 공국의 독립을 유지했지만, 앙리 1세가 자식 없이 죽은 것은 공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순간이었다.[8]

1002년 앙리 1세가 사망하면서 로베르 경건왕과 오토-빌렘 사이에 계승 분쟁이 발생했다. 로베르는 부르고뉴 공국을 프랑스 왕관에 안전하게 하였고, 통일된 부르고뉴의 전망은 사라졌고, 공국은 프랑스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한동안 공국은 왕실 영토의 일부였으나, 프랑스의 앙리 1세는 그의 형제 로베르 1세에게 공국을 주었다. 로베르는 공국의 "자유 소유권을 누리고" "그것을 그의 상속인에게 물려줄 권리"를 갖게 되었고, 카페 왕조 공작 시대가 시작되었다.

12세기와 13세기의 부르고뉴-아를 왕국과 카페 왕조 부르고뉴 공국


로베르와 그의 상속자들은 공작령 직할지를 회복하고 공작의 권력을 강화해야 했다. 그들은 몰수법(Escheat)을 이용하고, 토지와 봉신을 매입하여 공작령 직할지를 늘리고 봉신의 수를 증가시켰다. 그들은 공국 내 영주의 봉건적 권리를 인정하는 대가로 현금 지불을 요구하고, 유대인과 롬바르드 은행가들로부터 대출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봉건적 세금을 신중하게 관리하며, 면제와 사법권을 적극적으로 판매함으로써 수입을 얻었다.

공국은 카페 왕조의 통치로부터 혜택을 받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국가는 건설되고 안정되었고, 보뉴에 졸르 제네랄(Jours Generaux)이 설치되었으며, 공국은 5개의 집정관 관할구로 나뉘었다.

11세기 말, 부르고뉴 공국은 스페인의 레콩키스타에 점점 더 많이 관여하여 무슬림 타이파와 싸우고 스페인 왕실과 결혼 동맹을 맺었다. 제1차 십자군이 시작되면서 부르고뉴 공작들의 관심은 성지로 옮겨갔고, 부르고뉴 공작 오도 1세는 1101년 십자군 중에 사망했다.[9]

로베르 2세의 지도 아래 부르고뉴는 정치적, 경제적으로 새로운 수준에 도달했다. 로베르는 차남과 차녀에게 소규모 토지와 작위를 수여하는 관행을 끝내고, 장남 위그에게 모든 것을 남겼다.

위그 5세는 1315년에 사망했고, 그의 동생 오도 4세가 계승했다. 그는 잔과의 결혼을 통해 부르고뉴와 아르투아를 통합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오도 공작과 잔 백작 사이에는 필리프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는 오베르뉴와 불로뉴의 상속녀 잔과 결혼하여 필리프 1세를 낳았지만, 필리프 1세는 부모보다 먼저 사망했다. 결국 공국의 생존은 어린 필리프 1세에게 달려있었다.

필리프 1세는 1349년부터 부르고뉴 공작이 되었다. 그는 플랑드르의 상속녀 마르그리트와 결혼할 예정이었으나, 1361년 흑사병으로 사망했다.

918년부터 1477년까지 부르고뉴 가문 소유지의 성장을 보여주는 애니메이션. 빨간색은 부르고뉴 공국입니다.


필리프 1세가 사망하자, 공국의 계승 문제가 복잡하게 제기되었다. 장자 상속과 혈족 근접성이라는 두 가지 상속 원칙이 있었는데, 나바라의 샤를 2세는 장자 상속에서, 프랑스의 장 2세는 혈족 근접성에서 우월한 주장을 가졌다.

그러나 백년 전쟁 상황에서 나바라 왕은 잉글랜드의 동맹이었고, 부르고뉴인들은 장 2세를 지지했다. 결국 장 2세가 공국을 상속받았고, 그는 공국을 프랑스 왕관에 합병하려고 시도했으나, 부르고뉴인들의 반발로 실패했다.

국왕의 막내아들 필립 대담왕은 1363년 부르고뉴 공작으로 임명되었고, 1364년 샤를 5세는 이를 공식적으로 확립했다.

1477년 프랑스(붉은색 윤곽선): 부르고뉴 전쟁 이후 부르고뉴 영토(주황색/노란색)


필립 대담왕과 담피에르의 마가렛의 결혼으로 부르고뉴 공작령은 플랑드르, 네베르, 레텔 백국을 포함하여 확장되었다.[10] 1405년까지 부르고뉴는 프랑스의 봉토라기보다는 독립적인 국가에 가까워졌고, 유럽 정치에서 주요한 정치 세력이었다.

필리프 대담공은 신중한 인물이었으나, 그의 아들 용맹공 장은 그렇지 않았고, 부르고뉴와 오를레앙은 권력을 놓고 다투면서 충돌하였다. 장의 죽음 이후, 공작들은 샤를 7세와 루이 11세로부터 견제를 받았다.

선량공 필리프가 그의 아들 대담공 샤를과 그의 재상 니콜라 롤랭과 함께 약 1447~1448년경에 ''헤이노의 연대기''를 받는 모습


선량공 필리프와 대담공 샤를은 프랑스 왕관으로부터 독립을 확보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대담공 샤를이 전투에서 사망하자, 루이 11세는 공작령을 프랑스 왕관에 병합하였다. 샤를의 딸 부르고뉴의 마리는 부르고뉴 공작령을 주장하였고, 부르고뉴 계승 전쟁이 일어났다. 아라스 조약 (1482년)으로 프랑스는 대부분의 부르고뉴 봉토를 유지하였고, 플랑드르 백국은 막시밀리안과 마리의 후손에게 넘어갔다. 1493년 생리스 조약으로 부르고뉴 백국, 아르투아샤를루아는 막시밀리안의 후손에게 돌아갔지만, 부르고뉴 공작령과 피카르디는 프랑스에 완전히 넘어갔다.[11]

1526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는 마드리드 조약에 따라 작위와 영토를 회복했지만,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는 조약을 파기했고, 카를 5세는 공작령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지 못했다. 프랑스의 앙리 2세는 스페인 합스부르크가의 작위 주장은 무효라고 주장했고, 이후 부르고뉴 영토는 프랑스에 남았다. 이 작위는 때때로 프랑스 왕족에게 부여되었다.[11]

현재 스페인 국왕인 스페인의 펠리페 6세는 "부르고뉴 공작"이라는 칭호를 주장하며, 스페인의 후안 카를로스 1세의 문장에는 부르고뉴 십자기가 포함되어 있다. 부르고뉴 십자기는 스페인 제국의 전성기 시절 국기였다.[11]

3. 1. 초기 부르고뉴 왕국과 프랑크 왕국의 지배

부르군트 왕국은 534년 프랑크족의 침입으로 멸망하고, 6세기 말경부터 프랑크 왕국의 지배를 받았다. 561년 프랑크 왕 클로타르 1세가 사망하자 프랑크 왕국은 메로빙거 왕가 사람들에 의해 분할되었고, 클로타르의 아들인 군트람이 부르군트 왕국을 차지했다. 이 왕국은 기존 부르군트 왕국의 영토와 프로방스아를 주교관구, 알프스 동쪽의 발다오스타, 프랑스 중북부의 상당 지역을 포함했다. 이 왕국은 독립된 메로빙거 왕국으로 존속하다가 8세기에 카를 마르텔에 의해 점령되어 프랑크 오스트라시아의 일부가 되었다.[4]

프랑크 왕국의 일부였던 부르고뉴는 부르고뉴인들이 그들만의 법전인 ''로이 곰베트''를 유지하면서 반자치적인 존재를 유지했다. 그러나 남부 부르고뉴는 8세기 사라센 침공으로 약탈당했다. 샤를 마르텔이 침입자들을 몰아낸 후, 부르고뉴를 아를 부르고뉴, 비엔 부르고뉴, 알레만 부르고뉴, 프랑크 부르고뉴의 네 개의 지휘부로 나누고, 그의 형제 힐데브란트를 프랑크 부르고뉴 총독으로 임명했다. 카롤링거 왕조 시대에 부르고뉴의 분리주의는 약해졌고, 부르고뉴는 이전 부르고뉴의 백국 지역만을 가리키는 순전히 지리적인 용어가 되었다.[4]

부르고뉴 공국과 부르고뉴 백국은 모두 카롤링거 중앙집권주의의 붕괴와 843년 베르됭 조약에 의해 초래된 프랑크 영토의 분할로 등장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프로방스의 게랭은 프랑크 왕 경건왕 루이의 막내아들인 대머리왕 샤를에게 자신을 붙였고, 샤를의 형인 황제 로타르에 대항하는 퐁테네 전투에서 그를 도왔다. 서프랑크 왕국이 쏜과 뫼즈의 경계를 따라 분할되면서 게랭은 왕으로부터 샬롱과 네베르 백국의 행정권을 부여받았다. 그는 관습적으로 자신의 대리인으로 통치할 부백작을 임명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서프랑크 국경의 중요한 군사 방어자였던 게랭은 때때로 "지도자"를 뜻하는 라틴어 ''dux'' 또는 "공작"으로 알려졌다.[4]

3. 2. 부르고뉴 공국의 성립과 카페 왕조 시대

1031년부터 카페 왕조의 방계인 부르고뉴 가문이 부르고뉴 공국을 지배했다. 마지막 당주 필리프 1세1361년 요절하자 이곳은 프랑스 국왕의 직할령이 되었다.[47]

1363년 프랑스 국왕 현명왕 샤를 5세는 동생 용담공 필리프를 부르고뉴 공작에 봉했다. 한편 플랑드르 백작 루이 2세는 명확히 잉글랜드 편을 들었고, 같은 해 에드워드 3세는 삼남 에드먼드와 루이 2세의 유일한 후계자인 마르그리트를 결혼시키려 했다.[48] 샤를 5세는 이를 방해하고 동생인 호담공 필리프와 마르그리트를 결혼시켰다.[48]

1369년 6월 13일, 부르고뉴 공 필리프 2세와 부르고뉴 여백작이자 플랑드르 여백작인 마르그리트 3세의 결혼으로 광활한 동군 연합이 성립되었다.

3. 3. 발루아-부르고뉴 가문 시대의 번영과 갈등

1363년 프랑스 왕 장 2세는 부르고뉴 공국을 왕실 직영지로 병합한 후, 자신의 막내아들 필리프 2세에게 봉토로 수여했다.[44] 이는 푸아티에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운 공로에 대한 보답이었으나,[45] 훗날 왕실과 부르고뉴 간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45]

1369년 필리프 2세는 플랑드르의 마르가레트와 결혼하여 1384년 장인 사망 후 느베르, 르텔, 아르투아, 플랑드르, 프랑슈콩테를 상속받았다. 부르고뉴 공국은 프랑스 남부와 북부 (네덜란드, 뫼즈강 유역, 아르덴)로 확장되었으며, 에노(1428), 브라반트(1430), 뤽상부르(1443) 등이 프랑스 영토로 편입되었다.

백년 전쟁 이전,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는 1336년 양모 수출입을 금지하여[46] 플랑드르의 산업에 타격을 주었고, 이는 야코프 판 아르테벨더의 반란을 야기했다.[46] 플랑드르 백작 루이 1세는 프랑스로 망명했고, 여러 도시들은 잉글랜드를 지지했다.[46] 1338년 잉글랜드군은 플랑드르를 침공하여 백년 전쟁 초반의 요지가 되었다.

1380년 샤를 5세가 사망하고 샤를 6세가 즉위하면서, 필리프 2세를 비롯한 왕의 숙부들이 섭정을 맡았다.[49] 필리프 2세는 프랑스 국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50] 1388년 샤를 6세는 친정을 시작하며 루이를 중용하여 필리프 2세와 대립이 심화되었으나,[50] 1392년 샤를 6세의 정신 질환 발작 이후 왕비 이자보루이의 관계로 오를레앙파가 세력을 키웠다.[51]

1404년 필리프 2세 사후, 장 1세를 중심으로 '''부르고뉴파'''가 형성되었다. 1407년 부르고뉴파는 루이를 암살했고, 오를레앙파는 '''아르마냐크파'''로 이름을 바꾸고 내란을 일으켰다.[53] 1415년 아쟁쿠르 전투에서 프랑스는 대패했고, 아르마냐크파는 약화되었다.[55]

샤를 왕태자는 파리에 정부를 세우고 이자보를 추방했다.[56] 장 1세이자보와 연합하여 1418년 파리에서 실권을 잡고 친(親)잉글랜드 정책을 펼쳤다.[57] 1419년 장 1세샤를 왕태자와의 회담 중 암살당했다.

필리프 3세는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고,[58] 1420년 트루아 조약을 통해 헨리 5세와 카트린의 결혼, 샤를 왕태자의 폐위, 잉글랜드-프랑스 이중 왕국 수립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1422년 헨리 5세샤를 6세의 사망으로 헨리 6세가 즉위하고, 샤를 왕태자는 조약을 부정했다.

3. 4. 부르고뉴 전쟁과 공국의 멸망

1474년부터 샤를 1세는 로트링겐 지방과 스위스 북서부로의 확장을 꾀하며 부르고뉴 전쟁을 일으켰다.[67] 그는 부르고뉴 공국의 왕국 승격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위에 대한 야심을 품고 있었다.[67] 1476년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3세의 아들 막시밀리안과 외동딸 마리를 약혼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샤를 1세는 1477년 1월 5일 낭시 근교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67] 그는 생전에 프랑스 왕 루이 11세와 끊임없이 갈등했다. 샤를 1세는 로렌 지방을 합병하여 부르고뉴 공국의 남부와 북부를 연결하려 했으나, 루이 11세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여러 차례 원정을 벌이고 경제 봉쇄령을 내리기도 했다.

샤를 1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루이 11세는 부르고뉴의 상속녀 마리와 자신의 아들인 도팽 샤를(훗날 샤를 8세)과의 혼인을 추진했으나 실패했다. 마리는 오스트리아의 대공 막시밀리안과 결혼했다. 1482년 루이 11세는 막시밀리안과 아라스 조약을 맺어 아들 도팽 샤를과 마리의 딸 마르가레트를 약혼시키고 프랑슈콩테를 할양받았다.[68] 그러나 샤를 8세1491년 브르타뉴의 안과 결혼하면서 마르가레트와 파혼했다.[69] 1493년 샤를 8세는 막시밀리안 1세와 상리스 조약을 맺고 프랑슈콩테를 다시 오스트리아에 돌려주었다.

4. 문화

선량공 필리프는 1419년 본거지를 디종에서 브뤼허로 옮기고[63] 각지에 프린센호프를 지었으며 특히 브뤼허에 즐겨 머물렀다.[64] 궁정이 존재함으로써 예술가들이 파리 등으로 돈을 벌러 갈 필요 없이 브뤼허를 비롯한 각 도시에서의 활동이 가능해졌다.[63] 플랑드르 지역은 북방 르네상스의 한 축을 담당하며 유럽 미술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63]

1430년 1월 10일, 선량공과 포르투갈 공주 이자벨과의 혼례를 계기로 '''황금양모 기사단'''이 창설되었다. 이는 십자군을 염두에 두고 장려한 의식이 펼쳐졌으며 부르고뉴 귀족의 신분, 지위 및 정체성을 상징했다.[65] 또한 부르고뉴 및 주변국들의 제후를 의례체계에 편입하려는 외교적인 의도가 있었다.[66]

발루아 부르고뉴 공작령 아래에서, 공작령은 번영하였다. 플랑드르는 유럽의 주요 수출품이었던 모직물 산지로, 이를 중심으로 한 경제의 중심지였다. 르네상스 문화는 전반적으로 이탈리아가 중심이었지만, 15세기에 회화와 음악 분야에서는 이탈리아를 능가하는 발전을 보였다.

4. 1. 회화

필리프 선공 시대에 얀 반 에이크(1390년경 - 1441년)는 유화 기법을 완성했다. 대표작으로는 「겐트 제단화」가 있다.[63]

4. 2. 음악

음악사에서는 르네상스 음악의 발전으로 알려져 있다. 기욤 뒤파이(1400년경 - 1474년)는 플랑드르의 캉브레(현재는 프랑스 영토)에서 태어나 이탈리아로 건너가 활동했다. 1437년에 캉브레로 돌아온 후에도 많은 작곡을 했고, 뒤파이를 중심으로 부르고뉴 악파라고 불리는 그룹이 형성되었다.[63] (후에, 16세기에는 플랑드르 악파)

5. 역대 부르고뉴 공작

리샤르 공작(921년 사망) 시대에 부르고뉴 공국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리샤르는 왕으로부터 공작으로 공식 인정받았으며, 부르고뉴 공작으로서 자신의 영토에 대한 권력을 점점 더 강화할 수 있었다. 리샤르의 ''ducatus''에는 오튀네, 보뇌, 아발루아, 라소아, 디종, 몽토, 아튀이, 오셰레, 오크소아, 뒤에스무아, 오세르, 니베르네, 쇼누아, 마수아 지역이 포함되었다.[8]

프랑스의 루돌프는 리샤르의 아들로, 921년 부르고뉴 영토를 계승한 후 923년 프랑스 국왕이 되면서 부르고뉴는 잠시 프랑스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흑색 휴(952년 사망) 치하에서 부르고뉴는 프랑키아 공작 칭호를 가진 로베르 가문이 부르고뉴 공국을 종주권 아래 두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프랑스의 첫 번째 카페 왕조 국왕인 위그 카페의 두 형제인 오토와 앙리 경건왕이 공작 지위를 이어받아 공국의 독립을 유지했지만, 앙리 1세가 자식 없이 죽으면서 공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순간을 맞이했다.[8]

1002년 앙리 1세가 사망하면서 두 명의 후계자가 등장했는데, 프랑스 국왕인 그의 조카 로베르 경건왕과 앙리 1세가 양자로 삼았던 그의 계자 오토-빌렘이었다. 로베르는 13년간의 격렬하고 장기간에 걸친 전투 끝에 디종을 포함한 쏘느 강 서쪽의 모든 부르고뉴 백작령을 장악하여 부르고뉴 공국을 프랑스 왕관에 안전하게 하였다.

이후 공국은 왕실 영토의 일부였지만, 당시 프랑스 왕실은 불안정한 영토를 다스릴 수 없었다. 프랑스의 앙리 1세는 그의 형제 로베르 1세에게 부르고뉴 공작 지위를 주었고(1032년) 로베르는 공국의 "자유 소유권"과 "상속인에게 물려줄 권리"를 갖게 되었다. 이로써 카페 왕조 공작 시대가 시작되었다.

카페 왕조 시대 부르고뉴 공작들은 공작령 직할지를 회복하고 공작의 권력을 강화해야 했다. 그들은 몰수법(Escheat)을 이용하고, 토지와 봉신을 매입하여 공작령 직할지를 늘리고 공작에게 의존하는 봉신의 수를 증가시켰다.

11세기 말, 부르고뉴 공국은 스페인의 레콩키스타에 참여했고, 제1차 십자군이 시작되면서 성지로 관심이 옮겨갔다. 부르고뉴 공작 오도 1세는 1101년 십자군 중에 사망했다.[9]

로베르 2세(재위 1271~1306년)의 지도 아래 부르고뉴는 정치적, 경제적으로 새로운 수준에 도달했다. 로베르는 차남들에게 소규모 토지와 작위를 주는 관행을 끝내고, 장남 위그와 그의 상속자에게 모든 것을 남겼다.

위그 5세 사후, 그의 동생 오도 4세가 계승했다. 오도 4세와 잔의 결혼으로 부르고뉴는 다시 통합되었으나,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1세(루브르의 필립)가 흑사병으로 1361년 사망하면서 왕조가 끝났다.

필리프 사망 후, 상속 문제에 있어 장자 상속과 혈족 근접성 두 가지 원칙에 따라, 샤를 2세는 장자 상속에서, 장 2세는 혈족 근접성에서 우월한 주장을 가졌다. 백년 전쟁 중 나바라 왕은 잉글랜드 동맹이었기에 부르고뉴인들에게 불쾌감을 주었고, 결국 부르고뉴 귀족들은 장 2세를 지지했다. 장 2세는 칙령을 통해 공국을 프랑스 왕관에 합병하려 했으나, 부르고뉴인들의 반대로 실패하고, 막내아들 필립 대담왕을 부르고뉴 공작으로 임명했다.

; 필리프 대담공

(대담공, 또는 용맹공. Philippe le Hardi프랑스어 1342년 ~ 1404년, 재위: 1363년 ~ 1404년[39])

1384년 플랑드르 백작 부인이자 부르고뉴 백작 부인 마르그리트와 결혼하여 거대 세력이 되었다.

; 장 용맹공

(무적공이라고도 함. Jean sans peur프랑스어 1371년 ~ 1419년, 재위: 1404년 ~ 1419년)

파리를 지배했지만, 왕세자 샤를(샤를 7세)에게 암살당했다. 이후 부르고뉴 파는 잉글랜드 왕국과 동맹하여 백년 전쟁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 필리프 선공

(Philippe le Bon프랑스어 1396년 ~ 1467년, 재위: 1419년 ~ 1467년)

안정된 통치를 하고 영토를 확장했다. 금양모 기사단을 창설하고 기사도 문화가 최성기를 맞이했다. 백년 전쟁에서 잉글랜드 편에 서서, 1430년 잔 다르크를 잉글랜드군에 넘겼다.

; 샤를 대담공

샤를 대담공(루벤스 그림)


(용감공, 무모공, 돌진공. Charles le Téméraire프랑스어 1433년 ~ 1477년, 재위: 1467년 ~ 1477년)

영토 확장을 꿈꾸며 부르고뉴 전쟁을 일으켰으나, 낭시 전투에서 전사했다.

; 마리 여공

마리 여공


(Marie프랑스어 1457년 - 1482년, 재위: 1477년 - 1482년)

아버지 샤를 용감공 사후,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의 선동으로 반란이 일어났다. 기네가테 전투 승리로 네덜란드와 프랑슈-콩테는 확보했으나, 낙마 사고로 요절했다. 발루아-부르고뉴가 남계가 단절되어 아들 필리프 아름다운 공작이 상속받았다.

5. 1. 카페 왕조 부르고뉴 가문

1031년부터 카페가의 방계인 부르고뉴 가문이 부르고뉴 공국을 지배했다. 마지막 당주인 필리프 1세1361년에 요절하자, 부르고뉴 공국은 프랑스 국왕의 직할령이 되었다.[47]

1363년, 프랑스 국왕 샤를 5세는 동생인 필리프를 부르고뉴 공작에 임명했다. 한편, 플랑드르 백작 루이 2세는 잉글랜드 편을 들었고, 에드워드 3세는 아들 에드먼드와 루이 2세의 후계자인 마르그리트를 결혼시키려 했다.[48] 샤를 5세는 이를 막고 필리프와 마르그리트를 결혼시켰다.[48]

1369년 6월 13일, 필리프 2세와 부르고뉴 여백작이자 플랑드르 여백작인 마르그리트 3세의 결혼으로 광활한 동군 연합이 성립되었다.

5. 2. 발루아-부르고뉴 가문

필리프 대담공과 담피에르의 마가렛( 루브르의 필리프의 미망인)의 결혼으로 부르고뉴 공작령은 부르고뉴 백국과 다시 통합되었을 뿐만 아니라 아르투아 백국과도 통합되었고, 또한 부유한 플랑드르, 네베르, 레텔 백국을 공작의 지배하에 두게 되었다.[10] 1405년 필리프와 마가렛이 사망하고 그들의 아들 장 용맹공이 공작령과 그들의 대부분의 소유지를 상속받을 때까지, 부르고뉴는 프랑스의 봉토라기보다는 독립적인 국가에 가까워졌다.

장 용맹공의 통치 아래 부르고뉴와 오를레앙은 권력을 놓고 다투면서 충돌하였다. 그 결과 부르고뉴의 권력은 증가했지만, 부르고뉴 국가는 프랑스 왕관의 적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장의 죽음 이후, 공작들은 샤를 7세와 그의 후계자 루이 11세로부터 주의 혹은 노골적인 적대감을 받았다.

선량공 필리프 3세는 1419년 본거지를 디종에서 브뤼허로 옮기고[63] 각지에 프린센호프를 지었으며 특히 포르투갈 공주 이자벨과의 혼례를 계기로 '''황금양모 기사단'''이 창설되었다.[65]

1467년 선량공 필리프의 사망 이후 용담공 샤를 1세가 공위를 계승했다. 용담공 샤를은 세력 확대를 꾀하고 전투를 이어나갔다. 부르고뉴 전쟁을 일으켰으나 1477년 1월 5일 낭시 근교에서 전사하였다.

샤를 1세의 목표는 로렌 지방을 합병하여 공국의 남부와 북부를 결합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노력은 루이 11세의 방해를 받아 좌절되었고 실제로 루이 11세는 샤를을 토벌하기 위해 여러 번 원정전을 벌이고 부르고뉴를 상대로 경제봉쇄령을 내리기도 했다.

1477년 부르고뉴 공작 샤를 1세가 죽자 루이 11세는 부르고뉴의 유일한 상속녀인 마리와 자신의 아들인 도팽 샤를(훗날 샤를 8세)과 혼인을 추진했으나 실패하였다. 상속녀인 부르고뉴의 마리는 오스트리아의 대공인 합스부르크의 막시밀리안(후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과 결혼했다.

발루아 부르고뉴 공작령 아래에서, 공작령은 번영하였다.

초상화이름별칭출생-사망 년도재위 기간
--필리프 대담공대담공, 용맹공
Philippe le Hardi프랑스어(필리프 르 아르디)
1342년 ~ 1404년1363년 ~ 1404년[39]
--장 용맹공무적공
Jean sans peur프랑스어(장 상 푸르)
1371년 ~ 1419년1404년 ~ 1419년
--필리프 선공Philippe le Bon프랑스어(필리프 르 봉)1396년 ~ 1467년1419년 ~ 1467년
샤를 대담공용감공, 무모공, 돌진공
Charles le Téméraire프랑스어(샤를 르 테메레르)
1433년 ~ 1477년1467년 ~ 1477년
마리 여공Marie프랑스어1457년 ~ 1482년1477년 ~ 1482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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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언어
[3] 웹사이트 Burgundy - Roman, Medieval, Renaissance https://www.britanni[...] 2024-01-09
[4] 웹사이트 Histoire de la Bourgogne https://www.mon-coin[...] 2024-01-09
[5] 웹사이트 Les Etats bourguignons (1363-1477) - Réussite et déclin d'une principauté pendant la Guerre de Cent Ans (I) https://www.histoire[...] 2024-01-09
[6] 웹사이트 Histoire Abrégée Du Duché De Bourgogne, Depuis Les Eduens, Les Lingons Et Les Séquanois, Jusqu'à La Réunion De La Province À La Couronne Sous Louis Xi.... https://www.indigo.c[...] 2024-01-09
[7] 웹사이트 Kingdom of the Burgundy (406–534) https://www.shorthis[...] 2020-11-25
[8] 웹사이트 Les ducs Valois et le duché de Bourgogne https://www.faton.fr[...] 2024-01-09
[9] 서적 The New Cambridge Medieval History Cambridge University Press
[10] 서적 Philip the Bold: The Formation of the Burgundian State Boydell Press
[11] 웹사이트 DUCHÉ DE BOURGOGNE : La réunion du duché au royaume de France https://www.universa[...] 2024-01-09
[12]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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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웹사이트 日本大百科全書(ニッポニカ)の解説 https://kotobank.jp/[...] コトバンク 2018-02-12
[40] 서적 The Early Dated Coins of Europe, 1234–1500 Coin & Currency Institu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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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서적 佐藤 2003
[55] 서적 佐藤 2003
[56] 서적 佐藤 2003
[57] 서적 사토 2003
[58] 서적 佐藤 2003
[59] 서적 佐藤 2003
[60] 서적 佐藤 2003
[61] 서적 佐藤 2003
[62] 서적 佐藤 2003
[63] 서적 荒木 2015
[64] 서적 河原 2006
[65] 서적 河原 2006
[66] 서적 掘越 1996
[67] 서적 江村 1987
[68] 서적 프랑스의 역사 까치글방 2013-03-11
[69] 서적 프랑스의 역사 까치글방 2013-03-11
[70] 서적 江村 1987
[71] 서적 江村 1987
[72] 서적 江村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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