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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다카모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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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리 다카모토는 센고쿠 시대의 무장으로, 모리 모토나리의 적남이다. 1523년에 태어나 1563년에 사망했으며, 1546년 모리 가문의 가독을 상속받아 13대 당주가 되었다. 그는 오우치 요시타카에게 인질로 보내져 우아한 생활을 했으며, 이쓰쿠시마 전투에서 아버지 모토나리와 함께 스에 하루카타를 격파하는 데 기여했다. 다카모토는 온화하고 교양 있는 인물이었으나, 무장으로서의 기개와 재치는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의 사후, 모리 가문은 그의 아들 모리 데루모토가 이었으나, 모토나리가 실질적인 당주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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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다카모토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모리 다카모토 사진
이름모리 다카모토 (毛利 隆元)
아명쇼노타로 (少輔太郎)
출생1523년
사망1563년 9월 18일 (향년 40세 또는 41세)
출생지아키 지방 사루카케 성
사망지아키 지방 요시다
묘소히로시마현 아키타카타시 다이츠인
계명조에이지덴코로쿠다이부카케이요코다이젠조몬, 조에이공
신호불명
관위비추노카미, 종4위하, 다이젠노다이부, 증 정3위
씨족모리 씨
가문
가문일문자삼성 (나가토별)
정치 경력
직위다이묘
주군오우치 요시타카아시카가 요시테루
모리 가문 당주시작: 1557년
종료: 1563년
이전: 모리 모토나리
이후: 모리 데루모토
막부무로마치 막부 쇼반슈, 스오, 나가토, 아키, 빈고, 비추 슈고
가족 관계
아버지모리 모토나리
어머니묘큐니 (깃카와 구니쓰네의 딸)
배우자오사키노쓰보네 (오우치 요시타카의 양녀, 나이토 오키모리의 딸)
자녀모리 데루모토
도쿠쓰루마루
쓰와노노쓰보네 (요시미 히로요리의 아내)
형제자매
고료노쓰보네 (시시도 다카이에의 아내)
깃카와 모토하루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딸 (우에하라 모토마사의 아내)
니노미야 나리토키
호이다 모토키요
모리 모토아키
이즈하 모토토모
아마노 모토마사
스에쓰구 모토야스
고바야카와 히데카네
군사 정보
소속모리 씨
참전 전투미야지마 전투 (1555년)
모지 성 포위전 (1561년)

2. 생애

1523년 타지히-사루가케 성에서 태어나,[1] 오우치 요시타카의 인질로 스오 국으로 보내졌다.[1] 이는 아버지의 오우치 가문에 대한 충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1] 1546년경 아버지의 은퇴와 함께 가문의 공식적인 지도자가 되었지만, 아버지 모리 모토나리는 계속해서 가문의 일을 실제로 통제했다.[1]

1555년, 스에 하루카타가 쿠데타를 일으켜 오우치 요시타카에게 자결을 강요한 후, 미야지마 전투에서 스에 하루카타를 패배시켰다.[2] 모리 가문은 주고쿠 지방에서 권력을 잡았다.[1]

1561년, 오토모 소린에 맞서 모지 포위전에서 싸웠으나, 오토모의 공격은 실패했고 성은 모리 가문의 소유로 남았다.[3]

아버지의 조언이나 명령에 따라 오우치 영토를 공격했고, 빈고 국을 통해 모리 군대를 이끌던 중, 1563년 9월 18일 갑자기 4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 갑작스러운 질병으로 사망했지만, 독살 의혹도 있었다.

1566년경,[1][4] 아들 모리 데루모토가 후계자로 선택되었지만, 모토나리가 모리 가문의 실질적인 권력을 계속 행사했다.[5]

2. 1. 탄생과 인질 시대

다이에이 3년(1523년) 모리 모토나리의 적남으로서 아키국 다지히사루카케성(多治比猿掛城)에서 태어났다.[1]

덴분 6년 12월 1일(1537년) 당시 모토나리가 종속되어 있던 스오의 전국 다이묘 오우치 요시타카에게 인질로 보내져 야마구치에서 인질 생활을 하게 되었지만, 빈객에 가까운 대우를 받으면서 우아한 생활을 하였다. '쇼유타로'(少輔太郎, 다카모토의 아명)는 동생인 다카카게 만큼은 아니지만 단정한 용모였기 때문에, 요시타카가 총애했다고 한다. 같은 해 요시타카를 에보시오야(烏帽子親, 관례 시의 대부)로 하여 관례를 올려 요시타카의 이름에서 '다카'(隆)라는 글자를 받아 '다카모토'(隆元)라고 칭했다. 또한, 다음해에는 요시타카의 양녀를 정실로 맞아들인다. 적남 다카모토를 인질로 보냈기 때문에 모리 가문은 오우치 가문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받게 되었다.[1] 다카모토는 요시타카와의 교류에 따라 상당한 지식과 교양을 익히게 된 반면, 필요 이상으로 온화한 성격이 되었다. 당시의 다카모토의 우아한 생활상은 <<모리 다카모토 공 야마구치 두류일기(毛利隆元公山口逗留日記)>>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야마구치에 머물고 있는 다카모토는 오우치 가문의 중신 나이토 오키모리(内藤興盛)와 에라 후사히데(江良房栄), 그리고 같은 인질 신세의 아마노 다카쓰나(天野隆綱) 등과도 친교를 맺었다. 특히 동년배였던 스에 다카후사(陶隆房, 후의 스에 하루카타)와 히로나카 다카카네(弘中隆包)와는 친교가 깊어, 귀국 후에도 오우치 가문과의 외교 정책의 일환으로 서로 연락을 취했다고 한다.

덴분 9년(1540년), 요시타카로부터 요시다 고리야마성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 받았다.[1]

2. 2. 가독 상속과 이쓰쿠시마 전투

1546년(덴분 15년), 아버지 모리 모토나리가 갑작스럽게 은거 의사를 밝히면서 모리 다카모토는 가독을 상속받아 모리 가문의 제13대 당주가 되었다. 그러나 모토나리는 은거 후에도 실권을 장악했고, 다카모토는 여전히 모토나리 휘하의 무장으로 취급되었다. 이는 모리 가문을 둘러싼 정세가 험난했고, 다카모토 스스로도 실권 이양을 사양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가독 상속 전후, 모토나리의 요청으로 노신 시지 히로요시가 다카모토의 교육을 담당했다.

1550년(덴분 19년), 아버지 모토나리의 주도로 전횡을 일삼던 이노우에 일당이 숙청되고, 다카모토 직속의 고부교 제도가 발족하였다. 아카가와 모토야스를 필두로 구니시 모토스케, 아와야 모토치카와 모토나리의 측근인 고다마 나리타다, 가쓰라 모토타다가 참여하였다. 다카모토도 이 조직 창설에 크게 공헌했지만, 주도권은 여전히 모토나리가 쥐고 있었다.

1551년(덴분 20년), 오우치 요시타카가 중신 스에 하루카타에게 자결당하자(다이네이지의 변), 다카모토는 스에 하루카타를 타도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모토나리는 전력 열세를 이유로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다카모토는 중신들을 움직여 모토나리의 결심을 재촉하고, 가문 내에 스에 씨의 횡포를 알렸다. 결국 모토나리도 스에 씨와의 대결을 결심하게 되었다.

1555년(고지 원년), 아버지 모토나리와 함께 스에 하루카타이쓰쿠시마 전투에서 멸망시켰다. 다카모토는 모토나리와 함께 본진을 이끌고 이쓰쿠시마로 건너갔다. 폭풍우를 두려워해 이쓰쿠시마 상륙을 반대하는 장병들을 독려하기 위해, 다카모토는 모토나리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먼저 배에 탔다고 한다.

2. 3. 슈고 취임과 의문의 죽음

고지 3년(1557년) 보초 경략을 행하여 오우치 요시나가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구 오우치 영지를 둘러싸고 분고오토모 소린이 서쪽에서, 이즈모의 아마고 하루히사가 북쪽에서 침공해 왔기 때문에, 모리 모토나리는 북쪽의 아마고 씨에, 다카모토는 서쪽의 오토모 씨에 대응하게 되었다. 모리 씨에게는 매우 위기적인 시기였지만, 다카모토는 동생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지원을 받으면서 오토모 씨를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에이로쿠 2년(1559년), 다카모토는 모토나리와 함께 오기마치 천황의 즉위료를 조정에 헌납했다.

에이로쿠 3년(1560년), 무로마치 막부의 제1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로부터 아키의 슈고로 임명되었다. 또한, 오기마치 천황의 즉위료를 헌상한 공적으로 조정으로부터 대선대부에 임명되었다.

에이로쿠 5년(1562년), 다카모토는 막부로부터 빗추, 빈고, 나가토의 슈고직에, 에이로쿠 6년(1563년)에는 스오의 슈고직에 임명되어 모리 씨는 정식으로 주고쿠 지방의 다이묘로서의 입장을 인정받게 되었다.

에이로쿠 3년(1560년)에 아마고 하루히사가 급사하여 아마고 씨의 세력이 쇠퇴하기 시작하자, 규슈 전선을 담당하고 있던 다카모토는 막부의 중재를 이용하여 오토모 소린과 화의를 맺고 아마고 토벌에 전력을 기울였다.

1563년 9월 1일, 다카모토는 와치 마사하루의 접대를 받은 직후, 아키의 사사베(佐々部)에서 급사했다. 향년 41세. 사인은 식중독 또는 독살이라고 하며, 부고를 접했을 때 부친 모토나리의 비탄은 심상치 않은 것이었다고 한다. 그 뒤, 모토나리는 와치 마사하루 등을 암살 혐의로 주살, 혹은 할복시켰다.

모리 가문의 가독은 다카모토의 적남 모리 데루모토가 이었으나, 데루모토가 어렸으므로 모토나리가 실질적인 당주로서 더욱 강하게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2. 4. 사망 관련 의혹

에이로쿠 6년(1563년) 9월 1일, 모리 다카모토는 아마고 공격에 참가하던 중, 모리 가문 휘하의 고쿠진(국인)이자 빗추의 와치 마사하루의 접대를 받은 직후, 아키의 사사베(佐々部)에서 급사했다.[1] 향년 41세였다.[1] 사인은 식중독 또는 독살이라고 전해지며,[1] 부고를 접한 아버지 모리 모토나리는 매우 비통해했다고 한다.

와치 마사하루는 모리 가문에 모반을 일으키려다 발각되어 모토나리의 명령을 받은 구마가이 노부나오와 아마노 모토마사에게 주살되었는데, 마사하루가 주살된 해가 다카모토가 사망한 해와 일치한다.

그 후, 모토나리는 다카모토의 측근이었던 아카가와 모토야스를 독살 혐의로 주살했다.[1] 그러나 아카가와 모토야스에 대해서는 무고했을 가능성이 있어 후회했다고도 전해진다.

3. 인물과 일화

모리 다카모토는 온화하고 인간미 넘치는 성격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아버지 모리 모토나리처럼 초연하지 못하고, 유능한 아버지와 동생들 때문에 고민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는 서신에서 자신을 "재능과 기량이 부족하다"고 자조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8]


  • 성격 및 평가: 다카모토는 온화하고 독실하며 효심이 깊은 인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모토나리는 그를 "우유부단하여 무장으로서의 자질이 부족하다"고 평했다.[8] 다카모토는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괴로워했고, 아버지의 위업을 실추시킬까 봐 병적으로 두려워했다.[8]
  • 형제들과의 관계: '세 자루의 화살(三本の矢)' 일화와는 달리, 다카모토는 동생들인 모토하루, 다카카게와 영지 분할, 가문 운영, 성격 차이 등으로 갈등을 겪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동생들이 자신을 따돌리는 것 같다고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8]
  • 내정 및 정치 능력: 다카모토는 내정과 재무 능력에 뛰어났으며, 그의 사후 모리 가문의 수입이 감소할 정도였다. 또한 독자적인 파벌을 조직할 정도의 정치력도 가지고 있었다.[8]
  • 군사적 능력: 부젠 마쓰야마성 전투에서 오토모 가문을 격퇴하는 등 군사적 공적도 있었지만, 스스마누마성 공략전에서는 패배하기도 했다.
  • 기타 일화:
  • 다이네이지의 변 당시 스에 다카후사와의 교전을 주장했다.
  • 정실 부인 오자키 국을 깊이 사랑하여 평생 측실을 두지 않았다.
  • 조슈번 번주 모리 시게타카는 다카모토의 가훈을 좌우명으로 삼았고, 요시다 쇼인은 다카모토를 다이라노 시게모리에 비유하며 칭송했다.

4. 평가

모리 다카모토는 교양 있고 온화한 성품으로 인장(仁將, 어진 장수)으로 명성이 높았지만, 무장으로서의 기개나 기지는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아버지 모리 모토나리는 "능(能)이나 기예(技藝)나 위로(慰め)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 오직 무략(武略), 계략(計略), 조략(調略)이 중요하오. 꾀가 많으면 이기고, 적으면 지는 것이오"라며 다카모토를 질책했다.[8]

모토나리는 다카모토를 "우유부단하고 무장으로서의 자질이 부족하다"고 평가했으며, 다카모토에게 실권 이양이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도 이러한 성격 문제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다카모토 자신도 아버지의 위업을 실추시킬까 병적으로 두려워했으며, "명장의 아래에서는 불우한 아들이 태어난다"라고 자조하기도 했다.[8]

다카모토는 내정·재무 능력은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사후 모리 가문의 수입이 2000관 (약 4000석) 정도 감소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정치 면에서도 모토나리 직속 중신들과 다카모토 직속 관료들 사이에서 의견 대립이 발생할 정도로 자신만의 파벌을 조직할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세 개의 화살 일화와는 달리, 다카모토는 동생들인 기카와 모토하루,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와 소령 분할, 가문 운영, 성격 차이 등으로 인해 사이가 좋지 않았다. 다카모토는 아버지에게 "두 동생이 저를 깔보고 따돌리는 것 같아 매우 화가 난다"는 내용의 서찰을 보내기도 했다.

다카모토는 정실 부인 오자키 국을 깊이 사랑하여 평생 측실을 두지 않았다. 다이네이지의 변으로 오우치 요시타카가 살해당하자, 스에 하루카타를 "호랑이와 이리의 마음"이라고 비난하며 스에와의 교전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보초 경략 이후에는 오우치 씨의 영광을 계승하려 했으며, 감합 무역에 사용하던 감합찰을 입수하여 대륙과의 교역을 재개하려 했다.[10]

실전 지휘관으로서 부젠 마쓰야마성 근교에서 분고 오토모 씨와의 교전에서 승리한 공적이 있다. 보초 경략 때의 스스마누마성 공략전에서는 패배했지만, 1552년에는 아키 국 사이조의 쓰치야마성을 함락시키기도 했다.

5. 가계

관계이름출생 - 사망비고
아버지모리 모토나리1497년 - 1571년
어머니묘큐1499년 - 1546년
형제이름 없는 누이? - ?
고류 부인? - 1574년시시도 다카이에의 아내
깃카와 모토하루1530년 - 1586년
고바야카와 다카카게1533년 - 1597년
이복 형제니노미야 나리토키1546년 - 1607년
모리 모토키요1551년 - 1597년
모리 모토아키1552년 - 1585년
이즈하 모토토모1555년 - 1571년
아마노 모토마사1559년 - 1609년
스에츠구 모토야스1560년 - 1601년
고바야카와 히데카네1567년 - 1601년
부인오자키노쓰보네1527년 - 1572년나이토 오키모리의 딸이자 오우치 요시타카의 양녀
자녀모리 데루모토1553년 - 1625년
모리 도쿠쓰루마루? - ?
쓰와노노쓰보네? - ?요시미 히로요리의 첫 번째 부인



본성은 오에 씨이다. 가계오에노 히로모토의 넷째 아들인 모리 스에미츠를 시조로 하는 국인 영주 모리 씨이다. 정식 성명은 '''오에 다카모토'''(大江 隆元)이다.

6. 등장 작품

참조

[1] 웹사이트 Mōri Takamoto https://kotobank.jp/[...] kotobank 2021-10-15
[2] 서적 The Samurai Sourcebook Cassell & Co.
[3] 서적 Samurai - The World of the Warrior https://books.google[...]
[4] 웹사이트 毛利隆元の墓 https://www.hiroshim[...] 広島観光協会 2021-10-15
[5] 웹사이트 Mōri Terumoto https://kotobank.jp/[...] kotobank 2021-10-15
[6] 문서 毛利家文書283号
[7] 인용 国重政恒의 著作 温故私記
[8] 뉴스 目で見る 毛利家あれこれ 〜毛利博物館収蔵資料と歴史ばなし〜 第421回 http://www.hop-web.n[...] 地域情報新聞ほっぷ 2018-11-23
[9] 간행물 コラム2 毛利隆元・内藤興盛と縹糸胸紅白威胴丸 安芸高田市
[10] 문서 吉見正頼覚書
[11] 웹사이트 毛利隆元逝去の地 安芸高田市観光協会「安芸高田市観光ナビ」 http://akitakata-kan[...]
[12] 웹사이트 大河ドラマ 毛利元就 完全版 第壱集 DVD-BOX http://www.nhk-ep.co[...] NHKエンタープライズ
[13] 웹사이트 出演作品 http://kamikawatakay[...] 上川隆也公式サイ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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