깃카와 모토하루
1. 개요
깃카와 모토하루는 센고쿠 시대의 무장으로, 모리 모토나리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쓰쿠시마 전투에서 승리하고 아마고 가문을 멸망시키는 등 모리 가문의 세력 확장에 크게 기여했다. 1557년 부친 모리 모토나리가 은거한 후, 동생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와 함께 모리 가문을 실질적으로 지탱했으며, 1582년 은거하여 1586년 5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깃카와 씨의 당주로서, 76번의 전투에서 64번의 승리를 거둔 불패의 맹장으로 평가받으며, 《깃카와 본 태평기》를 저술하는 등 지용을 겸비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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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명 | 깃카와 모토하루 (吉川元春) |
|---|---|
| 이명 | 쇼노지ro (少輔次郎) 모리 료센 (毛利両川), 또는 "모리의 두 강" |
| 출생 | 1530년 |
| 사망 | 1586년 12월 25일 (56세 또는 57세) |
| 출생지 | 히로시마현요시다, 아키국 |
| 사망지 | 아키국 |
| 묘소 | 히로시마현 야마가타군 가이오지 가이오지 터 (깃카와 모토하루관) 터 인접지 교토시 묘신지 |
| 계명 | 随浪院殿前駿州太守四品拾遺海翁正恵大居士 |
| 통칭 | 쇼노지ro (少輔次郎) |
| 가명 | 모리 모토하루 → 깃카와 모토하루 |
| 가문 | 오에씨모리씨 → 후지와라 남가구도씨깃카와씨 |
| 소속 | 모리씨 도요토미씨 |
| 아버지 | 모리 모토나리 |
|---|---|
| 어머니 | 묘큐 부인 |
| 배우자 | 정실: 신조노쓰보네 (구마가이 노부나오의 딸) |
| 자녀 | 모토나가 사나자와 모토우지 마스다 모토요시의 부인 히로이에 쇼주마루 요시미 모토요리의 부인 |
| 형제자매 | 모리 다카모토 고료노쓰보네 (시시도 다카이에의 부인) 모토하루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니노미야 나리카도 호이다 모토키요 모리 모토아키 데와 모토토모 아마노 모토마사 스에쓰구 모토야스 고바야카와 히데카네 |
| 양아버지 | 깃카와 오키쓰네 |
| 관위 | 종4위하, 지부쇼유, 스루가노카미 |
|---|
| 소속 | 깃카와씨 |
|---|---|
| 주군 | 모리 모토나리 → 다카모토 → 데루모토 |
| 복무 기간 | 불명 |
| 계급 | 다이묘 |
| 지휘 | 히노야마성 |
| 주요 전투 | 이쓰쿠시마 전투 (1555년) 도다성 공성전 (1566년) 도리사카 전투 (1568년) 다타라하마 전투 (1569년) 고즈키성 공방전 (1578년) 다카마쓰성 수공전 (1582년) 시코쿠 침공 (1585년) |
-
깃카와씨 (모토하루류) -
모리 료센
모리 료센은 모리 씨가 주고쿠 지방의 패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성립된 정치 체제로, 모리 종가를 깃카와 씨와 고바야카와 씨가 지지하는 형태로 구축되었으나, 에도 막부 시대에 역할이 축소되고 17세기 중반에 사실상 해체되었다. -
아키 모리씨 -
히로시마성
히로시마성은 1589년 축성되어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 잡았으나 원폭으로 파괴된 후 복원되었고, 현재는 평화를 기원하는 상징이자 '잉어성'이라는 별칭으로 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히로시마의 평지성이다. -
아키 모리씨 -
모리 데루모토
모리 데루모토는 모리 모토나리의 손자이자 모리 가문의 당주로, 고바야카와 타카카게와 기카와 모토하루의 지원을 받으며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휘하에서 공을 세웠으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 총대장으로서 실질적으로 참전하지 않아 영지를 잃고 조슈 번을 다스리게 된 인물이다. -
1530년 출생 -
장 보댕
장 보댕은 프랑스의 법학자, 정치철학자, 경제학자이자 저술가로서, 『국가론』에서 제시한 주권 개념으로 절대주의 이론 발전에 기여했으나, 마녀사냥에 대한 견해와 저술은 비판받으며 후대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
1530년 출생 -
에티엔 드 라 보에시
에티엔 드 라 보에시는 프랑스의 시인이자 작가, 외교관으로 미셸 드 몽테뉴와 교류했으며, 폭군의 권력 유지가 피지배자들의 자발적 복종에 기인한다는 내용을 담은 대표작 『자발적 예속론』을 통해 전제군주제와 폭정을 비판하고 시민 불복종과 비폭력 저항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무정부주의 사상에 영향을 미쳤다.
2. 생애
1530년 요시다코리야마성에서 태어나, 깃카와 오키쓰네의 양자가 되어 깃카와 씨족에 들어갔다. 1550년경 가문의 수장이 되었고, 1547년 구마가이 노부나오의 딸과 결혼했다.
모리 모토하루는 형제인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와 함께 미야지마 전투(1555년), 누노베야마 전투(1570년) 등 많은 전투에 참전했다. 1566년에는 아마고 씨족을 물리치고 이즈모 국을 자신의 영지로 삼았다. 1568년 토리사카 전투, 1569년 타타라하마 전투에도 참전했다.
오다 노부나가와의 전투에도 여러 차례 참전하여, 1578년 고즈키성 전투, 1582년 다카마쓰성 전투 등에서 활약했다. 1582년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한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 휘하에서 시코쿠 정벌 (1585)에 참전했으나, 히데요시에게 신종하는 것을 불쾌하게 여겨 은퇴했다.
1586년, 고쿠라성에서 사망했으며, 아들 깃카와 히로이에가 깃카와 씨족의 수장이 되었다.
2.1. 유년 시절
교로쿠 3년(1530년) 모리 모토나리의 차남으로 아키국 요시다코리야마성에서 태어났다.
덴분 9년(1540년) 이즈모국의 아마고 하루히사가 침공했을 때 벌어진 요시다코리야마성 전투에서 원복 전임에도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출진하여 훌륭하게 첫 출진을 치렀다.
덴분 12년(1543년) 8월 30일 형인 모리 다카모토로부터 관례를 받고 원복했으며, 동시에 이름자 "元"의 편휘를 받아 모토하루라 칭했다.
덴분 13년(1544년) 12월 20일 친자식이 없는 모토나리의 동생 기타 조카쓰와 양자 계약을 맺고 기타 조카쓰 사후에 영지를 물려받는 계약을 맺었다.
덴분 16년(1547년) 구마가이 노부나오의 딸인 신조노쓰보네와 결혼했다.
2.2. 깃카와 가문 상속
1547년 7월, 모토하루는 어머니 쪽 사촌 형인 깃카와 오키쓰네의 양자가 되었다. 이는 오키쓰네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깃카와 가신들의 권유와 더불어, 오키쓰네의 생명 보장 및 그의 아들 지호시를 모토하루의 양자로 삼는 조건으로 이루어졌다.
같은 해 윤7월 22일, 깃카와 쓰네요, 이치카와 쓰네요시, 이마다 쓰네타카는 연서의 혈판기청문을 통해 모토나리, 다카모토, 모토하루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윤7월 25일에는 모토나리, 다카모토, 모토하루가 회답의 연서 기청문을 보냈다.
1550년, 모리 모토나리는 오키쓰네를 강제로 은거시키고 모토하루에게 가문을 잇게 하여 깃카와 씨의 당주로 삼았다. 이후 모토나리는 구마가이 노부나오 등에게 명령해 오키쓰네와 지호시를 살해했는데, 이는 모토나리의 책략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모토하루는 아키 국 오아사의 오구라야마성에 들어갔으나, 히노야마성을 축성하여 거점을 옮겼다.
2.3. 오우치, 아마고 가문과의 전투
1555년 이쓰쿠시마 전투에서 깃카와 군을 이끌고 고바야카와 군과 협력하여 스에 하루카타가 이끄는 오우치 군을 격파했다. 1556년부터 이와미 국에 원정하여 아마고 하루히사와 여러 차례 싸웠으나 초기에는 패배를 경험하기도 했다. 1557년 부친 모리 모토나리가 은거하자 다카카게와 함께 '양천(両川)'으로서 모리 가문을 실질적으로 지탱했다.
1562년 흉부와 복부의 격통을 동반하는 적취(癪)라는 병(신경성 통증으로 추정)에 걸렸으나, 모리 모토나리의 적극적인 치료 노력으로 회복했다.
1565년 제2차 갓산토다성 전투에서 주력으로 참전하여 무공을 세웠고, 1566년 아마고 요시히사를 항복시켰다. 1569년부터 아마고 가문 재흥을 꾀하는 야마나카 유키모리 등의 아마고 재흥군과 싸워 누노베산 전투에서 승리했다. 같은 해, 모리 가문과 적대하는 오토모 가문의 지원을 받던 오우치 데루히로가 스오 국에 침공했으나, 모토하루는 신속하게 대응하여 데루히로를 자결로 몰아넣었다(오우치 데루히로의 난). 1571년 아마고 가쓰히사가 농성하는 스에노이시 성을 공격하여 야마나카 유키모리를 포로로 잡고 가쓰히사를 패주시켰다.
2.4. 오다 노부나가와의 전투
깃카와 모토하루는 오다 노부나가와의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다. 1578년 고즈키성 전투에서는 아마고 가쓰히사 등을 자결시키고 야마나카 유키모리를 처형하여 아마고 재흥군의 움직임을 저지했다. 1582년 다카마쓰성 전투에서도 오다 군과 맞서 싸웠다.
겐키 2년(1571년), 아버지 깃카와 모토나리가 사망하자 조카 모리 데루모토를 동생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와 함께 보좌했다. 그러나 아마고 가쓰히사 등은 오다 노부나가에게 의지하여 저항을 계속했고, 1576년 무로마치 막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모리 가문으로 망명하면서 오다 가문과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1577년부터 하시바 히데요시(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끄는 중국 원정군이 하리마국에 침공했고, 모토하루는 이를 요격했다.
이후에도 오다 군과 각지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1580년 미키 성 함락, 1581년 돗토리성에서 깃카와 쓰네이에 자결 등 모리 가문은 점차 열세에 놓였다.
1582년 빗추 다카마쓰성 전투에서 히데요시의 수공에 고전하던 중,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변으로 사망하자 히데요시는 모리 가문과 화친을 맺고 철수했다.
2.5. 사망
1582년 말, 모토나가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했다. 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기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1585년, 다카카게는 히데요시의 시코쿠 정벌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지만, 모토하루는 직접 출진하지 않았다.
1586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강력한 요청과 주변의 설득으로 규슈 평정에 참가했으나, 같은 해 11월 15일 부젠 고쿠라성에서 화농성 염증(암으로 추정)으로 사망했다. 향년 57세.
3. 인물·일화
* 모토하루라는 이름은 아키국에 토착한 모리 가문의 세력 확대를 위해 힘썼던 선조 모리 모토하루(毛利元春)에서 따온 것이다. 부친 모토나리는 모토하루의 용맹함에 대해 "나는 싸움으로는 모토하루에게 미치지 못한다", "눈은 동남쪽을 보면서, 마음은 서북쪽에 있다"라고 평가했다.
* 구마가이 노부나오(熊谷信直)의 딸을 정실로 맞이한 것은 정략결혼이자 여색을 경계하기 위함이었다고 전해지나, 부부 관계는 원만하여 깃카와 모토나가(吉川元長), 깃카와 히로이에(吉川広家), 깃카와 모토우지(毛利元氏) 등 여러 자식을 두었다. 다만, 다케다 미쓰카즈(武田光和)에게 시집간 구마가이 노부나오의 여동생은 절세 미인이었다는 기록도 있어, 실제로 추녀였는지는 불분명하다.
* 통산 전적 76전 64승 12무로 불패의 맹장이었다고 전해진다. 아마고 가문 토벌 중 《태평기》 40권을 필사하여 현존하는 《깃카와 본 태평기(吉川本太平記)》를 남기는 등 지용을 겸비한 명장으로 평가받는다.
* 제2차 갓산토다 성 전투 때, 국지전에서 아마고 가문의 무장 아키아게 히사이에(秋上久家)에게 기습을 받아 패주한 적이 있으나, 전체적인 전황에서는 모리 군이 승리했기에 패배로 치지 않는 견해도 있다.
* 어렸을 때 동생 다카카게와 눈싸움을 벌였는데, 처음에는 모토하루가 돌격하여 승리했으나, 다음에는 다카카게의 유인책에 넘어가 패배했다.
* 하시바 히데요시와 대치했을 때 배수진을 쳐 히데요시를 두렵게 했고, 히데요시의 가신 미야베 게이준(宮部継潤)은 "깃카와가 있는 한, 모리의 무운은 쇠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 병에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구로다 요시타카가 준비한 연어 요리를 거절하지 않고 먹었다가 증세가 악화되어 사망했다는 일화는 그의 굳은 의리를 보여준다.
* 히데요시의 주고쿠 전선 철수 당시 추격을 진언한 것은 모토나가와 히로이에였고, 모토하루 자신은 데루모토, 다카카게와 함께 추격에 반대했다는 설도 있다.
4. 깃카와 본 태평기
태평기는 남북조 시대의 쟁란을 그린 군기물어로, 전국 시대 무인들에게 널리 애독되었다.
아마고 가문 토벌 중, 모토하루는 《태평기》 40권을 필사했는데, 이는 현재 《깃카와 본》으로 전해지고 있다. 깃카와 본 태평기는 모토하루 자신이 필사한 것으로, 현재는 재단법인 깃카와 호코카이의 소유가 되었으며, 이와쿠니시의 깃카와 사료관이 보관하고 있다. 태평기 본문은 가타카나 표기가 섞여 있으며, 오래된 형식을 잘 전하고 있다.
간행 후 기록의 주필에 따르면, 깃카와 모토하루가 제1권을 1563년 12월에 붓을 들었고, 그 후 각 권의 필사를 진행하여, 1565년 7월에 제39권의 필사를 완성했다고 한다. 별도로 자필의 태평기 목록 1권도 있다.
태평기에는 다소 다른 판본이 존재하고, 그중 가장 원작에 가깝다고 인정된 것은 간다 태평기였으나, 간다본에는 14권의 빠진 부분이 있었다. 깃카와 본은 간다본에 가까운 내용을 가지고 있으며, 게다가 거의 전권을 완비하고 있기 때문에, 고전문학 연구상 매우 귀중한 자료로 여겨진다. 1959년 12월 18일, 국가의 중요문화재 (서적)로 지정되었다.
5. 거관 유적 조사
깃카와 모토하루 관 터는 히노야마성 서남쪽 기슭, 시지로하라 강의 하안 단구 위 완만한 경사면에 자리 잡고 있다. 강은 해자 역할을 했으며, 서쪽 산에는 카이오지 터가 있다.
지금까지 돌담, 토루, 흙기둥 건물을 중심으로 하는 저택과 정원이 확인되었다. 저택에서는 건물 외에 화장실 유구 2기가 발견되었다. 또한, 큰 도랑에서는 금은고와 "파리를 쫓기 위해 이것을 만들었다"라고 쓰인 나무 팻말이 나왔다. 유구 밖에서는 "코호리사타우"라고 쓰인 빙설탕 용기로 추정되는 둥근 나무 뚜껑, "카카이 사마에(어머니께)"라고 쓰여 모토하루의 아내에게 보내진 것으로 보이는 나무 짐표 등이 출토되었다.
1986년 8월 28일, 오구라 산성, 스루가마루 성, 히노야마성과 함께 깃카와 씨 거관 터가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저택과 정원은 일부 복원되었다.
6. 가계
* 아버지: 모리 모토나리
* 어머니: 묘큐 (깃카와 구니쓰네의 딸)
* 양아버지: 깃카와 오키쓰네
* 정실: 신조노 쓰보네 (구마가이 노부나오의 딸)
* 자녀:
깃카와 모토나가
시게자와 모토우지 (니호 다카아리의 데릴사위)
깃카와 히로이에
깃카와 쇼주마루
마스다 모토요시의 정실 (법호: 하나야 소에이)
요시미 모토요리의 정실 (법호: 세쓰간 슈바)
7. 관련 작품
; 소설
* 하마노 타쿠야, 《기타카와 모토하루 모리를 지탱한 용장》 (PHP 문고, 1997년)
* 난조 노리오, 《관백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은 남자 - 깃카와 지부쇼유 모토하루》 (분슌 문고・『오노레 지쿠젠, 와레 야부레타리』수록, 2002년)
; 텔레비전 드라마
* 태합기 (1965년, NHK 대하드라마, 배우: 니혼야나기 히로시)
* 모리 모토나리 (1997년, NHK 대하드라마, 배우: 마츠시게 유타카)
* 군사 칸베에 (2014년, NHK 대하드라마, 배우: 요시미 카즈토요)
; 예능
* 난조 춤 - 깃카와 모토하루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지는 야마구치현・히로시마현에 남아있는 전통 민속 무용
7.1. 소설
* 아와야 하루츠나
* 이가타 하루노리
* 이가타 하루리
* 이시 하루나리
* 이치카와 하루토시
* 이노우에 하루타다
* 이노우에 하루카
* 이마다 하루베
* 이마다 하루카
* 우츠노미야 하루요리
* 카가와 하루츠구
* 카츠라 하루후사
* 카츠라 하루타다
* 키카와 하루타카
* 쿠바 하루요시
* 코사카 하루노부
* 코다마 하루타네
* 사카이 하루토모
* 니노미야 하루즈미
* 니노미야 하루지
* 미야쇼 하루마
* 모리와키 하루치카
* 모리와키 하루타다
* 야마가타 하루지
* 유하라 하루츠나
* 요코미치 하루시게
7.2. 텔레비전 드라마
* 태합기 (1965년, NHK 대하드라마, 배우: 니혼야나기 히로시)
* 모리 모토나리 (1997년, NHK 대하드라마, 배우: 마츠시게 유타카)
* 군사 칸베에 (2014년, NHK 대하드라마, 배우: 요시미 카즈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