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네이지의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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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이네이지의 변은 1551년, 센고쿠 시대 다이묘 오우치 요시타카가 가신 스에 다카후사의 반란으로 자결한 사건이다. 아마고 씨와의 전투 패배 이후 요시타카가 정무를 소홀히 하고 문치파를 중용한 것에 무공파가 반발하여 일어났다. 요시타카는 야마구치 천도 계획을 추진했으나 군사 조직의 반대에 직면했다. 스에 다카후사는 반란을 일으켜 요시타카를 공격했고, 요시타카는 다이네이지에서 자결했다. 이 사건으로 오우치 가문은 쇠퇴하고 모리 씨가 세력을 확장했으며, 일본 전역에 정치적, 경제적 혼란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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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네이지의 변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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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개요 | |
사건명 | 다이네이지 사건 |
주요 관련 시기 | 센고쿠 시대 |
발생일 | 1551년 9월 28일 ~ 30일 |
위치 | 나가토국(현재의 야마구치현) 다이네이지 |
결과 | 스에 가문의 승리; 오우치 요시타카 자결 |
교전 세력 | |
교전 1 | 오우치 가문 (스에 다카후사 지휘하) |
교전 2 | 오우치 요시타카의 측근 |
지휘관 및 지도자 | |
오우치 가문 | 스에 다카후사 스기 시게노리 나이토 오키모리 |
오우치 요시타카 측 | 오우치 요시타카 사가라 다케토 |
전력 | |
오우치 가문 | 5,000명 |
오우치 요시타카 측 | 원래 3,000명이었으나, 이반과 탈주로 인해 최종적으로 20명만 남음 |
관련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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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덴분(天文) 10년(1541년), 오우치 씨의 산하에 있던 모리 씨를 공격한 아마고 씨는 요시다코리야마 성 전투에서 패배했다. 이를 계기로 스오 국의 센고쿠 다이묘인 오우치 요시타카는 오우치 가신단 내에서도 무공파인 스에 다카후사 등의 주도하에 1542년(덴분 11년) 대군을 이끌고 아마고 씨의 본국인 이즈모 국으로 원정을 갔지만, 갓산토다 성에 농성하여 철저히 항전하는 아마고 하루히사를 공격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제1차 갓산토다 성 전투) 결국 1543년(덴분 12년) 2월, 오우치 군은 총퇴각하였고, 대장인 요시타카는 스오로 패주했으며, 조카이자 양자인 오우치 하루모치는 패주 도중 이부야 항구에서 레이제이 다카토요가 보낸 작은 배를 타고 본선으로 옮겨 타려던 순간, 작은 배가 뒤집혀 익사하는 등 오우치 측은 참담한 결과를 맞이했다.
이후 세력 회복을 꾀하며 활발하게 움직이는 아마고 씨에 맞서 아키 국, 이와미 국, 빈고 국 등에서는 오우치 측의 여러 장수들과 모리 모토나리 등이 대항하여 출진하는 등 혼란스러운 상황이 벌어졌다. (후노 붕괴, 칸나베 전투 등) 한편 오우치 요시타카는 이즈모 원정을 주도한 스에 다카후사 등 무공파를 국정의 중추에서 멀리하고, 사가라 다케토 등의 문치파 측근들을 중용하여 정무에서 멀어지고 학예・다도 등에 몰두하며 구게와 같은 생활을 보내 국내 정치를 돌보지 않게 되었다. 또한 고액의 지출을 충당하기 위해 연공을 증액하여 토호나 영지 백성들도 증세에 고통스러워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우치 가문의 주도권을 놓고 무공파인 스에 다카후사, 나이토 오키모리와 문치파인 사가라 다케토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2. 1. 오우치 가문의 번영과 쇠퇴
덴분(天文) 10년(1541년), 오우치 씨의 산하에 있던 모리 씨를 공격한 아마고 씨는 요시다코리야마 성 전투에서 패배했다. 이를 계기로 스오 국의 센고쿠 다이묘인 오우치 요시타카는 오우치 가신단 내에서도 무공파인 스에 다카후사 등의 주도하에 1542년(덴분 11년) 대군을 이끌고 아마고 씨의 본국인 이즈모 국으로 원정을 갔지만, 갓산토다 성에 농성하여 철저히 항전하는 아마고 하루히사를 공격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제1차 갓산토다 성 전투) 결국 1543년(덴분 12년) 2월, 오우치 군은 총퇴각하였고, 대장인 요시타카는 스오로 패주했으며, 조카이자 양자인 오우치 하루모치는 패주 도중 이부야 항구에서 레이제이 다카토요가 보낸 작은 배를 타고 본선으로 옮겨 타려던 순간, 작은 배가 뒤집혀 익사하는 등 오우치 측은 참담한 결과를 맞이했다.[1]이로 인해 세력 회복을 꾀하며 활발하게 움직이는 아마고 씨에 맞서 아키 국, 이와미 국, 빈고 국 등에서는 오우치 측의 여러 장수들과 모리 모토나리 등이 대항하여 출진하는 등 혼란스러운 상황이 벌어졌다. (후노 붕괴, 칸나베 전투 등)
과거에는 요시타카가 이즈모 원정을 주도한 스에 다카후사 등 무공파를 국정에서 멀리하고, 사가라 타케토 등 문치파 측근을 중용하여 정무에서 멀어져 학예, 다도 등에 몰두하며 구게와 같은 생활을 해 국내 정치를 돌보지 않았고, 막대한 지출을 충당하기 위해 세금을 늘려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했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최근 연구에서는 이러한 통설이 부정되고 있다. 요시타카는 제1차 갓산토다 성 전투 이후에도, 이듬해인 1543년(덴분 12년)에는 처남 오토모 요시아키의 차남 시오토마루(후의 오우치 요시나가)를 양자로 삼아 오토모 씨와의 관계를 개선했고, 이와미 국에서는 오가사와라 나가오를 종속시켰으며, 빈고 국에서는 칸나베 전투와 후노 붕괴에서 승리하여 오우치 씨의 최대 판도를 구축했다. 또한, 사가라 타케토는 오우치 마사히로 시대부터 오우치 씨를 섬겼으며, 패전과 그로 인한 실의로 인해 타케토를 중용한 것이 아니다.[2] "공경과 같은 생활을 했다"는 평가도, 요시타카의 증조부인 오우치 노리히로와 조부 오우치 마사히로의 위계가 추증 종3위, 부친 오우치 요시오키의 위계가 종3위, 요시타카 자신은 최종적으로 종2위에 서임된 것처럼, 무로마치 시대에서 무사의 신분으로 4대째 3위 이상의 위계에 서임된 오우치 씨는 "공경 흉내"가 아니라 "공경 그 자체"였기 때문에, 전혀 이상한 행동이 아니라 오히려 당연한 행위였다.[2] 요시타카의 재정에 대해서도, 6개국의 수호였던 것에 더해, 이와미 은광이나 견명선의 독점 등, 오우치 씨는 자금원을 다수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민을 무시하고 헌금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3]
이와 같이 기존에 알려진 통설은 부정되고 있으며, 그 대신 다이네이지의 변 발생 원인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제기되고 있다.
2. 2. 오우치 가신단의 갈등: 무공파 vs. 문치파
덴분 10년(1541년), 오우치 요시타카는 가신단 중 무공파인 스에 다카후사 등의 주도로 아마고 씨의 본거지 이즈모국으로 원정을 떠났으나 갓산도다 성에서 농성하며 철저항전하는 아마고 하루히사에게 대패하였다.(제1차 갓산토다성 전투) 이 패배로 오우치 요시타카는 혐전(厭戰) 기운이 강해졌고, 사가라 다케토 등의 문치파 측근들을 중용하였다.[20] 요시타카는 학예와 다도에 몰두하며 구게와 같은 생활을 하였고, 국내 정치에는 소홀해졌다.이러한 상황에서 오우치 가문의 주도권을 놓고 무공파인 스에 다카후사, 나이토 오키모리와 문치파인 사가라 다케토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특히 다케토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에 대한 불만이 커져, 1545년(덴분 14년) 5월에는 다케토가 삭발하고 요시타카 곁을 떠나는 상황까지 발생했다.[20] 이는 다카후사 등의 반격을 받은 문치파의 실각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1548년(덴분 17년) 요시타카의 요청으로 다케토는 다시 오우치 가문에 출사하였다. 이 무렵 부젠국 슈고다이인 스기 시게노리가 다카후사의 불온한 움직임을 요시타카에게 진언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549년(덴분 18년)에는 모리 모토나리가 아들들을 데리고 야마구치를 방문하여 요시타카를 알현했는데, 이는 오우치 가와 모리 가의 동맹을 강화하기 위한 요시타카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일설에는 모리 가문과 가까워지기 위해 다카후사가 모토나리를 초대한 것이라고도 하며, 다카후사의 아들 스에 나가후사를 통해 밀서를 주고받았다고도 한다. 이 기간 동안 다카후사는 깃카와 모토하루와 의형제를 맺기도 했다.
1550년(덴분 19년)에 이르러 다케토와 다카후사의 대립은 극에 달했고, 다케토 암살 모의까지 이루어졌으나 다케토가 사전에 요시타카에게 밀고하여 위기를 모면하였다. 그러나 다카후사가 모반을 일으켰다는 소문이 돌았고, 요시타카의 측근 레이제이 다카토요가 요시타카에게 다카후사 주살을 진언할 정도였다. 다케토는 자신의 딸을 다카후사의 아들 나가후사에게 시집보내 화해를 시도했지만, 다카후사가 가문의 격이 다르다는 이유로 거절하여 융화는 결렬되었다.
1550년 8월 24일, 다카후사는 모리 모토나리와 다카모토 부자, 그리고 의형제 깃카와 모토하루에게 밀서를 보내 "스기, 나이토와 상담하여 요시타카를 당주에서 폐하고 요시타카에게 그 뒤를 잇게 하고자 한다"며 협력을 구했다. 이는 다카후사가 오우치 가문에 대한 '모반' 의사를 보인 최초의 사료로 평가된다.[20]
같은 해 9월 15일, 니카베 신사와 이마하치만 궁에서 열린 예제에 요시타카는 갑자기 결석하고 우다 다카쓰구를 대행하게 하였다. 이는 "다카후사가 요시타카와 다케토를 유폐할 것이다"라는 소문으로 요시타카 측이 경계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20] 다음 날인 16일, 요시타카는 다카후사를 불러 힐문하였고, 다카후사는 사실무근이라고 부인하였다.[4] 한편, 같은 날 다케토는 다시 오우치 가문을 떠나 이와미국의 요시미 마사요리에게 도망쳤다.[4]
11월 하순부터 다카후사는 병을 이유로 자신의 거성인 와카야마 성(슈난시)에 들어갔으며,[4] 이듬해 2월에 열리는 수이월회(修二月会)의 대두(大頭) 역도 다하지 않았다. 이때 오우치 요시타카도 다카후사 등의 모반을 두려워하여 몸소 갑주를 입고 자신의 저택에서 농성하였고, 다카후사에게 힐문하는 사자를 보내는 등 요시타카와 다카후사 사이도 최악의 사태를 맞이하고 있었다.
1551년(덴분 20년) 1월, 오우치 가문을 떠나 있던 사가라 다케토가 지쿠젠국 슈고다이 스기 오키카즈에 의해 신병이 확보되었다. 다케토는 요시타카에게 책임을 추궁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사가라 다케토 신장(相良武任申状)을 써서 변명했는데, 여기서 다케토는 "스에 다카후사에게 모반 혐의가 있다고 주장한 것은 (원래부터 다카후사와 사이가 나빴던) 스기 시게노리다. 그러나 그 주진(注進)이 받아 들여지지 않자 시게노리는 (다카후사의 노여움을 사지 않으려는 보신주의로) 참소를 나(다케토)에게 돌림으로써 다카후사와 가까워지고 대립하고 있었을 다카후사에게로 돌아선 것이다. 둘 다 나이토 오키모리와 함께 무언가 획책하였다"라는 뜬금없는 참소를 했다.
4월, 요시타카는 다케토를 스오로 데려와 출사하게 하였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다카후사 등은 5월, 오토모 요시시게의 이복 동생 오토모 하루히데(요시타카의 조카)를 오우치 가의 새로운 당주로 옹립할 뜻에 협력해 주기를 요구하는 밀사를 오토모 씨에게 보냈다.
2. 3. 오우치 요시타카와 고나라 천황의 야마구치 천도 계획 (논란)
오우치 요시타카는 고나라 천황과 교토에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제국 조정이 재정적으로 감당할 수 없었던 많은 제례를 후원했다.[1] 1551년 3월 27일, 궁지에 몰린 천황은 오우치 요시타카를 야마시로의 임시 지사로 임명하여, 제국의 수도 교토가 위치한 이곳에서, 무장 미요시 나가요시의 만행에 대항하기 위해 오우치를 활용하려 했다.[2] 야마시로의 임시 지사이자, 더 나아가 조정의 보호자였던 요시타카는 천황과 조정을 야마구치로 이전하는 과감한 계획을 시작했다. 전 섭정(간파쿠) 니조 타다후사와 은퇴한 대신(사다이진) 산조 킨요리(다케다 신겐의 장인)를 포함한 고위 관료들과 제례 수행자들이 야마구치로 이동했다.[3] 1551년 8월 말까지, 천황 자신과 궁녀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조정이 야마구치에 있었다.[4]오우치 가문의 군사 조직은 야마구치에 제국 조정을 정착시키려는 요시타카의 계획에 반대했다. 이러한 조치는 조정 대신들에게 특권을 부여하고 오우치 가문 내에서 군대의 지위를 약화시킬 것이었다.[5] 게다가 그 계획은 지나치게 비쌌다.[6]
3. 경과
1545년(덴분 14년) 5월, 오우치 가문 내부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문치파였던 사가라 다케토는 삭발하고 히고국으로 낙향했다.[20] 이는 무단파인 스에 다카후사 등의 반격으로 문치파가 실각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1548년 오우치 요시타카의 요청으로 다케토는 다시 오우치 가문에 출사했다. 이 무렵, 스기 시게노리가 다카후사의 불온한 움직임을 요시타카에게 알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549년 2월부터 5월까지, 오우치 가문과 모리 가문의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모토나리가 아들들을 데리고 야마구치를 방문하여 요시타카를 알현했다. 이 과정에서 다카후사는 모리 모토나리와 깃카와 모토하루와 의형제를 맺는 등 모리 가문과의 관계를 강화했다.
1550년에 이르러 다케토와 다카후사의 대립은 극에 달했고, 다케토 암살 모의까지 이루어졌으나 다케토가 요시타카에게 밀고하여 위기를 모면했다. 그러나 다카후사가 모반을 일으켰다는 소문이 돌았고, 요시타카의 측근 레이제이 다카토요는 다카후사 주살을 건의하기도 했다. 다케토는 자신의 딸을 다카후사의 아들 나가후사에게 시집보내 화친을 시도했지만, 다카후사가 가문의 격이 다르다는 이유로 거절하여 무산되었다.
1550년 8월 24일, 다카후사는 모리 모토나리와 깃카와 모토하루에게 밀서를 보내 요시타카를 폐하고 요시타카를 옹립하려는 계획에 협력을 요청했다. 이는 다카후사가 오우치 가문에 대한 모반 의사를 밝힌 최초의 사료로 평가된다. 또한, 아마노 다카쓰나 등 다른 고쿠진(국인)들에게도 협력의 대가로 영지를 약속했다.
9월 15일, 나카베 신사와 이마 하치만구에서 열린 예제에 요시타카는 갑자기 불참하고 미기타 다카쓰구를 대행하게 했다. 이는 다카후사가 요시타카와 다케토를 유폐할 것이라는 소문 때문에 요시타카 측이 경계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다음 날인 16일, 요시타카는 다카후사를 불러 힐문했고, 다카후사는 사실무근이라고 부인했다. 같은 날, 사가라 다케토는 다시 오우치 가문을 떠나 이와미국의 요시미 마사요리에게로 도망쳤다.[20]
11월 하순부터 다카후사는 병을 핑계로 자신의 거성인 와카야마 성(슈난시)에 틀어박혔으며, 이듬해 2월에 열리는 수이월회(修二月会)의 대두(大頭) 역도 맡지 않았다. 이때 오우치 요시타카도 다카후사 등의 모반을 두려워하여 갑옷을 입고 자신의 저택에서 농성했고, 다카후사에게 힐문하는 사자를 보내는 등 요시타카와 다카후사의 관계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했다.
1551년 1월, 오우치 가문을 떠났던 사가라 다케토가 지쿠젠국 슈고다이 스기 오키카즈에게 붙잡혔다. 다케토는 요시타카에게 책임을 추궁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변명하는 문서를 썼는데, 여기서 다케토는 스에 다카후사에게 모반 혐의가 있다고 주장한 것은 스기 시게노리이며, 시게노리가 참소를 자신에게 돌려 다카후사와 가까워지려 했다고 주장했다.
4월, 요시타카는 다케토를 스오로 불러들여 출사하게 했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다카후사 등은 5월, 오토모 요시시게의 이복동생 오토모 하루히데(요시타카의 조카)를 오우치 가의 새로운 당주로 옹립할 계획에 협력해 줄 것을 오토모 가문에 요청했다. 기타큐슈에서 오우치 가문의 이권을 할양하는 조건으로 하루히데는 옹립을 승낙했고, 요시시게도 이를 허락했다.
3. 1. 스에 다카후사의 봉기 (1551년 8월)
1551년 8월 10일, 사가라 다케토는 스에 다카후사를 두려워하여 오우치 가문에서 세 번째로 도망쳐 지쿠젠으로 달아났다.[20]8월 20일, 다카후사는 오키모리 등과 함께 군사를 일으켰다. 다카후사의 군은 먼저 이쓰쿠시마의 신령(神領)과 사쿠라오 성(桜尾城)을 접수하고, 이에 호응하여 출진한 모리 군도 사도긴잔 성(佐東銀山城)이나 인근 지역(히로시마 시 아사미나미구)을 점령하여 산요도 요충지를 제압하였다.
8월 28일, 와카야마 성을 출발한 다카후사의 군은 다카후사가 거느리는 본대가 도쿠지(徳地) 어귀까지, 다카후사의 가신 에라 후사히데(江良房栄) ・ 미야가와 후사나가(宮川房長)가 거느린 별동대가 호후 어귀부터 야마구치에 쳐들어갔다.[20] 같은 날 정오 무렵 야마구치에 들어간 스기 ・ 나이토의 군세도 호응하여 다카후사의 군 진영에 합류했다.[20] 다카후사의 군은 5천에서 1만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에 반해 오우치 요시타카의 대응은 놀라울 정도로 느렸다. 8월 23일에는 다카후사의 군이 야마구치를 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분고의 오토모 씨에게서 온 사자들을 맞아 술자리를 이어나갔고, 다카후사 출진 하루 전날인 8월 27일에는 노 공연을 하였다. 레이제이 다카토요는 스기 시게노리 저택을 공격하자고 제안하였으나, 요시타카는 "스기와 나이토가 적이 될 리 없다"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다카후사의 침공 소식을 들은 요시타카는 그제서야 오우치 씨의 저택인 지쿠야마 관(築山館)을 나와 방어에 유리한 산기슭의 호센지(法泉寺)로 물러났다. 호센지 본당에 본진을 치고 산악의 간노도(観音堂) ・ 구몬지 산(求聞寺山) 등을 다카토요가 굳게 지키게 하였다.[20] 하지만 함께 도망친 구게나 근습들을 제외하면 요시타카를 따르는 중신은 다카토요 정도였고 병력도 2, 3천 명밖에 모이지 않았다. 제대로 저항도 해보지 못하고 텅 빈 오우치 저택이나 주변 근신들의 저택은 불길에 휩싸였고 보물들도 약탈당하였다. 전임 간파쿠(関白) 니조 다다후사(二条尹房)는 오키모리에게 사자를 보내 "요시타카는 은거하고 (그 아들인) 요시타카를 당주로 삼으라"고 화친을 제안했으나, 거부당하였다.[20]
3. 2. 오우치 요시타카의 최후
1551년 9월 28일, 스에 하루카타(陶晴賢)를 중심으로 한 반란군이 야마구치로 진군했다.[1][4] 오우치 요시타카는 스에, 스기, 나이토 가문이 자신에게 충성할 것이라 믿었기에 제대로 된 방어를 하지 못하고 도시에서 도망쳐야 했다. 반란군은 야마구치에 불을 질렀다.[4]요시타카와 그의 측근들은 야마구치현 우베시의 호센지(法泉寺)에서 최대 2,000명의 병력을 모아 저항하려 했으나, 병사들이 도주하거나 적에게 투항하면서 실패했다. 다음 날, 5,000명의 반군이 호센지를 포위했다. 전 섭정 니조 다다후사(二条尹房)가 요시타카의 은퇴를 조건으로 협상을 시도했지만, 반란군은 이를 거부했다.[4]
요시타카 일행은 나가토 국 북쪽 해안으로 가서 배를 타고 이와미 국으로 도망치려 했으나, 악천후로 인해 실패하고 나가토의 다이네이지(大寧寺)로 피신했다.[5] 이 무렵 요시타카에게 남은 사람은 20명뿐이었다. 결국 요시타카는 1551년 9월 30일,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음을 깨닫고 자신의 죽음의 시를 짓고 ''세푸쿠''(자결)했다.[4] 그의 아들들과 수행원들, 궁정 신하들도 자결하거나 반군에게 죽임을 당했다.[6]
요시타카는 가문 내부와 백성들의 동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중앙 지향적인 자세를 고집하며 국정을 소홀히 하고 세금을 늘린 것이 비극으로 이어졌다고 평가받는다.[7]
3. 3. 다이네이지의 변 이후
사가라 다케토와 그를 숨기고 있던 스에 오키카즈 등 요시타카 파는 다카후사가 지쿠젠으로 보낸 노가미 후사타다(野上房忠)의 군세에 의해 하나오 성에서 공격받아 살해되었다. 다케토의 목은 야마구치에서 효수되었다.[24]1551년 9월 4일, 모리 모토나리는 히가시사이조(東西条)의 오우치 영지에 병사를 보내 요시타카 파인 히라가 다카야스가 농성하고 있던 가시라자키 성을 공격했다. 다카야스는 가시라자키 성에서 도망쳐 쓰치 산성의 간다 노부자네(菅田宣眞)에게로 들어갔다. 모토나리는 깃카와, 고바야카와, 시시도 등과 함께 군세 4천으로 쓰치 산성을 공격하여 11일에 항복시켰다.[24]
10월에는 스에 씨와 인척 관계에 있던 이와미 나나오 성의 성주 마스다 후지카네가 요시타카 측인 요시미 마사요리를 공격했다.[24] 그러나 요시미 씨의 지성(支城)인 노토로 산성에 대한 공격은 요시미 가의 가신 시모세 요리사다의 방어전으로 실패하였다. 또한 사가라 다케토의 아들인 도라오(虎王)를 잡아 죽였다.[24]
1552년 1월, 다카후사는 스기 시게노리를 나가토 마구라(万倉, 우베시)의 조코지(長興寺)에서 자결하게 했다.[20] 이는 시게노리가 요시타카에게 다카후사를 참소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같은 해 3월, 오토모 하루히데를 야마구치로 맞이하였다. 새로운 오우치 가 당주로써 가독을 이은 하루히데는 오우치 요시나가로 이름을 고쳤고, 다카후사 자신도 새로운 주군 하루히데(요시나가)에 대한 충성을 증명하는 뜻에서 스에 하루카타로 이름을 고쳤다. 이로써 하루카타는 요시나가를 꼭두각시 당주로 하여 오우치 가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4. 결과 및 영향
다이네이지의 변 이후, 여러 세력 판도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오우치 가문과 스에 가문 (스오 국, 나가토 국)
- 요시타카를 부정하고 군사력 강화를 추진한 요시나가와 하루카타의 새 정권은 지방 영주와 다이묘들에게 더 많은 부역을 요구하여 반발을 샀다. 영토 통치에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 봉기 당시 협력 관계였던 스기 시게노리가 하루카타와 다시 대립하여 살해당하는 등, 정권 내부도 불안정했다.
- 1554년 이후, 요시미 마사요리와 모리 모토나리 등 여러 세력이 오우치 가문(요시나가-하루카타 연합)에서 이탈했다. 요시나가는 가신들을 통솔할 힘이 없었다.
- 1555년 이쓰쿠시마 전투에서 하루카타가 모리 모토나리에게 패배하여 자결하면서 오우치 가문은 급격히 쇠퇴했다.
- 오우치 가신단 내부의 대립이 표면화되었고, 모리 가문의 야마구치 침공을 받은 요시나가는 1557년에 자결했다(보초 경략). 결국 오우치 가문은 요시타카 사후 6년도 되지 않아 멸망했다.
모리 가문과 아마고 가문 (아키 국, 이즈모 국, 빈고 국 등)
- 다카후사의 모반에 동조한 모토나리는 사토 군 등을 영지로 얻었고, 히라가 씨와 아소누마 씨가 모리 가문의 휘하에 들어가면서 아키 국 대부분을 세력권으로 확보했다.[1]
- 오우치 가문과 격렬하게 대립하던 아마고 하루히사는 1552년 4월 2일에 이즈모, 오키, 호키, 이난바, 미마사카, 비젠, 빈추, 빈고 8개 국의 슈고로 임명되었다.
- 아마고 가문은 다이네이지의 변을 틈타 빈고 국으로 출진했다. 모토나리가 이끄는 아키 국인 연합군이 이에 대항하여, 1552년 7월부터 이듬해 10월까지 이어진 공방전 끝에 아마고 군을 격퇴했다.
- 이로 인해 빈고 국의 야마우치 씨, 미야 씨, 와치 씨, 미요시 씨 등이 모토나리에게 복속했다. 게이비 지역의 유력 국인들을 거느리게 된 모리 가문은 오우치, 스에 가문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으로 성장했다.
요시미 가문 (이와미 국)
- 스에 가문과 요시미 가문은 오랫동안 적대 관계였다. 특히 요시타카와 깊은 관계였던 요시미 마사요리는 모반을 일으킨 스에 하루카타와 더욱 대립했다.[8]
- 1554년, 마사요리는 하루카타에 맞서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고 거병했다(산본마쓰 성 전투). 이는 모리 가문이 오우치 가문에서 독립하는 보게이 분기의 계기가 되었다.
무라카미 수군 (세토 내해)
- 하루카타는 세토 내해의 교통 요충지인 이쓰쿠시마의 권익에 주목하여, 다이네이지의 변 직후 이쓰쿠시마에서 통행료 징수를 시작했다.
- 요시타카 시대에는 무라카미 수군이 통행료 징수를 허가받았기 때문에, 무라카미 다케요시 등이 이에 반발했다. 이는 이후 이쓰쿠시마 전투에서 무라카미 수군이 모리 가문 편에 서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시부카와 가문 (규슈 단다이)
- 시부카와 씨는 무로마치 시대부터 대대로 규슈 단다이를 세습했지만, 실제로는 외교 및 국방 문제로 하카타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려던 무로마치 막부, 오우치 가문, 오토모 가문 사이의 정치적 균형 속에서 존속했다.
- 묘오의 정변부터 에이쇼의 착란에 이르는 무로마치 막부 분열기에 시부카와 가문도 분열하여, 오우치 가문과 오토모 가문이 각각 단다이를 옹립하는 상황이었다.
- 덴분 연간에는 오우치 요시타카가 옹립한 시부카와 요시모토가 규슈 단다이 지위에 있었고, 오토모 요시아키는 이를 부정했다.
- 니카이 붕괴의 변으로 요시아키가 암살되고, 다이네이지의 변으로 요시타카가 사망하면서 오우치 가문과 오토모 가문 사이에 화해와 동맹이 성립되었다. 이로 인해 시부카와 가문의 규슈 단다이는 더 이상 필요 없어졌다.
- 1554년, 오토모 요시시게가 히젠 슈고에 임명되었고[9], 이듬해에는 오우치 요시나가의 명을 받은 고나카 다카카네가 단다이 영지였던 지쿠젠 국 사와라 군 메노하마를 접수했다.[10]
- 1559년, 오토모 요시시게가 규슈 단다이에 임명됨과 동시에, 오우치 요시나가의 멸망으로 공석이 된 오우치 가문의 가독 계승을 명받았다.[11] 이로써 규슈 단다이로서의 시부카와 가문은 사라졌다(서류상으로는 오기 번 가신으로 존속).[12]
조정
- 헤이안 시대 후기부터 오즈키 씨가 세습해 온 좌대사 필두(대부사, 관무)는 태정관의 실무를 담당하는 중요한 직책이었다.[13]
- 헤이안 시대 말기에 오즈키 가문 적류는 오미야 가와 미부 가로 분열되어 관무 지위를 두고 다투었으나, 다이네이지의 변으로 오미야(오즈키) 이야기가 사망하고 그 아들도 상속을 진행하지 않으면서 미부 가문이 오미야 가문을 계승하게 되었다.[14] 이로써 300년에 걸친 분열이 종결되었다.
그 외 (국내외)
- 명나라는 요시나가를 찬탈자로 간주하여 일명 무역 재개를 허용하지 않았고, 감합 무역은 완전히 종결되었다. 이후 중일 간의 교역은 상인이나 다이묘에 의한 사적 무역, 밀무역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5. 다이네이지의 변 관련 인물
1545년 5월, 사가라 다케토는 오우치 요시타카와의 관계가 악화되자 삭발하고 오우치 가문을 떠나 히고(肥後)로 낙향했다.[20] 1548년, 요시타카의 요청으로 다시 오우치가에 출사했다. 1549년 2월부터 5월까지, 모리 모토나리가 자식들을 데리고 야마구치(山口)를 방문하여 요시타카를 알현했는데, 이는 스에 다카후사(陶隆房)가 모리 가문과 가까워지기 위해 주선한 일이었다. 다카후사는 모리 가의 가신인 깃카와 모토하루와 의형제를 맺기도 했다.
1550년에 이르러 다카후사와 다케토 사이의 대립은 극에 달했고, 다케토 암살 모의까지 이루어졌다. 다케토는 요시타카에게 밀고하여 위기를 모면했으나, 다카후사의 모반 소문이 돌았고, 요시타카의 측근 레이제이 다카토요(冷泉隆豊)는 다카후사 모살을 진언했다. 다케토는 자신의 딸을 다카후사의 아들 나가후사(長房)에게 시집보내려 했으나, 다카후사가 가문의 격이 다르다며 거절하여 관계 개선에 실패했다.
8월 24일, 다카후사는 모리 모토나리 ・ 다카모토(隆元) 부자와 의형제 깃카와 모토하루에게 밀지를 보내, 요시타카를 폐하고 요시타카(義尊)를 옹립하는 계획에 협력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는 다카후사가 오우치 가문에 대한 '모반' 의사를 보인 최초의 사료로 평가된다.[20] 다카후사의 의향은 아마노 다카쓰나 등 다른 아키(安芸)의 고쿠진(国人)들에게도 전해져 협력의 대가로 영지를 약속받았다.
9월 16일, 사가라 다케토는 오우치 가문을 떠나 이와미(石見)의 요시미 마사요리(吉見正頼)에게로 도망쳤다.[20]
11월 하순, 다카후사가 병을 핑계로 거성(居城)에 틀어박히자,[20] 요시타카는 갑주를 입고 저택에서 농성하며 다카후사를 힐문하는 등 양측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1551년 1월, 오우치 가를 떠났던 사가라 다케토가 지쿠젠(筑前) 슈고다이 스기 오키카즈(杉興運)에게 붙잡혔다. 다케토는 변명하는 문서를 썼지만, 요시타카는 4월에 다케토를 스오(周防)로 데려와 출사시켰다.
결국 다카후사 등은 오토모 요시시게(大友義鎮)의 이복동생 오토모 하루히데(大友晴英, 요시타카의 조카)를 오우치 가의 새 당주로 옹립하려 했고, 오토모 가문은 이를 승낙했다.
8월 10일, 사가라 다케토는 다카후사를 두려워하여 오우치 가에서 세 번째로 빠져나와 지쿠젠으로 달아났다.
8월 20일, 다카후사는 오키모리 등과 함께 군사를 일으켰다. 다카후사의 군은 먼저 이쓰쿠시마의 신령(神領)과 사쿠라오 성(桜尾城)을 접수하고, 이에 호응하여 출진한 모리 군도 사도긴잔 성(佐東銀山城)이나 인근 지역(히로시마 시 아사미나미구)을 접수하여 산요도 요충지를 제압하였다.
8월 28일, 와카야마 성을 출발한 다카후사의 군은 도쿠지(徳地) 어귀와 호후(防府) 어귀부터 야마구치(山口)에 쳐들어갔다.[20] 야마구치로 들어간 것은 같은 날 정오의 일로, 스기 ・ 나이토의 군세도 호응하여 다카후사의 군 진영에 달려와 합류했다.[20] 다카후사의 군은 병력 5천에서 1만에 이르렀다고 한다.
; 다이네이지의 변 관련 인물
구분 | 이름 | 비고 |
---|---|---|
오우치 씨 | 오우치 요시타카 | 다이네이지에서 자결 |
오우치 주코 | 다이네이지에서 자결 | |
오우치 요시타카 | 도 씨 군에게 붙잡혀 살해 | |
오우치 칸쥬마루 | 이듬해 도 씨 군에게 붙잡혀 살해 | |
오우치 요시타네 | 다이네이지의 변 후에 태어나 요시미로 도망 | |
오우치 씨 가신 (중신·측근 등) | 레이제이 다카토요 | 요시타카를 지키며 다이네이지에서 전사 |
우다 다카쓰구 | 오우치 씨 일족, 요시타카를 지키며 다이네이지에서 전사 | |
스에 다카야스 | 스에 씨 일족, 요시타카를 지키며 호센지에서 전사 | |
스에 다카히로 | 스에 씨 일족, 요시타카를 지키며 호센지에서 전사 | |
누키 다카나카 | 요시타카를 지키며 호센지에서 전사 | |
아마노 다카요시 | 아키 국인, 아마노 다카시게 동생, 요시타카를 지키며 다이네이지에서 전사 | |
구로카와 다카조 | 별명 소 무네우지, 요시타카를 지키며 다이네이지에서 전사 | |
오타 다카미치 | 요시타카를 지키며 다이네이지에서 전사 | |
오카베 다카카게 | 요시타카를 지키며 다이네이지에서 전사 | |
오카야 다카히데 | 요시타카를 지키며 다이네이지에서 전사 | |
네기 우엔 | 요시타카를 지키며 다이네이지에서 전사 | |
후지시마 사네나오 | 요시타카를 지키며 다이네이지에서 전사 | |
이사 다카미쓰 | 요시타카를 지키며 다이네이지에서 전사 | |
이사 카게히사 | 요시타카를 지키며 다이네이지에서 전사 | |
후카노 다카히로 | 요시타카를 지키며 다이네이지에서 전사 | |
쿠라타 노리노부 | 요시타카를 지키며 다이네이지에서 전사 | |
오바타 요시자네 | 요시타카를 지키며 도망치지만, 도 씨 군에게 붙잡혀 살해 | |
사바 다카쓰라 | 요시미 씨에게 사자가 되었으나 귀가 도중 전사 | |
지쿠젠 국 | 스기 고운 | 지쿠젠 국 수호대, 지쿠젠 카스야하마에서 전사 |
스기 다카카게 | 지쿠젠 국 카스야하마에서 전사 | |
사가라 다케토 | 도망친 사오노 성에서 자해 | |
아키 국 | 히라가 다카야스 | 즈사키 성에서 모리의 습격을 받아 도망 후 자해 |
간다 노부자네 | 츠치야마 성에서 모리에게 공격받아 항복 | |
이와미 국 | 요시미 마사요리 | 이와미 국 삼본송에 주둔 |
공가 | 이니켄 (레이제이 노리토오 혹은 레이제이 다카토요 일족) | 휘말려 살해[16] |
오즈키 이하루 | 정4위, 오우치 요시타카의 아내의 아버지, 휘말려 살해 | |
산조 키미요리 | 다케다 신겐 정실 부, 휘말려 살해 | |
니조 요리후사 | 관백, 좌대신, 휘말려 살해 | |
니조 요시토요 | 휘말려 자해 | |
기요하라 세이시로 | 기요하라 노리노리의 동생, 휘말려 살해 | |
스에 씨 | 스에 다카후사 | 반란군 대장, 군세를 이끌고 호후에서 야마구치로 침공 |
스에 다카미츠 | 군세를 이끌고 호후에서 야마구치로 침공 | |
스에 씨 가신 | 에라 후사요시 | 군세를 이끌고 호후에서 야마구치로 침공 |
노가미 후사타다 | 지쿠젠 국에서 사가라 다케토, 스기 고운을 공격 | |
미야가와 후사나가 | 군세를 이끌고 호후에서 야마구치로 침공 | |
에라 켄신 | 아키 사쿠라오에 주둔 | |
후카노 후사타카 | 모반을 간하고 자해 | |
미야가와 후사카츠 | 모반을 간하고 자해 | |
오우치 씨 가신 | 나이토 오키모리 | 야마구치에 거주, 사변을 침묵하고, 요시타카로부터의 화해 요청을 거절 |
나이토 다카요 | 야마구치에 거주, 동향 불명 | |
스기 시게노리 | 야마구치에 침공 | |
스기 다카야스 | 구라카케에 주둔 | |
아오카게 다카아키 | 오우치 씨 가신 | |
이다 오키히데 | 오우치 씨 가신 | |
니호 다카야스 | 오우치 씨 가신 | |
도다 다카모리 | 소란 중의 동태는 불명하지만, 변 후에 다카후사에 협력 | |
히로나카 다카카네 | 소란 중의 동태는 불명하지만, 변 후에 다카후사에 협력 | |
아키 국 | 모리 모토나리 | 다카후사와 동조하여 아키의 요시타카 측 세력을 구축 |
아마노 다카츠나 | 다카후사와 동조하여 아키의 요시타카 측 세력을 구축 | |
이와미 국 | 마스다 후지카네 | 다카후사와 동조하여 요시미 씨 공격 |
5. 1. 오우치 요시타카 측
덴분 14년(1545년) 5월, 오우치 요시타카와 사가라 다케토의 관계가 악화되자 다케토는 요시타카 곁을 떠나 히고(肥後)로 낙향했다.[20] 그러나 덴분 17년(1548년) 요시타카의 요청으로 다시 오우치가에 출사했다.덴분 19년(1550년), 다케토와 스에 다카후사(陶隆房) 사이의 대립이 격화되어 다케토 암살 모의까지 벌어졌다. 다케토는 이를 요시타카에게 밀고하여 위기를 모면했지만, 다카후사의 모반 소문이 돌았고, 요시타카의 측근 레이제이 다카토요(冷泉隆豊)는 다카후사 모살을 진언했다. 다케토는 자신의 딸을 다카후사의 아들 나가후사(長房)에게 시집보내려 했으나, 다카후사가 가문의 격이 다르다며 거절하여 관계 개선에 실패했다.
9월 16일, 사가라 다케토는 오우치 가문을 떠나 이와미(石見)의 요시미 마사요리(吉見正頼)에게로 도망쳤다.[20]
11월 하순, 다카후사가 병을 핑계로 거성(居城)에 틀어박히자,[20] 요시타카는 갑주를 입고 저택에서 농성하며 다카후사를 힐문하는 등 양측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덴분 20년(1551년) 1월, 오우치 가를 떠났던 사가라 다케토가 지쿠젠(筑前) 슈고다이 스기 오키카즈(杉興運)에게 붙잡혔다. 다케토는 변명하는 문서를 썼지만, 요시타카는 4월에 다케토를 스오(周防)로 데려와 출사시켰다.
결국 다카후사 등은 오토모 요시시게(大友義鎮)의 이복동생 오토모 하루히데(大友晴英, 요시타카의 조카)를 오우치 가의 새 당주로 옹립하려 했고, 오토모 가문은 이를 승낙했다.
사가라 다케토와 그를 숨기고 있던 스기 오키카즈 등 요시타카 측은 다카후사가 보낸 군세에 의해 살해되었다. 다케토의 목은 야마구치(山口)에서 효수되었다.
9월,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는 요시타카파인 히라가 다카야스(平賀隆保)를 공격하여 항복시켰다.
10월, 이와미(石見)의 마스다 후지카네(益田藤兼)가 요시타카 측인 요시미 마사요리(吉見正頼)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24] 또한 사가라 다케토의 아들 도라오(虎王)를 잡아 죽였다.
덴분 21년(1552년) 1월, 다카후사는 스기 시게노리(杉重矩)를 자결로 몰아넣었다.[20]
3월, 오토모 하루히데가 야마구치에 들어와 오우치 요시나가(大内義長)로 개명하고 오우치 가의 가독을 이었다. 다카후사 역시 하루카타(晴賢)로 개명하여 요시나가를 꼭두각시 당주로 삼아 오우치 가의 실권을 장악했다.
; 오우치 요시타카 측 인물
구분 | 이름 | 비고 |
---|---|---|
오우치 씨 | 오우치 요시타카 | 다이네이지에서 자결 |
오우치 주코 | 다이네이지에서 자결 | |
오우치 요시타카 | 도 씨 군에게 붙잡혀 살해 | |
오우치 칸쥬마루 | 이듬해 도 씨 군에게 붙잡혀 살해 | |
오우치 요시타네 | 다이네이지의 변 후에 태어나 요시미로 도망 | |
오우치 씨 가신 (중신·측근 등) | 레이제이 다카토요 | 요시타카를 지키며 다이네이지에서 전사 |
우다 다카쓰구 | 오우치 씨 일족, 요시타카를 지키며 다이네이지에서 전사 | |
스에 다카야스 | 스에 씨 일족, 요시타카를 지키며 호센지에서 전사 | |
스에 다카히로 | 스에 씨 일족, 요시타카를 지키며 호센지에서 전사 | |
누키 다카나카 | 요시타카를 지키며 호센지에서 전사 | |
아마노 다카요시 | 아키 국인, 아마노 다카시게 동생, 요시타카를 지키며 다이네이지에서 전사 | |
구로카와 다카조 | 별명 소 무네우지, 요시타카를 지키며 다이네이지에서 전사 | |
오타 다카미치 | 요시타카를 지키며 다이네이지에서 전사 | |
오카베 다카카게 | 요시타카를 지키며 다이네이지에서 전사 | |
오카야 다카히데 | 요시타카를 지키며 다이네이지에서 전사 | |
네기 우엔 | 요시타카를 지키며 다이네이지에서 전사 | |
후지시마 사네나오 | 요시타카를 지키며 다이네이지에서 전사 | |
이사 다카미쓰 | 요시타카를 지키며 다이네이지에서 전사 | |
이사 카게히사 | 요시타카를 지키며 다이네이지에서 전사 | |
후카노 다카히로 | 요시타카를 지키며 다이네이지에서 전사 | |
쿠라타 노리노부 | 요시타카를 지키며 다이네이지에서 전사 | |
오바타 요시자네 | 요시타카를 지키며 도망치지만, 도 씨 군에게 붙잡혀 살해 | |
사바 다카쓰라 | 요시미 씨에게 사자가 되었으나 귀가 도중 전사 | |
지쿠젠 국 | 스기 고운 | 지쿠젠 국 수호대, 지쿠젠 카스야하마에서 전사 |
스기 다카카게 | 지쿠젠 국 카스야하마에서 전사 | |
사가라 다케토 | 도망친 사오노 성에서 자해 | |
아키 국 | 히라가 다카야스 | 즈사키 성에서 모리의 습격을 받아 도망 후 자해 |
간다 노부자네 | 츠치야마 성에서 모리에게 공격받아 항복 | |
이와미 국 | 요시미 마사요리 | 이와미 국 삼본송에 주둔 |
공가 | 이니켄 (레이제이 노리토오 혹은 레이제이 다카토요 일족) | 휘말려 살해[16] |
오즈키 이하루 | 정4위, 오우치 요시타카의 아내의 아버지, 휘말려 살해 | |
산조 키미요리 | 다케다 신겐 정실 부, 휘말려 살해 | |
니조 요리후사 | 관백, 좌대신, 휘말려 살해 | |
니조 요시토요 | 휘말려 자해 | |
기요하라 세이시로 | 기요하라 노리노리의 동생, 휘말려 살해 |
5. 2. 스에 하루카타 측
1545년 5월, 다케토는 머리를 깎고 요시타카의 곁을 떠나 히고(肥後)의 본가로 낙향했다.[20] 1549년 2월부터 5월까지 모리 가문과 가까워지기 위해 다카후사가 모리 모토나리를 초청했고, 그는 자신의 아들들을 데리고 야마구치(山口)를 방문하여 요시타카를 알현하였다. 이 때 다카후사는 모리 가의 가신인 깃카와 모토하루와 의형제를 맺기도 하였다.1550년에 이르러 다케토와 다카후사 사이의 대립은 극에 달했으며, 다케토 암살 모의까지 이루어졌으나 다케토가 요시타카에게 밀고하여 위기를 모면하였다. 다카후사가 모반을 일으켰다는 소문이 돌았고, 요시타카의 측근인 레이제이 다카토요가 요시타카에게 다카후사 모살을 진언할 정도였다. 다케토는 자신의 딸을 다카후사의 아들 나가후사에게 시집 보내려 하였으나, 다카후사가 집안의 격이 다름을 이유로 거절하여 융화안은 파열되었다.
8월 24일, 다카후사는 모리 모토나리 ・ 다카모토(隆元) 부자와 의형제 깃카와 모토하루에게 밀지를 보내, 스기나 나이토와 상담하여 요시타카를 폐하고 요시타카(義尊)를 옹립하겠다는 계획과 모리 씨에게 협력을 구하는 내용을 전했다. 이는 다카후사가 오우치 가문에 대한 '모반'의 의사를 보인 최초의 사료로 평가된다.[20] 또한, 다카후사의 의향은 아마노 다카쓰나 등 다른 아키의 고쿠진(国人)들에게도 전해져 다카후사에 대한 협력의 대가로 영지를 주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9월 15일, 나카베 신사(仁壁神社)・이마 하치만구(今八幡宮)에서 이루어진 예제(例祭) 참예를 요시타카는 갑자기 결석하였고, 미기타 다카쓰구(右田隆次)에게 대행하게 하였다. 이는 「다카후사가 요시타카 ・ 다케토를 유폐할 것이다」라는 소문으로 요시타카 측이 경계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다음날인 16일, 요시타카는 다카후사를 불러 힐문하였고, 다카후사는 사실무근이라고 부인하였다.[20]
11월 하순부터 다카후사는 병을 이유로 자신의 거성(居城)인 와카야마 성(若山城)에 들어가 있었으며, 해를 넘겨 2월에 열리는 수이월회(修二月会)의 대두(大頭) 역도 다하지 않았다.[20]
1551년 1월, 오우치 씨를 떠나 있던 사가라 다케토가 지쿠젠(筑前)의 슈고다이 스기 오키카즈(杉興運)에 의해 그 신병이 확보되었다. 다케토는 사가라 다케토 신장(相良武任申状)이라는 문서를 써서 변명하였는데, 여기서 다케토는 스에 다카후사에게 모반 혐의가 있다고 주장한 것은 스기 시게노리이며, 시게노리가 참소를 자신에게 돌려 다카후사와 가까워지려 했다고 주장했다.
4월, 요시타카는 다케토를 스오로 데리고 돌아와 출사하게 하였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다카후사 등은 5월 오토모 요시시게의 이복 동생 오토모 하루히데(大友晴英)를 오우치 가의 새로운 당주로 옹립할 뜻에 협력해 주기를 요구하는 밀사를 오토모 씨에게 보냈다.
8월 10일, 사가라 다케토는 다카후사를 두려워하여 오우치 가에서 세 번째로 빠져나와 지쿠젠으로 달아났다.
8월 20일, 다카후사는 오키모리 등과 함께 군사를 일으켰다. 다카후사의 군은 먼저 이쓰쿠시마의 신령(神領)과 사쿠라오 성(桜尾城)을 접수하고, 이에 호응하여 출진한 모리 군도 사도긴잔 성(佐東銀山城)이나 인근 지역(히로시마 시 아사미나미구)을 접수하여 산요도 요충지를 제압하였다.
8월 28일, 와카야마 성을 출발한 다카후사의 군은 도쿠지(徳地) 어귀와 호후(防府) 어귀부터 야마구치(山口)에 쳐들어갔다.[20] 야마구치로 들어간 것은 같은 날 정오의 일로, 스기 ・ 나이토의 군세도 호응하여 다카후사의 군 진영에 달려와 합류했다.[20] 다카후사의 군은 병력 5천에서 1만에 이르렀다고 한다.
;스에 하루카타 측
인물 | 소속 | 역할 및 행동 |
---|---|---|
스에 다카후사 | 스에 씨 | 반란군 대장, 군세를 이끌고 호후에서 야마구치로 침공 |
스에 다카미츠 | 스에 씨 | 군세를 이끌고 호후에서 야마구치로 침공 |
에라 후사요시 | 스에 씨 가신 | 군세를 이끌고 호후에서 야마구치로 침공 |
노가미 후사타다 | 스에 씨 가신 | 지쿠젠 국에서 사가라 다케토, 스기 고운을 공격 |
미야가와 후사나가 | 스에 씨 가신 | 군세를 이끌고 호후에서 야마구치로 침공 |
에라 켄신 | 스에 씨 가신 | 아키 사쿠라오에 주둔 |
후카노 후사타카 | 스에 씨 가신 | 모반을 간하고 자해 |
미야가와 후사카츠 | 스에 씨 가신 | 모반을 간하고 자해 |
나이토 오키모리 | 오우치 씨 가신 | 야마구치에 거주, 사변을 침묵하고, 요시타카로부터의 화해 요청을 거절 |
나이토 다카요 | 오우치 씨 가신 | 야마구치에 거주, 동향 불명 |
스기 시게노리 | 오우치 씨 가신 | 야마구치에 침공 |
스기 다카야스 | 오우치 씨 가신 | 구라카케에 주둔 |
아오카게 다카아키 | 오우치 씨 가신 | |
이다 오키히데 | 오우치 씨 가신 | |
니호 다카야스 | 오우치 씨 가신 | |
도다 다카모리 | 오우치 씨 가신 | 소란 중의 동태는 불명하지만, 변 후에 다카후사에 협력 |
히로나카 다카카네 | 오우치 씨 가신 | 소란 중의 동태는 불명하지만, 변 후에 다카후사에 협력 |
모리 모토나리 | 아키 국 | 다카후사와 동조하여 아키의 요시타카 측 세력을 구축 |
아마노 다카츠나 | 아키 국 | 다카후사와 동조하여 아키의 요시타카 측 세력을 구축 |
마스다 후지카네 | 이와미 국 | 다카후사와 동조하여 요시미 씨 공격 |
6. 평가
다이네이지의 변에 대한 평가는 여러 관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 오오우치 요시타카와 고나라 천황의 야마구치 천도 계획 저지: 토마스 콘란은 요시타카가 고나라 천황 및 공경들과 함께 야마구치로 천도하려는 계획을 세웠고, 스에 다카후사는 "교토의 상의"에 따라, 실제로는 구조 다네미치의 사주를 받아 이를 저지하기 위해 변을 일으켰다고 주장한다.[15]
- 오오우치 가문 내 공가 세력에 대한 반발: 하키와라 다이스케는 변에서 살아남은 공가들과 변 이후 야마구치를 방문한 공가들의 사례를 들어, 스에 다카후사 등 기존 오오우치 씨 가신들이 오오우치 가문 내에서 발언권을 강화하던 특정 공가들을 목표로 삼았다고 본다.[16]
- 요시타카의 치세에 대한 불만:
- 제1차 겟산토다 성 공격 실패 후 요시타카가 문약한 생활을 시작하고, 이로 인한 낭비와 증세로 악정이 심화된 것에 대한 반발.[1][17]
- 무공파(스에 다카후사, 나이토 오키모리 등)와 문치파(사가라 다케토) 간의 관계 결렬, 그리고 다케토를 중용한 요시타카에 대한 불만.[1][17]
- 슈고다이 세력과 당주 직속 관리들 간의 갈등 심화.[18]
- 요시타카와 다카후사의 개인적 대립:
- 요시타카가 스에 가문의 영지 일부를 도다이지에 반환하려 한 것에 대한 원한.[8]
- 스에 히로모리 암살 사건 이후 오오우치 가문의 당주 권위 강화 움직임에 대한 스에 가문의 불신.[19]
- 반역의 정당성: 다카후사 자신은 "천도"를 명분으로 반역을 정당화했다.[1] 무로마치 막부는 다카후사의 반역을 인정했다.
- 모리 모토나리의 비판: 이쓰쿠시마 전투에서 스에 하루카타를 쓰러뜨린 모토나리는 하루카타를 "시역의 악"이라 비난했지만, 이는 모리 가문의 대의명분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
- 다치바나 도세쓰의 회상: 오토모 씨의 중신 다치바나 도세쓰는 요시타카가 다카후사보다 사가라 다케토를 편애한 것을 비판했다.[1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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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毛利戦記
学習研究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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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内義隆――大内氏最大版図を築くも家臣に背かれる
戎光祥出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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室町戦国日本の覇者 大内氏の世界をさぐる
勉誠出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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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大内氏概略 大内氏の滅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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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内義隆のすべて
新人物往来社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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学習研究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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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九州探題考
高志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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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
官務小槻氏の確立 : 太政官弁官局(官方)の中世化
https://cir.nii.ac.j[...]
立命館大学
[14]
학술지
小槻氏の中世:大夫史の家の継承にみる
https://cir.nii.ac.j[...]
お茶の水女子大学文教育学部人文科学科比較歴史学コース内読史会
[15]
문서
大内義隆の遷都計画
https://tconlan.scho[...]
[16]
간행물
戦国期大内氏分国下向公家と「陶隆房の乱」
古典ライブラリー
[17]
서적
西国の戦国合戦
吉川弘文館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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戎光祥出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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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大内政弘の権力構造と周防・長門支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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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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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内義隆のすべ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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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毛利元就
学習研究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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