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 데루모토
1. 개요
모리 데루모토는 모리 모토나리의 손자이자 모리 다카모토의 아들로, 1553년에 태어나 1625년에 사망한 인물이다. 그는 1563년 아버지의 급사로 11세의 어린 나이에 가문을 상속받았으며, 할아버지 모토나리의 지원을 받으며 성장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 총대장으로 추대되었으나, 직접 참전하지 않고 가문은 패배하여 영지가 대폭 삭감되었다. 이후 조슈번의 지배 체제를 강화하고 내정에 힘썼으며, 소설, 드라마 등 다양한 작품에서 다루어졌다.
| 이름 | 모리 데루모토 |
|---|---|
| 원어 이름 | 毛利 輝元 |
| 로마자 표기 | Mōri Terumoto |
| 가나 표기 | もうり てるもと |
| 한자 표기 | 毛利輝元 |
| 출생 | 1553년 2월 4일 |
| 출생지 | 히로시마현 요시다 |
| 사망 | 1625년 6월 2일 |
| 사망지 | 히로시마현 요시다 |
| 본명 | 고쓰루마루 (幸鶴丸) |
| 별명 | 쇼유타로(少輔太郎), 아키 중납언(安芸中納言) |
| 계명 | 천수원암종서(天樹院巌宗瑞) |
| 묘소 | 야마구치현 하기시 |
| 관위 | 종오위하 우위문독, 우마두, 종사위하 시종, 참의, 종삼위 권중납언 |
| 씨족 | 오에성 모리씨 |
|---|---|
| 가문 | 모리 가문 |
| 직책 | 다이묘 (영주) |
|---|---|
| 역임 | 모리 가문 당주 |
| 시작 | 1566년 |
|---|---|
| 종료 | 1623년 |
| 이전 당주 | 모리 다카모토 |
| 다음 당주 | 모리 히데나리 |
| 아버지 | 모리 다카모토 |
|---|---|
| 어머니 | 오자키 부인 |
| 할아버지 | 모리 모토나리 |
| 삼촌 | 깃카와 모토하루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
| 양자 | 모리 히데모토 |
| 양녀 | 고마히메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아내) |
| 배우자 | 세이코인, 세이타이인, 오마쓰, 오센, 오쓰, 오사나 |
| 자녀 | 모리 히데나리 다케히메 모리 나리타카 |
| 형제 | 모리 도쿠쓰루마루 쓰와노 국 (요시미 히로요리의 정실) |
| 주군 | 아시카가 요시아키 → 도요토미 히데요시 → 도요토미 히데요리 → 도쿠가와 이에야스 → 도쿠가와 히데타다 → 도쿠가와 이에미쓰 |
|---|---|
| 소속 | 모리 가문 도요토미 가문 서군 도쿠가와 막부 |
| 막부 | 무로마치 막부 상반중 → 에도 막부 |
| 번 | 조슈번 초대 번주 |
| 군대 지휘 | 히로시마성 |
| 주요 전투 | 후베야마 전투 (1570) 이시야마 혼간지 전투 (1576-1580) 임진왜란 (1592-1593) 세키가하라 전투 (1600) |
| 통칭 | 하바시 아키노사이쇼, 하바시 아키노추나곤 |
|---|---|
| 법명 | 천수원전황문운암종서대거사, 천수공 |
| 증위 | 종2위 |
| 공식 홈페이지 | 나우루 공식 홈페이지 |
|---|
-
모리씨 (오에씨) -
모리 모토나리
모리 모토나리는 센고쿠 시대 아키 국을 기반으로 뛰어난 지략과 외교를 통해 주고쿠 지방을 통일한 다이묘로, 아리타-나카이데 전투와 이쓰쿠시마 전투에서의 승리, 세 아들과의 화합을 강조한 일화, 그리고 "천하를 탐하지 않는다"는 유언으로 유명하며 대중문화에서도 영웅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
일본의 씨족 -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전국시대의 혼란을 끝내고 일본을 통일한 무장이자 정치가로, 미천한 농민 출신으로 오다 노부나가를 섬겨 권력을 장악, 도요토미 정권을 수립했으나 임진왜란을 일으키며 그의 야망은 좌절되었고, 오늘날까지도 일본 역사상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
일본의 씨족 -
모리 모토나리
모리 모토나리는 센고쿠 시대 아키 국을 기반으로 뛰어난 지략과 외교를 통해 주고쿠 지방을 통일한 다이묘로, 아리타-나카이데 전투와 이쓰쿠시마 전투에서의 승리, 세 아들과의 화합을 강조한 일화, 그리고 "천하를 탐하지 않는다"는 유언으로 유명하며 대중문화에서도 영웅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
아키 모리씨 -
히로시마성
히로시마성은 1589년 축성되어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 잡았으나 원폭으로 파괴된 후 복원되었고, 현재는 평화를 기원하는 상징이자 '잉어성'이라는 별칭으로 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히로시마의 평지성이다. -
아키 모리씨 -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센고쿠 시대부터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활약한 무장으로, 모리 모토나리의 아들이자 고바야카와 가문의 양자로서 모리 가문의 세력 확장에 기여했으며 도요토미 정권의 고다이로를 역임하고 임진왜란에도 참전했다.
2. 생애
모리 데루모토는 1553년 아키 요시다 고리야마 성에서 모리 다카모토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고쓰마루'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의 어머니 오자키노쓰보네는 오우치 요시타카의 양녀였다. 1563년 아버지 다카모토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데루모토가 상속자로 지명되었으나, 너무 어렸기 때문에 할아버지 모리 모토나리가 실질적으로 모리 가문을 이끌었다.
1564년, 성인식에서 고쓰마루는 데루모토라는 이름을 받았으며("輝"는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에게서 받았다), 지휘권을 맡게 되었다. 1566년, 모리 가문의 숙적이었던 아마고 씨가 멸망하자, 모토나리는 현재 영토에 만족하고 확장을 멈추라는 유언을 남겼다. 데루모토는 대체로 이 유언을 따랐다.
1570년 후반, 데루모토는 장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깃카와 모토하루와 함께 아마고 가쓰히사를 격파하고 오키섬으로 몰아냈다. 1571년 모토나리가 사망하면서, 데루모토는 광대한 영토와 강력한 해군, 그리고 두 명의 유능한 삼촌(다카카게와 모토하루)의 지원을 물려받았다.
그는 하기야키 도자기의 주요 후원자로 알려져 있다.
모리 데루모토의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
| 관계 | 이름 |
|---|---|
| 아버지 | 모리 다카모토 |
| 어머니 | 오자키노쓰보네(나이토 오키모리의 딸) |
| 정실 | 세이코인(시시도 다카이에의 딸) |
| 측실 | 세이타이인 |
| 장남 | 모리 히데나리 |
| 장녀 | 다케히메(깃카와 히로마사의 아내) |
| 차남 | 모리 나리타카 |
| 측실 | 오마쓰(하네 야마시로노카미 모토야스의 딸) |
| 측실 | 오센(이누에 가와치노카미 나리마사의 딸) |
| 측실 | 오쓰(하나후사 다로자에몬 야스유키의 딸) |
| 측실 | 오사나(고다마 고자에몬 노리토모의 딸) |
| 양녀 | 고마히메(시시도 모토히데의 딸,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아내) |
| 양자 | 모리 히데모토(모리 모토키요의 장남) |
본관은 오에 씨이며, 정식 이름은 오에 데루모토이다.
덴문 22년(1553년) 모리 다카모토의 적장자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오우치 요시타카의 양녀 오자키노쓰보네이다. 에이로쿠 6년(1563년) 아버지의 급사로 가독을 계승, 할아버지 모리 모토나리와 두 숙부 깃카와 모토하루,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후견을 받았다. 성인식에서 무로마치 막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에게서 "輝" 자를 받아 데루모토라 칭했다.
겐키 2년(1571년) 모토나리 사후 친정을 시작, 아마고 씨 멸망, 오우치 데루히로의 난, 오토모 씨와의 전투 등에 대처하며 영토를 유지했다.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한 오다 노부나가와 초기에는 우호적이었으나, 노부나가의 세력 확장에 따라 대립이 불가피해졌다. 덴쇼 4년(1576년) 요시아키가 비고 도모로 망명하자 그를 보호, 도모 막부를 수립했다. 다케다 씨, 우에스기 씨, 이시야마 혼간지 등과 동맹을 맺고 오다-도요토미 정권과 싸웠다. 부쇼군에 임명되었고, 아마고 씨 잔당에게 승리하여 광대한 영토를 얻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공세에 궁지에 몰렸으나, 혼노지의 변으로 노부나가가 사망하자 히데요시와 일시 화평했다. 이후 히데요시와 수년간 싸웠지만, 결국 영토를 보장받고 싸움을 끝냈다(교게이와 화목). 시코쿠 정벌, 규슈 정벌에서 선봉을 맡았다.
도요토미 정권에서 오대로 중 한 명으로 중임을 맡았다. 히로시마성 축성, 측근 집단 정비 등 지배 체제 구축을 목표로 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대두하자 고부교 등과 연계하여 대항했다. 게이초 5년(1600년) 이시다 미쓰나리의 호출에 응하여 서군 총대장으로 추대되어 오사카성에 입성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모리 군은 깃카와 히로이에 등의 배신으로 본전에 참전하지 못하고 패배했다.
전후 오사카 성을 떠났으나, 서군 총대장으로 활동한 사실이 발각되어 영토 대부분을 빼앗기고 스오, 나가토만 영유하게 되었다(보초 감봉).
출가 후 적장자 모리 히데나리에게 가독을 양위했지만, 실질적인 당주로서 정무를 관장했다. 하기성 축성, 재정 재건, 가중 화합에 힘썼고, 에도 막부와의 관계도 중시했다. 가신 숙청을 통해 권위 회복을 꾀했다.
겐와 9년(1623년) 히데나리에게 정식으로 가독을 양위하고 60년간의 통치를 마무리했다. 간에이 2년(1625년) 하기시에서 병사했다. 향년 73세.
모리 데루모토의 관직 임명 및 변천 과정은 다음과 같다.
| 날짜 | 내용 |
|---|---|
| 에이로쿠 8년(1565년) 2월 16일 | 원복, 무로마치 막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에게서 이름 한 글자를 받아 데루모토로 개명. 야카타 호 칭호 허락. |
| 겐키 원년(1570년) 3월 23일 | 우에몬도쿠 임관, 종오위하 서위. |
| 겐키 4년(1573년) 2월 9일 | 우마노카미 전임. |
| 덴쇼 4년(1576년) 11월 24일 | 아시카가 쇼군가 오동나무 문장 사용 허가. |
| 덴쇼 16년(1588년) 7월 25일 | 종사위하 승서, 시종 임관. 28일, 산기 전임. 세이카가 가문 서열 진입. 아키 재상 또는 하시바 아키 재상으로 불림. |
| 분로쿠 4년(1595년) 1월 6일 | 종삼위 승서, 곤추나곤 전임. 아키 주나곤 또는 하시바 아키 주나곤으로 불림. 같은 해, 도요토미 씨 5대로 일원. |
| 게이초 3년(1598년) 4월 18일 | 곤추나곤 사임. |
| 게이초 5년(1600년) 10월 | 출가하여 겐안소즈이로 칭함. |
| 겐와 9년(1623년) 9월 10일 | 히데나리에게 정식으로 가독 양도. |
| 다이쇼 14년(1925년) 3월 16일 | 종이위 추증. |
2.1. 가독 상속과 초기 활동 (1553년 ~ 1571년)
덴분 22년 (1553년) 음력 1월 22일 모리 모토나리의 적장자 모리 다카모토의 장남으로 아키 요시다 고리야마 산성에서 태어났다. 유아명은 고쓰루마루이다. 아버지가 계속 전장에 나가 있었기에 할아버지인 모토나리가 감독자가 되어 실질적으로 모리 가문의 정치와 군사 문제를 담당하였다.
에이로쿠 6년 (1563년) 아버지 다카모토가 급사하여 11세에 가독을 승계하였다. 그러나 너무 어렸기 때문에 할아버지 모토나리가 실권을 장악했다. 에이로쿠 8년 (1565년)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에게서 이름 글자 한 자를 받아 데루모토로 개명하였다. 같은 해 갓산 도다 성 전투에서 첫 출진했다.
겐나 2년 (1571년) 할아버지 모토나리가 사망하자 모리 료센 체제를 중심으로 중신의 보좌를 받아 친정을 시작하였다.
2.2. 오다 가문과의 대립 (1574년 ~ 1582년)
1576년 오다 노부나가에게 축출된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비호하고,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를 지원하여 오다 가문과 대립하였다. 제1차 기즈키가와구치 전투에서 오다 수군을 격파하며 승리하였다. 1578년 고즈키 성 전투에서는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와 아마고 가문 연합군을 격파하였다.
그러나 1578년 제2차 기즈키가와구치 전투에서 철갑선을 앞세운 오다 군에게 패배하면서 전황은 불리해졌다. 1579년에는 우키다 나오이에가 오다 가문에 투항하였다. 1581년에는 돗토리 성이 함락되고 깃카와 쓰네이에(吉川経家)가 자결하였다.
1582년 빗추 다카마쓰 성 전투 중 혼노지의 변이 발생하여 히데요시와 화친하였다.
2.3. 도요토미 정권 시대 (1582년 ~ 1598년)
오다 노부나가 사후, 하시바 히데요시와 시바타 가쓰이에가 권력을 다투었을 때, 모리 데루모토는 중립을 지켰다.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 이후 히데요시에게 신하의 예를 표하고, 숙부 모리 히데카네와 사촌 깃카와 히로이에를 인질로 보냈다.
1585년 시코쿠 정벌, 1586년 규슈 정벌에 선봉으로 참전하여 히데요시의 천하통일에 기여했고, 주고쿠 6개국 120만 5천 석의 영지를 인정받았다.
1589년 오타강 삼각주에 히로시마성 축성을 시작했고, 1591년 요시다 고리야마 산성에서 히로시마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주력 부대를 파견했다. 1597년 숙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와 함께 고다이로에 임명되었고, 1598년 히데요시 사망 직전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보좌를 부탁받았다.
2.4. 세키가하라 전투와 에도 시대 (1600년 ~ 1625년)
160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와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가 대립하여 무력 충돌로 발전하였다. 그해 6월, 이에야스는 우에스기 가게카쓰(上杉景勝) 토벌을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켜 아이즈 지방으로 출진하였고, 다음 달 7월 이시다 미쓰나리도 군사를 일으켜 이에야스와 맞섰다. 이때 미쓰나리는 친구 오타니 요시쓰구(大谷吉継)의 제안에 따라 자신이 총대장에 오르지 않고, 이에야스와 필적할 만한 실력을 가진 모리 데루모토를 서군 총대장으로 추대하려 하였다. 모리 가문의 외교 승려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恵瓊)에게 설득된 모리 데루모토는 서군의 총대장 자리를 수락하였다.
데루모토는 그해 7월 17일 오사카성 니시노마루에 입성하였다. 그러나 그해 9월 15일에 일어난 세키가하라 전투에 직접 군을 이끌고 출진하지는 않았고, 대신 친족인 모리 히데모토와 깃카와 히로이에를 파견하였다. 전투 후 서군이 패배하자, 그해 9월 24일 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와 모리 히데모토의 주전론을 거부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전쟁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그리고 오사카 성에서 퇴거하였다.
서군의 패배를 예상한 깃카와 히로이에는 구로다 나가마사(黒田長政)를 통해 본령 안도와 가문 존속을 교섭하려 하였다. 이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깃카와 가문의 군대가 모리 가문의 군대를 저지하는 결과로 이어졌고, 모리 가문의 군대는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 그러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전투 후 약속을 어기고 모리 데루모토의 영지를 몰수하고, 그중 일부인 스오, 나가토 2개국 298000석을 깃카와 가문에 주려고 하였다. 이에 놀란 깃카와 히로이에는 이에야스와 담판을 지어 모리 가문의 존속과 자신에게 돌아갈 영지를 모리 가문에 주는 선에서 마무리 지었다. 이로 인해 깃카와 히로이에는 모리 가문, 즉 종가를 배신했다는 오명을 쓰게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가 끝난 후 그해 10월, 모리 데루모토는 출가하여 '겐안소즈이'라 불렀으며, 가독은 적자인 모리 히데나리에게 형식적으로나마 양도하였다. 하지만 가문의 실권은 데루모토에게 있었다. 1603년 데루모토는 에도로 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사죄하고, 다음 해인 1604년 나가토 국에 하기성을 축성하여 거성으로 삼았다.
1614년 오사카 겨울 전투에서 은밀히 중신 나이토 모토모리를 오사카 성에 보내 도요토미 가문을 지원하는 한편, 이에야스의 동군에도 참전하였다. 하지만 모리 가문은 이 전투에서 소극적인 움직임만 보였다. 이후 도요토미 가문과 도쿠가와 가문은 화의를 맺고 군을 철수시켰다. 그러나 도쿠가와 가문은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절에 기증한 종의 명문을 문제 삼아 다시 군사를 일으켜 도요토미 가문의 오사카 성을 공격하였다. 이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 모리 히데모토의 부대가 본대보다 선봉에서 도요토미 군을 상대했었다. 이를 계기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모리 가문을 칭찬하였다.
이 오사카 전투의 군역과 에도 성 건축에 참여, 에도에 번저를 짓는 등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 빚어진 가문의 분열을 막고자 노력하였다.
1623년 모리 히데나리에게 정식으로 가독을 양도하고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1625년 음력 4월 27일 하기의 시혼마쓰 저택에서 임종을 맞이하였다. 향년 73세였다. 이때 가신 나가이 모토후사가 순사하였다.
3. 내정과 가신 통제
160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이시다 미쓰나리의 대립으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한 후, 모리 데루모토는 나가토로 이봉되었다. 이후 조슈번의 지배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가신단을 정리하고 숙청했다.
먼저 혈연 관계에 있던 구마가이 모토나오 일족을 숙청했다. 또한, 요시미 히로나가를 숙청하여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이래의 명문가인 요시미 씨를 사실상 멸망시켰다. 반면, 혈연 관계가 없는 마스다 모토나가를 발탁하여 중용하였다.
내정 면에서는 황무지 개간을 장려하고, 특산품 생산을 지원하여 조슈번의 경제적 토대를 마련하는 데 힘썼다. 번의 정치는 대부분 모리 히데모토와 마스다 모토나가에게 위임하였다.
4. 숙청
모리 데루모토는 숙청과 암살을 많이 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다음은 그가 숙청하거나 암살한 인물 목록이다.
| 이름 | 내용 |
|---|---|
| 구마가이 모토나오 | 로마 가톨릭 신앙을 문제삼아 살해하였다. |
| 아마노 모토노부 | 로마 가톨릭 신앙을 문제삼아 살해하였다. |
| 스기 모토노부 | 부인을 취하기 위해 살해하였다. |
| 요시미 히로나가 | 모반을 꾀한다는 이유로 토벌하였다. |
| 나이토 모토요시 | 사노 미치요시 사건에 연좌되어 자결하였다. 나이토 모토모리의 장남. |
| 아와야 모토토요 | 사노 미치요시 사건에 연좌되어 자결하였다. 나이토 모토모리의 차남. |
| 우가이 모토타쓰 |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가신이었지만, 숙부가 죽은 후 살해하였다. |
5. 가계
6. 평가 및 작품
강항(姜沆)은 간양록(看羊錄)에서 데루모토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 "겸손하고, 느긋하고 너그러워서, 우리나라(조선) 사람의 성질과 아주 닮았다."
* "조선 출병 당시, 데루모토만은 조선인의 코 베기(鼻削ぎ) 등의 잔혹 행위를 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姜沆일본어은 데루모토를 적이면서도 그 인격을 칭찬하고 있다.
또한 姜沆일본어은 간양록(看羊錄)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일본 사람들은 모두, '가가쓰는 간토에서 교토에 이르기까지 쌀가마니를 이용해 길을 만들 수 있고, 데루모토는 산요·산인에서 교토에 이르기까지의 길에 돈을 이용해 다리를 만들 수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姜沆일본어은 데루모토를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필적하는 존재로 여겼으며, 데루모토 통치하의 히로시마의 번영을 보고 "물력이 뛰어나고, 부유한 것은, 와쿄(교토(京都))에 비유된다"라고 적었다.
; 소설
* 平川弥太郎일본어, 『백야동백 ― 모리 테루모토의 음모』
* 近衛龍春일본어, 『모리는 남았다』
* 伊東潤일본어, 『천하대란』
; 드라마
* 김다 류노스케(金田龍之介) - 세키가하라 (TBS일본어, 1981년)
* 이리에 마사노리(入江正徳) - 여자 태합기 (NHK 대하드라마, 1981년)
* 미키모토 신스케(御木本伸介) - 도쿠가와 이에야스 (NHK 대하드라마, 1983년)
* 카자마 마사히로(風間正広) - 히데요시 (NHK 대하드라마, 1996년)
* 모리타 고(森田剛) - 모리 모토나리 (NHK 대하드라마, 1997년)
* 우츠이 켄(宇津井健) - 아오이 도쿠가와 삼대 (NHK 대하드라마, 2000년)
* 오모리 케이시로(大森啓祠朗) - 도시이에와 마쓰~가가 백만석 이야기~ (NHK 대하드라마, 2002년)
* 츠가야마 마사타네(津嘉山正種) - 공명의 갈림길 (NHK 대하드라마, 2006년)
* 나카오 아키라(中尾彬) - 천지인 (NHK 대하드라마, 2009년)
* 하마다 아키라(浜田晃) - 고우 ~공주들의 전국~ (NHK 대하드라마, 2011년)
* 미우라 코타(三浦孝太) - 군사 간베에 (NHK 대하드라마, 2014년)
* 아사지 나오키(浅地直樹) - 사나다마루 (NHK 대하드라마, 2016년)
* 후키코시 미츠루(吹越満) - 어떡할래 이에야스 (NHK 대하드라마, 20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