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함마드 8세 알아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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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함마드 8세 알아민은 1943년부터 1957년 튀니지가 공화국으로 선포될 때까지 튀니지의 베이였다. 그는 아흐마드 2세 알-후세인의 사망 후 몬세프 베이에 의해 황태자로 임명되었지만, 프랑스에 의해 몬세프 베이가 폐위된 후 왕위에 올랐다. 통치 초기에는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했지만, 몬세프 베이의 사망 이후 민족주의 운동과의 관계를 개선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부르기바와 갈등을 겪으며 1956년 튀니지가 독립한 후에도 그의 권력은 약화되었고, 1957년 군주제가 폐지되면서 폐위되었다. 이후 감금 생활을 하다 1962년에 사망했다. 그는 12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그의 가족 구성원들은 튀니지 공화국 수립 이후 어려움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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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함마드 8세 알아민 | |
|---|---|
| 기본 정보 | |
| 칭호 | 라민 베이 |
| 본명 | 무함마드 알아민 |
| 아랍어 표기 | الأمين باي بن محمد الحبيب (알아민 바이 빈 무함마드 알하비브) |
| 출생일 | 1881년 9월 4일 |
| 출생지 | 카르타고, 튀니스 베이국 |
| 사망일 | 1962년 9월 30일 (81세) |
| 사망지 | 튀니스, 튀니지 |
| 매장지 | 시디 압둘아지즈 묘지, 라 마르사 |
| 종교 | 수니 이슬람 |
| 통치 정보 | |
| 즉위일 | 1956년 3월 20일 |
| 퇴위일 | 1957년 7월 25일 |
| 이전 | 자신 (튀니스 베이로서) |
| 이후 | 폐지 (하비브 부르기바 튀니지 대통령) |
| 즉위일 | 1943년 5월 15일 |
| 퇴위일 | 1956년 3월 20일 |
| 이전 | 무함마드 7세 |
| 이후 | 직위 폐지 (자신, 튀니지 국왕으로서) |
| 가족 관계 | |
| 배우자 | 랄라 제네이나 베이야 (1902년 결혼, 1960년 사망) |
| 자녀 | 랄라 자키아 공주 랄라 아이샤 공주 랄라 카디자 공주 셰들리 베이 왕자 랄라 수피아 공주 모하메드 베이 왕자 살라헤딘 베이 왕자 랄라 제네이카 자누카 공주 랄라 파트마 공주 랄라 카부라 공주 자쿠아 공주 랄라 릴리아 공주 랄라 헤디아 공주 |
| 아버지 | 무함마드 6세 알 하비브 |
| 어머니 | 랄라 파투마 엘-이스마일라 |
| 왕조 | |
| 왕가 | 후사인 왕조 |
2. 베이 알-마할라 (황태자)
아흐마드 2세가 사망하고 무함마드 7세(몬세프 베이로도 알려짐)가 그 뒤를 이었다. 전통에 따라 1942년 6월 25일 몬세프 베이는 라민 베이를 황태자로 임명하고, 아흐드 엘-아마네를 수여하고 사단장으로 임명했다.[3] 한 달 후, 그는 궁정 고문 중 한 명인 므하메드 벨코자 장군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자신의 국왕에 대한 충성을 보여줄 기회를 얻었다. 벨코자는 자신의 정치적 미래를 두려워하여 프랑스 레지던트 제네럴 장피에르 에스테바에게 몬세프 베이를 폐위하도록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라민 베이는 이 음모에 대해 통치자에게 경고했고, 벨코자는 7월 30일 궁궐에서 추방되었다.[4]
몬세프 베이가 사망한 후, 라민 베이와 민족주의자들의 관계는 개선되었다. 베이는 하비브 부르기바와 살라 벤 유세프와 은밀히 협력하여 튀니지 자치 정부에 대한 요구를 제기했으며, 1948년부터 1951년까지 프랑스 당국에 상당한 압력을 가할 수 있었다.[27] 1952년, 전임자보다 훨씬 강경한 노선을 취한 새로운 레지던트 제네럴인 장 드 오트클로크가 취임하여 부르기바와 다른 민족주의 지도자들을 투옥했다. 베이는 뱅상 오리올 대통령에게 드 오트클로크의 무례하고 위협적인 어조에 대해 항의하는 격분한 전보를 보냈다. 그 결과는 몇 시간 안에 그의 모든 장관들이 체포되어 구금된 것이었다. 장관들의 지원을 받지 못한 베이는 결국 3월 28일에 드 오트클로크의 지명자인 슬라헤딘 바쿠시를 대재상으로 임명하는 칙령에 서명했다.[28] 그러나 그는 바쿠시 내각이나 레지던트 제네럴이 발령한 어떤 칙령에도 서명하기를 거부하여 정부를 마비시키고 교착 상태를 초래했다.
하비브 부르기바가 여전히 망명 중일 때, 라민 베이는 모하메드 살라 므잘리에게 프랑스 레지던트 제너럴과 새로운 개혁 협상을 요청했다. 1954년 1월 18일, 충분한 진전이 이루어져 베이는 므잘리에게 새 정부 구성을 요청했다.[35] 헤디 누이라를 포함한 많은 민족주의자들이 이러한 개혁에 기회를 주려 했지만, 부르기바의 석방을 거부한 프랑스는 많은 튀니지인들과 부르기바 자신에게 걸림돌로 남아 있었다. 부르기바는 "퇴위와 망명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늙은이의 실패는, 무자비한 야심을 가진 비양심적인 모험가의 끔찍한 야망과 결합되어 튀니지가 가진 유일한 자산, 즉 국가로서의 위상...을 박탈할 위험이 있다. 갑자기 나의 석방이 무기한 연기되었다"고 언급했다.[36] 1954년 5월 27일, 라 갈테에서 프랑스 감옥으로 이송된 부르기바는 1950년에 받은 니샨 이프티카르 대십자 훈장을 베이에게 반환했다.[37]
1956년 3월 20일 튀니지의 프랑스 보호령이 공식적으로 종료되면서 같은 날 튀니지 왕국이 선포되었고, 베이는 튀니지 국왕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무함마드 8세는 75세의 나이에 흰색 리넨 제바와 노란색 모로코 슬리퍼 차림으로 궁전을 나섰지만, 가는 길에 슬리퍼를 잃어버렸다. 그는 마누바의 히다야 궁전으로 이송되었는데, 그곳은 물과 전기가 없는 버려진 옛 베이 궁전이었다. 그와 그의 가족(아내 라라 제네이나, 아들 체들리 왕자, M'하메드, 살라 에딘, 딸 수피아 공주, 사위 모하메드 벤 살렘, 알-마할라 하신 베이)에게 배정된 곳은 바닥에 매트리스만 놓여 있었고, 시트나 이불도 없었다.[56] 처음 사흘 동안은 음식이 제공되었지만, 이후에는 가족들이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무함마드 8세 알아민은 1902년 바시르 아야리의 딸인 라라 제네이나 베야(1887–1960)와 결혼했다.[64] 그녀는 튀니지 라스 다르브 지구 출신의 트리폴리타니아 상인이었다. 그는 세 명의 왕자와 아홉 명의 공주를 포함하여 12명의 자녀를 두었다.
محمد الثامن الأمين|무함마드 8세 알아민ar의 가계도는 다음과 같다.
[1]
서적
De la dynastie husseinite. Le fondateur Hussein Ben Ali. 1705 - 1735 - 1740
Serviced
1993
3. 몬세프 베이의 폐위

1943년 5월 튀니지 전역 말, 북아프리카 주둔 프랑스군 사령관 알퐁스 쥐앵 장군은 무함마드 7세가 점령 기간 중 추축국과 협력하려 했고 민족주의 단체인 데스투르의 행동에 관대했다는 혐의로 그를 폐위하라는 명령을 받고 튀니지에 도착했다.[5] 쥐앵은 베이의 행동을 조사했지만 비난할 근거를 찾지 못했다. 그러나 명령은 명확했고, 몬세프에게 퇴위를 설득했지만 그는 거절했다.[6] 쥐앵은 라 마르사에 있는 라민의 별장을 방문하여 왕위를 제안했지만, 라민은 처음에는 거부했다. 결국 쥐앵은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다는 이점을 들어 라민을 설득했다.[7] 몬세프 베이가 퇴위를 거부하자, 1943년 5월 14일 기로 장군이 그를 폐위시켰다.[8]
1943년 5월 15일, 쥐앵 장군은 바르도 궁전에서 무함마드 8세를 즉위시키고 레지옹 도뇌르를 수여했다. 그 후 무함마드 8세는 왕가, 각료, 궁정 관리, 영사단의 경의를 받았다. 그는 전임자가 폐지했던 손에 입맞춤하는 관습을 부활시켰다. 같은 날 무함마드 셰니크는 정부의 사임을 제출했고, 슬라헤딘 바쿠슈로 교체되었다.[9] 프랑스 보호령 하에서 베이는 각료 선택에 대해 의견을 묻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몬세프 베이가 임명한 셰니크 정부는 예외였다). 1943년 7월 6일, 몬세프 베이는 결국 퇴위했고, 라민 베이의 즉위는 정당성을 얻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튀니지인들은 라민 베이를 여전히 찬탈자로 여겼다.[10]
4. 초기 통치 (1943–1948)
라민 베이는 몬세프 베이의 복귀를 요구하는 지지자들의 요구에 직면하여 조심스러운 태도를 유지했다. 그의 드문 모습은 신하들이 그에게 무관심하거나, 심지어 적대적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11] 그는 자신의 입지를 재건하기 위해 1943년 12월에 파업을 벌인 에즈-제이투나 대학교의 교사들을 지원했고 네오 데스투리안을 장관으로 선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여론은 그가 퇴위하고 몬세프 베이에게 왕위를 돌려주기를 원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소문이 부인되자 그의 인기는 다시 하락했다.[12]
1944년 5월 7일 샤를 드 골은 추축국으로부터 해방된 지 1주년을 기념하여 튀니스를 방문했다. 튀니지인들은 그가 그의 옛 경쟁자 지로의 불의를 되돌리고 몬세프 베이를 복위시켜주기를 바랐지만, 몬세프주의자들은 이러한 희망에 실망했다.[13] 대신 드 골은 라민 베이에게 로렌 십자훈장을 금으로 수여했는데, 이는 추축국 점령 기간 동안 그가 런던에서 드 골의 방송을 비밀리에 청취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베이는 그 후 오랫동안 자신의 훈장 옆에 이 훈장을 제복에 착용했다.[14]
베이에 대한 적대감은 감소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이드 알피트르를 위해 모스크에 갔을 때 다른 후사인 왕자들에게 보이콧을 당했다.[15] 그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그는 파리로 초청되어 1945년 7월 14일 군사 퍼레이드에 참석하여 드 골 옆에 섰다. 그는 이어서 독일을 방문했다.[16] 그러나 튀니지인들에게 그는 '프랑스의 베이'로 남아 있었다.[17] 1946년 8월, 여러 민족주의자들의 체포에 항의하기 위한 총파업으로 수도가 마비되었을 때, 그는 이드 알피트르를 위해 개최해야 할 손에 키스하는 의식을 취소하기 위해 건강이 좋지 않은 척을 했다.[18] 그러나 1947년 2월 마울리드 축제에 튀니스 거리를 지나갈 때, 그는 신하들의 무관심을 쉽게 볼 수 있었다.[19] 그의 즉위 기념일은 상인들에게 그들의 점포를 닫고 그의 전임자의 초상화를 내걸 좋은 기회로 여겨졌다. 심지어 사람들은 그의 차에 침을 뱉기도 했다.[20] 이러한 증오에 직면하여 그의 건강은 악화되었고, 1947년 엑스레이 검사 결과 그의 왼쪽 폐에 병변이 발견되었다. 그의 딸 자키아 공주의 남편인 모하메드 벤 살렘 박사(1915–2001)는 그의 주치의가 되었고 나중에는 정치 고문이 되었다.[21]
1947년 3월 3일, 새로운 프랑스 레지던트 제너럴 장 몽스가 튀니스에 도착했다. 전쟁이 끝난 이후 정치 상황은 변함없이 유지되었는데, 데스투르와 네오 데스투르는 라민 베이를 제거하고 그의 전임자를 복위시켜야 한다는 요구 외에는 아무것도 합의할 수 없었다. 궁정은 그의 복위라는 병적인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다.[22] 실제로, 그러한 분위기가 만연하여 몽스는 프랑스 정부에 몬세프 베이를 복위시키라고 제안했다. 폴 라마디에 총리는 북아프리카의 프랑스 정착민들의 반발을 우려하여 거부했다.[23] 1947년 7월 19일 새로운 대재상 무스타파 카크가 레지던트 제너럴에 의해 임명되었다. 처음으로 정부에서 튀니지인과 프랑스인이 동등한 지위를 갖게 되었다.[24]
몬세프 베이는 1948년 9월 1일 망명지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장례식을 위해 9월 5일 튀니스로 옮겨졌고, 수천 명의 튀니지인들이 그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참석했다. 그의 가족은 라민 베이가 참석할 경우 장례식을 보이콧하겠다고 위협했고, 그는 그들에게 조의를 표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25] 그러나 이는 그의 통치의 전환점이 되었는데, 몬세프 베이의 복위 가능성이 이제 제거되었고, 처음으로 그의 백성들은 그를 합법적인 통치자로 여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26]
5. 민족주의 운동과의 관계 강화 (1948–1953)
모든 장관과 고문들이 투옥된 상황에서 라민 베이는 노동조합 지도자인 파르하트 하셰드의 조언과 지원에 의존했지만, 1952년 12월 그는 라 맹 루즈의 극단주의 프랑스 정착민들에게 암살당했다.[29] 드 오트클로크에게 더 이상 저항할 수 없었던 라민 베이는 결국 몇 달 전에 파리에서 작성된 제한적인 내부 자치에 관한 칙령에 서명하여 새로운 지방 선거를 허용했다.[30][31] 그러나 프랑스가 강요한 개혁은 민족주의자들이 후보와 유권자 모두를 상대로 테러 캠페인을 시작했기 때문에 유명무실해졌다. 이 캠페인은 집권 가문 자체까지 확대되어, 1953년 7월 1일 베이의 후계자 아제딘 베이가 레지던트 제네럴과 독자적인 회담을 했다는 혐의로 자신의 궁궐 안에서 암살당했다.
1953년 9월 2일, 장 드 오트클로크는 파리로 소환되었고, 새로운 레지던트 제네럴 피에르 부아자르는 더 화해적인 노선을 취했다. 수천 명의 수감자들이 석방되었고 검열이 축소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로부터 받은 부아자르의 지시는 상대적인 평화를 일시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그는 베이와만 개혁 정책을 추구해야 했고, 네오 데스투르와는 그렇지 않았다. 프랑스 제4공화국은 이러한 방식으로 통치자와 무장 민족주의자 사이에 균열을 일으키기를 희망했다.[32] 라민 베이는 새로운 레지던트 제네럴의 겉보기에 유쾌한 태도에 속아 넘어갈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1953년 10월 16일, 그는 일부 억압적인 조치가 여전히 시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튀니스-카르타고 박람회 개막을 주재하는 것을 거부했다.[33] 그를 달래기 위한 더 많은 노력이 이루어졌다. 1954년 1월 1일, 많은 민족주의 지도자들이 석방되어 베이에게 즉시 영접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에 의해 매우 위험한 인물로 여겨진 부르기바는 라 갈리테에 계속 갇혀 있었다.[34]
6. 민족주의 운동과의 결별 (1953–1956)
므잘리 내각은 1954년 6월 17일에 사임했고 후임자는 임명되지 않았다. 베이는 피에르 보이에 드 라투르에게 "1년 동안, 부르기바를 석방하거나 온천으로 이송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협박 외에는 아무것도 받지 못했습니다... 저는 제 소총을 들고 펠라가가 되어 제 국민과의 접촉을 재건할 준비가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38]
1954년 7월 31일, 피에르 멘데스 프랑스 프랑스 총리가 튀니스를 방문하여 카르타고 왕궁에서 라민 베이의 환영을 받았고, 튀니지의 내정 자치를 발표했다. 이는 멘데스 프랑스와 신 데스투르당 사이의 협상에서 베이에게 반가운 소식이었다. 베이는 "우리 사랑하는 조국의 삶에 새로운 국면이 막 시작되었습니다...우리 민족의 삶에서 이 결정적인 단계 전에, 우리는...단결된 국민의 모습을 보여주며 우리의 운명에 걸맞게 서 있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39] 그러나 프랑스는 베이와 협상하는 것만으로 정치 제도를 발전시키는 것이 헛됨을 깨달았고, 튀니지 국민의 유일한 대화 상대는 신 데스투르당이 되었다.
베이는 1955년 8월 10일, 프랑스 정부에 베일릭 제도를 완전한 군주제로 대체할 것을 제안하고, 바르도 조약에 대한 보충 협정에 서명할 의향을 밝혔다. 동시에 살라 벤 유세프와 통신을 시작했지만, 아무런 결과도 낳지 못했다.[41] 1955년 6월 3일 자치 협정이 체결되었고, 부르기바는 6월 1일 튀니스로 돌아와 베이의 세 아들과 튀니지인들의 환영을 받았다. 부르기바는 베이를 방문하여 베일릭 통치에 대한 튀니지 국민의 깊은 애착을 담은 선언을 했다.[43] 8월 7일, 베이는 프랑스와 합의된 협약에 서명했고,[44] 9월 1일, 1881년 보호령 수립 이후 처음으로 레지던트 제너럴의 승인 없이 법령에 서명했다. 1955년 12월 29일, 1956년 4월 8일에 선거가 치러질 국가 헌법 의회를 설립하는 법령을 확인했다. 튀니지는 입헌 군주국으로 진화하는 듯 보였다.[45]
그러나 독립이 다가오면서 권력은 라민 베이로부터 약화되었다. 1955년 9월 13일 망명에서 돌아온 살라 벤 유세프는 베이에게 정치적 권력 회복의 희망을 주었다. 그러나 벤 유세프와 부르기바 추종자들 사이에 폭력이 발생했고, 베이는 중재하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프랑스는 경찰력에 대한 권한을 부르기바가 선택한 장관들로 구성된 튀니지 정부로 이관했기 때문에 벤 유세프가 베이에게 한 주장은 효과가 없었다. 12월 2일 베이는 로제 세두 고등판무관에게 공공 질서에 대한 프랑스의 책임을 상기시켰지만, 프랑스는 더 이상 그 책임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베이는 민족주의 정부로부터 식민 권력의 회복을 호소하고 있었다.[46] 호소가 효과가 없자 그는 다가오는 선거와 지방 행정관 및 시장 임명 승인 법령에 서명을 거부했다. 이 조치는 벤 유세프가 환영했지만, 베이를 부르기바로부터 더 멀어지게 했다. 그는 다음 날 물러서서 서명했다.[47] 1956년 1월 28일 벤 유세프는 나라를 떠났고 부르기바는 튀니지에서 그의 추종자들에 대한 단속을 이어갔다. 라민 베이는 1956년 4월 세두에게 비효율적인 항의를 했지만, 부르기바를 격노하게 만들어 베이와 그의 가족이 권력 이전을 방해하려 한다고 비난했다.[48] 1956년 3월 20일 프랑스-튀니지 의정서는 타하르 벤 아마르 대재상과 크리스티앙 피노 프랑스 외무장관에 의해 서명되었다.
7. 국왕과 폐위 (1956–1957)
1956년 튀니지 제헌 의회 선거에서 국민 연합(네오-두스투르, 튀니지 총노동 연맹, 튀니지 농민 전국 연합, 튀니지 장인 및 상인 연합 간의 동맹)이 98석 전체를 차지하며 압승을 거두었다.
1956년 4월 8일, 제헌 의회는 공식 개회식을 열었다. 국왕은 자신이 태어났을 때는 신하였으나 1922년에 멸망한 오스만 제국의 원수 제복을 입고 회의를 주재하여 시대의 변화를 보여주었다. 그는 의장 선출 토론에 참석하려 했으나, 총리 타하르 벤 아마르의 설득으로 물러났다.[49]
이틀 후, 벤 아마르가 사임하고 국왕은 하비브 부르기바를 새 총리로 임명했다.
1956년 5월 31일, 제헌 의회 포고령으로 이전 통치 가문에 부여되었던 모든 특권이 폐지되었다. 이들은 일반 시민이 되었고,[49] 왕실 재산은 정부 통제하에 놓였다. 국왕은 이에 항의하지 않고 서명했다. 6월 21일 포고령은 국기를 수정하고 후세이니 왕조 관련 언급을 삭제했으며,[50] 8월 31일 포고령은 국왕의 규정 통과 특권을 폐지하고 총리에게 이전했다.[51]
이후 국왕이 의심스러운 상황에서 획득했을 수 있는 재산을 국가에 넘기도록 하는 포고령이 이어졌다. 이러한 조치로 국왕의 위신은 크게 실추되었다.[52] 그럼에도 무함마드 8세는 1956년 12월 19일 새로운 독립 훈장을 최초로 수여받았다. 같은 날 부르기바에게 니찬 이프티카르를 수여했다.[53] 그러나 부르기바는 통치 가문에 대한 존경심이 거의 없었다. 7월 19일 이드 알 피트르에 국왕 부인을 예방했지만 왕좌에 접근하는 것을 거부하며 "나는 이전처럼 온 것이 아니라 정부 수장으로서 왔다. 당신은 당신의 왕좌에 앉아 있지 말고 나를 맞이하기 위해 앞으로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54]
1957년 7월 15일, 튀니지군은 왕궁 주변 근위대를 교체했고, 국왕은 사실상 이동의 자유를 잃었다. 7월 18일, 그의 막내 아들 살라 에딘은 조작된 혐의로 체포되었다.
1957년 7월 25일, 제헌 의회는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국을 선포하며 부르기바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55]
곧바로 부의장 알리 벨하우안, 내무 장관 타예브 메히리, 법무 장관 아흐메드 메스티리를 수반한 대표단이 카르타고 궁전으로 가서 국왕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왕비, 세 아들, 일곱 딸, 손주들과 함께 궁전을 떠날 것을 요청했다.
알리 벨하우안은 제헌 의회의 결의안을 읽었고, 사진 촬영 시도는 국왕의 거부로 무산되었다. 경찰 서장 드리스 기가는 몰락한 통치자에게 격리 명령을 알렸다. 국왕은 아버지의 이름이 언급되자 "알라 야르하무(신이 그의 영혼을 구원하소서)"라고 말하며 방을 나섰다. 이 모든 과정은 3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8. 감금과 죽음
8월 11일, 체들리와 벤 살렘은 카이루안 감옥으로 이송되었다.[57] 하신, M'하메드, 수피아 공주는 며칠 후 석방되었다. 막내아들 살라 에딘은 가택 연금 3개월 후 튀니스 민간 감옥으로 이송되었다.[58] 폐허가 된 궁전에 홀로 남겨진 노부부는 라민의 건강 악화로 1958년 10월까지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이후 그들은 부엌, 욕실, 다른 두 개의 방이 있는 라 수크라의 작은 빌라로 이송되었고, 한 달에 80DIN (중등학교 교사 급여와 거의 같은 액수)의 수당을 받았다. 그들은 가택 연금 상태였고, 바깥 정원에도 나갈 수 없었다. 경찰관이 빌라 안에서 근무했지만, 딸 수피아 공주는 원할 때마다 방문할 수 있었다.[59]
2년 후, 보석 수색이 재개되면서 전 국왕과 그의 아내는 심문을 받기 위해 소환되었다. 이때 튀니스 민간 감옥에 있던 살라 에딘이 아버지에게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같은 건물에 수감되기도 했다.[60] 라민의 아내는 국가 안보 본부로 소환되어 3일 동안 심문을 받다가 말을 할 수 없게 되었고, 뇌졸중에 시달렸다.[61] 살라 에딘은 어머니가 체포된 후, 특히 내무부 4층에서 3일 동안 심문을 받은 후 회복되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보안 부대는 가족 보석의 행방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했고, 그녀는 입에서 피를 흘리고 하복부에 내부 출혈을 일으키며 돌아왔다. 그녀는 충격 상태에서 아버지의 품에 안겨 죽었고, 심문 중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지 않았다.[60] 고통 속에 라 수크라로 돌아온 그녀는 이틀 후에 죽었다. 그녀는 라 마르사의 시디 압델아지즈 묘지에 묻혔고, 아들 살라 에딘과 M'하메드가 참석했다. 라민은 참석하지 못했고, 경찰은 대중의 묘지 출입을 막았다. 이슬람교 셰이크인 시디 알리 벤 코자만이 묘지에 들어가 망자를 위한 기도를 할 수 있었다.[61]
며칠 후, 전 국왕의 가택 연금이 해제되었다. 라민은 정원에 나가 아내의 무덤을 방문할 수 있었다. 그는 라 수크라의 빌라를 떠나 유고슬라비아 거리의 유대인 친구 아파트로 이사했는데, 그 친구는 이미 수피아 공주의 남편 아흐메드 엘 카사르와 궁전에서 쫓겨난 살라 에딘 왕자의 가족을 받아들였다. 1961년 체들리 왕자가 석방되자, 그들은 튀니스 라파예트의 페넬론 거리에서 그들과 합류하여 2개의 방이 있는 아파트에 살았는데, 그곳은 끊임없이 감시를 받았다.[61]
무함마드는 1962년 9월 30일 8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가족의 대부분의 통치자들이 튀니스 메디나의 투르베 엘 베이 묘지에 안장된 것과 달리, 아내 옆 시디 압델아지즈 묘지에 묻혔다.[62] 셰이크 무함마드 알-타히르 이븐 아슈르가 그의 시신에 기도를 올렸고, 사진 작가 빅터 세바그가 그 행사를 기록했는데, 그 일로 하룻밤 동안 경찰서 유치장에 갇혔다.[63] 그는 후세인 베이에 의해 후세이니 왕조의 수장과 명목상 국왕의 자리를 계승했다.
9. 가족과 사생활
이름 출생-사망 배우자 비고 공주 라라 아이샤 1906–1994 슬라헤딘 메헤르지 국왕의 장녀로, 여러 차례 아버지를 대신하여 대표했다. 1955년 6월 1일, 국가 내부 독립을 기념하여 라 굴레트 항구에서 하비브 부르기바를 맞이했다. 슬라헤딘 메헤르지와 결혼하여 세 아들을 두었다. 공주 라라 카디자 1909–199? 카이레딘 아쭈즈 1939년 결혼. 왕자 체들리 베이 1910–2004 공주 호슨 엘 우주드 자카리아(?–1991) 전 왕실 내각 국장(1950–1957), 2001년부터 2004년까지 왕족 수장. 공주 라라 수피아 1912–1994 왕자 모하메드 헤디 베이(1907–1965, 이혼), 소장 헤디 벤 무스타파(이혼), 중장 아흐메드 카사르 왕자 모하메드 베이 1914–1999 체르케스인 오달리스크인 사피야(1910–2000) 무함마드 3세 알사디크, 알리 3세 이븐 알후세인, 무함마드 5세 안나시르의 부인이었던 라라 크마르에 의해 길러졌다. 네 아들과 한 딸을 두었다. 왕자 살라헤딘 베이 1919–2003 하비바 메헤르지(1916–199?), 릴리안 지드(1932–1998) CS 함맘-리프의 설립자. 군주제 폐지 후 1957년 8월에 체포되었다. 첫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두 아들과 두 딸, 두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세 아들과 한 딸을 두었다. 공주 라라 제네이카 자누카 1923–2007 대령 나스레딘 자카리아 1944년 결혼. 두 아들과 세 딸을 두었다. 공주 라라 파트마 1924–1957 무스타파 벤 압달라 (마테르의 부지사) 두 아들과 한 딸을 두었다. 공주 라라 카비라 카부라 1926–2007 의전 수석 모하메드 아지즈 바흐리 네 아들과 두 딸을 두었다. 공주 라라 자키아 자쿠아 1927–1998 모하메드 벤 살렘 1944년 전 보건부 장관과 결혼. 세 아들과 세 딸을 두었다. 공주 라라 릴리아 1929–2021 멘차리 박사(수의사), 하마디 첼리(1948년) 1957년 군주제 폐지 후 모로코로 자진 망명. 자네 엘 아비디네 벤 알리 대통령 즉위 후 튀니지로 돌아왔다. 두 아들과 한 딸을 두었다. 공주 라라 헤디아 1931–2010 엔지니어 오스만 바흐리 두 아들과 세 딸을 두었다.
10. 가계도
1세대 2세대 3세대 4세대 1. محمد الثامن الأمين|무함마드 8세 알아민ar 2. 무함마드 6세 알하비브 4. 시디 무함마드 알마문 베이 8. 알후세인 2세 빈 마흐무드 3. 랄라 파티마 빈트 무함마드 5. 랄라 파티마 9. 야스민 벤 라민 6. 시디 무함마드 빈 이스마일 7. 12. 시디 이스마일 13. 1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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