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태후
1. 개요
문경태후는 고려 예종의 왕비이자 고려 인종의 어머니로, 인천 이씨 가문 출신이다. 1108년 예종에게 시집가 연덕궁주에 봉해졌으며, 이듬해 인종을 낳았다. 1114년 왕후가 되었으나 1118년 2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후 순덕왕후로 시호를 받았으며, 아들 인종이 즉위한 후 문경왕태후로 추존되었다.
| 이름 | 순덕왕후 |
|---|---|
| 한자 | 順德王后 李氏 |
| 로마자 표기 | Sundeok Wanghu Yi Ssi |
| 휘 | 없음 |
| 시호 | 순덕(順德) |
| 추존 시호 | 자정문경왕태후(慈靖文敬王太后; 1140년 추존) |
| 생몰 | 1094년 4월 15일 ~ 1118년 9월 21일 |
| 음력 생몰 | 1094년 3월 28일 ~ 1118년 9월 5일 |
| 칭호 | 연덕궁주(延德宮主; 1108년~1114년) |
| 능묘 | 수릉(綏陵) |
| 직위 | 고려의 왕후 |
|---|---|
| 배우자 | 예종 |
| 재위 기간 | 1114년 ~ 1118년 |
| 전임 | 경화왕후 |
| 후임 | 폐비 이씨 |
| 아버지 | 이자겸 |
|---|---|
| 어머니 | 변한국대부인 최씨 (해주 최씨) |
| 자녀 | 1남 2녀 |
| 아들 | 인종 |
| 딸 | 승덕공주, 흥경공주 |
| 가문 | 경원 이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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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인종 -
인종 (고려)
인종은 이자겸의 난을 진압 후 왕권 강화를 꾀하고 김부식에게 삼국사기 편찬을 명하는 등 문벌 귀족 중심의 정치를 펼치며 금과의 외교 관계 속에서 고려의 독립을 유지하려 노력한 고려의 제17대 왕이다. -
고려 인종 -
승경궁주
고려 의종의 후비인 승경궁주는 1148년 궁주로 책봉되었고 강릉공 왕온의 아들인 공화후 왕영과 혼인하여 광릉공 왕면과 딸 1명을 두었으며, 남편과는 7촌 숙질 간의 근친혼 관계였다. -
1094년 출생 -
이븐 주르
이븐 주르는 중세 이슬람 시대 안달루시아의 저명한 의학자로, 임상 의학에 헌신하고 실험적 방법론을 통해 의학 발전에 기여했으며, 그의 저서와 업적은 후대 의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
1094년 출생 -
정습명
정습명은 고려 인종 때 국자감 사업을 지내고 묘청의 난 토벌에 참여했으며 김부식 등과 함께 《삼국사기》 편찬에 참여한 문신으로, 의종 즉위 후 간언을 이어갔으나 왕의 미움을 사 자결했다. -
1118년 사망 -
알렉시오스 1세
알렉시오스 1세 콤네누스는 콤네누스 왕조를 창시하여 동로마 제국을 안정시키고 영토를 회복했으며, 제1차 십자군을 이용하여 셀주크 제국의 위협을 억제했으나, 십자군과의 복잡한 관계와 만년의 족벌주의, 후계 문제로 비판받았다. -
1118년 사망 -
필리프 (스웨덴)
필리프는 할스텐 국왕의 아들이자 잉에 1세의 사촌으로, 잉에 2세와 공동 군주로서 1110년경부터 1118년까지 스웨덴을 통치하며 평화로운 통치를 했다고 전해진다.
2. 생애
예종의 왕비로, 1108년(예종 3년)에 입궁하여 연덕궁주(延德宮主)에 봉해졌고, 1109년(예종 4년) 인종을 낳았다. 1114년(예종 9년) 왕후에 책봉되었으나, 1118년(예종 13년) 음력 9월 5일에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성품이 슬기롭고 부드러워 예종의 총애를 받았다. 순덕왕후가 병에 걸리자 예종은 직접 약과 음식을 가져다주었고, 사망했을 때는 신봉문(神鳳門) 밖까지 직접 나가 장례 행렬을 배웅하였다. 예종은 순덕왕후가 죽은 후에도 여러 번 그녀의 혼당을 찾아가 슬퍼했다.
사망 후 시호는 순덕왕후(順德王后)로 정해졌고, 아들 인종이 즉위하면서 문경왕태후(文敬王太后)로 추존되었다. 훗날 자정(慈靖)이라는 시호가 추가되었다. 능은 수릉이다.
2.1. 가계와 출생
본관은 인천이며, 이자겸의 둘째 딸로 1094년 음력 3월 28일에 태어났다. 인천 이씨 집안은 문종 때부터 왕후를 배출한 유력한 가문이었다. 훗날 아들 인종이 왕위에 오른 뒤, 인종의 외조부인 이자겸은 자신의 다른 두 딸(문경왕태후의 동생들)을 인종과 결혼시켜 더욱 강력한 권력을 가지려고 하였다. 하지만 이자겸이 축출된 후 인종에게 시집간 두 딸은 인종의 이모가 되는 이유로 왕후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2.2. 왕비 책봉과 궁중 생활
이자겸의 둘째 딸로, 본관은 인천이다. 1094년 음력 3월 28일에 태어났다. 1108년(예종 3년), 15세의 나이로 입궁하여 연덕궁주(延德宮主)에 봉해지고 연덕궁(延德宮)에서 살았다. 1109년(예종 4년) 사제에서 원자(훗날의 인종)를 낳았다. 왕은 아들이 태어난 것을 알고 사자를 보내 조서를 내리고 은기, 비단, 말, 포목, 곡식을 하사하며 그녀에게 경의를 표하는 표(表)를 올렸다.
1114년(예종 9년), 정식으로 왕비에 책봉되었다. 예종은 첫 번째 부인이 죽은 후 매우 슬퍼했고, 순덕왕후와 결혼한 후 그녀의 순종적이고, 지적이고, 현명하고, 부드럽고 온화한 성격 때문에 그녀를 매우 사랑하고 총애했다고 한다. 순덕왕후의 어머니인 최씨는 "조선국대부인"(朝鮮國大夫人)으로, 할머니인 김씨는 "통의국대부인"(通儀國大夫人)으로 불렸다.
채봉문에 따르면, 순덕왕후는 입궁 후 부부 화합의 본보기를 보였고, 사적인 요구를 한 적이 없으며, 대대로 아들을 낳았다. 또한 수탉이 울면 남편에게 일어나라고 충고하며 남편을 보살피는 덕으로 칭찬을 받았다.
2.3. 죽음과 사후
성품이 슬기롭고 부드러워 예종이 무척 사랑했다고 한다. 순덕왕후가 병석에 눕자 예종이 직접 약과 음식을 가져왔고, 1118년(예종 13년) 음력 9월 5일에 사망했을 때에는 직접 신봉문(神鳳門) 밖까지 나와 장례행렬을 배웅하기도 하였다. 예종은 그녀가 죽고난 후 몇 번이나 그녀의 혼당에 행차하였으며, 순덕왕후가 사망한 지 2년이 지난 1120년(예종 15년) 음력 8월에는 그녀의 혼당을 찾아 오래도록 슬퍼했다.
사망 후 시호를 순덕왕후(順德王后)라 하고, 아들 인종이 즉위하여 문경왕태후(文敬王太后)로 추존하였다. 훗날 자정(慈靖)이라는 시호가 추가되었다. 능은 수릉이다.
예종은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직접 신봉문까지 나가 수릉으로 향하는 문경태후의 장례 행렬을 지켜보았다.
그녀를 기리기 위해 예종은 안화사(安和寺)에 문경태후의 초상화를 모시는 혼당(魂堂)을 준비했다고 전해지며, 이듬해 2월부터 8월까지 매번 안화사를 방문했고, 문경태후의 혼례를 올린 혼례궁에도 여러 차례 방문했다. 예종은 신하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굴하지 않고 혼례궁을 찾아 예를 올리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제의 예식은 송나라 임금도 한 적이 있다. 나는 그 일을 본받은 것뿐이다! 그리고 혼당 한번 간다고 무슨 큰일이 나는가?"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했다고 말했다.
1120년, 문경태후의 상을 마치자 예종은 태자, 이자겸과 지방관 이자량을 불러 위로하고 물품을 하사했다.
1146년 남편의 사후, 그들의 외아들 왕해가 즉위했고, 문경태후의 여동생들과 혼인하여 두 명의 여동생이 동시에 며느리가 되었다. 인종 재위 기간 동안 그녀의 형제들은 모두 요직을 차지했다. 그러나 아버지 이자겸이 폐위되어 유배된 후, 그녀의 두 여동생 역시 그 지위에서 쫓겨났다.
1122년 외아들이 즉위한 후 순덕왕후(順德王后)와 문경왕태후(文敬王太后)로 추존되었다. 1140년, 그녀의 시호에 자정(慈靖)이라는 이름이 추가되었다.
3. 가족 관계
4. 평가 및 영향
문경태후는 최고 귀족 가문 출신으로 왕비가 되었고, 훗날 왕위에 오른 아들을 낳았다. 문경태후는 당시 사회에서 요구하는 미덕을 갖춘 삶을 살아 남편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의 결혼으로 이자겸의 권위가 크게 높아졌고, 왕의 총애는 이자겸에게 권력의 기반이 되어, 결국 이자겸이 반역을 도모하는 원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