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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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습명은 고려 시대의 문신으로, 예종, 인종, 의종 3대에 걸쳐 벼슬을 지냈다. 그는 묘청의 난 진압에 참여하고, 시폐 10조 상소를 통해 정치 개혁을 요구했으며, 김부식 등과 함께 《삼국사기》 편찬에 참여했다. 인종의 유지를 받들어 의종을 보필하려 했으나, 의종의 향락을 지적하다 미움을 받아 자결했다. 사후 영일 오천서원에 제향되었으며, 그의 10대손은 정몽주이다.
정습명은 경상북도 영일군(오늘날 포항시) 출신으로, 신라 시대 간관(諫官)을 지낸 정종은(鄭宗殷)의 후손이다. তবে 족보가 전해지지 않아 정확한 가계는 알 수 없다. 정습명은 연일호장(連日戶長)을 지낸 정의경(鄭宜卿)의 후손으로, 그 후손들은 대대로 영일현에서 호장직을 세습했다.
그는 예종, 인종, 의종 3대의 조정에 출사한 중신(重臣)으로 성품이 강직, 쾌활하였고 지, 인, 용을 겸비하였으며 문명(文名)과 기개가 높았다. 또한 직언으로 의종이 스스로 깨닫도록 인도하여 태평성대를 이룩하였다. 동국통감에서는 '습명은 임금의 주위에 이와 같은 소인간신(小人奸臣)의 무리가 에우고 있는 한(限)은 끝끝내 바른 임금의 도리를 찾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마침내 앙약(仰藥) 자결하였으니 그 선견지명(先見之明)을 아무도 따를 수 없는 것이다.'라고 평가하였다.
2. 생애
어려서부터 글을 잘 지었고 학문에 힘써 예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내시(內侍)가 되었다. 〈석죽화(石竹花)〉라는 시로 예종의 특별 천거를 받아 옥당(玉堂)에 제수되었으며, 인종의 총애를 받았다.
인종 초 국자감 사업(國子監司業)으로 유학을 가르쳤으며, 1134년 홍주(洪州) 소태현(蘇泰縣)의 하천 공사를 맡았으나 실패했다. 1135년 묘청과 정지상 등이 서경 천도 좌절에 반발하여 난을 일으키자 토벌대 장수로 출정하였으나 패배하였다. 이후 어사대에서 오랫동안 간관직을 맡아 직언을 서슴지 않아 인종의 신뢰를 얻었고,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지제고 시절에는 낭사(郞舍) 최재 등과 함께 정치의 폐단 10가지를 지적한 시폐십조(時弊十條)를 상소하고 시정을 요구하였으나, 임금의 윤허가 없자 모두 관직을 사임하였다.
인종의 명으로 김부식 등과 함께 삼국사기 편찬에 참여하여 1145년 《삼국사기》 50권을 완성하였다.[6]
인종과 공예태후 임씨(恭睿太后 任氏)가 의종 대신 둘째 아들 대령후(大寧侯) 경(暻)을 태자로 세우려 하자, 장자 상속 원칙을 내세워 이를 막아 인종과 의종의 신뢰를 얻었다.
1147년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가 되었다. 의종 즉위 후 1148년 한림학사(翰林學士)에 발탁되었고, 1149년 좌승선으로 고시관이 되어 과거 시험을 주관하였으며, 다시 추밀원지주사가 되었다. 인종은 정습명에게 아들 의종을 지도할 것을 부탁하였고, 정습명은 의종에게 직언을 아끼지 않았다.
의종이 향락에 빠지자 이를 거침없이 지적하고 질타하여 왕의 미움을 샀다. 1150년 3월 정습명이 병으로 사직하자 왕은 김존중(金存中)에게 임시로 그 직을 대신하게 하였고, 정습명은 그해 3월 21일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사후 영일 오천서원(烏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의종은 훗날 정습명을 그리워하며 그가 살아있었다면 자신이 이 지경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라 탄식하였다고 한다.[3]
2. 1. 가계와 초기 생애
경상북도 영일군(오늘날 포항시)에서 태어났다. 신라 시대에 간관(諫官)을 역임한 정종은(鄭宗殷)의 후손이었으나, 족보가 실전되어 세계(世系)는 알 수 없다. 정종은의 후손 중 정의경(鄭宜卿)이 연일호장(連日戶長)을 지낸 이후 대대로 경상북도 영일현에서 호장직을 세습하였다. 정습명은 정의경의 후손이었다.
일찍부터 성격이 대범하고 기이하였으며, 작은 일에 얽매이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독서에 힘써 글을 잘 지었고, 배우는 데 힘썼다. 예종 때 향공문과(鄕貢文科)에 급제하여 내시(內侍)에 임명되었다.[3] 그 뒤 〈석죽화(石竹花)〉라는 시를 지었는데, 이 시가 널리 알려져 예종에 의하여 특별 천거되어 옥당(玉堂)에 제수되었다.[4] 그 후 인종에게 인격과 학행을 인정받아 인종의 총애를 받았다.
2. 2. 정치 활동과 간관 생활
인종 초 국자감 사업(國子監司業)으로 유학을 가르쳤다. 1134년 안흥정(安興亭) 밑의 조운(漕運)을 쉽게 하기 위해 홍주(洪州) 소태현(蘇泰縣)에 하천 공사를 주관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135년 묘청과 정지상 등이 서경 천도론 좌절에 반발하여 서경에서 궐기하자, 내시지후(內侍祗候)로서 토벌대 장수로 출정하였다. 수군을 이끌고 순화현(順化縣) 남강(南江)에서 묘청 군과 교전하였고, 이어 병선판관(兵船判官)이 되어 상장군 이녹천 등과 함께 묘청 군에 항전하였으나 대패하였다.[1]
이후 어사대에 보직되어 오랫동안 간관직에 있으면서 직간을 서슴지 않아 인종의 신뢰를 얻었고, 이후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1]
2. 2. 1. 묘청의 난 진압
인종 초 국자감 사업(國子監司業)으로 유학을 가르쳤다. 1134년 안흥정(安興亭) 밑의 조운(漕運)을 쉽게 하기 위해 홍주(洪州) 소태현(蘇泰縣)에 하천 공사를 주관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135년 묘청과 정지상 등이 서경 천도론 좌절에 반발하여 서경에서 궐기하자, 내시지후(內侍祗候)로서 토벌대 장수로 출정하였다. 수군을 이끌고 순화현(順化縣) 남강(南江)에서 묘청 군과 교전하였고, 이어 병선판관(兵船判官)이 되어 상장군 이녹천 등과 함께 묘청 군에 항전하였으나 대패하였다.[1]
이후 어사대에 보직되어 오랫동안 간관직에 있으면서 직간을 서슴지 않아 인종의 신뢰를 얻었고, 이후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1]
2. 2. 2. 시폐 10조 상소와 직간
그 뒤 지제고에 있을 때 낭사(郞舍) 최재와 재상인 김부식, 임원개, 이중, 최주 등과 함께 정치의 폐단 10가지를 지적한 시폐십조(時弊十條)를 임금께 상소하고 사흘 동안 편전 문 앞에 엎드려 시정을 권고하였으나 임금의 윤허를 기다렸으나 아무 회답이 없으므로 모두 관직을 사임하고 나가지 아니하였다.[5]
그러자 임금은 집주관(執奏官)을 파(罷)하고 이 집주관의 소관사무의 권한을 덜어 내시별감(內侍別監) 및 내시원 별고(別庫)의 임무로 대체하였다. 이때 인종은 최재 등을 불러 집주관의 일을 보게 하였는데 정습명만 혼자 궐앞에서 10조를 다 관철하기 위하여 임금께 계속하여 아뢰었고 인종이 이를 종용하였으나 끝내 일어나지 아니하였다. 우상시(右常侍) 최관 등은 정습명과 더불어 상소하는데 혼자만 참여하지 않았는데, 함께 일을 시작하였으나 동참을 거부하여 그를 낮추어 의리없는 사람이라 하였다.[6]
2. 3. 삼국사기 편찬
인종의 명을 받아 김부식, 김효충(金孝忠) 등과 함께 삼국사기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1145년(인종 23년)에 《삼국사기》 50권의 편찬이 완료되었다.[6]
2. 4. 의종과의 갈등과 죽음
그 뒤 인종과 공예태후 임씨(恭睿太后 任氏)가 의종의 재질을 부족하게 판단하여, 그 대신에 둘째 아들인 대령후(大寧侯) 경(暻)을 태자로 세우려 하자, 장자에게 상속되어야 한다는 원칙으로 이를 막기도 하였다. 이로써 인종과 의종으로부터 깊은 신뢰를 얻기도 했다.
1147년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가 되었다. 그 뒤 의종이 즉위하자 1148년(의종 2년) 한림학사(翰林學士)에 발탁되었고, 1149년 좌승선으로 고시관이 되어 시부(詩賦)로 오광윤(吳光允), 십운시로 조정시(趙挺時) 등을 선발하였고, 다시 추밀원지주사가 되었다. 인종은 죽으며 그에게 아들 의종을 지도할 것을 부탁하였는데, 선왕의 유지가 있다고 하여 아는 것은 말하지 않는 것이 없었으며, 의종이 향락에 빠지자 이를 거침없이 지적, 질타하였다.
왕에 대한 지적이 계속되자 의종은 그를 미워하고 기피하였다. 왕이 그를 꺼리는 데다가 김존중(金存中)과 정함 등은 밤낮으로 그를 헐뜯었다. 1150년 3월 정습명이 병으로 사직하자 왕은 즉시 김존중에게 임시로 그 직을 대신하게 하였다. 왕의 뜻을 알아차린 그는 그해 3월 21일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2. 5. 사후
영일 오천서원(烏川書院)에 제향되었다. 그 뒤 의종 임금이 귀법사(歸法寺)라는 절에 놀러 나갔을 때, 비밀리에 혼자 말을 타고 달려 달영다원(獺嶺茶院)에 가게 되었다. 그러나 따르는 신하가 한 사람도 없자, 임금은 다원의 나무 기둥에 의지하고 서서 거기 있던 사람에게 '만약 습명이 살아 있었다면 내가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하고 탄식하였다.[3]
경상북도 영일군에 묘소가 있었으나 후에 실전되었다. 후손들이 묘소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에 단을 설립하였고, 후에 조선 후기의 정승 유척기가 그의 묘단 근처에 묘단비음기(墓壇碑陰記)를 지었다.[3]
3. 평가
후에 의종은 무신정변으로 폐출되어 쫓겨날 때, 눈물 흘리며 자신에게 바른 말로 간하던 그를 찾았다고 한다.
4. 저서
5. 기타
참조
[1]
서적
고려사
(고려사 저자 정보 부족)
1151-03-21
[2]
서적
고려사
(고려사 저자 정보 부족)
[3]
문서
고려시대 내시 선발
[4]
서적
파한집
[5]
서적
고려사
[6]
문서
최관 등의 참여 거부
[7]
서적
파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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