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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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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인종은 고려 예종의 장남으로, 1122년 14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즉위 초 외척 이자겸의 권력 남용과 이자겸의 난, 척준경의 난을 겪었다. 이후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과 묘청의 난을 겪었으며, 김부식으로 하여금 삼국사기를 편찬하게 하는 등 유교 정치를 강화하고 문화 발전에 기여했다. 1146년 38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장릉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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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 (고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123년, 북송의 외교관 路允迪(왼쪽)가 고려 인종(오른쪽)을 만났다.
이름인종 (仁宗)
왕 구 (王構), 후에 왕 해 (王楷)
인표 (仁表)
묘호인종 (仁宗)
시호극안공효대왕 (克安恭孝大王)
왕위
왕위 계승제17대 고려 국왕
재위 기간1122년 ~ 1146년
즉위1122년
즉위 장소개성 중광전
선대 왕예종
후대 왕의종
생애
출생1109년 10월 29일
출생지개성 순덕왕후의 사저
사망1146년 4월 10일 (36세)
사망 장소개경 보화궁
능묘장릉 (長陵)
가족 관계
부왕예종
모후순덕왕후
배우자폐비 연덕궁주 (1124년 결혼, 1126년 폐출)
폐비 복창원주 (1125년 결혼, 1126년 폐출)
공예왕후 (1126년 결혼, 1146년 사망)
선평왕후 (1127년 결혼, 1146년 사망)
자녀아들: 왕현, 왕경, 왕호, 왕충희, 왕탁
딸: 승경궁주, 덕녕궁주, 창락궁주, 영화궁주

2. 생애

1109년, 예종의 장남으로 태어나, 1115년(예종 10년) 음력 2월, 왕태자로 책봉되었다.[30] 1122년 음력 4월 예종의 뒤를 이어 14살에 왕위를 이었다. 나이가 어린 것이 염려되었으나 외조부인 평장사 이자겸이 옹립하였다.[30]

==== 이자겸의 난과 척준경의 몰락 (1122년 ~ 1127년) ====

이자겸은 인종 즉위 초 중서문하성을 통솔하는 최고 재상(문하시중, 정1품)으로서 정계를 장악했다.[7][8][9] 1122년 말, 이자겸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포(蒲)와 혜(惠) 두 왕자를 유배보내고, 한안인을 암살했으며, 그의 추종자 수백 명[10], 특히 단주 한(Tanju Han)과 청안 임(Cheongan Im) 가문의 핵심 구성원 수십 명을 추방하거나 강등시켰다.[3] 이자겸은 무관 출신인 척준경등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다.[3][8]

이자겸은 세 재상(삼성)을 모두 관할하는 특별 영의정이 되었으며, 이부의 수장(판사) 직책도 유지했고, 공(公)에 봉해졌다. 외교적으로는 김부식과 연대하여 금에 대한 복종을 옹호했다.[11] 1124년, 이자겸은 자신의 딸 중 한 명을 인종에게 시집보냈고, 고위 관직을 자신의 충신과 친척들로 채웠다.[1]

이자겸은 왕위를 찬탈하려 했고, '십팔자' 예언을 이용하여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다.[1] 그는 자신의 조상들의 묘에서 왕실 의례 음악을 연주하고 자신의 생일을 왕의 즉위 기념일(인수절)로 기념할 계획을 세웠으나 김부식 등의 반대에 부딪혔다.[16]

1126년, 이자겸이 마침내 반란을 일으켜 인종을 시해하려 했지만, 그때에도 남편을 구하려는 왕후의 계략으로 실패했고, 이자겸은 모든 권력과 재산, 관작을 몰수당하고 국왕 독살 혐의로 영광군으로 유배되었다. 반란은 끝났지만, 국왕의 목숨을 구한 왕후는 전에 폐위된 언니와 마찬가지로 폐비가 되었다.[30] 음모자들은 궁궐을 점령하고 이자겸의 충신 몇 명을 살해했으나, 척준경의 군대와 이자겸의 아들이 이끄는 무장 승려들에게 포위되었다. 척준경은 궁궐에 불을 지르라고 명령했고, 궁궐의 대부분이 불탔다. 인종은 이자겸에게 양위를 제안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인종은 이자겸의 집에서 생활했고 그의 다른 딸과 결혼했다. 그러나 귀족 세력들이 연합하여 이자겸을 몰아내려 했고, 인종, 이공수, 김부식 등의 개입으로 1126년 5월, 이자겸과 그의 가족은 척준경의 군인들에게 체포되었다.[3] 이자겸은 전라도로 유배되었고 나중에 참수되었다.[1] 1127년, 척준경은 강등되어 유배되었다.[3] 1127년에는 각 지방의 주와 현에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에 힘썼다. 이 해, 공예왕후 사이에 의종이 태어났다.

====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과 묘청의 난 (1127년 ~ 1136년) ====

이자겸의 난 이후, 인종서경(현재의 평양) 출신 승려 묘청의 주장에 따라 서경 천도를 추진하려 했다.[17] 묘청은 풍수지리설을 내세워 서경으로 천도하면 금나라를 정벌하고 황제를 칭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21] 그는 인종에게 황제를 칭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며, "오만한 금나라"를 공격할 것을 촉구했다.[21] 이와 같은 취지의 건의서가 정지상윤언이에 의해 인종에게 제출되었다.[25]

묘청은 성스러운 인물이라는 평판을 얻었고 "듣는 사람을 쉽게 매료시키는" 연설가였다.[3] 그의 가르침은 백성들과 국왕을 포함한 일부 엘리트들 사이에서 점점 더 인기를 얻었다. 정치적으로 평양 세력은 경주 김씨와 한안인/청안 임씨 세력의 반대에 직면했다. 그의 지지자로는 한안인 세력의 오랜 적이었으며, 당시 감찰의 수장이었던 최홍재, 그리고 유명한 장군 윤관의 아들이자 영향력 있는 유학자였으며 정지상의 측근이었던 윤언이 등이 있었다.[3][18]

그러나 개경 귀족 세력의 중심인 김부식은 묘청의 주장에 강력히 반대하며 인종에게 개경에 머물 것을 설득했다. 묘청은 최근 개경에서 일어난 소란에 대한 풍수지리적 설명을 제시하고 그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했다. 즉, 동쪽 수도(개경) 주변의 풍수지리적 기운이 쇠퇴하고 있으므로, 같은 기운이 강하고 "활력이 넘치는" 서경으로 궁궐을 옮겨야 한다는 것이었다.[21] 태조의 훈요 10조는 풍수지리적 고려를 정부 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로 받아들였고, 서경에 특별한 중요성을 부여했다. 1129년 인종의 칙령은 "정치를 부흥시키고 [...] 영원히 후세에 행복을 가져다주기 위해" 평양에 궁궐 (대화궁)을 건설하라고 명령했다. 이 궁궐은 1132년에 완공되었고 인종은 그곳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18]

1135년, 묘청은 서경에서 난을 일으켰으나,[21] 김부식이 이끄는 관군에 의해 진압되었다.[18][21] 묘청은 자신의 군대에 의해 암살되었고, 1136년 초에 평양은 정부군에게 함락되었다.[18][21]

==== 유교 정치 강화와 삼국사기 편찬 ====

묘청의 난이 진압된 후, 김부식은 1142년 은퇴할 때까지 고려 정부를 이끌었다.[5] 1140년대 초, 고려는 금나라와 여러 차례 외교 사절을 교환했고, 1142년 인종은 금나라의 속국으로 공식 책봉되었다.[26]

1143년 인종은 지방 행정 강화를 위해 14명의 지방 관리를 임명했다. 예종과 인종의 개혁으로 고려 주, 군의 약 3분의 1이 중앙 정부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1]

1135년(인종 13년) 묘청이 반란을 일으키니, 이것이 묘청의 난이다. 김부식을 서경정토대장(西京征討大將)으로 보내어 이듬해 평정하였다. 인종은 또한 김부식에게 《삼국사기》를 편찬할 것을 명하여 1145년 완성을 보았다.

1146년(인종 23년) 음력 2월 향년 38세에 태자에게 황위를 물리고 병으로 죽었다. 능은 경기도 개풍군 청교면에 위치한 장릉(長陵)이다.

인종과 임씨(공예태후) 모두 맏아들 현태자에 대해 우려를 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두 사람 모두 그의 통치 능력을 의심했으며, 공예태후는 둘째 아들 경태자를 다음 왕으로 선호했다.[28]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종이 죽자 현태자는 고려의 제18대 국왕으로 즉위했다.[29]

2. 1. 이자겸의 난과 척준경의 몰락 (1122년 ~ 1127년)

이자겸은 인종 즉위 초 중서문하성을 통솔하는 최고 재상(문하시중, 정1품)으로서 정계를 장악했다.[7][8][9] 1122년 말, 이자겸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포(蒲)와 혜(惠) 두 왕자를 유배보내고, 한안인을 암살했으며, 그의 추종자 수백 명[10], 특히 단주 한(Tanju Han)과 청안 임(Cheongan Im) 가문의 핵심 구성원 수십 명을 추방하거나 강등시켰다.[3] 이자겸은 무관 출신인 척준경등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다.[3][8]

이자겸은 세 재상(삼성)을 모두 관할하는 특별 영의정이 되었으며, 이부의 수장(판사) 직책도 유지했고, 공(公)에 봉해졌다. 외교적으로는 김부식과 연대하여 금에 대한 복종을 옹호했다.[11] 1124년, 이자겸은 자신의 딸 중 한 명을 인종에게 시집보냈고, 고위 관직을 자신의 충신과 친척들로 채웠다.[1]

이자겸은 왕위를 찬탈하려 했고, '십팔자' 예언을 이용하여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다.[1] 그는 자신의 조상들의 묘에서 왕실 의례 음악을 연주하고 자신의 생일을 왕의 즉위 기념일(인수절)로 기념할 계획을 세웠으나 김부식 등의 반대에 부딪혔다.[16]

1126년, 이자겸은 척준경과 함께 난을 일으켰다.[30] 음모자들은 궁궐을 점령하고 이자겸의 충신 몇 명을 살해했으나, 척준경의 군대와 이자겸의 아들이 이끄는 무장 승려들에게 포위되었다. 척준경은 궁궐에 불을 지르라고 명령했고, 궁궐의 대부분이 불탔다. 인종은 이자겸에게 양위를 제안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인종은 이자겸의 집에서 생활했고 그의 다른 딸과 결혼했다. 그러나 귀족 세력들이 연합하여 이자겸을 몰아내려 했고, 인종, 이공수, 김부식 등의 개입으로 1126년 5월, 이자겸과 그의 가족은 척준경의 군인들에게 체포되었다.[3] 이자겸은 전라도로 유배되었고 나중에 참수되었다.[1] 1127년, 척준경은 강등되어 유배되었다.[3]

2. 2.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과 묘청의 난 (1127년 ~ 1136년)

이자겸의 난 이후, 인종서경(현재의 평양) 출신 승려 묘청의 주장에 따라 서경 천도를 추진하려 했다.[17] 묘청은 풍수지리설을 내세워 서경으로 천도하면 금나라를 정벌하고 황제를 칭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21] 그는 인종에게 황제를 칭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며, "오만한 금나라"를 공격할 것을 촉구했다.[21] 이와 같은 취지의 건의서가 정지상윤언이에 의해 인종에게 제출되었다.[25]

묘청은 성스러운 인물이라는 평판을 얻었고 "듣는 사람을 쉽게 매료시키는" 연설가였다.[3] 그의 가르침은 백성들과 국왕을 포함한 일부 엘리트들 사이에서 점점 더 인기를 얻었다. 정치적으로 평양 세력은 경주 김씨와 한안인/청안 임씨 세력의 반대에 직면했다. 그의 지지자로는 한안인 세력의 오랜 적이었으며, 당시 감찰의 수장이었던 최홍재, 그리고 유명한 장군 윤관의 아들이자 영향력 있는 유학자였으며 정지상의 측근이었던 윤언이 등이 있었다.[3][18]

그러나 개경 귀족 세력의 중심인 김부식은 묘청의 주장에 강력히 반대하며 인종에게 개경에 머물 것을 설득했다. 묘청은 최근 개경에서 일어난 소란에 대한 풍수지리적 설명을 제시하고 그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했다. 즉, 동쪽 수도(개경) 주변의 풍수지리적 기운이 쇠퇴하고 있으므로, 같은 기운이 강하고 "활력이 넘치는" 서경으로 궁궐을 옮겨야 한다는 것이었다.[21] 태조의 훈요 10조는 풍수지리적 고려를 정부 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로 받아들였고, 서경에 특별한 중요성을 부여했다. 1129년 인종의 칙령은 "정치를 부흥시키고 [...] 영원히 후세에 행복을 가져다주기 위해" 평양에 궁궐 (대화궁)을 건설하라고 명령했다. 이 궁궐은 1132년에 완공되었고 인종은 그곳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18]

1135년, 묘청은 서경에서 난을 일으켰으나,[21] 김부식이 이끄는 관군에 의해 진압되었다.[18][21] 묘청은 자신의 군대에 의해 암살되었고, 1136년 초에 평양은 정부군에게 함락되었다.[18][21]

2. 3. 유교 정치 강화와 삼국사기 편찬

묘청의 난이 진압된 후, 김부식은 1142년 은퇴할 때까지 고려 정부를 이끌었다.[5] 1140년대 초, 고려는 금나라와 여러 차례 외교 사절을 교환했고, 1142년 인종은 금나라의 속국으로 공식 책봉되었다.[26]

1143년 인종은 지방 행정 강화를 위해 14명의 지방 관리를 임명했다. 예종과 인종의 개혁으로 고려 주, 군의 약 3분의 1이 중앙 정부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1]

1145년 말 또는 1146년 초, 인종은 김부식에게 삼국과 통일 신라의 역사를 기록한 삼국사기 편찬을 명했다. 김부식은 사마천사기 등 중국 역사서를 참고하여 14명의 저술가 팀을 이끌고 한국사에 대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자료를 완성했다.[27]

3. 국제 관계

1122년 초, 거란이 이끄는 는 급부상한 여진이 이끄는 금의 태조 군대에 의해 사실상 멸망했다.[4] 많은 수의 거란인들이 고려로 도망쳤다.[4] 북송의 거란에 대한 작전은 실패했으며, 만리장성 남쪽의 잃어버린 송나라 영토(연운 16주)는 금이 요나라를 정복한 후에야 회복되었다.[5]

1122년, 거란이 이끄는 요나라는 급부상한 여진족이 이끄는 금의 태조 군대에 의해 사실상 멸망했다. 많은 수의 거란인들이 고려로 도망쳤다.[4] 북송의 거란에 대한 작전은 실패했으며, 만리장성 남쪽의 잃어버린 송나라 영토(연운 16주)는 금이 요나라를 정복한 후에야 회복되었다. 1123년 조약은 금의 우위를 공식화했는데, 송나라의 연례 조공은 은 20만 과 비단 20만 필로 정해졌다.[5] 거란에 대한 부진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송 정부는 연경 (오늘날의 베이징)의 수복의 중요성과 자체 군사력에 대한 과대평가를 했다.[6] 이후 금나라에 밀려 남쪽으로 이동한 송나라(남송)와 고려의 관계는 소원해졌다.

는 거란이 이끄는 나라였으나, 여진족이 이끄는 금의 태조 군대에 의해 1122년 초에 사실상 멸망했다.[4] 많은 수의 거란인들이 고려로 도망쳤다.[4] 금은 만리장성 남쪽의 잃어버린 송나라 영토(연운 16주)를 회복하였고, 1123년 조약을 통해 송나라로부터 은 20만 과 비단 20만 필의 연례 조공을 받기로 하며 우위를 점했다.[5] 고려는 금나라의 압력에 굴복하여 사대 관계를 맺었으나, 묘청 등 일부 세력은 금나라 정벌을 주장하기도 했다.

인종 대의 고려는 북방 민족과의 관계에서 실리적인 외교 노선을 추구했다. 초기에는 송나라와 전통적인 우호 관계를 유지하려 했으나, 여진족의 금나라가 성장하면서 금나라와 사대 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러한 실리 외교는 이자겸김부식 등 여러 정치 세력의 지지를 받았다. 특히 이자겸은 금나라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려 했으며, 김부식은 송나라와의 관계보다는 금나라와의 관계를 중시하는 현실적인 외교 노선을 주장했다.

3. 1. 거란, 요나라와의 관계

1122년 초, 거란이 이끄는 는 급부상한 여진이 이끄는 금의 태조 군대에 의해 사실상 멸망했다.[4] 많은 수의 거란인들이 고려로 도망쳤다.[4] 북송의 거란에 대한 작전은 실패했으며, 만리장성 남쪽의 잃어버린 송나라 영토(연운 16주)는 금이 요나라를 정복한 후에야 회복되었다.[5]

3. 2. 송나라와의 관계

1122년, 거란족이 이끄는 요나라는 급부상한 여진족이 이끄는 금의 태조 군대에 의해 사실상 멸망했다. 많은 수의 거란인들이 고려로 도망쳤다.[4] 북송의 거란에 대한 작전은 실패했으며, 만리장성 남쪽의 잃어버린 송나라 영토(연운 16주)는 금이 요나라를 정복한 후에야 회복되었다. 1123년 조약은 금의 우위를 공식화했는데, 송나라의 연례 조공은 은 20만 과 비단 20만 필로 정해졌다.[5] 거란에 대한 부진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송 정부는 연경 (오늘날의 베이징)의 수복의 중요성과 자체 군사력에 대한 과대평가를 했다.[6]

이후 금나라에 밀려 남쪽으로 이동한 송나라(남송)와 고려의 관계는 소원해졌다.

3. 3. 금나라와의 관계

는 거란이 이끄는 나라였으나, 여진족이 이끄는 금의 태조 군대에 의해 1122년 초에 사실상 멸망했다.[4] 많은 수의 거란인들이 고려로 도망쳤다.[4] 금은 만리장성 남쪽의 잃어버린 송나라 영토(연운 16주)를 회복하였고, 1123년 조약을 통해 송나라로부터 은 20만 과 비단 20만 필의 연례 조공을 받기로 하며 우위를 점했다.[5] 고려는 금나라의 압력에 굴복하여 사대 관계를 맺었으나, 묘청 등 일부 세력은 금나라 정벌을 주장하기도 했다.

4. 가족 관계

이자겸의 셋째 딸은 인종의 어머니의 여동생으로, 폐비 이씨(1139년 몰)이다.[34] 이자겸의 넷째 딸 역시 인종의 어머니의 여동생으로, 폐비 이씨(1195년 몰)이다.[34] 이들은 인종의 이모이자 왕비였으나, 이자겸의 난 이후 모두 폐위되었다.

공예왕후 임씨(1109년 ~ 1183년)는 중서령 임원후의 딸이다.[34] 공예왕후의종, 왕경, 왕호(명종), 왕충희, 왕탁(신종) 등 다섯 왕자와 승경궁주, 덕녕궁주, 창락궁주, 영화궁주 등 네 공주를 낳았다.

선평왕후 김씨(1178년 몰)는 병부상서 김선의 딸이다.[34]

4. 1. 부모

예종은 1079년에 숙종과 명의왕후 유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1122년에 사망했다.[34] 순덕왕후 이씨는 이자겸과 변한국대부인 최씨 사이에서 1094년에 태어나 1118년에 사망했다.[34] 순덕왕후 이씨는 예종 9년(1114년) 황후로 책봉되었다.

4. 2. 왕후

이자겸의 딸들인 폐비 이씨폐비 이씨인종 4년(1126년)에 폐위되었다.[34] 폐비 이씨는 1139년에, 폐비 이씨는 1195년에 사망하였다.[34]

공예왕후 임씨임원후와 진한국대부인 이씨의 딸로 1109년에 태어나 1183년에 사망하였다. 선평왕후 김씨는 김선의 딸로, 사망년도는 미상이나 1179년에 사망하였다.

생몰년부모비고
폐비폐비 이씨
廢妃 李氏
연덕궁주
延德宮主
미상 - 1139년이자겸
李資謙
변한국대부인 최씨
卞韓國大夫人 崔氏[34]
이자겸의 3녀
인종 4년(1126년) 폐위
폐비폐비 이씨
廢妃 李氏
복창원주
福昌院主
미상 - 1195년이자겸
李資謙
변한국대부인 최씨
卞韓國大夫人 崔氏[34]
이자겸의 4녀
인종 4년(1126년) 폐위
제1비공예왕후 임씨
恭睿王后 任氏
공예태후
恭睿太后
1109년 - 1183년임원후
任元厚
진한국대부인 이씨
辰韓國大夫人 李氏
제2비선평왕후 김씨
宣平王后 金氏
미상 - 1179년김선
金璿
미상


4. 3. 왕자

인종에게는 공예왕후를 비롯한 여러 왕비가 있었으며, 공예왕후는 5명의 왕자와 4명의 공주를 낳았다.[35][36][37][38] 왕자들은 다음과 같다.

이름생몰년생모배우자비고
의종
懿宗
왕현(晛)
1127년 - 1173년공예왕후장경왕후 김씨
장선왕후 최씨
제18대 국왕
대령후 왕경(暻)1130년 - 미상공예왕후김씨
명종
明宗
익양공 왕호(晧)
1131년 - 1202년공예왕후의정왕후 김씨제19대 국왕
왕충희(冲曦)미상 - 1183년공예왕후미혼원경국사
신종
神宗
평량공 왕탁(晫)
1144년 - 1204년공예왕후선정왕후 김씨제20대 국왕


4. 4. 왕녀

예종과 순덕왕후의 딸들이다.[39][40][41][42][43][44]

이름생몰년생모배우자비고
승경궁주미상공예왕후공화후 왕영의종 11년(1157년) 이전 사망
덕녕궁주? ~ 1192년공예왕후강양공 왕감
창락궁주? ~ 1216년공예왕후신안후 왕성고종의 외조모
영화궁주1141년 ~ 1208년공예왕후소성후 왕공


5. 평가

인종은 유교적 소양을 갖춘 군주로 평가되며, 어려서부터 재능과 기예가 있어 음률과 서화에도 능하였다. 국가 재정을 절약하여 환관들을 감축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으며, 문운을 일으키고 김부식 등에 명하여 《삼국사기》를 편찬하게 하는 등 문화 발전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외척 세력과 서경 천도 운동에 휘둘리는 등 정치적 리더십은 부족했다는 비판도 있다. 특히 묘청의 난 진압 과정에서 김부식을 비롯한 개경 문벌 귀족 세력에 지나치게 의존했다는 지적이 있다.

6. 기타

2003년부터 2004년까지 방영된 KBS 드라마 《무인시대》에서 이성호가 인종을 연기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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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문서 고려 숙종의 증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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