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겸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이자겸은 고려 문종의 장인 이자연의 손자이자 예종의 장인으로, 왕실과의 인척 관계를 통해 고위 관직에 올랐다. 예종 사후 어린 외손자 인종을 옹립하고 섭정하며 권력을 장악, 한양공, 조선국공을 칭하며 권세를 누렸다. 두 딸을 인종에게 시집보내 권력을 더욱 강화하고, 송나라에 섭정 임명을 요청하는 등 월권 행위를 했다. 인종은 이자겸을 제거하려 했고, 이자겸의 난이 발생했으나 척준경의 배반으로 영광으로 유배되어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고려의 국공 - 목종 (고려)
목종은 고려의 제7대 왕으로, 헌애왕후의 섭정 하에 전시과 개혁과 국방 강화에 힘썼으나, 권력 남용과 왕위 찬탈 시도 속에 폐위되어 살해당하며 그의 죽음은 전쟁의 빌미가 되었다. - 고려의 국공 - 정간왕
현종과 원혜왕후의 아들이자 문종의 동생인 정간왕은 개성국공에 봉해진 후 평양공으로 진봉되어 고려 왕실에 공헌했으나, 사후 모반 사건으로 아들이 유배되기도 했으며, 딸은 순종의 왕비가 되었다. - 고려의 문벌귀족 - 윤관
고려 시대 윤관은 문종 때 과거에 급제한 무신이자 정치가로, 숙종 대 왕권 강화 정책을 추진하고 여진 정벌을 주도하여 동북 9성을 축조했으나, 정치적 음모로 실각한 후 그의 묘는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 고려의 문벌귀족 - 김부식
신라 왕족 후예인 김부식은 고려 중기 문신이자 학자로,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진압에 공을 세웠으며 《삼국사기》를 편찬했다. - 고려의 사도 - 오연총
오연총은 고려 예종 때 요나라와 송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고 여진 정벌에서 윤관의 부원수로 활약했으며, 신기군 징발 조건 완화와 서경 궁궐 창건 반대 등의 정치적 행보를 보이다가 문하시중평장사를 지내고 문양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 고려의 사도 - 고려 양헌왕
고려 양헌왕은 고려 문종의 장남으로 조선공에 봉해졌으며 숙종 때 양헌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이자연의 외손자이며 1099년에 사망하여 제후왕으로 추존되었다.
이자겸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인물 정보 | |
이름 | 이자겸 |
한글 표기 | 이자겸 |
한자 표기 | 李資謙 |
로마자 표기 | Yi Jagyeom |
다른 이름 | 알려진 바 없음 |
직업 | 정치인 군인 시인 (추가 정보) |
활동 기간 | ?–1127 |
시대 | 예종 인종 |
업적 | 알려진 바 없음 |
배우자 | 해주 최씨 부인 (1094년 이전 결혼) |
자녀 | 6남 4녀 |
가문 | 인주 이씨 |
아버지 | 이호 |
어머니 | 광산 김씨 부인 |
생애 | |
출생 | 알려진 바 없음 |
출생지 | 알려진 바 없음 |
사망일 | 1127년 1월 19일 |
사망 장소 | 전라남도 영광군 법성포 고려 |
묘소 | 알려진 바 없음 |
가계 | |
부 | 이호 |
모 | 광산 김씨 (통의국대부인) |
배우자 | 변한국대부인 최씨 |
자녀 | 6남 4녀 |
딸 | 2녀: 문경태후 3녀: 폐비 이씨 4녀: 폐비 이씨 |
2. 생애
예종이 죽고 외손자인 인종이 즉위하면서 이자겸은 권력을 장악했다. 인종은 이자겸의 힘을 의지하여 왕위에 올랐고, 정사를 모두 그에게 맡겼다. 이자겸은 이 기회를 틈타 권력을 독식하기 위해 정적 제거에 나섰다.[18] 1122년 12월에는 대방공 왕보를 추대하려 했다는 혐의로 한안인을 제거하고, 관련자 50여 명을 유배 보냈다.[20]
1124년에는 스스로 조선국공(朝鮮國公)이라 칭하고, 왕자나 왕비에게만 설치하는 숭덕부(崇德府)를 설치하여 자신을 왕태자와 동등한 위치에 놓았다.[18] 또한, 친족들을 요직에 앉히고 뇌물을 받는 등 부패 행위를 일삼았다.[16]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자신을 지군국사(知軍國事)로 칭하며 섭정 임명을 요청하기도 했다.[2]
1115년 건국한 금나라가 1125년 요나라를 멸망시키자, 고려 조정은 1126년 음력 3월 금나라와의 관계 설정에 대해 논의했다.[1] 대신들은 금나라를 상국으로 섬기는 것에 반대했으나, 이자겸은 척준경과 함께 금나라의 강성함을 이유로 사대를 주장했다.[1] 결국 음력 4월, 금나라에 사신을 보내 군신관계를 맺었다.[1]
이자겸의 권력이 강해지자 인종은 그를 제거하려 했다. 1126년 2월, 인종은 측근들과 군사를 동원해 이자겸 세력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이자겸은 척준경을 시켜 궁궐을 장악하고, 인종을 자신의 집에 연금했다.[26] 인종은 이자겸에게 양위하겠다는 뜻을 밝혔으나, 이자겸은 여론을 의식하여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자겸은 '십팔자가 왕이 된다'는 도참설을 믿고 인종을 독살하려 했으나, 왕비가 된 넷째 딸의 도움으로 실패했다.[27] 한편, 인종은 척준경과 이자겸 사이를 이간질했고, 척준경은 결국 인종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이자겸 제거에 나섰다.
2. 1. 생애 초반
이자겸은 개경에서 태어났으며, 할아버지는 문종의 장인이었던 이자연이고, 아버지는 이호였다. 이자겸은 왕족과의 인척 관계 덕분에 음서를 통해 과거 시험을 면제받고 관직에 진출했다. 아버지 이호는 자신의 둘째 딸을 순종에게 시집보내 왕실과의 관계를 더욱 굳건히 했다. 이자겸은 왕후의 오빠라는 이유만으로 고위 관직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순종이 즉위한 지 3개월 만에 사망했고, 왕후였던 이자겸의 누이가 국왕 사후 노비와의 부적절한 관계가 발각되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관직을 잃었다.탄핵 이후, 이자겸은 한동안 관직 복귀에 어려움을 겪다가 1107년 자신의 둘째 딸을 예종(1105년~1122년)에게 시집보냈다. 이 결혼은 예종이 여진에 대한 군사 작전에 반대하는 조정 대신들을 달래기 위한 노력이었는데, 이자겸의 장인인 최사추가 고려에서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고, 이자겸의 매형인 김인존은 고려 조정의 유력 인사로서 여진과의 전쟁을 맹렬히 반대했기 때문이다. 1109년, 이자겸의 딸은 아들을 낳았고, 이 아들이 나중에 고려의 17대 국왕인 인종(1122년~1146년)으로 즉위하게 된다.
1122년, 예종이 사망한 후, 이자겸은 자신의 어린 외손자를 고려의 다음 국왕으로 옹립했다. 이후 이자겸은 어린 국왕의 섭정으로서 거의 절대적인 권력을 누렸다. 1122년, 이자겸은 스스로에게 한양공(漢陽公)이라는 칭호를 부여했고, 1124년에는 조선국공(朝鮮國公)으로 자칭했다.[1]
이자겸의 막대한 권력은 두 딸을 인종에게 시집보낸 후 더욱 커졌으며,[1] 이는 그의 부패를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그는 왕자나 왕후에게 주어지는 숭덕부(崇德府)를 스스로 설치하여 자신을 태자나 왕후와 동등한 위치에 놓았다. 어느 날, 이자겸은 인종과 상의 없이 사신을 송나라에 파견하여 국왕의 섭정(知軍國事) 임명을 요청했고, 이후 인종에게 사후 승인을 요구했다.[2]
2. 1. 1. 출생과 가계 배경
이자겸은 개경에서 고려 문종의 장인이자 문하시중을 지낸 이자연의 손자이자 상서좌복야 이호와 통의국대부인(通義國大夫人) 김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경원 이씨 집안은 고려 귀족 중에 가장 힘있는 외척으로, 그의 가계는 그가 태어날 무렵에 이미 고려의 권세가로 발돋움하고 있었다.[15]이자겸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15]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이호 | 호부낭중 역임 |
할아버지 | 이자연 | 문종의 장인, 문하시중 역임 |
할머니 | 계림국대부인 경주 김씨 | 김인위의 딸 |
어머니 | 통의국대부인 광산 김씨 | 김정준의 딸 |
부인 | 변한국대부인 해주 최씨 | 최사추의 둘째 딸, 해동공자 최충의 손녀 |
이자겸은 왕족과 인척 관계였기에 음서를 통해 과거 시험을 면제받고 관직에 나아갔다.
2. 1. 2. 음서와 관직 임용 초기
문종의 장인이자 문하시중을 지낸 이자연의 손자이자 이호의 아들로 태어난 이자겸은 명문가 출신이었다. 이자겸은 음서로 벼슬길에 올라 합문지후에 임명되었다.[15] 아버지 이호는 자신의 딸을 순종에게 시집보내 외척이 되었고, 이자겸은 왕비의 오빠라는 이유로 과거 시험 없이 요직에 임명되었다.[15] 그러나 순종이 즉위 3개월 만에 사망하고, 순종의 왕비였던 이자겸의 누이 장경궁주가 노비와 간통한 사실이 발각되어 이자겸도 관직에서 쫓겨났다.[15]헌종 재위 기간에는 사촌 이자의가 숙종과 대립하다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파직 후 한동안 벼슬에 오르지 못하던 이자겸은 둘째 딸(훗날의 순덕왕후)을 예종에게 시집보내면서 다시 출세길을 걷게 된다.[15] 1107년 둘째 딸이 예종의 후궁으로 입궐했는데, 이는 여진족 정벌에 대한 문신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것이었다.[17] 이자겸은 최사추의 사위였고, 김상기의 아들 김인존(金仁存)의 처남이었는데,[17] 최사추는 당시 여론을 주도할 정도로 정치적 영향력이 컸고,[16] 김인존은 여진 정벌에 반대했기 때문이다.[16]
1108년, 이자겸의 둘째 딸은 예종의 비(妃)가 되었고, 이듬해 인종을 낳았다. 이후 이자겸은 예종의 총애를 받으며 참지정사, 상서좌복야를 거쳐 문하평장사로 승진했고, 아들들도 함께 승진했다.
2. 1. 3. 왕위계승전과 인종 옹립
예종이 사망한 후, 이자겸은 자신의 어린 외손자를 인종으로 옹립했다.[1] 이후 이자겸은 어린 국왕의 섭정으로서 거의 절대적인 권력을 누리며, 자신의 외손자를 옹립하는 것을 반대하고 왕위를 찬탈하려다 실패하여 제거된 옛 동맹들을 포함한 정치적 경쟁자들을 제거했다.이자겸은 스스로에게 한양공(漢陽公)이라는 칭호를 부여했고, 1124년에는 조선국공(朝鮮國公)으로 자칭했다.[1] 이자겸의 막대한 권력은 두 딸을 인종에게 시집보낸 후 더욱 커졌으며, 이는 그의 부패를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1] 그는 왕자나 왕후에게 주어지는 숭덕부(崇德府)를 스스로 설치하여 자신을 태자나 왕후와 동등한 위치에 놓았다. 어느 날, 이자겸은 인종과 상의 없이 사신을 송나라에 파견하여 국왕의 섭정(知軍國事) 임명을 요청했고, 이후 인종에게 사후 승인을 요구했다.[2]
2. 2. 정치 활동
이자겸은 문종의 장인이었던 이자연의 손자이자 이호의 아들로, 개경에서 태어났다. 왕족과 인척 관계였던 덕에 음서를 통해 과거 시험 없이 관직에 나아갔다. 아버지 이호는 둘째 딸을 순종에게 시집보내 왕실과의 관계를 더욱 굳건히 했다. 이자겸은 왕후의 오빠라는 이유로 고위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순종이 즉위 3년 만에 사망하고 누이인 왕후는 부적절한 관계로 관직을 잃었다.한동안 관직 복귀에 어려움을 겪던 이자겸은 1107년 둘째 딸을 고려 예종에게 시집보냈다. 이 결혼은 예종이 여진 정벌에 반대하는 대신들을 달래기 위한 목적도 있었는데, 이자겸의 장인 최사추와 매형 김인존이 조정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1109년, 이자겸의 딸은 아들(훗날 고려 인종)을 낳았다.
1122년 예종이 병으로 위중해지자 이자겸은 쾌유를 빌었으나, 예종은 종양으로 사망했다. 이자겸은 재빨리 궁궐을 장악하고 외손 인종을 옹립했다. 예종 사후 왕위를 노리던 예종의 아우들을 저지하고 인종을 즉위시키는 데 공헌했다. 이후, 이자겸은 어린 국왕의 섭정으로서 거의 절대적인 권력을 누리며 정치적 경쟁자들을 제거했다.
이자겸의 막대한 권력은 두 딸을 인종에게 시집보낸 후 더욱 커졌으며, 이는 그의 부패를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그의 아들들은 고려의 수도에 나란히 저택을 지었고, 이자겸은 왕자나 왕후에게 주어지는 숭덕부(崇德府)를 스스로 설치하여 자신을 태자와 동등한 위치에 놓았다. 부패와 뇌물이 개경을 휩쓸었다. 이자겸은 인종과 상의 없이 사신을 송나라에 파견하여 국왕의 섭정(知軍國事) 임명을 요청했고, 인종은 이를 거부하고 이자겸을 권력에서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1115년 건국 후 강성해진 금나라가 1125년 요나라를 멸망시키자, 고려에서는 1126년 음력 3월 금나라와 군신관계를 맺는 일에 대해 논의하게 되었다.[1] 당시 조정 대신들은 금나라를 상국으로 섬기는 것에 반대했으나, 이자겸은 척준경과 함께 금나라가 강성하므로 섬기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1] 이자겸 등이 대궐을 불태우고 반대파를 숙청하였기 때문에 이자겸의 말에 반대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음력 4월 금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군신관계를 맺게 되었다.[1]
2. 2. 1. 인종의 즉위와 섭정
1122년 예종이 종양으로 병석에 누워 한 달 만에 죽게 되자,[18] 이자겸은 민첩하게 궁궐을 장악하고 외손 인종을 옹립하였다. 예종이 승하한 후 왕위를 노리는 예종의 아우들을 저지하고 유조(遺詔 : 임금이 세상을 떠나며 내리는 조서)에 따라 인종을 등극시키는 데 공헌했다.어린 인종이 왕위를 이으면서 이자겸은 절대권력을 차지하게 되었다.[18] 이자겸의 힘에 의지하여 왕위에 오른 인종은 정사를 모두 그에게 내맡기다시피 했으며, 이자겸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권력을 독식하기 위해 정적 제거 작업에 착수했다.[18]
인종을 추대한 공로로 양절익명공신(亮節翼命功臣)에 책록되고 중서령(中書令) 겸 영문하상서도성사(領門下尙書都省事)에 임명되어 판이부사(判吏部事)와 판병부사(判兵部事), 서경유수사(西京留守事)를 겸하였으며, 식읍 8천 호와 식실봉 2천 호를 하사받았다. 부인은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에 봉해지는 한편 여러 아들들의 관직도 승급되어 그의 일문은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1122년 12월, 막강한 세력을 가진 인종의 작은아버지 대방공(帶方公) 왕보(王俌)와 한안인, 문공인 등이 역모를 꾀하였다는 명목으로 대방공 왕보의 가족과 측근들을 숙청, 제거하고 그 일당 50여 명을 살해 또는 유배 보냈다.
이자겸의 정적은 크게 예종의 아우 왕보로 대표되는 종실 세력과 한안인으로 대표되는 지방 출신 관료 세력, 두 부류였다.[18] 왕보를 비롯한 예종의 아우들은 덕종, 선종, 숙종의 선례에 따라 어린 태자 대신 자신들 중 한 명이 왕위를 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한안인 세력 역시 외척 이자겸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염려하여 종실 세력의 생각에 동의하고 있었다.[18] 이들은 인종 즉위 후 이자겸이 권력을 독점하게 되자 못마땅한 태도로 일관하며 그를 비판하기 시작했고, 이를 지켜본 이자겸은 왕보와 한안인 세력을 동시에 제거하는 길을 모색한다.[18]
사건의 발단은 한안인이 이자겸의 독단적인 처사를 비방하면서 시작된다. 한안인은 이자겸이 나라의 최고 재상으로 있으면서 정사를 모두 제집에서 처결하는 오만한 태도를 보이며 조회에도 참석하지 않는다고 비방했다.
한안인이 칩거하자 한때 그와 함께 예종의 총애를 받던 문공미와 그의 사촌 아우 정극영, 매부 지어사대사사 이영 등이 자주 한안인을 방문하였다.[18] 이를 지켜본 최홍재라는 인물이 이자겸을 찾아가 한안인과 문공미가 붕당을 맺고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말했다.[20] 최홍재는 예종 시절부터 한안인, 문공미 두 사람과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이 기회에 이자겸의 힘을 이용하여 그들을 제거하고자 했던 것이다.[20]
때마침 지난날의 일로 한안인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던 태의(太醫) 최사전이 한안인이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과 자주 만나는 것을 두고 한안인이 음모를 꾸민다고 이자겸에게 모함하였는데, 한안인이 인종의 즉위를 못마땅히 여기던 점과 왕제들의 즉위에 동조했던 점을 눈여겨 본 이자겸은 이를 빌미삼아 대방공(帶方公) 왕보를 추대하려는 역모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한안인을 제거한다.
이어 한안인은 승주군 감물도로 귀양 보내졌다가 도중에 이자겸의 심복들에 의해 순천 앞바다에 던져져 죽었으며, 대방공 왕보도 귀양길에 올랐다.[20] 그리고 문공미, 이영, 정극영 등 자주 만났던 인물들과 형 한안중, 동생 한영륜, 종제 한충, 처제 임존, 사위 이정 등 연루자 50여 명이 유배되었고, 이들과 친분이 있는 수백 명의 관료들이 파직되거나 유배되었다.[20] 또한 그와 관련된 사람들을 모두 귀양 보내거나 벼슬에서 파면, 해임 등으로 내쫓아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하였다.
1122년, 이자겸은 스스로에게 한양공(漢陽公)이라는 칭호를 부여했고, 1124년에는 이 칭호에 만족하지 못하고 조선국공(朝鮮國公)으로 자칭했다.
이자겸은 어린 국왕의 섭정으로서 자신의 외손자를 옹립하는 것을 반대하고 왕위를 찬탈하려다 실패하여 제거된 옛 동맹들을 포함한 정치적 경쟁자들을 제거했다.
2. 2. 2. 종실, 한안인 등과의 대립
1122년 12월, 인종의 작은아버지인 대방공(帶方公) 왕보와 한안인, 문공인(文公仁) 등이 역모를 꾀했다는 명목으로 왕보의 가족과 측근 50여 명이 숙청되었다.[18]이자겸의 정적은 예종의 아우 왕보로 대표되는 종실 세력과 한안인으로 대표되는 지방 출신 관료 세력이었다.[18] 이자겸은 한안인과 충돌했는데, 한안인은 이자겸이 조회에 잘 나오지 않고 주요 국사를 집에서 처리한다고 비판했다.[18] 또한 이자겸이 최유적을 급사중(給事中)으로 임명하자, 한안인은 장응추에게서 최유적이 이자겸에게 노비를 뇌물로 주고 벼슬을 얻었다는 말을 듣고 이를 퍼트렸다.[18]
왕보를 비롯한 예종의 아우들은 덕종, 선종, 숙종의 선례에 따라 어린 태자 대신 자신들 중 한 명이 왕위를 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한안인 세력 역시 이자겸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염려하여 이에 동의했다.[18] 이들은 인종 즉위 후 이자겸이 권력을 독점하자 그를 비판했고, 이자겸은 왕보와 한안인 세력을 동시에 제거하려 했다.[18]
한안인은 이자겸이 나라의 최고 재상으로 있으면서 정사를 모두 제집에서 처결하는 오만한 태도를 보이며 조회에도 참석하지 않는다고 비방했다.[18] 이자겸이 시비를 가리길 청하자 한안인은 부끄러워하며 조정에 나오지 않았다.
한안인이 칩거하자 문공미와 그의 사촌 아우 정극영, 매부 지어사대사 이영 등이 자주 한안인을 방문하였다.[18] 이를 본 최홍재는 이자겸에게 한안인과 문공미가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말했다.[20] 최홍재는 예종 시절부터 한안인, 문공미와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이자겸의 힘을 빌려 그들을 제거하고자 했다.[20]
태의(太醫) 최사전이 한안인이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과 자주 만나는 것을 두고 한안인이 음모를 꾸민다고 이자겸에게 모함하였는데, 이자겸은 이를 빌미삼아 대방공 왕보를 추대하려는 역모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한안인을 제거한다.
한안인은 승주군 감물도로 귀양 보내졌다가 도중에 이자겸의 심복들에 의해 순천 앞바다에 던져져 죽었고, 대방공 왕보도 귀양길에 올랐다.[20] 문공미, 이영, 정극영 등 자주 만났던 인물들과 형 한안중, 동생 한영륜, 종제 한충, 처제 임존, 사위 이정 등 연루자 50여 명이 유배되었고, 이들과 친분이 있는 수백 명의 관료들이 파직되거나 유배되었다.[20] 이자겸은 이들을 모두 귀양 보내거나 벼슬에서 파면, 해임 등으로 내쫓아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하였다.
2. 2. 3. 금나라와의 사대 관계
1115년 건국 후 날로 강성해지던 금나라가 1125년 요나라를 멸망시키자, 고려에서는 1126년 음력 3월 금나라와 군신관계를 맺는 일에 대해 논의하게 되었다.[1] 금나라는 이미 1117년 사신을 보내 금나라 황제가 고려 왕의 형이라 자처한 적이 있었고, 고려에서도 금나라군의 승리를 축하하는 사절을 보냈으나 사대외교는 하지 않았으며, 천리장성의 성벽을 석 자 더 쌓는 등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다.[1]당시 조정 대신들은 금나라를 상국으로 받드는 것은 물론, 국교를 맺는 것조차 극렬히 반대했으며 심지어 그 사신을 죽이자고 하는 이들도 있었다.[1] 하지만 이자겸은 척준경과 함께 금나라가 강성하므로 섬기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1] 당시 이자겸 등이 대궐을 불태우고 반대파를 숙청하였기 때문에 이자겸의 말에 반대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음력 4월 금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군신관계를 맺게 되었다.[1]
2. 3. 권력 장악
예종이 암으로 사망한 후, 이자겸은 자신의 어린 외손자를 인종으로 옹립했다. 이후 이자겸은 어린 국왕의 섭정으로서 거의 절대적인 권력을 누리며, 자신의 외손자를 옹립하는 것을 반대하는 정치적 경쟁자들을 제거했다.[1] 스스로 한양공(漢陽公)이라는 칭호를 부여했고, 1124년에는 조선국공(朝鮮國公)으로 자칭했다.[1]이자겸의 막대한 권력은 두 딸을 인종에게 왕후로 보내면서 더욱 커졌으며,[1] 이는 그의 부패를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아들들은 개경에 나란히 저택을 지었고, 이자겸은 왕자나 왕후에게 주어지는 숭덕부(崇德府)를 설치하여 자신을 태자나 왕후와 동등한 위치에 놓았다. 개경에는 뇌물이 만연했다.[1] 이자겸은 인종과 상의 없이 사신을 송나라에 파견하여 국왕의 섭정(知軍國事) 임명을 요청했고, 이후 인종에게 사후 승인을 요구했다.[2] 분노한 인종은 이를 거부하고 이자겸을 권력에서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인천 이씨는 문종부터 인종까지 고려 왕실의 외척으로서 정권을 잡은 유력 가문이었다. 이자겸 자신도 예종에게 둘째 딸을 시집보내 문하시중이 되었으며, 외조부로서 인종을 옹립했다. 지군국사라 칭하며 송에 독자적인 외교 사절을 파견하고 군사와 국정을 농단했으며, 더 나아가 "십팔자도참설"(十八子圖讖說, 십팔자는 '이(李)'를 파자(破字)한 것으로, 이씨 성에 의한 역성혁명을 의미함)이라는 속설을 믿고 왕위를 엿보면서, 차츰 인종과 대립하게 되었다.
2. 3. 1. 섭정과 월권 행위
인종이 즉위한 후, 이자겸은 자신의 외조부라는 이유로 특별한 예우를 받고자 했다. 1122년(인종 즉위년) 음력 10월에는 한양공으로 책봉되었으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1124년(인종 2년) 음력 7월에는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여 조선국공으로 높여 책봉하도록 만들었다.[18] 이자겸은 자신의 위세가 드높아지고 인종이 어린 것을 이용하여 섭정 역할을 수행하였으나, 임의로 국사를 자신의 집에서 처리할 때가 많았고, 사사로운 청탁이 들어오기도 했다.[16] 이 때문에 한안인, 최거린 등의 비판을 받았다.한안인을 제거한 후 이자겸은 정치권력을 독점하고 왕위를 노리는 왕숙들까지 제거했다.[16] 또한 왕위에 가담하지 않은 반대파들도 숙청하여 조정을 장악했다. 권력을 더욱 확대하기 위해 자신의 셋째 딸과 넷째 딸을 차례로 인종과 결혼시켜 왕비로 삼게 하였다.[18]
이자겸은 숭덕부(崇德府)라는 부를 설치하였는데,[16] 고려에서 부는 왕자나 왕비에게만 설치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관리가 부를 설치했다는 것은 그의 지위가 왕자나 왕비와 다를 바 없음을 의미했다.[16] 또한 친족들을 요직에 배치하고 매관매직하여 재산을 축적하였으며, 스스로를 국공으로 자처하면서 자신의 등급을 왕태자와 대등하게 보고 생일을 인수절이라 하여 전국에서 축하문을 올리도록 했다.[18]
이자겸은 예종 때에 식읍을 하사받았는데, 조정의 허락 없이 사사로이 자신에게 부여된 식읍의 주부(注簿)인 소세청(蘇世淸)을 송나라에 보내어 표(表)를 올리고 토산물을 바쳐서 논란을 야기하기도 하였으며, 스스로 지군국사(知軍國事)라 자칭하기도 하였다.
2. 3. 2. 부패 행위
인종이 즉위한 후, 이자겸은 자신의 외할아버지라는 이유로 특별 대우를 받으려 했고, 1122년 음력 10월 한양공으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여 1124년 음력 7월 조선국공으로 책봉되도록 하였다. 이자겸은 위세가 높아지고 인종이 어린 점을 이용하여 섭정 역할을 하며 국사를 자신의 집에서 처리하는 경우가 많았고, 사사로운 청탁도 받았다. 이 때문에 한안인, 최거린 등의 비판을 받았고, 이들이 사라진 뒤에도 신하들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16]한안인을 제거한 후, 이자겸은 정치 권력을 독점하고 왕위를 노리는 왕족들까지 제거했다.[16] 또한, 역모에 가담하지 않은 반대파들도 숙청하여 조정을 장악했다. 권력을 더욱 확대하기 위해 자신의 셋째 딸과 넷째 딸을 차례로 왕과 결혼시켜 왕비로 삼게 했다.[18] 당시 관리들은 이자겸에게 정치 권력이 집중되는 현상을 묵과할 수 없었다.[16] 유학자들은 신라시대부터 이어진 근친혼을 비난했지만, 이자겸은 근친혼 전통을 내세워 반박했다.
이자겸은 셋째 딸과 넷째 딸을 인종의 왕비로 들였고, 숭덕부(崇德府)라는 부를 설치했다.[16] 고려에서 부는 왕자나 왕비에게만 설치하는 것이었기에, 관리가 부를 설치한 것은 그의 지위가 왕자나 왕비와 다름없음을 의미했다.[16] 또한 친족들을 요직에 앉히고, 관직을 사고팔아 재산을 축적했으며, 스스로를 국공이라 칭하고 자신의 등급을 왕태자와 동등하게 여겨 생일을 인수절이라 하여 전국에서 축하문을 올리게 했다.[18]
예종 때 식읍을 하사받은 이자겸은 조정 허락 없이 자신에게 부여된 식읍의 주부(注簿)인 소세청(蘇世淸)을 송나라에 보내 표(表)를 올리고 토산물을 바쳐 논란을 일으켰고, 스스로 지군국사(知軍國事)라 칭하기도 했다. 그의 자식들까지 경쟁적으로 큰 집을 신축하여 개경 거리에 그들의 집이 나란히 인접하게 되었다.[16] 그의 자제들은 부패 행위를 일삼아 문제가 되었다.
이자겸의 아들들과 친척들은 조정 요직을 차지하고 다른 사람의 재산을 강제로 빼앗는 등 횡포를 부렸고, 출가한 막내아들인 승려 의장(義莊)은 교종 법계(法階) 중 다섯 번째 자리인 수좌(首座)에 임명되어 종교계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1124년에는 셋째 딸을, 이듬해에 넷째 딸을 인종에게 시집보내 왕비로 삼게 했는데, 어떤 이는 이를 조조가 후한 헌제에게 딸을 시집보낸 것에 비유하기도 했다.[21]
고려사는 당시 상황을 '그 세력이 더욱 기고만장해져서 뇌물이 공공연히 오가며 사방에서 음식 선물 등이 들어와 항상 수만 근의 고기가 썩어났다. 백성들의 토지를 강탈하고 자기 집 종들을 앞세워 남의 수레를 약탈해다가 자신의 물자를 수송했으므로 백성들은 모두 수레를 때려 부수고 우마를 끌고 다니는 바람에 모든 길이 소요스러웠다'고 표현하고 있다.[16] 어사대 등의 언관들은 이자겸의 월권행위를 비판했고, 인종은 이자겸 제거를 결심한다.
1124년 음력 1월, 모친상을 당해 표면적으로는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실제로는 최홍재가 자신을 해칠 것을 우려하여 욕지도로 귀양 보내는 등 여전히 권세를 부렸다. 그해 음력 5월에는 조서에 이름을 쓰지 않고 경으로 부르지 않게 하는 특혜를 받았으며, 이자겸의 집은 의친궁 숭덕부라는 이름이 붙었다. 또한 이자겸을 따르던 박승중은 조정에서 이자겸의 생일을 인수절로 부르자고 하였는데, 생일에 절을 붙이는 것은 원래 국왕과 태자에게만 한정된 것이었으므로 김부식의 반발에 부딪혀 무산되었다. 그러나 박승중은 사사로이 인수절이라 불렀고, 나중에는 이자겸 본인도 자신의 생일을 인수절이라 칭하며 태자와 같은 예우를 받았다.
이자겸은 사사로이 송나라에 숭덕부 관원을 사신으로 보내 자신을 지군국사(知軍國事)로 칭했으며, 인종에게도 지군국사로 책봉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자겸은 스스로 지군국사가 되고 싶어 왕에게 자기 집으로 와서 책서를 수여해 줄 것을 요청했고, 임명식 날짜까지 강압적으로 지정하였다.[22] 지군국사는 왕의 권한을 가지고 섭정을 하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의 요구는 대신들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되었다. 인종의 측근들을 중심으로 이자겸을 제거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갔고,[22] 이자겸이 직접 자신의 집에 와서 직책에 임명해 줄 것을 강요한 것을 두고 왕의 인사권을 침해했다고 생각한 인종은 분노했다.
2. 3. 3. 인종의 이자겸 제거 시도
1126년 2월 25일, 인종은 내시 김찬을 보내 원로 김인존과 평장사 이수에게 이자겸 체포에 대한 의견을 물었으나, 현실적인 힘의 열세를 이유로 반대하는 의견을 들었다.[22] 그럼에도 인종은 이자겸 체포를 명했다.[22]같은 날 밤, 인종의 명을 받은 최탁, 오탁, 권수 등이 군사를 이끌고 궁궐로 진입했다. 지녹연, 상장군 오탁, 대장군 권수, 장군 고석 등은 병부상서 척준신과 내시 척순을 죽이고 시체를 궐 밖에 버렸다.[24] 이와 함께 김정분, 전기상, 최영 등도 제거되었다. 그러나 내직기두 학문이 성벽을 넘어 중랑장 지호를 통해 이자겸에게 이 사건을 보고했다.[24]
이자겸은 척준경에게 군사를 이끌고 궁성을 포위하도록 명했다.[23] 척준경은 군사들과 함께 궁궐을 공격했고, 궁성 병력은 그들의 숫자가 많은 줄 알고 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았다.[24]
2월 26일 아침, 이자겸은 척준경을 직접 파견했고, 척준경은 동생과 아들의 시체를 발견하고 복수를 다짐하며 군사를 모아 궁성을 포위했다.[24] 결국 척준경 군사는 왕궁을 장악했고, 인종은 무장 해제를 명했지만 병사들은 듣지 않았다.
2. 3. 4. 이자겸의 반격
1126년 2월 25일, 인종의 명을 받은 최탁, 오탁, 권수 등이 군사를 이끌고 궁궐로 진입했다. 지녹연, 상장군 오탁, 대장군 권수, 장군 고석 등은 병부상서(兵部尙書) 척준신과 척준경의 아들인 내시 척순(拓純)을 죽이고 시체를 궐 밖에 버렸다.[22] 지후 김정분, 녹사 전기상, 최영 등도 함께 제거했다. 그러나 내직기두 학문이 성벽을 타고 넘어가 중랑장 지호를 통하여 이자겸에게 이 사건을 보고하였다.[24]이 소식을 접한 이자겸은 척준경에게 아들 의장이 거느리고 온 현화사의 승려 3백여 명을 이끌고 궁성을 포위하도록 명하였다.[23] 척준경은 시랑 최식, 지후 이후진, 녹사 윤한 등에게 수십 명의 군사를 이끌고 가서 궁성문을 열라고 지시했다.[24] 의장이 거느린 승려 3백 명이 개경 왕궁에 도착해 이들과 함께 궁궐을 공략했다.
척준경의 명령을 받은 소장들은 궁성에 도착해 자물쇠를 부수고 성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고함을 지르며 반군들에게 항복을 종용했다.[24] 그러나 궁성 병력은 그들의 숫자가 많은 줄 알고 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았다.[24] 2월 26일 아침, 이자겸은 척준경을 직접 파견했다. 척준경은 동생 척준신과 아들 척순의 시체를 발견하고 복수를 다짐했다.[24] 그는 군졸을 불러모아 최탁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말하고 궁성을 포위할 것을 명령했다. 여기에 승려 의장이 이끄는 현화사 승병 3백여 명도 가세했다.[24] 결국 척준경 군사는 왕궁을 장악했고 인종은 무장해제를 명했지만 병사들은 듣지 않았다.
궁궐을 장악한 이자겸은 합문지후 최학란과 도병마사 녹사 소억을 궁문 밖까지 보내 인종에게 협박조로 궁중에서 변란을 일으킨 자들을 내보내지 않으면 궁중이 위험해질 것이라고 전했다.[25] 하지만 인종이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이자겸은 척준경과 협의하여 궁성 공격을 명령했다.[25] 척준경은 화공으로 공격했다.
궁성 병력이 모두 제압되었을 때 궁궐 내부는 완전히 전쟁터와 같았다.[25] 이자겸은 인종을 면대하였다. 사태가 종결되자 이자겸은 궁성 세력에 협력한 사람들은 모두 처단하고, 그의 가족들과 친척들도 죽이거나 유배시켰다.[25] 인종은 이자겸이 자신까지도 해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왕위를 넘겨주겠다는 조서를 내렸다. 하지만 이자겸은 대간과 조정 대신들의 공론이 두려워 기회를 엿보다가 그의 재종형 이수가 이자겸을 꾸짖으며 신하로서 그 같은 왕의 조서를 받아들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호통을 치자 왕위에 대한 욕심을 접었다.[25]
2. 3. 5. 궁궐 장악과 인종의 양위 사태
척준경이 밤에 대궐을 불태워 인종은 불길을 피해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고, 인종을 따라 나온 거사 측 인물들은 죽음을 면치 못했다.[5][6] 이자겸은 거사에 가담한 자들의 집을 불태우고 가족들을 노비로 삼았다. 이 일로 궁궐 대부분이 불타고 많은 군사가 죽었으며, 과거 시행이 철회될 정도로 여파가 컸다.집권한 이자겸은 문하시중을 대신하여 조정을 장악하였다. 이자겸은 죽은 자파 인물들에게 벼슬을 추증하고 척준경 등 수하들의 벼슬을 높이는 한편, 인종을 자신의 집으로 옮겨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국사를 처리하였다. 더욱 기고만장해진 이자겸은 문무 백관이 인종에게 올리는 절을 같이 받기도 했으며, 십팔자득국(十八子得國 : 십팔자(十八子) 성씨, 곧 이(李)씨가 나라를 얻음)이라는 도참설을 믿고 인종을 독살하려 했으나 둘째 왕비가 된 넷째 딸이 몰래 인종을 도와 실패했다.
이자겸은 왕과 같은 권한으로 행동하면서 인종을 자신의 사택인 중흥택 서원에 연금하고 모든 정사를 자신이 주관하며 결재했다.[26] 이자겸과 척준경이 자신을 죽일까 두려워하고 김인존의 조언을 따르지 않은 것을 후회한 인종은 이자겸에게 양위할 뜻을 표명하는 서신을 보냈다. 그러나 이자겸은 여론과 사회적 규범 때문에 이러한 행위를 반역과 찬탈로 간주하여 인종의 결정을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이자겸의 지지자들은 이자겸 자신이 왕위에 욕심이 없다고 암시하며 그가 어떻게 인종의 양위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이자겸은 충성을 보여주기 위해 인종에게 재고를 촉구했고, 인종은 양위를 철회했다.
인종의 공모자들과 군인들 다수가 처형되거나 유배되었고, 지난 4일간의 격동적인 사건들은 이자겸의 세력을 더욱 강화했다.
2. 3. 6. 집권, 척준경과의 갈등
척준경이 밤에 대궐을 불태우자, 인종은 불길을 피해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자겸은 거사에 가담한 자들의 집을 불태우고 가족들을 노비로 삼았다. 이 일로 궁궐 대부분이 불타고 많은 군사가 죽었으며, 과거 시행이 철회될 정도로 여파가 컸다.[5][6]집권한 이자겸은 문하시중을 대신하여 조정을 장악하였다. 이자겸은 죽임을 당한 자파 인물들에게 벼슬을 추증하고 척준경 등 수하들의 벼슬을 높이는 한편, 인종을 자신의 집으로 옮겨와 감시하고 국사를 처리하였다. 문무 백관이 인종에게 절을 올리는 것을 같이 받기도 했으며, 도참설 중 하나인 십팔자득국(十八子得國 : 십팔자(十八子) 성씨, 곧 이(李)씨가 나라를 얻음)을 믿고 인종을 독살하려 했으나, 둘째 왕비가 된 넷째 딸이 몰래 인종을 도와 실패했다.
이자겸은 왕과 같은 권한으로 행동하면서, 인종을 자신의 사택인 중흥택 서원에 연금하고 모든 정사를 자신이 주관하며 결제했다.[26] 그러나 인종은 다시금 이자겸을 축출하기 위해 내의원 최사전과 모의하고 척준경과 이자겸을 이간질시키기로 작정한다.[26] 이자겸의 아들 이지언은 척준경이 궁성에 활을 쏘고 불을 지른 사실을 비난하였다. 그러한 때에 국왕은 척준경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자겸을 제거하여 공을 세울 것을 종용했다.[23]
마침 이자겸의 아들 이지언의 집사와 척준경의 집사 간에 시비가 붙는 사건이 발생했다.[26] 이지언의 집사가 홧김에 '너희 상전은 임금이 있는 자리에 대고 활을 쏘고 궁중에 불을 질렀으니 그 죄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고,[26] 이 말이 척준경의 귀에 들어가 척준경은 이자겸의 집으로 달려가 따지며 의관을 벗어 던져버렸다.[26] 척준경 측의 불만이 심해지고 이자겸 측에서는 사과를 거부하자, 인종은 사람을 보내 이들의 갈등을 부채질했다.
난처한 입장이 된 이자겸은 이지미와 이공의를 보내 화해를 요청했으나, 척준경은 욕설을 퍼부으며 은퇴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26] 이후 인종은 복구된 연경궁으로 옮겨갔고, 이자겸도 연경궁 남쪽에 거처를 마련하여 지내면서 북편 담을 뚫어 궁궐과 통하도록 하였다. 또한 군기고에 있던 갑옷과 병장기를 모두 가져다가 자신의 집에 두었다.[27]
인종은 이자겸을 제거하기 위해 그를 군사력으로 뒷받침하는 척준경을 회유했는데, 때마침 이자겸의 셋째 아들 이지언의 종이 척준경을 욕하는 바람에 화가 난 척준경은 이자겸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이자겸은 '십팔자가 왕이 된다'는 파자점을 믿고 자신의 성씨인 이(李)자를 분해하면 십팔자가 된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왕이 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28][27] 그래서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독이 든 떡을 왕에게 올렸다. 하지만 떡 속에 독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그의 넷째 딸인 왕비가 이를 막았다. 왕비는 은밀히 떡 속에 독이 들어 있음을 왕에게 알렸고, 인종은 까마귀에게 떡을 던져 주어 확인했다. 떡을 먹은 까마귀는 그 자리에서 죽었다.[27]
이자겸은 또 독약을 보내 왕비에게 왕에게 먹이라고 했지만, 딸인 왕비가 그릇을 들고 가다가 고의로 넘어져 독약을 엎질렀다.[27] 이자겸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왕을 독살하려고 하자, 이 소식을 들은 척준경은 왕에게 충성을 하겠다는 결정을 내린다.[27] 왕의 친서를 받은 척준경은 인종이 위험에 처해 있음을 감지하고 장교 7명과 관노 20여 명을 인솔하여 궁궐로 향했다. 이들은 무기가 없어 목책나무를 몽둥이 삼아 뽑아든 채로 달려갔다.[27]
참조
[1]
웹사이트
Yi Cha-gyŏm Marries Two Daughters to Injong
https://db.history.g[...]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2]
웹사이트
Yi Cha-gyŏm Acts Like King
https://db.history.g[...]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3]
웹사이트
Assassination of Yi Cha-gyŏm and Ch'ŏk Chun-gyŏng Fails
https://db.history.g[...]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4]
웹사이트
Kim Chan et al. Attempt Assassination of Yi Cha-gyŏm and Ch'ŏk Chun-gyŏng but Fail
https://db.history.g[...]
National History of Korean History
[5]
웹사이트
Yi Cha-gyŏm and Ch'ŏk Chun-gyŏng Set Palace on Fire
https://db.history.g[...]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6]
웹사이트
Yi Cha-gyŏm and Ch'ŏk Chun-gyŏng Set Palace on Fire
https://db.history.g[...]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7]
웹사이트
Injong Uses Ch'ŏk Chun-gyŏng to Exile Yi Cha-gyŏm and His Cronies
https://db.history.g[...]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8]
웹사이트
King Has Ch'ŏk Chun-gyŏng Quell Yi Cha-gyŏm's Rebellion
https://db.history.g[...]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9]
웹사이트
King Has Ch'ŏk Chun-gyŏng Arrest Yi Cha-gyŏm
https://db.history.g[...]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10]
웹사이트
Yi Cha-gyŏm Dies in Exile
https://db.history.g[...]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11]
웹사이트
李資謙(りしけん)
https://kotobank.jp/[...]
2023-10-21
[12]
뉴스
영광 ‘굴비’ 이름 붙여진 사연을 찾아서 …
http://article.joins[...]
중앙일보
2009-12-22
[13]
문서
[14]
서적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15]
서적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16]
서적
우리 한국사:정치사중심의 새로운 한국통사
푸른역사
2006
[17]
서적
우리 한국사:정치사중심의 새로운 한국통사
푸른역사
2006
[18]
서적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19]
서적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20]
서적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21]
간행물
동사강목
1125
[22]
서적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23]
서적
우리 한국사:정치사중심의 새로운 한국통사
푸른역사
2006
[24]
서적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25]
서적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26]
서적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27]
서적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28]
서적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29]
서적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30]
문서
[31]
문서
[32]
문서
[33]
서적
우리 한국사:정치사중심의 새로운 한국통사
푸른역사
2006
[34]
웹인용
고려 이자겸의 屈非 vs 칠산바다의 울음소리 - 광주 KBS
http://gwangju.kbs.c[...]
2011-07-02
[35]
문서
[36]
서적
서해문집
[37]
웹사이트
한국고전번역원
http://www.minchu.or[...]
2013-08-17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