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미 스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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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미 스미스는 존 레논의 이모이자 법적 보호자였다. 스미스는 리버풀 출신으로, 1939년에 조지 스미스와 결혼하여 멘딥스라는 집에서 생활했다. 그녀는 엄격한 양육 방식으로 존 레논을 키웠으며, 존 레논이 비틀즈 멤버가 되는 것을 반대했지만, 그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스미스는 1991년에 사망했으며, 그녀의 삶은 여러 영화에서 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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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슬레이든은 잉글랜드 배우로, BBC SF 드라마 《닥터 후》에서 사라 제인 스미스 역을 맡아 세 번째, 네 번째 닥터의 컴패니언으로 출연했으며, 이후 스핀오프 드라마 《사라 제인 어드벤처》에서 주연을 맡았다. - 리버풀 출신 - 비틀즈
1960년대 영국에서 결성되어 혁신적인 음악과 문화적 현상을 일으키며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지만 멤버 간의 갈등으로 1970년 해산한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로 구성된 록 밴드가 비틀즈이다.
| 미미 스미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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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명 | 메리 엘리자베스 스탠리 |
| 로마자 표기 | Meri Ellijabethŭ Sŭtaelli |
| 출생일 | 1906년 4월 24일 |
| 출생지 | 잉글랜드 리버풀 |
| 사망일 | 1991년 12월 6일 |
| 사망지 | 잉글랜드 도싯주 풀 |
| 직업 | 간호사, 비서, 주부 |
| 배우자 | 조지 스미스 (1939년 결혼, 1955년 사별) |
| 가족 관계 | 줄리아 레논 (자매), 존 레논 (조카), 줄리아 베어드 (조카딸) |
2. 스탠리 가문
스탠리 가문은 레논의 외가로, 리버풀에 기반을 둔 가문이다. 레논은 스탠리 가문이 과거 울턴 지역을 소유했다고 언급했으나[1], 실제로는 윌리엄 스탠리, 제6대 더비 백작과는 다른 낮은 사회 계층 출신으로 1870년대 리버풀로 이주했다. 미미 스미스의 할아버지는 버밍엄, 증조 할아버지는 런던 출신이다.
미미의 아버지 조지 어니스트 스탠리는 1874년 리버풀 에버튼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어머니 엘리자 제인 길디아는 아일랜드 얼스터 타이론 주 오마 출신이었다.[2][3][4][5] 미미의 어머니 애니 제인 밀워드는 1873년 체스터에서 웨일스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7][8] 조지 스탠리와 애니 밀워드는 1906년 11월 19일 리버풀 세인트 피터 교회에서 결혼했으며[9][10][11], 미미는 이들 부부의 첫째 딸이었다.[12] 결혼 초기 조지 스탠리는 상선 선원으로 일했다.
2. 1. 가족 배경
레논에 따르면, 스탠리 가문은 한때 울턴 마을 전체를 소유했다고 한다. 윌리엄 스탠리, 제6대 더비 백작은 한때 울턴의 영주권을 소유했지만, 레논의 스탠리 가문은 그보다 낮은 사회 계층 출신이었으며 1870년대에 리버풀로 이주했다. 스미스의 할아버지는 버밍엄에서 태어났고, 그녀의 증조 할아버지는 런던에서 태어났다. 스미스의 아버지 조지 어니스트 스탠리는 1874년 리버풀의 에버튼 지역에서 윌리엄 헨리 스탠리와 엘리자 제인 길디아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엘리자는 아일랜드 얼스터 타이론 주 오마 출신이었다.[2][3][4][5] 1891년까지 스탠리 가문은 시내 중심부 남쪽의 어퍼 프레데릭 스트리트에 살았는데, 이곳은 조지의 미래 아내인 애니 제인 밀워드의 가족이 살던 도심 지역과 같았다.[6] 애니는 1873년 체스터에서 웨일스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7][8] 조지 어니스트 스탠리와 애니 밀워드는 1906년 11월 19일 리버풀 세인트 피터 교회 (현재는 철거됨)에서 결혼했다. 스탠리는 상선 선원으로 일하며 자주 바다에 나가 있었기 때문에 일부 인구 조사 기록에는 이름이 빠져 있었다.[9][10][11]
미미는 부부의 첫 딸로, 부모가 결혼하기 7개월 전에 태어났다.[12] 그 후 엘리자베스 제인("마터"; 1908–1976), 애니 조지나("낸니"; 1911–1988), 줄리아("주디"; 1914–1958), 해리엇("해리"; 1916–1972) 등 네 명의 딸이 더 태어났다.[13][14] 스탠리는 딸들이 태어난 후 항해를 그만두고 리버풀 앤 글래스고 터그 살베지 컴퍼니에서 보험 조사관으로 일자리를 구했다. 그는 가족을 리버풀 교외의 알러턴으로 이사시켰고, 그곳의 9 뉴캐슬 로드에 있는 작은 테라스 하우스에서 살았다. 비틀즈 전기 작가 밥 스피츠에 따르면, 미미는 어머니를 도와 스탠리 가문의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했으며, 옷차림은 "마치 매주 정원 클럽 회의에 가는 것처럼" 단정했다고 한다. 레논의 친구들은 나중에 그의 이모가 예의, 정직함, 그리고 흑백 논리적 사고방식을 중시했다고 회상했다. "당신이 충분히 좋거나 그렇지 않거나, 둘 중 하나였죠." 애니 스탠리는 1941년에 사망했고, 미미는 줄리아의 도움을 받아 아버지를 돌보는 책임을 맡았다.[15]
다른 소녀들이 결혼을 생각할 나이에, 스미스는 자신의 "고집스러운 독립성"에서 비롯된 도전과 모험을 즐겼으며, "부엌 싱크대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여 결혼하고 싶지 않다고 자주 말했다. 그녀는 울턴 요양 병원에서 레지던트 간호사로 일했으며, 나중에는 맨체스터와 리버풀에 사업체를 둔 산업 재벌 어니스트 비커스의 개인 비서로 일했다. 그녀는 언젠가 리버풀의 "존경받는 교외"에 집을 사서 "리버풀 사회의 학자들과 고위 인사들"을 접대하는 것을 장기적인 목표로 삼고 있었다.
3. 결혼과 '멘딥스'
미미는 1932년 초, 우유 배달부였던 조지 스미스를 만났다. 조지 스미스는 7년 가까이 미미에게 구애한 끝에 1939년 9월 15일 결혼에 성공했다. 결혼 후 부부는 리버풀의 중산층 지역인 멘로브 애비뉴 251번지에 위치한 연립주택인 멘딥스(Mendips)를 구입하여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이 집의 이름은 멘딥 힐스(Mendip Hills)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멘딥스'는 이후 존 레논이 유년 시절을 보낸 집으로 잘 알려지게 된다.
3. 1. 조지 스미스와의 만남과 결혼
1932년 초, 미미는 자신이 일하던 병원 건너편에 살면서 매일 아침 우유를 배달하던 조지 스미스를 만났다. 스미스와 그의 형 프랭크는 울턴에서 4대째 스미스 가문이 운영하는 낙농장과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스미스는 미미에게 구애했지만, 미미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아버지 스탠리의 반대에도 부딪혔다. 스탠리는 스미스 부부가 집에 있을 때는 조지와 미미가 뒷방에만 있도록 허락했으며, 시간이 너무 늦으면 뒷방으로 와서 조지에게 큰 소리로 집에 가라고 하곤 했다. 이러한 구애는 거의 7년 동안 이어졌으나, 기다림에 지친 스미스는 어느 날 아침 우유 배달 후 미미에게 "나와 결혼하든지, 아니면 아무 관계도 갖지 말자!"라며 최후통첩을 했다.
미미와 스미스는 마침내 1939년 9월 15일에 결혼했다. 그들은 리버풀의 중산층 지역인 멘로브 애비뉴 251번지에 있는 연립주택인 멘딥스(Mendips)를 구입했는데, 이 집의 이름은 멘딥 힐스(Mendip Hills)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멘로브 애비뉴는 큰 피해를 입었으며, 미미는 집에 떨어진 소이탄에 젖은 담요를 던져 불을 꺼야 했던 경험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전쟁 중 정부는 스미스 부부의 농지를 전쟁 관련 사업을 위해 징발했고, 조지 스미스는 군에 징집되었다. 그러나 그는 3년 후 제대하여 전쟁이 끝날 때까지 스페크에 있는 항공기 공장에서 일했다.[14] 전쟁 후 스미스는 우유 사업을 그만두고 작은 부업을 시작했는데, 미미는 나중에 그가 도박 중독에 빠져 돈을 거의 다 잃었다고 불평하기도 했다.
3. 2. '멘딥스'에서의 생활
1932년 초, 미미는 자신이 일하던 병원 건너편에 살면서 매일 아침 우유를 배달하던 조지 스미스를 만났다. 조지 스미스와 그의 형 프랭크는 울턴에서 4대째 스미스 가문이 운영하는 낙농장과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조지 스미스는 미미에게 7년 가까이 구애했지만, 미미의 무관심과 아버지의 반대로 어려움을 겪었다. 미미의 아버지 스탠리는 조지 스미스가 집에 방문했을 때 특정 방에만 머물도록 하고 일찍 집으로 돌려보내곤 했다. 오랜 구애에 지친 조지 스미스는 결국 미미에게 결혼할지 말지를 결정하라는 최후 통첩을 했다.
미미와 조지 스미스는 1939년 9월 15일에 결혼했다. 그들은 리버풀의 중산층 지역인 멘로브 애비뉴 251번지에 위치한 연립주택인 멘딥스를 구입했다. 이 집의 이름은 멘딥 언덕(Mendip Hills)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멘로브 애비뉴는 폭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으며, 미미는 집에 떨어진 소이탄에 젖은 담요를 던져 불을 꺼야 했던 경험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전쟁 중 정부는 스미스 부부의 농지를 전쟁 관련 사업을 위해 인수했고, 조지 스미스는 군에 징집되었다. 그러나 그는 3년 후 제대하여 전쟁이 끝날 때까지 스페크에 있는 항공기 공장에서 일했다.[14] 전쟁 후 조지 스미스는 우유 배달 사업을 그만두고 작은 부업을 시작했으나, 미미는 나중에 그가 도박 중독에 빠져 재산을 거의 잃었다고 불평했다.
4. 존 레논
미미 스미스는 여동생 줄리아가 남편 알프레드 레논과 헤어진 후 불안정한 생활을 하게 되자, 조카 존 레논의 양육을 맡게 되었다. 아동 복지 당국의 개입과 줄리아의 설득 끝에, 자녀가 없던 미미 부부는 존을 리버풀의 집 '멘딥스'로 데려와 키우기로 결정했다. 미미는 존에게 엄격하면서도 깊은 애정을 가진 보호자였으며, 이는 두 사람의 관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존의 교육에 신경 썼고, 때로는 엄격함 속에서도 유머를 공유하는 등 복합적인 관계를 형성했다.[16]
남편 조지 스미스가 1955년 사망하고, 3년 뒤 여동생 줄리아마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 미미는 큰 슬픔을 겪었다. 특히 줄리아의 사고 당시 미미는 현장에 있었으며, 가해 운전자가 무죄 판결을 받자 법정에서 분노를 표출하기도 했다.[19] 이후 미미는 존의 유일한 보호자로서 그의 성장 과정을 계속 지켜보았다.
4. 1. 존 레논의 어린 시절
미미 스미스의 여동생 줄리아는 1938년 12월 3일 알프레드 레논과 결혼했다. 1940년 10월 9일, 부부의 외아들 존 레논이 태어났다. 미미는 그날 저녁 옥스퍼드 스트리트 산부인과 병원에 전화하여 줄리아가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들었다.[16] 미미에 따르면, 그녀는 공습 중에 "다리가 버틸 수 있는 한 빨리" 병원으로 달려갔고, 파편을 피하기 위해 문간에 숨어야 했다고 한다. 그녀는 병원 밖에 낙하산 기뢰가 투하된 이야기로 시작하며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 "내 여동생은 침대에 누워 있었고, 그들은 아기를 침대 밑에 넣었다. 그들은 나에게 지하실로 가라고 했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에게 소식을 전하기 위해 뉴캐슬 로드로 달려갔다. '대피소로 들어가세요.' 수위들이 외쳤다. '아, 조용히 해.'라고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16] 그러나 이 공습 이야기는 그날 밤 리버풀에 공습이 없었기 때문에 나중에 반박되었다. 이전 공습은 9월 21-22일이었고, 다음 공습은 10월 16일에 있었다.줄리아가 남편 알프레드와 헤어진 후, 그녀와 아기 레논은 새로운 파트너 존 앨버트 "바비" 다이킨스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미는 리버풀의 아동 복지 기관에 두 번 연락하여 존이 줄리아와 다이킨스와 같은 침대에서 자는 것에 대해 불만을 제기했다. 결국 줄리아는 자녀가 없던 미미 부부에게 존을 맡기도록 설득되었다. 미미는 나중에 친척에게 아이를 원한 적은 없지만, "항상 존을 원했다"고 털어놓았다.[16] 1946년 7월, 알프레드 레논은 미미 부부를 방문하여 존을 블랙풀로 데려갔다. 표면적으로는 긴 휴가를 위해서였지만, 실제로는 존과 함께 뉴질랜드로 이민을 갈 계획이었다.[17] 줄리아는 블랙풀로 가서 존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왔지만, 몇 주 후 다시 미미에게 돌려보냈다. 그 후 존은 미미 부부의 집인 멘딥스의 가장 작은 침실(현관 위쪽 방)에서 계속 살았다. 미미는 존을 돌보는 보호자였지만, 남편 조지 스미스나 존의 어머니 줄리아보다 더 엄격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가족 친구들은 미미를 고집스럽고, 참을성이 없으며, 용서하지 않는 성격으로 묘사했지만, 유머 감각이 뛰어나다고도 말했다. 미미가 존을 비난할 때마다 존은 농담으로 응수했고, 둘은 "함께 구르며 웃곤 했다".
미미는 존을 위해 단편 소설 책들을 사주었고, 그녀의 남편 조지는 존이 다섯 살 때부터 ''리버풀 에코''의 헤드라인을 소리 내어 읽어주며 읽는 법을 가르쳤다. 1949년부터 1955년까지 매년 여름, 미미는 존을 스코틀랜드 북부 해안의 던네스 근처 로크 미디에 사는 이모 마터와 그녀의 가족을 방문하도록 혼자 10시간 버스 여행을 보냈다. 미미는 또한 매년 존을 칼더스톤스 공원에서 열리는 가든 파티에 데려갔는데, 그곳에서는 구세군 밴드가 연주했다. 스트로베리 필드는 비컨스필드 로드에 있는 구세군 아동원의 이름이었고, 레논은 나중에 비틀즈의 노래 "Strawberry Fields Forever"에서 이 이름을 사용했다. 미미는 존이 삼촌 조지와 유대감을 형성할 때 소외감을 느꼈다고 회상하며 "존은 그의 삼촌 조지를 사랑했다. 나는 그 일에서 완전히 소외감을 느꼈다. 그들은 함께 떠나서 나에게 초콜릿 한 조각과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라는 쪽지만 남겨두었다."고 말했다.[16]
미미 부부는 1947년부터 추가 수입을 위해 1층 침실 두 개를 학생들에게 세를 놓았고, 부부는 1층의 이전 식당에서 잠을 잤다.[18] 그곳에 머물렀던 학생 중 한 명인 존 카빌(1949년 9월부터 1950년 6월까지 거주)은 기타를 연주했다. 카빌은 코드에 대해 거의 몰랐지만, 기타 현으로 곡을 연주했고 존 레논도 이를 따라 했다.
조지 스미스는 1955년 6월 간 출혈로 사망했으며, £2,000의 유언을 남겼다. 3년 후, 존의 어머니 줄리아는 멘로브 애비뉴에서 퇴근 중이던 경찰관 에릭 클라그가 운전하는 차에 치여 사망했다. 미미는 치명적인 충돌을 직접 목격하지는 못했지만, 구급차가 도착할 때까지 줄리아의 시신을 붙잡고 히스테리하게 울었다. 클라그는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았고, 견책과 짧은 직무 정지 처분만 받았다. 미미는 판결을 듣고 클라그에게 "살인자!"라고 소리쳤다.[19]
존 레논이 유명해진 후, 미미는 그에게 리버풀 억양으로 말하는 것에 대해 꾸짖었지만, 레논은 "그건 쇼 비즈니스예요. 그들은 내가 더 리버풀 억양으로 말하기를 원해요."라고 대답했다.[20] 레논은 나중에 자신을 노동자 계급 출신으로 보는 시각을 거부하며 "나는 멋지고 깔끔한 교외 소년이었어요."라고 말했다.[20] 그는 멘딥스에서의 생활 환경을 다른 비틀즈 멤버들과 비교하며, "계급 제도에서 폴, 조지, 링고보다 반 인치 정도 더 높은 계급이었어요. 그들은 정부 지원 주택에서 살았어요.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집을 소유했고, 우리 자신의 정원이 있었어요. 그들은 그런 것을 전혀 갖지 못했어요."라고 설명했다.[21]
4. 2. 존 레논과 음악
미미 부부는 1947년부터 추가 수입을 위해 1층 침실 두 개를 학생들에게 세를 놓았다.[18] 그곳에 머물렀던 학생 중 한 명인 존 카빌(John Cavill)은 1949년 9월부터 1950년 6월까지 거주했다. 카빌은 기타를 사서 연주했는데, 이는 존 레논에게 영향을 주었을 수 있다.미미는 매년 여름 존을 칼더스톤스 공원에서 열리는 가든 파티에 데려갔는데, 그곳에서는 구세군 밴드가 연주했다. 스트로베리 필드는 근처 구세군 아동원의 이름이었고, 레논은 훗날 비틀즈의 노래 "Strawberry Fields Forever"에서 이를 언급하게 된다.
미미는 나중에 자신이 존의 첫 번째 기타를 사줬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존이 몇 주 동안 끈질기게 조른 끝에 그의 어머니 줄리아가 사준 것이었다. 줄리아는 5GBP짜리 악기를 언니의 집이 아닌 자신의 집에 배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57년 7월 6일 오후, 미미와 줄리아 두 자매는 울턴 성 베드로 교회 축제에서 존이 쿼리멘과 함께 공연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아들이 공연하는 것을 알고 있던 줄리아는 미미를 데려가 함께 보았다. 존은 관중 속에서 이모를 발견하고는 노래 가사를 바꾸어 "오-오, 미미가 지금 복도를 내려오네..."라고 불렀다. 미미는 그날 존의 무대를 본 후 "존이 마이크 앞에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또는 "그가 저기 있는 것을 보니 기뻤다"는 상반된 심정을 표현했다.
존이 음악에 관심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미미는 그가 어떤 형태로든 학업 자격을 갖추기를 원했기에, 교장의 도움을 받아 리버풀 예술 대학에 입학시켰다. 그녀는 존이 밴드를 결성하는 것을 반대했으며, 폴 매카트니가 "노동자 계급"이라는 이유로 탐탁지 않게 여겨 "존의 작은 친구"라고 불렀다. 조지 해리슨에 대해서는 그의 걸쭉한 리버풀 억양과 테디 보이 스타일의 옷차림 때문에 "그를 싫어했다". 존과 폴은 종종 멘딥스의 집 앞 유리 현관에서 만나 노래를 만들고 리허설을 했는데, 그곳이 유일하게 연주가 허락된 공간이었다.
미미는 한때 조카 스탠리 파크스에게 존과 비틀즈의 공연을 보러 더 캐번에 데려가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비명을 지르는 팬들로 가득 찬 지하실로 내려가자마자 파크스에게 "그 [레논]를 데려와, 데려와! 무대에서 내려오라고 해! 여기 있을 수 없어... 이걸 멈춰야 해!"라고 소리쳤다.[22] 미미는 존이 학업을 계속하기를 바랐기 때문에, 밴드의 함부르크 첫 장기 공연에 대해 격분했지만, 존이 벌어들일 돈을 과장하여 말하자 누그러졌다.
그녀는 존이 음악에 싫증을 낼 것이라 희망하며 종종 "기타는 괜찮지만, 그걸로는 절대 먹고살 수 없을 거야."라고 말했다. 훗날 존은 이 말을 농담 삼아 그녀에게 상기시켰고, 이 문구를 새긴 은색 명판을 만들어 선물했다.[23] 미미는 나중에 이 명판에 대해 질문받자, 존이 자신을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 남편 조지를 위해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33]
존 레논이 유명해진 후, 미미는 그에게 리버풀 억양으로 말하는 것에 대해 꾸짖었지만, 레논은 "그건 쇼 비즈니스예요. 그들은 내가 더 리버풀 억양으로 말하기를 원해요."라고 대답했다.[20] 레논은 나중에 자신을 다른 비틀즈 멤버들과 비교하며 "계급 제도에서 폴, 조지, 링고보다 반 인치 정도 더 높은 계급이었어요. 그들은 정부 지원 주택에서 살았어요.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집을 소유했고, 우리 자신의 정원이 있었어요. 그들은 그런 것을 전혀 갖지 못했어요."라고 말하며 노동자 계급 이미지를 거부했다.[21]
4. 3. 존 레논의 연애와 결혼
미미 스미스는 존 레논의 연애 상대에 대해 종종 냉담하거나 비꼬는 태도를 보였다.그녀는 신시아 파월을 "갱스터의 정부"라고 부르며 특히 불쾌하게 대했다. 1962년 여름, 신시아가 레논의 아이를 임신하자 레논은 그녀에게 청혼했다. 미미 스미스는 레논이 결혼하면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위협하며 결혼을 막으려 했다. 그럼에도 존과 신시아는 1962년 8월 23일 리버풀의 마운트 플레전트 등록 사무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미미 스미스는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레논은 이복 여동생, 사촌, 고모들이 결혼식에 오기를 바랐지만, 미미 스미스는 미리 그들에게 연락하여 참석하지 말라고 권했다. 레논 부부가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아파트에서 몇 달간 지내고 신시아가 유산을 겪을 뻔한 이후, 미미 스미스는 그들에게 자신의 집 아래층 뒷방을 빌려주겠다고 제안했다.
1972년 크리스마스 전, 미미 스미스는 막내 여동생 해리엇의 장례식에서 당시 이혼한 상태였던 신시아와 다시 만났다. 미미 스미스는 신시아가 레논과 이혼하고 그가 오노 요코와 관계를 맺도록 내버려 두었다며 엄하게 비판했다. 그녀는 신시아가 레논이 "스스로를 바보로 만드는 것"을 막았어야 했다고 주장했다. 비록 미미 스미스는 존 레논의 연인들에게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이후 오노 요코에 대해서는 좋은 아내이자 어머니였다고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다.[24][25] 레논 사망 후, 오노 요코와 아들 션 레논이 리버풀의 미미 스미스를 방문했을 때, 그녀는 션이 외모와 태도, 유머 감각 등 모든 면에서 존 레논을 닮았다고 말했다.[26]
5. 노년과 사망
비틀즈의 성공 이후, 스미스는 리버풀의 자택 '멘딥스'에서 팬들에게 끊임없이 시달리게 되자 1965년 집을 팔았다. 이에 존 레논은 그녀에게 도싯 주 풀의 해변가에 위치한 방갈로 '하버즈 에지'를 사주었고, 스미스는 이곳에서 남은 생애를 보냈다.[28] 레논은 1971년 뉴욕으로 이주한 뒤 영국으로 돌아오지 않았지만, 스미스와는 매주 전화 통화를 하며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30]
스미스는 1981년 사우스턴 텔레비전과의 인터뷰에서 레논이 살해되기 전날 밤에도 통화했으며, 그가 향수병을 느끼며 영국으로 돌아올 계획을 밝혔다고 말했다.[31] 그러나 레논이 사망한 후, 스미스는 레논이 집의 소유권을 자신에게 이전하지 않았다는 사실, 즉 오노 요코가 집을 소유하고 언제든지 팔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분노했다.
5. 1. 존 레논과의 관계 유지
비틀즈의 성공 이후 팬들의 관심이 부담스러워진 스미스를 위해, 존 레논은 1965년 그녀에게 도싯 주 풀의 해변 근처에 있는 25000GBP짜리 방갈로 Harbour's Edge|하버즈 에지eng를 사주었고, 이곳은 그녀가 남은 생애 동안 거주한 집이 되었다.[28] 레논은 나중에 그의 이모에게 MBE 메달을 주었지만, 후에 항의의 표시로 반환하기 위해 다시 돌려달라고 요청했다.[29]레논은 1971년에 뉴욕으로 이주했고, 다시는 영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후 다른 가족들과는 연락이 줄었음에도 불구하고, 레논은 스미스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매주 그녀에게 전화했다.[30] 1981년 사우스턴 텔레비전과의 인터뷰에서 스미스는 레논이 살해되기 전날 밤에도 통화했다고 밝혔다. 그는 통화에서 향수병을 느끼며 영국으로 돌아갈 계획이라고 말했다고 한다.[31]
5. 2. 사망과 유산
레논은 미미 스미스에게 도싯 주 풀의 파노라마 로드 126번지에 있는 해변 근처 방갈로 ''하버즈 에지''를 사주었고, 이곳은 그녀가 남은 생애 동안 거주한 집이 되었다.[28] 레논은 1971년 뉴욕으로 이주한 후 영국으로 돌아오지 않았지만, 스미스와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매주 전화 통화를 했다.[30] 1981년 인터뷰에서 스미스는 레논이 사망하기 전날 밤 통화에서 향수병을 느끼며 영국으로 돌아갈 계획이라고 말했다고 밝혔다.[31] 레논 사망 후, 스미스는 레논이 집의 소유권을 자신에게 이전하지 않아 오노가 집을 소유하게 되었고 언제든 팔 수 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스미스는 1991년 12월 6일 85세의 나이로 자택에서 사망했다.[32] 당시 보조 간호사 린 바르코의 간호를 받고 있었다. 사망 당일 스미스는 욕실에서 쓰러졌고, 침대에 옮겨진 후 체인-스토크스 호흡을 시작했다. 바르코에 따르면 그녀의 마지막 말은 "안녕, 존"이었다.[33] 스미스는 스탠리 가문의 자매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았지만, 가장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났다.
1991년 12월 12일에 열린 장례식에는 신시아, 숀, 오노 요코가 참석했으며, 매카트니, 해리슨, 스타는 조화를 보냈다. 과거 신시아와 스미스 사이에 갈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간호사 바르코는 신시아가 장례식 내내 울었으며 스미스가 평소 신시아에 대해 긍정적으로 이야기했다고 회상했다.[33] 스미스는 풀 화장터에서 화장되었고, 피로연은 하버 하이츠 호텔에서 열렸다.[34] 그녀의 유해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았다. 오노 요코는 화장 당일 스미스의 집 '하버즈 에지'를 매물로 내놓았으며, 이 집은 1994년에 철거되었다.[34][35] 그 자리에는 침실 4개짜리 새 집이 지어졌고, 현재 '이매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36]
6. 영화 속 묘사
스미스는 영화 《비틀즈의 탄생》(1979),[37] 《존 & 요코: 러브 스토리》(1985),[38] 《인 히스 라이프: 존 레논 스토리》(2000),[39] 그리고 크리스틴 스콧 토마스가 연기한 《노웨어 보이》(2009)에서 묘사되었다.[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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