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레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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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존 레논은 1940년 리버풀에서 태어나 1980년 뉴욕에서 사망한 영국의 음악가이자 평화 운동가이다. 쿼리맨 결성, 비틀즈의 세계적인 성공, 솔로 활동을 통해 20세기 대중음악과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오노 요코와의 만남 이후 평화주의와 반전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음악 외에도 문학, 미술, 영화 등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활동했다. 그의 음악과 사상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으며, 그의 유산은 음악, 예술, 사회 운동 등 다방면에서 기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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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레논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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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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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존 윈스턴 레논 |
다른 이름 | 존 윈스턴 오노 레논 |
출생일 | 1940년 10월 9일 |
출생지 | 리버풀, 잉글랜드 |
사망일 | 1980년 12월 8일 |
사망지 | 미국 뉴욕 시 |
사망 원인 | 총상 |
안장 장소 | 화장 후 뉴욕 센트럴 파크에 뿌림 |
직업 | 가수 작곡가 음악가 작가 미술가 평화 운동가 |
활동 기간 | 1956년–1980년 |
배우자 | 신시아 파월(1962년 8월 23일 결혼, 1968년 11월 8일 이혼) 오노 요코(1969년 3월 20일 결혼) |
파트너 | 메이 팡 (1973년–1975년) |
자녀 | 줄리언 숀 |
아버지 | 앨프리드 레논 |
어머니 | 줄리아 스탠리 |
친척 | 줄리아 베어드(이복 여동생) 미미 스미스(이모) |
공식 웹사이트 | 존 레논 공식 웹사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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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활동 | |
장르 | 록 팝 실험 |
악기 | 보컬 기타 건반 악기 하모니카 |
레이블 | 팔로폰 캐피틀 애플 게펜 폴리도르 |
이전 소속 그룹 | 더 쿼리멘 비틀즈 더티 맥 플라스틱 오노 밴드 |
일본어 정보 | |
출생명 | 존 윈스턴 레논 |
별명 | 조니 실버 롱 존 실버 윈스턴 레그사이 조엘 노운 존 오션 닥터 윈스턴 오브기 |
출신 학교 | 리버풀 칼리지 오브 아트 |
직업 | 싱어송라이터 기타 연주자 평화 운동가 |
활동 기간 | 1957년 - 1975년 1980년 |
담당 악기 | 보컬 기타 하모니카 건반 악기 |
장르 | 록 팝 실험 음악 |
레이블 | EMI 팔로폰 애플 게펜 폴리도르 |
공동 작업자 | 쿼리멘 비틀즈 플라스틱 오노 밴드 |
사용 악기 | 리켄배커 325 에피폰 카지노 깁슨 J-160E 깁슨 레스폴 주니어 |
한국어 정보 | |
원어 이름 | John Lennon |
국적 | 영국 |
장르 | 록 팝 익스페리멘탈 |
악기 | 보컬 기타 피아노 키보드 |
직업 | 음악가 가수 작곡가 운동가 |
활동 시기 | 1957~1975, 1980 |
레이블 | 애플 캐피틀 게펜 팔로폰 폴리도르 |
가족 | 아버지 앨프리드 레논 어머니 줄리아 레논 배우자 신시아 레논(1962~1968; 이혼) 배우자 오노 요코(1969~1980) 아들 줄리언 레논 아들 숀 레논 |
관련 활동 | 쿼리맨 비틀즈 플라스틱 오노 밴드 해리 닐슨 더티 맥 오노 요코 데이비드 보위 엘튼 존 마이클 잭슨 |
웹사이트 | 존 레논 홈페이지 |
2. 생애
== 생애 ==
존 레논의 삶은 1940년 10월 9일 리버풀에서의 출생부터 1980년 12월 8일 뉴욕에서의 사망까지 다양한 경험과 업적으로 가득 차 있다. 쿼리맨 결성부터 비틀즈의 세계적인 성공, 그리고 솔로 아티스트로서의 활동과 평화 운동 참여까지, 그의 삶은 20세기 대중음악과 문화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비틀즈 시절의 활동과 솔로 활동은 하위 섹션에서 자세히 다룬다. 1960년대 중반 이후, 그는 히피 문화와 동양 사상에 영향을 받아 평화주의와 반전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이는 그의 음악과 삶 전반에 투영되었다. 특히, 오노 요코와의 만남 이후 그의 삶과 음악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갔고, 이는 그의 음악적 실험과 평화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보수적인 시각에서 볼 때 그의 반정부 활동과 사회 참여는 비판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그의 삶은 결국 1980년 암살이라는 비극적인 종지부를 찍었지만, 그의 음악과 평화에 대한 메시지는 여전히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2. 1. 1940–1957: 어린 시절
존 윈스턴 레넌(John Winston Lennon)은 1940년 10월 9일,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의 공습을 받던 머지사이드 주 리버풀에서 태어났다. 아일랜드계 아버지 알프레드(프레디) 레논(상선)과 잉글랜드인 어머니 줄리아 레넌 사이의 외아들이었다. 당시 아버지는 상선 선원으로 일하며 항해 중이었고 어머니는 다른 남자와 동거하고 있었기에, 존은 어머니의 언니인 메리 "미미" 스미스에게 길러졌다. 그의 이름 "존"은 외할아버지 존 "잭" 레논의 이름을 따왔고, 중간 이름 "윈스턴"은 당시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의 이름에서 따왔다. 그는 스코틀랜드 혈통도 이어받았다.레논을 키운 미미 스미스 부부는 중산층이었던 반면, 비틀즈의 다른 멤버들은 대부분 노동자 계급 출신이었다. 1946년 귀국한 아버지와 몇 주 동안 함께 지냈지만, 다시 어머니에게 돌아갔다가 미미 부부에게 길러졌다. 아버지는 이후 행방불명되었다. 레논은 1952년 9월 문법학교인 칼더스톤스 학교에 입학했다.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던 미미의 남편 조지는 1955년 사망했다.
레논의 10대 시절 영국에서는 로니 도네건의 "록 아일랜드 라인"이 큰 인기를 끌면서 스키플 붐이 일었다. 1956년 엘비스 프레슬리의 "하트브레이크 호텔"을 듣고 록큰롤에 매료된 레논은 신문의 통신 판매를 통해 갤로톤 챔피언 기타를 구입했다. 이 무렵 어머니가 근처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레논은 자주 어머니를 찾아갔다. 어머니는 레논에게 몇 가지 밴조 코드를 가르쳐주며 그의 음악적 재능을 북돋아 주었다. 1957년에는 그의 첫 작품인 "헬로 리틀 걸"을 작곡했고, 이때부터 기타와 보컬을 담당했다. 레논은 멘디프스, 멘러브 애비뉴 251번지에서 이모 미미와 이모부 조지와 함께 유년기를 보냈다. 미미는 그에게 많은 단편 소설책을 사주었고, 이모부는 레논에게 하모니카를 사주고 십자말 퍼즐을 풀도록 가르쳐주었다. 어머니 줄리아는 정기적으로 레논을 방문했고, 레논은 어머니의 집을 자주 방문하여 엘비스 프레슬리 음반을 듣고 밴조를 배우며 팻스 도미노의 연주법을 배웠다.
1955년 6월 5일, 이모부 조지가 간 출혈로 사망했다. 레논은 성공회 신자로 자라 도브데일 초등학교에 다녔고, 1952년 9월부터 1957년까지 쿼리 뱅크 고등학교에 다녔다. 학교에서는 "태평스럽고 유쾌하며 활기차다"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동시에 싸움과 학교 규칙 위반으로도 알려져 있었다. 그는 학교 잡지 《데일리 홀》에 만화를 그리기도 했다. 1956년 어머니는 레논에게 갤로톤 챔피언 어쿠스틱 기타를 사주었다. 이모 미미는 레논의 음악적 열망에 회의적이었지만, 어머니는 레논이 음악으로 성공할 것이라 믿었다. 1958년 7월 15일, 레논의 어머니 줄리아는 집으로 가는 길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이 사건은 레논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이후 2년 동안 과음과 싸움을 일삼았다. 어머니의 죽음은 이후 레논의 음악적 영감의 중요한 원천이 되었다. 레논은 O 레벨 시험에 실패했지만, 이모와 교장의 도움으로 리버풀 예술 대학에 입학했다. 대학에서는 테디 보이 스타일의 옷을 입었고, 학교 규칙을 어기는 행동으로 퇴학 위기에 놓였다. 결국, 그는 졸업 전에 학교를 떠났다.
2. 2. 1957–1970: 쿼리맨과 비틀즈
1957년 3월, 존 레논은 쿼리뱅크 학교 친구들과 스키플 밴드인 쿼리맨을 결성했다. 7월 6일, 울턴의 세인트 피터스 교회 연주에서 친구 아이반 본을 통해 폴 매카트니를 만나 10월 18일 그를 쿼리맨에 합류시켰다. 엘비스 프레슬리, 척 베리, 버디 홀리, 진 빈센트 등 미국 록큰롤에 심취했으며, 루 크리스티에게도 큰 영향을 받았다.[96] 1958년 2월, 매카트니를 통해 조지 해리슨을 소개받고 그를 쿼리맨에 영입했다. 같은 해 7월 15일, 어머니 줄리아가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고,[97] 이는 레논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1958년 9월, 쿼리뱅크 학교 졸업 후 리버풀 예술대학교에 입학하여 첫 번째 부인 신시아 레논(신시아 파월)을 만났다. 1959년 1월, 쿼리맨 멤버는 레논, 매카트니, 해리슨 세 명만 남았고, 리버풀과 함부르크 클럽에서 연주 활동을 시작했다. 함부르크 악기점에서 리켄베커 325 일렉트릭 기타를 구입했다. 1960년 1월, 스튜어트 서트클리프가 멤버로 합류하여 베이스를 담당했다.[98] 밴드 이름은 여러 차례 바뀐 후 8월에 "비틀즈"로 정해졌고, 피트 베스트가 합류했다. 밥 딜런이 비틀즈에게 약물을 가르쳤다는 속설은 사실이 아니다.1961년 4월, 서트클리프가 탈퇴했고 레논은 매카트니를 베이시스트로 전향시켰다.[99] 클라우스 포어만의 합류 제안은 거절했다. 서트클리프는 뇌출혈로 사망했다. 6월에는 토니 셰리던의 백 밴드로 "마이 보니" 등을 녹음했다. 1961년 12월, 브라이언 에프스타인과 매니지먼트 계약을 맺고[100] 런던 레코드 회사에 영업 활동을 시작했다. 1962년 1월 데카 레코드 심사에서 탈락했지만, 6월 EMI 파르로폰과 계약을 맺었다. 8월 16일 피트 베스트가 해고되고 링고 스타가 합류했다. 10월 5일, 비틀즈로 데뷔했다. 신시아 파월과 1962년 8월 23일에 결혼했지만,[100] 신시아의 존재는 오랫동안 비밀로 유지되었다.[101] 1963년 4월 8일 장남 줄리안 레논이 태어났다. 레논은 히피 문화에 영향을 받아 도노반, 마이크 러브, 미아 패로우, 제인 애셔, 패티 보이드, 신시아 레논과 함께 인도로 여행을 갔다.[102] 1966년 3월 4일, 모린 클리브와의 인터뷰에서 레논은 예수보다 비틀즈가 더 인기 있다는 발언을 했고,[103] 이는 미국에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8월 11일 시카고에서 해명 기자회견을 열었다.
2. 2. 1. 1957–1966: 결성, 상업적 성공과 투어 기간
1956년 9월, 15세의 존 레논은 쿼리뱅크 고등학교의 이름을 딴 스키플 그룹인 쿼리맨을 결성했다. 1957년 여름, 쿼리맨은 스키플과 로큰롤이 혼합된 열정적인 공연을 선보였다. 7월 6일, 울턴 세인트 피터 교회 원유회에서 열린 쿼리맨의 공연에서 존 레논은 폴 매카트니를 만나 그를 밴드에 합류하도록 초청했다.폴 매카트니는 자신의 이모 미미가 존 레논의 친구들이 하층 계급임을 알고 있었고, 매카트니를 깔보았다고 증언했다. 폴의 형 마이크는 아버지 역시 레논을 못마땅하게 여겨 레논이 아들을 "곤경에 빠뜨릴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폴의 아버지는 포슬린 로드 20번지 자택 거실에서 밴드 연습을 허용했다. 이 시기에 레논은 자신의 첫 노래인 "헬로 리틀 걸"을 작곡했고, 이 곡은 5년 후 더 포모스트가 불러 영국 차트 10위 안에 들었다.
매카트니는 친구 조지 해리슨을 리드 기타리스트로 추천했지만, 레논은 14세였던 해리슨이 너무 어리다고 생각했다. 매카트니는 리버풀 버스 위층에서 해리슨의 오디션을 주선했고, 해리슨은 "론치"를 연주하여 밴드에 합류했다. 레논의 미술학교 친구 스튜어트 섯클리프가 베이시스트로 합류하면서, 1960년대 초 레논, 매카트니, 해리슨, 섯클리프는 "비틀즈"가 되었다. 8월, 함부르크에서의 공연을 위해 드러머 피트 베스트가 영입되었다. 레논의 이모는 함부르크 여행에 충격을 받고 미술 공부를 계속하라고 설득했다. 함부르크 체류 후, 비틀즈는 1961년 4월과 1962년 4월에 다시 함부르크에서 공연했다. 다른 멤버들처럼 레논은 함부르크에서 프레루딘을 접했고, 긴 공연을 위해 암페타민 등 각성제를 복용했다.
1962년부터 비틀즈의 매니저가 된 브라이언 엡스타인은 밴드의 복장과 무대 매너에 큰 영향을 미쳤다. 레논은 처음에 엡스타인의 제안을 거부했지만, 결국 "돈만 준다면 바보 같은 풍선이라도 입겠다"며 받아들였다. 섯클리프가 함부르크에 남고 매카트니가 베이스를 맡았고, 드러머는 베스트에서 링고 스타로 교체되면서 1970년 해산까지 4인조 체제가 완성되었다. 비틀즈의 첫 싱글 "러브 미 두"는 1962년 10월 발매되어 영국 차트 17위를 기록했다. 그들은 1963년 2월 11일 10시간 만에 데뷔 앨범 플리즈 플리즈 미를 녹음했는데, 레논은 감기에 걸린 상태였다. 레논-매카트니는 14곡 중 8곡을 작곡했고, 레논은 당시 가사에 말장난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매카트니는 1987년 인터뷰에서 다른 멤버들이 레논을 우상으로 여겼다고 말했다.
1963년 초 비틀즈는 영국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레논은 첫 아들 줄리안이 태어난 4월에도 투어를 이어갔다. 로열 버라이어티 쇼에서 레논은 관객을 향해 재치있는 말을 했다. 1964년 2월, 에드 설리번 쇼 출연을 통해 미국에서 큰 성공을 거두며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다. 2년간 투어, 영화 제작, 작곡을 이어갔고, 레논은 책 ''그 자신의 이야기''와 ''일하는 스페인 사람''을 출판했다. 1965년 비틀즈는 대영 제국 훈장을 받았다.
레논은 팬들의 함성 때문에 음악이 가려지고 밴드의 음악성이 저하되는 것을 걱정했다. "헬프!"는 그의 감정을 표현한 곡이었다. 그는 체중이 증가했고, 무의식적으로 변화를 추구했다. 1965년 3월, 레논과 해리슨은 치과의사가 준 커피에 LSD가 들어있었음을 알게 되었고, LSD의 영향으로 나이트클럽 엘리베이터에서 마치 불이 난 것처럼 느꼈다고 회상했다.
1966년 3월, 레논은 모린 클리브와의 인터뷰에서 "기독교는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예수보다 더 인기 있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미국에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비틀즈의 투어 중단으로 이어졌다.
2. 2. 2. 1967–1970: 스튜디오 기간, 해체, 솔로 작업
1966년 8월 29일 마지막 공연 이후, 존 레논은 라이브 공연의 상실감과 밴드 탈퇴에 대한 생각에 잠겼다. 1월 우연히 LSD를 복용한 이후 약물 사용이 늘었고, 특히 1967년에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이안 맥도널드에 따르면, 지속적인 약물 복용으로 인해 "자아를 거의 상실할 뻔"했다. 그러나 1967년 레논이 작곡한 ''스트로베리 필즈 포에버''는 발표되어 ''타임''지로부터 "놀라운 창의력"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비틀즈의 대표적인 앨범인 ''세인트 페퍼스 론리 하츠 클럽 밴드''의 가사는 초기의 단순한 사랑 노래와는 크게 달랐다.8월, 비틀즈는 마하리시 마헤쉬 요기의 초월 명상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웨일스 뱅고어를 방문했다. 세미나 도중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사망 소식을 접하게 되었고, 레논은 나중에 "우리가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음악 연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고 두려웠다"고 회고했다. 해리슨과 레논은 동양 종교에 큰 관심을 가졌고, 인도에서 마하리시의 아시람을 방문하여 더 많은 지도를 받았다. 그곳에서 ''비틀즈''와 ''애비 로드''의 많은 곡들을 작곡했다.
레논은 반전 영화 ''내가 전쟁에서 이긴 방법''에 출연했고(1967년 10월 상영), 비틀즈는 엡스타인 없이 처음으로 진행한 텔레비전 영화 ''매지컬 미스터리 투어''(폴 매카트니 기획, 비틀즈 직접 각본 및 감독)를 제작했다. 12월에 공개된 이 영화는 비틀즈 작품 중 처음으로 악평을 받았지만, 레논의 ''아이 엠 더 월러스''가 수록된 사운드트랙은 성공을 거두었다. 엡스타인 사망 후 비틀즈는 사업에 참여하게 되었고, 1968년 2월 애플 레코드와 여러 자회사로 구성된 애플 코퍼레이션을 설립했다. 레논은 이를 "사업 구조 내 예술적 자유" 추구의 시도라고 설명했지만, 그의 마약 실험, 오노 요코에 대한 집착, 매카트니의 결혼 계획 등으로 인해 애플은 전문 경영진이 필요하게 되었다. 레논은 비칭 경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고, 앨런 클라인이 최고 경영자로 임명되었으나 매카트니는 계약에 서명하지 않았다.
1968년 말 레논은 더티 맥으로 ''더 롤링 스톤스 록 앤 롤 서커스''에 출연했다(1996년 공개). 레논과 오노는 1969년 3월 20일 결혼했고, 신혼여행 사진을 담은 석판화 시리즈를 발표했으나 일부는 음란물로 간주되어 금지 또는 압수되었다. 레논은 비틀즈 활동을 줄이고 오노와 함께 실험 음악 3장을 발표했으며(1968~1969), 플라스틱 오노 밴드를 결성하여 ''라이브 피스 인 토론토 1969''를 발표했다. 1969~1970년 사이에 레논은 반전 노래 ''평화에 기회를 주세요'', 헤로인 중독 후 회한을 담은 ''콜드 터키'', 그리고 ''인스턴트 카르마!''를 발표했다. 베트남 전쟁, 나이지리아 내전에 대한 영국의 개입, ''콜드 터키''의 차트 부진에 항의하며 레논은 MBE 훈장을 반납했지만, 그의 지위에는 영향이 없었다.
레논은 1969년 9월 비틀즈를 탈퇴했지만, 녹음 계약 재협상 기간에는 언론에 알리지 않기로 했다. 1970년 4월 매카트니가 솔로 앨범 발매와 함께 밴드 탈퇴를 선언하자 레논은 분노했다. 그는 나중에 "내가 밴드를 시작했고, 내가 해체했다"라고 말했고, ''롤링 스톤''과의 인터뷰에서 매카트니를 비판했다. 다른 멤버들의 오노에 대한 적대감과 매카트니에 대한 불만을 언급하며, 엡스타인 사망 후 비틀즈가 무너졌다고 주장했다.
2. 3. 1970–1980: 솔로 경력
1966년 비틀즈의 공연 활동 종료 후, 존 레넌은 영화 존 레넌의 나의 전쟁 촬영에 참여했고, 11월에는 런던의 인디카 갤러리에서 오노 요코를 만났다. 당시 일본과 동양 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레넌은 선종과 공의 개념에 매료되어 오노의 작품에 큰 흥미를 느꼈다. 특히, 오노의 작품 중 하나인 하얀 방에 설치된 사다리와 현미경, 그리고 현미경으로만 볼 수 있는 "YES"라는 글씨에 큰 감명을 받았다. [104]자금 지원을 통해 친분을 쌓은 레넌과 오노는 세인트 페퍼스 론리 하츠 클럽 밴드 녹음 기간 중 교제를 시작했고, 1968년 2월부터 4월까지 레넌이 인도에서 수행하는 동안에도 서신을 주고받았다. 5월에는 아내 신시아를 여행 보내고 오노와 동거를 시작했고, 7월 이혼을 신청하여 11월 8일 정식으로 이혼했다.
1969년 3월 지브롤터에서 결혼식을 올린 레넌과 오노는 신혼여행으로 파리를 방문하여 존과 요코의 발라드를 쓰고, 암스테르담과 몬트리올에서 "침대 시위"라는 평화 운동을 벌였다. 결혼 직후, 레넌은 미들 네임을 "Ono"로 변경하려 했지만 기각되었고, 공문서에는 "John Winston Ono Lennon"으로 표기되었다.
매스컴의 주목을 받은 레넌과 오노는 반전 운동의 중요 인물로 부상했고, 좌익 단체와의 관계로 FBI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104] 1969년 이후, 레넌은 오노와 함께 플라스틱 오노 밴드를 결성하여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에 참여하고 대영 제국 훈장을 반납했다. "배기즘", "도토리 이벤트", "침대 시위", 「War Is Over (If You Want it)」 광고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본격적인 솔로 활동 전, 레넌은 오노와 함께 투 버지너스, Unfinished Music No. 2: Life with the Lions, 웨딩 앨범 등의 아방가르드적인 앨범을 발표했고, 오노의 솔로 앨범 Yoko Ono/Plastic Ono Band, Fly (Yoko Ono album), Approximately Infinite Universe, Feeling the Space 등도 함께 제작했다. 또한, 섬타임 인 뉴욕 시티, 더블 판타지, 밀크 앤드 허니 등의 공동 명의 음악 작품도 발표했다.
레넌은 1968년부터 1976년까지 플라스틱 오노 밴드 명의로 활동하며, 클라우스 포어만, 앨런 화이트, 짐 켈트너, 니키 호프킨스 등과 함께 1969년 싱글 「평화를 우리에게」, 「콜드 터키」와 라이브 앨범 『평화의 기도를 담아~라이브 피스 인 토론토 1969~』를 발표했다. 비틀즈 활동 중이던 1970년 2월에는 해리슨이 참여한 「인스턴트 카르마」를 발표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70년 4월 10일 맥카트니의 탈퇴로 비틀즈가 사실상 해체된 후, 레넌은 원초치료를 받고, 링고 스타, 클라우스 포어만, 빌리 프레스턴과 함께 앨범 존의 영혼을 발표했다. 1971년 6월에는 앨범 이매진 (앨범) 제작을 시작하여 미국과 영국, 일본에서 1위를 기록하며 대히트를 기록했다. 9월 뉴욕으로 거처를 옮긴 레넌은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반체제 운동가 및 뮤지션들과 교류하며 정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존 싱클레어 구제 공연, 앳티카 교도소 수감자 가족을 위한 자선 공연 등을 했고, 리처드 닉슨 행정부와 FBI의 감시를 받았다. [105] [106]
1971년에는 마일스 데이비스와 만나 농구를 즐겼고, TV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척 베리와 함께 공연을 했다. 6월에 발표한 섬타임 인 뉴욕 시티는 교도소 폭동, 인종 차별, 성 차별, 북아일랜드 분쟁, 미국 영주권 등을 다루었고, 앨범 재킷에는 리처드 닉슨과 마오쩌둥의 합성 사진을 사용했다. 8월에는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자선 공연을 열고 스티비 원더와 함께 공연했다.
1973년 4월에는 오노와 함께 가상 국가 "누토피아"의 건국을 선언했고, 링고 스타의 앨범에 참여했다. 9월에는 오노와 헤어지고 메이 팡과 동거하며 "잃어버린 주말"을 보냈고, 이 기간 동안 전처 신시아와 아들 줄리안과 재회하고 맥카트니와도 교류했다. 11월에는 앨범 마인드 게임스를 발표했다.
1974년에는 해리 닐슨의 앨범을 프로듀스하고, 자신의 앨범 심의 벽, 사랑의 다리를 발표하여 미국 1위를 차지했다. 엘튼 존과 함께 공연하기도 했고, 믹 재거의 곡을 프로듀스했다. 1975년에는 커버 앨범 록 앤 롤 (존 레논의 앨범)을 발표했고, 데이비드 보위와 협업하여 보위의 앨범 영 아메리칸스 (앨범)에 참여했다. 10월에는 둘째 아들 션이 태어났다.
1976년에는 션의 양육에 전념하기 위해 음악 활동에서 은퇴하고, 미국의 영주권을 취득했다. 5년간 음악 활동을 중단했지만, 집에서 작곡 활동을 계속했고, 그 곡들은 1998년 존 레논 안솔로지에서 발표되었다. 1979년에는 쿠르트 발트하임으로부터 인도차이나 난민 구제 공연 참여 요청을 받았으나, 사퇴했다. [107] [108]
2. 3. 1. 1970–1972: 초기 솔로 성공과 행동주의
1970년, 존 레논과 오노 요코는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에서 아서 야노브 박사로부터 원초 치료를 받았다.[14] 유년기의 정서적 고통을 치유하기 위한 이 치료는 4개월 동안 주 2회 진행되었지만, 미국 비자 만료로 런던으로 돌아왔다.[14] 레논의 데뷔 솔로 앨범 John Lennon/Plastic Ono Band (1970)는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개인적인 가사와 음울한 사운드로 인해 상업적 성공은 제한적이었다. 앨범에는 유년 시절의 상처를 다룬 "Mother"와 부르주아 사회를 비판하는 "Working Class Hero"가 수록되어 있는데, 후자는 "넌 아직도 망할 하류층이야"라는 가사 때문에 방송사들의 비판을 받았다.1971년 1월, 타리크 알리와의 인터뷰에서 영감을 받아 "Power to the People"을 작곡했다. 레논은 음란물 혐의로 기소된 잡지 Oz를 지지하며, 이 소송을 "역겨운 파시즘"이라고 비난하고, 오노 요코와 함께 "God Save Us/Do the Oz" 싱글을 발매하고 지지 시위에 참여했다.
Imagine (1971)은 상업적 성공을 목표로 대중적인 사운드를 채택했고, 롤링 스톤지는 앨범의 음악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레논의 태도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을 보였다. 타이틀곡 "Imagine"은 반전 운동의 상징이 되었고, "How Do You Sleep?"는 Ram 앨범의 가사에 대한 반격으로, 폴 매카트니를 비판하는 곡이었다. 레논은 1970년대 중반 이후 자신의 입장을 수정하며, 이 곡이 자신을 향한 것이라고 말했다. "Jealous Guy"에서는 여성에 대한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반성했다.
1971년 8월 뉴욕으로 이주한 레논과 오노는 12월 "Happy Xmas (War Is Over)"를 발매했다. 리처드 닉슨 행정부는 레논의 반전 운동과 반닉슨 활동에 대해 4년간의 추방 시도를 시작했다.[15] Some Time in New York City (1972)는 오노 요코와 함께 제작한 앨범으로, 여성의 권리, 인종 문제, 북아일랜드 문제 등을 다루었지만, 상업적으로 실패하고 비판을 받았다. "Woman Is the Nigger of the World"는 인종차별적 표현 때문에 많은 라디오 방송국에서 방송을 거부당했다. 레논은 정신병원 환자들을 위한 자선 공연을 열었고, 1972년 8월 30일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공연이 그의 마지막 대규모 공연이었다. 조지 맥거번의 대선 패배 후, 레논과 오노는 제리 루빈의 집에서 열린 추모 행사에 참석했다.[15] 레논은 술에 취해 여성과 성관계를 맺어 오노를 당황하게 했고, 이 사건은 오노의 노래 "Death of Samantha"에 영감을 주었다.[17]
2. 3. 2. 1973–1975: "잃어버린 주말"
1973년, 존 레논이 《Mind Games》 앨범 녹음 중이던 시기에 그는 요코 오노와 별거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18개월간의 별거 기간은 레논 자신에 의해 "잃어버린 주말"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로스앤젤레스와 뉴욕에서 개인 비서 메이 팡과 함께 지냈다.[19] "플라스틱 오노 밴드"라는 이름으로 발매된 《Mind Games》는 1973년 11월에 출시되었고, 같은 달에 발매된 링고 스타의 앨범 《Ringo》에 수록된 "I'm the Greatest" 곡에도 참여했다. 레논이 가이드 보컬을 맡은 다른 버전은 《John Lennon Anthology》에 수록되어 있다.1974년 초, 레논은 술에 심하게 취해 해리 닐슨과 함께 여러 사건을 일으켜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특히 3월에 로스앤젤레스의 트루바두르 클럽에서 두 차례의 사건이 크게 보도되었다. 첫 번째는 레논이 웨이트리스와 언쟁을 벌이며 이마에 사용한 생리대를 붙인 사건이고, 두 번째는 2주 후 레논과 닐슨이 스머더스 브라더스를 괴롭히다 클럽에서 퇴장당한 사건이다. 레논은 닐슨의 앨범 《Pussy Cats》의 프로듀싱을 맡았고, 메이 팡은 그들을 위해 로스앤젤레스 해변가에 있는 집을 임대했다. 그러나 한 달간의 녹음 세션은 혼란스러웠고, 레논은 팡과 함께 뉴욕으로 돌아가 앨범 작업을 마무리했다. 4월에는 믹 재거의 노래 "Too Many Cooks (Spoil the Soup)"를 프로듀싱했지만, 계약 문제로 30년 이상 발매되지 않았다가 메이 팡이 녹음을 제공하여 믹 재거의 《The Very Best of Mick Jagger》(2007)에 수록되었다.[20]
뉴욕으로 돌아온 레논은 《Walls and Bridges》 앨범을 녹음했고, 이 앨범은 1974년 10월에 발매되었다. 엘튼 존이 백킹 보컬과 피아노를 맡은 "Whatever Gets You Thru the Night" 싱글은 레논의 솔로 경력 중 유일하게 빌보드 핫 100 1위를 차지했다. 연말에는 이 앨범의 두 번째 싱글 "#9 Dream"이 발매되었다. 링고 스타의 《Goodnight Vienna》(1974)의 타이틀 곡 작사 및 피아노 연주에도 참여했다. 11월 28일에는 엘튼 존의 추수감사절 콘서트에 특별 게스트로 출연하여 "Whatever Gets You Thru the Night"의 1위 공약을 지켰다. 이 무대에서 그는 "폴이라고 불리는 옛날 약혼자의 노래"라며 비틀즈의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와 "I Saw Her Standing There"를 연주했다.
1975년 1월에는 데이비드 보위의 미국 첫 1위 곡 "Fame"의 공동 작곡 및 기타 연주와 백킹 보컬 참여를 했고, 같은 달 엘튼 존이 커버한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가 1위를 차지했는데, 여기서 레논은 "닥터 윈스턴 오'부기"라는 가명으로 기타 연주와 백킹 보컬을 맡았다. 오노 요코와 재결합한 레논은 커버 앨범 《Rock 'n' Roll》(1975)을 발매했고, 2월에 발매된 싱글 "Stand by Me"는 미국과 영국에서 히트를 기록했으며, 이후 5년간 싱글을 발매하지 않았다. 그는 4월 18일에 녹화되어 6월에 방영된 ATV 특집 프로그램 《A Salute to Lew Grade》에서 마지막 무대 공연을 가졌다. 어쿠스틱 기타와 8인조 밴드와 함께 《Rock 'n' Roll》 수록곡인 "Stand by Me"와 "Slippin' and Slidin'"(두 곡 모두 방송되지 않음), 그리고 "Imagine"을 공연했다. "Etc."라는 밴드는 머리 뒤에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이는 레논이 루 그레이드의 이중적인 면모를 비꼬기 위해 고안한 아이디어였다.[149]
2. 3. 3. 1975–1980: 은퇴와 복귀
1975년 10월 9일, 존 레논은 오노 요코와의 사이에서 둘째 아들 숀 레논을 얻었다. 이후 레논은 5년간 음악 활동을 중단하고 육아에 전념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이전에 녹음된 노래들을 모은 컴필레이션 음반 《Shaved Fish》를 발매했다. 레논은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숀의 식사를 준비하고 그와 시간을 보냈다. 1976년에는 링고 스타의 음반 《Ringo's Rotogravure》에 수록될 〈Cookin' (In the Kitchen of Love)〉를 작곡하고 녹음했는데, 이는 1980년까지 그의 마지막 녹음 세션이었다. 1977년 6월 도쿄에서 레논은 음악 활동 중단을 공식적으로 선언하며, 육아에 전념하고 충분한 시간을 보낸 후에 음악 활동을 재개하겠다고 밝혔다. 활동 중단 기간 동안 그는 그림을 그렸고, 자서전적인 내용과 그가 "미친 것들"이라고 부르는 내용을 섞은 책을 썼다. 이 책들은 모두 사후에 출판되었다.1980년 10월, 레논은 싱글 〈(Just Like) Starting Over〉를 발표하며 5년 만에 음악 활동을 재개했다. 11월에는 오노 요코와 함께 공동으로 정규 음반 《Double Fantasy》를 발표했다. 이 음반에는 6월에 43피트 크기의 범선을 타고 버뮤다를 여행하는 동안 쓴 곡들이 수록되어 있으며, 새롭게 찾은 안정적인 가정 생활에서 느끼는 만족감을 반영하고 있다. 후속 앨범 《Milk and Honey》를 위한 충분한 곡들이 녹음되었고, 이 앨범은 1984년 사후에 발매되었다. 《Double Fantasy》는 당시에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고, 《Melody Maker》는 "관대하기 짝이 없이 무미건조하다…지독하게도 따분하다"고 평했다. 레논은 5년간의 활동 중단에 대해 나중에 "빵을 구웠고 아기를 돌봤다"고 회고했다. 그는 션에게 헌신적으로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그의 식사를 준비하고 함께 시간을 보냈다.
2. 4. 1980년 12월 8일: 죽음
1980년 12월 8일 오후 10시 50분경(EST), 존 레논과 오노 요코는 뉴욕의 다코타 아파트로 돌아오던 중 마크 채프먼의 총격을 받았다. 채프먼은 아파트 아치에서 레논의 등에 총 네 발을 쐈고, 레논은 루즈벨트 병원으로 급히 이송되었으나 11시경 사망했다. 같은 날 저녁, 레논은 채프먼에게 자신의 새 앨범 《더블 판타지》에 사인을 해 주었다. 오노 요코는 레논의 장례식은 치르지 않겠다고 발표하고, 전 세계 팬들에게 그의 명복을 빌어달라고 요청했다. 레논의 시신은 뉴욕 시 하츠데일 펀클리프 묘지에서 화장되었고, 그의 재는 오노 요코에 의해 센트럴 파크에 뿌려졌다. 이후 그곳에는 스트로베리 필즈 기념비가 세워졌다. 채프먼은 2급 살인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최소 20년의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며, 2016년까지 가석방이 여러 차례 거부되었다. 레논의 죽음은 전 세계적으로 큰 충격과 슬픔을 불러일으켰고, 그의 음악은 계속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사건 이후 몇 주 동안, 그의 앨범 《더블 판타지》와 싱글 "(Just Like) Starting Over"는 영국과 미국 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다. "Imagine" 또한 1981년 1월 영국 차트 1위를 기록했고, "Happy Xmas"는 2위에 올랐다. 레논의 죽음은 전 세계 음악계에 큰 슬픔을 안겨주었으며, 그의 음악과 평화주의적 메시지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비틀즈 멤버들과 많은 뮤지션들은 레논을 추모하는 곡들을 발표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일본에서는 비틀즈 팬클럽 주최의 추모 행사가 열렸고, 센트럴 파크에는 그의를 추모하는 "이매진의 비"가 설치되었다. [150] [151] [27] [28] [29] [30] [31]3. 주변 관계
== 주변 관계 ==
존 레논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주요 인물들과의 관계를 살펴본다. 브라이언 엡스타인, 줄리언 레논, 오노 요코, 메이 팡, 그리고 다른 비틀즈 멤버들과의 관계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자.
레논과 엡스타인의 관계는 복잡하고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엡스타인은 레논에게 강한 매력을 느꼈고, 그들의 관계는 연애에 가까웠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레논은 엡스타인의 동성애와 유대인임을 조롱하는 등, 그와의 관계에서 모순된 행동을 보였다. 레논은 엡스타인의 자서전 제목을 "''Queer Jew''"로 제안하기도 했다. 이러한 행동은 레논의 성 정체성에 대한 불확실성과 억압된 감정, 그리고 당시 사회적 편견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레논의 첫째 아들 줄리언 레논과의 관계는 그의 삶의 중요한 부분이었지만, 항상 순탄치 않았다. 비틀즈의 인기 절정기에 태어난 줄리언은 아버지와 멀리 떨어져 지내야 했고, 아버지보다 폴 매카트니와 더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레논은 줄리언과의 관계를 회복하려 노력했고, 그의 음악적 재능을 지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레논의 사후, 줄리언에게 남겨진 유산은 미미했다는 점은 여전히 안타까운 부분이다.
오노 요코와의 관계는 레논의 삶과 음악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그들의 만남은 레논의 개인적인 변화와 더불어 반전 운동 등 사회 운동 참여의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오노와의 관계는 레논의 첫 번째 부인 신시아와의 이혼으로 이어졌고, 그들의 관계는 항상 논란과 비판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은 함께 다양한 예술 활동을 펼치고 반전 운동을 벌였지만, 이러한 활동들은 그들의 관계만큼이나 논쟁적인 부분으로 남아있다.
메이 팡은 레논과 오노의 관계가 소원해졌을 때, 레논의 동반자 역할을 했다. 레논은 팡과의 관계에서 억눌렸던 감정을 해소하고, 가족 및 친구들과 관계를 회복하기 시작했지만, 결국 오노와의 관계로 돌아갔다. 이는 레논의 불안정한 심리 상태와 오노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사례로 볼 수 있다.
비틀즈 멤버들과의 관계는 레논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었지만, 비틀즈 해체 후 그들의 관계는 복잡해졌다. 레논은 링고 스타와는 꾸준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지만, 폴 매카트니와 조지 해리슨과의 관계는 갈등과 화해를 반복했다. 특히 매카트니와의 관계는 오랜 시간 동안 갈등과 경쟁, 그리고 어느 정도의 화해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레논은 매카트니를 음악적으로 경쟁 상대로 인식하면서도, 그에 대한 애증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관계는 시간이 흘러 회복되었고, 매카트니는 현재까지도 레논의 음악을 기리고 있다.
3. 1. 신시아 레논
존 레논은 1957년 리버풀 예술대학에서 신시아 파월(1939~2015)을 만났다. 처음엔 신시아는 레논의 태도와 외모에 겁먹었지만, 그가 브리지트 바르도에게 빠져있다는 말을 듣고 머리를 금발로 염색했다. 레논의 구애에도 신시아는 약혼 상태라고 했고, 레논은 거칠게 반응했다. 신시아는 종종 레논과 함께 쿼리맨 공연에 갔고, 함부르크까지 그를 방문하기도 했다. 레논은 질투심이 많았고, 폭력적인 성향을 보였다. 신시아의 회고록에 따르면, 레논은 스튜어트 서틀리프와 춤추는 신시아를 때리기도 했다. 이후 관계는 끝났지만, 레논의 사과 후 다시 만났다. 레논은 신시아에게 폭력을 행사했지만, 나중에는 신체적 폭력은 줄였다고 한다. 레논은 나중에 오노 요코를 만나기 전까지는 여성에 대한 자신의 남성 중심적인 태도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았다고 말했다. 비틀즈의 노래 ''Getting Better''는 그의 경험을 반영한다고 그는 언급했다.1962년 7월 신시아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레논은 결혼을 결심했고, 8월 23일 리버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브라이언 엡스타인은 비틀즈의 인기에 대한 우려로 결혼 사실을 비밀로 하자고 요청했다. 그들의 아들 줄리안 레논은 1963년 4월 8일에 태어났다. 레논은 당시 투어 중이어서 며칠 후에야 아들을 만났다.
신시아는 레논의 LSD 사용으로 인해 부부 관계가 악화되었다고 여겼다. 1967년 마하리시 마헤시 요기의 세미나 참석을 위해 뱅고어로 가는 기차에서 신시아가 경찰에 의해 탑승 거부당한 사건은 결혼 생활의 끝을 예고하는 사건이었다. 신시아는 레논과 오노 요코가 함께 있는 것을 목격하고 집을 나갔다. 몇 주 후, 레논은 이혼과 줄리안의 양육권을 요구했고, 결국 1968년 11월 이혼했다. 레논은 신시아에게 10만 파운드와 연금, 그리고 줄리안의 양육권을 주었다.
3. 2. 브라이언 엡스타인
1962년 11월, 리버풀의 캐번 클럽에서 공연 중이던 비틀즈는 정오 공연 후 브라이언 엡스타인을 만났다. 엡스타인은 동성애자였으며, 전기 작가 필립 노먼에 따르면 그가 비틀즈의 매니저가 되고 싶어했던 이유 중 하나는 존 레논에게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줄리안이 태어난 직후 레논은 엡스타인과 함께 스페인으로 휴가를 갔고, 이로 인해 두 사람 관계에 대한 추측이 제기되었다. 후에 이에 대해 질문받은 레논은 "거의 연애였지만, 완전히 그렇지는 않았다. 결실은 없었지만, 꽤 강렬한 관계였다. 내가 동성애자인 것을 의식했던 동성애자와의 첫 경험이었다. 토레몰리노스의 카페에 앉아 소년들을 보며 '얘가 좋니? 아니면 쟤가 좋니?'라고 물었었다. 작가처럼 그 경험을 즐겼다"고 회고했다.스페인에서 돌아온 직후인 1963년 6월, 맥카트니의 21번째 생일 파티에서 레논은 캐번 클럽 사회자 밥 울러가 "신혼여행은 어떠셨어요, 존?"이라고 농담처럼 말한 것에 폭력을 행사했다. 결혼 후 10개월이나 지났고, 신혼여행은 아직 두 달이나 남은 상태였다. 당시 술에 취해 있던 레논은 "그가 날 게이라고 불렀으니, 그의 갈비뼈를 두들겨팼다"고 말했다.
레논은 엡스타인의 동성애와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조롱하는 것을 즐겼다. 엡스타인이 자서전 제목에 대한 제안을 요청했을 때, 레논은 "''Queer Jew''"를 제안했고, 최종 제목인 "''A Cellarful of Noise''"을 알게 되자 "''A Cellarful of Boys''"라고 패러디했다. 엡스타인의 아파트를 방문한 사람에게는 "그를 협박하러 왔나? 아니라면 런던에서 그렇게 하지 않은 유일한 녀석이군"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베이비, 유어 어 리치 맨" 녹음 중에는 "베이비, 넌 부유한 동성애자 유대인(Baby, you're a rich fag Jew)"으로 바꾼 후렴구를 불렀다.
3. 3. 줄리언 레논
존 레논의 첫째 아들 줄리언 레논은 비틀즈의 인기가 절정에 달했던 1963년 4월 8일, 레논과 신시아의 결혼 생활 중에 태어났다. 당시 레논은 비틀즈 투어 중이었다. 브라이언 엡스타인은 줄리언의 출생 사실이 비틀즈의 상업적 성공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줄리언의 출생과 레논-신시아 부부의 결혼 사실을 비밀로 유지했다. 줄리언은 약 4년 후,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제가 그린 수채화 그림을 보여드렸어요. 별들과 학교에서 알던 금발 여자아이 그림이었죠. 아버지는 '이게 뭐니?'라고 물었고, 전 '다이아몬드와 함께 있는 하늘 속 루시(It's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라고 대답했어요."라고 말했다. 레논은 이를 비틀즈의 노래 제목으로 사용했고, 이후 LSD의 머리글자에서 따왔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레논은 마약과 관련된 노래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폴 매카트니도 줄리언이 무의식적으로 지은 이름이라고 레논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레논은 줄리언과 거리를 두었고, 줄리언은 아버지보다 매카트니와 더 가까웠다. 레논의 이혼 과정 중, 매카트니는 신시아와 줄리언을 방문하던 중 줄리언을 위해 'Hey Jules'라는 곡을 작곡했는데, 이후 '헤이 주드'로 제목이 바뀌었다. 레논은 "그건 폴의 곡 중 가장 좋은 곡입니다. 처음에는 제 아들 줄리언에 관한 곡이었죠… 그는 후에 'Hey Jude'로 바꾸었어요. 전 항상 그게 저와 오노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그건 아니었다고 하더군요."라고 회고했다.레논과 줄리언의 관계는 이미 소원해져 있었고, 1971년 레논이 오노 요코와 함께 뉴욕으로 이주하면서 1973년까지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팡의 권유로 줄리언과 어머니는 레논을 만나러 로스앤젤레스의 디즈니랜드를 방문했다. 이후 줄리언은 아버지를 정기적으로 방문했고, 레논은 그에게 자신의 앨범 ''월즈 앤 브리지스''의 드럼 연주를 맡기기도 했다. 레논은 줄리언에게 깁슨 레스폴 기타와 여러 악기를 사주고, 기타 코드를 가르쳐주며 그의 음악적 재능을 북돋아주었다. 줄리언은 뉴욕에서 아버지와 보낸 시간을 회상하며 "훨씬 더 가까워졌다"고 말했다. "우리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많이 웃었고, 좋은 시간이었죠."
''플레이보이''지와의 인터뷰에서 레논은 "숀은 계획된 아이였고, 거기에 차이가 있습니다. 저는 줄리언이라고 해서 조금이라도 덜한 사랑을 준 건 아닙니다. 그가 위스키 한 병에서 나왔든, 그 날 피임약을 안 먹어서였든, 여전히 제 아들이에요. 그는 여기에, 제 안에 존재해요. 그리고 언제나 함께할 겁니다."라고 말했다. 당시 17세였던 줄리언과의 관계 회복을 시도했고, "줄리언과 전 미래의 관계를 맺을 거예요"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레논 사후, 줄리언에게 남겨진 유산은 거의 없었다.

3. 4. 오노 요코
존 레논이 오노 요코를 만난 경위는 두 가지 설이 있다. 레논의 설명에 따르면, 1966년 11월 9일 런던 인디카 갤러리에서 개념 예술 전시회를 준비하던 오노를 갤러리 주인 존 던바를 통해 소개받았다.[152] 레논은 오노의 작품 〈못을 박기 위한 페인팅〉에 매료되었고, 전시 시작 전에도 불구하고 못을 박고 싶어 했지만 오노는 거절했다. 이후 레논은 "상상의 5실링을 드릴 테니, 상상의 못을 망치질하게 해줘요"라고 말해 오노의 마음을 돌렸다.[152] 폴 매카트니의 증언에 따르면, 1965년 말 오노가 존 케이지의 《Notations》를 위해 악보 원고 기증을 요청했고, 매카트니는 거절했지만 레논은 〈The Word〉의 가사를 직접 쓴 원고를 주었다.[152]
오노는 이후 레논에게 지속적으로 전화를 걸었고, 신시아가 이에 대해 따지자 레논은 오노가 단순히 아방가르드 예술로 돈을 벌려는 것이라고 말했다.[153] 1968년 5월, 신시아가 그리스로 휴가를 간 사이 레논은 오노를 집으로 초대했고, 그들은 함께 《Two Virgins》 앨범의 수록곡을 녹음하고 사랑을 나누었다.[153] 신시아가 돌아왔을 때 오노는 레논과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고, 레논은 간단히 "오, 안녕."이라고 인사했다.[153] 오노는 1968년 유산을 했고,[153] 몇 주 후 레논과 신시아는 이혼했다.[153]
비틀즈 활동 후반 2년간 레논과 오노는 베트남 전쟁 반대 시위를 벌였다. 1969년 3월 20일 지브롤터에서 결혼한 후,[154] 암스테르담 힐튼 호텔에서 '베드 인' 시위를 하는 신혼여행을 보냈다. 미국에서도 시위를 계획했지만 입국 거부당했고,[154] 몬트리올 퀸 엘리자베스 호텔에서 〈Give Peace a Chance〉를 녹음했다.[154] 그들은 함께 행위 예술을 선보이기도 했는데, 빈에서 처음 선보인 배기즘이 대표적이다. 레논은 비틀즈 노래 〈The Ballad of John and Yoko〉에 이 시기를 상세히 담았다.[154] 1969년 4월 22일 레논은 중간 이름에 '오노'를 추가했고, 애플 코어 건물에서 소규모 파티를 열었다. 비록 존 오노 레논이라는 이름을 사용했지만, 공식 문서에는 존 윈스턴 오노 레논으로 표기되었다.[154] 부부는 버크셔의 티텐 허스트 파크에 정착했다.[154] 오노가 교통사고를 당하자 레논은 비틀즈의 앨범 《Abbey Road》 녹음 중 스튜디오에 킹사이즈 침대를 가져다 놓았다.[154]
비난을 피하기 위해 1971년 8월 31일 뉴욕으로 이주하여 5번가 세인트 레지스 호텔에 머물다가, 1971년 10월 16일 그리니치빌리지의 뱅크로 105번지로 이사했다. 강도 사건 이후 더 다코타로 이사했다.[154] 레논은 1966년 11월 9일 인디카 갤러리에서 오노를 만났다. 오노의 개념 미술 작품에 매료되었고, 애플에 전시된 사과를 한 입 베어 먹었다는 일화가 있다.[32] 1968년 5월 신시아가 그리스에 간 사이 오노와 동거를 시작했고, 1968년 11월 8일 신시아와 이혼했다.[33] 1969년 3월 지브롤터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암스테르담과 몬트리올에서 '침대 시위'를 벌였다.[104] 레논은 중간 이름을 "오노"로 바꾸려 했으나 기각되어 공식 문서에는 "John Winston Ono Lennon"으로 표기되었다.[104] 그들은 반전 운동의 중요 인물이 되었고, FBI의 감시 대상이 되기도 했다.[104] 플라스틱 오노 밴드를 결성하여 베트남 전쟁 반대 활동에 참여했고, 대영 제국 훈장을 반납했다.[104] 많은 공동 음악 작품을 발표했다.
3. 5. 메이 팡
존 레논과 요코 오노의 별거 기간 동안, 메이 팡은 레논의 동반자 역할을 했다. 메이 팡은 1969년부터 ABKCO 산업의 접수원으로 일했고, 이듬해 레논과 오노는 ABKCO 프로젝트를 통해 그녀를 만나 개인 비서로 고용했다. 3년간 일하던 중, 오노는 레논과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있다며 팡에게 레논과의 육체적 관계를 제안했고, "그는 널 굉장히 좋아해"라고 말했다. 당시 22세였던 팡은 놀랐지만 결국 오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후 레논과 팡은 캘리포니아로 이주하여 약 18개월 동안 동거하며 레논이 "잃어버린 주말"이라고 부른 시기를 보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팡은 레논이 2년 만에 다시 만난 아들 줄리언과의 관계 회복을 도왔고, 스타, 맥카트니, 말 에반스, 해리 닐슨 등과의 관계 회복에도 기여했다. 하지만 해리 닐슨과 술을 마시던 중 레논은 팡의 말을 오해하여 그녀의 목을 조르려는 일이 있었고, 닐슨이 저지했다.뉴욕으로 돌아온 후, 둘은 줄리언의 방문을 위해 새 숙소를 마련했다. 레논은 오노로 인해 억눌렸던 감정을 해소하고 가족 및 친구들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12월에는 오노의 전화를 받지 않고 팡과 함께 집을 구입할 계획까지 세웠다. 하지만 1975년 1월, 오노가 금연 방법을 찾았다고 말하자 레논은 다시 오노를 만났고, 집으로 돌아가거나 팡과 연락하지 않았다. 다음 날 팡의 전화에 오노는 최면 요법으로 지쳐 레논이 만날 수 없다고 했고, 이틀 후 치과에서 만난 레논은 매우 혼란스러워 보였다. 팡은 레논이 세뇌당했다고 의심했다. 결국 레논은 팡에게 오노와의 관계는 끝났지만, 오노가 자신을 정부로 계속 만나는 것을 허락했다고 말했다.
3. 6. 숀 레논
존 레논과 오노 요코의 재결합 후, 오노 요코는 임신을 하였다. 이전 세 번의 유산 경험으로 인해 낙태를 고려했으나, 레논이 전업주부 역할을 맡는다는 조건으로 임신을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1975년 10월 9일, 레논의 35번째 생일에 둘째 아들인 션 오노 레논(션 레넌)이 제왕절개를 통해 태어났다. 션의 탄생으로 레논은 5년간 음악 활동을 중단하고 육아에 전념했다. 그는 1살이었던 션의 일상을 사진으로 기록했으며, 수많은 그림을 그려주었다. 이 그림들은 사후에 ''진정한 사랑: 션을 위한 그림들''(Real Love: The Drawings for Sean)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레논은 션에 대한 깊은 애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내 뱃속에서 나오진 않았지만, 하늘에 맹세코, 난 그의 뼈를 창조했다. 왜냐면 그의 매 식사를 챙겨줬고 잠을 재우기도 해왔으니까, 물고기처럼 수영한다는 것도 안다."3. 7. 비틀즈 멤버
1964년 뉴욕 JFK 공항에 도착한 레논(맨 왼쪽)과 비틀즈 멤버들비틀즈 해체 후, 레논은 링고 스타와는 계속해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지만, 폴 매카트니와 조지 해리슨과의 관계는 복잡했다. 초기에는 해리슨과 가까웠으나, 1971년 레논이 미국으로 이주한 후 관계가 소원해졌다. 1974년 해리슨의 ''다크 호스'' 투어 당시 뉴욕에서 만날 기회가 있었지만, 비틀즈 해체 관련 법적 서류 서명 문제로 갈등을 빚어 무산되었다. 레논은 결국 휴가 중에 서류에 서명했다. 1980년 해리슨이 출판한 자서전에서 레논에 대한 언급이 적었던 점에 대해 레논은 실망감을 표출하기도 했다. 그는 ''플레이보이''지 인터뷰에서 "상처받았다...내가 그의 삶에 미친 영향은 전혀 없었던 것 같다...그는 수년 동안 만난 하찮은 색소폰 연주자나 기타 연주자는 모두 기억하는데, 나는 책에 없었다"고 말했다.
레논은 매카트니에 대한 강한 감정을 드러냈다. ''잠 못 이루는 밤''의 가사를 통해 매카트니를 공격했고, 비틀즈 해체 후 3년간 언론을 통해 그와 갈등을 빚었다. 그러나 이후 두 사람은 관계를 회복하여 1974년에는 함께 음악 작업을 하기도 했다. 1976년 매카트니의 마지막 방문 당시에는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에서 비틀즈 재결합을 제안하는 장면을 함께 시청하기도 했으나, 출연 제안은 실현되지 않았다. 사망 3일 전 인터뷰에서 레논은 "내 커리어 내내 폴 매카트니와 오노 요코, 단 두 사람과만 일하기로 했다...나쁜 선택은 아니었다"고 말하며 매카트니에 대한 생각을 간결하게 정리했다.
매카트니와의 불화 속에서도 레논은 그와의 음악적 경쟁을 의식했고, 그의 음악을 주목했다. 레논은 1975년부터 음악 활동을 중단했던 기간 동안 매카트니가 평범한 음악을 만드는 동안에는 만족스러워 했다. 1980년 매카트니가 ''커밍 업''을 발표하자 레논은 다시 스튜디오로 돌아왔고, "내 머리를 쥐어뜯게 만든다!"라며 농담 섞인 불평을 했다. 같은 해, 비틀즈를 두려운 적 또는 가장 친한 친구로 묘사해달라는 질문에 레논은 둘 다 아니라며, 오랫동안 멤버들을 만나지 못했다고 답했지만, "나는 여전히 그 친구들을 사랑한다. 비틀즈는 끝났지만 존, 폴, 조지, 링고는 계속된다"라고 덧붙였다. 비틀즈 해체 직후 두 사람의 불화는 팬들과 언론에도 알려졌고, 서로의 음악에서 공격적인 가사를 사용하는 등 심각한 갈등이 있었다.[120] 하지만 1970년대 중반 이후 매카트니가 레논을 방문하는 등 관계가 회복되기 시작했고, 1974년에는 함께 잼 세션을 열기도 했다. 현재 매카트니는 비틀즈 노래를 부를 때 레논의 파트를 맡거나 레논의 솔로곡을 커버하고 있다. 매카트니가 레논의 집을 방문했을 때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 출연 제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과거를 회상하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레논은 "폴의 험담을 할 수 있는 것은 나뿐이다. 다른 놈이 하는 것은 용서하지 않는다"고 말할 정도로 매카트니에 대한 애증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레논은 사망 직전 인터뷰에서 "인생에서 두 번, 훌륭한 선택을 했다. 폴과 오노 요코다. 그것은 매우 좋은 선택이었다"고 말했다.[121]
4. 정치적 활동
== 정치적 활동 ==
레논은 평화 운동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69년 3월, 신혼여행 중 암스테르담 힐튼 호텔에서 오노 요코와 함께 진행한 '베드 인 포 피스'는 전 세계 언론의 조롱을 받았지만, 반전 운동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었다.[155][35] 세 달 뒤 몬트리올 퀸 엘리자베스 호텔에서 열린 두 번째 베드 인에서 레논은 반전 앤섬이 된 〈Give Peace a Chance〉를 작곡하고 녹음했다. 같은 해 11월 워싱턴 D.C.의 베트남 반전 시위에서는 50만 명이 이 노래를 함께 불렀다.[155][35] 12월에는 "전쟁은 끝났다! 당신이 원한다면!"이라는 메시지를 전 세계 10개 도시에 게시하는 광고 캠페인을 진행했다.
레논은 제임스 핸래티의 무죄를 주장하는 그의 가족들을 지지하며, 핸래티를 사형시킨 자들을 "남아프리카의 거리에서 흑인들을 살해하는 자들과 같은 종류의 인간"이라고 비판했다.[156][36] 런던에서 "영국이 핸래티를 살해했다"라는 플래카드 시위를 벌이고, 이 사건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도 했다. 하지만 몇 년 후 항소심에서 DNA 증거가 일치하여 핸래티의 유죄가 확정되었다.[156][36]
1971년에는 어퍼 클라이드 조선소 노동자들의 자주 관리 운동을 지지하며 빨간 장미와 5,000파운드를 보냈다.[158] 뉴욕으로 이주한 후에는 시카고 세븐과 흑표당 등 급진적 평화 운동가들과 교류하며, 마리화나 소지 혐의로 10년형을 선고받은 존 싱클레어를 위한 자선 공연을 열었다.[158] 이 공연을 통해 싱클레어는 석방되었고, 공연 실황은 훗날 《John Lennon Anthology》에 수록되었다.
1972년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 레논은 영국군과 IRA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IRA를 선택할 것이라고 발언했고, 아일랜드 탄압을 비판하는 〈Luck of the Irish〉와 〈Sunday Bloody Sunday〉를 발표했다.[37][38] 하지만 MI5 전 요원의 주장과 달리, 오노 요코는 레논이 IRA에 돈을 제공했다는 사실을 부인했다.[37][38] 레논은 또한 1968년 결성된 트로츠키주의 단체인 국제 마르크스주의 그룹에 동정적이었으며, 1973년에는 동성애 해방을 지지하는 오행시를 발표했다.[159][40][41] 그의 마지막 정치 활동은 1980년 샌프란시스코 환경미화원 파업 지지 성명이었다.[160][42]
4. 1. 반전 운동
1969년 3월, 존 레넌은 오노 요코와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여행으로 파리를 방문하여 존과 요코의 발라드를 작곡했다. 이후 암스테르담과 몬트리올에서 "침대 시위"라는 평화 운동을 벌였다. 이는 베트남 전쟁을 비롯한 전쟁에 대한 강력한 반대와 평화를 촉구하는 행위였다. 결혼 직후, 레넌은 미들 네임을 "Ono"로 변경하려 했으나 기각되었고, 공식 문서에는 "John Winston Ono Lennon"으로 표기되었다. 오노 요코와 함께 많은 매스컴의 주목을 받으며 반전 운동의 중요 인물로 부상했다. 좌익 단체와의 관계로 FBI의 감시 대상이 되기도 했다.[104]1969년 이후, 레넌은 오노와 함께 플라스틱 오노 밴드를 결성하여 베트남 전쟁 반대와 평화를 요구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베트남 전쟁에 대한 영국의 지지에 항의하며 대영 제국 훈장을 반납하는 행동을 보였다. "배기즘"과 "도토리 이벤트" 등 오노와 공동으로 퍼포먼스 아트를 선보였으며, 1969년에는 "침대 시위"를 진행하고, 1971년에는 「War Is Over (If You Want it)」의 거리 광고를 통해 평화 메시지를 전달했다. 플라스틱 오노 밴드 명의로 싱글 『평화를 우리에게』와 『콜드 터키』를 발표했으며, 1969년 토론토 공연 실황을 담은 라이브 앨범 『평화의 기도를 담아~라이브 피스 인 토론토 1969~』도 발매했다. 이 공연 영상은 DVD 『스위트 토론토』에 수록되어 있다. 레넌의 반전 활동은 오노 요코와의 협력을 통해 진행되었으며, 그의 솔로 음악 활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평화와 반전 메시지를 전달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4. 2. 기타 정치적 활동
존 레논은 평화 운동 외에도 다양한 사회 운동에 참여하며 억압받는 사람들과의 연대를 보여주었다. 특히, 반전 운동과 여성 해방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인종차별 철폐를 위한 활동에도 앞장섰다. 그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강력한 반대 의사를 표명하며 여러 반전 시위에 참가했고, 베트남 전쟁 종식을 촉구하는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또한, 여성의 권익 향상을 위해 노력했으며, 여성 해방 운동가들과의 협력을 통해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위한 활동을 펼쳤다. 아울러, 인종차별에 맞서 싸우는 운동에도 참여하며 인종 평등을 위한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이러한 행보는 단순한 정치적 발언을 넘어, 실질적인 행동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는 자신의 음악과 예술 활동을 통해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특히, 그의 솔직하고 과감한 정치적 발언은 당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상당한 파장을 불러일으켰으며, 이러한 활동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4. 3. 추방 시도
닉슨 행정부는 존 레논의 베트남 전쟁 반대 활동, 특히 "Give Peace a Chance"와 "Happy Xmas (War Is Over)"의 영향력을 우려하여 그를 추방하려 했다. [164] [165] 1972년 공화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레논의 샌디에이고 콘서트 참여 소식에 닉슨은 레논의 반전 활동이 자신의 재선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 판단하고, 스트롬 서먼드 상원의원의 제안에 따라 추방을 시도했다. 미국 이민귀화국(INS)은 1968년 레논의 런던 대마초 소지 경범죄를 근거로 추방 절차를 시작했고, 레논은 1975년 10월 8일까지 3년 6개월간 추방 청문회에 출석해야 했다. 그러나 항소 법원은 정치적 이유에 의한 선택적 추방을 불허하며 레논의 추방을 막았다. 법적 공방 중에도 레논은 계속해서 반전 활동을 펼치며 "The Mike Douglas Show" 진행 등 대중적 활동을 이어갔다. 밥 딜런을 비롯한 많은 예술가들이 레논을 지지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43] [44]1973년 3월 23일, 레논은 60일 이내 미국을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오노 요코는 영주권을 취득했다. 이에 레논과 오노는 '땅도 경계도 여권도 없는, 오직 사람만 있는 국가' 누토피아를 선포하며 미국 내 정치적 망명을 신청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 기자회견은 다큐멘터리 "존 레논 대 미국"에 등장한다. 레논의 음반 "Mind Games"에는 3초간의 침묵으로 이루어진 "Nutopian International Anthem"이 수록되었다. 이 시기 닉슨의 워터게이트 사건 연루가 드러나면서 닉슨은 사임했고, 후임 제럴드 포드 대통령은 레논 추방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1975년 추방 명령이 취소되었고, 이듬해 레논은 영주권을 얻었다. 1977년 지미 카터 대통령 취임식 무도회에는 레논과 오노도 참석했다.
4. 4. FBI의 감시와 기밀 해제 문서
존 레논 사후, 역사학자 존 와이너는 정보자유법을 통해 FBI가 보유한 레논 관련 파일 공개를 추진했다. FBI는 281페이지 분량의 파일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했지만, 국가 안보 정보를 이유로 대부분의 공개를 거부했다. 1983년, 와이너는 미국 시민자유연맹 남캘리포니아 지부의 도움을 받아 FBI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14년간의 법적 공방 끝에 1997년 빌 클린턴 행정부의 새로운 규칙에 따라 대부분의 문서가 공개되었다. 일부 국가 안보 정보가 포함된 10개 문서는 2006년 12월에야 공개되었다. 공개된 문서에는 반전 운동가들의 일상생활을 상세히 기록한 비밀 정보원의 보고서, 백악관에 보내진 메모, 레논 출연 TV 프로그램 대본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흥미롭게도, 영국 정부가 레논을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했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공개된 정보 중에는 저명한 영국 좌파 인사들이 레논의 좌파 서점 및 열람실 지원을 바랐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과정은 존 와이너의 저서 《진실을 밝혀라: 존 레논 FBI 파일》과 다큐멘터리 《미국 대 존 레넌》에서 자세히 다루어진다. [45]5. 예술성
== 예술성 ==
존 레논은 다양한 예술적 재능을 가진 인물이었다. 비틀즈 전기 작가 빌 해리에 따르면, 레논은 어린 시절 삼촌의 격려 덕분에 그림과 글쓰기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쓴 소설, 시, 만화, 캐리커쳐들을 모아 쿼리 뱅크 고등학교 잡지인 《데일리 하울》에 실었다. 그의 작품에는 장애인이 자주 등장했고, 풍자적인 글과 말장난이 가득했다고 한다. 급우 빌 터너의 증언에 따르면, 레논은 가장 친한 친구이자 후에 쿼리맨에서 함께 활동하는 피트 쇼튼을 즐겁게 하기 위해 이 작품들을 만들었고, 피트가 보기 전까지는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고 한다. 터너는 또한 레논이 "위건 부두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계속해서 언급되었다"고 말했다. 레논의 소설 《감자 광산의 당근》(A Carrot in a Potato Mine)에는 "광산은 위건 부두 끝에 위치했다"는 문장이 나온다. 터너는 레논의 그림 중 하나를 설명하며, 버스 정류장 표지판에 "Why?"라고 새겨져 있고, 위에는 날아다니는 팬케이크가, 아래에는 안경을 쓴 맹인이 안경을 쓴 눈먼 개를 따라다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고 묘사했다.
레논이 24세가 되었을 때, 그의 말장난 가득한 글은 더 많은 독자를 사로잡았다. 해리는 레논의 저서 《그 자신의 이야기》의 출판 경위를 이렇게 설명했다. "비틀즈를 취재하는 기자들이 와서 어쩔 수 없이 그가 글을 보여주자, 그들이 '책을 써라'고 말했다. 그렇게 첫 번째 책이 탄생했다." 이 책에는 《데일리 홀》과 마찬가지로 단편 소설, 시, 연극, 그림 등 다양한 형식이 혼합되어 있다. 수록된 단편 중 하나인 〈Good Dog Nigel〉은 "3시에 살해당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들었을 때까지 램프 포스트에 소변을 보고, 꼬리를 흔드는 행복한 강아지의 이야기"를 그렸다. 《더 타임스 리터러리 서플리먼트》는 "놀랍다 ... 또한 웃기기도 하다 ... 난센스는 자연스럽고, 글과 이미지는 순수한 판타지의 사슬이 되어 서로를 자극한다"고 평했다. 《북 위크》는 "말도 안 되는 글이지만, 레논은 난센스 문학의 시각으로 보자면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다. 몇몇 동음이의어는 따분한 말장이지만, 대다수가 이중의미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이중적인 통렬함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했다. 레논은 긍정적인 반응과, 책이 검열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는 "(독자들이 책을) 저보다 더 진지하게 받아드리는 것 같습니다. 그건 제가 웃고자 만든 것인데도 말이에요"라고 말했다.
빅터 스피네티와 아드리엔 케네디는 《일하는 스페인 사람》(A Spaniard in the Works, 1965)과 《그 자신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무대극 《The John Lennon Play: In His Own Write》을 제작했다. 레논, 스피네티, 그리고 로열 내셔널 시어터의 예술 감독인 로런스 올리비에는 협상을 거친 후 1968년 올드빅에서 연극을 공연했다. 레논과 오노는 오프닝 나이트 공연과 두 번째 공개 공연에 참석했다. 1969년에 레논은 아방가르드 연극 《오! 캘커타!》를 위해, 자신이 10대 때 한 집단 자위를 바탕으로 〈Four in Hand〉라는 글을 썼다.[166] 레논 사후에도 그의 작품들이 추가로 출간되었다. 《입소문이 그린 공중 문자》(Skywriting by Word of Mouth, 1968), 《Ai: 존 레논의 눈으로 본 일본: 개인적인 스케치북》(Ai: Japan Through John Lennon's Eyes: A Personal Sketchbook, 1992), 《진정한 사랑: 숀을 위한 그림》(Real Love: The Drawings for Sean, 1999), 《비틀즈 앤솔로지》(The Beatles Anthology, 2000) 등에서 그의 글과 그림을 볼 수 있다.
1967년, 미술학교 출신인 존 레논은 오노 요코의 리슨 갤러리(Lisson Gallery)에서 열린 전시회 《반쪽 방》(Half-A-Room)에 자금을 지원하고 익명으로 참여했다. 1968년 플라스틱 오노 밴드(The Plastic Ono Band) 활동을 통해 오노 요코와 협업한 후, 레논은 플럭서스(Fluxus) 예술 운동에 참여했다. 1968년 여름, 레논은 런던의 로버트 프레이저(Robert Fraser) 갤러리에서 자신의 회화와 개념 미술 작품을 선보이는 전시회 "여기 있습니다"(You Are Here)를 열었다.[47] 오노 요코에게 헌정된 이 전시회에는 지름 1.8m의 둥근 흰색 단색화(monochrome painting)인 "여기 있습니다"(You Are Here, 1968)가 포함되어 있었다. 흰색 단색 페인트 외에는 "여기 있습니다"라는 작은 손글씨가 적혀 있을 뿐이었다. 이 그림과 전시회는 오노 요코의 개념 미술 작품 "여기 아닙니다"(This is Not Here, 1966)에 대한 반응으로 기획되었다. "여기 아닙니다"는 그녀의 플럭서스 벽면 텍스트 설치 작품 "블루 룸 이벤트"(Blue Room Event, 1966)의 일부였다. "블루 룸 이벤트"는 오노 요코가 자신의 뉴욕 아파트 벽과 천장에 직접 쓴 문장들로 구성되었다. 레논의 "여기 있습니다" 전시회에는 60개의 자선 모금함, "당신께 신발을 벗습니다"라는 표지가 붙은 레논의 신발 한 켤레,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과 그의 1917년 작품 《자전거 바퀴》(Bicycle Wheel)에 대한 헌정으로 보이는 기성품(ready made) 검은 자전거, "작가를 위해"라는 라벨이 붙은 뒤집힌 흰색 모자, 그리고 무료로 가져갈 수 있는 "여기 있습니다"라는 흰색 핀 배지(pin badge)가 가득 찬 큰 유리 항아리가 포함되어 있었다.[48] 숨겨진 카메라가 전시회에 대한 대중의 반응을 비밀리에 촬영했다.[49] 7월 1일 개막식에서 레논은 (오노 요코와 마찬가지로) 온통 흰색으로 차려입고 365개의 흰색 풍선을 도시 하늘로 날려 보냈다. 각 풍선에는 작은 종이 카드가 붙어 있었는데, 찾은 사람이 69 듀크 스트리트(Duke Street, St James's)의 로버트 프레이저 갤러리로 레논에게 우편으로 보낼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50]
뉴욕으로 이주한 후, 1970년 4월 18일부터 6월 12일까지 레논과 오노 요코는 조 존스(Joe Jones (Fluxus musician))의 "톤 데프 뮤직 스토어"(Tone Deaf Music Store)에서 "자몽 플럭스 만찬"(GRAPEFRUIT FLUXBANQUET)이라는 플럭서스(Fluxus) 개념 예술 이벤트와 콘서트를 선보였다. 공연에는 "존 레논과 오노 요코로 분장하여 오세요, 자몽 만찬"(Come Impersonating John Lennon & Yoko Ono, Grapefruit Banquet)과 "젊은 구름으로서의 존 레논의 초상화, 오노 요코와 모든 사람들에 의해"(Portrait of John Lennon as a Young Cloud by Yoko + Everybody)가 포함되었다.[51] 같은 해, 레논은 "오노 요코 완전 시집 게임"(The Complete Yoko Ono Word Poem Game, 1970)을 만들었다. 이것은 존 케이지(John Cage)와 많은 플럭서스 예술가들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컷업(cut-up technique) 또는 데쿠페(découpé) 기법을 사용한 개념 미술 시 콜라주(collage)였다. 컷업 기법은 적어도 1920년대 다다(Dada) 예술가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1960년대 초 작가 윌리엄 S. 버로우즈(William S. Burroughs)에 의해 대중화되었다. "오노 요코 완전 시집 게임"을 위해 레논은 1968년 비틀즈(The Beatles (album)) LP(일명 "화이트 앨범") 패키지에 포함된 자신의 초상 사진을 134개의 작은 직사각형으로 잘랐다. 각 조각의 뒷면에는 단어 하나가 적혀 있었고, 어떤 순서로든 읽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초상화 이미지는 어떤 순서로든 다시 조립할 수 있도록 의도되었다. "오노 요코 완전 시집 게임"은 7월 28일 레논이 오노 요코에게 헌정된 봉투에 담아 전달했고, 오노 요코는 원하는 대로 무작위로 조립하고 재조립할 수 있었다.[52]
레논은 생애 말년까지 기발한 그림과 미술 판화를 가끔 제작했다.[53] 예를 들어, 레논은 유진 슈스터(Eugene Schuster)의 런던 아츠 갤러리(London Arts Gallery)에서 자신의 "백 원"(Bag One) 석판화(lithograph)를 전시했는데, 이 전시회에는 여러 개의 에로틱(erotic)한 이미지를 묘사한 작품이 포함되어 있었다. 1970년 1월 15일에 개막한 이 전시회는 24시간 후 경찰에 의해 급습당했고, 14개의 석판화 중 8개가 외설(indecency)이라는 이유로 압수당했다. 이 석판화들은 1969년 레논이 오노 요코와의 결혼식과 신혼여행, 그리고 세계 평화를 위해 기획된 베드인(bed-in)을 기록하면서 그린 것이었다.[54]
1969년, 레논은 오노 요코의 플럭서스 예술 영화 《자화상》(Self-Portrait (1969 film))에 출연했는데, 이 영화는 레논의 성기를 40분 동안 촬영한 단일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었다.[55] 이 영화는 현대예술연구소(Institute of Contemporary Arts)에서 처음 상영되었다.[56][57] 1971년, 레논은 《발기》(Erection (film))라는 실험 예술 영화를 제작했는데, 이 영화는 플럭서스(Fluxus) 예술 운동의 창시자이자 오노 요코의 아방가르드(avant-garde) 동시대인인 조지 마키우나스(George Maciunas)에 의해 16mm 필름[58]으로 편집되었다.[59] 이 영화는 오노 요코의 1971년 앨범 《플라이》(Fly (Yoko Ono album))의 노래 "에어메일"(Airmale)과 "유"(You)를 사운드트랙으로 사용했다.[60]
1960년대 비틀즈는 팝 문화, 록 음악, 그리고 록을 지향하는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며 음악과 청년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존 레논이 홀로 또는 중심이 되어 작곡한 곡들은 내성적이며, 1인칭으로 쓰인 개인적인 내용인 경우가 많았다. 레논의 이러한 작풍과 폴 매카트니의 밝은 작풍은 비틀즈 음악에 다양성을 가져다주었다. 비틀즈 초기 레논-매카트니 공동 작곡에서는 "She Loves You", "I Want to Hold Your Hand", 위크 등에서 개방적인 분위기의 멜로디를 만들어냈다. 비틀즈 최초의 대히트곡 "Please Please Me" 외에도 "Ticket to Ride", 아이 필 핀(I Feel Fine), "A Hard Day's Night", "Help!"는 사실상 레논이 작곡한 곡들이다. 매카트니 작곡인 미셸 등에서 들리는 감상적이고 애수 어린 멜로디는 그의 낙관적인 멜로디에 레논의 성격과 음악성이 그림자를 더해 곡에 애수를 더했다.[111]
비틀즈 중기에는 마약과 인도 음악의 영향을 받아 환상적이고 사이키델릭적인 색채가 강한 작품들을 제작했다. "I Am the Walrus", "Strawberry Fields Forever", 투모로우 네버 노우스, "A Day in the Life",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 등은 많은 아티스트들에게 영향을 준 당시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1967년 6월, 비틀즈는 세계 최초의 위성 중계 TV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전 세계 4억 명이 시청했다고 알려진 이 프로그램에서 "All You Need Is Love"를 공연했다. 원제인 "All You Need Is Love"는 비틀즈와 레논을 이야기할 때의 대명사가 되었다. 후기에는 솔로 작품이 늘어나 "굿 나잇"(Good Night), "Across the Universe", 비코즈(Because) 와 같은 아름다운 멜로디를 가진 곡들과 "예이 블루스"(Yer Blues), "Come Together", 돈 렛 미 다운(Don't Let Me Down)과 같은 블루스 록 곡들을 발표했다.
비틀즈 시대와 비교하여 솔로 시절에는 더욱 간결한 화성 진행과 개성적인 가사로 특징지어지는 곡풍으로 변화하여, 「마더」, 「콜드 터키」, 「진실을 원해」와 같은 곡들을 발표했다. 그리고 「인스턴트 카르마」와 같이 로큰롤 보이스가 특징인 록 음악도 제작했다. 또한 「러브」와 같이 아름다운 멜로디의 곡이나, 비틀즈 시대의 「스트로베리 필즈 포에버」, 「줄리아」처럼 섬세한 멜로디이면서도 개성적인 화성 진행을 보이는 독특한 곡풍은, 동시기(1967-1968년)에 원곡이 쓰여졌다고 여겨지는 「젤러스 가이」로 발전했다. 더 나아가 엘튼 존과 함께한 「루시 인 더 스카이~」의 간주 부분이나, 「인투이이션」(1973)에서 본격적인 레게의 도입으로 이어졌다. 1980년 인터뷰에서는 레게 리듬을 함께 작업하는 뮤지션들에게 설명해야 했다는 발언이 있다.[112] 「벽 속의 숨결, 사랑의 다리」의 「러브」에서는 비틀즈의 「해피니스 이즈 어 웜 건」의 통작 형식[113]을 계승한 곡 구성을 보였다. 겨우 15분 만에 쓰여졌다고 알려진 「우먼」은 단순하지만, 마지막 부분에서 반음계 상승 등 카덴차(종지형, 코드 패턴)에 테크닉이 사용된 곡이 되었다. 곡의 발상은 비틀즈 시대의 「걸」을 발전시킨 것이라고 레논이 1980년 인터뷰에서 언급하고 있다.[112]
「렛 잇 비」를 프로듀스한 필 스펙터(Phil Spector)를 높이 평가한 레논은 비틀즈 후기 싱글 「인스턴트 카르마」와 솔로 전기의 「존의 영혼」, 「이매진」에서 스펙터를 기용했다. 스펙터는 스트링스와 다수의 악기를 여러 겹으로 쌓아 올린, 「벽돌처럼 쌓아올린 사운드」(Wall of Sound: 음의 벽)라고도 불리는 두꺼운 사운드의 편곡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두 작품 모두 어레인지는 이와 달랐으며, 레논이 추구하는 간결한 사운드 메이킹이 이루어졌다.[112] 솔로 후기의 「마인드 게임스」, 「벽 속의 사랑」, 「록큰롤」, 복귀 후의 「더블 팬터지」에서는 셀프 프로듀스(「록큰롤」에서는 일부를 필 스펙터가 담당, 「더블 팬터지」는 , 오노 요코가 공동 프로듀스)에 의해 협연자에게 경의를 표하면서 세션 중에 어레인지를 구성해 나갔다.[114] 이것이 협연자의 존경을 얻었다는 많은 발언(데이비드 스피노자(David Spinoza), 토니 레빈(Tony Levin) 등)이 있다.[115] 「마인드 게임스」에 참가한 스피노자에 따르면, 레논은 스튜디오 뮤지션을 사용하여 기본 라인을 녹음한 후, 레논 자신의 기타, 슬라이드 기타 등을 사용한 사운드를 정교하게 겹쳐 오케스트레이션을 만들어냈다.[116] 그리고 어른들을 위한 록을 창조했다.[117] 비틀즈 이래의 작곡 수법이 된 베이스의 클리셰[118], 분산화음적인 어프로치도 도입하고 있다. 「벽 속의 사랑」에서는 스트링스, 호른도 다용한 편곡을 했다. 또한 에코를 넣은 「인스턴트 카르마」, 「마더」, 「러브리스」, 「스타팅 오버」 등의 작품은 레논 자신이 중음역에서 풍부한 음색의 재현, 배음 효과를 의식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119]
5. 1. 문학적 재능
존 레논은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보였다. 삼촌의 격려 덕분에 그림과 글쓰기를 시작했고, 쿼리 뱅크 고등학교 시절에는 자신의 이야기, 시, 만화, 캐리커처를 모아 '데일리 하울(Daily Howl)'이라는 연습장을 만들었다. '데일리 하울'에는 풍자적인 글과 풍부한 말장난이 가득했으며, 특히 위건 피어(Wigan Pier)가 자주 등장했다고 한다. 친구 피트 샷턴(Pete Shotton)에게 먼저 보여주고 나서야 다른 사람들에게 공개할 정도로 그의 작품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예를 들어, 버스 정류장 표지판에 "왜?"라는 질문과 함께 날아다니는 팬케이크와 안경 쓴 맹인과 안경 쓴 맹인 개 그림을 그린 만화는 그의 유머 감각을 잘 보여준다.레논의 말장난과 기발한 넌센스에 대한 사랑은 24세에 출판된 자기 방식대로(In His Own Write)(1964)를 통해 더 넓은 독자층에게 알려졌다. 단편 소설, 시, 희곡, 그림 등 다양한 형식이 혼합된 이 책은 타임즈 문학 부록(The Times Literary Supplement)으로부터 "놀랍고... 매우 재미있다... 넌센스가 계속 이어지고, 단어와 이미지가 순수한 환상의 사슬에서 서로를 촉구한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북 위크(Book Week) 또한 레논의 뛰어난 넌센스 문학적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 레논 본인은 독자들이 자신의 작품을 예상보다 훨씬 진지하게 받아들였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한다. 이는 단순한 웃음거리에서 시작된 그의 작품이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은 것을 의미한다.
자기 방식대로(In His Own Write)(1964)와 작품 속의 스페인 사람(A Spaniard in the Works)(1965)는 연극 레논 연극: 자기 방식대로(The Lennon Play: In His Own Write)의 기초가 되었다. 빅터 스피네티(Victor Spinetti)와 애드리엔 케네디(Adrienne Kennedy)가 공동 각색한 이 연극은 1968년 올드 빅(The Old Vic)에서 초연되었고, 레논과 오노 요코가 참석했다. 또한, 레논은 10대 시절 경험을 바탕으로 한 스킷 "포 인 핸드(Four in Hand)"를 케네스 타이넌(Kenneth Tynan)의 연극 오! 칼커타!(Oh! Calcutta!)에 기고하기도 했다. 그의 사후에도 입으로 하는 하늘 글씨(Skywriting by Word of Mouth)(1986), "아이: 존 레논의 눈으로 본 일본: 개인 스케치북(Ai: Japan Through John Lennon's Eyes: A Personal Sketchbook)"(1992), "진정한 사랑: 션을 위한 그림(Real Love: The Drawings for Sean)"(1999) 등 다수의 작품이 출판되었고, 비틀즈 앤솔로지(The Beatles Anthology)(2000)에도 그의 글과 그림이 소개되었다.
5. 2. 음악적 재능
존 레논은 비틀즈 시절부터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선보였다. 초기 비틀즈의 히트곡들은 레논-매카트니 공동 작곡이 많았지만, "Please Please Me", "Ticket to Ride", "I Feel Fine", "A Hard Day's Night", "Help!" 등은 사실상 레논이 주도적으로 작곡한 곡들이다. 레논의 내성적이고 개인적인 가사와 멜로디는 폴 매카트니의 밝은 작풍과 대조를 이루며 비틀즈 음악에 다양성을 부여했다. 특히 "She Loves You", "I Want to Hold Your Hand", 위크 등은 밝고 개방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반면, 미셸과 같은 매카트니의 곡들에도 레논의 음악적 성향이 영향을 미쳐 애수를 더했다.[111]비틀즈 중기에는 마약과 인도 음악의 영향을 받아 "I Am the Walrus", "Strawberry Fields Forever", 투모로우 네버 노우스, "A Day in the Life",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 등 환상적이고 사이키델릭적인 색채가 강한 작품들을 선보였다. 이러한 곡들은 많은 아티스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All You Need Is Love"는 비틀즈와 레논을 대표하는 곡이 되었고, 전 세계 4억 명이 시청한 위성 중계 TV 프로그램에서 공연되기도 했다.
후기 비틀즈와 솔로 활동에서는 "굿 나잇", "Across the Universe", 비코즈 와 같은 아름다운 멜로디의 곡과 "예이 블루스", "Come Together", 돈 렛 미 다운과 같은 블루스 록 곡들을 발표했다. 솔로 시절에는 더욱 간결한 화성 진행과 개성적인 가사가 특징인 곡풍으로 변화하며, "마더", "콜드 터키", "진실을 원해", "인스턴트 카르마" 등을 발표했다. "러브"와 같은 아름다운 멜로디의 곡이나, "스트로베리 필즈 포에버", "줄리아"처럼 섬세하면서도 독특한 화성 진행을 보이는 곡들도 선보였다. 엘튼 존과 함께한 "루시 인 더 스카이~"의 간주 부분이나 "인투이이션"에서는 레게를 도입하기도 했다.[112] "우먼"은 단순하지만 카덴차 기법을 사용한 곡으로, 레논은 1980년 인터뷰에서 비틀즈 시절의 "걸"을 발전시킨 것이라고 언급했다.[112]
필 스펙터의 "벽돌처럼 쌓아올린 사운드" 기법과는 달리, 레논은 "인스턴트 카르마", "이매진" 등에서 간결한 사운드를 추구했다.[112] 솔로 후기에는 셀프 프로듀싱을 통해 협연자들과 협력하며 곡을 만들어나갔다.[114] 데이비드 스피노자 등 협연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레논은 스튜디오 뮤지션을 활용하여 기본 라인을 녹음한 후, 자신이 직접 기타 연주를 덧입혀 오케스트레이션을 완성하는 방식을 사용했다.[116] 베이스의 클리셰[118]와 분산화음적인 어프로치를 도입했고, "벽 속의 사랑"에서는 스트링스와 호른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또한 "인스턴트 카르마", "마더", "러브리스", "스타팅 오버" 등에서 사용된 에코 효과는 레논이 음색과 배음 효과에 대한 높은 이해도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119]
5. 2. 1. 악기 연주
존 레논은 다양한 악기를 연주했으며, 그의 음악적 스타일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어린 시절에는 장난감 악기 대신 마우스 오르간과 버스에서 얻은 하모니카를 연주했다.[167] 어머니 줄리아에게 밴조와 통기타 연주법을 배우고 16세에는 쿼리맨에서 리듬 기타를 연주했다.비틀즈 시절에는 리켄배커 325, 에피폰 카지노, 깁슨 J-160E 등 다양한 일렉트릭 기타를 사용했고, 솔로 활동에서는 깁슨 레스폴 주니어를 주로 사용했다. 흥미롭게도, 그는 비틀즈 시절부터 자신의 D현을 약간 낮춰 조율했는데, 이는 그의 미미 이모가 녹음에서 어떤 기타가 그의 것인지 알아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61] 펜더 베이스 VI라는 6현 베이스 기타를 연주하며 비틀즈의 〈소련으로 돌아가다〉, 〈길고 험난한 길〉, 〈헬터 스켈터〉 등의 곡에 저음을 더했다. 또한, 그는 피아노를 능숙하게 연주했으며, 그의 대표곡인 〈Imagine〉을 포함한 많은 곡에서 피아노 연주를 들려주었다. 1963년에는 폴 매카트니와 함께 피아노를 연주하며 비틀즈의 첫 번째 미국 히트곡 〈내 손을 잡아줘〉를 작곡했다. 1964년에는 멜로트론 키보드를 소유한 최초의 영국 음악가 중 한 명이 되었지만, 1967년 〈Strawberry Fields Forever〉까지는 사용하지 않았다.
2024년에는 분실되었던 그의 기타가 발견되어 경매에서 고가에 낙찰되었다.[62] 그 외에도, 그는 깁슨 J-200, 리켄바커 12현 기타, 마틴 D-28, 호프너 클럽40, 펜더 스트라토캐스터, 보크스 AC30, AC50, 슈퍼 비틀 앰프, 펜더 트윈 리버브, 호너 블루스 하프, 호너 크로마티카 등 다양한 악기를 사용했다. 특히, 그가 사용했던 여러 깁슨 J-160E 기타들은 비틀즈의 초기 사운드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또한, 그가 사용한 리켄베커 325는 여러 개가 있었고, 각각의 역사와 사양이 다르다. 에피폰 카지노 역시 비틀즈 후기 활동에서 자주 등장하는 그의 대표적인 기타 중 하나였다.
5. 2. 2. 보컬 스타일
존 레논의 보컬은 독특한 스타일과 폭넓은 표현력으로 유명하다. 비틀즈 초기, 특히 데뷔 앨범 ''Please Please Me'' 수록곡 "Twist and Shout" 녹음 당시에는 감기에 걸린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레논은 "그냥 비명을 질렀다."[63]고 할 정도로 격렬하게 노래했다. [63] 전기 작가 배리 마일즈는 레논이 "단순히 로큰롤을 위해 성대를 망가뜨렸다"[63]고 표현했으며, 비틀즈의 프로듀서 조지 마틴은 레논이 자신의 목소리를 싫어해 항상 "내 목소리 좀 어떻게 해주세요! 다르게 만들어주세요!"[64][65]라고 요청했다고 회고했다. 마틴은 더블 트래킹 등의 기술을 사용하여 레논의 요구를 충족시켰다.[64][65]솔로 경력으로 넘어가면서 레논의 보컬은 더욱 다양해졌다. 크리스 그레고리는 레논이 어쿠스틱 기반의 발라드를 통해 불안감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이는 "Cold Turkey"의 원초적인 비명과 ''John Lennon/Plastic Ono Band''의 카타르시스적인 표현으로 이어지는 '공개적인 치료' 과정이었다고 분석했다.[64] 로버트 크리스토가우는 이 시기를 레논의 "최고 보컬 퍼포먼스"[64]로 칭하며, 비명에서 흐느낌까지, 전자적으로 변조된 그의 보컬에 대해 언급했다.[64] 데이비드 스튜어트 라이언은 레논의 보컬이 극도의 취약성과 감수성에서 거친 스타일까지 다양했다고 평가했고,[64] 닉 콘은 레논이 "최고의 팝 보컬 중 하나"를 가지고 있었다며, 거칠고 격렬하며 강렬한 그의 목소리를 칭찬했다.[63] 벤 우리쉬는 레논 사망 후 라디오에서 비틀즈의 "This Boy"를 듣고, 레논의 고통스럽고 감정적인 비명에 자신의 감정을 투영했다고 회상했다.[65] 레논의 보컬은 그의 내면의 고뇌와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매개체였으며, 이는 시대를 초월하여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6. 유산
== 유산 ==
존 레논의 음악과 사상, 활동은 전 세계적으로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음악 역사가들은 비틀즈가 1950년대와 60년대 대중음악의 사운드, 스타일, 태도에 혁명을 일으켰고, 영국 록의 새로운 물결을 열었다고 평가한다. 오아시스의 리암 갤러거는 레논을 자신의 영웅으로 칭하며, 첫 아이의 이름을 레논 갤러거로 지었다. 1999년 BBC 여론조사에서 "이매진"은 영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 가사로 선정되었다. 2006년 ''가디언''지의 존 가너는 1972년 젊은이들에게 레논의 닉슨에 대한 당당한 저항이 큰 감동을 주었다고 언급하며, 레논이 자신의 경력과 삶을 걸고 위험을 감수하는 의지가 그를 존경받게 하는 이유 중 하나라고 지적했다. 음악 역사가들은 레논의 가장 큰 업적으로 그의 노래에 담긴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를 꼽는다.
레논의 죽음 이후에도 그의 유산은 전 세계적으로 기념되고 있다. 2002년 그의 고향 리버풀의 공항 이름이 리버풀 존 레논 공항으로 바뀌었고, 2010년에는 레논 탄생 70주년을 기념하여 리버풀 샤베스 공원에 존 레논 평화비가 세워졌다. "평화와 조화"라는 제목의 이 기념비는 평화를 상징하며, "생명의 보전을 위한 지구 상의 평화 · 존 레논을 기리며 1940–1980"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2013년에는 국제 천문학 연합이 수성의 분화구 하나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 쿠바 하바나에는 존 레논 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그의 모습을 한 동상이 벤치에 앉아 있다.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도 그의 이름을 새긴 별이 있다. 1994년과 1995년에 재결합한 비틀즈의 세 명의 생존 멤버들이 레논의 가정용 녹음 데모곡들을 완성하여 발매하기도 했다. 또한, 존 레논 장학금을 통해 젊은 음악가들을 지원하는 사업도 진행되고 있다. 다운타운 뮤직 퍼블리싱은 레논과 오노 요코의 노래 목록을 소장하고 있으며, "이매진"을 포함한 그의 솔로 작품들을 관리하고 있다. 레논의 윈저 안경은 그의 스타일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이미지로 전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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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 영향력
존 레논은 록 음악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뮤지션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그의 음악과 사상은 후대 뮤지션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사회 운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비틀즈 동료인 폴 매카트니와 조지 해리슨은 물론, 닐 영, 엘튼 존, 데이비드 보위, 해리 닐슨, 퀸 등 수많은 뮤지션들이 레논의 영향을 받았다.[122] 라즈베리스, ELO, 10cc, 데이비드 필 등도 그 예외가 아니다.심지어 반비틀즈로 여겨졌던 펑크 뮤지션들조차 레논에게서 영감을 얻었다. 섹스 피스톨즈의 존 라이든은 "워킹 클래스 히어로"를 듣고 처음으로 분노와 억울함을 진정으로 느꼈으며, 이 곡이 섹스 피스톨즈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회상했다. 그린데이의 빌리 조 암스트롱 또한 같은 곡을 커버하며 레논에게서 "진실이 무엇인지 배웠다"고 말했다. 클래시의 조 스트러머는 레논이 꿈을 꿀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문을 열어주었다고 평가하며, 그가 남긴 업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잭슨 브라운은 롤링 스톤지와의 인터뷰에서 레논이 항상 진실을 말했다고 찬사를 보냈다.[123] U2의 "선데이 블러디 선데이"는 레논의 동명의 곡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폴리스의 스팅은 노웨어지에서 "우리 같은 록 뮤지션이 무언가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존 덕분이다"라고 언급했다. 리암 갤러거는 존 레논을 만난다면 핥아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존경심을 드러냈다.
1995년 발매된 레논의 트리뷰트 앨범 『워킹 클래스 히로』의 라이너 노츠에는 타임스지 기사를 인용하여 레논이 듣는 이와 매우 친밀하고 개인적인 관계를 맺는 희귀한 뮤지션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또한 그의 복잡한 리듬과 코드 진행은 록 음악의 한계를 확장하고 발전에 기여했다고 언급하며 그의 음악적 업적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보컬의 이중 녹음 기법을 활용하여 플랜저와 같은 이펙터 개발에 기여했고, 보컬의 전기적 처리 기법을 도입하는데 영향을 끼쳤다.
6. 2. 수상과 판매량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의 공동 작곡은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고 성공적인 업적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레논은 연주자, 작곡가 또는 공동 작곡가로서 미국 빌보드 핫 100 차트 1위 싱글 25곡을 기록했다. 여기에는 솔로곡인 "밤을 지새우게 하는 무엇이든 (Whatever Gets You thru the Night)"과 "(그냥) 다시 시작하기 ((Just Like) Starting Over)" 2곡, 비틀즈 시절의 20곡, 그리고 다른 아티스트의 곡에 참여한 3곡이 포함된다. 미국 내 그의 음반 판매량은 1400만 장에 달한다.[76][77] 그의 가장 많이 팔린 솔로 앨범인 ''더블 판타지 (Double Fantasy)''는 미국에서 300만 장의 출하량을 기록했으며,[3] 1981년 그래미 올해의 앨범상을 수상했다.[3] 같은 해, 그는 브릿 어워드 음악에 대한 탁월한 공헌상을 수상했다.[76][77]2002년 BBC 여론조사에서 그는 "가장 위대한 영국인 100인" 중 8위에 선정되었다.[76][77] 2003년부터 2008년까지 ''롤링 스톤''지는 여러 차례의 평가에서 그를 "역대 최고의 가수 100인" 5위, "역대 최고의 아티스트 100인" 38위로 선정했고,[76][77] 그의 앨범 ''존 레넌/플라스틱 오노 밴드 (John Lennon/Plastic Ono Band)''와 ''이매진 (Imagine)''은 "롤링 스톤 선정 역대 최고의 앨범 500"에서 각각 22위와 76위를 차지했다.[76][77] 그는 1965년 다른 비틀즈 멤버들과 함께 대영 제국 훈장 멤버(MBE)에 임명되었으나 1969년 반환했다.[77] 사후인 1987년 송라이터 명예의 전당에, 1994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76][77]
일본에서는 싱글 차트에서 "마더(Mother)", "이매진(Imagine)", "스타팅 오버(Starting Over)", "러브(Love)" 등이 상위권에 랭크되었으며, 앨범 차트에서는 "이매진(Imagine)"을 비롯해 "존의 영혼(ジョンの魂)"(5위), "마인드 게임즈(Mind Games)"(6위), "더블 판타지(Double Fantasy)"(2위, 일일 차트 1위), "밀크 앤드 허니(Milk and Honey)"(3위) 등이 높은 순위를 기록하며 서양 음악 아티스트 중에서도 뛰어난 인기를 보였다. 오리콘 집계에 따르면 싱글과 앨범을 합쳐 21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
7. 음반 목록
== 음반 목록 ==
존 레논은 비틀즈 활동 이후 솔로 아티스트로서 활발한 음악 활동을 펼쳤으며, 오노 요코와의 협업도 활발하게 진행했다. 그의 음반 목록은 다음과 같다. 비틀즈 시절 활동에 대한 내용은 비틀즈#음반 목록을 참고하라.
- '''정규 음반'''
미완성 작품 제1번 투 버진스 (Unfinished Music No. 1: Two Virgins) (1968) - 오노 요코와 함께 작업
미완성 작품 제2번 라이프 위드 더 라이언스 (Unfinished Music No. 2: Life with the Lions) (1969) - 오노 요코와 함께 작업
웨딩 앨범 (Wedding Album) (1969) - 오노 요코와 함께 작업
존 레논/플라스틱 오노 밴드 (John Lennon/Plastic Ono Band) (1970)이매진 (Imagine) (1971)섬타임 인 뉴욕 시티 (Some Time in New York City) (1972) - 오노 요코와 함께 작업
마인드 게임즈 (Mind Games) (1973) (한국어 제목: 눗토피아 선언)
심의 벽, 사랑의 다리 (Walls and Bridges) (1974)록큰롤 (Rock 'n' Roll) (1975)더블 판타지 (Double Fantasy) (1980) - 오노 요코와 함께 작업
밀크 앤 허니 (Milk and Honey) (1984) - 오노 요코와 함께 작업 (사후 발매)
존 레논의 음반 목록에서 더 자세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레논의 음악은 그의 평화주의적 신념과 반전 운동을 반영하며,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그의 음악은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특히, ''이매진''은 그의 대표곡이자 평화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그의 일부 음악은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한 과격한 표현을 포함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을 고려하여 그의 음악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8. 영화 목록
== 영화 목록 ==
존 레논이 출연하거나 제작에 참여한 영화 목록이다. 1980년 사망 이후 발매된 작품들은 기존 영상 자료를 사용한 것이다. 존 레논 음반 목록#비디오 목록과 비틀즈 영화, 비틀즈 비디오 항목도 참고할 수 있다.
비틀즈 시절 출연했던 ''Ready Steady Go!''(1963-64, 4회 출연), ''Around the Beatles''(1964), ''What's Happening! The Beatles in the U.S.A.''(1964), ''The Ed Sullivan Show''(1964-65, 4회 출연), ''The Music of Lennon & McCartney''(1965), ''Not Only... But Also''(1965-66, 2회 출연 - 화장실 직원 역할로 출연), ''The Beatles at Shea Stadium''(1966), 그리고 ''The Beatles in Japan''(1966) 등을 통해 전 세계 팬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알렸다.
솔로 활동 이후에는 ''Rape''(1969, 사운드, 편집, 작가, 제작자, 감독까지 참여), ''The Dick Cavett Show''(1971-72, 3회 출연), ''John Lennon and Yoko Ono Present the One-to-One Concert''(1972), ''Imagine''(1972) 등에 출연하며 음악 활동 외에도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했다. 또한, 여러 다큐멘터리에도 출연하여 자신의 삶과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전달했다. 대표적으로 ''A Salute to the Beatles: Once upon a Time''(1975), ''All You Need Is Love: The Story of Popular Music''(1977), ''It Was Twenty Years Ago Today''(1987), ''The Beatles Anthology''(1995), ''Gimme Some Truth: The Making of John Lennon's Imagine Album''(2000), ''John & Yoko's Year of Peace''(2000), ''클래식 앨범: 존 레논/플라스틱 오노 밴드''(2008), 그리고 ''John & Yoko: Above Us Only Sky''(2018) 등이 있다.
8. 1. 영화
존 레논은 다수의 영화에 출연하거나 제작에 참여했다. 가장 유명한 출연작은 비틀즈 시절 출연한 ''어 하드 데이즈 나이트''(1964)와 ''헬프!''(1965)이다. 이 두 작품은 비틀즈의 음악과 함께 그들의 유쾌한 모습을 담아낸 뮤지컬 코미디 영화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비틀즈의 멤버로서 출연한 다른 작품으로는 ''매지컬 미스터리 투어''(1967)가 있는데, 이 영화는 레논이 직접 각본, 감독, 내레이션을 맡았다. ''옐로우 서브마린''(1968)에서는 마지막 장면에 카메오로 출연했다. 또한, 그는 ''렛 잇 비''(1970)에도 출연했는데, 이 작품은 비틀즈의 해체 과정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로, 비틀즈의 마지막 앨범 제작 과정의 어려움과 멤버들 간의 갈등을 엿볼 수 있다.레논은 비틀즈 활동 이후에도 다양한 영화에 출연하거나 제작에 참여했다. ''이매진: 존 레논''(1988)은 그의 삶과 음악을 다룬 다큐멘터리로, 그의 평화주의 활동과 예술적 업적을 조명하여 진보적인 그의 이미지를 더욱 강화시켰다. ''미국 대 존 레논''(2006)은 그가 미국 정부와 벌였던 갈등과 그의 반전 운동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이 영화는 미국 정부의 보수적인 정책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제시하며, 레논의 반전 운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비틀즈: 겟 백''(2021)은 비틀즈의 마지막 앨범 녹음 과정을 상세히 담은 다큐멘터리로, 그의 음악적 업적을 다시 한번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 외에도 ''존 레논의 전쟁 대작전'' (1967) 등 여러 영화에 출연하였으며, ''투 버진스''(1968)와 같은 단편 영화를 직접 제작하기도 했다. 레논이 출연하거나 제작에 참여한 다큐멘터리들은 그의 삶과 예술, 그리고 사회적 활동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그의 평화주의와 반전 활동을 강조하는 다큐멘터리는 당시 보수적인 미국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담고 있다. 레논은 영화를 통해 그의 예술적 재능과 사회적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했다. 다만, 일부 영화들은 그의 사생활이나 극단적인 면을 부각하며 그의 이미지를 왜곡하는 시각도 존재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8. 2. 텔레비전
존 레논은 다수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비틀즈 시절에는 ''Ready Steady Go!''(1963-64, 4회 출연), ''Around the Beatles''(1964), ''What's Happening! The Beatles in the U.S.A.''(1964), ''The Ed Sullivan Show''(1964-65, 4회 출연), ''The Music of Lennon & McCartney''(1965), ''Not Only... But Also''(1965-66, 2회 출연 - 화장실 직원 역할로 출연), ''The Beatles at Shea Stadium''(1966), 그리고 ''The Beatles in Japan''(1966) 등에 출연하여 전 세계 팬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알렸다. 솔로 활동 이후에는 ''Rape''(1969, 사운드, 편집, 작가, 제작자, 감독까지 참여), ''The Dick Cavett Show''(1971-72, 3회 출연), ''John Lennon and Yoko Ono Present the One-to-One Concert''(1972), ''Imagine''(1972) 등에 출연하며 음악 활동뿐 아니라 다양한 영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었다. 또한, 여러 다큐멘터리에도 출연하여 그의 삶과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전달했는데, ''A Salute to the Beatles: Once upon a Time''(1975), ''All You Need Is Love: The Story of Popular Music''(1977), ''It Was Twenty Years Ago Today''(1987), ''The Beatles Anthology''(1995), ''Gimme Some Truth: The Making of John Lennon's Imagine Album''(2000), ''John & Yoko's Year of Peace''(2000), ''클래식 앨범: 존 레논/플라스틱 오노 밴드''(2008), 그리고 ''John & Yoko: Above Us Only Sky''(2018) 등이 있다.9. 책 목록
존 레논이 직접 집필한 책으로는 다음과 같은 작품들이 있다.
- '''자신만의 글쓰기''' (1964): 원제는 ''In His Own Write''이다. 레논 특유의 유머와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넌센스 작품집으로, 그의 문학적 재능을 엿볼 수 있다.
- '''작품 속 스페인 사람''' (1965): 원제는 ''A Spaniard in the Works''이다. '''자기만의 글쓰기'''의 후속작으로, 역시 기발한 유머와 넌센스적인 요소가 가득한 작품이다.
- '''입으로 하는 하늘 글씨 쓰기''' (1986): 원제는 ''Skywriting by Word of Mouth''이다. 레논의 시, 에세이, 그림 등이 수록된 작품으로, 그의 예술적 면모를 다각적으로 보여준다.
- '''존 레논의 노랫말''' (1997): 레논의 노래 가사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그의 음악적 철학과 사회적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 '''존 레논의 편지''' (2012): 레논이 생전에 쓴 편지들을 모은 책으로, 그의 인간적인 면모와 개인적인 생각들을 엿볼 수 있다.
일본어로 번역된 그의 저서 및 그에 대한 전기, 인터뷰집 등은 다음과 같다.
- 『이야기 그림책 존 레논 넌센스』(In His Own Write)(1964년) 카타오카 요시오 저, 가토 나오키 역, 쇼분샤 1975년 12월, 후에 치쿠마쇼보(치쿠마문고) 2011년, 후에 쇼분샤 신판 2013년 11월
- 『랄리루레 레논 존 레논 넌센스 작품집』(A Spaniard in the Works)(1965년) 사토 요시아키 역, 치쿠마쇼보 2002년 12월
- 『하늘에 쓰다 존 레논 자전 & 작품집』(Skywriting by Word of Mouth)(1986년) 모리타 요시노부 역, 치쿠마쇼보 2002년 12월
- 『Ai 존 레논이 본 일본』(Ai: Japan Through John Lennon's Eyes: A Personal Sketchbook)(1992년) (서문: 오노 요코), 치쿠마쇼보(치쿠마문고) 2001년 12월
- 『리얼 러브 션을 위해 그린 그림』(Real Love: The Drawings for Sean)(1999년) (서문: 오노 요코), 토쿠마쇼텐 2000년 5월
- 『비틀즈 앤솔로지』(The Beatles Anthology)(2000년) 비틀즈 클럽, 시마다 요코 역, 릿토뮤직 2000년 9월
- 얀 위너 저, 片岡義男 역, 『비틀즈 혁명』草思社, 1972년 4월
이후 개제, 『회상하는 존 레논: 존 레논의 고백』신판, 1974년 6월
이후 개제, 『레논 리멤버즈』(서문: 오노 요코) 동사, 2001년 7월
- ''Lennon Remembers: The Full Rolling Stone Interviews from 1970'' (2000년) - 앤디 피블스 저, 北山修 역, 『All that John Lennon』中央公論新社, 1981년 2월
이후 개제, 문고판 『존 레논 라스트 인터뷰』동사(中公文庫), 2001년 11월
- ''Lennon Tapes Paperback'' (1981년) - 『존 레논 플레이보이 인터뷰』PLAYBOY 편집부 편, 集英社, 1981년 3월
이후 전모판, 데이비드 셰프 저, 石田泰子 역, 『존과 요코 라스트 인터뷰: Love & peace』동사, 1990년 11월
- ''The Playboy Interviews With John Lennon and Yoko Ono'' (1981년) - 『존 레논 음악과 사상을 이야기하다: 정선 인터뷰 1964-1980』ジェフ・バーガー 편, DU BOOKS, 2018년 3월
''Lennon on Lennon: Conversations with John Lennon'' (2016년) - 신시아 레논 저, 강구대행·샤롯트 듀크 공역, 『소녀 시절의 존 레논: 붕괴의 서곡』, 신코뮤직 엔터테인먼트, 1981년 4월
- ''A Twist of Lennon'' (1980년) - 레이 콜먼 저, 오카야마 토오루 역, 『존 레논』, 음악지우샤, 1986년 8월
- ''John Winston Lennon Volume 1 1940-66'' (1984년) - 토니 브래드먼 저, 사카모토 마리 역, 『존 레논: 사랑이 전부다』(해설: 가타오카 요시오), 유가쿠샤, 1987년 11월
- 케빈 호울렛, 마크 루이슨 저, 나카에 마사히코 역, 『존 레논 IN MY LIFE』, 일본방송출판협회, 1991년 11월
- 마이클 화이트 저, 이누이 유미코 역, 『존 레논』, 계성사(전기 세계의 작곡가 12), 1999년 4월
- 레이 콜먼 저, 오카야마 토오루 역, 『존 레논』, 음악지우샤, 2002년 5월
- : - ''Lennon: The Definitive Biography : Anniversary Edition''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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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추가 참고 문헌
== 추가 참고 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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