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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자술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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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하일 자술리치는 러시아 제국의 군인으로, 해군사관학교와 콘스타노브스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877년 러시아-튀르크 전쟁, 1878년 필리포폴리스 전투에 참전하여 용맹을 떨쳤다. 러일 전쟁 직전 제2 시베리아 군단의 군단장을 맡아 압록강 방어 임무를 수행했으나, 전략적 판단 미스로 압록강 전투에서 패배했다. 이후 여러 전투에 참전했으나, 결단력 부족으로 연전연패하며 부하들의 신뢰를 잃었고, 러일 전쟁 이후 건강 문제로 전역했다. 그는 성 게오르기 훈장 4등급, 성 안나 훈장 3,1등급, 성 스타니슬라우스 훈장 2등급, 성 블라디미르 훈장 2등급 등을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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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자술리치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미하일 이바노비치 자술리치
미하일 이바노비치 자술리치 장군
인물 정보
이름미하일 이바노비치 자술리치
로마자 표기Mikhail Ivanovich Zasulich
출생일1843년 12월 24일
사망일1910년
군사 경력
소속러시아 제국 육군
복무 기간1863년–1906년
최종 계급육군 대장
지휘제9보병사단 제1여단
제6보병사단
제2시베리아군단
주요 참전 전투/전쟁러시아-튀르크 전쟁
러일 전쟁

2. 생애

자술리치는 육군 사관학교와 콘스탄티노프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863년 소위로 임관하여 이르쿠츠크의 제93 보병 연대에서 복무했다. 1864년 근위대 척탄병 연대로 전속되었다. 그는 러시아-튀르크 전쟁 (1877-1878) 당시 이 연대에 소속되어 발칸에서 전투 중 용맹함을 여러 차례 인정받았으며, 특히 필리포폴리스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 공로로 1878년 대령으로 진급했다.

1887년, 자술리치는 페름에 주둔한 제101 보병 연대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1894년 소장으로 진급하여 제9 보병 사단의 제1 여단, 이어서 제2 척탄병 사단의 제1 여단 지휘관이 되었다. 1899년에는 현재 폴란드에 있는 오소비에츠 요새의 지휘를 맡았다. 이듬해 제6 보병 사단의 사령관이 되었으며, 1901년 중장으로 진급했다.

러일 전쟁이 시작되기 직전, 자술리치는 제2 시베리아 군단의 지휘를 맡았다. 이 군단은 보병 16,000명, 기병 5,000명, 포 62문을 보유하고 러시아 만주 군의 동쪽 날개를 형성했다. 그의 임무는 일본 제국 육군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진입하는 것을 막는 것이었으나, 그는 약 273.59km에 달하는 넓은 전선에 병력을 분산 배치하고, 주 공격 예상 지점으로 확신한 단둥 국경을 과도하게 요새화하는 전술적 실수를 저질렀다. 그는 단둥 상류의 의주 근처에 집결한 일본군을 기만 전술로 오판하고 병력 재배치 요청을 거부했다. 이어진 압록강 전투에서 러시아군은 구로키 다메모토 장군 휘하의 일본 제1군에게 일방적으로 밀렸다. 일본군을 과소평가했던 자술리치는 초기에 알렉세이 쿠로팟킨 장군의 단계적 철수 명령을 거부했으나, 일본군의 공세가 거세지자 결국 큰 손실을 입고 북쪽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 패배로 자술리치는 야전 사령관 자리에서 표도르 켈러 중장으로 교체되었지만, 제2 시베리아 군단의 지휘권은 유지했다.[3]

자술리치는 이후 다시차오 전투, 시무청 전투, 랴오양 전투 및 봉천 전투 등 전쟁의 주요 전투에 참여했지만, 그의 지휘는 우유부단하고 소극적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연이은 패배를 초래했다. 그는 공세 전환을 거부하고 지속적인 후퇴를 거듭하여 부하들의 신뢰를 잃었으며, 특히 랴오양 전투에서는 니콜라이 자루바예프 중장의 진지 사수 명령을 따르지 않아 러시아 전선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기도 했다.

1906년 러일 전쟁이 끝난 후, 자술리치는 질병을 이유로 군에서 퇴역했으며, 1910년에 사망했다.

3. 러일 전쟁

러일 전쟁 발발 직전, 자술리치는 제2 시베리아 군단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러시아 만주군 동부 전선을 책임지게 되었다. 그의 주요 임무는 일본 제국 육군압록강 도하를 저지하여 만주 진입을 막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압록강 전투에서 전략적 판단 착오와 총사령관 알렉세이 쿠로팟킨의 명령에 대한 불복종 등으로 인해 일본군에게 패배하는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했다.[3] 이 패배로 야전사령관 직위는 표도르 켈러 중장으로 교체되었으나, 군단 지휘는 계속 맡았다.[3]

이후 다시차오 전투, 시무청 전투, 랴오양 전투, 봉천 전투 등 주요 전투에 참여했지만, 그의 지휘는 지속적으로 우유부단하고 소극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공격 명령을 거부하고 후퇴를 반복하면서 부하들의 신뢰를 잃었으며, 특히 랴오양 전투에서는 니콜라이 자루바예프 중장의 명령을 거부하여 아군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기도 했다. 결국 전쟁에서의 연이은 실패와 부정적인 평가 속에 1906년 질병을 이유로 퇴역했다.

3. 1. 압록강 전투

러일 전쟁 직전, 자술리치는 제2 시베리아 군단의 군단장이 되었다. 이 군단은 보병 16,000명, 기병 5,000명, 대포 62문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러시아 만주군의 동쪽 측면을 담당했다. 그의 임무는 일본 제국 육군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진입하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술리치는 약 273.59km에 달하는 넓은 전선에 병력을 분산시키는 전략적 오류를 범했다. 그는 안둥이 일본군의 주 공격로가 될 것이라 확신하고 이곳의 방어만 강화했다. 일본군이 안둥 상류의 위주 근처에 집결한 것을 기만 전술로 오판하고, 부대 재배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3]

이어진 압록강 전투에서 러시아군은 구로키 다메모토 장군이 지휘하는 일본 제1군에게 크게 패했다. 자술리치는 일본군의 전력을 과소평가하여 총사령관 알렉세이 쿠로팟킨 장군의 단계적 철수 명령을 처음에는 거부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공세가 거세지자 결국 큰 손실을 입고 북쪽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 패배로 자술리치는 야전사령관 자리에서 물러나 표도르 켈러 중장으로 교체되었지만, 제2 시베리아 군단의 지휘권은 유지했다.[3]

자술리치는 이후 다시차오 전투, 시무청 전투, 랴오양 전투, 봉천 전투 등에도 참전했으나, 그의 지휘는 결단력이 부족하고 소극적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연이은 패배를 기록했다. 공세 전환 요청을 거부하고 계속 후퇴하면서 부하들의 신뢰를 잃었으며, 특히 랴오양 전투에서는 니콜라이 자루바예프 중장의 진지 사수 명령을 따르지 않아 러시아군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기도 했다.

3. 2. 이후 전투

압록강 회전에서의 패배 이후, 자술리치는 야전사령관 자리에서 물러나 표도르 켈레르 중장에게 자리를 넘겨주었지만, 제2 시베리아 군단의 지휘권은 계속 유지했다.[3]

그는 이후 벌어진 주요 전투에도 제2 시베리아 군단을 이끌고 참전했다. 대석교 전투, 시무청 전투, 랴오양 전투, 그리고 봉천 전투 등이 그가 참여한 대표적인 전투이다. 그러나 이 전투들에서 자술리치는 일관되게 결단력이 부족하고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이는 러시아군의 연이은 패배로 이어졌다. 그는 공세로 전환하라는 상부의 요청을 거부하고 지속적으로 후퇴하는 모습을 보여 부하 병사들로부터 신뢰를 잃었다. 특히 랴오양 전투에서는 니콜라이 자루바예프 중장의 진지 사수 명령을 따르지 않아 러시아군 전체 방어선을 위험에 빠뜨리기도 했다.

러일 전쟁이 끝난 후인 1906년, 자술리치는 질병을 이유로 군에서 퇴역했다.

4. 러일 전쟁 이후

1906년 러일 전쟁이 끝난 후, 자술리치는 질병을 이유로 군에서 퇴역했다. 이후 1910년에 사망했다.

5. 훈장

wiki

훈장 이미지훈장 이름등급수여 연도
성 게오르기 훈장 리본
성 게오르기 훈장4등급1878년
성 안나 훈장 리본
성 안나 훈장3등급 (검과 활)1878년
성 스타니슬라우스 훈장 리본
성 스타니슬라우스 훈장2등급 (검)1878년
--성 안나 훈장1등급 (검)1906년
성 블라디미르 훈장 리본
성 블라디미르 훈장2등급1906년


참조

[1]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the Russo-Japanese War
[2] 서적
[3]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the Russo-Japanese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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