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키 다메모토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구로키 다메모토는 사쓰마번 출신의 일본 제국 육군 군인으로, 메이지 유신 시기 보신 전쟁에 참전했다. 육군 대장으로 러일 전쟁에 참전하여 제1군 사령관으로서 압록강 전투, 요동 전투, 사호 전투, 봉천 전투에서 활약하며 "쿠로킨스키"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는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에서 공을 세워 남작, 백작 작위를 받았으며, 군사 참의관과 추밀원 고문관을 역임했다. 하지만 원수로의 승진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는 뛰어난 지휘 능력과 언론 통제 전략으로 주목받았지만, 강직한 성격으로 인해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23년 폐렴으로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공1급 금치훈장 수훈자 - 데라우치 마사타케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메이지 시대부터 다이쇼 시대까지 활동한 일본의 군인이자 정치가로서 육군대신, 한국통감, 조선총독,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하며 한국 병합을 주도하고 무단통치를 실시했으며, 시베리아 출병 등 외교 정책을 펼친 일본 제국주의 핵심 인물이다. - 공1급 금치훈장 수훈자 - 고다마 겐타로
고다마 겐타로는 일본 제국의 육군 군인이자 정치가로서, 만주군 총참모장으로 러일 전쟁 승리에 기여하고 대만 총독으로서 식민 통치를 펼치며 한일 병합 조약 체결에 관여하는 등 긍정적, 부정적 영향을 모두 남겼다. - 공3급 금치훈장 수훈자 - 의민태자
의민태자는 고종과 순헌황귀비 엄씨 사이에서 태어난 대한제국 최후의 황태자로, 영친왕 책봉 후 황태자가 되었으나 일본 유학 및 군 복무, 일본 황족과의 정략결혼, 광복 후 국적 미인정으로 일본에서 생활하다 귀국 후 영원에 안장되었으며 사후 의민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 공3급 금치훈장 수훈자 - 데라우치 마사타케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메이지 시대부터 다이쇼 시대까지 활동한 일본의 군인이자 정치가로서 육군대신, 한국통감, 조선총독,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하며 한국 병합을 주도하고 무단통치를 실시했으며, 시베리아 출병 등 외교 정책을 펼친 일본 제국주의 핵심 인물이다. - 세이난 전쟁 관련자 - 데라우치 마사타케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메이지 시대부터 다이쇼 시대까지 활동한 일본의 군인이자 정치가로서 육군대신, 한국통감, 조선총독,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하며 한국 병합을 주도하고 무단통치를 실시했으며, 시베리아 출병 등 외교 정책을 펼친 일본 제국주의 핵심 인물이다. - 세이난 전쟁 관련자 - 오쿠보 도시미치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사쓰마 번 출신의 일본 정치가 오쿠보 도시미치는 사이고 다카모리, 기도 다카요시와 함께 막부 타도를 이끌고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근대화를 추진했으나, 강력한 권력과 정책 추진 방식으로 비판받았으며 사족에게 암살당했다.
구로키 다메모토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구로키 다메모토 |
한자 표기 | 흑목 위정 |
일본어 표기 | 黒木 為楨 |
로마자 표기 | Kuroki Tamemoto |
별명 | 크로킨스키 |
출생 | 1844년 5월 3일 |
출생지 | 사쓰마국 가고시마군 가치야정 (현재 가고시마현 가고시마시 가치야정) |
사망 | 1923년 2월 3일 |
사망지 | 도쿄부 도쿄시 아카사카구 아오야마미나미정 6번지 |
묘소 | 다마 묘원 |
군 경력 | |
소속 | 일본 제국 육군 |
복무 기간 | 1864년 – 1869년, 1871년 – 1909년 |
최종 계급 | 육군 대장 |
참전 | 보신 전쟁 청일 전쟁 러일 전쟁 |
지휘 | 제6사단 제1군 |
기타 정보 | |
서훈 | 금치훈장 3급 금치훈장 1급 |
이후 활동 | 추밀고문관 |
2. 생애
구로키 다메모토는 1844년 5월 3일 (덴포 15년 3월 16일) 규슈 남부 사쓰마번(현재의 가고시마현)에서 사무라이의 아들로 태어났다.[12] 보신 전쟁에서 도쿠가와 막부 군대에 맞서 싸웠으며, 도바-후시미 전투와 우쓰노미야 성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12]
(생애 초기와 일본 제국 육군 초기 시절의 자세한 내용은 === 초기 생애 ===, === 일본 제국 육군 === 하위 섹션을 참조)
1896년 근위사단장에 임명되었고, 서부 도독으로 전임되었다. 1903년 육군 대장으로 진급했다.[12]
1904년 군사 참의관을 거쳐 제1군 사령관으로 러일 전쟁에 참전했다. 압록강에서 봉천 회전까지 연전하여 러시아군으로부터 "쿠로킨스키"라고 불리며 두려움을 샀다. 당시 유럽에서는 니콜라이 2세가 일본인을 "원숭이 같은"이라고 폄하하며 일본이 러시아에 이길 리 없다고 생각했으나, 구로키의 활약으로 인해 그가 오랫동안 러시아에 시달려온 폴란드인이라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1906년 다시 군사 참의관이 되었고, 1907년 미국에 출장했다. 같은 해 군공으로 백작 작위를 받았다. 1909년 후비역으로 편입되었고, 1914년 퇴역했다. 1917년부터 1923년까지 추밀 고문관을 역임했다.
1923년 2월 3일 도쿄시아오야마 자택에서 폐렴으로 서거했다. 향년 80세.
2. 1. 초기 생애
덴포 15년 (1844년 5월 3일) 3월 16일, 사쓰마 번사(士) 죠사(帖佐) 타메에몬의 셋째 아들로 사쓰마국 가고시마성 아래 가치야초 네코노야쿠시코지(시모가치야초 방한)에서 태어났다. 이후 쿠로키 만자에몬 타메요시의 양자가 되어 구로키 성을 칭했다.[12]보신 전쟁에 4번대 반대장으로 종군하였다. 도바·후시미 전투에서는 사쓰마 번의 소총대를 지휘하여 막부 보병을 집중 사격으로 패주시키고, 우쓰노미야성 공방전에서는 성벽에 돌진하여 공격하는 등 분전하여 승리의 계기를 만들었다. 메이지 2년 (1869년) 2월, 1번 대대 소대장이 되었다.[12]
메이지 4년 (1871년) 4월에 상경하여, 같은 해 7월 육군 대위로 임관, 어친병 1번 대대에 배속되었다. 메이지 5년 (1872년) 8월, 육군 소좌로 승진하여 근위 보병 제1대대장에 취임하였다.[12]
2. 2. 일본 제국 육군
1871년 7월, 구로키는 새로 창설된 일본 제국 육군 제1대대 대위로 임관되었다. 이후 빠르게 진급하여, 1872년 8월 소좌로 승진, 근위 보병 제1대대장이 되었다. 근위 보병 제2대대장을 거쳐, 1875년 2월, 31세의 젊은 나이에 제12 히로시마 보병 연대장(중령)이 되었다.1877년 세이난 전쟁 당시 구로키는 자신의 씨족에 대항하여 연대를 지휘했다. 1878년 11월 대좌로 진급, 1879년 1월 근위 보병 제2연대장, 중부 감군부 참모, 참모 본부 관동국장을 역임했다. 1885년 5월 육군 소장으로 진급하여 보병 제5여단장, 근위 보병 제2여단장을 맡았다.
1893년 11월 육군 중장으로 진급, 제6사단장에 취임했다. 1895년 1월 청일 전쟁에 출정하여 웨이하이웨이 공격에 참가했으며, 같은 해 8월 군공으로 남작 작위를 받았다.[12]
3. 러일 전쟁
구로키 다메모토는 1903년 장군으로 진급한 뒤, 1904년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 제1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서울 근처의 제물포에 병력을 상륙시킨 후 북쪽으로 진격하여 압록강 전투, 요동 전투, 사호 전투, 봉천 전투 등 주요 전투에서 러시아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특히, 압록강 전투에서는 적은 수의 병력으로 러시아군을 격파하였고, 요동 전투와 사호 전투에서는 러시아군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해냈다. 봉천 전투에서는 일본군 우익을 지휘하여 승리에 기여했다.
구로키는 전쟁 중 서방의 여러 관찰자들을 신경써야 했다.[2] 당시 전쟁 보도는 기자들의 이동을 제한하고 엄격한 검열을 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이후 군사적 충돌에서 언론 보도를 통제하는 중요한 모델이 되었다.[3]
영국령 인도 육군의 무관 이안 해밀턴 경은 구로키의 경험을 바탕으로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갈리폴리 전역에서 언론 검열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활용했다.[4] 또한, 미국의 군사 주재관 존 J. 퍼싱 대위 역시 구로키의 사례를 참고하여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미국 원정군의 언론 인증 업무를 담당할 인물을 선정했다.[5]
3. 1. 압록강 전투

1903년 11월 장군으로 진급한 구로키는 이듬해 러일 전쟁 발발과 함께 일본 제1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904년 2월 중순, 서울 근처 제물포에 병력을 상륙시킨 구로키는 북쪽으로 진격하여 1904년 4월 30일부터 5월 1일까지 압록강 전투에서 러시아군을 격파했다.[1]
3. 2. 요동 전투
요동 전투에서 일본군 좌익을 지휘하여 1904년 8월 25일부터 9월 3일까지 혼란스러운 러시아군의 공격을 격퇴했다.[1]
3. 3. 사호 전투


구로키 부대는 1904년 10월 5일부터 10월 17일까지 사호 전투에서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쿠로파트킨 장군 휘하의 러시아군 공세를 성공적으로 방어했다.[1] 이후 1905년 2월 21일부터 3월 10일까지 봉천 전투에서 일본군 우익을 지휘했다.[1]
전쟁 중 구로키는 많은 서방 관찰자들에게 신경을 써야 했다.[2] 전쟁에 대한 언론 보도는 기자들의 이동 제한과 엄격한 검열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후 모든 군사적 충돌에서 보다 통제된 보도에 대한 면밀한 주의가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3]
3. 4. 봉천 전투
사호 전투에서 구로키 부대는 1904년 10월 5일부터 10월 17일까지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쿠로파트킨 장군 휘하의 러시아군 공세를 성공적으로 방어했으며, 이후 1905년 2월 21일부터 3월 10일까지 봉천 전투에서 일본군 우익을 지휘했다.[1]전쟁 중 구로키는 많은 서방 관찰자들에게 신경을 써야 했다.[2] 전쟁에 대한 언론 보도는 기자들의 이동 제한과 엄격한 검열의 영향을 받았다. 이후 모든 군사적 충돌에서 보다 통제된 보도에 대한 면밀한 주의가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3]
3. 5. 서방 언론과의 관계
러일 전쟁 중 구로키는 수많은 서방 관찰자들에게 신경을 써야 했다.[2] 당시 전쟁에 대한 언론 보도는 기자들의 이동을 제한하고 엄격한 검열을 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방식은 이후 모든 군사적 충돌에서 언론 보도를 통제하는 데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3]영국령 인도 육군의 무관으로 일본 제1군에 주재했던 이안 해밀턴 경은 구로키의 수행원에게서 얻은 교훈을 직접 적용하였다. 1915년 갈리폴리 전역에서 그는 런던 ''데일리 메일''에 러일 전쟁을 보도했던 영국 기자 윌리엄 맥스웰 대위를 수석 야전 검열관으로 임명했다.[4]
이러한 경험은 10년 후 미국 군사 주재관 존 J. 퍼싱 대위가 유럽에서 미국의 저널리스트 프레데릭 팔머를 설득하여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미국 원정군의 언론 인증 업무를 맡도록 했을 때 채택한 모델이 되었다.[5] 팔머는 퍼싱처럼 구로키가 부과한 제약 속에서 러일 전쟁을 경험한 바 있다.
4. 만년
1909년(메이지 42년) 3월, 후비역으로 편입되었고, 1914년(다이쇼 3년) 4월 1일에 퇴역했다.[13] 이후 1917년(다이쇼 6년) 4월부터 1923년(다이쇼 12년) 2월까지 추밀 고문관을 역임했다.
구로키는 원수로 승진하지 못한 두 명의 고위 야전 사령관 중 한 명이었다. 이는 조슈 출신 경쟁자들에게 지배받던 당시 정부 상황에서, 그의 사쓰마 출신 배경이 주된 이유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혹은 일본 제국 육군 내부의 정치적 상황 때문일 수도 있다.[6]
4. 1. 은퇴 후
1909년 군에서 은퇴한 구로키는 ''단샤쿠''(남작) 작위를 받았으며, 이후 ''화족'' 작위 체제 하에서 ''하쿠샤쿠''(백작) 작위를 받았다.[6] 1917년부터 1923년 폐렴으로 사망할 때까지 내대신|Naidaijin일본어으로 재직했다.5. 인물
구로키 다메모토는 사쓰마 무사다운 호걸 기질로, 논리보다 경험을 중시하는 돌격형 군인이었다. 메이지 천황과의 스모 일화는 그의 성격을 보여준다. 야전 지휘관으로서 러일 전쟁 초기 일본군의 쾌진격에 기여했으나, 지나친 돌출 행동으로 만주군 총사령부로부터 여러 차례 "진격 중지" 명령을 받기도 했다.
러일 전쟁 후 다른 군사령관들이 원수로 추대될 때, 구로키는 대장으로 군 경력을 마쳤다. 이는 명예직인 원수보다 현장 지휘관을 선호한 본인의 의사와 강직하고 거친 성격이 군 중앙에서 환영받지 못한 점이 작용한 결과였다.[14]
5. 1. 성격과 리더십
사쓰마 무사다운 호걸 기질의 성격으로, 논리보다는 경험을 중시하는 돌진형 군인이었다. 이를 증명하듯, 재미 삼아 스모 상대를 신청한 메이지 천황을 용서 없이 내던지고 내동댕이쳤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야전 지휘관으로서 오랜 경험과 감을 살린 뛰어난 지휘 능력을 보여, 러일 전쟁 직후 일본군의 쾌진격은 구로키의 수완에 기인한 바가 크다. 그러나, 그 돌진형 성격이 화근이 되어, 총사령부의 뜻에 반하는 돌출 행위를 보였고, 봉천 회전 당시에는 지나친 돌출 행위로 인해 만주군 총사령부로부터 여러 차례 "진격 중지" 명령을 받았다.
러일 전쟁 후, 전군에 대한 훈시에서 "충성을 다하고, 무용을 떨쳐, 신속히 평화를 극복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14]
6. 평가
구로키 다메모토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러일 전쟁에서 보여준 그의 군사적 능력은 높이 평가받지만, 원수 진급 실패와 관련된 정치적 배경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사쓰마 출신이라는 점이 조슈 출신이 주류였던 당시 일본 육군 내에서 불이익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그는 러일 전쟁 이후 "충성을 다하고, 무용을 떨쳐, 신속히 평화를 극복해야 한다"라는 훈시를 남겼다.[14] 노기 마레스케와 마찬가지로, 구로키는 뛰어난 업적에도 불구하고 대장으로 전역했다. 일각에서는 그가 현장 지휘관을 선호하는 성향과 강직한 성격 때문에 군 상층부의 견제를 받았다고 분석한다.
6. 1. 정치적 배경
구로키 다메모토가 원수로 승진하지 못한 것은 당시 일본 제국 육군 내의 정치적 상황 때문으로 보인다.[6] 당시 정부는 조슈 출신이 장악하고 있었고, 구로키는 사쓰마 출신이었기 때문에 견제를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러일 전쟁 이후 구로키는 전군에 "충성을 다하고, 무용을 떨쳐, 신속히 평화를 극복해야 한다"라는 훈시를 남겼다.[14]
노기 마레스케와 함께 구로키는 군 경력과 공적에도 불구하고 원수로 추대되지 않고 대장으로 전역했다. 구로키는 명예직인 원수보다 현장 지휘관을 선호했으며, 강직한 성격이 군 상층부의 환영을 받지 못한 것도 원수 진급이 좌절된 이유 중 하나로 꼽힌다. 노기 또한 원수 추대를 제안받았으나 고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7. 영전
구로키 다메모토는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에서 세운 공으로 훈장과 작위를 받았다. 1895년 남작 작위를 받았고, 1906년에는 금계 훈장 1급과 욱일대수장을 받았다. 1907년 백작으로 승격되었다.[30]
7. 1. 위계
연도 | 위계 |
---|---|
1886년 10월 28일 | 종4위[15] |
1892년 2월 13일 | 정4위[16] |
1897년 5월 31일 | 종3위[17] |
1902년 8월 20일 | 정3위[18] |
1907년 8월 30일 | 종2위[19] |
1914년 4월 30일 | 정2위[20] |
1923년 2월 4일 | 종1위[21] |
7. 2. 훈장
수여 날짜 | 훈장 종류 | 비고 |
---|---|---|
1885년 4월 7일 | 훈3등 욱일중수장 | [22] |
1889년 11월 25일 | 대일본제국 헌법 발포 기념장 | [23] |
1893년 5월 26일 | 훈2등 서보장 | [25] |
1895년 8월 20일 | 남작·공3급 금치훈장·욱일중광장 | [24] |
1900년 5월 31일 | 훈1등 서보장 | [26][27] |
1905년 5월 30일 | 욱일대수장 | [28] |
1906년 2월 20일 | 성 미카엘 및 성 조지 훈장 (GCMG) | [7] |
1906년 4월 1일 | -- 공1급 금치훈장, 욱일동화대수장, 메이지 37·38년 종군기장 | [29] |
1906년 7월 13일 | 스웨덴 레페 훈장 코만도르 아벡 에트와르 에그랑크로와 | 외국 훈장 착용 허가 [32] |
1906년 12월 28일 | 매화 훈장 | |
1907년 9월 21일 | 백작 | [30] |
1915년 11월 10일 | 대례 기념장 | [31] |
7. 3. 외국 훈장
8. 가족 관계
구로키 다메모토는 1844년 5월 3일 (덴포 15년 3월 16일) 사쓰마 번사(士) 죠사(帖佐) 타메에몬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이후 쿠로키 만자에몬 타메요시의 양자가 되어 구로키 성을 칭했다.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
관계 | 이름 | 출생-사망 | 비고 |
---|---|---|---|
아버지 | 죠사 타메에몬 | ? | 사쓰마 번사 |
양아버지 | 구로키 만자에몬 타메요시 | ? | |
후처 | 구로키 히야쿠(百子) | 1868년 ~ 1961년 | 하타모토(旗本) 나카야마 가쓰시게의 차녀, 구로다 기요타카의 양녀 |
장남 | 구로키 미쓰지 | 1884년 ~ 1944년 | 마쓰카타 이와오의 딸 다케코와 결혼, 가독 상속, 귀족원 의원 역임 |
삼남 | 구로다 기요시 (백작) | 1893년 ~ 1951년 | 구로다 기요나카 백작의 양자로 입적, 백작 작위 상속 |
장녀 | 쓰네 | 1877년 ~ 1922년 | 가와다 교케이의 장남과 결혼 |
차녀 | 아이코 | ? | 다카하시 고레키요의 장남 다카하시 고겐과 결혼 |
8. 1. 배우자 및 자녀
- 후처: 구로키 히야쿠(百子, 黒木百|쿠로키 햐쿠일본어)(1868년 ~ 1961년) - 하타모토(旗本) 나카야마 가쓰시게의 차녀, 구로다 기요타카의 양녀, 기요타카의 전처의 여동생
- 장남: 구로키 미쓰지(1884년 ~ 1944년) - 전처의 아들. 아내 다케코(1895년 ~ 1979년)는 마쓰카타 이와오의 딸. 가독을 상속. 제1차 제국 부흥원 참여·귀족원 의원을 역임, 정3위 훈3등 백작으로 승진.
- 삼남: 구로다 기요시 (백작)(1893년 ~ 1951년) - 구로다 기요나카 백작(내각총리대신 구로다 기요타카 육군 중장 백작의 아들)의 양자로 입적하여, 백작 작위를 상속.
- 장녀: 쓰네(1877년 ~ 1922년) - 가와다 교케이의 장남의 아내
- 차녀: 아이코 - 다카하시 고레키요의 장남, 다카하시 고겐의 아내
9. 관련 서적
- 쓰게 히사요시, 《구로키 다메모토: 러일 전쟁의 승리에 가장 공헌한 명장》, PHP 연구소, 2010년, PHP 문고, 전국 서지 번호 [https://id.ndl.go.jp/bib/000011056008 21860788][1]
- 쓰게 히사요시, 《러일 전쟁 7인의 육장 명장의 조건 오야마 이와오・고다마 겐타로・후쿠시마 야스마사・구로키 다메모토・타치미 나오후미・아키야마 요시후루・이치노헤 효에》, 가쿠켄 퍼블리싱, 2010년 12월[2]
- 라이하라 게이스케, 세리자와 다케미츠, 《러일 전쟁에서의 구로키 다메모토 대장》, 난포 신사, 2012년, 전국 서지 번호 [https://id.ndl.go.jp/bib/023421064 22060128][3]
- 모리 다카하루, 〈잭 런던에 대한 사쓰마 무인의 영향: 구로키 타메모토의 경우〉, 《리츠메이칸 경제학》, 리츠메이칸 대학 경제 학회, 58권 3호, 43~58쪽, 2009년 9월, [https://doi.org/10.34382/00001586 doi:10.34382/00001586][4]
참조
[1]
서적
The War of the Rising Sun and Tumbling Bear: A Military History of the Russo-Japanese War, 1904-5
https://books.google[...]
1988
[2]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War Journalism
https://books.google[...]
1997
[3]
웹사이트
Jack London's War
http://www.jacklondo[...]
[4]
웹사이트
Beating the censor – Ashmead-Bartlett's efforts to reveal the real story of Gallipoli
http://www.anzacsite[...]
[5]
서적
https://books.google[...]
[6]
서적
The Way of the Heavenly Sword: The Japanese Army in the 1920s
https://books.google[...]
1995
[7]
뉴스
The London Gazette, 15 May 1906
http://www.london-ga[...]
The London Gazette
1906-05-15
[8]
간행물
Sveriges statskalender
https://gupea.ub.gu.[...]
2021-03-19
[9]
문서
People Places: Contemporary Saskatchewan Place Names
2003-10
[10]
웹사이트
Kuroki (Bottineau County)
https://web.archive.[...]
2014-08-23
[11]
사전
黒木為楨
https://kotobank.jp/[...]
[12]
논문
20世紀初頭のライプチヒ-植物学者大野直枝のドイツ日記
https://tezukayama.r[...]
帝塚山大学人間環境科学研究所
1999
[13]
관보
『官報』第503号
1914-04-06
[14]
서적
陸軍郷土歩兵聯隊写真集 わが聯隊
ノーベル書房
1979
[15]
관보
『官報』第1003号「叙任及辞令」
1886-11-01
[16]
관보
『官報』第2584号「叙任及辞令」
1892-02-15
[17]
관보
『官報』第4172号「叙任及辞令」
1897-06-01
[18]
관보
『官報』第5740号「叙任及辞令」
1902-08-21
[19]
관보
『官報』第7253号「叙任及辞令」
1907-08-31
[20]
관보
『官報』第525号「叙任及辞令」
1914-05-01
[21]
관보
『官報』第3153号「叙任及辞令」
1923-02-06
[22]
관보
『官報』第527号「賞勲叙任」
1885-04-08
[23]
관보
『官報』第1929号「叙任及辞令」
1889-12-02
[24]
관보
『官報』第3644号「叙任及辞令」
1895-08-21
[25]
관보
『官報』第2971号「叙任及辞令」
1893-05-27
[26]
관보
『官報』第5072号「叙任及辞令」
1900-06-01
[27]
웹사이트
中野文庫 - 旧・勲一等瑞宝章受章者一覧(戦前の部)
https://web.archive.[...]
[28]
관보
『官報』第6573号「叙任及辞令」
1905-05-31
[29]
관보
『官報』号外「叙任及辞令」
1906-12-30
[30]
관보
『官報』第7272号「授爵敍任及辞令」
1907-09-23
[31]
관보
『官報』第1310号・付録「辞令」
1916-12-13
[32]
관보
『官報』第6919号「叙任及辞令」
1906-07-23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