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무청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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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무청 전투는 1904년 7월 31일부터 8월 1일까지 일본 제4군과 러시아 제2 시베리아 군단 사이에 벌어진 러일 전쟁의 전투이다. 노즈 미치쓰라가 지휘하는 일본군은 제2군에서 분리되어 랴오양을 향해 진군했고, 미하일 자술리치 중장이 지휘하는 러시아군은 하이청 근교에서 일본군의 진격을 저지하려 했다. 전투는 러시아군의 퇴각으로 끝났으며, 러시아군은 1,217명의 사상자를, 일본군은 836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이 전투는 랴오양 전투로 이어졌으며, 러일 전쟁의 전황과 대한민국의 지정학적 위치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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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무청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전투 개요 | |
전투명 | 시무청 전투 |
다른 이름 | 석목성 전투 (析木城の戦い, 세키조 노 타타카이) 보이 우 시무체나 (Бой у Симучена, 러시아어) |
일부 | 러일 전쟁 |
날짜 | 1904년 7월 31일 - 1904년 8월 1일 |
장소 | 만주, 랴오양과 뤼순 항 사이 (하이청 시 인근) |
결과 | 일본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일본 제국 |
교전국 2 | 러시아 제국 |
지휘관 | |
일본군 지휘관 | 노즈 미치쓰라 대장 |
러시아군 지휘관 | 미하일 자술리치 중장 |
병력 규모 | |
일본군 병력 | 약 34,000명 |
러시아군 병력 | 약 33,000명 |
피해 규모 | |
일본군 사상자 | 836명 |
러시아군 사상자 | 1,217명 |
관련 전투 | |
관련 전투 목록 | 1st Port Arthur Chemulpo Bay Hitachi Maru convoy Yellow Sea Ulsan Korsakov Dogger Bank incident Tsushima Yalu River Nanshan Te-li-Ssu Motien Pass Tashihchiao 2nd Port Arthur Hsimucheng Liaoyang Shaho Sandepu Mukden Sakhalin |
2. 배경
노즈 미치쓰라 장군이 이끄는 일본군 제4군 제5사단, 제10사단은 제2군에서 분리되어 랴오양 시를 향해 북쪽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미하일 자술리치 중장이 지휘하는 러시아 제국 제2 시베리아 군단이 하이청 근교에서 일본군의 진격을 저지하려 했다. 러시아군은 파벨 미셴코 중장이 이끄는 포병 부대의 지원을 받았다.[2]
일본 제국 육군 제4군은 대고산에 상륙한 후, 독립 제10사단을 주력으로 랴오양 시를 향해 진격했다. 진격로 상의 요충지인 하이청 시 근교에는 러시아군 시베리아 제2군단이 배치되어 있었다. 7월 30일, 일본 제4군은 러시아군 진지에 도착하여 다음 날 공격을 개시했다. 제4군은 제2군 소속 제3사단과 협력하여 포위 공격을 시도했으나, 전황은 쉽게 유리해지지 않았다. 이에 미하일 자술리치 중장은 북쪽으로 퇴각을 결정했고, 8월 1일 새벽 전투가 종료되었다. 시베리아 제2군단은 요양에서 러시아 만주군 주력과 합류했고, 일본 제4군은 제2군과 함께 요양 남쪽에 진을 쳤다.[1]
3. 전투 전개
3. 1. 러시아군의 방어 준비
타스히차오 전투에서 패배한 미하일 자술리치 장군 휘하의 제2 시베리아 군단은 시무청 마을로 후퇴했다.[1] 자술리치 장군은 총 33개 대대와 80문의 포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산악 지형에서 노출된 위치에 있었다.[1]
3. 2. 일본군의 공격 개시
1904년 7월 31일 새벽 2시, 일본 제10사단과 예비 여단이 러시아군 진지에 정면 공격을 개시했고, 일본 제5사단은 좌측면 공격을 가하여 러시아군의 퇴로를 위협했다.[1]
러시아군은 수적으로 우세한 일본군에 맞서 낮 동안 끈기 있게 저항했고, 밤까지 전투를 지속했다.[1] 일본 제5사단은 오쿠 야스카타 장군이 파견한 제2군 제3사단의 별동대와 합류하여, 일본군은 러시아군을 포위할 수 있는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1] 같은 날 23시, 미하일 자술리치 장군은 알렉세이 쿠로팟킨 장군으로부터 받은 하이청 시 철수 명령을 실행했고, 일본군은 다음 랴오양으로 북진하기 위해 합류할 수 있었다.[1]
3. 3. 러시아군의 후퇴
러시아군은 수적으로 우세한 일본군에 맞서 낮 동안 끈기 있게 저항했고, 밤까지 전투를 지속했다. 일본 제5사단은 오쿠 야스카타 장군이 지원을 위해 파견한 제2군 제3사단의 별동대와 합류했고, 일본군은 러시아군을 포위할 수 있는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1] 1904년 7월 31일 23시, 미하일 자술리치 장군은 알렉세이 쿠로팟킨 장군으로부터 하이청 철수 명령을 받아 실행했고, 일본군은 이후 랴오양으로 북진하기 위해 합류할 수 있었다.[1]
4. 결과 및 영향
러시아군은 1,217명의 사상자를 냈고, 일본군은 836명의 사상자를 냈다.[1] 이 전투의 결과로 일본 제4군은 제2군과 함께 랴오양 남쪽에 진을 쳤고, 이후 랴오양 전투로 이어졌다. 시무청 전투는 러일 전쟁의 전반적인 전황에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와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참조
[1]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the Russo-Japanese War
[2]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the Russo-Japanese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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