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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르 그리펜베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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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카르 그리펜베르크는 발트 독일인 출신으로, 크림 전쟁, 폴란드 봉기, 중앙아시아 원정 등 러시아 제국 군대에서 복무한 장군이었다. 그는 러일 전쟁에 참전하여 제2군을 지휘했으나, 지휘권의 제한과 퇴각 명령으로 인해 사임하고 귀국했다. 귀국 후 보병 총감으로 임명되어 사격 교전 규칙 개정에 힘썼으며, 1914년까지 추밀원 의원을 역임했다. 1915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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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르 그리펜베르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그리펜베르크 장군
이름 (러시아어)Оскар-Фердинанд Казимирович Гриппенберг
로마자 표기 (러시아어)Oskar-Ferdinand Kazimirovich Grippenberg
출생일1838년 1월 13일
출생지핀란드 대공국, 이카알리넨
사망일1916년 1월 7일
사망지러시아, 페트로그라드
군사 경력
소속러시아 제국 육군
복무 기간1854년 – 1906년
최종 계급보병대장
지휘제1사단, 러시아 제국 근위대
러시아 제2만주군
주요 참전크림 전쟁
1월 봉기
러시아-투르키스탄 전쟁
러시아-튀르크 전쟁
러일 전쟁

2. 생애

오스카르 그리펜베르크는 상트페테르부르크발트 독일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1854년 크림 전쟁 참전을 시작으로 군인의 길을 걸었다. 이후 1863년-1864년 폴란드 반란 진압, 1867년부터 시작된 중앙아시아 원정, 1877년 러시아-튀르크 전쟁 등 여러 전쟁에 참전하며 대대장, 연대장, 여단장, 사단장, 군단장 등 주요 지휘관 직책을 역임했다.

1904년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만주에 파견되어 제2군 사령관을 맡았다. 그는 적극적인 공세를 주장했으나 총사령관 알렉세이 쿠로팟킨과의 의견 충돌과 지휘권 문제로 갈등을 겪었다. 1905년 1월 샌데푸 전투(흑구대 회전)를 지휘했으나 전투 후 사임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귀국 후 1905년 6월 보병 총감에 임명되었으나 건강 문제로 1906년 퇴역했다. 이후 러일 전쟁 패배 책임 문제를 두고 쿠로팟킨과 지상 논쟁을 벌였으며, 1914년까지 추밀원 의원을 지냈다. 1915년 상트페테르부르크(당시 페트로그라드)에서 사망하여 차르스코예 셀로(현 푸시킨 시)의 묘지에 묻혔다.

2. 1. 초기 생애 및 군 경력

오스카르 페르디난드 그리펜베르크는 핀란드 대공국 이깔리넨(스웨덴어: Ikaalinen)에서 우도 스텐 카시미르 그리펜베르크와 마리아 빌헬미나 엘리자베트 라다우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인 그리펜베르크 가문은 1678년 스웨덴 제국에서 귀족 지위를 받았다.[1] 그의 형제 카를은 제국 해군의 제독이었으며, 오스카르는 1874년 헤드비히 이다 안젤리크 룬드와 결혼하여 4명의 자녀를 두었다. 일부 기록에는 그가 상트페테르부르크발트 독일인 가정 출신이라고도 언급된다.

그리펜베르크는 1854년 러시아 크림 육군 사관생도로 군 경력을 시작하여 크림 전쟁에 참전하며 첫 전투 경험을 쌓았다. 1855년 11월 2일에는 그의 용맹함이 공보에 기록되기도 했다. 이후 1863년부터 1864년까지 폴란드에서 일어난 1월 봉기를 진압하는 러시아 군에 참여했으며, 이 공로로 중위로 진급했다.

1867년부터는 중앙아시아의 투르키스탄 군관구에 배속되어 오렌부르크 출신 보병 부대의 대대장을 맡았고, 1866년 소령으로 진급했다. 그는 제5 투르케스탄 대대를 지휘하며 러시아 제국의 투르케스탄 정복 전쟁에 참여하여 여러 전투를 치렀는데, 특히 부하라 토후국 정복과 우라-튜베 요새 공격에서 활약했다. 이러한 공적으로 성 안나 훈장 (검과 활이 있는 3등급)과 성 게오르기 훈장 (4등급)을 수여받았으며, 중령으로 진급했다. 성 게오르기 훈장 4등급은 당시 장군 계급에게 주로 수여되던 것을 고려할 때 이례적인 영예였다.

1869년에는 성 스타니슬라우스 훈장 (2등급)과 "용맹함"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성 게오르기 금검을 추가로 받았다. 1870년 제17 보병 대대장, 1872년 제2 근위 보병 대대장을 역임했으며, 1872년 대령으로 진급했다.

1877년부터 1878년까지 이어진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는 모스크바 근위 연대장으로 참전했다. 그는 고립된 상황에서도 튀르크 군의 반복적인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하며 큰 공을 세웠고, 이 공로로 성 블라디미르 훈장 (검이 있는 3등급), 성 스타니슬라우스 훈장 (1등급), 성 게오르기 훈장 (3등급)을 수여받았다. 전쟁 중인 1878년 2월 22일에는 소장으로 진급했다.

전쟁 후에도 그의 군 경력은 계속되었다. 1888년 근위 제1 보병사단 제1여단장이 되었고, 1890년에는 중장으로 승진하며 명망 높은 모스크바 근위대 제1 사단장이 되었다. 그러나 1898년, 핀란드 대공국에 대한 러시아의 강압적인 정책을 비판한 후 사단장직을 잃기도 했다.

이후 1900년 러시아 제6 군단장으로 임명되었고, 1901년부터는 빌뉴스 군관구 사령관을 지냈다. 1902년 보병 대장으로 진급했으며, 1904년에는 황제 니콜라이 2세부관으로 임명되는 영예를 안았다.

2. 2. 러일 전쟁

1904년 러일 전쟁이 발발하고 러시아군이 연이어 패배하며 북쪽으로 밀려나자, 베테랑 장군이었던 그리펜베르크는 반격을 지휘하기 위해 그해 11월 만주로 파견되었다.[2] 1904년 11월 28일 무크덴에 도착한 그는 제2만주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2] 그리펜베르크는 당시 러시아 만주군 총사령관 알렉세이 쿠로팟킨 장군이 채택한 소모전 전술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쿠로팟킨은 일본 제국 육군만주 깊숙이 유인하여 보급선을 길게 늘어뜨린 뒤,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완공되어 증원군이 도착하면 압도적인 병력으로 격파하려는 지연 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다.[2] 그러나 그리펜베르크는 무크덴 도착 후 부하들에게 "후퇴는 용납하지 않는다", "진지를 이탈하는 자는 즉결 처분하겠다"고 훈시하며[2] 전군이 공세로 전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쿠로팟킨이 여전히 대부분의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고, 그리펜베르크는 제2만주군만 지휘할 수 있었다.

혹한과 보급 부족으로 전선이 정체된 가운데, 1905년 1월 25일 그리펜베르크는 쿠로팟킨의 반대를 무릅쓰고 공세(샌데푸 전투(흑구대 회전))를 시작했다.[2] 이 기습 공격으로 일본군 좌익을 혼란에 빠뜨리며 궁지에 몰아넣었으나,[2] 쿠로팟킨은 그리펜베르크의 공세를 지원하기 위한 병력 투입을 거부했다.[2] 쿠로팟킨의 지원 거부로 공세는 실패했고, 이는 러시아군의 패배로 이어졌으며 두 장교 간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그리펜베르크는 전투가 끝난 다음 날인 1905년 1월 29일, 제2만주군 사령관직 사의를 표명했다.[2] 표면적으로는 질병을 이유로 들었지만,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는 무제한적인 지휘권이 주어지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니콜라이 2세는 그의 귀국을 허락하고 노고에 감사를 표했으며,[2] 3월에 공식적으로 해임되었다. 때마침 러시아 본국에서는 피의 일요일 사건이 발생하여 정세가 어수선했고, 공산주의자들은 장군들 간의 불화를 정부 무능의 증거로 삼아 비판했다.

그리펜베르크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후에도 러시아의 패배 책임을 쿠로팟킨에게 돌리며 공개적으로 비난했고, 이는 두 사람 간의 언론을 통한 설전으로 이어졌다.[2] 이후 1908년 쿠로팟킨이 러일 전쟁 회고록을 출판하자, 책임 소재를 둘러싸고 다시 한번 지상 논쟁을 벌였다.

2. 3. 러일 전쟁 이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귀환한 직후인 1905년 6월, 니콜라이 2세에 의해 보병 총감과 국가 평의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보병 총감으로서 새로운 사격 교본을 개발하는 등 보병의 사격 교전 규칙 개정에 힘썼다. 그러나 건강 상태가 악화되어 1906년 3월 23일 현역에서 물러났으나, 명목상 근위 부관으로서 국가 평의회 위원직은 유지했다.

1908년에는 쿠로팟킨이 출판한 러일 전쟁 회고록의 내용과 관련하여, 전쟁 패배의 책임 소재를 둘러싸고 그와 지면을 통한 논쟁을 벌였다. 그리펜베르크는 생의 마지막까지 신문, 팸플릿, 책 등을 통해 쿠로팟킨에 대한 비판을 계속하며, 무크덴 전투에서의 패배와 전쟁 전체의 손실에 대한 책임을 그에게 돌렸다.

1914년 7월까지 국가 평의회(추밀원)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916년 1월 7일 페트로그라드(옛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사망하여 차르스코예 셀로(현 푸시킨 시)의 묘지에 묻혔다.

3. 훈장

wikitext

연도훈장등급/비고
1867년
성 게오르기 훈장
성 게오르기 훈장
4등급
1867년
성 안나 훈장
성 안나 훈장
1등급
1867년
성 스타니슬라우스 훈장
성 스타니슬라우스 훈장
2등급
1869년용기 금검장
1878년몬테네그로 메달
1878년
성 게오르기 훈장
성 게오르기 훈장
3등급
1878년
성 블라디미르 훈장
성 블라디미르 훈장
3등급
1878년 성 스타니슬라우스 훈장1등급
1878년
프로이센 왕관 훈장
왕관 훈장
별장 (프로이센)
1881년 성 안나 훈장1등급
1882년
이탈리아 왕관 훈장
이탈리아 왕관 훈장
장교 십자장 (이탈리아)
1888년 성 블라디미르 훈장2등급
1896년
백수리 훈장
백수리 훈장
1905년
알렉산드르 넵스키 훈장
알렉산드르 넵스키 훈장


참조

[1] 웹사이트 The Gripenberg Family https://www.gripenbe[...] 1866
[2]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the Russo-Japanese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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